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이들에게 부모가 살아온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부모 대개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여긴다. 아이들이 가여울 수밖에 없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어떨까? 조급해하지 말고.... 말처럼 쉽지 않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이 글을 읽고 기본소득과 교육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다면 좋겠다.



[제정임의 문답쇼, 힘] ③ 김대식 교수 “다가온 인공지능시대··· 기계처럼 일한다면, 당신은 위험하다”


뇌과학자인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김대식(47) 교수는 인간의 정신노동을 대신하는 인공지능이 곧 대부분의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며 “지금 기계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창의성 있는 인간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인공지능시대를 맞아 교육, 복지, 조세 등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며 “아무것도 안 하면 자동으로 디스토피아(지옥)로 가는 것이고 유토피아(천국)를 만들려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4월 7일 SBS CNBC에서 방영된 <제정임의 문답쇼, 힘>에 출연해 이같이 밝혔다. 다음은 이날 방송의 주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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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SBSCNBC <제정임의 문답쇼, 힘>에 출연한 뇌과학자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가 인공지능이 가져올 교육, 사회, 경제 등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SBSCNBC



■인간의 뇌를 모방하는 인공지능 연구

제정임(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교수님은 뇌과학을 연구하시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학문인데, 뇌과학이란 어떤 연구인가요?

김대식(카이스트 전기ㆍ전자공학과 교수): 우리가 뇌를 연구할 수 있는 분야는 첫 번째로 뇌를 생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사들이 뇌 질병이나 자폐증·치매 등을 연구하는 상당히 중요한 분야죠. 두 번째는 인지 뇌과학입니다. 약간 심리학적 개념으로 ‘도대체 생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걸까’, ‘머리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왜 우린 이런 상황에서 이런 판단을 하는 걸까’라는 것을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세 번째 분야는 약간 공학적인 개념입니다. 뇌는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자아를 만들 수 있고,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잖아요. 우리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성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예제, 생각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뇌를 모방해서, 또는 거꾸로 역공학해서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뇌 공학, 또는 인공지능 분야입니다. 제 연구 분야는 뇌공학과 인지 뇌과학 정도입니다.

제: 그런데 얼핏 생각하면 우리의 뇌는 단백질 덩어리고 컴퓨터의 CPU(중앙처리장치)는 실리콘, 여러 가지 금속, 플라스틱인데 어떤 원리가 비슷할까요? 인간의 뇌와 인공지능의 작동원리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궁금해요.

김: 뇌를 복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뇌는 말씀하신 대로 단백질이고 그 안에 신경세포가 10의 11승이 있고, 또 10의 15승 되는 연결성을 가지고 있고, 정말 무한으로 복잡한 기계인거죠. 이것을 복사하는 방법은 아무도 모릅니다. 뇌를 복사하기 위해서는 그냥 아이를 가지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뇌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가장 잘하는 것, 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모방하는 것이죠.

■뇌 과학자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의 의미

제: 교수님이 쓰신 여러 가지 글을 보면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삶은 왜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셨어요. 뇌 과학자인데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김: 네.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제가 그러면 되묻습니다. 본래 그런 질문이 과학자가 해야 할 질문이 아니냐고요. 현대 과학의 시작은 어떻게 보면 3000년 전의 그리스겠죠. 수염 난 할아버지들이 하얀 수건 같은 것을 두르고 지중해 바닷가에 누워서 하늘을 보신 거잖아요. 은하수부터 시작해서 초롱초롱한 별들을 보면서 너무 궁금했겠죠. 도대체 저게 뭘까. 그리고 드디어 이분들이 종교나 전설이 아니고 논리와 이성을 사용해서 세상을 이해해보자고 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신 거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안 풀리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분들이 조금씩 방법론적으로 나뉘기 시작한 거죠. 어떤 분들은 수학을 사용해야 된다, 어떤 분들은 실험을 해야 한다, 어떤 분들은 시를 쓰자, 어떤 분들은 그림을 그리자, 어떤 분들을 철학을 해야 한다. 결국은 저희가 지금 알고 있는 철학, 문학, 예술, 수학, 과학은 사실 인간의 동일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죠.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노력이요. 이해하는 방법이 다양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지능, 또는 뇌에 대해서 연구할 때는 수학이나 코딩 등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요. 뇌라는 것이 지구에서 상당히 특별한 인간이라는 동물을 가능하게 하고, 더 재미있는 건 뇌에 대해서 생각하는 나 자신도 뇌 덕분에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철학적인 질문을 배제하고서는 이런 (과학적인) 질문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제: 철학자의 질문을 던지고 과학자의 답을 얻는 것이군요.

김대식 교수는 철학적 질문을 하지 않으면 과학적인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제: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 알파고 간의 세기의 대결이 벌어져서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는데요. 하필이면 대한민국 서울에서 벌어지는 바람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잘 몰랐던 인공지능에 대해서, 인공지능이 불러올 사회변화에 대해서 엄청난 각성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 분야를 전공하신 김대식 교수님은 이번 대국을 어떻게 보셨나요?

■‘이세돌 승리’ 확신은 기계를 몰랐던 인간의 실수

김: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세돌 9단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세돌 9단이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해서요. 하필이면 중요한 21세기, 2016년 3월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국이 서울에서 벌어졌어요. 딥마인드에서 3월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당연히 이세돌 9단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문 칼럼에도 썼고, 인터뷰도 했고요.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공지능 전문가, 바둑 전문가는 물론 이세돌 9단께서도 본인이 이긴다고 했죠. 

우리가 왜 이런 예측을 하게 됐을까. 알파고는 인간을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수십만 번 사람들이 둔 바둑 기보를 가지고 학습했잖아요. 그런데 거꾸로 우리는 기계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네이처지 논문에 나온 내용과 2015년에 알파고가 유럽챔피언 판후이하고 뒀던 바둑기보예요. 모든 전문가는 판후이가 프로급으로 1단 정도 할 것 같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파고도 당시에 그렇게 잘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냥 판후이보다 조금 더 잘했죠. 많은 분들이 이세돌은 9단이고, 알파고는 한 3단 정도다, 작년 10월부터 올해 대국까지 약 6개월이 있는데 알파고가 진화하더라도 5단~6단이다, 아무리 잘하더라도 7~8단이지 9단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죠. 3월 9일 첫 대국에서는 사실 이세돌 9단이 그렇게 잘하지 못했을 거예요. 긴장했겠죠. 그런데 알파고가 조금 더 잘했습니다. 2국에서는 이세돌 9단이 상당히 잘했습니다. 그런데 알파고가 또 조금 더 잘한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약간 섬뜩한 결론을 하나 낼 수 있는데요. 어쩌면 알파고의 진정한 능력을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알파고는 인간이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얘는 본인이 딱 이길 만큼만 잘한다는 거죠. 판후이하고 할 때는 판후이보다 조금 더 잘하고, 못하는 이세돌과 할 때는 못하는 이세돌보다 조금 더 잘하고, 잘하는 이세돌과 할 때는 그보다 조금 더 잘하는 거죠. 마치 우사인 볼트가 초등학생하고 달리기할 때 초등학생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달리고, 고등학생하고 할 때는 고등학생보다 좀 더 빠르게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결론은 우리가 알파고의 진정한 능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승리를 예측했다는 겁니다.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대국을 할 때, 기계라는 것을 모르고 봤다면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얘기했을 것 같아요. 인간 중 가장 천재적인 기사라고 착각을 했을 겁니다. 결론은 뭐냐면 이번 알파고와의 대국을 통해서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약한 인공지능(독립성과 자의식은 없는 인공지능)은 우리가 잘하면 천국 같은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고 우리가 못하면 지옥 같은 디스토피아도 될 수 있습니다. 단, 우리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일 때 얘깁니다. 강한 인공지능(독립성과 자의식이 있는 인공지능)은 인간이 더 이상 컨트롤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을 넘어 인공지능 시대에는 기계가 못하는 영역의 개척이 필요하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제: IBM은 왓슨(인공지능컴퓨터)을 의료 쪽으로 발전시켜서 암 진단에도 응용을 하고 있다고 해요. 그렇다면 구글은 알파고를 앞으로 어느 쪽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전망하세요?

김: 우선 알려진 것으로는 딥마인드에서 올해 초부터 영국 의료보험이죠, NHS(National health Service)와 함께 의료 데이터를 진단용으로 활용한다고 합니다. IBM하고 동일한 비즈니스 모델이죠. IBM하고 구글이 최고의 경쟁사가 되겠죠. 이번에 딥마인드의 경우 바둑을 마스터했고, 작년에는 벽돌 깨기 비디오게임을 마스터했고, 작년 인터뷰를 보면 스타크래프트 대결도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데요. 구글 같은 회사가 딥마인드를 인수하는데 천문학적인 돈, 4천억 이상을 투자해놓고 비디오 게임 잘하는 회사로 키우고 싶어 하진 않을 겁니다. 구글이 바둑소프트는 만들지는 않을 것이고, 뭔가로 돈을 벌려고 하겠죠. 다양한 시나리오가 가능하겠지만 소문을 들어보면요, 이번에 알파고 같은 비슷한 알고리즘으로 월스트리트 최고 투자자의 뇌를 한번 분석, 적용해보자는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우리가 워렌 버핏에게 어떻게 투자를 이렇게 잘 하느냐고 질문할 수 있겠죠. 하지만 워렌 버핏은 말로 답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왜냐면 대부분 직관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투자의 비법이 표현만 된다면, 그 데이터를 구글이 얻을 수 있다면 10년, 20년 내에 월스트리트 최고의 투자자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아시다시피 이런 분야를 요새 로보 어드바이저라고 부르는데요. 사실 이미 웬만한 사람보다 좋은 결과를 내고 있습니다. 로열뱅크 오브 스코틀랜드(RBS)에서는 사람들 다 내쫓고 기계로 바꾸겠다고 결론을 냈고요. 성과가 더 좋으니까요. 아직 이분들은 딥러닝 같은 최고 발달한 기술을 쓰지도 않았는데도 그런 성과가 난다면, 알파고와 같은 기술을 도입할 경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겠죠.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인간적’이어야

제: 인공지능이 폭넓게 도입이 될 경우 인류가 안고 있는 난제 중 먼저 해결될 수 있다고 기대할 만한 분야가 뭘까요.

김: 상당히 많은 질병의 치료 방법을 기계가 만들어 줄 수 있고요. 무한 에너지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토피아 책에서 봤던 것처럼 인공지능이 제대로만 활용되고, 그 생산성의 결과물만 합리적으로 재분배된다고 전제하면 국민소득 평균 3만 달러가 30만 달러, 300만 달러가 되지 못하라는 자연의 법칙은 없습니다. 이것이 유토피아인 거죠. 문제는 우리 인간도 결국은 몸 아니면 머리를 사용한다는 거예요. 이제까지 몸을 사용해서 하는 일들은 기계한테 넘겨주고 우리는 머리를 사용하는 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머리를 사용하는 일마저 기계한테 넘겨주면 인간이 갈 데가 없다는 거죠. 물론 새로운 직업들 많이 만들어질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인공지능 알파고를 예쁘게 꾸며주는 기계 미용사가 나올 수도 있고. 가상현실 작가가 나올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일자리를 다 합쳐도 사라지는 일자리를 대체하기에는 모자라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대부분의 직업들, 특히 우리가 얘기하는 화이트칼라 직업들이 위험해집니다. 1차, 2차 산업혁명 땐 블루칼라 직업들이 위험해졌잖아요. 물론 안전한 직업들도 있습니다. 안전한 직업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기업이나 사회 또는 조직에서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해야 되는 직업입니다. 왜냐면 그분들은 책임을 져야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요즘 우리가 비행기를 타면 90%의 시간은 컴퓨터가 조종을 합니다. 오토파일럿으로요. 하지만 여전히 파일럿은 필요합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되니까요. 만약 우리가 비행기를 탔는데 “재미있게도 오늘은 파일럿이 안 탔다. 알파고 파일럿이 열심히 조종하고 있다”고 방송이 나오면 난리가 나겠죠. 그런 건 불가능할 겁니다.

두 번째는 인간을 이해하는 행위가 필요한 직업입니다. 교육 관련 직업이 많이 해당되고요. 특히 아동교육이요. 또 협상, 광고, 영업, 심리치료사, 예술가와 같은 사람의 심리를 이해해야 하는 직업도 다 그쪽에 들어가겠죠. 인간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가장 크면서도 가장 애매모호한 영역인데요. 창의성이 필요한 직업, 지적인 노동이 있지만 매번 무언가를 새로 해야 되므로 반복성이 없는 직업입니다. 결론은 뭐냐 하면 인공지능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분석해야 할 것은 내가 지금 하는 일에 얼마만큼 반복성이 있고 내가 얼마만큼 기계화됐나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생각했을 때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나는 이미 반은 기계다, 그때는 많이 위험하거든요. 그렇다면 다시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오셔야 됩니다.

제: 기계가 할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해야 되는 군요.

김: 우리가 기계하고 경쟁할 때, 인간이 아무리 기계 흉내를 내더라도 더 좋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인간적이어야 되겠죠. 모든 기술이 그렇지만 특히 인공지능은 우리가 잘만 활용하면 유토피아고 잘못하면 디스토피아입니다. 근데 이거는 좀 기억해야 될 것 같아요. 역사에서도 항상 그랬지만, 천국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아주 쉬워요. 그게 항상 문제인거죠. 우리가 편하게 아무것도 안 하면 100% 지옥으로 갈 겁니다. 자동으로 가는 길은 지옥이고 디스토피아예요. 유토피아나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을 넘어 인공지능 시대에는 기계가 못하는 영역의 개척이 필요하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국·영·수에 치중한 교육시스템 전면적 개혁 필요

제: 교육이 좀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지금처럼 국·영·수 잘하게 키우는 거로는 불충분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너무 막연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문제를 이미 한 번 풀어봤거든요. 1차·2차 산업혁명 때요. 18세기, 19세기에 수많은 폭동과 전쟁이 있었죠. 어떻게 보면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도 1차 기계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피엔딩으로 왔을까요. 19세기에 있었던 혁신적인 발전 덕분입니다. 크게 3가지 혁신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첫 번째는 프랑스에서 공교육이 시작된 것입니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이 문맹이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농부의 자식들이 공장이나 회사에서 일하려면 적어도 글을 읽고 써야 했고, 웬만큼 수학을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게 바로 국·영·수의 시작입니다. 당시에는 상상을 초월한 혁신이었습니다. 그때의 기계들은 지적인 노동을 못했잖아요. 모든 프랑스 국민에게 삽질을 더 빨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줘도 불도저가 나오면 끝인 거예요. 그래서 기계가 못 하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겁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으로 아주 보수적이었던 독일의 비스마르크 수상이 사회보장제도를 만드신 거예요. 안 하면 폭동이 일어날 테니까요. 그래서 사회보장제도로 노후대책, 의료보험, 실업자 연금 같은 걸 만드신 거죠. 마지막으론 영국에서 세금제도를 바꿨습니다. 그전까지 국가 대부분의 소득은 농업을 통해서 왔는데, 농업이 없어지고 공장이 생기니까 부가가치세라는 게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우리도 비슷한 걸 또 한 번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교육이에요. 2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18세기 초 나폴레옹 때 만들어진 공교육을 갖고 있어요. 국·영·수죠. 문제는 지금 10대들이 20년 후에 노동시장에 들어갈 때, 다른 건 몰라도 기계가 인간보다 국·영·수를 100% 더 잘 할 거라는 겁니다. 따라서 저희가 이 시점에 국·영·수를 가르치는 것은 200년 전 프랑스 국민에게 삽질하는 걸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기계가 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야 되겠죠.

두 번째로 사회보장제도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비스마르크시대에는 100% 일을 하고 사람들이 60~65살까지만 산다는 전제에 만들어진 시스템인데요, 50%만 일을 하고 100살까지 살 때는 안 됩니다. 직업이 더 많이 생기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50% 정도는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일자리가 없습니다. 어쨌든 이분들한테도 소득이 있어야 하잖아요. 소비자니까요. 알파고가 제일 못 하는 것 중 하나가 소비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소비를 해야 하니까, 소비하는 능력에 대해 우리가 소득을 줘도 되겠죠. 물론 내가 자아실현을 하지 않고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비하는 것만으로 소득을 받는다면 노예근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 소득만큼은 보장해야 한다는 거죠. 이 기본소득은 유럽에서 쓰는 단어고 미국에서는 역소득세인데 똑같은 얘기예요.

제: 최저한도의 소비 수준을 유지시켜줄 만큼은 주자는 거죠?

김: 사회에서 소비가 필요하니까요. 그렇다면 소비를 유도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만들어줘야 된다는 거예요.

제: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일자리를 나눠서 모든 개인이 일을 통해 자아실현 할 수 있는 길은 열어 줘야 된다는 거죠?

김: 그렇죠. 근데 여기서 얘기하는 일이라는 게 기존의 일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일이 직접 사회에 생산성을 늘리는 일은 아니고, 가상직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인공지능시대 같은 식으로 많은 분들은 기본소득만 있으면 되겠다고 하는데, 이미 그런 사회가 있습니다. 미국의 노스다코타 같은 경우는 미국 원주민들이 사는 도시가 있어요. 인디언들의 땅을 뺏은 미국이 죄책감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기본월급을 주고, 모든 의료혜택과 교육이 무료입니다.

제: 먹고 살수는 있도록 해주는 거죠.

