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 되는’ 책을 만드는 즐거움을 알려주마 — 알마 정혜인 대표 [출처] ‘돈 안 되는’ 책을 만드는 즐거움을 알려주마 — 알마 정혜인 대표
그냥 책 2015. 8. 17. 10:04<‘기획회의’ 393호 2015. 6. 5>에 실린 글.
공부가 되고 자극을 주는 말씀이 참 많네. 나를 돌아보게 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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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되는’ 책을 만드는 즐거움을 알려주마
— 알마 정혜인 대표
김수한 편집자 popnamu@hanmail.net
지난 봄 <한겨레>에 실린 김민기 선생의 인터뷰 기사가 꽤나 화제였던 것 같다. 이진순 씨가 오랜만에 지면으로 불러낸 김민기의 근황은 특유의 목소리와 제스처의 질감이 생생히 전달되는 듯했다. 시종 어눌하면서도 단호하고, 수줍어하면서도 뚜렷하게 삶의 마디마디에 새겨진 요철의 시말을 전하는 ‘조용한 거장’의 일대기는 그를 아는 이들에겐 당대의 깊이를 새삼스레 확인하는 계기가, 그 이름이 낯선 이들에겐 신선한 꼰대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의 문화판에서 이리도 묵묵히 제 뜻과 길을 벼려온 ‘딴따라’가 몇 있겠는가. “문 닫을 때까지 돈 안 되는 일을 할 거다”라는 한결같은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 갈수록 귀중하고 드문 시대. 그처럼 뚝심 있게 ‘돈 안 되는 책’을 만들어가는 출판사도 몇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어떻게 일하고 먹고살아 갈까. 그 노하우를 알고 싶어 지난 5월 15일 스승의날 연남동에 자리한 알마 출판사에서 정혜인 대표를 만났다.
알마는 어떤 출판사입니까
김수한(김) — 10년 전에 연남동으로 출근하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조용한 주택가라 산책하기 좋은 동네였는데, 그 사이 변화도 있지만 여전히 사람 냄새가 나고 ‘저녁이 있는 삶’이 있는 동네 같습니다. 알마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 2년 정도 되지요? 장소의 기운일까요? 그 사이 알마 책들도 더 부드럽고 환해진 것 같습니다.
정혜인(정) — 파주에 있을 때보다 일하기 편해요. 저자 미팅이나 서점 방문도 파주보다 수월해요. 인쇄 감리는 파주로 들어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요. 로케이션의 의미는 근무자의 일상과도 관계가 커요. 창문을 열어두면 이웃 카페에서 커피 볶는 냄새도 흘러들어오고, 더러 물건 파는 분들의 스피커 소리도 들립니다. 사람 사는 동네죠. 파주출판단지는 그런 면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김 — 알마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여 몇 편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었습니다. 반가운 사실 하나가 눈에 띄더라고요. 보통 출판사 인터뷰는 대표이사의 사진만 실리는데, 알마는 책을 만드는 식구들 단체 사진이 주로 소개되어 보기 좋았습니다.
정 — 대표 혼자 책을 만드는 건 아니니까요. 안타깝지만, 오늘은 신간을 마무리하는 날이라 단체 사진은 찍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 — 예전에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꼭 가난하라는 법 없듯이, 편집자가 가난한 직업일 까닭은 없다’고 말씀해주셨지요. 편집일을 해서도 넉넉히 먹고살 수 있다는 말씀에 힘이 났는데, 지금도 그러한지 갸우뚱합니다. 알마 살림은 괜찮은지요?
정 — 사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웃음) 제가 평소에 그런 말을 자주 해왔으니 그 기억이 맞을 겁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50만 부, 100만 부 넘게 팔린 책들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실제로 그 책들로 큰돈을 벌기도 했고요.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다만 하고 싶은 일 재미있게 하면서 건강한 소시민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넉넉한 거 아닌가요? 알마 살림살이는 직원 10명이 먹고살 정 도는 됩니다. 작년에 전년 대비 매출액이 28% 올랐고, 영업이익도 6% 정도 됐어요. 시장이 좋지는 않지만 나름 잘 지냅니다. 책의 물성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고, 원고 계약도 활발한 편이라 현금 운용은 빠듯하지만요.
