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 그만 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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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雨ニモマケズ

 

         宮沢賢治



雨ニモマケズ 風ニモマケズ
雪ニモ 夏ノ暑サニモマケヌ
丈夫ナカラダヲモチ 欲ハナク
決シテ瞋ラズ イツモシヅカニワラッテヰル
一日ニ 玄米四合ト 味噌ト少シノ野菜ヲタベ
アラユルコトヲ ジブンヲカンジョウニ入レズニ
ヨクミキキシワカリ ソシテワスレズ
野原ノ松ノ林ノ蔭ノ 小サナ萱ブキノ小屋ニヰテ
東ニ病気ノコドモアレバ 行ッテ看病シテヤリ
西ニツカレタ母アレバ 行ッテソノ稲ノ束ヲ負ヒ
南ニ死ニサウナ人アレバ 行ッテコハがラナクテモイイトイヒ
北ニケンクヮヤソショウガアレバ ツマラナイカラヤメロトイヒ
ヒデリノトキハナミダヲナガシ
サムサノナツハオロオロアルキ
ミンナニデクノボートヨバレ ホメラレモセズ クニモサレズ
サウイフモノニ ワタシハ ナリタイ




https://youtu.be/bIjEa2h5GMU




<덤>



자유

                      - 안치환 노래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때 나는 자유 자유 

땀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 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때 나는 자유 자유 
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 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때 나는 자유 자유 
피와 땀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 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노래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소리높여 
자유여 해방이여 통일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워--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속으론 워--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Posted by 익은수박
,

김종철 선생이 쓴 글을 읽다가  글에서 언급한 함석헌 선생의 '들사람 얼(야인정신)'을 찾아보았다. 

어쩌면 나를 비롯 대부분이 들을 잊었거나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문명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으니. 몸도 마음(정신)도...

울타리 안에서 야인을 찾으려 하거나 흉내 내려 하면서 더욱 모순 덩어리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몸부림 속에서 울타리 경계까지 가거나 넘거나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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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 얼(野人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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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담배


옛날엔 호랑이가 담배를 먹었단다. 그때는 사람과 호랑이가 마주 앉아 맞불질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싸움의 맞불질이 아니고 평화의 맞불질이다. 본래 담배는 평화의 심볼이다. 담배가 아메리카 인디언에서 비로소 나온 것인데, 그들의 신화에 의하면 사람의 자식들이 너무 파가 갈라져 쌈을 하기 때문에 천지 지은 신이 평화의 담배를 피웠다.

 

모든 족속이 무럭무럭 올라가는 그 연기를 보고 모여 들자, 신은 엄숙하고도 간곡한 말로 타이르고 너희는 다 한배 새끼니 싸움 말라, 가서 이 담배를 서로 피고 평화로 살아라.” 했다는 것이다. 나는 담배는 싫어하는 사람이요, 깨끗이 길러낸 자식 담배 빠는 입엔 넘겨주기 싫어 사돈을 하려 할 때는 술 담배 먹나 아니 먹나 그것부터 물어, 만일 먹는다면 무조건 퇴짜를 놓으려는 사람이지만, 그런 평화의 담배라면 나도 이제라도 빨아도 좋다.

 

담배를 망우초(忘憂草)라 하기도 하고, 객대(客對)에 초인사(<>人事)라는 소리도 하지만, 담배에 확실히 사람의 맘을 가라앉히고 느꾸는 것이 있으며 사람과 사람을 접촉시키는 것이 있다. 내가 세계 문제를 의논하려 외교회의에 간다 하여도 우선 담배를 끄집어 낼 법도 하다. 싸움을 하려고 약이 털끝까지 오른 놈도 우선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봅시다.” 하면 좀 누그러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담배에 또 나쁜 것이 있다. 담배를 피우고 맘이 맑을 수는 없다. 그 연기가 자욱한 것은 그 정신의 표시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국제회의를 신용하지 않는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무슨 인류의 장래를 의논하잔 말인가? 취중에 된 교섭, 연막(煙幕) 속에서 나온 조약이 옳을 리가 없다. 언제 가서라도 정치가 술담배 아니 먹는 입으로 되는 날이 오지 않는 한, 세계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취해서, 마비돼서, 한때 잊어서 될 일이 아니고, 똑똑한 정신, 심각한 생각, 기도하는 마음으로만 될 일이기 때문이다.

 

담배 그 자체에 있는 것 아니다. 사람은 맘에 있지. 담배가 인디언에게 있어서는 좋다. 하나, 문명인에게는 독이다. 백두산 천지 가에 단군 할아버지와 백두산 호랑이가 턱 마주 앉아 주먹 같은 대통에 쓴 담배를 잔뜩 담아 산돼지 가죽 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제꺽 불을 쳐 맞불을 빨아 붙여 문 다음 퍽퍽 피는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곤륜산대행산우수리송아리를 뛰어 다니던 이야기를 한다 해 봐, 그 얼마나 시원하고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겠나? 그 뒤에 이어 천하 일 의논하면 어지간히 되지 않겠나?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불과 몇백 년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호랑이 담배 먹는 시절을 그리던 것을 보면 아직 기상이 남아 있다. 그것은 평화요, 관대요, 침착이요, 의젓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이런 것을 생각해봐. 스무 살서른 살 붉은 얼굴이 공부해 벼슬한답시고, 글 써 이름 내고 돈 번답시고 책상에 엎디어 담배를 팍팍 피어 손가락은 새빨갛게 이빨은 시꺼멓게 타지, 토했던 것 먹는 개보다 더 더러운 놈들이 양담배 값에 팔려 선거 운동을 하지, 돼지같이 뚱뚱 살이 찐 것들이 달리는 자동차 창으로 반도 채 피지 않은 것을 내던지면, 또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형상을 한 물건들이 뒤로 따라가며 그것을 줍지. 제 영혼 구하고 남의 영혼 구하기 위해 독신을 지키노란 신부가 이미 버리고 난 향락이면 무엇이 또 연연해 눈시울이 붉게 술을 마시고 입술이 퍼렇게 담배를 피우지.(그래도 거룩, 정결, 곧음을 말하나?)