김: 그렇다면 이분들이 시를 쓰고 철학을 할까요? 아니요. 미국에서 알코올 중독률이 가장 높습니다. 마약 중독률도 가장 높고요. 그래서 이 경우는 적절한 답이 아닌 것 같고요. 프랑스에서 생각하고 있는 건 가상회사를 만들어서 일자리가 없는 분들을 거기서 트레이닝 시켜줍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게요. 그리고 이분들은 트레이닝을 받고 가상으로 일도 하세요.

제: 사실 지금 우리 경제상황을 생각해보면 참 먼 얘기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급식 같은 것으로도 싸우고 있는 나라니까요. 하지만 그런 토론의 논지, 근거, 아이디어와 같은 것들을 우리가 주목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사회의 큰 흐름 이해할 수 있게 아이들 가르쳐야 

김: 이게 사이언스 픽션(공상과학) 아니냐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특이점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의 특징, 특히 인공지능의 특징은 상당히 오랜 기간 또한 천천히 발전하다가 어느 한순간부터 급격하게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을 합니다. 이 시점을 특이점, ‘싱귤러리티(singularity)’라고 부르는데요, 이날이 온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11월 추수감사절에 식구들이 다 모여서 칠면조를 먹잖아요. 11월 25일에 칠면조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칠면조 중 아인슈타인이 과거의 데이터를 가지고 한 번 분석을 해보는 거예요. 보니까 1년 동안 농부가 아침 8시에 와서 먹을 걸 줬거든요. 그 농부는 당연히 좋은 사람이고요. 11월 26일이 조금이라도 다를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

제: 그렇죠. 과거의 데이터는 항상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김: 대한민국의 미래도 우리가 지금까지 이 작은 문제들을 가지고 항상 싸웠듯이 10년, 20년 100년 계속 갈 거라는 느낌이 나겠지만요. 이 칠면조들은 11월 26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약간 기대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깜짝 놀랄 일이요. 이게 특이점의 문제라는 거죠. 어느 한순간 우리도 이런 얘기 하다가 갑자기 다른 세상에 갈 수 있다는 거고요. 노키아 같은 경우에도 망하기 일주일 전까지 노키아 10년 미래를 기획하는 태스크포스(TF)가 있었대요. 자신들도 몰랐던 거예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인공지능시대에 기본소득을 어떻게 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이게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거죠.

예측 불가능한 인공지능의 특이점(singluarity)이 단순히 터무니없는 사이언스픽션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제: (교육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 이런 답답함을 가지고 있거든요.

김: 저도 답을 모르죠. 제가 그 답을 안다면 인공지능에 대비한 대치동 학원을 하나 차려서 재벌이 되겠죠. 단 우리가 큰 예측을 해볼 수는 있겠죠. 아까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 수능 말씀하셨는데, 그럼 이걸 지금 당장 포기해야 될까. 그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할 하루 전까지 수능시험이 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지금 이 현실에 산다면 지금 하는 것은 계속 해야 됩니다. 단, 더해서 미래에 중요하다고 예측되는 것들, 코딩(프로그램방법) 같은 것을 더해야 하고요. 거기서 끝이 아니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도 준비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뭘까요. 아이들이 배워야 될 중요한 기술 중의 하나는 세상을 거시적으로 보는 겁니다. 내가 나중에 변호사가 되든 과학자가 되든 인공지능이 가져올 사회변화가 어디서 언제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미래 예측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단 언젠가는 일어날 것을 알고, 그 언젠가가 100년이 아니라는 것까지만 우리가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눈을 크게 뜨는 겁니다. 이게 알파고의 역할이었는데, 눈을 크게 뜨고, 그 크게 뜬 눈을 2주 만에 감지 말고, 계속 사회에 관심을 보여줘야 됩니다.

제: 사회의 큰 흐름에 관심을 갖고 이해를 해라, 파악을 해라, 그런 뜻이죠?

김: 그렇죠. 지금 10대한테도 신문 읽기를 가르쳐주고. 이걸 어떻게 보면 인문학적인 관점이라고도 볼 수 있고요. 사회 큰 흐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는 것을 우선 가르쳐줘야 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관심만 갖는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관심은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겠죠. 다시 말해서 평생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싶은, 공부할 수 있는, 변화는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줘야 되겠죠.

세 번째는, 이게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스킬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잔소리를 통해서 사회에 관심을 갖고 적응하는 것이 아니고 내부동기를 심어줘야 된다는 겁니다. 이건 내 인생이고 내 자아고, 내 미래이기 때문에, 내가 나의 미래를 위해서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를 발견하면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죠. 이게 제일 어렵죠. 왜냐? 내부동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가?”란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학생으로 자란다면, 내가 무엇을 원하나, 나는 누굴까 하는 질문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런 질문은 학원 2개 다니는 중간 쉬는 시간 10분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고등학교를 독일서 다니다가 고등학교가 싫다고 뛰쳐나온 거잖아요. 1년 동안을 북 이태리의 파비아 도시에서 그냥 놀았습니다. 1년 동안 놀면서 나는 뭘 원하고, 난 뭐가 좋고, 나는 누군가를 생각했죠.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왜 빛이라는 게 있을까?’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하기 시작한 거죠. 물론 여기서 1년 쉰다고 모두가 다 아인슈타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아인슈타인 되기 위해서는 ‘여유’를 가져야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얘기하는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타는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세상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져야할 능력은 창의성이에요. 너무나도 평범한 답인데, 재미있는 점은 지금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대기업에 임원으로 있으면서 창의성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창의적이지 않아도 잘 살고, 사실 창의적이지 않은 것이 먹고 사는데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미래 사회에서는 창의적이지 않으면, 또 내가 스스로 세상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으면, 내가 하는 일은 기계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정보기술발전 비해 개발 더딘 재난구조 로봇

제: 저는 과학자들에게 막연한 경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기술에 대해서 한때 냉소적인 생각이 든 적도 있었어요. 작년 재작년에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겪었잖아요. 우리가 우주에도 왔다 갔다 하는 시대에 저 선실 안에 있는 희생자를 수색하는데 저걸 제대로 해낼 로봇이 하나 없나, 기술의 진보라는 게, 재난 로봇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데 왜 그렇게 진도가 안 나갈까 실망을 했습니다. 이게 기술적으로 더 어려운건가요?

김: 훨씬 어렵습니다. 이런 것들은 저희가 의외로 못합니다. 뭔가가 움직이고 그러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전 세계의 최고 천재들이 최고의 첨단 기술을 사용하고 무한한 비용을 투자하는데도 NASA(미국항공우주국)에서도 여전히, 우주선을 띄우면 다섯 번 중 한 번은 폭발합니다. 그런가 하면 거꾸로 몸이 필요 없는 것들, 물질적이 이동이 필요 없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쉽습니다. 스마트폰, 위치확인시스템 등 정보의 역학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리 발전했습니다. 우리가 후쿠시마 재난 로봇 하나 없냐. 너무 맞는 말씀이지만, 거꾸로 우리가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을 이뤄냈죠. 이 두 가지 기술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인공지능에서도 비슷한 관점으로 터미네이터 같은 기계가 인간을 밟고 지나가는 미래는 멀어요.

데이터 공개를 꺼리는 한국은 인공지능시대를 앞서가기 어렵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데이터 공개 꺼리는 정부와 기업, 인공지능 발전 막아

제: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바이두 등은 검색엔진 회사거나, SNS 회사거나 전자상거래 데이터가 엄청 많은 회사들인데, 이들이 인공지능개발에 앞장서는 것은 빅데이터 사용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김: 네 그렇습니다. 지금 기계학습적인 인공지능을 주도하는 회사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바이두. 공통점이 하나 있죠. 그건 뭐냐면 인간의 선호도에 대한 데이터를 이미 많이 가지고 있는 회사들입니다. 이번에 알파고에서도 봤지만, 알파고도 바둑에 대한 직관을 얻기 위해서 프로 기사들의 12만개 기보를 가지고 학습을 했다는 거죠. 기계 학습은 항상 데이터가 고픕니다. 구글이나 바이두는 그런 데이터를 이미 가지고 있는 회사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어떻게 따라 잡아야 할지 고민을 해야 될 텐데, 우리나라는 두세 가지 포인트가 있어요.

첫 번째는 기술자체입니다. 이건 다 소프트웨어잖아요. 알고리즘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논문으로 나와 있고 퍼블릭 도메인(공개된 장소)이기 때문에, 몇 달 열심히 공부하면 대부분 할 수 있는 기술이에요. 문제는 두 번째, 데이터가 없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정부와 대기업도 본인들이 만들어내는 데이터조차도 다 막혀 있어요.

제: 제공을 안 한다는 거죠? 연구자들에게.

김: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드는데, 우리는 이름하고 주민번호 알겠다는 거 아니고 통계만 알고 싶은 거예요. 은행, 건강, 행정, 교통, 그 많은 데이터가 있는데 쓸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인력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총 통틀어 딥러닝 전문가가 20명이 안 될 거예요.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다시 말해서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해서 전 세계의 최고의 전문가를 키워야 된다는 겁니다. 제 개인적으로 느낌으로는, 우리나라에 인공지능 전문가 1000명만 키우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박사학위 받기 위해 5년이 걸립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당연히 접근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빨리 진행을 해야겠죠. 다시 말해서 저 같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똘똘한 젊은 친구들 1000명 정도 뽑아서 한 6개월 정도 특공대 공부를 시키겠어요.

제: 국가대표 선수로?

김: 네! 시켜서, 그런 다음에는 곳곳으로 뿌리겠어요. 기업, 국가정부, 국정원, 군대, 다 필요하죠.

다양한 경험으로 다양한 자극을 주자

제: 기계가 따라할 수 없는 인간의 경쟁력을 길러라 했는데, 이 기술의 흐름을 정말 어떻게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평범한 시청자들을 어떻게 준비하라는 말씀을 좀 해주세요.

김: 우선 미래에 대해서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인간의 뇌는 의외로 적응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인공시대에 와서 우리가 기계가 못하는 정말 창의적인 일을 해야 한다? 여기서 창의적인 일이라는 것이 대단한 게 아닙니다. 누구나 피카소가 되고 아인슈타인이 돼야 한다는 게 아이에요. 우리 모든 인간은 창의성, 즉 새로운 뭔가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나폴레옹 시대 만들어진 국·영·수 교육 덕분에 기계적인 인간으로 키워진 거죠.

반복적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다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라는 아이들한테는 이미 가지고 있는 창의력이 사라지지 못하도록 도와주면 되겠죠. 특히 5~7살 때는 뇌가 거의 스펀지 같아서 매일 새로운 단어를 수십 개 배울 수 있어요. 결국 반복된 생활에서 주말마다만 나와도 됩니다. 동물원, 이태원 가는 거예요. 인도식당 가서 손으로 밥을 먹어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 친구들한테는 엄청난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이거든요.

제: 다양한 경험으로 다양한 자극을 주는 것.

김: 그렇죠. 그렇다면 이미 뇌가 다 굳어버린 우리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 우리의 하드웨어는 이미 다 끝났기 때문에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알파고의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알파고도 처음 학습데이터를 얻은 다음에 데이터가 모자라니까 셀프시뮬레이션(self-simulation)을 했죠. 알파고와 알파고의 대결을 통해서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었죠. 이건우리 어른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뇌는 더 이상 바꿀 수 없지만, 우리 머리 안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셀프시뮬레이션을 해볼 수 있다는 겁니다. 나와 나 자신과의 토론, 나와 나 자신과의 대화 그리고 사물을 보는 것에 대한 다양한 관점·경험들을 통해서 알파고와 같은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거죠. 

자, 이 방송이 끝나자마자 우선 TV를 끄세요. 왜냐? TV는 모든 질문과 답이 한쪽 방향에서 나오기 때문에 셀프시뮬레이션이 안 됩니다. 창의성은 뇌가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본인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거죠. TV를 끄고, 휴대폰을 끄고 인생과 세상에 대한 질문을 구석에 앉아서 하시면 됩니다. 본인이 앉아있는 거실, 아님 카페에서 하셔도 됩니다. 이런 시간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지시는 게 어떻게 보면 가장 저렴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세상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 만들기입니다. 아주 쉬운 방법으로, 스스로 실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되겠죠.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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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그리고 깊게 우리와 지구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나는 어디에 있을까....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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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지금 출판계의 화두는 ‘문명史’

중력파ㆍ인공지능 잇단 조명에

‘사피엔스’ 계기로 관심 높아져

베스트셀러 ‘총 균 쇠’는 물론

‘더 타임스 세계사’ 등 인기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단연 압도적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판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특히나 눈 여겨 볼만한, 하나의 모델 같은 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26일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김영사) 인기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피엔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하라리의 ‘글빨’이다. 새로운 정보, 대담한 이론 쪽보다는 적절한 비유, 유려한 문체, 간간이 섞여 든 유머가 더 빛나는 책이다. 후일담이지만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는 ‘사피엔스’가 국내에 소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성공을 예감했다. 몇 년 전 이스라엘 방문 중 현지 미용실을 찾았는데 미용실 주인이 ‘사피엔스’를 재밌게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낮은 책이다.

‘사피엔스’를 계기로 문명사 책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빅데이터, 중력파, 인공지능(AI) 같은 얘기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인류 문명 차원에서의 호기심이 폭발하고 있어서다.

문명사라면 누가 뭐래도 1순위로 꼽히는 책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문학사상사)다. 1977년 미국에서 나왔으나 국내엔 1990년대에 소개됐다. 그 때만 해도 알음알음 알려진 수준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 서울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판매가 늘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인간의 분투보다는 환경의 차이가 역사적 차이를 낳는데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관점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30만부 정도 팔렸다.

또 손꼽히는 역작으로는 세계적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교양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사이언스북스)가 있다. 암스트롱은 신화, 이성, 문명이 폭발하던 기원전 시기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고, 핑커는 인간 마음의 진화 과정을 통찰한 뒤 문명사적 책으로는 드물게 인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고고학자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글항아리)도 빼놓을 수 없다. 문명사가 대체로 문명간 우열 도식에 빠져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동서양 문명에 별 차이가 없다’는 전제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쓴다면, 이 책은 제목에서 보듯 아예 지금 현재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까발리고 시작하는 독특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모리스는 정통 고고학자이기에 고고학 자료가 아주 풍부하다.

이외에 ‘말 바퀴 언어’(에코리브르) ‘탄소문명’(까치) ‘시간의 지도’(심산) 등이 명작으로 꼽힌다. 이런 책들은 ‘사피엔스’와 같은 대중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대개 몇 년간에 걸쳐 꾸준히 팔리면서 1만권 이상 나가는 스테디셀러로 분류된다.

이런 흐름은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100여명에 이르는 전문가들의 협업이 빛나는 ‘더 타임스 세계사’(예경), 캘리포니아 학파의 대표선수라 할 수 있는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에코리브르)가 대표적이다.

대작만 있는 건 아니다. 얇은 책으로는 인공지능을 키워드로 과학과 인문학을 합친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동아시아), 대륙 문명 베헤모스와 해양 문명 리바이어던 간 대결로 세계사를 설명한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꾸리에), 지리적 차이의 영향력에 주목한 다이아몬드의 또 다른 책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김영사) 등도 잇달아 나왔다.

‘더 타임스 세계사’를 낸 예경의 김지은 편집자는 “이런 책들은 한 권 분량으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인간 문명의 모든 장면을 다 담아냈다는 점이 매력”이라면서 “출간 초기 주문량을 따라가지 못해 책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고 말했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초창기와 달리 지금은 문명사 책이 어느 정도 소개된 단계여서 단순히 거시적 시각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책만의 독특한 시각을 전달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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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식 대화법을 활용한 토론이 디베이트를 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게 하는 것 같다.

토론, 독서는 앞으로 나의 삶에서 여러 화두 가운데 주요 화두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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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쉽게 틀리는 오답이 무엇인지 선생님이 알아야 하는 까닭

2016년 4월 18일  |  By:   |  과학  |  댓글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대해 잠깐 생각해봅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궤도를 그려보면 그 궤도가 완전한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은 아실 겁니다. 그 말인즉슨 일 년 중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일정하지 않고, 어떤 때는 지구가 태양보다 상대적으로 더 가까이 있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즉 계절이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지구의 타원 궤도 때문일까요?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버드대학교 과학교육과의 학과장이자 천문학자인 필립 새들러(Philip Sadler) 교수는 위에서 예로 든 것과 같은 “많은 사람이 틀리는 오답”에 관심이 많습니다.

“학생들의 머릿속을 백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미 학생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 나름대로 지식과 논리를 갖고 설명하려 들죠.”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또 애쓰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때 현대의 과학적 기법보다는 그리스 시대 철학자들이 했을 법한 방법론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경험, 그로 인한 제한된 지식에만 기대어 섣불리 답을 얻으려 하죠. 그래서 천동설을 주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처럼 우리는 정답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오답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게 되는 겁니다.

새들러는 한번 머릿속에 입력된 오답을 지워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인지과학을 빌려 설명합니다. 학생이 오답을 얻어내는 과정을 보고 논리적 결함을 찾지 못하거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선생님은 학생의 머릿속에 들러붙은 오답을 정답으로 바꿔놓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한번 정답이라고 믿은 무언가를 바꾼다는 건 정신적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입니다. 이런 식이죠. ‘내가 정확히 어디가 틀렸는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혹은 여전히 내가 보기엔 이게 오답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일단 교과서가, 선생님이 설명하시는 대로 믿어보겠다.’는 건 아주 큰 결단인 셈입니다.”

