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기사 퍼옴]
[놀이가 밥이다]기고 - 아이, 소비를 얻고 놀이를 잃다
아이가 점점 짐스러운 존재가 되어간다. 아이와 함께 갈 곳도, 받아주는 곳도 찾기 어렵다. 아이들한테 좋다는 것을 배우러 다니느라 한세월을 낭비하고, 부모가 교사까지 되려 한다. 한국에서 아이 키우기는 절망과 좌절의 ‘번갈아 뺨 맞기’다.
둘 다 소비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초등 5·6학년 아이들을 어린이의 범주에서 속절없이 떠나보내고 있다.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사들이고 소비하면서 아이들과 지내고 있는지. 이렇듯 소비가 부모와 아이들의 오락이 되어갈 즈음 놀이는 버려졌다. 아이들에게 소비의 시작은 놀이의 종점을 뜻한다. 이제 마트로 실내놀이터로 체험으로 쇼핑으로 달음박질칠 일만 남는다. 소비가 아이들의 놀이가 되면서 배움도 불가능해졌다. 이게 돈으로 아이를 키우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모두 다같이 아이와 소비하며 살자고 톡과 페북으로 구매와 사용기를 실어나른다. 돈으로 아이 키우기를 멈추는 곳에서 아이는 살아나고 놀이는 시작된다.
아이들은 놀이를 엄마한테 허락받아야 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물어보고 놀아야 하는 시대를 눈치 보며 통과한다. 아이들이 앞으로 살 세상을 떠올려본다. 지금보다 더 촘촘하게 삶을 조이는 사나운 세상일 것이다. 오늘 아이들을 잡은 만큼의 품값이나 사육된 만큼 인내의 대가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대목을 아이 키우는 부모는 깨우쳐야 한다. 그런데 도무지 깨우칠 수 없다. 머릿속에 광고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보니 아이들이 노는 게 노는 게 아니다. 부모는 돈 버는 일에 올인하고 아이에게는 소비가 놀이가 되어 둘 사이에 은밀한 합의마저 이루어진다. 그것은 팔릴 만한 아이로 만들어야 하고 아이 스스로 그런 아이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노는 아이 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다른 집 아이도 놀지 못하게 깊이 연대한다.
놀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가 세상을 건강하게 살기란 쉽지 않다. 놀면서 죽고 살고, 이기고 지고, 되고 안되고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음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숱하게 겪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부모이다. 아이들이 세상을 살려면 삶의 기운, 생기라는 것을 이 시기에 몸 가득 담아야 하는데 그걸 도와주기는커녕 방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부모가 아니다. 열 살까지 이 시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 10년의 시기를 아이들이 보내면서 평생 쓸 삶의 밑바닥 힘을 놀이로 다질 수 있게 하자는 사회적 합의의 물꼬를 터야 한다. 아이는 놀아야 산다는 절박함을 부모와 교사들의 제정신에 호소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아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놀 권리를 누리는 아이와 이를 돕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 이런 모습이 곧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할 극한의 실험 카드가 더는 없기 때문이다.
내 공부는 아이에서 출발해 놀이를 지나 놀이터에 이르렀다. 놀이터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위험’이다. 다칠까봐 못 내보내겠다는 것이다. 아이들 안전을 염려하는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이들이 작고 자주 다쳐야 크게 안 다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런 위험과 만날 수 있게 하는 게 부모이다. 때론 다치면서 삶을 겪도록 하자. 체험 이야기도 짧게 해야겠다. 지금의 체험은 놀이도 학습도 아니다. 현재 조립 수준을 넘지 못하는 기획된 체험의 난립에 아이들을 맡겨서는 안된다. 돈 쥐여 어디 보내고 뭐 사주는 게 부모가 아니다. 사지 않고 아이와 10년을 보낼 궁리를 하는 부모를 만나고 싶다. 돈 들이지 않고 놀 수 있어야 그게 놀이다. 바람이 분다.
