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는 참 좋다.

근데 좀 길긴 하더라.ㅎㅎㅎ

그래도 좋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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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한 사랑

                                  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갑작스러운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으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 속에서 주고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오,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야.

어쩌면 삼 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손잡이가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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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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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_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열심히 끄덕인다.

어느 틈에 주변에는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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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시 모임이 있었다. 원고 마감 때문에 며칠 잠을 못 이룬 터라 힘들었다. 모임이 끝나고 다시 원고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갔다.

다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일 때가 많을 것이다. 훌쩍 떠나는 여행을 그리는 마음은 비슷할 터이다. 나도 가끔은 잡다한 일상 내려놓고 떠나고 싶은 때가 있으니. 

여행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타자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길에 나서는 게 요즘의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고 여행하는 사람들을 얕잡아보려는 뜻은 아니다. 맛집을 순례한다고는 하지만 맛집의 음식을 정복하러 가는 것 같고, 여행지 또는 관광지를 찍고 떠나는 여행도 땅밟기하듯 정복하고 떠나는 것 같은 건 왜일까? 삐딱해서일까? 글쎄...

그래도 조용히 한 곳에 오래 머물러 가만히 타자(자연)를 들여다보는 여행은 자주 가고 싶다. 그런 여행은 결국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 같다는 생각이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어제 만난 시나 적어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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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며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솓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름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세상 끝 등대 I

                                                     - 박준

내가 연안(沿岸)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

                                                      - 강제윤

집을 떠나 자연의 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바쁘게 걷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시  속도의 노예가 되는 일이다.


길가의 풀과 나무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새소리를 듣지 못하고 정신 없이 걷는다면,

또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풍경을 놓친다면

길에 얽힌 이야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대체 이 자연의 길을 걷는 의미는 무엇일까


길을 나서려면 느리게 걸어야 하리라.

온갖 해찰을 다 부리며 걸어야 하리라.

길에서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위는 잊어야 하리라

목적지에 가지 못한들 어떠랴

길을 벗어나 낯선 길로 들어선들 또 어떠랴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 그 자체가 아닌가.



고요한 길

                                                                                         - 김사인

지나는 사람 없고

시든 엉겅퀴 대궁만 멀춤할 때 늙은 호박 엉덩이 무거워져 이제 혼자는 못 일어설 때

늦은 봉숭아 꽃잎 몇낱과 쇤 고구마줄기와 아주까리, 한사코 감고 오르는 까끄랭이 환삼과 개미들과

먼 데 누워 계시는 윗대 어른들 생각과 다시 콩밭과

잘 벌은 깻잎과 고추밭과 열무 배추와 불쑥한 토란대 몇 뿌리와 순간 까투리 푸다닥 날고, 문득 아픈 아내 생각과

밭둑 수숫대와 영글어가는 나락들과 엉뚱한 흑장미 한그루와

처서 백로 지나 오오 바람도 흙도 풀도 볕에 잘 마른 것,

개미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들로 나는 두루 그득해져

자불자불 졸리면서

전주 이씨네 산소 치장이나 한번 볼까 길을 바꿔 잡으며

어머니 비석에는 남원 양 아무개 여사라고 써볼 생각과 그럼 학생부군 아버지는 뭐라고 하나 싱거운 생각도 들다가

이 별의 한 모퉁이에 나도 머무는 데까지 잘 머물다가 어른들 가시는 것 봐드리고, 장인 장모님도 잘 배웅해드리고, 친구들과도 오명가며 지내다가, 세금이나 과태료 같은 거 밀린 것 없이 있다가, 아이들 짝 만나 서로 돌봐가며 지내는 것 잠깐 보다가, 좀 아파보니 아파서 죽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아내 말마따나 너무 많이 앓지는 말고, 그만할 때쯤 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여뀌풀꽃 분홍 수줍고

배추잎 하나가 우산만 하고

다만

고요한 길.




낯선 곳

                                       - 고은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명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 터키의 혁명적 서정시인이자 극작가로 모스크바 유학시절 마야콥스키의 영향을 받았고 귀국 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시 《죽은 계집아이》, 희곡 《다모클레스의 칼》 등이 있다.