<미국 교육자 회보(American Educator magazine)>에 최근 쓴 글에서 새들러는 중학생들에게 객관식 과학 문제 20개를 풀게 한 결과를 소개했습니다. 문항마다 많은 사람이 흔히 정답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오답인 함정이 숨어있었습니다. 정답보다 오히려 더 유명한 오답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풀어보세요)

  • 여기 양초 하나가 타고 있습니다. 초가 모두 탄 뒤에, 이를 지켜본 에릭은 원래는 고체 상태였던 밀랍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에릭이 제시한 가설 가운데 어떤 가설이 사실일까요?

보기 1번은 “밀랍이 모두 보이지 않는 기체로 기화됐다.”는 설명이었고, 4번은 “모든 밀랍이 녹아 촛농이 되어 촛대 밑부분으로 흘러내렸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정답은 1번입니다. 하지만 문제를 푼 학생 가운데 17%만 정답을 맞혔습니다. 반면 오답인 4번을 고른 학생은 59%나 됐습니다.

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같은 문제를 주었습니다. 선생님들에게는 문제를 푸는 일 외에 학생들이 자주 틀리는 오답이 무언지 알고 있는지도 함께 물었습니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85%가 정답을 맞혔으니까요. 하지만 학생들의 약점에 대해서는 모르는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4번 보기에 학생들이 취약하다고 골라낸 선생님은 41%에 그쳤습니다.

그해 말에 학생들에게 다시 과학 시험을 치렀는데, 학생들이 자주 틀리는 오답에 대해 알고 있는 선생님들에게 배운 학생들의 과학 성적이 훨씬 더 많이 올랐습니다.

오답을 잘 아는 건 학생들 가르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을 설득해야 할까요?

새들러는 소크라테스식 교육법을 먼저 꼽습니다. 즉, 학생들과 문답을 주고받으며, 학생들에게 직접 소리 내 논리를 설명하게 시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선생님이 앞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특히 학생들의 오답을 바로잡는 데는 훨씬 효과적이라는 게 새들러의 설명입니다.

“중요한 주제를 찾아내는 선생님보다도 오히려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내는 선생님이 더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다음 단계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주고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고 정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새들러와 동료들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개설했던 천문학 강좌를 예로 들어보죠. 새들러는 학생들에게 같은 망원경으로 같은 위치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촬영한 태양 사진을 비교해보도록 했습니다. (여름이 더운 이유가 태양이 지구에서 가깝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많은 학생이 여름에 촬영한 태양의 크기가 가장 클 거라 예상합니다. 하지만 직접 자를 대고 사진 속 태양의 크기를 재보면, 정반대로 태양이 가장 큰 건 1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올해 태양이 지구와 가장 가까웠던 근일점(perihelion)은 1월 2일이었습니다)

“타원 궤도를 토대로 유추해낸 그럴싸한 상식이 사실은 오답이었음을 빼도 박도 못하게 각인시키는 거죠.”

참고로 계절이 있는 이유는 타원 궤도 때문이 아니라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N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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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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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인드라망 소식지에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반GMO 생명연대'라는 곳을 찾았다.

덕분에 GMO 공부를 좀 하게 되었다. 

취재 인터뷰에서 일부러 GMO 찬성의 입장에서 써놓은 글들을 중심으로 질문을 던졌는데, 사이다 같은 시원한 답을 듣지는 못해서 아쉬웠다. 그래서 자료를 보고 찾고 하면서 공부해서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아래 자료도 좀 일찍 봤더라면 더 참고가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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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O 진실 혹은 거짓
[살림이야기] GMO쌀 상용화 반대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는 '생명공학기술을 이용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유전적 형질(DNA)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만든 생명체'로 정의할 수 있다. 이미 우리 농업과 식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데도 일상생활에서는 체감하기 어렵다. GMO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자.

유전자 '변형', '재조합' 또는 '조작'

한국 법률에서는 GMO를 '유전자변형'과 '유전자재조합'이라는 용어로 쓰고 있다. '유전자변형생물체'(유전자변형생물체의 국가 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 '유전자변형농수산물'(농수산물 품질관리법, 양곡관리법), '유전자재조합식품'(식품위생법) 등이다. 한편,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성질'을 '인위적으로 바꾼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유전자조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GMO를 LMO(Living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자체 생물이 생식·번식 가능한 것으로 기존 GMO에 '살아 있음(Living)'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전혀 다른 종의 유전자를 결합해 만든다 

농작물을 자연적으로 교배시키는 등으로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것을 '육종'이라고 한다. 방울토마토, 슈퍼옥수수, 씨 없는 수박, 통일벼 등이 이에 속한다. GMO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작물을 개량한다는 측면에서 GMO 또한 전통적인 육종기술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종이나 아주 가까운 종만을 대상으로 하는 육종과 달리 GMO는 자연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세균, 바이러스, 다른 식물이나 동물에서 추출한 유전자가 관계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살림이야기 

 
 

제초제에 견디고 해충도 이긴다고? 

① 제초제 저항성 GMO 

가장 강력한 제초제는 글리포세이트 계열로, 식물에 대한 독성이 강해서 잡초뿐 아니라 농작물까지 위협하기 때문에 '식물 전멸 제초제'라고도 불린다. 기업들은 글리포세이트 계열 제초제를 뿌려도 죽지 않는 GMO 종자를 개발했다. 콩이 대표적으로, 글리포세이트 계열 제초제 '라운드업'을 가장 먼저 개발한 다국적종자기업 몬산토에서 이 제초제에 내성을 가진 GMO 종자 '라운드업레디'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 한편 지난 3월 세계보건기구는 글리포세이트 성분을 발암성 물질 2A 등급으로 분류해 발표했다.

제초제를 한두 번만 뿌리면 잡초만 죽고 작물은 죽지 않아 노동력과 생산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기업의 주장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제초제를 쓰다 보면 잡초도 내성을 가지게 되고, 결국 제초제 사용량은 늘어나게 된다. 또 제초제와 종자를 함께 써야만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기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② 해충 저항성(살충성) GMO  

땅속에 사는 '바실리우스 투린지엔시스(Bt)'라는 균에 살충제 효과가 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이 균에서 살충성을 지닌 유전자만을 뽑아내어 GMO 종자를 만들었는데, 면화와 옥수수가 대표적이다. 해충 저항성GMO가 인체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균이 오랫동안 유기농가에서 사용돼 왔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균을 활용하는 것과 농작물 자체가 살충성을 지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또 특정 곤충에만 효과가 있으므로 다른 곤충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살충제를 뿌려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해충 저항성 GMO를 피하는 곤충들이 다른 농지로 이동해 해를 끼치지 않도록 농지의 10% 이상을 '곤충들의 피난처'로 만들어야 해서 농지이용률은 더 떨어지게 된다. 

콩·옥수수·면화·유채가 대표적 

2014년 현재 전 세계 28개국에서 GM작물이 재배되는데 콩, 옥수수, 면화, 유채(카놀라)가 주류를 이룬다. 2013년 기준 GM콩은 전 세계 콩 재배면적의 79%인 8450만 헥타르(ha)에서 재배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하여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대규모 영농으로 콩을 수출하는 나라들이 GM콩을 재배하기 때문이다. GM옥수수는 전체 재배면적의 32%인 5740만 ha, GM면화는 70%, GM유채는 24%에서 재배되고 있다. 한편 전 세계적 주곡인 밀은 GMO가 없다. 몬산토는 2002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GM밀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승인요청서를 정부의 해당 기관에 제출했으나 농민들과 시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사업 진행을 중단했다. 반면 한국 정부(농촌진흥청)는 지난 9월 초 GM벼 상용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되고 있다.


▲ 전세계 작물별 LMO 재배면적 비중. ⓒ살림이야기

 
 


▲ GM 작물별 주요 용도. 이들의 공통점은 식용유의 원료라는 사실이다. 콩, 옥수수, 면화, 유채의 알곡 또는 씨는 대표적인 식용유 원료이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식용유 중 이 네 가지를 원료로 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GMO이다. ⓒ살림이야기

 
 

▲ 품목별 GM작물 수입 현황(2014년도). 2014년 국내에 수입 승인된 식용·농업용 GMO는 총 1082만 톤, 31억2000달러 규모이다. 용도별로는 농업용 854만 톤(전체 수입량의 79%), 식용 228만 톤(21%)이다. 농업용은 주로 가축 사료용으로, 대규모로 경작된 GM작물은 대부분 사료로 쓰인다. GMO를 논의할 때 축산업을 포함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살림이야기 

 
 

건강, 생태계, 농업에 미치는 영향도 커  

① 식품 안전성 미흡 : GMO에 들어간 유전자는 대부분 미생물로부터 나온 유전자이다. 일반적으로 미생물을 먹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독성이나 알레르기 유발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식품은 사람이 먹는 것이므로 이의 안전성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하여 완전하게 검증되어야 한다.  

② 생태계 파괴 :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서 2007년 6월에 공개한 GMO의 유전자 이동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생태계에서 종의 다양성이 GMO의 유전자 이동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으며, 생물다양성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③ 종자 종속 : 종자는 농업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국적종자기업에서 GMO를 통해 종자 독점을 하면 결국 다양한 전통농업과 토종종자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참고 

 

<GMO 바로알기>(박수철·김해영·이철호 지음, 도서출판 식안연 펴냄)
<몬스터 식품의 숨겨진 비밀>(후나세 스케 지음, 중앙생활사 펴냄)
<유전자 조작 밥상을 치워라!>(김은진 지음, 도솔 펴냄)
<GMO의 법률상 용어 정의 및 관련 표시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박성용·강창경·정용수 지음, 한국소비자원)  
한국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 www.biosafety.or.kr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독자가 프레시안을 지키는 힘입니다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바뀐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정 사주나 지배집단에 좌우되지 않는 언론의 논조와 시각을 지켜 주면 좋겠다. 특히 협동조합은 개방적인 조직이니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겠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2013년 6월,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이 언론 협동조합이 됐습니다. <프레시안>의 기사에 만족하셨다면,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의 도전에 주목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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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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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간 몸 담았던 곳을 이제 떠나려 한다.

아니 떠났다고 해야겠다.

이 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겪고 만나고 얻었다.

물론 만나고 겪으면서 관계 맺은 사람들의 허상도 보았고.

껍데기뿐인 나를 확인하기도 했고.


2016년,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나를 위한 새로운 기회인지도 모른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새기며 뚜벅뚜벅 가련다.


더 큰 공부가 되는 출발이기를 빌어 본다.

_()_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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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나비_2013.10.29.]

쬐끔 친한 김상욱 샘 글. 


우리 그림책은 어디로 가야 하나



1. 그림책 발전의 배경


우리 그림책의 역사는 길지 않다. 넉넉하게 잡아도 20년 남짓. 그런데도 그 발전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채롭고 또 경이롭다. 아름다운 그림책, 소중한 그림책, 뜻 깊은 그림책 등 하나하나 손에 꼽으라면 그 어떤 것이든 손가락이 부족할 지경이다. 무엇이 우리 그림책을 이다지 힘차게 밀어 올릴 수 있었을까? 그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림책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배경의 성숙일 것이다. 일정 정도의 경제적 수준이 담보되고, 독자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될 만한 문화적 역량의 축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아동의 발견'에 버금가는 새로운 아동기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 조건의 개화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 눈부신 진전을 일구어온 가장 주요한 동력은 단연 그림책 자체가 안고 있는 힘이다.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져 이야기를 빚어내는 것이 그림책이라면, 그림책 속에는 글이, 그림이, 이야기가 함께 있다. 더욱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 똑 떼어내 분리하기 힘들 정도로 견고하고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마치 아이의 얼굴에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떼어내기 힘든 것처럼. 아이의 얼굴에는 엄마와 아빠가 있고, 또 자신만의 얼굴이 있는 법이기에. 글과 그림, 이야기가 그림책에는 있다. 그러니 그림책에는 아이가 처음 세상과 마주하고, 세상을 껴안고, 세상을 담아두기에 적합한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 셈이다. 


아이는 처음 세상을 본다. 그림은 아이가 처음 보는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무엇을 중심에 두고 보아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려준다. 아이는 그림을 통해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허공 속에 있는 엄마의 얼굴을 그저 이차원적인 평면이 아니라, 초점화를 통해 배경과 대상을 구분한다. 더욱이 대상을 고정된 상태로 붙잡아둠으로써 한결 정밀하게 탐사할 수 있게 한다. 시각적 문해력Visual Literacy과 함께 그림으로 담아낸 대상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된다.


또 그림책에는 말이 있다. 글은 엄마나 아빠, 가까운 이의 입을 빌려 말이 된다. 소리가 되고, 울림이 되고, 리듬이 된다. 의사소통의 근간을 이루는 말은 높낮이와 길이, 셈과 여림의 강세 등의 반복 속에서 리듬을 타고 아이의 귀를 통해 마음속으로 울림을 건넨다. 더욱이 이 말은 생각을 불러들인다. 언어가 지닌 기호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말은 대상을 즉각 떠올리게 만들며, 이 대상들이 조밀하게 얽혀 하나의 형상으로 자리 잡게 만든다. 또 다른 그림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언어에 내재된 상상하는 즐거움이 마음속에 움을 틔운다.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이야기는 단순히 앞과 뒤가 연결되어 있는 사건이 아니라, 처음과 끝을 분절시킴으로써 경험을 완결된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킨다. 시작과 끝을 설정함으로써 쉼 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붙들고, 그 경험을 통해 세상을 사는 이치를 깨우친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그림책이 어찌 아름답고 소중하지 않으랴. 그러니 짧은 역사에도 아랑곳없이, 이처럼 수많은 작가와 독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함께 공력을 기울이게 만들고, 함께 글과 그림과 이야기의 힘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우리 그림책의 발전에 가장 큰 공은 의당 그림책 자체의 장르적 본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 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우리 그림책을 있게 만든 1세대 그림책 작가들의 노고 또한 선명하다. 대체로 1세대 그림책의 작가군들, 류재수, 정승각, 이억배, 권윤덕, 정유정 등은 대부분 민중미술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었다. 그 경험들은 그림 작가의 개인적인 예술적 표현보다 대중과의 소통을 한층 더 중시하게 만든 동인이었으며, 이 소통에의 바람이 화폭 대신 출판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우리 그림책은 그 어떤 장르보다 주제의 현실주의적 자질들이 탄탄하며, 화풍의 민족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는 상대적으로 판타지에 대한 결핍을 초래하였고, 어린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계몽적 기획을 강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그림책의 성장을 위한 가장 힘차고 강건한 주춧돌을 마련했음은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후에 이어진 그림책이 예술적 표현의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현실성과 민족성이 우회적으로 반영되어 있음도 이 때문이다.



2. 그림책의 장르적 특성


그림책은 그림책이다. 그 무엇도 아닌 그저 그림책이다. 그럼에도 그림책이란 통칭 장르를 하위 장르로 구분해 본다면, 정보 그림책과 이야기 그림책으로 나뉜다. 정보 그림책이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야기 그림책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다. 어쩌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보 그림책이라면 이야기 그림책은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야기 자체의 즐거움을 건네주는 것이 목적이다. 이른바 칸트의 ‘무목적성’이 이야기 그림책의 특성이다. 더러 ‘시 그림책’이란 용어로 그림책을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를 바탕으로 만든 그림책이지만, 그림책이 되는 순간, 시는 자취를 감추고 32쪽의 그림이 펼쳐내는 이야기로 전화된다. 그러니 우리가 탐구하는 그림책은 오로지 이야기 그림책만 우두커니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장르는 비평가나 연구자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연구의 필요를 위해 거듭 새로운 장르는 만들어지고 지칭된다. 예컨대 판타지 그림책은 현실성을 넘어서는 요소나 장치, 플롯을 가질 경우의 작품들을 묶어 논의할 수 있다. <눈사람 아저씨>나 <사과가 쿵> 같은 작품들을 한꺼번에 묶어 논의할 수 있다. 심지어는 장르적 특성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칼데콧 수상 그림책'이 설정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는 넘쳐나는 지경이다. 우리 그림책 논의에서도 다양한 공모제에 수상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도 있다. 그러니 이러저러하게 새로운 장르명칭을 끌어와 논의를 한층 선명하게 밝히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다. 그러나 여전히 '영유아그림책'이란 명칭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나머지 또렷하게 특정한 작품군들을 지칭하는 명칭은 아니다.


