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갈리아 논쟁-여성학자 정희진의 시각
한 여성 게임 성우가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 인증 사진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일이 그의 일을 빼앗았습니다. 그를 지지한 웹툰 작가들은 ‘창작의 자유 규제’를 요구받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노동권 침해를 비판한 진보정당은 메갈리아 옹호 여부를 두고 내홍에 빠졌습니다. 탄생 이후 수많은 논란을 거쳐온 메갈리아가 2016년 뜨거운 여름에 이르러 한국 사회 논쟁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여성차별과 혐오를 주제로 지금처럼 뜨겁게 논쟁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난 18일 한 여성 게임 성우가 하얀 티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티셔츠엔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자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란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이 사진을 ‘메갈리안 인증’으로 받아들인 게임 유저들과 에스엔에스(SNS) 이용자들의 압박으로 게임회사 넥슨은 성우를 하루 만에 교체하고 그의 목소리를 삭제합니다.2015년 여름 등장한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는 ‘미러링’(일베 등이 사용하는 표현과 언어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방식)을 앞세워 ‘혐오’와 ‘차별’이란 화두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 전투적인 언어전략은 ‘새로운 여성운동’과 ‘여자 일베’란 양극의 평가를 받으며 여성차별 이슈를 가시권으로 밀어올립니다. 소수자 조롱 등이 섞인 미러링의 표현들은 메갈리안 사이에서도 이견을 낳았고 지향에 따라 그들도 분화합니다. 페이스북에 둥지를 튼 메갈리아의 경우 ‘메갈리아2’와 3이 삭제되고 현재 4(미러링보다 정제된 언어로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을 이야기)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해당 티셔츠는 페이스북의 페이지 삭제에 대응하는 소송 자금 마련을 위해 제작된 것이었습니다.사건보다 ‘사건 이후’가 파장을 넓히며 한국 사회를 달구고 있습니다. ‘반메갈리안들’의 압박은 성우 교체에 항의한 웹툰 작가들을 향한 압박(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 회원 탈퇴 등)으로 이어졌고, 작가들의 창작의 자유를 옹호하지 않겠다는 ‘예스컷 운동’(정부의 웹툰 규제 환영)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메갈리아 활동 취지에 동의를 표한 가수는 비난이 일자 곧바로 사과를 표명했습니다. 성우 교체를 노동권 침해의 관점에서 비판 논평(20일 문화예술위원회 명의)한 정의당은 내부 갈등에 빠졌습니다. ‘메갈리아 반대’ 여론에 직면한 당이 문화예술위원회가 낸 논평을 철회(25일)하고 일부 당원들은 논평 작성자들의 출당까지 추진하면서 논란은 더욱 부풀고 있습니다. 티셔츠 한 장에서 시작된 논쟁이 ‘메갈리아를 지지 혹은 혐오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투며 혐오와 차별을 둘러싼 격론으로 전이·확산되고 있습니다.여성학자 정희진씨의 글을 싣습니다. 현 사태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면서 그 자체로 매우 논쟁적입니다. 의미 있는 논쟁을 위한 밑거름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이 바다에 묻히고 국민은 “개돼지”가 된 마당에, 더 이상 놀랄 뉴스가 있을까. 하지만 한국 사회 일부 구성원, 특히 진보 진영을 포함한 자타칭 오피니언 리더들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발상은 여전히 충격의 연속이다. 온라인 여성주의 그룹 ‘메갈리아’를 후원하는 티셔츠를 샀다고 해서 회사 쪽으로부터 모종의 ‘조치’를 당한 여성, 이에 대한 정의당의 논평과 그 철회, 티셔츠 자체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분노는 우리 사회의 성별 관계, 진보, 사회운동, 미디어 등에 대해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정의당은 ‘제3자 개입’을 하지 않는다?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게임업체 넥슨은 성우 김자연씨에 대한 ‘조처’(7월19일 교체)가 남성 소비자의 항의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모든 소비자가 남성일 리는 없지만, 소비자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회사 쪽의 사정을 이해한다. 