 

너나 나나 이게 무슨 꼴이냐? 담배의 종 아닌가? 아니, 담배의 종이 아니다. 문명의 종이요 발달의 병이다! 호랑이가 담배를 먹을 때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사자가 풀을 먹고 어린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놀것을 이상하며 살 수가 있었지만, 담배가 문명인의 표가 된 오늘엔 그들의 얼굴에서 뵈는 것은 취함이요, 기운 빠짐이요, 간사요, 음험이요, 신경질이요, 비겁뿐 아닌가? 백두산, 히말라야산, 록키산, 우랄산에서 담배를 먹던 호랑이들은 어디로 다 갔을까?


맞서는 두 계급


평화의 담배 벗 호랑이를 잃고 그를 무서워 피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산을 떠나 내려와 저희끼리 울타리 안에 살게 되던 때에 시작이 됐다. 그때부터 겁쟁이가 되고, 겁이 나기 때문에 꾀가 늘고, 꾀가 늘기 때문에 믿음성이 없어지고, 믿음성이 없기 때문에 속이 어두워지고, 약해지게 되었다. 사람은 산에서 나서 골짜기에 내려왔고, 골짜기에서 버덩으로 뻗었다가 그만 성안에 갇히게 된 역사다. 성안에서는 그 전의 평화와 슬기와 날쌤()의 하나 됨을 다 잊어버리고 호랑이만 온다면 벌벌 떠는 겁쟁이가 되었다. 문명인처럼 겁쟁이가 어디 있나? 이야기가 이렇다.

 

()가 천하를 얻어 임금이 된 다음, 세상에서 자기의 다스림을 어찌 아나 알아보려고 한번은 시골을 나갔다. 밭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농사꾼을 보고 슬쩍, “당신 우리나라 임금을 아시오?” 했다. 농부가 그 말을 듣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흙덩이만 깨면서 하는 말이 , 내가 해 뜨면 나오구, 해 지면 들어가구, 내 손으로 우물 파 물 마시구, 밭 갈아 밥 먹구. 임금이구 뭐구 내게 상관이 뭐야?” 했다. 요가 속으로 내가 나 있는 줄을 모르리만큼 했으니 어지간히 하기는 했구나 하면서도 아무래도 맘이 시원치 못했다.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하자는 맘이요, 가르치잔 생각이므로 호강이나 세력을 부리잔 뜻은 없어, 집을 지어도 백성보다 나은 것이 겨우 흙으로 싼 새 층대에서 더한 것이 없음을 자기도 스스로 알지만, 그래도 어쩐지 맘의 한 구석에 불안이 있었다. 그래 사람을 영천(潁川) 냇가에 보내어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전에 도를 같이 닦던 시절의 친구인 소부(巢父)허유(許由)에게 가서, 나와서 벼슬을 하고 같이 일을 하자고 권했다. 그랬더니 허유가 그 말을 듣고는 에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군.” 하고 그 영천수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 소부가 송아지를 먹이면서 마침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그 모양을 보고, “, 그 물 더러워졌다. 그것 먹이면 내 송아지 더러워진다.” 하고 끌고 위로 올라갔다.


장자(莊子)가 초나라엘 갔다가 어느 냇가에서 낚시질을 했더니, 그 나라 임금이 듣고 신하를 보내어 예물을 잔뜩 가지고 와 하는 말이 우리나라 임금이 선생님의 어지신 소문을 듣고 꼭 오시어 우리나라를 위해 일을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했다. 장자가 그 이야기를 듣더니 하는 말이, “이애, 여기 제사 돼지가 있다. 그 놈 살았을 때 진창 속에 뒹굴고 있지만 제삿날이 오면 비단으로 입히고 정한 자리를 깔고 도마 위에 눕히고, 칼을 들어 잡는다. 그때 돼지가 되어 생각한다면 그렇게 죽는 것이 좋겠느냐? 진창 속에서나마 살고 싶겠느냐?


또 너의 나라 사당 안에 점치는 거북껍질 있지? 그 놈이 살았을 때 바닷가 감탕 속에 꼬리를 끌고 놀던 것인데 한번 잡힌즉 죽어 그 껍질을 미래를 점치는 신령이라 하여 비단보로 싸서 장안에 간직해 두게 되니, 거북이 되어 생각한다면 죽어서 그 영광을 받고 싶겠느냐? 감탕 속에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겠나?” 했다. 왔던 사신의 대답이 그야 물론 진창 감탕 속에서 뒹굴고 꼬리를 끌면서라고 살고 싶지요.” “그렇다면, 가서 너의 임금 보고, 나도 감탕 속에 꼬리를 치고 싶단다고 해라. 천하니 임금질이니 그게 다 뭐라더냐?”하고 장자는 물 위에 낚시를 휙 던졌다.