주일 2

                                       - 천상병

1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2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나는 생각하기를

                                               - 뵈른스트에른 뵈른손(노르웨이의 세계적 문호)

나는 생각하기를 위대해져야겠다 해서

우선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리하여 나와 모든 것을 잊었다.

여행 떠날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때 나는 한 소녀의 눈동자를 보았더니

먼 나라는 작아지면서

그녀와 함께 평화로이 사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처럼 여겨졌다.


나는 생각하기를 위대해져야겠다 해서

우선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리하여 정신의 크나큰 모임에로

젊은 힘은 높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가르치기를

하느님이 주는 최대의 것은

유명해지거나 우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 했다.


나는 생각하기를 위대해져야겠다 해서

우선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향이 냉정함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오해받고 소외되어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통해 내가 발견한 것은

만나는 사람의 눈마다 사랑이 있다는 것

모두가 기다린 것은 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인생은 새로워지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 에리히 캐스트너(독일의 대표적인 어린이책 작가이자 시인. 나치 독재에 맞선 지식인)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시간 속을 뚫어 먼 길을 갑니다.

우리는 모두 창밖을 내다봅니다.

내다보는 데에도 이제 싫증이 납니다.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달려갑니다.

어디까지 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옆 사람은 잠자고 있고, 다른 사람은 한숨 쉽니다.

또 한 사람은 쉴새없이 지껄이고 있습니다.

역 이름이 방송됩니다.

해마다 날마다 달리고 있는 기차는

도착할 종착역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짐을 풀고, 우리는 짐을 쌉니다.

무엇이 어떻게 된 셈인지 알지 못하며,

내일은 어디를 지날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차장의 입가에

애매한 미소가 감돌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밖으로 나갑니다.

요란스럽게 기적(汽笛)이 웁니다!

기차는 천천히 다가가 멈춥니다.

죽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립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기차에서 내립닌다.

어머니가 비탄에 젖어 웁니다.

죽은 사람들은 말없이

과거라는 이름의 플랫폼에 서 있습니다.

기차는 시간을 꿰뚫고, 다시 달려갑니다.

왜 달려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일등칸은 텅 비었습니다.

뚱뚱한 사내 하나가

빨간 빌로드 시트에 등을 기대고 앉아

괴롭게 숨쉬고 있습니다.

그는 혼자 있고 그 사실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멀찌감치

나무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현재에서 미래로 여행합니다.

우리는 모두 창밖을 내다봅니다.

내다보는 일에도 이제 싫증이 납니다.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달려갑니다.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차 칸에 있습니다.




여행

                               - 메리 올리버

어느 날 당신은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고

그것을 시작했다

당신을 둘러싼 목소리들이

계속 불길한 충고를 하고

온 집안이 동요하고

오래된 것들이 발목을 잡았지만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라고 소리쳤지만

당신은 멈추지 않았다

바람이 억센 손가락으로

주춧돌을 들어올리고

주변의 슬픔이 한없이 컸지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이미 충분히 늦은 황량한 밤

길에는 부러진 가지와 돌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떠날 때

구름들 사이로 조금씩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서서히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구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삶을 구원하기로 결심하고

세상 속으로 점점 깊이 걸어갈 때

언제나 당신 곁에 있어 온 그 목소리를



The Journey

                                                _ Mary Oliver

One day you finally knew

what you had to do, and began,

though the voices around you

kept shouting

their bad advice --

though the whole house

began to tremble

and you felt the old tug

at your ankles.

"Mend my life!"

each voice cried.

But you didn't stop.

You knew what you had to do,

though the wind pried

with its stiff fingers

at the very foundations,

though their melancholy

was terrible.

It was already late

enough, and a wild night,

and the road full of fallen

branches and stones.

But little by little,

as you left their voices behind,

the stars began to burn

through the sheets of clouds,

and there was a new voice

which you slowly

recognized as your own,

that kept you company

as you strode deeper and deeper

into the world,

determined to do

the only thing you could do --

determined to save

the only life you could save.




Posted by 익은수박
,

이 글을 읽다 보면, "아! 시가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딱 오는 듯하다.