셀러로 기획하는 책은 별도로 계획을 짜지만, 대체로 손익분기를 1000부에서 맞추려고 합니다. 합리적인 관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책값을 제대로 받으려고 해요. 거칠게 말해서 초판을 소화할 수 있다면 다른 책 한 권을 다시 출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는 거예요. 알마에서는 1000부 나가는 책을 실패로 보지 않습니다. 물론 1000부도 안 나가는 책이 있긴 하지만, 더 나가는 책도 있으니 상쇄가 됩니다. 중요한 지점이 몇 있는데,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알마는 구간 대 신간 매출이 5대 5에서 4대 6 사이인데, 매년 큰 변동이 없습니다. 알마가 문을 연 지 올 6월이면 만 9년이 되는데, 절판된 책이 총 출간종수의 5%가 안 돼요. 연 500부만 팔려도 중쇄를 찍습니다. 그래서 알마는 주문부수에 비해 일일주문장이 길어요. 작은 부수가 모여 알마의 총매출이 되는 거죠. 지난달에 재론칭한 『남해 유배지 답사기』(박진욱)도 악성 재고라 할만한 800여 부를 제목도 바꾸고 표지도 새롭게 해서 출고했는데 죽었던 책이 살아나서 500부를 더 찍었어요. 기쁜 일이죠. 출판업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우리가 만든 책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김 — 알마 하면 책 본문 뒤에 제본한 간이 도서목록 리플릿이 떠오릅니다. 몇몇 출판사들이 때때로 하지만 알마처럼 꾸준히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정 — 권당 리플릿 비용이 10만 원 정도 들어요. 그만하면 비용 대비 훌륭하죠. 노출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단행본 시장에서 마케팅 비용을 아끼면서 홍보하려는 몸부림이죠.(웃음) 홈페이지는 따로 없고요. 페이스북과 트위터 정도 하고 있는데요. 출간 이후 저자와 독자가 직접 만나는 이벤트를 자주 엽니다. 독자들도 예전처럼 수동적이지 않고 저자를 만나려는 분위기라 출판사로서는 책을 적극적으로 알리기에 좋은 기회죠.
김 — 문학동네 계열사로 있다가 독립해 이사하시면서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셨지요? 협동조합 절차는 완료가 되었는지요?
정 — 아이쿱생협이 55% 지분을 투자하고, 45%의 지분을 저와 직원들, 몇몇 저자 분들이 나눴어요. 협동조합 기본법의 후속 입법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여서 ‘세금폭탄’을 우려해 아직 법적으로는 주식회사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내용 면에서는 일부 변화가 있었는데요, 사안에 따라 결정권에 자잘한 변화들이 있었고, 핵심은 이익 배분 시스템을 사실상 협동조합 체제로 전환했다는 겁니다. 대부분 출판사들의 매출 대비 인건비 비율이 통상 10~15%로 압니다. 알마는 전년도 기준 24% 가까이 됩니다. 어떻게 회사를 유지하느냐고 걱정해주시는 분도 계십시다. 편집자는 책으로 말하고, 회사는 인건비로 말하라?! 투자 대비 이익을 많이 내는 것만이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전부터 노조 설립도 독려했는데, 드디어 노조도 만들어졌어요. 올해 노조와 첫 연봉협상을 하면서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연봉협상 시기가 다가왔는데도 인상폭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인상폭을 제시해달라고 했더니 그제야 회의를 거쳐 3% 인상안을 제시하더라고요. 어용노조 만들지 말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죠. 그동안 마땅한 이런 과정들이 무시되었는데, 반성할 지점입니다.
김 — 출판공동체를 지향하시는데, 일반 기업의 일하는 방식과 크게 다른가요?
정 — 출판공동체라고 해서 일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매사에 회의와 토론을 거쳐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권한에 따른 책임과 리더십의 집중도 당연히 필요한 거니까요. 또 제가 살펴야 하는 것들도 분명 있고요. 많은 부분을 직원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게 하려고 애쓰는 건 있어요. 이건 출판공동체와는 무관하고요. 슬슬 은퇴 준비를 하려는 제 속셈인 거죠.(웃음)
김 — 정혜인 대표님은 ‘무서운 분’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카리스마 작렬이라는….
