행복의 경제학 

1. 

<월든>을 쓴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간소, 자립, 관대, 신뢰'라고 네 단어로 답했다 한다.

아마, 행복해지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과 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사이의 균형 감각이며, 자신과 세상과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

이런 뜻일 게다. _ 쓰지 신이치


2.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 때와 똑같은 마인드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란 불가능하다." _ 아인슈타인


3.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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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퍼왔습니다.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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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제언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즐거운 농촌의 삶을 권합니다


요즘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산업화의 거센 물결이 한창 불어닥칠 때 이농(離農)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현상이었다면, 그 후 반세기가 지나 나타나는 귀농 귀촌은 산업화 이후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반세기 전의 이농(離農)도 지금의 귀농귀촌도 행복을 위한 것임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그 성격과 질이 다른 것이지요.

신자유주의의 세계질서 속에서 부존자원의 성격이나 지정학적 조건들로 ‘교역국가’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경우, 우리의 농업과 농민, 농촌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도적이고 구조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의 농업과 농촌이 산업화 이후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의 터전 또는 삶의 양식(樣式)으로 국민의 마음 속에 자리잡을 때, 농업은 농민의 것만이 아니라 국민의 농업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고, 어떤 세계화의 파고(波高)도 넘어설 수 있는 참된 기반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귀농귀촌하는 삶이 행복해야 합니다.

농사한겨레류우종기자.jpg 

나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의미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삶을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사는 이웃동네의 이름이 논곡(論谷)입니다. ‘논실’이라고도 불리지요. 주변에서는 제일 큰 동네입니다. 한창 적에는 백 호(戶)가 넘었다니까요. 마을 앞에 주경야독하던 인후(仁厚)한 마을의 연혁이 자랑스럽게 돌에 새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의 마을이 나라 전체에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귀농 귀촌이 단지 사람들이 농촌으로 돌아오는 현상적 흐름을 넘어서, 과거 주경야독의 문화적 전통이 한 단계 더 높게 승화되어 돌아오는 문화적 현상으로 되었으면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지요. 주경야독하는 삶은 행복한 농촌의 삶을 위해 대단히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특히 고전(古典)을 읽는 것이 좋고, 가끔 이웃과 함께 읽는 ‘독서모임’ 같은 것을 갖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의 질곡에 갇혀 그 생명력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그 산업화 과정이 대단히 빠르게 압축적으로 진행되다보니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집니다. 가히 물신(物神)이 지배하고, 이기(利己)의 늪에 빠져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것을 해방하여 물질적 제약이나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 사람과 자연을 포함하여 모두가 사이좋으며,  삶과 노동 그 자체가 즐거운 상태로 되는 것이 모두가 바라는 것이 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을까요? 이것이 지금을 ‘문명전환기’의 가장 큰 바탕이 아닐까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과거 위대한 사상가들의 깨달음이 이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가 봉착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귀농귀촌하시는 여러분들의 삶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신도 좋고 세상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지혜와 힘의 원천을 고전을 읽는데서 찾아보실 것을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간략하게 몇가지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 사이좋은 이웃
요즘 화두처럼 들리는 말이 ‘소통’입니다. 인터넷 특히 SNS등의 발달 등으로 소통을 위한 기술적 수준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가까운 사람끼리의 소통이나 그 마음의 상태 등을 보면 진정한 소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웃과 잘 소통하는 것입니다. 특히 농촌의 삶에서는 행복을 위한 절대 조건입니다. 아무리 주변 경관이 뛰어나고, 맑은 물, 좋은 공기가 있다해도 이웃과 사이가 나빠지면 결코 유쾌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웃과 사이가 좋아질까요?
자신과 생각이나 이해(利害)가 다를 때 무조건 양보하고 참아야할까요? 사이좋음을 위해서...
참고 양보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참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는 것은 일종의 독(毒)입니다. 이 독이 저절로 약(藥)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진화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지는 바탕에는 ‘내 생각이 틀림없다. 당연하다.’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사실이 그럴까요?
나는 여기, 즉 ‘사실은 어떤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아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각(自覺)을 일상화하는 것이지요.
고전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전해서 훨씬 고전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공자의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吾有知乎哉? 無知也)라는 무지(無知)의 선언이나 ”모르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참된 앎의 시작“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을 화두로 서구 사회에 한국불교를 널리 알린 숭산 선사 등이 그 좋은 보고(寶庫)가 될 것입니다.