시를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좋다!

이 글을 알게 해준 그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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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비행사


_산티아고 감보아


슬픈 이야기를 들려줄까 한다. 사실 지금 이 얘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다음 달로 미루거나 내년에나 풀어놓을 것인지, 아니면 아예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 중 하나인 나의 친구, 시인 이보 마카도(Ivo Machado)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최근에 구입한 금속제 모형 비행기를 눈앞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말했듯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포르투갈 아소르스 제도(諸島)에서 태어난 시인 이보 마카도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항공 관제사로 일했다는 점이다. 비행기가 하늘에 있는 길을 따라가도록 공항의 관제탑에 앉아 안내를 해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


이보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던 80년대 중반에, 아소르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산타 마리아의 공항에서 비행 관제사로 일했다. 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이 제도는 유럽과 북미의 딱 중간지점이다.

어느 밤, 그가 공항 관제탑에 도착했을 때, 그의 상사는 “오늘은 자네가 단 한대의 비행기만 안내하면 되네.”라고 말했다.

이보는 깜짝 놀랐다. 평소대로라면 열두 대 가량의 비행기를 관제해야 했다. 그러자 상사가 설명했다.

“특별 케이스야. 어느 수집가가 제 2차 대전 당시의 영국 폭격기를 런던 경매장에서 구입한 모양이야. 영국 비행사가 그 폭격기를 플로리다까지 운항해서 수집가에게 배달하는 임무를 맡았지. 그 비행사가 여기 기착했다가 캐나다 방향으로 가는 중인데 말이야, 폭격기의 비행성능이 신통치 못한데다가 폭풍까지 만났지 뭔가. 지그재그로 비행을 하다 보니 연료가 바닥이 나서 캐나다까지 갈 수도 없고 여기로 회항할 수도 없다고 연락이 왔네. 바다로 처박힐 판이지.”

상사는 쓰고 있던 헤드폰을 그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 친구 좀 진정시키게. 극도로 불안한 상태야. 캐나다 구조대가 출발했고 헬리콥터들이 추락 예상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고 설명하게.”


이보는 헤드폰을 착용하고 그 영국 비행사와 대화를 시작했다. 비행사의 목소리는 극심히 떨고 있었다. 그가 우선 알고 싶은 것은 바닷물의 수온이 어느 정도인지, 혹시 상어 떼가 나타나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이보는 상어 떼 따위는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런 뒤 그들은 사적인 대화로 들어갔다. 사실 관제탑과 비행사 사이의 대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비행사는 이보의 삶에 대해, 이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이보의 느낌에 대해 물었다. 이보가 자신이 시인이라고 말하자, 그 영국인은 기억하는 시가 있으면 낭송을 해달라고 청했다. 다행히도 내 친구는 월트 휘트먼, 코울리지, 에밀리 디킨슨 같은 시인들의 시를 몇 편 외우고 있었다. 이보는 낭송을 해주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소네트라든가 우주의 격렬한 분노와 맞서 싸우는 ‘늙은 선원의 노래’에 나오는 몇 구절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그러다 보니 그런대로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정도 평정심을 회복한 비행사는 이보 자신의 시를 몇 편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보는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시 몇 편을 그 자리에서 번역하여 이 영국인을 위해서 낭송했다. 단 한 명의 청중을 위해서, 고물 폭격기에서 외롭게 조종간을 붙잡은 비행사를 위해서, 캄캄한 바다 위에서 격렬한 폭풍과 싸우는 그를 위해서, 그리고 극도로 날카롭고 끔찍할 정도로 고독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위해서.

“당신 시에는 뭔가 깊은 슬픔이 있고 또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는 각성 같은 게 있군요,”

낭송을 듣고 나서 비행사는 감상을 조용히 전했다.

두 사람은 인생과 꿈에 대해, 깨지기 쉬운 것들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오고 말았다. 연료 게이지의 바늘이 붉은 눈금 아래로 떨어지자 폭격기는 바다로 추락했다.