 

마케도니아의 한 절반 야만의 자식인 알렉산더가 천하를 정복할 적에 당시 문화의 동산인 그리스를 말발굽 밑에 두루 짓밟았다. 감히 머리를 들 놈이 없었다. 오는 놈마다 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디오게네스란 유명한 어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젊은 아이의 영웅심 자만심에, 으레 제가 나를 보러 오겠거니 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니 왔다. 약도 올랐고, 호기심도 일어나고, 부하를 데리고 디오게네스 있는 곳을 찾아갔다. 가 보니 늙은이 하나가 몸에는 누더기를 입고 머리는 언제 빗질을 했는지 메두사의 머리의 뱀처럼 흐트러졌는데, 바야흐로 나무통 옆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이 나무통은 그의 소유의 전부인데 낮에는 어디나 가고 싶은 데로 그것을 굴려 가지고 가고, 밤에는 그 안에 들어가 자는 것이었다.


디오게네스는 누가 왔거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젊은 영웅은 화가 났다. “너 알렉산더를 모르나?” 제 이름만 들으면 나는 새도 떨어지고, 울던 애기도 그치는 줄만 아는 알렉산더는 맘속에 저놈의 영감쟁이가 몰라 그러지, 제가 정말 나인 줄을 알면야 질겁을 해 벌떡 일어설 테지하는 기대를 가지고 한 소리였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놀라지도, 코를 찡긋하지도 않고 기웃해 알렉산더를 물끄러미 보고 하는 말이 너 디오게네스를 모르나?” 그러고는 목구멍에 침이 타 마르고 있는 젊은 정복자를 보고 비켜, 해드는 데 그림자 져.” 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한개 선비로서 일어나 어지러워 가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전쟁이 다 끝나고 천하가 완전히 제 손아귀에 들어온 줄을 알게 된 다음, 맘에 좀 불안을 느꼈다. 이제 천하에 나를 칭찬 아니 할 놈이 없고 내게 복종 아니 할 놈이 없건만, 단 하나 한 사내만이 맘에 걸린다. 그것은 엄자릉(嚴子陵)이다. 그는 광무제의 동창 벗이었다. 한 가지 성현의 도를 닦는 시절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벗(知己之友)으로 허락을 했었고, 높은 이상과 도타운 덕에 있어 그가 자기보다 한 걸음을 내켜 디딘 줄을 아는 광무제는, 처음의 선비의 뜻을 버리고 권세의 길을 탐해 천자가 되기는 했지만 자릉이가 자기를 속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줄을 알았다. 그 생각을 하면 앞에서 네발로 기며 아첨하는 소위 만조백관(滿朝百官)이란 것들이 보기도 싫었다. 그래 사람을 부춘산(富春山)에 보내 냇가에 낚시질하는 엄자릉을 데려오라 하였다. 자릉이 따라왔다.


대신이요 무어요 하는 물건들이 뜰아래 두 줄로 벌려 서서 감히 우러러도 못 보는 데를 자릉이 성큼성큼 걸어 광무 앉은 곳으로 쑥 올라갔다. “, 문숙(文叔), 이게 얼마만인가?” 그 동안에 몇 해의 전쟁이요, 나라요, 정치요, 천자요 그런 것은 당초에 코끝에 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하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광무도 도량이 넓다고는 하나 짐승처럼 부려먹는 신하들 앞에서 제 위에 또 권위가 있는 것을 허락해 보여 주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릉이를 신하 대접을 했다가는 당장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고, 물론 자릉이 그럴 리도 없겠지만 광무의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인지 모르는 기()에 눌림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신하들 보고는 너희들은 물러가라, 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서로 정을 좀 풀련다.” 했다. 밤새 이야기를 하다 잤다. 천문을 보는 신하가 허방지방 들어와 큰일났습니다. 객성(客星)이 태백(太白)을 범했으니 무슨 일이 있삽는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태백이란 지금 말로 금성인데 옛 사람 생각에 그것은 임금을 표시한다 했다. 객성이란 다른 별이란 말이다. 임금은 절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엄자릉이 자면서 광무의 배 위에다 다리를 턱 올려놓고 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후의 시인이 자릉의 그 기상을 대신 말하여,


萬事無心一釣竿(만사무심일조간)

三公不換此江山(삼공부환차강산)

平生誤識劉文叔(평생오식유문숙)

惹起虛名滿世間(야기허명만세간)


일만 일에 생각 없고 다만 하나 낚싯대라

삼공 벼슬 준다 한들 이 강산을 놓을소냐

평생에 잘못 봤던 유문숙이 너 때문에

쓸데없는 이름 날려 온 세상에 퍼졌구나


했다.

이것은 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대가 그리워서 하는 이야기들이다.


누가 한 수 더 위냐


호랑이 담배를 먹는 이야기를 왜 이 우주 시대라는 지금에도 하며, 하면 왜 루니크2호가 달에 갔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상쾌함을 느낄까?

그것이 역사적으로 있었더냐 없었더냐가 문제 아니다. 없다면 없을수록,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전해오게 되는데, 그 사실을 뛰어 넘는 진실성이 있다. 사실, 사실은 사실의 전부가 아니다. 소위 사실이란 것은 현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인데, 현실은 결코 참이 아니다. 현실이라지만 현()이야말로 실()은 아니다. 씨는 언제나 뵈지 않는 속에 있다. Things are not what they seem! 씨가 피어나온 것이 잎이요 꽃이지만, 잎과 꽃이 그 씨가 품었던 전부는 아니다. 씨가 품은 것은 영원이요 무한이다. 그러므로 꽃마다 잎마다 열매를 내기 위하여는 떨어져야 하고 (현실은 없어지고), 그 씨는 또 더 많은, 더 새로운 씨를 위해 땅속에 들어가야 한다. 사실이 중요하지만 사실(事實)은 사실(史實)이 되어야 하고 사실(死實)에 이르러야 한다.