애초 그림책의 주된 독자는 영유아들이다. 그림책의 지평이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책이 담아내는 경험의 세계가 확장되었기에 초등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 독자들까지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들도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그림책이 지닌 표현의 영역 또한 독자와 조응하기보다 그림 작가의 개인적 예술 표현을 더욱 중시하게 됨으로써 특정한 연령층의 독자에 더 이상 초점을 맞추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그림책 고유의 독자는 단연 영유아들이다. 이는 그림책을 수용하는 연행의 방식을 미루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영아의 경우 그림책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림책이지, 혼자 힘으로 읽고 보는 방식으로 수용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경계의 확장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나 중심의 설정은 여전히 종요롭다. 다른 한편 영유아 그림책이란 경계의 설정을 망설이는 까닭은 의식적으로 독자를 설정하고 제한한다면, 그림책 표현의 경계는 점차 협소해지고 자칫 양식화될 우려가 적지 않다. 오히려 느슨한 넘나듦을 허용하는 정도의 선에서 중심을 명료하게 확인해 두는 정도로 영유아 그림책의 특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요청되는 것은 영아 그림책이다. 유아의 그림책은 오히려 그림책 일반의 특성과 평가의 준거만으로 충분하다. 거듭 강조하건대 유아 그림책이야말로 그림책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반면 영아 그림책은 충분히 장르적 특성, 그 특성의 중심*을 살펴볼 수 있다. 영아의 경우, 인지의 발달보다 정서적 발달이 중요하다. 자신을 보살펴 줄 따사롭고 편안한 가족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요람과도 같은 따스함과 안락함이야말로 영아 그림책의 핵심적인 자질이다. 헝겊 인형과 늘 덮고 자던 담요의 역할을 그림책이 해야만 한다. 그림책을 통해서도 헝겊 인형과 같은, 담요와 같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부분은 C.Huck 외(2001)의 논의와 J.Rocklin(2001)의 논의를 바탕으로 필자가 보완한 내용이다. C. Huck, S.Helper, J.Hickman, B.Kiefer, Children's Literature in Elementary School, 2001, p.123. J.Rocklin, "Inside the Mind of Child", Opinion Papers, ED 458 602


그러자면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계몽의 목소리로 어른들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생활 속의 단초들을 결합하고 연상해낼 수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펼쳐져야 한다. 그러자면 이야기가 단순해야 함은 물론이다. 나아가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결말을 지녀야 한다. <맥스의 첫 번째 말>과 같은 의외의 상황 역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상의 경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림은 이야기와 짝을 이룬 채, 밝고 명료한 그림이 바람직하다. 명확한 테두리를 통해 대상이 뚜렷하게 지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반면 배경은 거의 없거나 두드러지지 않아야 한다. 이야기를 형성해 가는 글 또한 명확하고 자연스러운 언어여야 한다. 자칫 정밀한 묘사를 욕심내거나 서술에 치중할 경우 영아의 그림책은 친숙함에서 멀어지게 된다. 글은 반복을 강화해야 하며, 리듬과 라임을 가져야 한다. 우리말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압운과 라임을 얻기가 쉽지 않다면, 호흡의 반복을 통한 율격을 갖추어야 하며, 어휘나 통사의 반복과 변형을 통해 리듬감을 한층 더 강화해야 한다. 리듬과 반복을 통해 영아들은 그림책의 세상이 인식할 수 있는, 통제 가능한 세상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서사의 내적인 진행과 반복과 변형을 통한 예측가능성이야말로 아이들이 그림책을 대상화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고 관여할 수 있는 세계로 만든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유머러스해야 한다. 그 웃음이 상황에 의해 빚어진 것이든, 말과 행동에 의해 빚어진 것이든 아이들은 책을 통해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웃음은 주로 아이들 자신보다 열등한 인물들의 어리석음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웃음이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에서 보듯 커다란 이웃집 개 한스에게 앙갚음을 하는 두더지의 우스꽝스러움이 그림책 전체를 웃음으로 밀어간다. 똥이 떨어지는 각양각색의 소리들 또한 즐거움을 건네주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영아 그림책의 이들 특성과 달리 유아들을 위한 그림책은 그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책의 장르적 특성에 부응하기만 한다면 그림의 요소들과 글의 요소들, 그 둘이 결합되어 빚어내는 이야기의 요소들 모두가 허용되어야 한다. 다만 그림책 일반에 요구되는 한층 더 적절한 그림책의 요건들은 고전적인 모범들에 견주어 언제나 숙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림책은 짧아야 한다. 고전적인 그림책인 펼침면 1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쇄상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길어질 경우 집중적인 관심 또한 멀어질 우려가 있기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32쪽에 만족해야 한다. 또한 그림책은 어린이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그 보살핌은 원경에서 존재해야지 그림책의 전면에 등장할 필요가 없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엄마처럼. 물론 어른이 주인공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어른은 아이 같은 어른이어야 하며, 독자인 어린이들이 동일시할 수 있을 만큼 소박하고 어리석어야 한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다르지 않다. 아이의 형상이나 성격적 특성들이 동물에게서도 확연하게 각인되어야 한다. 센닥의 괴물들이 ‘삼등신’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도 어린이보다 한층 더 어린이다운 외형을 통해 독자와 눈을 맞춘다. 또한 그림책은 서사가 지닌 갈등을 가능한 한 주인공인 어린이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어야 하며, 그 해결은 만족할 만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 단순한 서사의 끝이 아니라, 완결이란 말 그대로의 의미에 부합해야 한다. 글과 그림의 조화가 빚어낸 아름다운 한 세상이 완벽하게 끝을 맺어야 한다. 물론 이 밖에도 그림책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요건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그림책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셈이다.



3. 창작 그림책의 과제


우리 그림책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적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단연 서사의 결핍이다. 그림책의 본령인 이야기 자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사의 결핍 대부분은 글에서 비롯된다. 글은 명료한 시간의 축에서 전개되며, 그림은 정지된 순간을 묘사한다. 정지된 그림에 시간을 각인시키는 것은 장면과 장면의 연결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주요하게는 초점화된 글의 연쇄를 통해 이루어진다. 글은 초점과 초점을 연결하는 내용상의 결속성과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는 형식상의 응집성을 통해 이야기를 빚어낸다. 


우리 그림책에 서사가 부족하다는 것은 대부분의 그림 작가들이 한두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글 작가와 그림 작가, 그리고 편집자 등의 협응을 통해 작업하기보다 한 사람의 작가가 글과 그림을 모두 감당하려고 들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 영아를 위한 그림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글은 아주 빈약한 단어로 혹은 몇몇  문장으로 서사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그도 아니라면, <천하무적 고무 동력기>나 <우리 가족입니다>와 같은 일인칭의 대화체를 사용함으로써 그림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정보만을 글이 감당하고는 한다. 이들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옛이야기 그림책에서 소용되는 분량의 글이 나와야만 서사는 한결 풍부해지고 유려해질 것이다. 그리고 글의 분량과 함께 요구되는 것은 반복과 변형 속에서 통사적 리듬과 같은 글의 음악적 자질들을 한층 더 강화되어야 하는 것도 또 다른 과제이다. 시적 리듬을 갖지 못한 채 정보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글로는 서사의 결핍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런데 서사의 결핍은 이야기성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단순히 설명되지 않는다. 한층 면밀한 탐구가 필요하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주동적으로 서사를 꾸려가는 인물, 곧 그림책의 인물인 어린이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센 수탉>에서 확인되듯, 그림책의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가 없는 그림책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없으면 어린이의 경험을 담을 수 없게 됨은 분명하다. 나아가 어린이가 형상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어린이가 지금의 어린이가 아닌 것도 문제다. 최근 가장 멋진 그림책의 하나라고 거론했던 <심부름 말>(김수정 글/백보현 그림, 상출판사)*의 어린이는 지금의 어린이가 아닌 옛날의 어린이를 탐구하고 있다. 작가들의 어린 시절을 경험의 내용으로 설정한 것이다. 물론 그림책이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곡진하게 담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은, 그림책은 구체성, 직접성 속에 표현되는 것이기에 보편성은 상상력을 통해 얻어지지 경험 자체가 보편성을 저절로 갖지는 않는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지금의 어린이가 아니다. 옛날 어린이일 뿐이다. 물론 어른들은 그 어린이를 통해 흔쾌히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러나 지금의 어린이들은 그 어린이를 통해 즉각적으로 스스로를 동일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어린 독자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 지금의 어린이일 것이다. 그러자면 경험 속 현실의 어린이와 어린이문학이 쉼없이 발견하는 상상의 어린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또 어린이가 없고, 지금의 어린이가 없는 또 따른 이유는 작가들이 선택하는 서사가 어린이들이 듣고/보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 작업이 많은 부분 계몽적인 기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또한 서사를 빈약하게 만드는 동인임은 분명하다. 계몽성을 덜어내고 한층 더 현실에 착근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현실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옮겨오는 것만은 부족하다. 상상 속에서 은유와 상징을 최대한 증폭시킬 필요가 있다. 기계적인 재현인 아닌 상상적인 의장이 필요한 것이다.


* 졸고, “상상과 모험의 심부름말”, <시사인>, 2013.05.16. “나는 이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따스하고도 놀라운 협응이 옛날 어린이를 만나는 지금의 어른이 아니라, 지금의 어린이를 만나는 또 다른 지금 어린이를 형상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조금은 간절하게.” 


서사의 결핍과 함께 또 다른 문제는 표현의 양식이다. 작가는 어쩔 수 없이 개인의 양식 속에서 작업한다. 그러나 글이, 이야기가 무엇이든 동일한 양식으로 시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밀도를 떨어뜨린다. 최숙희나 김영진의 그림과 같이 캐릭터로 안착한 개인적 양식화는 어쩔 수 없지만, 어떤 이야기이든 동일한 양식, 곧 기법, 재료, 인물 등이 반복될 때 너끈히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모리스 센닥이 <토끼 아저씨와 멋진 생일 선물>에서는 인상주의적인 표현의 양식을, <한밤중 부엌에서>에서는 만화 컷과 같은 양식을,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펜을 활용한 크로스해칭의 양식을 활용한 것은 작품에 부응하는 양식적 실험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권윤덕의 거듭 새로운 모색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개인의 양식이 고착되는 것과 함께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예술적 자기 표현에 치중한 나머지 그림책의 본질적 표지의 하나인 단순성이 희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도한 표현의 욕구가 단순성과 배치된다면, 어린이의 명료한 시선을 사로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단순성은 서투름이 아니다. 무릇 뛰어난 화가의 그림들이 최대한의 단순화를 통해 시각적인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것은 결코 서투르기 때문에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호안 미로, 레오 리오니, 에릭 칼, 존 버닝햄 등의 그림이 단순한 것은 마침내 도달한 단순함이지 비로소 시작하는 단순함은 결코 아닐 것이다. 가브리엘 샤넬이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비결은 단순화하고 덜어내어 오직 정수만을 남겨두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어린이를 사로잡는 비결은 단순화하고 덜어내어 오직 정수만을 남겨두는 것”이 아닐까.



4. 전망을 생각하며


그림책이 의당 갖추어야 할 자질과 우리 그림책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문제라는 프레임으로 살폈기에 당연 한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그럼에도 우리 그림책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그림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림작가들 역시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림책에 입문하고, 또 더미를 구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이 많다. 


더욱이 북스타트와 같은 그림책과 어린이들을 중개하는 활동들이 점차 확장되고 있다. 10년 동안 북스타트는 어린 영유아를 위한 그림책을 정성껏 선정해 왔고, 또 독자와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통로를 마련해 왔다. 어린이도서연구회의 활동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좋은 책을 좋은 독자와 마주치게 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왔음에랴.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부모들은, 유치원 선생님들,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우리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책 그림책을 따뜻한 마음으로 쓰다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 그림책의 미래가 어두울 리가 있겠는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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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감으로도 좋겠다.

이런 걸 소재로 한 이야기도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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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이는 파란색, 여자 아이는 분홍색? 언제부터 그랬을까?

2015년 9월 10일  |  By:   |  문화  |  댓글이 없습니다

루즈벨트(F.D.R.) 전 미국 대통령의 세 살적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하얀 치마에 깃털 달린 모자를 꼭 움켜쥔 손과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보다 더 긴 머리, 애나멜가죽으로 댄 구두까지 지금 기준에서 보면 어여쁜 여자 아이 같습니다. 분명 지금 기준에서 보면 남자 아이에게 왜 저렇게 옷을 입혔을까 의아할 수 있지만, 사진이 찍힌 1884년 기준에서 보면 지극히 평범한,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옷차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일고여덟 살 때까지 치마를 입혔고, 머리도 자르지 않았습니다. 사진 속 루즈벨트의 옷차림은 당시에는 아주 흔했던 중성적인(gender-neutral) 아이 옷차림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이를 보고 한 눈에 성별을 구분해야만 하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아직 머리숱이 거의 없는 아기의 머리에도 굳이 분홍색 헤어밴드를 씌우고, 사람들은 또 그걸 보고 아이가 여자 아이라고 짐작하잖아요.”

<분홍과 파랑: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를 분간해내는 미국(Pink and Blue: Telling the Girls From the Boys in America)>이란 책의 저자 메릴랜드대학교의 역사학자 파올레티(Jo B. Paoletti) 교수의 말입니다. 파올레티 교수는 30년 동안 아기와 어린이의 옷차림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루즈벨트의 사진이 찍힌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130여 년은 길다면 긴, 하지만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옷을 색깔별로 구분해서 입혔을까요?

파올레티 교수는 중성적인 옷차림의 소멸 과정을 살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수세기 동안 아이들은 일곱 살 정도가 될 때까지 (남녀 가리지 않고) 하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실용적인 이유가 있는데, 흰 옷감은 때가 타고 더러운 것이 묻어도 다시 표백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하얀 옷을 입히지 않으면 부모들이 잘못이라고 느낄 정도로 오랫동안 어린이에겐 하얀 옷을 입히는 게 사실상의 규범이었습니다.”

성별에 따라 다른 색깔, 다른 종류의 옷을 입히는 건 하루아침에 나타난 트렌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서서히 굳어진 관행이라고 보기도 어렵긴 합니다. 우선 19세기 중반쯤 사람들은 아이 옷에 색깔을 넣기 시작합니다. 분홍색, 파란색을 비롯해 여러 색깔이 선을 보였죠. 하지만 그저 옷 색깔이 다양해졌을 뿐,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도 특정 색상이 성별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 건 아닙니다. 1918년,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어린이 패션 잡지라고 할 수 있는 <Earnshaw’s Infants’ Department>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분홍색은 남자 아이에게 어울리고, 파란색은 여자 아이에게 어울리는 색깔이다. 확실하고 더 힘찬 색깔로 여겨지는 분홍이 남자 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고, 여자 아이들은 연약하고 앙증맞은 색깔인 파랑을 입었을 때 더 예뻐 보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파란색이 금발에 더 잘 어울리고 분홍색은 검은 머리에 더 잘 어울린다거나, 파란 옷은 눈이 파란 아이에게, 분홍색 옷은 눈이 갈색인 아이에게 입혀야 한다는 등 지금 기준과는 상당히 다른 설명들도 많습니다.

1927년 <타임>지가 미국의 주요 백화점에서 아이의 성별에 따라 어떤 색깔 옷을 권장하는지를 정리한 표를 보면 보스톤과 뉴욕, 클리블랜드, 시카고 등 많은 곳에서 남자 아이에게 권하는 옷은 분홍색이었습니다.

파올레티 교수는 소매업계와 의류 제조업체들이 소비자들의 기호를 고려하고 동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194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아이의 성별에 따른 색깔이 정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은 이전 세대와는 달리 ‘남자답게’, 혹은 ‘여자답게’ 옷을 입으면서 자랐습니다. 여기서 남자답게, 여자답게는 남자 아이는 아빠처럼, 여자 아이는 엄마처럼 입는 것을 뜻합니다.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치마를 입고 가야만 했습니다. 아무 무늬도 없는 치마나 뛰어놀기 편한 말괄량이 스타일의 옷이라도 치마는 치마여야 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들어 나타난 여성주의, 여성해방 운동의 영향으로 이른바 “여성스러운 옷”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다시 어린이들에게 중성적인 옷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여자 아이도 남자 아이처럼, 혹은 옷 입은 것만 봐서는 성별을 알아차릴 수 없는 식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 몇몇 백화점의 아동복 코너에서는 분홍색 옷이 한동안 자취를 감췄습니다.

“당시 여성주의자들, 혹은 여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회 전체가 여성들이 보다 순종적으로 길들여지는 이유가 옷차림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자 아이에게도 남자 아이처럼 옷을 입히면 이 아이가 자라서 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사람이 될 거라고 여겼죠. 성역할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학습된다(nurture not nature)는 믿음이 널리 받아들여지던 시기였습니다.”

중성적인 옷차림은 1985년쯤까지 계속됐습니다. 파올레티 교수가 이를 연 단위로 정확히 기억하는 건 1982년에 그녀의 첫째 딸이 태어났고, 1986년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온 매장에 갑자기 파란 옷이 깔린 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면 풋볼을 들고 있는 테디베어 마네킹이 파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마네킹이 갑자기 매장 어디를 가나 눈에 띄었죠.”

이어 분홍색, 파란색 기저귀가 출시됐습니다.