그녀를 ‘교체’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이익을 창출했는지 모르지만, 기업도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현재 김자연씨의 블로그에는 그녀의 입장이 정확하고 차분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http://blog.naver.com/knknoku/220766463634). 그녀는 여느 여성들처럼 “혐오에는 혐오로 대응한다”는 일부 메갈리안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상식적 차원의 성 평등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티셔츠를 구입했다. 그녀는 “회사 측으로부터 충분한 배려를 받았고 녹음은 지난달 이미 다 마친 상태이며,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부당해고라는 말은 삼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라고 썼다. 나 역시 그녀가 이번 일로 더 이상 구설에 오르거나 난처한 입장에 처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도 그녀와 비슷한 경험이 있고, 이런 일이 개인적 차원에서는 얼마나 곤란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그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넥슨으로부터 교체당한 여성 성우 김자연씨가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 김자연 트위터 갈무리
지난 7월20일, 넥슨의 ‘조치’에 대해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왜 노동위원회가 아닐까?)는 “기업의 노동권 침해”라는 논평을 냈다. 철회 이유와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사자가 해당 회사와 원만하게 합의했으므로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한다. 둘째, 처음 논평은 메갈리아에 대한 지지 여부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이 친메갈리아인가 아닌가라는 수많은 논쟁만 야기하고 부당한 노동권의 침해라는 본 취지의 전달에는 실패하였다. 셋째, 논평의 발표 과정 중 당 내부에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다(2016년 7월25일 정의당 3기 상무집행위원회).
나는 이들의 철회 이유를 분석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티셔츠 한 장으로 대다수 남성들이 그토록 흥분하고, 공당(公黨)은 입장을 바꾸고, 여론은 들끓는 이 상황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어이가 없어서’는 두 번째 문제고, 이 일 자체가 ‘아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의 만 원짜리 의류 구입, 이것이 왜 그토록 문제인가.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소비자(남성)의 입장을 고려하는 기업 정신’은 그렇다 치고, 이에 대한 항의 논평을 철회한 진보정당은 누구의 눈치를 본 것인가. 만일 이런 일이 재발한다면, 그때도 당사자 핑계를 댈 것인가. 당사자가 기업에 저항한다면, 말리기라도 할 것인가.
노동계에서 오랫동안 논쟁 의제였고 공권력의 악용으로 많은 진보 인사들을 ‘불순 세력’으로 몰았던 ‘제3자 금지법’은 이제 없다. 그런데 여성은 노동자가 아니어서일까. 정의당은 ‘제3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포기하고 ‘반성’하고 있는 형국이다. 여성 노동자는 어떤 일을 당해도 개입하지 않겠다? 정의당의 원칙, 그야말로 정의에 위배되었는데도 단지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서 논평을 철회한다면, 이 정당은 개인주의 정당이거나 자유주의 정당이지, 노동자의 당파성은커녕 정책 정당이라고 보기 어렵다. 정의당이 상대해야 할 대상은 당사자가 아니라 기업이 아닐까.
두 번째 이유는 더욱 이상하다. “부당한 노동권 침해라는 본 취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더욱 첫 번째 항의 논평을 철회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사건은 메갈리아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과 전혀 관련이 없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의견이 직업 활동을 가로막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첫 번째 논평 제목처럼, 노동권 문제다. 이 사건은 정의당의 메갈리아 지지 여부를 묻는 문제가 아니다. 정의당은 명백한 노동 문제를 젠더 이슈로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 노동자의 티셔츠 구입은 젠더 문제이자 노동 문제이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당하는 차별에 집중해야지, 일반 남성들의 ‘대중정당’ 요구에 동일시하는 자세는 진보정당 활동을 하겠다는 것인가 말겠다는 것인가. 노동자, 대중, 시민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정의당은 스스로 자신들은 메갈리아 지지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 듯하다.