정 —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감정 표출의 강약이 분명한 편이죠. 제 나름의 원칙이 있는데요. 제작 사고를 낸다든지, 교정 과정에서 본문 일부가 날아가 책을 다시 찍어야 한다든지, 표지에서 글자 하나가 사라졌다든지, 이런 큰 실수는 한두 마디로 끝냅니다.
더러 위로도 하죠. 편집자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다고. 본인은 얼마나 황망하고 부끄럽겠어요. 저까지 보탤 필요 없죠. 하지만 작은 실수들, 실수도 능력인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결국 책을 만드는 일은 ‘안다’ ‘알고 있다’에서 그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체화되어야 하는 거죠. 가령 조사나 접속사의 쓰임을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잘못된 부분을 짚어내지 못한다면 그건 조사와 접속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디테일입니다. 최고인 사람은 작은 것에 강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작은 것이 큰 변화를 불러오듯, 소소한 요소들이 모여 좋은 책이 만들어진다고 봅니다.
알마는 어떤 책들을 만듭니까
김 — 지난 5월 14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무죄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희생자는 참기 힘든 고통 속에 무연한데, 가해자는 어느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 이 기묘한 상황이 참괴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지, 말문이 막힙니다. 누군가 이 사건을 추적해 논픽션을 만들어주길 고대했는데, 신문을 보니 『거짓말 잔치』라는 제목으로 조만간 출간된다는 소식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혹시 이렇게 뜨거운 책이라면, 알마에서 나오나 하고 잠깐 기대가 일었습니다.
정 — 알마는 아니에요. 그런 책은 꼭 필요하죠. 밀양이나 세월호, 쌍용자동차 같은 안타깝고 충격적인 일에 알마가 함께하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책도 인연인 것 같아요.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닌데, 마음먹는다고 해서 책을 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김 — 알마에서 펴내는 책들을 보면 뜨겁고 위험한 이슈를 건드리는 출판사라는 느낌이 듭니다. 재미나고 술술 읽히는 책보다는 무겁고 딱딱한 책들도 많고, 어떤 뚝심과 결기의 집요함이 느껴지는 목록입니다.
정 — 그런 책들은 이슈를 타고 드러나는 것이고, 차분하고 재미있는 책도 꽤 있습니다. 알마 책들의 무거움에 대해 변을 좀 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책을 만든다는 것은 여전히 운동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인데요. 현재성의 가치를 높이 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샘깊은오늘고전’ 시리즈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오늘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놓을 수가 없어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행본도 매체라는 사실입니다. 신문이나 TV 같은 제도권 매체는 큰 목소리만 노출시킵니다. 단행본은 다기한 작은 목소리로 다양성을 확보하고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작은 단행본 출판사들이 기획력을 발휘한다면 한국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때 다양성은 책을 왜 읽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김 — 현재성과 다양성에 대한 강조는 요즘 소란스러운 고전과 인문학 열풍과는 좀 거리가 있는 듯합니다.
정 — 열풍은 어차피 지나가는 것입니다. 고전 열풍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요. 문자나 텍스트는 현재의 욕망을 기록하기 마련입니다. 기원전 2000~3000년 전 수메르 문명으로 거슬러 가볼까요? 그들은 문자로 무엇을 거래했는지 기록했습니다. 서양이 그렇게 거래 기록을 문자로 남겼다면, 동양의 문자는 당대의 체제 유지와 상류층을 위한 자기 계발의 도구였습니다. 한무제의 필요에 의해 그가 다시 불러낸 공자 말씀이 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필독서가 됐는지…. 물론 연구자나 깊이 공부를 해볼 목적이라 면 당연히 읽어야겠지요. 전 국민의 필독서, 혹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그런 책들이 들어가 있다는 건 기이한 일입니다.
알마 저자인 백지연 선생이 출연하는 드라마라 요즘 <풍문으로 들었소>를 챙겨 보고 있는데요. 대형 로펌 대표인 상류층 주인공이 자식들에게 플라톤의 『국가』를 읽히고, 자신의 속물성을 치장하기 위해 공자님 말씀을 들먹입니다. 어이없어 실소가 나오더라고요. 제국의 통치, 기득권 체제 유지를 위해 『논어』를 읽힌 맥락이 지금 한국사회와 어떻게 접속하고 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지요. 지금은 오히려 묵자를 읽어야 할 때 아닌가요? 고전을 다루더라도 그것의 현재적 의미에 주목하고 새로 읽기를 강조해야 합니다. 저희 사마천의 『사기』 완역 시리즈가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의 의미, 좋은 책이란 무언가를 역사적으로 탐문한 『책의 정신』(강창래)도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책입니다.