참에서 있음이 나오지만 있는것이 참도 아니요 있던것이 참도 아니다. ‘있을 것, 있어야 할것이 정말 참이다. ()가 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종()이 시()를 낳는다. 신화는 있던 일이 아니요, 있어야 할 일이다. 신화를 잃어버린 20세기 문명은 참혹한 병이다. 신화는 이상(理想)이다. 이상이므로 처음부터 있었을 것이다. 알파 안에 오메가가 있고, 오메가 안에 알파가 있다. 이 문명이란 것은 알파도 오메가도 잃고 중간이다. 중간은 죽은 거요, 거짓이다. 이 사실에 붙는 문명은 죽은 문명이요, 거짓 문명이다.

 

호랑이는 담배를 먹었을 것이요, 사람과 서로 맞불을 붙이고야 말 것이요, 지금도 어디서 마시고 있을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를 먹었다면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다. 먹고야 말 것이다. 선악과를 먹던 에덴동산 이야기를 그리워서 하는 것은 사람이 선과 악을 참 아는 지혜를 얻고야 말 것을 뜻한다. 사람의 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결혼을 했을 것이요, 네피림(巨人)을 낳았을 것이요(창세기 6;4), 또 낳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모든 신화는 요컨대 하나다. 사람과 하나님과 만물이 서로 통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본이요 또 구경 이상이다. 그 신화가 타락하여 전설이 되고, 전설이 타락해 사화(史話)가 되고, 사화가 타락해 사건이 된다. 사건이 나면 죽는다. 문명은 사건의 공동묘실 아닌가?


그러므로 소부허유가 사실로 있었거나 없었거나, 자릉이 정말 광무의 배때기를 눌렀거나 아니 눌렀거나, 디오게네스가 과연 알렉산더를 눈깔을 빨았거나 말았거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과는 별 문제로 이 이야기들은 참이다. 따지고 들어가면 다른 것 아니요, 두 편이 있다는 말이다. 초왕알렉산더한광무 등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문명인과 소부허유장자디오게네스엄자릉 등으로 대표되는 들사람, 그리고 이 세상이 보기에는 문명인의 세상 같지만 사실은 들사람이 있으므로 되어간다는 말이다. 그것을 주장하자는 것이 이들 신화 전설의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이유다.

 

중국 민족같이 실제적인 민족은 없다. 거기서 난 성인 공자는 주로 한 것이 집과 나라와 사회를 어떻게 받들어나갈 거냐 거기 관한 실지 도덕의 가르침이 있지, 우주의 근본이나 생명의 신비 같은 것을 그리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리하여 그 가르침이 표준이 되어 임금을 하늘 아들이라 높였는데 그 중국 역사에 어찌하여 내리내리 잊지 않고 세상을 초탈하는 인물을 늘 그 위에 앉히는 사상이 있을까? 또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폴리스란 말이 정치를 뜻하듯이 그들은 정치적인 민족이요 또 과학 발달이 그들에게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디오게네스 같은 인물을 알렉산더보다 높이는 사상이 있을까?

 

그렇게 보면 하필 중국이나 그리스만이 아니라 어떤 민족어떤 나라의 역사에도 이 두 계급의 대립이 있고, 그리고 현실에 있어서는 하나 틀림없이 다 임금을 높이고 신이라고까지 하면서도 그 뒷면의 정신의 세계에선 늘 그 위에 관 없는 왕을, 왕 위에 왕을 앉혀 놓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양 치는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조약돌로 때려 눕혔고, 그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이 어린애처럼 가져다 왕 위에 놓았으며, 인도에서는 임금이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를 하여 거지같은 고행자 앞에 겸손한 제자가 되는 일이 수두룩하였다. 맹자는 임금이 불러도 저는 벼슬 한 가지 높지만 나는 나이도 높고 덕으로도 높으니 제가 어찌 나를 불러?” 하고 아니 갔고, 천작(天爵)인작(人爵)을 말했다.


뼈다귀가 빠질 대로 다 빠지고 살이 썩을 대로 다 썩은 우리나라 이씨(李氏)5백년에 있어서도 그래도 무슨 기백(氣魄)이 남은 것이 있다면, 상투 밑에서 고린내는 났을 망정 한 줌 되는 산림학자(山林學者)에 있지 않았나? 정몽주(鄭夢周)를 때려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선죽교(善竹橋)에 피가 흐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계이방원을 만고의 죄인으로 규정짓는 민중의 판단이지, 왕 위에 또 왕이 있단 말이지 무언가? 야차(夜叉) 같은 수양으로도 미친 녀석 같은 김시습(金時習)을 어떻게나 모셔 보려 애를 쓴 것은 무언가? 칼보다는 더 무서운 칼이 있고 곤룡포보다는 더 아름다운 옷이 있단 말이지.