이 일이 일어난 뒤, 관제탑의 책임자는 이보에게 집으로 퇴근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보가 이런 일을 겪고 당일 다른 비행기를 안내하는 것은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 이보는 그 사건의 결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구조대는 아무런 손상 없이 바다에 떠 있는 비행기를 발견했지만, 비행사는 사망하고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비행기가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의 충격으로 기내 구조물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그의 목을 강타했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군.” 이보가 내게 설명했다.

“그 비행사 때문에 내가 계속 시를 쓸 수 있는 것 같아.”


몇 달이 지난 뒤, 국제항공운송협회가 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보는 배심원단 앞에서 자신과 비행사가 나눴던 대화의 녹음 내용을 듣게 되었다. 배심원단은 그에게 수고했다는 감사의 말을 건넸다. 항공 역사상 관제탑의 주파수를 시로 가득 채웠던 건 그때가 유일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 사람 목소리를 꿈꾸곤 하네.”라는 이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마음으로 시를 써야 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쓰는 모든 말들이 한밤중에, 격렬한 폭풍에 맞서서, 사투를 벌이는 어느 외로운 비행사를 위한 것처럼.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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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가 <아픔의 기록>에 쓴 '길 안내'

자꾸 읽어 보면 시라는 게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대목이 자꾸 끌린다.

"시는 사실(事實앞에서 무력하다무력하지만 인내력을 잃은 채 무력한 것은 아니다모든 것이 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시는 결과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결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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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기록>(존 버거) 시 소묘 사진 1956-1996

_ 존 버거

 

길 안내

 

열두 살 때부터 시를 썼다, 무엇이든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을 때면. 시는 무력감에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시의 힘은 무력감에서 나온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일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주변의 모든 사실과 빠른 속도로 타협한다. 몸과 기계는 나아갈 길을 찾는 눈을 따른다.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자유롭다는 우리의 느낌은 결정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극히 짧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리고 어떤 저항이나 지연이 있게 되면 우리는 이를 비스듬히 비껴 가는 반동(反動)의 계기로 이용한다.

모터사이클을 몰 때, 삶을 계속 이어 가고자 한다면 거기에 있는 것 이외에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사실(事實) 앞에서 무력하다. 무력하지만 인내력을 잃은 채 무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시는 결과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결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않는다.

 

시를 쓰는 동안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외한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인다. , 벗어 던진 신발, 그리고 머리 빗는 솔처럼, 시는 거기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 앞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세기 전 스페인 북서쪽에 있는 갈리시아인들의 마을 베탄소스(Betanzos) 이곳저곳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플로리다, 쿠바, 중앙아메리카로 이민을 떠났다. 그래서 베탄소스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내가 그리는 그림에다 계속 이 단어를 써 넣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사람은 바람을 누비듯 앞으로 나아가고, 시는 그 반대 방향에서 다가온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지나칠 때 둘 사이에 때로 함께 나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베탄소스와 같은 이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똑같은 연민의 마음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내 사랑이, 똑같은 사랑이.

Posted by 익은수박
,

권정생 선생님!^^


애국자가 없는 세상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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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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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한 뙈기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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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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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단오'에 어울릴 만한 시를 만났다!



     단오

                                   _ 곽재구


사랑하는 이여

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룻배가 사공도 없이

저 혼자 아침 햇살을 맞는 곳


지난밤

가장 아름다운 별들이

눈동자를 빛내던 신비한 여울목을

찾아 헤매었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곳으로 와요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

햇창포 꽃잎을 풀고

매화향 깊게 스민 촘촘한 참빗으로

당신의 머리칼을 소복소복 빗겨드리겠어요


그런 다음

노란 원추리꽃 한 송이를

당신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

꽂아드리지요


사랑하는 이여

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룻배가 은빛 물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곳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칼을 빗겨드리겠어요

Posted by 익은수박
,

이번 시 모임에서는 '사랑'을 노래한 시들을 만나서 데려오기로 했다.

솔직히 설레고 떨리고 전기가 오는 것은 여전하다...^^


가장 먼저, 포루그 파로흐자드 시를 골랐다. 모임에서 읽을 때는 마지막에 읽을 거다. 끌리니까!