김 — 출판 기획은 반 발 앞서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한 발 앞서면 너무 이르다는 말이기도 한데, 알마 책들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일반 독자들의 관심사와 독서 습관의 경계를 살짝 넘어간 책들이라고 할까요? 무척 낯설거나 무거워 보이는 기획들, 가령 『누가 무지개 깃발을 짓밟는가』(스티븐 V. 스프링클)나 『이븐 할둔』(이브 라코스트), 올리버 색스 전작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에세이들,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장 마르크 드루앵),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제이 그리피스), 『난학의 세계사』(이종찬) 같은 책들은 어느 출판사에서 시도할 수 있을까요?
정 — 거대 담론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와 문체를 찾습니다. 더해서 한국사회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그 비밀과 작동 방식을 들추는 책들,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세상의 여러 문제를 추적하는 논픽션 책들을 펴내려 합니다. 가령 『우유의 역습』(티에리 수카르), 『감시의 시대』(아르망 마틀라르), 『검열에 관한 검은책』(에마뉘엘 피에라 외),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빌프리트 봄머트), 『질병판매학』(레이 모이니헌 외) 등이 그런 책들인데, 판매도 꾸준하고 반응도 느껴져 보람을 느낍니다. 학제간의 경계에 갇히지 않은 연구, 성소수자나 장애인 등 마이너리티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려 합니다.
김 — 한 발 앞선 기획인 데다가, 책을 만드는 물리적 시간이 길어 한 발 더 늦어 판매 포인트를 놓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정 — 알마에서 내는 책들의 시의성이 부분적으로 지속되고 보편성을 갖는 터라 약간의 수익을 내는 데는 부족하지 않아요. 판매 포인트를 놓치는 건 매우 안타깝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힘 쏟아 만들어서 길게 가는 겁니다.
김 — 기획의 대부분을 대표님이 주관하시나요?
정 — 전에는 그랬어요. 올해부터는 편집자들의 기획 역량을 강화하려 합니다. 1월부터 2시간씩, 주 2회 기획회의를 하고 있어요. 자율적으로 진행해보라고 맡겨 뒀는데, 기획안들이 느슨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초부터 다지자는 뜻에서 기획회의를 정례화하고, 트렌드와 매체 분석 등을 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획안을 작성합니다. 기획안의 완성과 실현은 어차피 기획자의 몫이니 기대하고 있습니다.
알마는 어떻게 기획하고 편집합니까
김 — 알마에는 스타일이 강하고 까다로운 필자들이 많아 보입니다. 고종석, 손석춘 선생부터 올리버 색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까지 국내외 필자들의 면면이 ‘세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 — 네, 저자 관리가 쉽지 않아요. 모든 편집자의 고민일 텐데요. 그래도 한 가지는 지키려고 애씁니다. 쉽지 않지만 저자들의 사소한 말에도 귀 기울이는 것. 번역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저자가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알아야 편집자도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펼칠 수 있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어떤 맥락에서 이 문장이 들어갔는지 꼼꼼히 살피고 매사에 의문을 가지는 태도가 우선돼야 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히친스의 『논쟁』에 썼던 표지글인데, 편집자에게도 꼭 필요한 태도라고 봅니다.
김 — 필자와의 대면 접촉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안과 설득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 — 중간에 아는 사람을 통한 소개로 필자를 접촉하는 방식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이메일, 편지, 만남의 단계로 관계를 트는데, 필자의 이야기를 진득이 듣고 우리의 생각을 타진합니다. 저는 지난해부터 기획 미팅에 거의 나가지 않고 편집자들이 전담하고 있습니다. 판단을 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살펴보는 경우는 있지만, 실무 교정에서도 손을 뗐어요. 『고종석의 문장』이 제가 마지막으로 본 교정지입니다.
김 — 이제 알마의 주요 책들을 훑어보지요. 먼저 인터뷰집 전문 출판사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터뷰 대담집의 본격 성공을 이끄셨잖아요?