현대과학으로 인식의 메카니즘을 이해하면 이 말들은 훨씬 잘 다가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각자의 서로 다른 감각기관과 서로 다른 저장된 정보가 만나서 판단하는 것일 뿐, 사실이나 실제와는 다른(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일상적으로 자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머리로 자각한다고 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이 잘 이해되고,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다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오랫 동안 “내 생각이 틀림없어” 하고 훈습된 상태가 빨리 변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늘 의식하고, 특히 다른 생각을 만나 힘들 때 이 자각(自覺)을 연습하는 기회로 한다면 ‘가랑비에 옷 젖듯’ 변해 갈 것입니다. 처음에는 참는 마음으로 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점차 참는 것(忍이라는 毒)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恕라는 藥) 마음의 진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이웃과 사이좋아지는 길이 아닐까요?


2. 경쟁을 넘어서, 자기 실현의 즐거운 노동

요즘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 바탕에는 자유라는 이름 아래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비인간성, 야만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높은 생산력과 소비수준의 근저에는 ‘경쟁’이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누군과와는 같이 해야합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늘 부족한 재화를 놓고 다투다보니 이 ‘경쟁’이 지배적인 인간 행위의 바탕처럼 되어버린 것 처럼 보입니다. 이제는 재화가 풍부해졌는데도 이 경쟁의식은 변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여 ‘무한경쟁’을 찬미하는 지경에 왔습니다.
그런데 ‘경쟁’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각하고 삶 자체를 바꾸는 결단(?)을 내리는 과정으로 귀농귀촌을 선택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요즘의 협동조합이나 마을운동들이 큰 흐름으로 나타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쟁 대신에 자기실현의 즐거운 노동에 의한 적절한 생산력이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협동하자!’고 해서 경쟁을 넘어서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협동할 수 있는 사람, 즉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로 되는 것이 먼저 되어야 비로소 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협동이 즐거워야 생산력도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선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다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공자는 이것을 서(恕)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기 일에 자발적으로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공자는 이것을 충(忠)이라 부르고, 15세기의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거룩함’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이라부르건 이 서(恕)와 충(忠)이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제적인 협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특히 현대에서는...
이 강제는 타자나 집단에게서 유형 무형으로 오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3. 진정으로 자유롭고, 유쾌한 인간--현대의 군자들이 사는 마을을 꿈꾸며

현대 인류는 전쟁, 양극화, 지구생태계의 위기 등의 난제 등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 근본 모순은 인간의 엄청난 행위능력과 그다지 변치 않는 자기중심적 가치체계의 모순에 있는 것입니다.
행위능력을 멈출 수는 없기 때문에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의 진보가 그 해답이 될 것입니다. 
나는 중용에 바탕을 둔 공자의 군자(君子)상(像)이 현대에 어필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선구자들이 이상으로 하는 인간상들도 표현은 다를지 몰라도 본질적인 지향은 갖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사는 마을이 이런 군자들이 사는 마을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논어에 나오는 다음의 몇 구절을 통해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 

“군자는 위로 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달한다.” 君子上達 小人下達

“군자는 화합하되 같게 하려 아니하고, 소인은 같게 하려 하되 화합하지 못한다.”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군자는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지만 태연하지 못하다.”
 君子 泰而不驕 小人 驕而不泰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편을 가르지 않는다.”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