일부 여론은(메갈리아에 반발하는 남성들) 티셔츠 한 장으로 기업과 정당을 쥐고 흔들며, 타인의 정치적 의견에 판관을 자임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독점하며, “할 말을 해왔던” 이들의 “넌 누구냐”라는 정체성 심문(審問) 폭력에 정의당은 벌벌 떨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의견”이란, ‘고작’ 티셔츠를 샀는가다. 티셔츠의 문구는 ‘겨우’ “우리에겐 왕자가 필요 없어”(Girls do not need a prince)였다. 이 티셔츠보다 수백만 배는 많이 입는 일상복, “날 원해?”(You want me?), “오늘 밤 널 느끼고 싶어”(I wanna feel you, tonight), “PLEASE, FUCK ME!”라고 쓴 ‘평범한’ 옷을 입은 여성이 해고되었다는 뉴스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여성이 이런 옷을 입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자본과 진보의 강고한 남성연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진보는 언제나 진보이기 전에 남성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재개념화되어야 할 용어 중 하나가 “진보”다.
일베에 대항한 유일한 집단, 메갈리아나는 ‘일간 베스트 저장소’(일베)가 한국 사회에 새로운 문화 권력과 혐오 산업을 창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는 매체의 발달과 매체가 곧 새로운 담론과 몸의 확장을 만들어낸다는 연구(미디어는 메시지다)가 ‘지금, 여기’의 시점에서 시급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나처럼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시민권을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베는 기존의 온라인(가상 세계)과 오프라인(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이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준 사례다. 동시에 온라인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정치(익명성, 동시성, 극한의 폭력성 등)를 실험하고 있다.
나는 일베가 남성 하위문화, 실업으로 인한 좌절, 여성 지위 ‘향상’에 대한 반발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일베 헤비 유저 출신의 <한국방송>(KBS) 수습기자 사건이 보여주었듯이, 그들은 한국의 평균 혹은 그 이상 수준의 남성들이다. 일베 사용자 중에는 ‘찌질남’도 있지만 지구화 시대 대한민국의 위상을 고민하는 새로운 건국 세력이 존재한다. 그들은 우익 시민사회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데올로그들, ‘엘리트’들이다. 한국과 같은 식민 지배 이후의 사회(포스트 콜로니얼, post-colonial)에서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아직 완전한 주권 회복이 안 되었다는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각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국가상, 건국(nation-building) 전략을 제시하고 그것이 정치적 전선을 독점한다. 정권 교체기마다 신임 대통령들의 취임사를 검토해보면, 하나같이 이전 정부와 다른 나라를 만들겠다는 강력한 결의가 등장한다.