정 — 그건 사실 창업 초기에 수익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한 처방전이었어요. 창업 초기 60권 정도 기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대만큼 수익을 얻지 못했어요. 만들고 싶은 무거운 책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살아남자 싶어서 좀 가벼운 책을 기획한 겁니다. 제가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데, 평전 시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만큼 미미하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좀 캐주얼하게 접근해볼 방법을 고민하다가 인터뷰집이라는 형식을 찾게 되었어요. 한국사회를 모자이크 해보자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들, 우리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김 — 이어진 인터뷰이들의 면면이 익숙하다가, 갈수록 신선한 인물이 세팅되었습니다. 광고인 박웅현, 만화가 이원복 선생 편까지는 출판과 먼 전문 분야가 아닌데, 이어 빗물박사 한무영, 법의학자 문국진 선생 편은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들려주어 반가웠습니다. 배우 신성일이나 영화감독 양익준, 김조광수, 뮤지션 신대철 편은 우리 대중문화의 두께와 너비를 새롭게 확인시켜준 반가운 기획인데요.
정 — 평전과 달리 그가 일궈낸 한 분야의 주제에 집중하자는 게 애초 기획 의도였으니까요. 뒤로 갈수록 주제가 더 잘 드러났을 뿐입니다. 철학자나 사상가, 학자들의 필생의 학문 주제를 집중 대담하는 책을 기획하고 싶은데 인터뷰어 섭외가 너무 어려워요.
김 — 알마 소개글에 ‘살아 숨 쉬는 인문 교양’과 ‘대안을 담은 교육 비평’을 펴낸다고 밝히셨어요. 주요 출간 토픽들을 보니 빈곤과 인권 및 평화 문제 등을 다룬 인문 사회 논픽션, 교양 과학과 환경 생태 관련서, 자녀 교육과 청소년 심리, 의료사회학과 음식 및 질병 관련 논픽션, 책읽기와 도서관 관련 책, 협동조합 관련 기획, 폐사지와 유배지 기행 등 문화 지리서, 대중문화 에세이 등이 여럿 보이고 특히 뇌과학과 범죄심리학, 언어학에 관한 책들이 많아 이채롭습니다.
정 — 수많은 인문 교양, 논픽션을 도서관 10진 분류법에 모두 채워 넣을 수 있을까요? 고전적인 장르 범주보다는 변화하는 지식장을 반영한 작은 계열, 겹쳐 읽을 수 있는 주제, 현재성을 띤 의제들로 기획 방향을 갈래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류와는 다른 시각, 생성중인 지식, 새로운 필자들의 책들을 주로 소개하게 된 거죠. 가령 범죄와 이상 심리, 법의학은 인간의 이해를 넓히는 창입니다. 선악의 구분을 넘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묻는 책들. 만드는 재미도 있고 판매도 좀 되어 범죄 덕을 봤어요.(웃음)
김 — 올리버 색스는 거의 전작이 소개된 듯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색스의 『편두통』은 읽어보려다 편두통이 나는 듯했습니다. 말기 암 투병중인 색스가 올초 <뉴욕타임스> 에 기고한 「나의 삶(My Own Life)」이라는 겸허한 성찰의 글이 감동과 화제를 주었는데, 책 판매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었나요?
정 — 『편두통』은 색스의 초기 작품이라 원문이 난삽합니다. 번역하고 감수하고, 두 분 선생님이 엄청 고생하셨어요. 교정 작업도 거의 6개월이 걸렸어요. 그렇게 어렵게 나왔는데도 편집자로서 부족함을 느끼는 책이에요. 색스의 저작물은 소량으로 꾸준히 나가는데요, 기사가 뜬 이후에 큰 폭은 아니고, 좀 움직이긴 했어요. 『뮤지코필리아』 는 순출고가 8000부를 넘어섰고요. 다른 타이틀들은 1000~2000부 선이에요. 큰 수익은 아니지만 손익분기는 충분히 넘어섰다고 봐야지요. 번역비도 많이 들고 교정 난 이도도 최상급이지만, 휴머니티가 살아 있는 그의 글은 매력이 넘칩니다. 올해 안으로 올리버 색스 자서전을 펴내려 하는데, 판매를 기대해봅니다.
