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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영혼이다.
온갖 빛깔의 꽃이 피는 귀한 단풍나무에서 나온 호접마마의 후손들은 나비를 영혼으로 여긴다. 그래서 먀오족(苗族) 사람들은 집으로 고운 나비 한 마리가 날아 들어오면 조상님이 배가 고파 찾아 오셨다고 여기고 상을 차려드린다. 다른 사람과 다툴 때 나비가 나타나면 조상님이 그 다툼을 못마땅해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싸움을 그만둔다. 푸른 숲 한가운데에서 홀연히 꿈처럼 날아오르는 찬란한 나비, 꿈틀거리는 몸을 벗어버리고 가볍게 훌쩍 날아오르는 나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혼’을 의미한다.
그 호접마마가 알록달록한 빛깔의 알 열두 개를 낳는다. 창세의 신 푸팡(府方)이 커다란 할미새를 불러다가 알을 품으라고 했다. 먀오족의 신화에는 거인 신들이 많이 등장한다. 푸팡은 다리 관절이 아홉 개나 있고 팔이 여덟 쌍 있는 거인이다. 물고기 아홉 광주리, 찹쌀 떡 아홉 통을 먹는 힘센 그가 한데 붙어있던 하늘과 땅을 갈라놓았고, 거인신 양유(養優)는 산을 만들었으며 머리에 뿔이 있는 거인 슈뉴는 강을 만들었다.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없어서 하늘과 땅이 흔들거릴 때 바오궁(寶公)과 슝궁(雄公), 쥐궁(且公)과 당궁(當公)이 머나먼 곳에서 온갖 고생 끝에 금과 은을 가져다가 녹여 금 기둥, 은 기둥을 만들어 하늘을 받쳤다.
기둥은 만들었지만 해와 달이 없어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신들은 고민했다. 어떤 모양으로 해와 달을 만들까? 돌을 강물에 던질 때 퍼져나가는 둥근 물결무늬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 무늬를 모델 삼아 해와 달을 만들었다. 거인 신들은 금으로 열두 개의 태양을, 은으로 열두 개의 달을 만들고 남은 부스러기로 별을 만들었다. 거인 신들이 왼쪽 어깨에 태양을, 오른쪽 어깨에 달을 지고, 소매에는 별을 넣고 허리에는 은하수를 차고 푸른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을 제자리에 놓았다. 다른 버전에 의하면 하늘에 걸린 해와 달이 자꾸 흔들리니까 남은 부스러기로 별을 만들어 못처럼 하늘에 박아놓았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열두 개의 태양과 달이 질서를 무시하고 한꺼번에 떠오르니 활 잘 쏘는 신 쌍자(桑札)가 한 개의 태양과 달만 남기고 다 쏘아서 떨어뜨렸다.
한 개씩 남은 태양과 달은 겁이 나서 숨어버렸고 세상은 암흑천지가 되었다. 숨어있는 해와 달을 불러내기 위해 신들은 온갖 동물들을 보내지만 결국 수탉의 청랑한 목소리에 해와 달이 다시 나온다. 신들은 세상에 다시 빛을 가져다준 수탉의 공로를 기려 예쁜 빗을 하나 주었고, 수탉은 그것을 자랑스레 머리 위에 꽂고 다녔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는 수탉의 붉은 볏이다.
먀오족의 창세신화에는 이렇게 많은 거인 신들이 등장한다. 서구의 신화에도 세상의 시작에는 거인 신들이 있다. 그 거인 신들의 신화가 피로 물들어 있다면 먀오족 신화의 거인 신들은 선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지금의 먀오족 사람들처럼 부지런하다. 금과 은을 운반해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해와 달을 하늘로 운반하다가 실수로 해와 달을 물에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슬퍼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유쾌하게 함께 힘을 합해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창조의 거대한 작업을 마무리한다.
한편 노란 알에서 나온 최초의 인간 장양(姜央)은 하얀 알에서 나온 우레신 뇌공(雷公·꺼우하오라고도 한다)과 끊임없이 다툰다. 먀오족의 오래된 노래는 열두 개의 알 이야기에서 홍수이야기로 이어진다.
열두 개의 알에 관한 노래 다 끝났네/ 이제 무얼 부를까/
다른 구연자가 와서 노래 이어 가네/ 홍수가 하늘까지 차오른 노래를 불러야지/
알에서 태어난 장양과 뇌공, 호랑이와 용 등은 누가 땅의 주인인가를 놓고 내기를 한다. 땅은 결국 꾀를 써서 승리한 장양의 차지가 되며 뇌공은 하늘로 올라간다. 그런데 뇌공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개 한 마리만 남기고 소와 말을 모조리 갖고 가버렸다. 세상에 남겨진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농사를 지으려니 농사가 잘될 리 없다. 화가 난 장양은 마침내 뇌공을 찾아간다.