이런 변화는 뱃속의 아기의 성별을 미리 알 수 있게 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부모는 태어날 아이가 남자 아이일지 여자 아이일지를 알고 나서 미리 옷을 사두고 방을 꾸미게 된 것이죠. 항목과 특성을 보다 세분화할수록 물건을 더 많이 팔 수 있고 매출이 늘어나는 법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신발부터 아기 이불, 장난감, 보행기, 차량용 아기 의자에 이르기까지 분홍색이 대유행합니다. 첫째가 딸이면 온통 분홍색으로 물건들을 샀다가 둘째가 아들이면 다시 전부 다 파란색 물건을 사야 했지만, 여유가 있는 부모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파올레티 교수는 또한 중성적인 옷차림이 여전히 유행하던 1980년대 초반에 어린 시절을 보낸 엄마들이 자신의 딸들에게는 중성적인 옷차림을 잘 입히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들이 다시 순종적인 여성상을 이상적으로 여기기 때문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여성주의자들과는 조금 이유가 다른데, 예를 들어 딸들이 외과 의사와 같은 여전히 남성이 많은 직업을 갖더라도 충분히 여성스러운 외과 의사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린이들의 소비, 정확히 말하면 유아용품, 어린이들의 물건에 대한 부모들의 소비가 크게 늘어난 것도 중요한 변화입니다. 아동발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아이들은 만 나이 3~4세 즈음 처음으로 성적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6~7살 때까지는 자신이 남자라는, 혹은 여자라는 의식이 확고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오늘날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진 ‘남자다운 것, 여자다운 것’에 끝없이 노출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어린 아이들도 머리가 길고 치마를 입는 건 여자 아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저 그렇다는 사실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파올레티 교수는 책을 쓰는 내내 사회가 규정한 성적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의 부모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성별에 맞춰 옷을 입혀야 할까요? 아니면 그런 데 아이들을 얽맬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대로 옷을 입고 생각을 말하도록 놔둬야 할까요? 파올레티 교수는 이 지점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성적인 옷차림의 소멸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남자 아이다운 것, 여자 아이다운 것을 명확하게 나눠버린 고정관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원래부터 정해져있던 것도 아니니까요. 중성적인 옷차림에 대한 수요가 다시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성적인 옷차림의 가치에 대해 다같이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애는 사내 아인데 늘상 옷을 여자 아이처럼 입으려고 해서 걱정이라는 부모가 여전히 많잖아요. 그것이 결코 문제가 아닌데 말이죠. 패션 업계는 남자 옷, 여자 옷을 구분해서 팔면 매출이 늘어나서 좋을지 모르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게 명백하게 남성성, 여성성을 분간할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Smithson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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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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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19_ 실상사 보현법회 회주 도법스님


노래 : 해탈의 기쁨

 

한생각 바로돌려 얽힌번뇌 끊고보니
천상천하 넓은우주 걸릴것이 하나없고
평등한 성품속엔 너와내가 따로없네
대자재 유아독존 바로 이것인것을
해탈의 참된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윤회의 고해에서 피안언덕 이르러니
어두웠던 나의마음 한순간에 밝아지고
본래의 천진면목 진실하게 드러나네
위없는 님의진리 영원한 빛가운데에
열반의 대합창이 온누리에 가득하네

 

1. 
방금 부른 노래 가사를 보니까 ‘해탈의 참된 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열반의 대합창이 온 누리에 가득하네.’ 이렇게 되어 있네요. 해탈은 ‘자유’라는 이야기고, 열반은 ‘평화’라는 이야기인데, 어떠세요? 평소 살면서 자유를 느낀 적 있으세요? 또는 평화를 느낀 적이 있으세요?

 

인생사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해탈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열반이라고도 이야기 하죠. 해탈은 ‘자유’라는 말이고, 열반은 ‘평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자유롭고 평화로우면 행복하다’ 이런 얘기가 됩니다. 다른 건 사실 다 군더더기예요. 스스로 삶이 자유로우면, 또 평화로우면 그게 최고다, 그 얘깁니다.

 

제가 부처님의 말씀 중에 대표적으로 많이 인용해서 얘기 하는 것이 있는데요, 
첫 번째,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말 못 알아듣는 사람 빼고, 말을 알아듣는 사람의 경우 같이 얘기 했을 때,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진리고, 나의 가르침이다.
두 번째, 이해되는 대로 실천하면 즉각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진리이고 가르침이다. 
세 번째, 정말 바로 이해가 되는지, 즉각 이루어지는지 바로 증명, 검증 되는 것이 나의 진리이고 가르침이다.

 

저는 부처님 경전 중에서 이 세 가지 내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불교의 사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내용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하는데 이렇게 즉각 이해가 되고, 즉각 이루어지기도 하고, 증명되기도 하면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잘 하는 것이고, 그것이 잘 안되고 있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잘 따져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부른 노래가 ‘해탈의 기쁨’인데, 어떠세요? 바로 이해가 되시는가요? 또 자유가 바로 이루어지는가요? ‘아, 그렇네’하고 자유로움을 느끼는가, ‘아, 그렇네’하고 평화로움을 누리는가. 어떻습니까? (...)

 

그렇지 않죠? 뭔가 그럴듯하기는 한데, 왜 그게 바로 이해가 안 될까, 부처님은 분명 즉각 된다고 했는데 말이죠. 이 노래가사 자체가 부처님의 말씀을 노래로 만든 거잖아요. 부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노래도 부르고 얘기도 하고 있는데 왜 부처님 말씀처럼 자유로움을, 또는 평화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가? 참회를 열심히 안 해서 그런가? 전생의 업 때문에 그런가? (웃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 이유는 잘 몰라서 그래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자유와 평화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인거죠. 모든 생명이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해요. 어쩌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유롭고 싶다, 평화롭고 싶다고 하는 것이 생명이 가지고 있는 바람, 소망입니다. 스님들이 청춘을 불사르고 수행자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도 그 삶을, 그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지요.

 

인생살이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의 삶은 틀림없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어쩌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많이 경험하고 있어요. 경험하고 있는데 본인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경험하고 있는데 본인이 모르는 경우, 그런 경우가 많죠? 그런데 우리는 ‘아, 이런 것이 자유구나’, ‘이런 것이 평화구나'하는 것을 사실 부지기수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자유고, 평화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거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평화로움, 자유로움이 굉장히 짜릿한 무엇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감각적으로 대단히 짜릿한, 마치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짜릿함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죽어라고 더운데 죽어라고 목마르다. 그 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했다. 어때요? 그때 기분이? 짜릿하겠죠? 아니면 얼려 놓은 냉수를 시원하게 마셨다. 실제 짜릿함이 느껴지잖아요.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데 그 행복도 이런 짜릿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그러기 때문에 그 짜릿한 재미를 찾아 동네방네 쫓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그런 것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짜릿한 충족감으로 행복해지려고 하는 한 영원히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짜릿한 재미를 찾으려고 동서남북으로 항상 쫓아다니고 있죠. 그래서 바빠요. 힘도 들고. 그 짜릿한 재미를 느끼려면 공짜로 안 되잖아요. 그렇죠? 돈이 많이 들어가야 되죠.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짜릿한 즐거움의 노예가 되는 거죠. 이것이 중생이에요. 이 ‘짜릿한 즐거움이 충족되어지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하는 무지와 착각 속에 빠져 짜릿한 무엇을 쫓아 사는 거예요. 한 마디로 얘기해서 감각적인 기쁨. 눈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입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코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귀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마음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온통 감각적인 기쁨을 탐닉하는 것, 이것이 중생입니다. 거기에 노예가 되어 사는 것이 중생이고, 그 기쁨이 충족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 중생입니다. 이런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거죠.
 
이 무지와 착각을 놔둔 채로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행복해 질 수 없어요. 이 무지와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이 무지와 착각으로부터 깨어나지 않는 한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가 어려워서 불행하다, 일자리가 없어서 불행하다, 이렇게들 이야기 하고 있죠. 물론 일자리니 경제니 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경제가 좋아지면, 일자리가 많아지면 바로 행복해지는가? 그건 아니죠? 직업 있고 돈 있는 사람도 여전히 불행하다고 하잖아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대부분 더 편리하고, 더 풍족하고, 더 맛있게 먹고, 더 쉽게 가고, 더 재밌게 하고,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쓰고 그러면 행복해진다-라고 믿고 그것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 나쁜 거짓말, 대단히 위험한 거짓말임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경험하고 있어요.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온 100년 역사만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 됐어요. 지금은 죽네, 사네, 하지만 3만 불을 얘기하고 있지요. 3만 불이면 부가 몇 배로 증가한 거예요? 300배예요. 생활의 편리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훨씬 더 편리해졌어요. 민주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민주화가 후퇴한다고 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고, 그것을 막기 위해 비판도 하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죠. 비록 그렇게 후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민주화도 300배는 이루어졌을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대통령을 국민이 뽑는 거죠. 옛날에는 나라의 대표인 임금을 국민이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집안이 만들었어요. 임금을 만드는데 국민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임금격인 대통령을 누가 만듭니까? 국민이 표를 줘야만 대통령이 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대통령을 만드는 주인이에요.

 

옛날엔 감히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어요. 그랬다가는 삼족이 멸했죠.  
진안에 가면 죽도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소위 역성혁명을 일으켰던 정여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말 때문에 죽었습니다. ‘임금의 종자가 따로 있나’ 그랬던 거죠. ‘실력 있으면 임금 하는 것이다. 임금의 종자가 따로 없다. 그가 누구이든 정말로 만백성을 위해서 역할을 잘 할 사람이면 그가 임금 되어야 된다. 집안이 좋다고 해서 실력도 없는데 임금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이 이야기를 해서 결국은 죽은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실제로 실력 있으면,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면 누구든지 대통령이 될 수 있잖아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물질적으로 300배 더 풍요로워진 것보다 더 커다란 변화죠. 천지개벽하는 변화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더 물질적으로 많아지고, 더 편해지고, 더 좋아지고, 더 재미있고 등등 이렇게 해서 행복해지는 거라면 적어도 우리는 300배는 더 행복해졌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못살겠다는 아우성은 그 때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왜 그렇게 된 걸까요?

 

바로 그런 ‘감각적 기쁨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라고 하는 무지와 착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깨달음’이 다른 게 아니에요. 이것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인 거죠. ‘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첫 번째가 그거죠. 그 생각을 내려놓고 보면  우리가 사실은 일상 속에서 무수하게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감각적 짜릿함이 아닌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2. 
노래가사를 가지고 얘기를 조금 더 해 보죠. ‘생각 바로 돌려 얽힌 번뇌 끊고 보니 천상천하 넓은 우주 걸릴 것 하나 없고.’ 걸릴 것 하나 없다는 말이 곧 해탈, 자유라는 말이죠. ‘평등한 성품 속엔 너와 내가 따로 없네. 대자재 유아독존 바로 이것인 것을. 해탈 참된 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자, 여기서 ‘얽힌 번뇌 끊고 보니’라고 했습니다. 어때요? 번뇌를 끊기 위해 많이 노력하시죠? 끊어지던가요? 어떻습니까? 번뇌를 끊기 위해 부처님에게 가서 빌기도 하고, 진언도 외우고, 화두도 들고, 염불도 하고, 위빠사나도 하고, 온갖 것을 다 할 텐데, 어떻던가요? 번뇌가 끊어져야 해탈이라고 했는데 끊어지던가요? ‘천상천하 걸릴 것 하나 없고.’ 실제적으로 해보니까 어떻습니까?

 

- 대중 : 끊으려고 하면 더 생각이 나요.

 

그렇죠. 더 생각이 나지요? 그런데 잘 관찰해보면 사실은 염불하면 한 번 하는 만큼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어요. 실제로는 화를 한 번 안내면 덜 낸 만큼 번뇌로부터 해탈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잘 관찰 하지 않는 거예요. 관찰은 하지 않고, 번뇌가 끊어진 상태를 그림으로 그리고만 있지요. 현실이 내가 그린 그림하고 안 맞는 거예요. 이게 환상이고 착각인 거죠. ‘번뇌가 끊어지면 이럴 거야’, 이러면서 번뇌가 끊어진 상태를 스스로가 조작하고 있는 셈이죠. 
 
번뇌는 염불하는 대로 즉각즉각 끊어지게 돼 있어요. 번뇌의 감옥으로 부터 바로바로 해탈하게 돼 있어요. 화두 들면 화두 드는 대로, 염불하면 염불하는 대로, 진언 외우면 진언 외우는 대로, 즉각 이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돼요. 그러면 번뇌로부터 해탈한 거잖아요. 그렇죠? 번뇌에 갇혀 있다가도 정신 차려 염불하면, 그 순간 바로 번뇌로부터 벗어나오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즉각즉각이에요. 하는 대로 바로 되기 때문에 시간이 안 걸려요. 목마를 때 물 마시면 목마름이 즉각 해결되나요, 아니면 십 년 후에 해결되나요? 어떻습니까? 즉각 해결되죠? 이것도 똑같아요. 

- 대중 :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목마름이 또 오잖아요.

 

그러니까 또 마셔야죠. 한 번 마시고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입니다. 한 번 하면 다 끝난다는 생각이 착각인 거예요. 그런 일은 없어요. 끊임없는 연속이에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저 다리 밑에 흐르는 물과 같은 거예요. 물은 늘 있죠? 그러면서도 늘 흘러가고 있어요. 내 인생도 저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내 마음도 저렇게 흘러가고 있고요.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딱 붙잡고 싶어 해요. 내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따로 붙잡으려고 하는 이것이 집착인거죠. 망상인 것이고.

 

왜냐하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만약에 저 흐르는 물중에서 어떤 부분을 붙잡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흐르는 물이 아닌 거잖아요. 고인 물인 거죠. 고인 물은 썩습니다. 썩으면 어떻게 돼요? 독이 돼요.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늘 마치 로또 복권 당첨 되듯이 딱 한 방에 되기를 바랍니다. 한 방에 끝나기를 바라죠.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한 방에 되는 것이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무지와 어리석음이죠. 그것이 무명입니다.

 

목마를 때 물 마시면 즉각 목마름으로부터 해탈하듯이, 염불하면 즉각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물 마시는 순간, 목마름 때문에 겪는 고통이 바로 해결됩니다. 그렇지만 못 견디게 목마르지 않고 그저 평범한 상태에서 물을 마시면 어떨까요? 짜릿한 재미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별로 그런 재미가 없죠. 그것과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까 꼭 짜릿해야만 좋은 것이라고 하는 생각, 이것이 망상, 어리석음이라는 거죠. 짜릿해야만 좋은 것이라는 생각, 이것 자체가 무지와 착각이라는 거죠. 그것은 좋은 것이지도 않고, 짜릿하다고 해서 좋아지지도 않습니다. 

 

3.
구체적으로 한 번 볼까요? 번뇌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주로 ‘번뇌’라고 하면 ‘나쁜 생각’, ‘어지러운 생각’ 이렇게 생각하는데 나쁜 생각만이 번뇌는 아니에요. 예를 들어 볼게요.

지금, 여기라고 하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나의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실상사 설법전이라고 하는 세계에 있습니다. 여기서 번뇌가 무엇인가요. 실상사 큰 방에 있어야 할 시간이면,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여기 있어야 되죠. 그런데 실제 큰 방에 몸이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도 여기 앉아 있나요? 그렇지 않죠? 마음은 제멋대로 돌아다니죠. 이게 문제인거죠.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은 우리가 ‘큰 방에 앉아 있자’, 그리고 ‘큰 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듣자’ 이렇게 하기로 한 거잖아요. 이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인 거죠. 이것 말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다 망상인 거예요. 부처님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하나님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돈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누구를 속여 먹으려고 생각해도 망상이고.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이 온전하게 함께 있는 것 말고는 다 망상이에요. 꼭 나쁜 생각만 망상이 아니란 말이죠.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이 오롯하게, 온전하게 있도록 하는 걸 우리는 참선이라고 얘기하고, 염불이라고 얘기하고, 기도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참선하는 사람, 화두 드는 사람에게는 화두 말고는 어떤 생각도 다 망상인 거예요. 내가 지금 화두를 들려고 마음먹었으면 마음먹은 대로 화두를 들어야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만약 화두를 들려고 마음먹었는데 화두를 드는 중에 부처님 생각을 한다든가 또 다른 좋은 일을 생각한다든가 하면 이것은 망상일까요, 아닐까요? 이런 것도 다 망상인거예요.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서 위빠사나를 수행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그 자체에 오롯해야 되지, 이것 말고 화두를 들겠다고 생각한다든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다든지 하면 이것도 다 망상인거예요.

 

거듭 말하지만 좋은 생각이라고 해서 망상이 아닌 게 아니라는 거죠. 몸과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이 현장, 이 시간, 이 장소에 온전하게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에 오롯하게 몸과 마음이 하나로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다 번뇌인 거예요. 어제를 생각하는 것, 내일을 생각하는 것, 애인을 생각하는 것, 부처를 생각하는 것 다 번뇌인 거예요. 지금 여기에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하나가 돼 있지 않은 한 다 번뇌인 거예요.

 

여기서 ‘번뇌를 끊고 보니’ 그랬는데, 이 번뇌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 온전하게 있으면 번뇌가 끊어지는 거예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이죠. 부처를 생각해보죠. 제가 늘 ‘노는 입에 염불 하세요’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최고의 수행은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 시시하게 생각해(웃음).

 

마음도 놀리고 몸도 놀리고 입도 놀려 놓으면 뭘 할 것 같아요? 대부분 쓸데없는 짓을 해요. 술 먹으러 가자. 고기 먹으러 가자. 만날 이런 거 하는 거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 욕이나 하고.(웃음) 놀려 놓으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별로 좋지도 아니한 것들을 막 하는 거예요. 마음으로는 과거에 누가 나한테 잘못한 것들을 끌어들여가지고 막 신경질내고 화내고, 이게 다 감옥이죠. 입으로는 누구 흉이나 보고 험담이나 하고 이게 다 감옥인 거죠. 몸으로는 해야 될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빈들빈들하고 딴 짓거리하고. 이게 다 감옥이죠. 다 번뇌로 이루어지는 것들이에요. 