김 — 알마 책의 물성 또한 눈에 두드러집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늘 “겉과 속이 따로 놀지는 않는가” “과하게 포장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자기 점검을 한다 하셨지요. 맞춤한 만듦새라는 감탄을 하면서도 과하게 비용을 쓰시진 않나 궁금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나온 『징비록』은 최근 만난 책들 가운데 최고의 물성을 보여주지 않나 부러웠습니다만, 1만 3800원에 그게 가능한지요?
정 — 그 책은 어린이용 징비록을 성인용으로 새로 편집, 디자인한 건데, 해설을 풍부하게 붙인 장점이 있습니다. 제작 비용이 커서 500부 단위로는 제작 단가가 안 나와요. 책 팔아 큰돈 벌려 하지 않으니 설계가 가능했던 건데요. 다행히 이부록 그림작가와 안지미 디자이너가 계약금 일부에 인세를 받는 방식으로 계약에 동의해주어 작업이 가능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현재 7000부 찍었고, 순출고가 5500부 정도 됩니다.
김 — 이슈북 시리즈는 참여한 필자들의 이름이 쟁쟁합니다. 크게 출판 이슈가 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계속되나요?
정 — 매체로서 단행본의 기능과 형식을 고민해본 한국형 신서인 셈인데, 반응이 책마다 편차가 있어요. 세로로 길쭉한 판형이 아무래도 낯선가 봅니다. 궁리 중이에요.
김 — 개정도서정가제 실행 이후에 출간량이 줄어들긴 했습니다만, 일주일에 100~200여 권의 신간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개중에 ‘새로운 책’은 그리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알마는 젊은 필자들이나 신진 필자의 등장을 심심치 않게 보여주셨는데, 『현시창』(임지선)은 놀랐고, 『검색되지 않을 자유』(임태훈), 『모서리에서의 사유』(최태섭)도 반가웠습니다. 『가장 사소한 구원』의 라종일, 김현진 조합도 의외였습니다.
정 — 2012년에 나온 『현시창』은 성기승 차장이 기획한 책이에요. 단행본 출판사의 의무 가운데 하나가 단행본 경험이 전무한 이들에게 필자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현장형 논픽션 필자를 찾아내려 합니다. 최근에 몸으로 글을 생산하는 멋진 필자 한 분과 접촉하고 있는데, 이런 만남들이 흥분됩니다. 라종일 선생은 『가장 사소한 구원』을 하면서 새삼 글을 잘 쓰시는 분이란 걸 알았습니다. 세대를 달리하는 두 작가가 편히 주고받은 메일을 통해 일상의 관찰과 고민을 담아보자는 의도였는데, 넉넉한 글쓰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도 좀 팔리고 있어요.
김 — 『MB의 비용』(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엮음) 역시 잘 나가지요? 시기도 적절했고, 여기저기 노출도 많이 되었고요.
정 — 한 10만 부 나갔느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1만 8000부 찍었어요. 앞서 출간된 이명박 자서전에 기댄 기획이 아니라 오래전에 유종일 선생의 기획 아래 차분히 써 내려간 글입니다. <프레시안>에 오랫동안 연재되었고, 거기에 인포그래픽을 추가하고 꼭지별로 들어가는 말을 넣어 단행본다운 포스를 지니게 되었어요. MB의 과욕과 실정에 대한 배설 차원의 까발림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분석과 비판이 담긴 책입니다. 판매부수 듣고는 많이들 놀라더라고요. 대한민국은 그렇게 훌륭한 사회가 아닙니다.(웃음) 좀더 널리 읽혔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아직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어요.
김 —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을 취재한 르포르타주 『노동여지도』(박점규)도 고마운 책입니다. 책 제목도 좋은데요?
정 — <주간경향>에 연재한 원고를 묶은 책인데 그때 썼던 제목이에요. 꼭 필요한 책인데 너무 늦게 나온 감이 있죠. 출판이 사회와 연대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그래서 노동사를 간략히 정리해 꼭지별로 넣자는 의견이 나왔고, 연재 원고지만 단행본스러운 원고가 완성된 것입니다. 추가 원고와 지도 등 원고 보강에 힘을 썼어요. 노동절에 맞춰 내느라 저자 분도 편집자도 고생이 많았지요. 그 책도 2쇄를 찍었어요.
김 — 고종석 선생의 책들도 반응 좋지요? 알마 아니면 만들기 쉽지 않은 책 같은데요.