“누렁이가 힘이 없어 논을 갈지 못해. 내게 너의 소를 빌려주면 논을 갈고 나서 돌려주지.”
하지만 장양은 논을 다 갈고 난 뒤에 소를 죽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고기를 다 먹어버렸다. 소의 꼬리와 뿔만 남겨 논에 묻어두고 장양은 뇌공에게 달려가 슬픈 척 하며 말했다.
“뇌공아. 이를 어떡하지? 논이 질척이고 소는 무거워서 논을 다 갈고 나니 소가 그만 논에 빠져 묻혀버렸단다.”
뇌공은 그 와중에 녹색 비단옷을 챙겨 입고 상투를 잘 매만지고서 논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정말 소의 꼬리와 뿔만 보이는 것이었다. 놀란 뇌공이 소의 꼬리를 잡아 당겨보고 나서 피가 묻어있지 않은 것을 보고 장양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네 이놈, 남의 소를 빌려다가 다 먹어버려? 내가 하늘로 돌아가 쇠망치와 도끼를 들고 돌아와 네 놈을 죽일 것이다.”
비단옷을 챙겨 입고 상투까지 틀고 왔는데 장양에게 속아 공연히 힘을 쓰느라 비단옷은 더럽혀지고 상투는 흐트러진 것이 생각할수록 분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싸움은 팽팽하게 이어진다. 뇌공이 마침내 장양에게 잡혔지만 장양이 외출 한 사이에 장양의 두 아이는 뇌공이 보여주는 현란한 마술에 정신을 빼앗겨 그가 원하는 물과 도끼를 가져다준다. 오누이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뇌공은 오누이에게 조롱박 씨앗을 준다.
“나를 살려줘서 고맙구나. 이 씨앗을 심어라. 이틀 후에 창고보다 큰 조롱박이 열릴 거야. 속을 파내고 그 안에 들어가렴. 큰 배가 되어 너희를 보호해 줄 거야.”
하늘로 돌아간 뇌공은 ‘하늘의 배꼽’을 열어 비를 퍼부어 홍수를 일으켰고 착한 오누이는 거대한 조롱박 속에 숨어 대홍수에서 살아남는다. 뇌공과 싸우러 하늘로 올라간 장양은 그곳에 남고, 오누이만 돌아와 우여곡절 끝에 혼인을 하게 된다. 마침내 먀오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바사 먀오족 마을의 군위안량(滾元亮)이 바로 그 장양의 화신이다. 그의 키는 정말 작다. 군위안량이 어려서 키가 자라지 않자 어머니가 마을의 장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고 장로는 귓속말로 어머니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장양의 화신이야.”
중국 국무원에서 유일하게 총을 지니고 다녀도 된다고 허락해주었다는 바사 먀오족 마을의 지도자 군위안량, 그가 지니고 다니는 총의 크기만큼 키가 자랐을 때 그는 이제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강렬한 지도력으로 마을을 이끈다. 숲 속의 통과 의례에서 오랜 전통에 따라 낫으로 머리를 밀어주는 그의 얼굴에서 단풍나무의 후손, 강인한 장양의 모습을 본다. 오랜 옛날, 동쪽에서 살던 먀오족의 인구가 늘어나고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하게 되자 그들은 좋은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들을 이끌었던 신화 속의 영웅이 바로 슝궁(雄公)이다. 그는 지혜로움과 용기로 부족을 이끌고 서쪽으로 온다.
좋은 곳은/ 하늘 저편에 있어요/
좋은 생활 하려면/ 산 저쪽으로 가야 해요/
살던 땅을 바라보며 눈물 짓는 이들을 이렇게 달래며 그는 목말라 하는 할머니에겐 찬물 한 모금, 힘들어하는 할아버지에겐 담배 잎 하나를 드리며 그들을 이끈다. 마침내 그들은 세 개의 강을 지난다. 강의근원에 금이 있는 누런 강, 강의 근원에 은이 있는 하얀 강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말한다.
“은이 있는 곳으로 가자. 은이 가장 귀해. 희고 예쁘잖아. 옷에 장식할 수 있는 은이 많은 곳으로 가자.”
“아니야. 금이 은보다 귀해. 누런 강물을 따라 금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러나 슝궁이 말한다.
“금과 은은 다 파내면 끝이지요. 벼꽃 향기 가득한 강으로 갑시다.”
그들은 금과 은을 버리고 벼꽃 향기를 택했고,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욕심을 버린 조상들 덕분에 그 후손들은 지금도 구이저우성 동남쪽 벼꽃향기 아름다운 곳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이루고 있으니.
〈김선자 중국신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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