좀 다른 시선으로 사랑을 노래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는 '진은영'의 시와 함께 읽어볼 만했다. 

다 흥미로운 시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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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부 시를 빼고, 새로운 시를 넣었다. 훨씬 좋다. 


3. 파블로 네루다의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를 또 추가한다. 다시 읽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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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_ 포루그 파로흐자드

 

오늘 밤 그대의 눈이 하늘에서

내 시에 별을 쏟아낸다

종이의 흰 침묵 속에

불꽃을 심는 나의 다섯 손가락

 

열정에 들뜬 나의 미친 시는

욕망의 상처가 부끄러워

또다시 자신의 단어들을 불태운다

불꽃의 끝없는 갈증

 

그렇다, 사랑의 시작이다

비록 그 길의 끝이 보이지 않아도

다시는 그 끝을 생각하지 않으리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기에

 

왜 어둠을 두려워하는가

밤이 빛의 조각들로 가득한데

그 밤이 스쳐 지나가는 자리에

재스민 꽃 어지러운 향기 머물러 있는데

 

, 그대로 두어라, 내가 영원히 그대 안에서 헤매도록

누구도 내 흔적을 다시는 찾지 못하도록

그대의 비 묻은 한숨과 타오르는 영혼이

내 노래의 온몸으로 퍼져 나가도록

, 그대로 두어라, 이 열린 창을 통해

꿈의 포근한 날개 속에서 잠든 채

여러 날을 함께 여행하여

세상 끝으로 도망치도록

 

그대는 아는가, 내 삶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그대가 되리라, 그대가

영혼의 그림자까지 그대

삶이 수천 번 반복된다 해도 또다시 그대다, 또다시 그대

 

내 안에 숨어 있는 것, 그것은 바다

숨길 수 없는 비밀의 파도

그대에게 그 폭풍의 분노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나를 당신으로 넘쳐나게 하고 싶다

사막으로 걸어가고 싶다

산돌로 머리를 다듬고

파도에 몸을 문지르고 싶다

 

이제 나를 당신으로 넘쳐나게 하고 싶다

그대가 신기루처럼 내 안에서 부서지기 전에

그대 환영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그대 그림자까지 붙잡고 싶다

 

그렇다, 사랑의 시작이다

비록 그 길의 끝이 보이지 않아도

다시는 그 끝을 생각하지 않으리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기에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_파블로 네루다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들을.

 

예컨대 이렇게 쓴다 "밤은 별들 총총하고

별들은 푸르고 멀리서 떨고 있다"

 

밤바람은 공중에서 선회하며 노래한다.

 

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때로는 나를 사랑했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끝없는 하늘 아래서 나는 연거푸 그녀와 키스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때때로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누가 그녀의 그 크고 조용한 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

이제 그녀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잃었다는 느낌에 잠겨.

 

광막한 밤을 듣거니, 그녀 없어 더욱 광막하구나.

그리고 시가 영혼에 떨어진다 목장에 내리는 이슬처럼.

 

내 사랑이 그녀를 붙잡아 놓지 못한 게 뭐 어떠랴.

밤은 별들 총총하고 그녀는 내 옆에 없다.

 

그게 전부다. 멀리서 누가 노래하고 있다. 멀리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은 게 못마땅하다.

 

내 눈길은 그녀를 가까이 끌어 오려는 듯이 그녀를 찾는다.

내 가슴은 그녀를 찾고, 그녀는 내 곁에 없다.

 

같은 밤이 같은 나무를 희게 물들인다.

그때의 우리, 이제는 똑같지 않다.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나는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던가.

내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가서 닿을 바람을 찾기도 했다.

 

다른 사람 거. 그녀는 다른 사람 게 되겠지. 내가 키스하기 전의 그녀처럼.

그녀의 목소리, 그 빛나는 몸. 그 무한한 두 눈.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렇게도 길다.

 

이윽고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으므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은 게 못마땅하다.

 

비록 이게 그녀가 나한테 주는 마지막 고통일지라도

그리고 이게 그녀를 위해 쓰는 내 마지막 시일지라도.