정 — 문화계의 중요한 필자로 그분의 글을 즐겨 읽는 독자였어요. 절필 선언 후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나 글쓰기에 관한 책을 내자는 제안을 하게 됐고요. 절필한 분이라 가능한 방식을 고민하다 강연을 기획해 책으로 엮기로 한 것이지요. 수강료 부담이 적지 않았는데, 예상보다 많은 독자들이 신청했습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정원을 다 채우고 미처 신청하지 못해 강의를 듣지 못한 분들도 꽤 있었어요. 강의로 수익을 내려는 의도는 아니었기에 강사료를 충분히 드릴 수 있었고, 출간에 따른 인세는 당연히 따로 보장해 드렸어요. 녹취를 풀어 문체를 다듬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어찌하면 고종석 선생의 스타일을 실어 나를 수 있을지 고민했고 초기 작업이 만만치 않았어요. 고생 좀 했죠. 이후 필자의 첨삭 과정을 거쳐 책이 나왔습니다.
김 — 이런 경우 편집자에게 큰 역량이 필요하겠습니다.
정 —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역으로 뺄셈을 하듯이 책 출간 과정을 복기해보면, 편집자는 그 모든 과정에 관여하는 사람입니다. 쉽지 않지요.
알마는 어디로 계속 가고 있습니까
김 — 최근에 「선녀와 나무꾼」을 비튼 짧은 연극 한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당에서도 선녀가 늘어 정규직 자리를 구하기 어렵게 된 한 선녀가 나무꾼을 꼬셔 결혼(취업)에 성공합니다. 자식 둘을 낳고 근근이 살아가던 어느 날, 귀가한 나무꾼이 전업의 고민을 피력합니다. 사람들이 나무 대신 땅속에서 캐낸 ‘검은 돌’만 찾으니, 나무 캐서 어찌 먹고사느냐고. 무슨 까닭인지, 선녀는 나무꾼은 나무꾼이어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저렇게 산에 나무가 많은데 쓸모가 없어질 리 없다’고. 감동이지요! 다음 장면에서 나무꾼이 이번엔 ‘검은 물’이 쏟아진다는 소식을 전하는데도 선녀는 나무꾼을 격려하지요. 저는 여기까지 보고서는 나무꾼이 책 만드는 사람, 편집자로 동일시되어 잠시 낙담하였습니다. 각설하고,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인터넷 시대에 이렇게 돈 안 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알마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알마의 독자들은 누구입니까?
정 — 알마의 독자들은 연령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 같아요. 책에 담긴 생각과 내용으로 다른 출판사의 목록과 차별된다고 생각하는데, 독자들의 호불호도 분명한 편입니다. 알마의 방향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계속 늘려가려 합니다.
김 — 빅데이터로 산출해 해당 독자가 관심 가질만한 책의 출간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시대입니다. 저도 그렇게 추천 받은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아 둡니다. 종종 출판의 성공 사례를 운을 빌어 설명하곤 했는데, 이제 그런 축복은 드물어질 것 같습니다. 또한 책의 경쟁력 상실은 책 내용의 경량화로도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솔직한 제목의 베스트셀러도 그렇고,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선전을 보면 이제 지식을 어떻게 편집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정 — 책은 앞으로 기호품이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책을 읽거나, 아예 보지 않거나. ‘인문학’이니 ‘고전’이니 ‘책이 답’이라느니, 하는 동어반복은 이제 길을 잃었다고 봅니다.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봤는데요. 게임하는 아이들에게 이거 너무 중요한 것이니 꼭 해라, 하고 나서는 무조건 후기도 써야 한다고 하면 지레 도망가지 않을까요? 반면 책 읽는 건 금지시키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야만 읽을 수 있는 거죠. 그 세계가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일면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 뭐가 저렇게 재미있어서 어른들은 책을 끼고 살까, 이런 상황이 오면 아이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몰래 숨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찾지 않을까요? 독서 환경이 바뀌어야만 하는 거죠. 그때까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 텐데요. 책은 책다울 때 책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책만큼은 경량화가 답은 아닌 것 같아요. 역행이라 할지 모르겠는데, 알마는 절판된 훌륭한 책들을 재번역하고, 재출간하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당연히 돈 안 되는 일입니다. 책이 사라지는 시대에 책의 운명을 지키고 연장하는 사람들이 편집자입니다. 알마는 지난해에는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과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의 『모성애의 발명』을 새로이 다시 펴냈고, 다음 달에는 린 헌트의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을 재출간합니다. 계속 이런 작업들을 해나갈 겁니다.