예를 들어서 지금 상황은 술을 먹어야 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술 먹으면 안 돼요. 그럼 지금은 뭐 해야 돼요? 지금은 여기 앉아서 얘기하고 들어야 해요. 지금은 얘기하고 듣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거 말고 다른 것을 하면 다 망상인 거예요. 그런데 술이 먹고 싶어 미치고 환장하겠어. 그래서 술 먹으려고 온갖 궁리를 한다. 그럴 수 있잖아요. 이게 망상이고 번뇌인 거죠. 이럴 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술이 먹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하겠다’라고 하는 번뇌의 감옥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즉각 정신차려서 노는 입에 염불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마음으로 ‘관세음보살’하고 생각한다. 입으로 ‘관세음보살’하고 부른다. 염불 하겠다 마음먹고 하는 거니까 그래도 정중하게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입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몸으로 ‘관세음보살’ 부르는데 집중하는 것. 마음먹고 하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아, 술 먹고 싶어 미치고 환장 하겠네’하면, 이 때 나는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한 놈일 뿐인 거예요. 왜냐면 인간이란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되는 거니까. 아무리 법당에 앉아 있어도 소용없어요. 가부좌하고 앉아 있어도 소용없어요. 아무리 참선하고 기도하고 있어도 소용없고요.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하겠네’라고 하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 그 순간은 법당에서 가부좌하고 기도를 하던, 절을 하던, 참선을 하던, 뭘 하던 그냥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 돼요. 실제로 대부분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또 그렇게 안 하려고 했는데도 그렇게 됩니다. 

그럴 때 얼른 정신 차려서 ‘어, 이거 아니지’, 그러고 ‘관세음보살’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부릅니다. 관세음보살을 지극하게 생각하고 부르려니까 몸도 거기에 맞게 집중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거 마음먹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술 먹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할 인간이었는데 ‘어, 이거 안 돼지’ 하고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데 집중한 태도를 견지하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될까요? 바로 술 먹고 싶어 환장한 놈에서 벗어나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사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기 위해 집중하는 사람이 되죠. 술 먹고 싶어 미치고 환장한 인간에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인간으로 태어나면 이건 환골탈태한 것 아닌가요? 한 순간도 시간이 걸리지 않고 즉각 효과가 나타나요. 늘상 되냐, 안되냐는 여러분들이 계속 하냐, 안 하냐의 문제예요.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면 하는 만큼 반드시 즉각즉각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해도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고 또 잘못 알고 잘못 믿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도 해요. 그러기 때문에 계속 뭔가 죽어라고 하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바로 즉각즉각 되고 있습니다. 마음먹고 생각하고 말하고 또 거기에 지극하게 몸과 마음을 집중하기만 하면 즉각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불교는 모든 것이 즉각 된다고 해요. 제대로만 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루어진다. 바로 증명된다. 그래서 불교가 훌륭하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가 희망의 종교라고 이야기하고 불교를 하면 행복해진다고 하는 거예요. 즉각즉각 되기 때문에 신이 나죠. 하는 만큼 바로바로 이루어지는데 왜 재미가 없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현실을 그렇지가 않지요. 10년, 20년을 해도 기대한 것처럼 안 돼요. 그러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노래 가사를 보니까 이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뭘 해야 하죠? 법성게를 해야죠. 법성게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것도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망상이죠. 왜냐하면 법성게 이야기를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지만 비록 법성게의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법성게 내용이었어요. 형식은 우리가 딴 짓거리를 한 셈인데, 내용을 보면 법성게 내용을 더 평범하게 더 일상 속에서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얘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4.
자, 그러면 오늘은 교재 35쪽을 읽어보겠습니다. 지난번에 한 데까지 읽겠습니다.

 

‘여기 한 사람 있으니 그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인드라망 무늬입니다.

이 두 마디로 표현되어진 것을 그림으로 그린 거예요.

 

천 년 전에도 저 모습이었고 천 년이 지난 오늘도 저 모습이고 앞으로도 저 모습이라는 것이죠. 이 말이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네’ 이렇게 표현되는 거죠.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진 적 없고.’ 모든 존재는 그물의 그물코처럼 전부 다 연결되어 있죠. 이것이 내 인생의 진면목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것 하고 관계없이 나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 그림에서 제일 아래 있는 사람이 나인데, 저것만 떼어내어서 ‘나는 이렇게 생기고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하고 그렇게 알고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어떨까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으로만 그렇지 실제는 나만 떨어져서 내 인생이 따로 있을 수가 없어요. 실제가 그런데도 우리는 실제와 완전히 어긋나게 알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길을 잃고 있는 겁니다.

 

‘본래 정해진 이름도 없고 본래 정해진 모습도 없으니.’

 

제가 도법인데요, 제가 도법이라는 것은 알지요? 본래부터 도법이었겠어요? 누가 만들었겠어요? 본래는 이름이 없었어요. 본래는 그냥 한 존재가 있을 뿐이죠, 인연으로 이루어진 한 존재. 거기다가 사람들이 도법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 거예요. 다른 이름을 붙이면 될까요, 안 될까요? 필요하면 다른 이름을 붙여도 관계없어요. 또 행위 하는 것에 따라 이름이 달라져요. 도둑질 하면 뭐라고 해요? 도둑놈이라는 이름이 붙어요. 사기 치면 사기꾼이라는 이름이 붙고. 역할에 따라서 이름이 붙는 거잖아요. 그래서 ‘본래 정해진 이름이 없고’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저 중에서 제일 밑에 것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끼리의 약속이에요. 본래는 사람이라는 이름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죠. 본래는 그런 것이 없어요. 저 중에서 밑에 것만 떼어내서 ‘나’라고 하는 것, 이것도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에요. 실제로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래서 ‘본래 정해진 이름도 없고 따로 정해진 모습도 없다.’라고 했어요. 도법이라고 하는 인간도 정해진 모습이 있습니까? 열 살 때하고 스무 살 때,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긴 한데 열 살 때는 아이잖아요, 스무 살 먹으면 청년이고. 모양새가 다르죠. ‘도법’이라는 이름으로 정하는 것은 인간들이 필요에 따라 그렇게 하는 거예요. 실제하고 관계없이 그렇게 규정하는 거예요.


‘그 내용은 오로지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그 밖에 다른 길이 있지 않네.’

 

(탁자 위의 물컵을 집어들다가) 어, 컵에 물이 없네? 다들 물이 있는 줄 알았죠? 저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게 착각이에요.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대중: 하하하.) 이런 것을 업대로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습관대로 한다는 거죠. 습관대로 하는 한, 업대로 하는 한 우리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길이 없어요. 업대로 하지 않고 정신 차려서 실제대료 해야죠. 지금 사실을 확인 해보니까 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없어요. (물을 가져오고 나서) 만일 습관대로 했으면 물을 마실 수가 없죠. 정신 차려서 실제대로 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 됐지요. 그랬잖아요.

 

제가 지금 물을 마셨는데요, 이 물이 시원할까요, 시원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실제 해본 저만 알 수 있죠. 이 얘기가 그 얘기예요.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여타의 다른 길이 있지 않다. 직접 해보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도 닦아서 깨달으면 도인이 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말로는 그럴듯하죠. 그래서 ‘그 분은 도인이야’라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업자득이라고 그랬어요.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된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행위 하는 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는 그냥은 알 수가 없어요. 직접 해 봐야만 알아요. 우리는 저 사람 도인인데? 이렇게 알고 믿었어요. 그런데 만일 행위 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인은 도둑질해도 도둑놈 안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행위 하는 대로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도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도둑질을 하면 그 사람은 그냥 도둑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복잡한 설명 필요 없이 직접 실천하는 것을 보면 바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다른 길은 있지 않네.’라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법성게의 전부이고, 화엄경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부연설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니.’

 

다 인연 따라 이루어지니까 물이 그릇 따라 모양을 바꾸는 것과 같은 거예요. 물이 네모난 그릇을 만나면 네모난 모양을 하고, 세모 그릇을 만나면 세모 모양이 되고. 인생도 그렇게 정해진 것 없이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거예요. 정해진 이름도 없고 정해진 모양도 없다는 거죠.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가 또한 그러하네.’

 

저 그림에서 네 발 달린 짐승이라고 하는 그물코를 쫙 끌고 가면 어때요? 다 따라오죠? 저 쪽에서 보면 뭐가 보여요? 네 발 달린 짐승만 보이는 거예요. 네 발 달린 짐승이 그대로 전 우주처럼 되는 거죠. 네 발 달린 짐승이 곧 그대로 우주다, 이렇게 얘기가 되는 거죠. 반대로 이쪽 물고기 그물코를 쫙 끌고 오면 어때요? 전체가 물고기로 딸려오는 거예요. 물고기가 곧 우주요, 이렇게 되는 거죠. 인간이라는 그물코, ‘나’라고 하는 그물코를 들면 어때요? 전체가 나라고 하는 그물코를 따라오게 돼 있죠. 이런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들도 또한 그러하네.’ 이것은 공간적 입장에서 나의 참모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대로 지금 여기 한 순간이요,

지금 여기 한 순간이 그대로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들과 지금 여기 한 순간이

함께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시간마다 따로 따로 이뤄지네.’

 

이것은 시간적 입장에서 나의 참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보면, 앞에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이것은 공간적 입장에서 지금 여기 나의 진면목을 설명한 것이고 그 다음에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것은 시간적 입장에서 지금 여기 나의 진면목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니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들도 또한 그러하네.’ 이것은 공간적 설명입니다.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대로 지금 여기 한 순간이요, 지금 여기 한 순간이 그대로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들과 지금 여기 한 순간이 함께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시간마다 따로따로 이뤄지네.’ 이것은 시간적 설명이죠. 지난달에 여기 까지 읽었는데 오늘 설명을 조금 더 해본 겁니다. 

 

5.
38쪽에 가면 그림이 세 개가 있죠? 첫 번째가 법성게 첫 구절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이것은 공간적으로 무한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것은 시간적으로 영원을 나타냅니다. 무한과 영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첫째 원상이죠. 우리의 생명은 이렇게 무한하고 영원하다, 이런 얘깁니다.

 

이 그림을 놓고 보았을 때, 시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80년 전에 태어나서 내 인생이 시작되고 80년쯤 살다가 내 인생이 끝나서 죽게 됩니다. 하지만 이 그림으로 봤을 때 시작이라고 하는 의미의 태어남과 끝이라는 의미의 죽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그런데 왜 시작으로서의 태어남과 끝으로서의 죽음이 있다고 믿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시작으로서의 태어남이 있다고 생각해서 태어남은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끝으로서의 죽음이 있다고 생각해서 죽음은 나쁜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태어나면 웃고 죽으면 곡을 하고 그러잖아요. 다 무지와 착각의 결과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실제로는 이 원상 같은 겁니다. 시작으로서의 태어남과 끝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 망상, 번뇌가 만들어낸 것일 뿐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이 무지와 착각으로부터 깨어나자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거예요.


두 번째는 뭐예요? 점이 세 개 있죠? 이것은 불, 법, 승을 나타내는 그림입니다. 이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은 영원과 무한의 존재인 생명, 영원과 무한이라고 하는 지금 여기 나의 참모습, 이 내용대로 삶을 잘 알고 살아간 사람이 부처님이에요. 두 번째, 이 내용대로 잘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뭐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세 번째, 이 가르침 내용대로 삶을 살고 이 가르침 내용대로 이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불교인들의 모임 즉, 승가공동체이죠. 요즘 우리는 사부대중 공동체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두 번째입니다. 이것은 조계종단을 상징하는 표시죠. 

제일 아래 그림은 뭘까요? 이런 내용을 일반화 시킨 겁니다. 기독교도 할 수 있고, 불교도 할 수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도 할 수 있고, 종교가 있는 사람도 할 수 있고, 동양 사람도 할 수 있고, 서양 사람도 할 수 있고, 진보도, 보수도, 좌파도, 우파도,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누구나 다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세 번째 것이죠. 원래 원상은 안 넣었었는데 이것을 불교 쪽에 좀 친하게 하려고 원상을 넣은 거예요. 이것이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거예요. 이것을 잘 보면 법성게의 내용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설명한 것까지가 우리가 알아야 될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고요, 그 다음은 능인 즉, 석가모니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삶을 살아가니까 ‘그 삶이 좋더라’하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누구예요?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라고 표현되었는데,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들이죠. 부처님이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니까 참 좋았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가자는 내용이 시고행자(是故行者) 그 뒤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또는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보니까 참 좋더라. 석가모니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니까 좋았듯이 우리도 이제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자. 왜? 그렇게 살면 좋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법성게라는 거죠. 일단 여기까지 하고 다른 설명을 좀 더 하겠습니다.

 

 

6.
우리 인생은 흐르는 강물, 그보다 더 정확하게 비유를 들면 망망대해 같은 거죠. 우리의 생명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바다처럼 활동하고 있다. 어떻게 흘러가고 활동하고 있는가?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활동하고 흘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활동하고 흘러가는데 그 삶이 괜찮을 것인가, 괜찮지 않을 것인가는 누구한테 달려있는가? 본인한테 달려있다는 얘깁니다. 본인이 ‘인생이란 강물 같은 것이구나.’ ‘인생은 바다와 같은 것이 구나’ 이것을 잘 알고 거기에 주체적으로 잘 적응하고 활용해서 살면 그 삶은 괜찮은 삶이 됩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게 되면 그 삶은 늘 고달프게 되는 거죠. 죽음이 늘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죠. 반면 변화활동, 순환활동이 있을 뿐 끝으로서의 죽음이란 본래 없다라는 사실을 잘 알면 죽음이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죠.


이것을 작품으로 잘 표현한 것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라는 책입니다. [싯다르타]는 조그만 책이니까 가능하면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특히 나이 드신 분들. 거기에는 인생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뱃사공인데 후계자한테 뱃사공 일을 넘겨주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난 살만큼 다 살았어. 나 이제 갈게. 잘 있어.’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유유히 떠나갑니다. 어디로 가느냐? 숲 속으로 갑니다. 숲 속으로 간다는 것은 바로 죽으러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보내는 사람도 ‘그래, 그 동안 참 애썼소. 참 잘 살았소. 잘 가시오.’ 이렇게 보냅니다. 굉장히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죠?

 

죽음은 나쁜 거야. 죽으면 끝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태어나서 사는 것이 생명활동의 하나인 것처럼, 강물 흐름의 하나인 것처럼, 바다 파도의 하나인 것처럼, 죽음도 강물 흐름의 하나야, 바다 파도의 하나야. 이렇게 죽음을 잘 알고 보면 사실은 그렇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되는 거죠. 그래, 난 파도 노릇을 할 만큼 했어. 잘 했어. 난 이제 바다로 돌아갈 거야. 숲으로 간다는 것은 이런 거잖아요. 삶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소화시키면 우리 삶은 그야말로 바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마치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가듯이.

 

어떻게 생각되세요? 인생을 그렇게 살면 좀 괜찮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살다가 떠나면. 떠나는 사람도 괜찮고, 보내는 사람도 괜찮고. 젊은 사람들한테는 이것이 별로 실감나지 않을 거예요. 나이 많은 분들은 보시면 대단히 도움이 될 겁니다. 저도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그 정도인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최근에 그것 가지고 공부하자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봤어요. 다시 보니까 놀랍게 잘 설명하고 있더라고요. 법성게를 잘 설명한 책, 화엄경을 잘 설명한 책, 인생을 잘 설명한 책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권하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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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393호 2015. 6. 5>에 실린 글.

공부가 되고 자극을 주는 말씀이 참 많네. 나를 돌아보게 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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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되는’ 책을 만드는 즐거움을 알려주마

— 알마 정혜인 대표

 

김수한 편집자 popnamu@hanmail.net

 

 


지난 봄 <한겨레>에 실린 김민기 선생의 인터뷰 기사가 꽤나 화제였던 것 같다. 이진순 씨가 오랜만에 지면으로 불러낸 김민기의 근황은 특유의 목소리와 제스처의 질감이 생생히 전달되는 듯했다. 시종 어눌하면서도 단호하고, 수줍어하면서도 뚜렷하게 삶의 마디마디에 새겨진 요철의 시말을 전하는 ‘조용한 거장’의 일대기는 그를 아는 이들에겐 당대의 깊이를 새삼스레 확인하는 계기가, 그 이름이 낯선 이들에겐 신선한 꼰대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의 문화판에서 이리도 묵묵히 제 뜻과 길을 벼려온 ‘딴따라’가 몇 있겠는가. “문 닫을 때까지 돈 안 되는 일을 할 거다”라는 한결같은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 갈수록 귀중하고 드문 시대. 그처럼 뚝심 있게 ‘돈 안 되는 책’을 만들어가는 출판사도 몇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어떻게 일하고 먹고살아 갈까. 그 노하우를 알고 싶어 지난 5월 15일 스승의날 연남동에 자리한 알마 출판사에서 정혜인 대표를 만났다.

 

알마는 어떤 출판사입니까

김수한(김) — 10년 전에 연남동으로 출근하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조용한 주택가라 산책하기 좋은 동네였는데, 그 사이 변화도 있지만 여전히 사람 냄새가 나고 ‘저녁이 있는 삶’이 있는 동네 같습니다. 알마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 2년 정도 되지요? 장소의 기운일까요? 그 사이 알마 책들도 더 부드럽고 환해진 것 같습니다.

 


정혜인(정) — 파주에 있을 때보다 일하기 편해요. 저자 미팅이나 서점 방문도 파주보다 수월해요. 인쇄 감리는 파주로 들어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요. 로케이션의 의미는 근무자의 일상과도 관계가 커요. 창문을 열어두면 이웃 카페에서 커피 볶는 냄새도 흘러들어오고, 더러 물건 파는 분들의 스피커 소리도 들립니다. 사람 사는 동네죠. 파주출판단지는 그런 면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김 — 알마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여 몇 편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었습니다. 반가운 사실 하나가 눈에 띄더라고요. 보통 출판사 인터뷰는 대표이사의 사진만 실리는데, 알마는 책을 만드는 식구들 단체 사진이 주로 소개되어 보기 좋았습니다.