일베는 ‘중요한’ 집단이다. 일베의 주요 혐오 대상은 여성, 호남 사람,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한국적이면서도(호남) 전통적인 사회적 약자(여성, 장애인)이다. 주목할 점은 일반 복지를 요구하는 여성들을 “맘충”(mom蟲)으로 부르거나 세월호 유가족까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일베가 보기에 이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대한민국 번영의 발목을 잡은 ‘충’(蟲)들로서, 솎아내야 할 비(非)국민이다. 이전의 군사독재 시절이나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구조’가 아닌, 자신을 국가의 대표로 자임하는 ‘개인’들이 다른 사회구성원을 극단의 혐오와 비하의 논리로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베가 멸시하는 대상 중 거의 모든 정체성이 겹치는 나는, 아직은 국가의 역할을 묻고 싶다. 특정 소수가 대다수 국민을 상대로 이렇게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국가는, 정당은, 진보 세력은, 시민단체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기들은 일베가 싫어하는 이들이 아니어서 가만히 있는가. 나는 그들이 두렵다. 일베 현상을 연구하자는 동료들이 많은데, 모두들 공포에 발을 뺀다. 이제까지 그 어떤 대의 기관도 일베에 맞선 이들은 없다. 누구도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메갈리아는 일베가 짓밟은 사회 집단 중 조직적으로 대항한 유일한 ‘당사자 집단’이다. 일베의 전라도 혐오에 ‘경상도 혐오’로 맞선 사례가 있으나 당사자 조직이나 커뮤니티 형식은 아니었다. 일베는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의 면전에서 ‘폭식 투쟁’을 하고, 광주민주화운동 사망자의 시신을 ‘홍어’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여성들의 용기가 특출해서가 아니다. 일베가 솎아내고 싶은 비국민 중에서, 집단의 크기가 가장 크고 어느 정도 자원과 인식을 가진 여성들이 그나마 이들에 맞설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들이 바로 ‘여자 일베’냐 ‘새로운 여성운동 세력’이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메갈리아다. 국가와 진보 남성들은 메갈리아 뒤에 숨었다. 아니, 국가와 시민사회는 일베와 같은 남성으로서 교직(交織)된 존재이다. 강남역 사건까지 겪은 여성들은 말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정부는 여성을 보호하지 못하고/않고, 진보정당은 비판 논평을 철회시킴으로써 메갈리아 티셔츠를 구입한 여성 성우를 교체한 기업에 동의했다. 내가 이번 ‘티셔츠 사태’에 절망한 이유는 지난 25여년 동안 경험한 바지만, 국가-우파-좌파 사이의 이념(이 있기는 한가?)과 계급을 초월한 성의 단결, 즉 남성연대 때문이다.
진보정당은 기업이나 무능·부패한 정부가 아니라 여성과 싸우고 있다. 왜? 그들이 좋아하는 ‘정치경제학’ 논리로 보자면, ‘진보’ 이전에 ‘남자’일 때 더 얻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일베의 폭력, 자신감, 신념, 막말은 마치 무정부 상태의 거칠 것 없는 주인공처럼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는 메갈리아에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거듭 묻는다. 누가 일베에 맞섰는가?
메갈리아는 일베가 짓밟은 집단 중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들 미러링은 성차별 여성 구제 아닌 남성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할 때 반응 자체를 여성운동이라 생각OECD 남녀임금 격차 부동의 1위 여성교육 수준은 세계 1~2위인데노동시장 지위는 최하위권 맴돌아 성차별 존재 사실 인식 없이는‘성차별 반대’ 주장도 공허할 뿐지난 5월17일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혐오 살인’ 논쟁이 일면서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가 피해자를 추모하는 글들로 뒤덮여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여자 일베’냐 아니냐는 의미 없어그간 메갈리안의 활동에서 가장 논쟁점이 된 것은, “혐오에는 혐오로 대응한다”는 일부 메갈리안들의 입장이었다. 이는 사회운동에서 저항 세력의 논리와 대안에 대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보다 본질적인 화두는 20~30대 여성들의 성차별에 대한 분노를 공감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다. 내 또래의 40대 여성들은 지금 젊은 여성들과 같은 대중적인, 동등한, 현대 교육을 받았다. 여성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고 배웠지만, 나는 동시에 (‘남존여비’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들과 협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나는 여중·여고를 나와서 여학생이 9%에 불과한 남녀 ‘공학’ 대학을 다녔다).
지금 세대의 여성들은 규범적 평등과 실제적 차별 사이의 간극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세대다. 이들은 ‘우리’와 달리 참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이 넘을 수 없는 벽을 넘는 방식을 가르쳐주지 않았고(여성학 교육이 없었고), 남성 개인, 가족 제도, 국가는 변화가 없다. 이 상황의 가장 직접적인 변화가 저출산(만혼, 결혼 기피)이다. 이런 상태에서 이들의 문제의식과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온라인이며 에스엔에스 같은 매체이다. 이곳에서는 여성도 남성이 될 수 있다.