소로우오두막집.jpg

4. 정신과 물질의 조화--마음도 몸도 풍요로운 농촌
 
인간의 첫 번째 생존 조건은 경제입니다. 물질생활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전되어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자본주의의 최대 기여는 인간의 물질적 수요를 충족하게 하는 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만 최대의 문제는 인간소외인 것이지요. 즉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돌려 놓지 못하면 개개인의 행복은 물론 인류의 생존이 아니 존속 그 자체가 위험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단순소박한 삶’이 하나의 화두처럼 떠오릅니다.
공생공빈(共生共貧;같이 살고 함께 가난하기)이나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이런 취지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너무 극단적이 되거나 진정한 자발성에서 나오지 않게 되면 보편화하기 힘든 주장으로 비춰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안빈락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현대적으로 음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즐기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 도(道)란 무엇일까요?
나는 그것이 정신적, 예술적, 영적 욕구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인간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인간’이란 동물계로부터 한 단계 나아간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동물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ㅎㅎㅎ)
이런 욕구들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물질에 대한 욕구는 감소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욕구의 질이 변해서 이루어지는 ‘단순소박한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발적 풍요’인 셈이지요.
아마 자발적 가난이란 표현도 그 뜻이 같겠지만, 자칫하면 참아내야 하는 부자유가 섞일 수 있어서 현대인들의 높은 자유도(自由度)를 생각하면 ‘자발적 풍요’라는 표현이 어떨지...

이상으로 오늘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을 마치려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귀농귀촌이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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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의견이 난무하는 속에서

아이들과 디베이트를 시작한 지 벌써 반년 가까이 되었다.

될 수 있으면 즐거운 놀이 시간이 되게 하려고 애쓰기는 하는데

아이들에게는 어떤지 모르겠다.


얘들은 즐거워하고 날 좋아라 하지만,

나는 가끔은 맥이 빠질 때도 있다.

큰 걸 기대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이이들과 하는 디베이트는 

상대 의견에 귀기울이는 것이 중요하고,

상대의 의견은 존중하되

의견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어떻게 오류가 있는지 살펴보면서


내 의견에는 어떤 오류가 있는지 성찰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앞으로는 나도 틈틈이 짧으나마, 어설프나마 글을 올려야겠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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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 책꽂이~

찰칵 2013. 3. 6. 11:48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만들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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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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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씨름

물소리*바람소리 2013. 2. 1. 17:04

팔씨름


아들이랑 팔씨름!

헉!

왼손잡이인 내가

왼손에서 지고 말았다.


고딩 시절 아버지랑 팔씨름하다

내가 이길 것 같아

아슬아슬하게 지는 척한 날이 떠오른다.


근데 이놈은 무자비하게

날 

뒤집고 만다.


인자 

무거운 건

니가

다 들어!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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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작은도서관에서 드디어 초딩 친구들과 토론 모임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름하여 글마루 토론 모임(Debate club).

4학년 어린 친구들이라(내년이면 5학년이 되지만) 서툴고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막상 두 차례 토론도 해보고

얘기도 나눠 보니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연습 삼아, '공동주택에서 애완동물 키우지 말아야 한다'라는 주제로 즉흥 토론을 해 보았고,

둘째 주에는 각자 자료 조사를 해와서 같은 주제로 해 봤다.

셋째 주에는 같은 주제로 글쓰기 숙제를 내 주었다.

어떤 글을 써올지 궁금하다.


토론을 통해서 글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논리 있게 말을 하고, 자기 주장을 설득력 있게 글로 쓰는 힘이 서서히 자랄 것으로 믿는다.


엄마들 욕심인지 초딩 한 팀이 더 꾸려지게 생겼다. 이젠 토요일 꼼짝을 못 하겠구나.

주중 중딩 한 팀까지 하면.... 앞으로 이걸로 먹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ㅋㅋㅋ



서로 이겨보려고 나름대로 작전 짜고 할 말 알려주고...ㅋㅋ

평소 때는 남자애들이랑 여자애들이랑 적군을 대하듯 하던 녀석들이...ㅋㅋ

우리 동네 글마루작은도서관에서.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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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박근혜가 대통령이 돼선 안 될 이유

등록 : 2012.06.10 18:58 수정 : 2012.06.11 16:16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 과오를
손톱만큼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긍정하는 딸이기에…

 