김 — 생각난 김에, 저 ‘고색창연’한 이지누 선생의 책은 누가 읽나요?
정 — 가장 안타까운 책들이에요. 이지누 선생의 텍스트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저 같이 이지누라는 스타일에 대한 향수를 지닌 독자가 많지 않아요. 어떤 종이를 쓰든 이지누의 것으로 보이는 사진과 종이의 물성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가진 저자는 이제 거의 없을 겁니다. 사실 어디에서 만들어도 그렇게 나올 책들인데, 그 문체를 알아보는 독자에게 값진 책을 제공하는 것도 출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 슬슬 예정된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올해 준비 중인 책 몇 권 소개해주세요.
정 — 뉴턴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벽돌 책’을 몇 년째 준비 중인데, 하반기에는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빅히스토리 관련한 대작도 준비 중이고요. 그 정도만 공개하지요.
김 — 끝으로, 꼭 만들고 싶었던 책이 있다면?
정 — 사전류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주제별, 테마별로 항목이 구성된 독특한 사전이요. 사라지는 사물의 세부 명칭을 도해로 해제하는 사전 같은 건 정말 만들어보고 싶죠. 지식의 변동과 언어의 소멸에 대한 아카이브가 필요한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합니다.
김 — 처음이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정 —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입니다. 크게 아프면 세상이 달라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웃음)
김 —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5년 안에 내부 일꾼들에게 회사를 넘겨주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 꿈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정 — 회사를 잘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어요. 나는 터를 보여주는 사람이니까요.
출판사를 찾아가는 즐거움 중 하나는, 서가에 꽂힌 그 출판사의 책들을 한눈에 일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책들을 한꺼번에 훑으면서 이 출판사는 이런 지도를 그려 왔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의 안심이 좋다. 그 지도가 알아볼만한 형상일 경우 얼마나 반가운지. 게다가 두 시간 동안 두서없는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오는 길에, 정혜인 대표는 알마 책 중 보고 싶은 책을 한 권 선사할 테니 골라보라고 하였다. 날카로운 질문 하나 준비하지 못했으니 ‘풍문으로 들었던’ 『크리티컬 매스』(백지연)는 밀쳐 두고, 『뮤지코필리아』를 꼽아 들었다. 책 표지에 실린 음악을 듣는 올리버 색스의 황홀한 표정에 끌렸다. 나는 그게 책에 흠씬 빠진 사람의 얼굴로 보였는데, 이 ‘비블리오필리아’의 이름이 혹시 알마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애칭이 알마alma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책이 한데 모여 있었다는 인류 지성의 성소, 그 도서관은 번역과 출판일도 겸했다고 한다. 알마는 또한 스페인어로 영혼, 정신,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아랍어로는 기르다, 양육하다의 의미. 다양한 뜻이 근사하다. 알마 출판사의 등장 이후 ‘알’ 자가 들어간 출판사들이 여럿 뒤를 이었다. 알랩, 알키, 알투스, 알비 등. 모두 특색 있는 책들을 내는 곳들이다. 엉뚱하지만, 앞으로 알마를 ‘알짜’ 출판사의 시작이라 부르련다.
강상중 교수는 최근 출간된 『마음의 힘』(사계절, 2015)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무지막지한 시장경제의 힘에 쓸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고통만 남은 동시대인들을 근심한다. 그는 다른 삶을 상상할 용기를 잃은 병든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마음의 힘’을 키우자고 제안한다. 그가 제안하는 방법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생산성이나 합리성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는 세계에 풍덩 뛰어드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이다. 마음의 체력을 기르기 위한 삶의 잠시 유예. 그게 바로 책읽기의 시간이 아닐까. 일단 읽기 시작하는 것. 읽다 보면 어디로든 움직이리라. 오늘 ‘알마 도서관’ 정혜인 대표와 나눈 이야기가 겹쳐 떠올랐다.
‘기획회의’ 393호 2015. 6. 5
[출처] ‘돈 안 되는’ 책을 만드는 즐거움을 알려주마 — 알마 정혜인 대표|작성자 한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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