일베와 맞설 때 주먹이 필요할까. 페미니즘 이론이 필요한가. 아니면 중산층 여성성이 체화된 교양 있고 우아한 언어가 유용할까. 아니,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이제까지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쟁은 그들의 주된 활동 방식인 미러링(mirroring)에 관한 것이었다. 미러링은 글자 그대로 상대의 행위를 거울을 통해 되돌려 보여주는 것이다. 일종의 사상(寫像), 사진 찍어 ‘보내는’ 행위다. 그러므로 미러링 방식이 기대하는 효과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아, 내 행동이 그랬구나”라는 반성을 촉발하거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공감 능력이다.
그러나 메갈리아의 전략은 그들이 의도(인지)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일반적인 의미의 미러링이 아니었다. 일단, ‘메갈리아’의 뜻 자체가 노르웨이의 여성주의 작가 게르드 브란텐베르그의 가상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과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의 합성어다. 처음부터 이들은 그간 인터넷에서 남성의 세계와 언어를 지켜본 경험을 살려 그들 문화 속에 들어가, 나도 그 입장이 되어 보자는 게임에서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남성들도 겪어봐라”가 아니라 “우리도 그래 보면 저들이 어떻게 나올까”의 의미가 강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유명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처럼, ‘남자가 월경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가정(假定)의 세계다. 남자도 월경을 “해라”가 아니라 “한다면”이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얼마나 유세를 부릴까”와 같은 풍자의 의미다. ‘실제의 실천’을 제안한 것이 아니다. 메갈리아는 1983년에 설립된 ‘여성의전화’나 1984년의 ‘또하나의 문화’ 같은 전통적인 의미의 여성운동 단체가 아니다. 기존의 여성주의나 사회운동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을 이해, 해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엉뚱한 전선에서 소모적 논의를 반복하게 된다.
이들의 목적은 대사회적 발언이나 구체적인 성차별의 피해여성 ‘구제’가 아니다. 지금 일부 메갈리안들의 미러링 언어는, 남자들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자유롭게 했던 말들이다. 거듭 강조하면, 이제까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혐오를 돌려준다기보다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할 때 사회의 반응, 그 자체를 여성운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꽃뱀”에 대해 “좆뱀”, “김치녀”에 대해 “씹치남”, “맘충”에 대해 “한남충”(한국남자蟲) 등이 그것이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메갈리안이 모두 여성일까” “일베가 모두 남성일까?”라고 질문한다. 이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이라는 뜻이 아니다. 가까이는 지난 10여년 동안 인터넷 세계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수천년간 여성에 대한 재현(‘지껄임’), 즉 남성의 말을 ‘복사’해서 사회에 ‘원본’을 보여준 것이다. 원본을 빼앗긴 혹은 무수한 원본이 돌아다니자 남성들은 당황, 분노하기 시작했다. 남성들에게 가장 공포는 여성의 자각이 아니다.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타인을 짓밟을 수 있는 쾌락의 언어와 맘껏 허용되었던 그 ‘권리’를 여자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좌절감이다. 철벽같았던 자기들만의 공간에 “이빨 세고 겁 없는 여자들”이 침입한 것이다. 게다가 일부이지만 자신보다 학력이 높고 고소득인 또래 여성이, 자신을 “좆뱀”이라고 불렀을 때 심정을 생각해보라.
메갈리아 활동에 대해 “여자 일베”라는 입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다”는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당연히 미러링은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할 필요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다. 이것은 메갈리아의 잘못도 실패도 아니다. 미러링이 성공하려면 성차별 현실을 인정하고 서로의 경험과 언어, 사회적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갑’인 남성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니다.