사랑이 나가다

 

_ 이문재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의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을 놓치면

오늘을 붙잡지 못한다

나를 붙잡지 못한다



 


 

낙 서

 

_ 박준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

 

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

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넣다 말고

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몇 번을 더 버티다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조미료 통을 닫았고요

 

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

저를 계속 보아오던 두 사람도

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

 

휴지로 입을 닦다 말고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잔득 낙서해놓은 분식집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조그많게 적어놓았습니다

 

 

 

 

물빛 1

 

_ 마종기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 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 보면, 결국에는

욕심을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주세요.

내 속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 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져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없다면

 

_ 미겔 에르난데스

 

그대의 눈이 없다면 내 눈은 눈이 아닙니다

외로운 두 개의 개미집일 따름입니다

그대의 손이 없다면 내 손은

다만 고약한 가시다발일 뿐입니다

 

달콤한 종소리로 나를 가득 채우는

그대의 붉은 입술이 없다면

내 입술도 없습니다

그대가 없다면 나의 마음은

엉겅퀴 우거지고 회향잎마저 시드는

고난의 길입니다

 

그대 음성이 들리지 않는 내 귀는

어찌 될까요?

그대의 별이 없다면

나는 어느 곳을 향해 떠돌까요?

그대의 대꾸 없음에

내 목소리는 자꾸 약해집니다

바람결에 묻어오는 그대의 냄새를 좇아

잊혀진 그대의 흔적을 더듬어 봅니다

사랑은 그대에게서 시작되어

나에게서 끝납니다

 

Posted by 익은수박
,

지난 주에는 '바람'을 노래한 시를 나누었다.

바람... 어찌 보면 우울과 번민과 아픔을 시원하게 날려줄 같다가도

현재를, 기쁨을, 신남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것 같은 그런 바람.

아니면 저 멀리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전해줄 메신저이거나.

뭐, 그런 '바람'을 

암튼 '바람'에는 참 많은 바람이 담겨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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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_ 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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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_ 포루그 파로흐자드

 

나의 작은 밤 안에,

바람은 나뭇잎들과 밀회를 즐기네

나의 작은 밤 안에

적막한 두려움이 있어

 

들어 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나는 이방인처럼 이 행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절망에 중독되어 간다

 

들어 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지금 이 순간, 이 밤 안에

무엇인가 지나간다

그것은 고요에 이르지 못하는 붉은 달

끊임없이 추락의 공포에 떨며 지붕에 걸쳐 있다

조문객 행렬처럼 몰려드는 구름은

폭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 순간

그 다음엔 무

밤은 창 너머에서 소멸하고

대지는 또다시 숨을 멈추었다

이 창 너머 낯선 누군가가

그대와 나를 향하고 있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른 이여

불타는 기억처럼 그대의 손을

내 손에 얹어 달라

그대를 사랑하는 이 손에

생의 열기로 가득한 그대 입술을

사랑에 번민하는 내 입술의 애무에 맡겨 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 잘 날 없어라

 

_ 박노해

 

바람 잘 날 없어라

내 생의 길에

온 둥치가 흔들리고

뿌리마다 사무치고

 

아 언제나 그치나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싸워야 하나

 

바람 잘 날 없어라

울지 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 아픔 속에 외로움 속에

푸르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추풍에 부치는 노래

 

_ 노천명

 

가을바람이 우수수 불어옵니다

신이 몰아오는 비인 마차 소리가 들립니다

웬일입니까

내 가슴이 써늘하게 샅샅이 얼어듭니다

 

인생은 짧다고 실없이 옮겨 본 노릇이

오늘 아침 이 말은 내 가슴에다

화살처럼 와서 박혔습니다

나는 아파서 몸을 추설 수가 없습니다

 

환혼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섭니다

하루하루가 금싸라기 같은 날들입니다

어쩌면 청춘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습니까

연인들이여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은 듯이 지나 버리는 생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꽃밭을 그대 만나거든

마음대로 앉아 노니다 가시오

남이야 뭐라든 상관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밤을 도와 하게 하시오

총기(聰氣)는 늘 지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금싸라기 같은 날들이 하루하루 없어집니다

이것을 잠가 둘 상아 궤짝도 아무것도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낙엽이 내 창을 두드립니다

차 시간을 놓친 손님 모양 당황합니다

어쩌자고 신은 오늘이사 내게

청춘을 이렇든 찬란하게 펴 보이십니까



(친일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작품만으로 감상해 보고자 한다.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쓴 시)





바람만이 아는 대답

 

_ 밥 딜런

 

사람은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만

사람다워질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모래밭에서 편안히 쉴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포탄이 터져야만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끝날까?