 

이태조세조는 왜 또 들추느냐? 그밖엔 할 말이 없느냐? 하고 그의 자손과 그의 종들은 강아지처럼 앙절거려 항의를 할 거다. 그렇다, 나는 무식해서 할 말이 그것밖엔 모른다. 나는 무지한 백성의 한 알이다. 내가 이 꼴밖에 못된 것은 그들 때문이다. 한이 뼈에 사무쳤다. 그러나 내가 개인 이성계나 수양을 나무라겠느냐? 다 죽어 썩어져 백골도 없는 그들을 욕해서는 무엇하리오? 그들은 민중을 다스리는 권력, 구속하는 제도의 상징 아닌가? 그의 정신적 권속은 오늘도 씨글거리지 않나? 내말도 못 알아듣는 가엾은 사람아, 너희 같은 것을 위해 최영이 목을 잘리고 정몽주가 맞아 죽고, 성삼문박팽년이 죽고, 유응부가 서서 껍데기를 벗기우고, 김옥균이 총에 맞아 죽고 시체도 평안치 못해 오차 당했단다.


개성에 가면 덕물산이란 조그만 산이 있어 거기는 무당만 몇 십 호가 굿을 해먹고 살아갔는데, 그거는 뭐냐 하면 최영 장군의 영을 뫼신 곳이다. 지금은 물론 미신이지만 당초의 그 유래를 찾으면 태종 때에 비가 아니 와서 사방 기우제를 지내다 못해 누가 말이 최장군의 영이 노해 그런다 하여 그 묘에 제사를 지냈더니 곧 큰 비가 와서 그때부터 그리 됐다는 것이다. 이태조와 최장군이 원수로 대립이 되던 이상 태종의 맘으로 그 묘에 제사하는 것을 허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민중의 생명이 관계되는데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뭐야? 목은 잘랐지만 도리어 졌단 말 아닌가? 민중은 최장군을 더 존경한단 말 아닌가? 과학적으로 보아, 비 온 것이 우연이거나 영검이거나 그것은 별문제로 민중의 맘이 최장군을 위해 절대 받든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살고 죽는, 화복의 마지막 결정권은 민중에 있다.

 

또 김시습이 미친 모양을 하고 다니며 길가에서 오줌을 쌌다. 그것이 누구냐? 그가 길을 가다가는 주저앉아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 하고 통곡하던 바로 민중 그 자신이 아닌가? 오줌을 쌌다니 어디다 싼 것인가? 세조의 정치에 대해, 바로 세조의 얼굴에 대고 싼 것이지 뭐냐? 칼을 뽑아 물을 잘라도 물은 오히려 흐른다고, 사람의 모가지는 자를 수 있어도 민중의 오줌인 신화전설여론은 못 자를 것이다. 봐라! 두고 봐라! 한이 뼈에 사무쳤다니 원수라도 갚을까봐 겁이 나 그러나? 비겁하다! 그게 아니다. 미친 체 오줌을 싸는 것은 원수 갚을 마음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비겁하거나 미워하는 맘에서 싸는 오줌이 아니야. 오줌 쌈을 받는 놈보다는 스스로 좀 넓고 큰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야. 소원이야 예수처럼 죽으면서도 죽이는 놈을 위해 복 빌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만한 얼의 실력은 없으니, 오줌이라도 싸는 것이다.


매월당(梅月堂)의 오줌 한 번 구경하려나? 서거정(徐居正)이 그와 친구였다. 찾아온 김시습을 보고 그림 한 폭을 내놓으며 거기다 뭐라 글을 하나 써 달라 했다. 그림은 강태공이 문왕을 만나기 전 위천에서 낚시질하는 것을 그린 것이었다. 시습은 붓을 들더니 곧 단숨에 내리 갈겼다.


風雨瀟瀟拂釣磯(풍우소소불조기)

渭川魚鳥學忘機(위천어조학망기)

如何老作鷹揚將(여하노작응양장)

空使夷齊餓採薇(공사이제아채미)


비바람 들이치는 위천 물가 낚싯돌에

저 고기 새 너를 배워 세상일 꽤 잊었더니

어쩌다 늘그막엔 난다 긴다 장수되어

쓸데없이 백이숙제 굶어 죽게 했단 말가


거정(居正)이 이것을 보더니 이거 나를 죄 주는 소리로구나.” 했다. 옳은 말이다. 본래 벼슬이라도 해먹는 놈들에게 맞지도 않는 그림이었다. “내가 진리의 왕이다.”는 못할망정 매월당이 쌌던 세종로 종로에 대고 대낮에 오줌을 한 번 갈기고 싶은 일이다. 그만한 들사람얼이 있었으면!


글월과 바탈


칼 마르크스는 계급 싸움을 주장한다. 즉 역사는 있는 놈 없는 놈, 다스리는 놈 다스림 받는 놈이 대립되어 싸우는 동안에 변증론적(辯證論的), 즉 묻거니 대답하거니 하는 식으로 번져 나간다는 것이다. 역사를 묻고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그러는 동안에 자꾸 부정됨에 의하여 차차 높아진다고 본 것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잘못 본 점이 있다. 역사는 묻고 대답함이지만 계급 사이의 문답은 아니다. 또 계급이란 말은 해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있고 없음, 누름 눌림의 관계가 아니다. 또 다시, 있고 없음, 누름 눌림이라 해도 좋으나, 그것이 경제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겉에 나타난 것은 그거지만 그것은 속에 보다 깊은 것이 있어서 나오는 현상뿐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의 싸움으로만 알아서는 해결될 수 없다. 역사에 맞섬이 있지만 그것은 평면적인 맞섬이 아니다. 묻고 대답함이 있지만 문답은 동무 사이에는 없다. 아버지와 아들, 선생과 제자 사이, 즉 위아래 관계에서만 정말 발전시키는 문답은 있을 수 있다.