 

정 — 대표 혼자 책을 만드는 건 아니니까요. 안타깝지만, 오늘은 신간을 마무리하는 날이라 단체 사진은 찍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 — 예전에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꼭 가난하라는 법 없듯이, 편집자가 가난한 직업일 까닭은 없다’고 말씀해주셨지요. 편집일을 해서도 넉넉히 먹고살 수 있다는 말씀에 힘이 났는데, 지금도 그러한지 갸우뚱합니다. 알마 살림은 괜찮은지요?

 

정 — 사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웃음) 제가 평소에 그런 말을 자주 해왔으니 그 기억이 맞을 겁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50만 부, 100만 부 넘게 팔린 책들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실제로 그 책들로 큰돈을 벌기도 했고요.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다만 하고 싶은 일 재미있게 하면서 건강한 소시민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넉넉한 거 아닌가요? 알마 살림살이는 직원 10명이 먹고살 정 도는 됩니다. 작년에 전년 대비 매출액이 28% 올랐고, 영업이익도 6% 정도 됐어요. 시장이 좋지는 않지만 나름 잘 지냅니다. 책의 물성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고, 원고 계약도 활발한 편이라 현금 운용은 빠듯하지만요.

 

셀러로 기획하는 책은 별도로 계획을 짜지만, 대체로 손익분기를 1000부에서 맞추려고 합니다. 합리적인 관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책값을 제대로 받으려고 해요. 거칠게 말해서 초판을 소화할 수 있다면 다른 책 한 권을 다시 출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는 거예요. 알마에서는 1000부 나가는 책을 실패로 보지 않습니다. 물론 1000부도 안 나가는 책이 있긴 하지만, 더 나가는 책도 있으니 상쇄가 됩니다. 중요한 지점이 몇 있는데,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알마는 구간 대 신간 매출이 5대 5에서 4대 6 사이인데, 매년 큰 변동이 없습니다. 알마가 문을 연 지 올 6월이면 만 9년이 되는데, 절판된 책이 총 출간종수의 5%가 안 돼요. 연 500부만 팔려도 중쇄를 찍습니다. 그래서 알마는 주문부수에 비해 일일주문장이 길어요. 작은 부수가 모여 알마의 총매출이 되는 거죠. 지난달에 재론칭한 『남해 유배지 답사기』(박진욱)도 악성 재고라 할만한 800여 부를 제목도 바꾸고 표지도 새롭게 해서 출고했는데 죽었던 책이 살아나서 500부를 더 찍었어요. 기쁜 일이죠. 출판업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우리가 만든 책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김 — 알마 하면 책 본문 뒤에 제본한 간이 도서목록 리플릿이 떠오릅니다. 몇몇 출판사들이 때때로 하지만 알마처럼 꾸준히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정 — 권당 리플릿 비용이 10만 원 정도 들어요. 그만하면 비용 대비 훌륭하죠. 노출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단행본 시장에서 마케팅 비용을 아끼면서 홍보하려는 몸부림이죠.(웃음) 홈페이지는 따로 없고요. 페이스북과 트위터 정도 하고 있는데요. 출간 이후 저자와 독자가 직접 만나는 이벤트를 자주 엽니다. 독자들도 예전처럼 수동적이지 않고 저자를 만나려는 분위기라 출판사로서는 책을 적극적으로 알리기에 좋은 기회죠.

 

김 — 문학동네 계열사로 있다가 독립해 이사하시면서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셨지요? 협동조합 절차는 완료가 되었는지요?

 

정 — 아이쿱생협이 55% 지분을 투자하고, 45%의 지분을 저와 직원들, 몇몇 저자 분들이 나눴어요. 협동조합 기본법의 후속 입법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여서 ‘세금폭탄’을 우려해 아직 법적으로는 주식회사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내용 면에서는 일부 변화가 있었는데요, 사안에 따라 결정권에 자잘한 변화들이 있었고, 핵심은 이익 배분 시스템을 사실상 협동조합 체제로 전환했다는 겁니다. 대부분 출판사들의 매출 대비 인건비 비율이 통상 10~15%로 압니다. 알마는 전년도 기준 24% 가까이 됩니다. 어떻게 회사를 유지하느냐고 걱정해주시는 분도 계십시다. 편집자는 책으로 말하고, 회사는 인건비로 말하라?! 투자 대비 이익을 많이 내는 것만이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전부터 노조 설립도 독려했는데, 드디어 노조도 만들어졌어요. 올해 노조와 첫 연봉협상을 하면서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연봉협상 시기가 다가왔는데도 인상폭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인상폭을 제시해달라고 했더니 그제야 회의를 거쳐 3% 인상안을 제시하더라고요. 어용노조 만들지 말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죠. 그동안 마땅한 이런 과정들이 무시되었는데, 반성할 지점입니다.

 

김 — 출판공동체를 지향하시는데, 일반 기업의 일하는 방식과 크게 다른가요?

 

정 — 출판공동체라고 해서 일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매사에 회의와 토론을 거쳐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권한에 따른 책임과 리더십의 집중도 당연히 필요한 거니까요. 또 제가 살펴야 하는 것들도 분명 있고요. 많은 부분을 직원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게 하려고 애쓰는 건 있어요. 이건 출판공동체와는 무관하고요. 슬슬 은퇴 준비를 하려는 제 속셈인 거죠.(웃음)

 

김 — 정혜인 대표님은 ‘무서운 분’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카리스마 작렬이라는….

 

정 —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감정 표출의 강약이 분명한 편이죠. 제 나름의 원칙이 있는데요. 제작 사고를 낸다든지, 교정 과정에서 본문 일부가 날아가 책을 다시 찍어야 한다든지, 표지에서 글자 하나가 사라졌다든지, 이런 큰 실수는 한두 마디로 끝냅니다.

 


더러 위로도 하죠. 편집자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다고. 본인은 얼마나 황망하고 부끄럽겠어요. 저까지 보탤 필요 없죠. 하지만 작은 실수들, 실수도 능력인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결국 책을 만드는 일은 ‘안다’ ‘알고 있다’에서 그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체화되어야 하는 거죠. 가령 조사나 접속사의 쓰임을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잘못된 부분을 짚어내지 못한다면 그건 조사와 접속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디테일입니다. 최고인 사람은 작은 것에 강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작은 것이 큰 변화를 불러오듯, 소소한 요소들이 모여 좋은 책이 만들어진다고 봅니다.

 

알마는 어떤 책들을 만듭니까

김 — 지난 5월 14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무죄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희생자는 참기 힘든 고통 속에 무연한데, 가해자는 어느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 이 기묘한 상황이 참괴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지, 말문이 막힙니다. 누군가 이 사건을 추적해 논픽션을 만들어주길 고대했는데, 신문을 보니 『거짓말 잔치』라는 제목으로 조만간 출간된다는 소식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혹시 이렇게 뜨거운 책이라면, 알마에서 나오나 하고 잠깐 기대가 일었습니다.

 

정 — 알마는 아니에요. 그런 책은 꼭 필요하죠. 밀양이나 세월호, 쌍용자동차 같은 안타깝고 충격적인 일에 알마가 함께하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책도 인연인 것 같아요.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닌데, 마음먹는다고 해서 책을 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김 — 알마에서 펴내는 책들을 보면 뜨겁고 위험한 이슈를 건드리는 출판사라는 느낌이 듭니다. 재미나고 술술 읽히는 책보다는 무겁고 딱딱한 책들도 많고, 어떤 뚝심과 결기의 집요함이 느껴지는 목록입니다.

 

정 — 그런 책들은 이슈를 타고 드러나는 것이고, 차분하고 재미있는 책도 꽤 있습니다. 알마 책들의 무거움에 대해 변을 좀 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책을 만든다는 것은 여전히 운동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인데요. 현재성의 가치를 높이 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샘깊은오늘고전’ 시리즈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오늘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놓을 수가 없어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행본도 매체라는 사실입니다. 신문이나 TV 같은 제도권 매체는 큰 목소리만 노출시킵니다. 단행본은 다기한 작은 목소리로 다양성을 확보하고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작은 단행본 출판사들이 기획력을 발휘한다면 한국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때 다양성은 책을 왜 읽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김 — 현재성과 다양성에 대한 강조는 요즘 소란스러운 고전과 인문학 열풍과는 좀 거리가 있는 듯합니다.

 

정 — 열풍은 어차피 지나가는 것입니다. 고전 열풍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요. 문자나 텍스트는 현재의 욕망을 기록하기 마련입니다. 기원전 2000~3000년 전 수메르 문명으로 거슬러 가볼까요? 그들은 문자로 무엇을 거래했는지 기록했습니다. 서양이 그렇게 거래 기록을 문자로 남겼다면, 동양의 문자는 당대의 체제 유지와 상류층을 위한 자기 계발의 도구였습니다. 한무제의 필요에 의해 그가 다시 불러낸 공자 말씀이 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필독서가 됐는지…. 물론 연구자나 깊이 공부를 해볼 목적이라 면 당연히 읽어야겠지요. 전 국민의 필독서, 혹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그런 책들이 들어가 있다는 건 기이한 일입니다.


알마 저자인 백지연 선생이 출연하는 드라마라 요즘 <풍문으로 들었소>를 챙겨 보고 있는데요. 대형 로펌 대표인 상류층 주인공이 자식들에게 플라톤의 『국가』를 읽히고, 자신의 속물성을 치장하기 위해 공자님 말씀을 들먹입니다. 어이없어 실소가 나오더라고요. 제국의 통치, 기득권 체제 유지를 위해 『논어』를 읽힌 맥락이 지금 한국사회와 어떻게 접속하고 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지요. 지금은 오히려 묵자를 읽어야 할 때 아닌가요? 고전을 다루더라도 그것의 현재적 의미에 주목하고 새로 읽기를 강조해야 합니다. 저희 사마천의 『사기』 완역 시리즈가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의 의미, 좋은 책이란 무언가를 역사적으로 탐문한 『책의 정신』(강창래)도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책입니다.

 

김 — 출판 기획은 반 발 앞서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한 발 앞서면 너무 이르다는 말이기도 한데, 알마 책들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일반 독자들의 관심사와 독서 습관의 경계를 살짝 넘어간 책들이라고 할까요? 무척 낯설거나 무거워 보이는 기획들, 가령 『누가 무지개 깃발을 짓밟는가』(스티븐 V. 스프링클)나 『이븐 할둔』(이브 라코스트), 올리버 색스 전작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에세이들,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장 마르크 드루앵),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제이 그리피스), 『난학의 세계사』(이종찬) 같은 책들은 어느 출판사에서 시도할 수 있을까요?

 

정 — 거대 담론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와 문체를 찾습니다. 더해서 한국사회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그 비밀과 작동 방식을 들추는 책들,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세상의 여러 문제를 추적하는 논픽션 책들을 펴내려 합니다. 가령 『우유의 역습』(티에리 수카르), 『감시의 시대』(아르망 마틀라르), 『검열에 관한 검은책』(에마뉘엘 피에라 외),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빌프리트 봄머트), 『질병판매학』(레이 모이니헌 외) 등이 그런 책들인데, 판매도 꾸준하고 반응도 느껴져 보람을 느낍니다. 학제간의 경계에 갇히지 않은 연구, 성소수자나 장애인 등 마이너리티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려 합니다.

 

김 — 한 발 앞선 기획인 데다가, 책을 만드는 물리적 시간이 길어 한 발 더 늦어 판매 포인트를 놓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정 — 알마에서 내는 책들의 시의성이 부분적으로 지속되고 보편성을 갖는 터라 약간의 수익을 내는 데는 부족하지 않아요. 판매 포인트를 놓치는 건 매우 안타깝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힘 쏟아 만들어서 길게 가는 겁니다.

 

김 — 기획의 대부분을 대표님이 주관하시나요?

 

정 — 전에는 그랬어요. 올해부터는 편집자들의 기획 역량을 강화하려 합니다. 1월부터 2시간씩, 주 2회 기획회의를 하고 있어요. 자율적으로 진행해보라고 맡겨 뒀는데, 기획안들이 느슨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초부터 다지자는 뜻에서 기획회의를 정례화하고, 트렌드와 매체 분석 등을 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획안을 작성합니다. 기획안의 완성과 실현은 어차피 기획자의 몫이니 기대하고 있습니다.

 

알마는 어떻게 기획하고 편집합니까

김 — 알마에는 스타일이 강하고 까다로운 필자들이 많아 보입니다. 고종석, 손석춘 선생부터 올리버 색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까지 국내외 필자들의 면면이 ‘세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 — 네, 저자 관리가 쉽지 않아요. 모든 편집자의 고민일 텐데요. 그래도 한 가지는 지키려고 애씁니다. 쉽지 않지만 저자들의 사소한 말에도 귀 기울이는 것. 번역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저자가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알아야 편집자도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펼칠 수 있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어떤 맥락에서 이 문장이 들어갔는지 꼼꼼히 살피고 매사에 의문을 가지는 태도가 우선돼야 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히친스의 『논쟁』에 썼던 표지글인데, 편집자에게도 꼭 필요한 태도라고 봅니다.

 

김 — 필자와의 대면 접촉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안과 설득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 — 중간에 아는 사람을 통한 소개로 필자를 접촉하는 방식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이메일, 편지, 만남의 단계로 관계를 트는데, 필자의 이야기를 진득이 듣고 우리의 생각을 타진합니다. 저는 지난해부터 기획 미팅에 거의 나가지 않고 편집자들이 전담하고 있습니다. 판단을 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살펴보는 경우는 있지만, 실무 교정에서도 손을 뗐어요. 『고종석의 문장』이 제가 마지막으로 본 교정지입니다.

 

김 — 이제 알마의 주요 책들을 훑어보지요. 먼저 인터뷰집 전문 출판사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터뷰 대담집의 본격 성공을 이끄셨잖아요?

 

정 — 그건 사실 창업 초기에 수익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한 처방전이었어요. 창업 초기 60권 정도 기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대만큼 수익을 얻지 못했어요. 만들고 싶은 무거운 책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살아남자 싶어서 좀 가벼운 책을 기획한 겁니다. 제가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데, 평전 시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만큼 미미하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좀 캐주얼하게 접근해볼 방법을 고민하다가 인터뷰집이라는 형식을 찾게 되었어요. 한국사회를 모자이크 해보자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들, 우리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김 — 이어진 인터뷰이들의 면면이 익숙하다가, 갈수록 신선한 인물이 세팅되었습니다. 광고인 박웅현, 만화가 이원복 선생 편까지는 출판과 먼 전문 분야가 아닌데, 이어 빗물박사 한무영, 법의학자 문국진 선생 편은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들려주어 반가웠습니다. 배우 신성일이나 영화감독 양익준, 김조광수, 뮤지션 신대철 편은 우리 대중문화의 두께와 너비를 새롭게 확인시켜준 반가운 기획인데요.

 

정 — 평전과 달리 그가 일궈낸 한 분야의 주제에 집중하자는 게 애초 기획 의도였으니까요. 뒤로 갈수록 주제가 더 잘 드러났을 뿐입니다. 철학자나 사상가, 학자들의 필생의 학문 주제를 집중 대담하는 책을 기획하고 싶은데 인터뷰어 섭외가 너무 어려워요.

 

김 — 알마 소개글에 ‘살아 숨 쉬는 인문 교양’과 ‘대안을 담은 교육 비평’을 펴낸다고 밝히셨어요. 주요 출간 토픽들을 보니 빈곤과 인권 및 평화 문제 등을 다룬 인문 사회 논픽션, 교양 과학과 환경 생태 관련서, 자녀 교육과 청소년 심리, 의료사회학과 음식 및 질병 관련 논픽션, 책읽기와 도서관 관련 책, 협동조합 관련 기획, 폐사지와 유배지 기행 등 문화 지리서, 대중문화 에세이 등이 여럿 보이고 특히 뇌과학과 범죄심리학, 언어학에 관한 책들이 많아 이채롭습니다.

 

정 — 수많은 인문 교양, 논픽션을 도서관 10진 분류법에 모두 채워 넣을 수 있을까요? 고전적인 장르 범주보다는 변화하는 지식장을 반영한 작은 계열, 겹쳐 읽을 수 있는 주제, 현재성을 띤 의제들로 기획 방향을 갈래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류와는 다른 시각, 생성중인 지식, 새로운 필자들의 책들을 주로 소개하게 된 거죠. 가령 범죄와 이상 심리, 법의학은 인간의 이해를 넓히는 창입니다. 선악의 구분을 넘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묻는 책들. 만드는 재미도 있고 판매도 좀 되어 범죄 덕을 봤어요.(웃음)

 

김 — 올리버 색스는 거의 전작이 소개된 듯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색스의 『편두통』은 읽어보려다 편두통이 나는 듯했습니다. 말기 암 투병중인 색스가 올초 <뉴욕타임스> 에 기고한 「나의 삶(My Own Life)」이라는 겸허한 성찰의 글이 감동과 화제를 주었는데, 책 판매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었나요?