오는 12월 대통령선거에서 극보수 새누리당이 다시 집권하든 민주통합당과 안철수를 아우른 중도세력이 정권을 되찾아오든, 민중 생활에 커다란 변화는 없을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 속에서 태어난 노무현 정권 아래서 사회양극화가 되레 심해졌다는 사실은 이런 예측을 슬며시 정당화한다. 남북관계가 더 나빠지지도 않을 것이고, 외교가 미국에 더 종속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새누리당 정권이라 해서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를 지금보다 더 악화시키지는 않을 테고, 유권자들의 자연스런 민족주의 감정을 거스르려 작정하지 않는 한 지금보다 더 친미적인 스탠스를 취하기는 어려울 테다. 다만 중도세력이 집권하면 이명박 정권이 크게 훼손한 시민적 정치적 자유를 제자리에 되돌려놓으리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이런 예측을 바탕에 두고, 좌파 정치권 한켠에서는 정권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계급투쟁이 중요하다고 힘줘 말한다. 한정된 정치적 도덕적 열정을 정권교체 같은 허깨비에 쏟을 게 아니라, 민중 생활 개선을 위해 쓰자는 얘기다. 일리가 없지 않다. 나 역시 지난번 대선 땐 그런 생각으로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다르다. 왜? 새누리당 후보로 나올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이가 박근혜이기 때문이다. 왜 박근혜는 다른 새누리당 후보들과 다른가? 그가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이다. 낡아빠진, 위헌적인 연좌제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박근혜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딸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 과오를 손톱만큼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불법으로 빼앗아 지금 그가 움켜쥐고 있는 엄청난 재산을 본디 주인에게 되돌려줄 생각도, 나라에 헌납할 생각도 없다. 따라서 박근혜와 박정희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온 겨레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시절,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본 관동군 장교로 복무했던 사람이다. 그는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국군’에 들어가기 위해 “만주국과 조국(일본-인용자)을 위해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겠다’”는 혈서를 쓴 사람이다. 그가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조선인 항일투사들에게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민족을 배신한 사람이다. 민족반역자라는 말도 걸맞지 않을지 모른다. 스스로 썼듯, 그의 조국은 일본이었으니까.

 

 

박정희는 누구인가? 해방 뒤 좌익 세상이 이내 올 듯하자, 군대 안의 남로당 세포들을 거느리고 대한민국의 전복을 꾀하던 사람이다. 그 일이 발각돼 군법회의에서 제게 사형이 구형되자, 군 수사당국에 동료들을 모조리 밀고하고 제 한 목숨 건진 사람이다. 동료들을 배신한 거야 박정희의 개인윤리 문제니 그렇다 치자.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군부 내 남로당 프락치로 암약하며 제 새로운 조국을, 대한민국을 배신했다는 사실이다. 요즘 ‘종북’, ‘종북’ 하지만, 박정희야말로 원조 정통 종북이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학생과 시민들의 피로 이룩한 저 빛나는 제2공화국을 군사반란으로 무너뜨리고 18년간 이 나라를 철권으로 옥죄었던 사람이다. 그 시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 빨갱이로 몰려서 죽고 다치고 갇히고 망가졌다. 그 당사자들과 유족들은 지금도 따돌림과 가위눌림 속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누려야 할 복지는 꼭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정신적 복지가 외려 더 소중할 때도 있다. 그 정신적 복지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 긍지일 테다. 민족을 배신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람의 딸이, 더구나 아버지가 한 짓은 뭐든 잘한 일이라고 우겨대는 딸이 공화국 대통령이 된다면, 대한민국 시민들의 긍지는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밥 세끼 입에 들어간다고 공동체의 긍지를 포기한다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를 게 뭔가? 그것이 박근혜가 다음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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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모일에 우주/천문학을 주제로 한 책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더렜다.

어느 분 말씀처럼 하늘(우주)을 보며 고민하고 공부하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려 한 게 과학의 출발이요 이게 곧 철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코스모스>는 참 멋진 책인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주이야기          별똥별 아줌마가 들려주는 우주 이야기

이번에 읽어보고 공부한 책 두 권은 결국 할아버지와 아줌마의 대결이 되고 말았다.

천문학(우주)을 다룬 책으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주 이야기>와 <별똥별 아줌마가 들려주는 우주 이야기>였으니...