친구여, 묻지 말아요

오직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 가야만

산이 씻겨 바다로 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 가야만

사람들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얼마나 더 외면을 하고

보지 못한 척할 수 있을까?

친구여, 묻지 말아요

오직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얼마나 더 많이 고개를 들어야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귀를 가져야

세상 사람들의 울음을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묻지 말아요

오직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바람이 불어오는 곳

 

_ 김광석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에 보았던 그 길 그 길에 서 있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햇살이 눈부신 곳 그곳으로 가네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그곳으로 가네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려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햇살이 웃고 있는 곳 그곳으로 가네

 

나뭇잎이 손짓하는 곳 그곳으로 가네

휘파람 불며 걷다가 너를 생각해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 볼 수는 없지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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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시시한 다방'이 있다. 김사인 시인이 진행을 하는 팟캐스트다.

그의 목소리가 참 좋았다.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시를 읽어주는 데 딱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제 진행을 그만두신단다.

마지막 진행 때는 손님으로 나왔는데, 이때 진행자가 김사인 시인이 2006년 대산문학상을 받았을 때

소감을 읽어주었다.

이 방송을 들은 한 벗이 그것을 손수 적었단다.

흘러가는 소리로 듣는 것과 새겨진 글씨로 읽는 것은 참 다르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도 여기 새겨두고자...^^


옛날 '노동해방문학'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걸 이 분이 만드셨더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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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중히 여기는 우리 말 중에 '섬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을 입 안에서 굴려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좀 더 순해지고 맑아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외람되지만, 저는 제 시 쓰기가 적으나마 세상의 목숨들을 섬기는 한 노릇에 해당하기를 조심스레 빌고 있습니다. 섬김의 따뜻하고 순결한 수동성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어떤 간곡함이 제 시 쓰기이 내용이자 형식이기를 소망합니다.


저의 시가, 제 말을 하는 데 바쁜 시이기보다 묵묵히 기다리는 시이기를, 할 말을 잘하는 시인 것도 좋지만, 침묵해야 할 때에 침묵할 줄 아는 시이기를 먼저 바랍니다. 저의 시가 이기는 시이기보다 지는 시이기를 바랍니다. 맑고 드높은 웃음도 아름답지만, 영혼은 언제나 설움과 쓰디쓴 쪽에서 더 온전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감히 그들을 위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비 맞는 풀과 나무들 곁에서 함께 비 맞고 서 있기로서 저의 시 쓰기를 삼고자 합니다. 우산을 구해 오는 일만 능사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겠습니다. 그 찬비 맞음에 외로움과 슬픈 평화를 마음 다해 예배하겠습니다. 그 곁에 서서 함께 비 맞음의 극진함으로써 제 몫의 우산을 삼겠습니다. 그것으로서 저의 리얼리즘을 삼고, 전복적 글쓰기를 삼고, 할 수만 있다면 저의 생태적 상상력과 저의 페미니즘을 삼을 수 있기 바라겠습니다. 이 소망이 과한 것이라면 부디 저의 시 쓰기가 누군가를 사하게 하는 노릇만이라도 아닐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강구하겠습니다. 


풀과 돌의 이름을, 거기 그렇게 있는 그들의 참다움을 내 시를 꾸미려고 앗아오지 않겠습니다. 지어낸 억지 이름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제 이름을  꽃피울 때를 오래 기다리겠습니다. 그들이 열어 허락한 만큼만을 저의 시로서 받들겠습니다. 그리하여 큰 수행이자 큰 과학이자 큰 예배로서 저에게 시 쓰기가 오래도록 다함이 없기를 기원할 따름입니다.


                                                                                                        - 시 쓰는 김사인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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