문제는(?) 이번 티셔츠가 원래 1천만원 정도의 판매를 목적으로 했다가 1억을 넘어 1억5천만원어치가 판매된 사실에서 보여주듯이, ‘예기치 못한’ 대중의 열렬한 지지다. 이는 그만큼 한국 사회의 성차별이 비상식적으로 심각했다는 뜻이다. 처음 출발과 달리, 메갈리아는 사회로 소환되었고 사회와 소통이 불가피해졌다. 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메갈리아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본다.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넥슨의 여성 게임 성우 교체에 항의한 웹툰 작가들을 겨냥해 ‘반메갈리안’ 유저들과 누리꾼들이 작가들의 창작의 자유를 옹호하지 않겠다며 ‘예스컷 운동’(정부의 웹툰 규제 환영)을 벌이고 있다. 나무위키 갈무리
성차별 의식 없는 성차별 사회 한국 사회 가부장제의 특징은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이다. 한국의 남성성은 책임감, 부양자/보호자 의식, 자율성 등 전통적인 서구 백인 중산층의 남성성이 아니다. 제3세계나 피식민 지배를 경험한 남성성과 제국의 남성성은 같을 수 없다. 남성이 가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과 역할은 많을 수밖에 없다. 이들 여성 중 몇몇은 미디어에 의해 과잉 재현되어 마치 모든 여성이 ‘출세’한 것처럼 보이고 남성은 여성 상위 시대(‘흑인 상위 시대라는 말이 가능한가’)라고 착각하게 된다.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 사회의 특징은 성차별은 극심한데 여성운동은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남녀 임금 격차를 발표한 2000년부터 부동의 1위를 지켜왔다. 2014년도 역시 압도적 1위다.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36.7% 덜 받는다. 지난해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29개 조사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세계경제포럼의 성차별 지수 역시 145개국 중 115위다. 한국 여성의 교육 수준은 세계 1~2위인데, 노동시장 지위는 최하위권이다. 이 문단은 내가 노래를 부르는 내용인데, 많은 남성들은 한국에는 성차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이번 사건, 앞으로 한국 사회를 전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있다. 모든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간에, 그런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때문에 인종 차별도 심하지만, 동시에 이에 대한 저항도 활발하며 사회 전반 고민과 문제의식도 깊다. 의미 없는 말이지만, 미국의 인종차별이 우리의 성차별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 인식이다. 현실을 자각할 때 개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한국 남성들은 규범적으로는 혹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여성차별에 반대하고 양성은 평등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차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사회 구조적 제도로서 성차별의 심각성과 광범위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 여성문제는 언제나 ‘사소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운동에 대해서도 운동의 방법 등을 문제 삼아 실제로는 방관하거나 불편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차별에도 반대하고, 메갈리아에도 반대한다’는 이중적 언설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일반인, 학계, 정치권, 시민사회 다 마찬가지다. 학문이 발전할 리 없다. 타자에 대한 인식이 없는데 어떻게 앎이 가능하겠는가.
성차별이 작동한다는 의식(consciousness)이 없기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그토록 자주 ‘실수’하는 것이다. 성차별주의자든 아니든 간에, 성차별이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미국처럼 최소한 공식 영역에서의 ‘n word 정책’(‘니그로’ ‘깜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조심’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러한 인식도 합의도 없다. 집권당 대표는 카메라 앞에서 흑인 유학생에게 “연탄”이라고 말하고, ‘오피니언 리더’들의 여성에 대한 발언과 행동에 나는 아직까지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지적을 받거나 법적 처벌을 겪으면, ‘가해자의 피해의식’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남성이 받는 대부분의 상처는 남성과 남성의 계급 차이 때문이다. 어쨌든, 이마저도 여성의 감정노동을 구입해서 해결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독점하는 사회. 이보다 끔찍한 공동체는 없다. 그래서일까. 여성이 술을 마시면 주로 울거나 신세한탄을 하는데, 남성은 일선 경찰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인 주취 폭력을 행사한다. “내가 누군지 알아!”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묻는다. 그것은 자기를 알고 싶은 무의식적 소망일지도 모른다. 정희진/여성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