 

아무튼 두 책은 들려주는 분이 서로 다른 만큼 여러 가지로 대비되는 점들이 있었다.

물론 두 책은 염두에 둔 독자층이 다르기에 똑같은 수준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보더라도 비교는 안 할 수가 없어서~^^

 

1.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주는, 들려주려는 모든 얘기가 연결되어 있는 듯 유기적인 느낌이 들도록 해주었으며,

적절한 문-답이 이를 잘 살려주었다고 본다. 그래서 철학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대신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책을 통해 구체적인 뭔가를 붙잡았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다는 느낌이다.

 

덧붙여 번역 문장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친절한 번역이 되지 못하여 철학적인 우주 이야기가 더욱 난해하게 느껴지고 맥락을 잡기가 어려웠다고 하였다. 아마 이는 번역하는 분이 이 분야를 전문으로 공부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그 점이 참 아쉽다. 좀만 더 친절했더라면...ㅠㅠ

한편 편집 과정에서 번역 문장의 아쉬움을 꼼꼼하게 못 봤을 수도 있겠거나 아니면 우리가 깔끔하게 구체적으로 정리해주는 걸 읽는 데 익숙해서인지도 모르겠고.

아, 그리고 기초지식이 어느 정도 갖춰진 독자라면 훨씬 풍부한 느낌(멋진 철학책이 되었을 거라면서)으로 읽었을 거라는 얘기를 하면서 다들 기초체력이 부실함을 한탄하기도 하였다.(뭐, 실제로 체력이 부실-저질체력-하기도 하지만...^^) 

 

2.

아줌마가 들려주는 우주는, 구체적인 정보를 들려주는 천문학 이야기이다. 어린이 독자로 하여금 우주/천문학에 대한 정보와 사실을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본다. 그래도 그날 분위기로는 그리 후한 점수를 받지는 못한 것 같았다.ㅎㅎ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연결된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맥락이 없고 산만하고 끊기는 느낌 때문에 책 한 권을 통해서 유기적인 구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다는 얘기를 하였다.(그러고 보니 각 챕터가 하나의 재미난 이야기여야 할 뿐만 아니라 책 한 권이 담고 있는 전체 글 또한 하나의 재미난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근데 이거 쉽지 않잖아요?!ㅠㅠ)

또한 별똥별 아줌마의 말투에서 독자들에게 자꾸 재미있지? 이상하지? 신기하지? 하고 억지스럽게 확인하거나 동의를 구하려는 태도가 좀(많이) 거슬리기도 하였다.(하긴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집중을 해야지, 재밌지? 신기하지? 하고 애써 확인하는 것은 글쓴이의 불안감 또는 불확신 때문인지도 모르겠당.)

 

어설프지만 이 정도로 정리를...

 

덤으로...

두 책에서 '퀘이사'를 얘기하는 부분에서 확연한 차이를 어느 분이 말려주었다.

별똥별 아줌마에서는 퀘이사를 우주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생긴 '천체'라고 설명하고,

할아버지는 '퀘이사'를 전혀 다르게 설명(할아버지가 들려주는~ 150~151쪽)하고 있다.

이건 두 책을 펼쳐보고 비교해 보시길^^

아무래도 할아버지 말씀이 옳다고 보았어요.


꾸벅!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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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그랬어>에 있는 고래교육연구소와 고래동무들이 고민하고 공유하고 다듬어 완성했다.
나도 여기에 의견을 던졌는데 반영이 된 듯하여 더욱 반갑다^^
많은 부모들이 이런 약속을 한다면 참 좋겠다.
무엇보다 엄마나 아빠  둘 가운데 혼자만 할 게 아니라,
부모가 둘다 하는 약속이어야 더욱 힘이 실리고 지켜질 가능성이 높은 약속이 될 거라 생각해 본다.
아래 약속에 의견 주실 분은 <고래교육연구소>로 메일 주시길. gorae@goraeya.co.kr



부모의 10가지 약속

내 아이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지금, 약속합니다.
 