 

말씀은 구경에 있어서 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탈의 맞섬(質的對立)이요, 영과 영 사이의 문답이다. 구경을 따져 말하면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다. 정신과 물질의 대화라 할 수도 있고, ()과 낱()의 대화라 해도 좋다. 마르크스는 유물변증법이라 해서 과학적이노라 하지만 그야말로 비과학적이다. 말씀은 물질에는 있을 수 없다. 뜻은 정신에만 있는 것이요, 문답은 뜻 때문에 나온다. 그러므로 물질이란 말과 변증이란 말은 맞붙을 수 없는 말이다. 역사는 영과 영의 문답이다. 어미 영과 새끼 영이 있어서 문답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랑의 말씀이라 혹은 교()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브라만아트만의 문답이다. 절대와 상대의 문답이다. 하늘과 백성의 문답이다.

 

문답이 일어나는 것은 뜻 때문이다. 빤히 뵈는 형상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뜻은 숨는 것이므로, 숨었기 때문에 뜻이므로, 그것은 현상을 뜯어보아야 안다. 그래 묻고 대답이다. 말씀은 현상을 뜯어 제낌이다. 현상을 뜯어 제끼면 뜻의 샘이 저절로 솟아나오고 피어나오고 자라나온다. 그러므로 뜻엔 처음도 나중도 없기 때문에 처음과 나중을 지어낼 수 있다. 그것이 삶()이요, ()이요, 돼감(歷史)이다.

 

얼은 한 얼이지 둘이 있을 리 없다. 허나 무슨 까닭인지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론 법칙에 의하여 인 얼은 갈라진 것, 맞선 것으로 보인다. 아래, , 고움미움......이것을 왜 그러냐 물어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그대로 있음이지 가 없다. ‘의 그물에 걸리는 것은 참이 아니다. 허지만 우리 이성은 이 할 수 없는 것, 소용없는 것을 묻는다. 옛날 말에, 대가리 둘 가진 뱀을 보면 죽는다 했다지만 있음이야말로 대가리 둘 가진 뱀인지 모른다. 대가리가 둘이 아니고 꽁지가 둘인지 모르지, 얼은 일 수밖에 없으니. 대가리거나 꽁지거나 간에 이것을 보았다 하는 순간 이성의 아이는 죽어 버린다. 죽어버리건만 기어이 아니 보곤 못견디는 것이 이성의 버릇이다. 먹지 말란 선악과를 혀가 갈라진(두말 하는) 뱀의 소리를 듣고 기어이 먹고 죽었다 하지 않던가? ‘인 얼이 스스로 하는 데서 이 이성이란 것이 나왔는데 요 당돌한 것이 감히 저 나온 근본을 알아보겠다는 데서 말썽이 생긴다. 역사요, 문명이요, 철학이요, 종교요.


이성은 빛이다. 빛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얼이 운동하던 그 깊음의 어둠을 비쳐 낼 수는 없다. “빛이 어두운 데 비치되 어둠이 받지 않더라.” 사람의 모든 정신적 산물이란, 요 이성의 당돌한 등불이 바탈의 동굴 속을 더듬어 보자고 애를 쓰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하는 소리가 항상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 모르긴 하거니와 바탈의 얼이 두 얼굴이 아니고 이성, 제가 눈이 두 알이 돼서 모든 것이 이원(二元)으로 보일 것이다. 눈이 두 알이라 하는 것이 좋을지 하나는 제 모양이고 하나는 그림자라 할지. 어쨌건 사람은 을 찾으면서도 둘밖에 못 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맞섬으로 된다. 상대적이다. 우리는 반대적이다. 우리는 반대 없이는 생각할 수도 살 수도 없다. 이 소리조차도 이성이 할 수 없어 하는 말이다. 천번을 되풀이해도 결국 무극(無極)이 태극(太極), 태극이 양의(兩儀)라는 설명, ‘브라만아트만’, ‘아트만브라만그 중간에 있는 구나스()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설명,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고, 사탄의 유혹으로 잘못됐으며 그 중간에 하나님이면서 사람, 사람이면서 하나님인 인격이 서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설명, 그 밖을 나갈 것이 없을 것이다. 사람의 몸이 돼먹음도 맞섬으로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팔다리가 대립, 왼편 바른편이 대립, 눈 둘, 귀 둘, 콧구멍 둘, 들어가는 구멍 나가는 구멍, 입 하나로 먹고 말을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하나로 배설과 생산을 겸해 그것도 대립,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골통은 하나다. 인생과 역사는 대립에 있고, 구경은 하나 됨에 있다.


이것을 사람의 문화사 위에서 말하면 문()과 야() 곧 글월과 바탈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역사는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것 같이 지배 계급 피지배 계급의 싸움이 아니라, 문인(文人)과 야인(野人)의 문답이요 싸움이다. 가진 놈 못 가진 놈의 대립도, 누르는 놈 눌린 놈의 대립도, 이 문()과 야()의 대립에서 나온다.

 

글월을 주장하느냐? 바탈을 주장하느냐? 물론 바탈이 있어서 글월이요, 글월 아니고는 모르는 바탈이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늘 싸움이 있다. 글월이란 무늬란 말이다. 비단을 짜고 거기 군데군데 무슨 형상을 그려 놓으면 보기가 더 좋다. 그것이 무늬다. 한문의 문()자는 그 금을 이리저리 그어 놓은 형상이다. 그러므로 글과 그림이 하나다. 우리말에 ’ ‘그림이 한 말인 것은 이 때문이요, 옛날 글자가 그림으로 시작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림은 왜 그리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립다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맘속에 그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 얼굴을 그려본다. 그래 그리운 사람이다. 그리우면 그 감정을 나타내고 싶어진다. 그것이 글이다. 노래편지. 글은 그것 하기위해 발달된 것이다. 그러면 글월은 속에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나타내는 것은 무엇으로나 나타낼 수 있다.