<편해문 | 어린이놀이운동가>
정작 짐스러운 까닭은 따로 있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이제 아이들은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초등 5·6학년 아이가 “엄마는 사는데 나는 왜 못 사게 하느냐!” 따진다. 부모 또한 무얼 살 궁리에 빠져 있고 아이들은 무얼 살 때 행복해한다. 소비는 이렇게 오늘 아이들의 놀이가 되었다. 쇼핑이 즐거움인 엄마 아빠처럼…. 초등 5·6학년 아이들이 하루의 많은 시간 동안 하는 생각은 ‘아! 사고 싶다. 입고 싶다. 바르고 싶다’이다. 사기 위해 공부시키고 더 사기 위해 공부한다.
둘 다 소비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초등 5·6학년 아이들을 어린이의 범주에서 속절없이 떠나보내고 있다.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사들이고 소비하면서 아이들과 지내고 있는지. 이렇듯 소비가 부모와 아이들의 오락이 되어갈 즈음 놀이는 버려졌다. 아이들에게 소비의 시작은 놀이의 종점을 뜻한다. 이제 마트로 실내놀이터로 체험으로 쇼핑으로 달음박질칠 일만 남는다. 소비가 아이들의 놀이가 되면서 배움도 불가능해졌다. 이게 돈으로 아이를 키우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모두 다같이 아이와 소비하며 살자고 톡과 페북으로 구매와 사용기를 실어나른다. 돈으로 아이 키우기를 멈추는 곳에서 아이는 살아나고 놀이는 시작된다.
아이들은 놀이를 엄마한테 허락받아야 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물어보고 놀아야 하는 시대를 눈치 보며 통과한다. 아이들이 앞으로 살 세상을 떠올려본다. 지금보다 더 촘촘하게 삶을 조이는 사나운 세상일 것이다. 오늘 아이들을 잡은 만큼의 품값이나 사육된 만큼 인내의 대가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대목을 아이 키우는 부모는 깨우쳐야 한다. 그런데 도무지 깨우칠 수 없다. 머릿속에 광고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보니 아이들이 노는 게 노는 게 아니다. 부모는 돈 버는 일에 올인하고 아이에게는 소비가 놀이가 되어 둘 사이에 은밀한 합의마저 이루어진다. 그것은 팔릴 만한 아이로 만들어야 하고 아이 스스로 그런 아이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노는 아이 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다른 집 아이도 놀지 못하게 깊이 연대한다.
놀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가 세상을 건강하게 살기란 쉽지 않다. 놀면서 죽고 살고, 이기고 지고, 되고 안되고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음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숱하게 겪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부모이다. 아이들이 세상을 살려면 삶의 기운, 생기라는 것을 이 시기에 몸 가득 담아야 하는데 그걸 도와주기는커녕 방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부모가 아니다. 열 살까지 이 시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 10년의 시기를 아이들이 보내면서 평생 쓸 삶의 밑바닥 힘을 놀이로 다질 수 있게 하자는 사회적 합의의 물꼬를 터야 한다. 아이는 놀아야 산다는 절박함을 부모와 교사들의 제정신에 호소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아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놀 권리를 누리는 아이와 이를 돕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 이런 모습이 곧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할 극한의 실험 카드가 더는 없기 때문이다.
내 공부는 아이에서 출발해 놀이를 지나 놀이터에 이르렀다. 놀이터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위험’이다. 다칠까봐 못 내보내겠다는 것이다. 아이들 안전을 염려하는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이들이 작고 자주 다쳐야 크게 안 다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런 위험과 만날 수 있게 하는 게 부모이다. 때론 다치면서 삶을 겪도록 하자. 체험 이야기도 짧게 해야겠다. 지금의 체험은 놀이도 학습도 아니다. 현재 조립 수준을 넘지 못하는 기획된 체험의 난립에 아이들을 맡겨서는 안된다. 돈 쥐여 어디 보내고 뭐 사주는 게 부모가 아니다. 사지 않고 아이와 10년을 보낼 궁리를 하는 부모를 만나고 싶다. 돈 들이지 않고 놀 수 있어야 그게 놀이다. 바람이 분다.
<편해문 | 어린이놀이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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