1.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라 나와 귀한 인연을 맺은 독립적 존재입니다.
2. 아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만큼 행복이 뭔 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3. 아이의 미래 행복을 위해 현재 행복을 빼앗지 않습니다.
4. 교육은 아이의 상품성이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5. 돈은 아이의 인생에서 생존의 조건이되 행복의 조건은 아닙니다.
6. 아이는 동무와 어울려 잘 놀아야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으로 자랍니다.
7. 아이가 몇 등인가 보다 왜 공부하는지 , 뭘 공부하는 지가 중요합니다.
8. 사교육과 대학 진학 여부는 아이와 민주적인 대화를 통해 결정합니다.
9. 아이의 직업 선택에 내가 가진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10. 교육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늘 참여합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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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이트 주제 : 인터넷 실명제 폐지해야 한다

참고자료 01
미디어오늘 이정환 기자 기사


최근 해외에서도 실명 확인을 요구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뉴욕타임즈가 우리나라의 인터넷 실명제 도입 사례를 거론해 눈길을 끈다. 뉴욕타임즈는 4일 "인터넷에서 이름 대기(Naming Names on the Internet)"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에서는 3년 전 인터넷 악성 댓글에 시달리던 여자 배우가 자살한 뒤 인터넷 실명제가 도입됐지만 지난달 대규모 개인 정보 유출 사고 이후 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에서의 경험은 실명을 강요하는 정책이 멍청한(lousy) 아이디어라는 걸 입증했다"면서 "온라인에서의 익명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개인 정보 보호 차원이 아니라 아랍의 반정부 시위에서 보듯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반대 의견을 표명하거나 기업의 기밀을 폭로하려는 내부 고발자에게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신문은 "미국에서는 익명 표현의 자유가 법으로 보장돼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실명 확인을 요구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늘어나고 있어 주목된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일부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실명을 쓰도록 권고하고 실명이 아닌 것으로 확인될 경우 계정을 폐쇄하는 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방문자 10만명 이상의 사이트를 대상으로 주민등록번호 기반의 실명 확인을 의무화하고 있는데 정부 차원에서 인터넷 실명제를 강제 도입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최근 독일의 프리드리히 한스-페터 내무부 장관은 노르웨이 테러 같은 사건을 막으려면 블로거들이 그들의 실명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68명을 살해한 테러범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빅은 '피요르드만'이라는 가명으로 블로그를 운영해 왔다. 한스-페터 장관은 시사주간지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떳떳하다면 굳이 실명을 밝히지 않으려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고 반문하기도 했다.

구글의 최고경영자 에릭 슈미트 회장도 지난달 한 컨퍼런스에서 "우리가 당신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정보를 갖는다면 훨씬 더 나은 서비스를 할 수 있다"면서 실명 확인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만약 당신이 실명을 적고 싶지 않다면 구글 플러스를 쓰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즈는 "열린 인터넷을 지향한다는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익명 표현의 가치를 부정하는 건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즈는 "구글의 주장은 범죄 예방 차원이라기 보다는 상업적인 목적에서 나온 것이며 구글이 세부적인 개인 정보를 수집하려 하는 것도 결국 광고나 다른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그러나 장벽 없는 인터넷의 세계에서 완벽한 실명제는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면서 "페이스북 역시 실명 확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즈는 "만약 온라인 토론이 실명을 기반으로 이뤄진다면 인터넷이 좀 더 정화될 거라는 기대가 가능하다"면서도 "온라인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건 사실이지만 익명성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전문가들은 원하기만 하면 익명의 사이버 범죄를 추적할 기술을 확보하고 있고 익명으로 활동하는 악명 높은 해커 그룹이 체포된 사례도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에 인터넷 실명제를 요구하자 구글이 유튜브 한국 서비스를 차단한 사실도 거론됐다. 구글은 사용자 설정이 한국으로 돼 있을 경우 업로드를 할 수 없도록 제한했는데 이 때문에 청와대가 국적을 바꾸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뉴욕타임즈는 "현실의 세계는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우며 익명의 개인들로 넘쳐난다"면서 "인터넷도 마찬가지로 내버려두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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