꽃이 물 위에 뚝 떨어지는 것을 볼 때 거기 말할 수 없이 좋은 것을 느낀다. 낙화수면개문장(落花水面皆文章)이다. 가을날 맑은 물 위를 바람이 슬쩍 불어갈 때 거기 아름다운 무늬가 나온다. 추수문장(秋水文章)이다. 어슬터슬한 도끼로 깎으면 나무의 결에 무늬가 돋혀 나온다. 두보(杜甫)가 고백행(古柏行)에서 불로문장세기경(不露文章世己驚)이라 한 것은 이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좋은 느낌을 하는 것은 거기 무슨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요, 보람을 느끼는 것은 그 꽃나무바람을 타서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이 잡혀지고 나오고 자라기 때문이다. 즉 자아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 실현되어 나온 것이 문() 곧 글이다. 하늘의 천체를 통해 나오면 천문(天文), 땅의 것을 통해 나오면 지문(地文), 사람 자기의 일을 통해 나오면 인문(人文), 그러나 무엇을 알았든지 결국 안 것은 자기요, 드러낸 것은 제 속에 있는 얼이다. 자기의 실현이란 곧 참의 실현이다. 내가 곧 부처요, 하늘나라가 내안에 있기 때문이다.

 

()에 대해 야()는 뭐냐? 무늬에 대한 바탕이다. 질소(質素)라 하는 데 질()도 바탕이요, ()도 바탕이다. ()은 형()에 대해 하는 말이다. 나타나면 형(), 나타나지 않은 것은 질(), ()는 희다는 뜻으로도 쓰는데, 무늬 놓지 않은 비단 그것이 소(). 회사후소(繪事後素), 그림은 바탕 뒤에 온다.

 

또 박([])이라는 자가 있다. 박은 다듬지 않은 나무다. 나무를 다듬으면 고운 무늬가 나오고 아로새기면 아름다운 형상이 되지만 그렇게 하기 전 나무대로 있는 것이 박이다. 또 순(), ()하는 글자들이 있다. ()은 진한 술이다. ()은 순()과 통해 쓴다. 이 말들이 다 바탕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손질이 가지 않은 그대로 있는 것이란 뜻이다. 그 바탕이 좋다는 뜻에서 질소(質素) 질박(質朴) 순박(醇朴)’ 하는 말들이 있다.


(), 곧 들은 도(), ()에 대해 쓰는 말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읍, 그 읍 중에서도 나라 임금 있는 곳이 도(). ()는 그 도읍 밖에 나와서 있는 들, 교외(郊外). 시골, 농촌이다. 야인, 들사람은 시골 사람, 두메 사람이다. 야인헌근(野人獻芹)이란 말이 있다. 시골 놈이 제 입에 가장 맛있는 것이 미나리니까 그것을 가지고 임금께 바치겠다고 가지고 간단 말이다. 야인은 또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으로도 쓴다. 여당야당 할 때의 야는 그것이다.

 

야는 그렇듯 본래 문()에 대한 바탕을 가르치는 말이건만 문을 좋게 여기는 사람이 바탕을 나쁘게 보기 시작하여서 야비(野卑야심(野心야만(野蠻조야(粗野)’ 하는 말들이 나왔다. 논어에 질승문즉야(質勝文則野), 문승질즉사(文勝質則史), 문질빈빈연후군자(文質彬彬然後君子)” 란 말이 있다. ()이 문()보다 지나친 것, 즉 글월을 돋히지 못하고 바탈대로만 있으면 야()해 못쓰고 반대로 글월이 너무 지나치면 사()해 못 쓴다. 사는 지금은 역사란 뜻으로만 쓰이지만 본래는 관청에서 무엇을 기록하는 서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관청의 기록이란 언제나 형식적인 것이다. 여기 사라 한 것은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문과 질이 빈빈(彬彬), 알맞게 조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공자로도 이상적인 지경을 못 얻을진댄 차라리 질, 바탕편이 낫다 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을 했다. 그래 자공(子貢)이 그 뜻을 알아듣고 , 그럼 예()가 뒤에 온단 말씀입니까.” 했다. 그 뜻은 사람의 글월인 예가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바탕 되는 충()이요, ()이요, ()이 있고 말이지, 그것 없이 해서는 도리어 해란 말이다. 그래서 공자는 또 다른 데서 예여기사야영검(禮與其奢也寧儉)”이라 했다. ()는 꾸밈이 너무 지나친 것인데, 예는 그것보다는 차라리 검()한 것이 낫다는 말이다. 검이란 검소 검약하는 말들이 표시하는 대로 수수한 바탕대로 함이다.


공자는 문을 퍽 중요하게 생각했으므로 사람의 정신적인 지음 왼통을 문() 한자로 표하여 사문(斯文)이라 했고, 자기의 사명이 그 글월을 지키고 빛내 후세에 전하는 데 있다고 느껴서 어느 때 신변의 위험을 느꼈을 때 제자들이 걱정하니, “하늘이 이 글월을 없애신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이야 무슨 걱정이 있느냐.” 고 말한 일까지 있고, 사람을 가르치는 과목을 넷으로 나눠 하는데 문을 첫째로 넣어 ()()()()’ 이라 했다. 오늘날도 동양에선 문화 문명 해서 사람의 정신적 물질적 힘써 만든 모든 것을 문으로 표시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된 일이다.