 

정 — 『편두통』은 색스의 초기 작품이라 원문이 난삽합니다. 번역하고 감수하고, 두 분 선생님이 엄청 고생하셨어요. 교정 작업도 거의 6개월이 걸렸어요. 그렇게 어렵게 나왔는데도 편집자로서 부족함을 느끼는 책이에요. 색스의 저작물은 소량으로 꾸준히 나가는데요, 기사가 뜬 이후에 큰 폭은 아니고, 좀 움직이긴 했어요. 『뮤지코필리아』 는 순출고가 8000부를 넘어섰고요. 다른 타이틀들은 1000~2000부 선이에요. 큰 수익은 아니지만 손익분기는 충분히 넘어섰다고 봐야지요. 번역비도 많이 들고 교정 난 이도도 최상급이지만, 휴머니티가 살아 있는 그의 글은 매력이 넘칩니다. 올해 안으로 올리버 색스 자서전을 펴내려 하는데, 판매를 기대해봅니다.

 

김 — 알마 책의 물성 또한 눈에 두드러집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늘 “겉과 속이 따로 놀지는 않는가” “과하게 포장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자기 점검을 한다 하셨지요. 맞춤한 만듦새라는 감탄을 하면서도 과하게 비용을 쓰시진 않나 궁금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나온 『징비록』은 최근 만난 책들 가운데 최고의 물성을 보여주지 않나 부러웠습니다만, 1만 3800원에 그게 가능한지요?

 

정 — 그 책은 어린이용 징비록을 성인용으로 새로 편집, 디자인한 건데, 해설을 풍부하게 붙인 장점이 있습니다. 제작 비용이 커서 500부 단위로는 제작 단가가 안 나와요. 책 팔아 큰돈 벌려 하지 않으니 설계가 가능했던 건데요. 다행히 이부록 그림작가와 안지미 디자이너가 계약금 일부에 인세를 받는 방식으로 계약에 동의해주어 작업이 가능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현재 7000부 찍었고, 순출고가 5500부 정도 됩니다.

 

김 — 이슈북 시리즈는 참여한 필자들의 이름이 쟁쟁합니다. 크게 출판 이슈가 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계속되나요?

 

정 — 매체로서 단행본의 기능과 형식을 고민해본 한국형 신서인 셈인데, 반응이 책마다 편차가 있어요. 세로로 길쭉한 판형이 아무래도 낯선가 봅니다. 궁리 중이에요.

 

김 — 개정도서정가제 실행 이후에 출간량이 줄어들긴 했습니다만, 일주일에 100~200여 권의 신간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개중에 ‘새로운 책’은 그리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알마는 젊은 필자들이나 신진 필자의 등장을 심심치 않게 보여주셨는데, 『현시창』(임지선)은 놀랐고, 『검색되지 않을 자유』(임태훈), 『모서리에서의 사유』(최태섭)도 반가웠습니다. 『가장 사소한 구원』의 라종일, 김현진 조합도 의외였습니다.

 


정 — 2012년에 나온 『현시창』은 성기승 차장이 기획한 책이에요. 단행본 출판사의 의무 가운데 하나가 단행본 경험이 전무한 이들에게 필자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현장형 논픽션 필자를 찾아내려 합니다. 최근에 몸으로 글을 생산하는 멋진 필자 한 분과 접촉하고 있는데, 이런 만남들이 흥분됩니다. 라종일 선생은 『가장 사소한 구원』을 하면서 새삼 글을 잘 쓰시는 분이란 걸 알았습니다. 세대를 달리하는 두 작가가 편히 주고받은 메일을 통해 일상의 관찰과 고민을 담아보자는 의도였는데, 넉넉한 글쓰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도 좀 팔리고 있어요.

 

김 — 『MB의 비용』(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엮음) 역시 잘 나가지요? 시기도 적절했고, 여기저기 노출도 많이 되었고요.

 

정 — 한 10만 부 나갔느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1만 8000부 찍었어요. 앞서 출간된 이명박 자서전에 기댄 기획이 아니라 오래전에 유종일 선생의 기획 아래 차분히 써 내려간 글입니다. <프레시안>에 오랫동안 연재되었고, 거기에 인포그래픽을 추가하고 꼭지별로 들어가는 말을 넣어 단행본다운 포스를 지니게 되었어요. MB의 과욕과 실정에 대한 배설 차원의 까발림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분석과 비판이 담긴 책입니다. 판매부수 듣고는 많이들 놀라더라고요. 대한민국은 그렇게 훌륭한 사회가 아닙니다.(웃음) 좀더 널리 읽혔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아직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어요.

 

김 —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을 취재한 르포르타주 『노동여지도』(박점규)도 고마운 책입니다. 책 제목도 좋은데요?

 

정 — <주간경향>에 연재한 원고를 묶은 책인데 그때 썼던 제목이에요. 꼭 필요한 책인데 너무 늦게 나온 감이 있죠. 출판이 사회와 연대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그래서 노동사를 간략히 정리해 꼭지별로 넣자는 의견이 나왔고, 연재 원고지만 단행본스러운 원고가 완성된 것입니다. 추가 원고와 지도 등 원고 보강에 힘을 썼어요. 노동절에 맞춰 내느라 저자 분도 편집자도 고생이 많았지요. 그 책도 2쇄를 찍었어요.

 

김 — 고종석 선생의 책들도 반응 좋지요? 알마 아니면 만들기 쉽지 않은 책 같은데요.

 

정 — 문화계의 중요한 필자로 그분의 글을 즐겨 읽는 독자였어요. 절필 선언 후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나 글쓰기에 관한 책을 내자는 제안을 하게 됐고요. 절필한 분이라 가능한 방식을 고민하다 강연을 기획해 책으로 엮기로 한 것이지요. 수강료 부담이 적지 않았는데, 예상보다 많은 독자들이 신청했습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정원을 다 채우고 미처 신청하지 못해 강의를 듣지 못한 분들도 꽤 있었어요. 강의로 수익을 내려는 의도는 아니었기에 강사료를 충분히 드릴 수 있었고, 출간에 따른 인세는 당연히 따로 보장해 드렸어요. 녹취를 풀어 문체를 다듬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어찌하면 고종석 선생의 스타일을 실어 나를 수 있을지 고민했고 초기 작업이 만만치 않았어요. 고생 좀 했죠. 이후 필자의 첨삭 과정을 거쳐 책이 나왔습니다.

 

김 — 이런 경우 편집자에게 큰 역량이 필요하겠습니다.

 

정 —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역으로 뺄셈을 하듯이 책 출간 과정을 복기해보면, 편집자는 그 모든 과정에 관여하는 사람입니다. 쉽지 않지요.

 

알마는 어디로 계속 가고 있습니까

김 — 최근에 「선녀와 나무꾼」을 비튼 짧은 연극 한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당에서도 선녀가 늘어 정규직 자리를 구하기 어렵게 된 한 선녀가 나무꾼을 꼬셔 결혼(취업)에 성공합니다. 자식 둘을 낳고 근근이 살아가던 어느 날, 귀가한 나무꾼이 전업의 고민을 피력합니다. 사람들이 나무 대신 땅속에서 캐낸 ‘검은 돌’만 찾으니, 나무 캐서 어찌 먹고사느냐고. 무슨 까닭인지, 선녀는 나무꾼은 나무꾼이어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저렇게 산에 나무가 많은데 쓸모가 없어질 리 없다’고. 감동이지요! 다음 장면에서 나무꾼이 이번엔 ‘검은 물’이 쏟아진다는 소식을 전하는데도 선녀는 나무꾼을 격려하지요. 저는 여기까지 보고서는 나무꾼이 책 만드는 사람, 편집자로 동일시되어 잠시 낙담하였습니다. 각설하고,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인터넷 시대에 이렇게 돈 안 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알마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알마의 독자들은 누구입니까?

 

정 — 알마의 독자들은 연령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 같아요. 책에 담긴 생각과 내용으로 다른 출판사의 목록과 차별된다고 생각하는데, 독자들의 호불호도 분명한 편입니다. 알마의 방향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계속 늘려가려 합니다.

 

김 — 빅데이터로 산출해 해당 독자가 관심 가질만한 책의 출간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시대입니다. 저도 그렇게 추천 받은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아 둡니다. 종종 출판의 성공 사례를 운을 빌어 설명하곤 했는데, 이제 그런 축복은 드물어질 것 같습니다. 또한 책의 경쟁력 상실은 책 내용의 경량화로도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솔직한 제목의 베스트셀러도 그렇고,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선전을 보면 이제 지식을 어떻게 편집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정 — 책은 앞으로 기호품이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책을 읽거나, 아예 보지 않거나. ‘인문학’이니 ‘고전’이니 ‘책이 답’이라느니, 하는 동어반복은 이제 길을 잃었다고 봅니다.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봤는데요. 게임하는 아이들에게 이거 너무 중요한 것이니 꼭 해라, 하고 나서는 무조건 후기도 써야 한다고 하면 지레 도망가지 않을까요? 반면 책 읽는 건 금지시키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야만 읽을 수 있는 거죠. 그 세계가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일면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 뭐가 저렇게 재미있어서 어른들은 책을 끼고 살까, 이런 상황이 오면 아이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몰래 숨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찾지 않을까요? 독서 환경이 바뀌어야만 하는 거죠. 그때까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 텐데요. 책은 책다울 때 책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책만큼은 경량화가 답은 아닌 것 같아요. 역행이라 할지 모르겠는데, 알마는 절판된 훌륭한 책들을 재번역하고, 재출간하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당연히 돈 안 되는 일입니다. 책이 사라지는 시대에 책의 운명을 지키고 연장하는 사람들이 편집자입니다. 알마는 지난해에는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과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의 『모성애의 발명』을 새로이 다시 펴냈고, 다음 달에는 린 헌트의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을 재출간합니다. 계속 이런 작업들을 해나갈 겁니다.

 

김 — 생각난 김에, 저 ‘고색창연’한 이지누 선생의 책은 누가 읽나요?

 

정 — 가장 안타까운 책들이에요. 이지누 선생의 텍스트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저 같이 이지누라는 스타일에 대한 향수를 지닌 독자가 많지 않아요. 어떤 종이를 쓰든 이지누의 것으로 보이는 사진과 종이의 물성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가진 저자는 이제 거의 없을 겁니다. 사실 어디에서 만들어도 그렇게 나올 책들인데, 그 문체를 알아보는 독자에게 값진 책을 제공하는 것도 출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 슬슬 예정된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올해 준비 중인 책 몇 권 소개해주세요.

 

정 — 뉴턴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벽돌 책’을 몇 년째 준비 중인데, 하반기에는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빅히스토리 관련한 대작도 준비 중이고요. 그 정도만 공개하지요.

 

김 — 끝으로, 꼭 만들고 싶었던 책이 있다면?

 

정 — 사전류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주제별, 테마별로 항목이 구성된 독특한 사전이요. 사라지는 사물의 세부 명칭을 도해로 해제하는 사전 같은 건 정말 만들어보고 싶죠. 지식의 변동과 언어의 소멸에 대한 아카이브가 필요한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합니다.

 

김 — 처음이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정 —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입니다. 크게 아프면 세상이 달라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웃음)

 

김 —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5년 안에 내부 일꾼들에게 회사를 넘겨주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 꿈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정 — 회사를 잘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어요. 나는 터를 보여주는 사람이니까요.

 

출판사를 찾아가는 즐거움 중 하나는, 서가에 꽂힌 그 출판사의 책들을 한눈에 일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책들을 한꺼번에 훑으면서 이 출판사는 이런 지도를 그려 왔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의 안심이 좋다. 그 지도가 알아볼만한 형상일 경우 얼마나 반가운지. 게다가 두 시간 동안 두서없는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오는 길에, 정혜인 대표는 알마 책 중 보고 싶은 책을 한 권 선사할 테니 골라보라고 하였다. 날카로운 질문 하나 준비하지 못했으니 ‘풍문으로 들었던’ 『크리티컬 매스』(백지연)는 밀쳐 두고, 『뮤지코필리아』를 꼽아 들었다. 책 표지에 실린 음악을 듣는 올리버 색스의 황홀한 표정에 끌렸다. 나는 그게 책에 흠씬 빠진 사람의 얼굴로 보였는데, 이 ‘비블리오필리아’의 이름이 혹시 알마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애칭이 알마alma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책이 한데 모여 있었다는 인류 지성의 성소, 그 도서관은 번역과 출판일도 겸했다고 한다. 알마는 또한 스페인어로 영혼, 정신,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아랍어로는 기르다, 양육하다의 의미. 다양한 뜻이 근사하다. 알마 출판사의 등장 이후 ‘알’ 자가 들어간 출판사들이 여럿 뒤를 이었다. 알랩, 알키, 알투스, 알비 등. 모두 특색 있는 책들을 내는 곳들이다. 엉뚱하지만, 앞으로 알마를 ‘알짜’ 출판사의 시작이라 부르련다.

 

강상중 교수는 최근 출간된 『마음의 힘』(사계절, 2015)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무지막지한 시장경제의 힘에 쓸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고통만 남은 동시대인들을 근심한다. 그는 다른 삶을 상상할 용기를 잃은 병든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마음의 힘’을 키우자고 제안한다. 그가 제안하는 방법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생산성이나 합리성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는 세계에 풍덩 뛰어드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이다. 마음의 체력을 기르기 위한 삶의 잠시 유예. 그게 바로 책읽기의 시간이 아닐까. 일단 읽기 시작하는 것. 읽다 보면 어디로든 움직이리라. 오늘 ‘알마 도서관’ 정혜인 대표와 나눈 이야기가 겹쳐 떠올랐다.

 

‘기획회의’ 393호 2015. 6. 5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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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는 인지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2015년 7월 13일  |  By:   |  과학  |  1개의 댓글

컴퓨터 사용이 주를 이루자 몇몇 미술 학교에서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수업이 손으로 그리는 수업을 대체하였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그리는 것이 글을 읽고 쓰는 데 필수 요소라고 지난 몇 년간 주장해온 사람들은 컴퓨터를 이용한 미술 프로그램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이자 ‘그림 그리기는 곧 생각하기’라는 2008년 논문의 저자인 밀톤 글래이저는 “손으로 물건을 그릴 때 우리는 완전하게 집중하게 되며, 이렇게 집중할 수 있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무언가를 정말로 파악하고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펜과 종이를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새로 나온 두 권의 책은 낙서나 스케치, 그리기 등이 우리의 사고를 촉진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추켜세웁니다. 또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다양한 브랜드의 맞춤형 스케치북이나 일기장, 수첩도 다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컴퓨터나 디지털 기기가 점한 우위에 대한 일종의 미적 반란이라 말할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 그리는 것의 필요성이 인간의 뇌리에 뿌리내려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낙서건 이보다 정교한 그림이건, 인류가 이미지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언어를 사용한 것보다 앞서며, 그린다는 것은 어떤 개념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필수입니다.

예술가만이 연필이나 펜, 또는 붓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낙서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행위입니다. 더구나 ‘응용 인지 심리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 의하면, 낙서를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약 29% 더 정보를 잘 기억해냅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예술가의 전유물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낙서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정교함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원시적인 방법일지라도 그리기는 종종 단어만 사용해서는 불가능했을 통찰력이나 발견을 촉발시키기도 합니다. 냅킨이나 쪽지에 적었던 아이디어가 수백만 달러의 가치로 돌아왔던 예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림을 이용해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에 대한 ‘낙서 혁명’이라는 책을 최근 발간한 수니 브라운은 “낙서를 하는 사람에게 그리는 기술과 학습의 질 사이에 관계가 없기 때문에 사실 낙서의 미적 가치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합니다. 아주 엉망인 그림도 그것을 그린 사람에게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미적인 정교함이 아닌 무언가를 배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브라운은 기술적인 낙서방법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 시각적 언어는 재주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열려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낙서 지지자로서 그녀는 낙서의 실용적 측면에 기초해 낙서를 잘하도록 연습하는 것은 글을 잘 쓰는 사람만이 문장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다고 믿습니다.

브라운의 낙서와의 인연은 나중에 빛을 발하게 됩니다. 자라면서 그녀는 공책의 가장자리에 주로 낙서를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The Grove라는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면서,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간단하며 적용할 수 있는 시각적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2008년 그녀 스스로 창의적 컨설팅 회사를 시작한 이후, 그녀는 이 적용할 수 있는 시각적 언어를 낙서라는 단어를 사용해 설명하고 ‘인식의 행위’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옳았습니다. 사실 낙서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바꾸어 놓습니다. 낙서는 사람들을 정신 산만한 상태에서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상태로 이끌어주는 차분한 행위입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낙서를 한 순간에 신체와 신경에 변화를 주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리기에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이 낙서를 통해 열반을 경험한다면, 직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매일 천국에 사는 것 같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동서적 삽화가로 수상 경력이 있으며, 최근 ‘그리기는 마법’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한 존 헨드릭스는 예술가들이 나이를 더해가면서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리기를 즐기는데, 우리는 더 이상 그리기를 즐기지 못해요. 자라면서 사람들은 미술 학교에 들어가서 이미지를 그리는 데 어떤 방법이 옳고 그른지를 배워요. 학교에서 빛, 공간, 구도, 자세, 선, 모양을 그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요. 하지만 그 이후에 우리는 즐기는 것을 배우기 위해 또 다시 훈련 받아야 하죠.” 헨드릭스에게 즐거움을 찾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를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첫 걸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언제 그리기를 시작했어요?”가 아니라 “언제 그리기를 그만두었어요?”입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우리 모두는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예술가와 일반인 모두에게 그리기는 예술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기는 바로 생각의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원문출처: 디아틀랜틱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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