 

하지만 에서 보면 아는 대로 문은 그 하나에 지나지 않고 그 다음 점점 높은 지경은 다 사람의 속, 바탕에 관한 것임을 볼 때 공자의 뜻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래 그는 술이부작(述而不作)” 이라 한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겸손한 말이다. 바탈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문화활동이라 해서 현대 사람은 창작이란 말을 헤피 쓰지만 공자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감히 짓는다 할 수 있느냐? 나는 본래부터 있는 것을 펴서 설명할 뿐이다.” 하는 말이다. 본래부터 있는 것은 바탈이다. 천명이요 성()이다. ()은 그것을 내 처지에 따라 내 힘대로 드러낸 것이다. realize한 것이다.

 

문명은 실현이다. 문명문화의 명()이나 화()는 그 뜻을 표시하는 말이다. 바탈 곧 실(), 참이 있어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밝힘이요 됨이다. 서양 말에 culture 라는 말도 같은 뜻을 나타낸다. ‘길들이다’ ‘재배하다는 뜻인데 이것은 사람이 자연에 붙어 사냥질을 하며 왔다 갔다 하며 살던 것을 버리고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살며 짐승을 기르고 곡식을 재배하던 때부터 이른바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므로 하는 말일 것이다. 야생의 식물 동물을 길들이고 기름으로 그 속에 들어 있는 바탈을 점점 드러내게 됐다. 그것이 발달, 그 발달을 시키므로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무엇을 또 드러낸다. 모여 사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복잡해지고 그것을 알맞춰 고루어 가기 위해 여러 가지 풍속규칙제도가 생겼다. 그것이 시(), 시민(市民), 정치(政治). civil이다. 그래 civilization이다.


문명은 병이다.


사람은 나르시스다. 저 한 일에 취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일이다. 제게 취하지 않은, 제 지은 것에 종이 되지 않은 개인도 시대도 별로 없다. 문명인은 제 글에 취한 사람이요, 제 만든 기계에 종이 된 죄수다. 타골이,


죄수야, 말해봐, 이 끊을 수 없는 사슬을 만든 것은 누구냐?

죄수 대답하는 말, 나입니다. 내가 이것을 공력 들여 만들었습니다. 나는 아무도 내 힘을 당할 자 없다 생각했고, 그 힘으로 온 세계를 잡아 가두면 아무도 내 자유를 방해할 놈은 없으리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밤낮으로 무서운 불길에 지독한 메질로 이 사슬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에 일을 다하고 고리를 끊어지지 않도록 다 이어 놓고 보니 꼭 붙들어 매인 것은 나였습니다.


할 때 그것은 20세기 문명인을 그린 것이다. 에드워드 카펜터의 말대로 문명은 병이다. 역사상의 어느 문명도 제 속에서 난 원인 때문에 망하지 않은 문명이 없다. 이집트가 그렇고, 바빌론이 그렇고, 앗시리아가 그렇고 아테네, 스파르타, 로마, 옛날의 인도, 중국이 다 그렇다. 그리고 그 원인은 언제나 다름없이 꼭 같이 문명으로 인하여 정신이 약해지는 데 있다.

 

그럴 때면 반드시 소수의 들사람이 나타나서 썩어져 가는 백성을 책망하여 맘 속에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도로 찾도록 부르짖는다. 그 말을 들으면 살아났고, 아니 들으면 죽었다. 중국의 노자, 장자는 다 야인(野人)정신을 부르짖는 사람이다. 주나라 시대에 와서 고대의 소박을 잃고, 춘추전국시대에 온 즉 점점 더 세상은 재주와 꾀만 숭상하고 형식적인 제도의 폐해가 심했다. 그러므로 그 풍을 고치려고 외친 것이 그들의 문명주의에 반대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었다.

 

서양에서 하면 그리스의 옛날 씩씩한 정신이 없어지고 궤변만 늘어 가려 할 때 불쑥 차고 일어난 것이 소크라테스였다. 허술한 옷에 발을 벗고 아테네 길거리를 큰 걸음으로 걸으며 만나는 젊은이거든 붙잡고 닦아세운 그는 확실히 야인이었다. 그는 제 손으로 기록도 아니 남겼다. 그랬기에 그도 문화의 저자 무리들한테 잡혀 독살을 당하지 않았나?


미국의 휘트먼, 소로도 야인이다. 맨발을 벗고 가슴을 풀어 헤치고 큰길을 걸으며 운도 없이 곡조도 없이 부르는 [풀잎] 노래, 월든 호숫가에 막을 치고 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도 원시림 속의 공기를 마시는 것 같다. 그들의 사상 아니었더라면 미국은 더 썩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인의 가장 좋은 역사는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다. 그 나라의 종교 정치 교육의 터를 잡아 놓은 모세부터 야인이었다. 이집트 문명 속에서 40년을 자란 그건만 그것으로 민족 구원이 될 수 없음을 알자 그는 시내 산에 가서 문화인의 때를 벗기고 명상 가운데 바탈을 찾아내기에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완전히 들사람이 된 후 그는 지팡이 하나를 들고 이집트 문명에 맞섰으며 거기서 민족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 이집트 문명의 폐해에 중독이 된 민중을 훈련하여 새 역사를 짓는 정신을 길러 주고 목적지인 가나안에 들어가 이미 있는 문명과 싸워 이기게 하기 위하여 빈들에서 또 40년을 야인 생활을 시켰다. 그의 제도가 어떻게 간결한 것이며 그 정신이 어떻게 굳굳한 것임은 구약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서는 시내산 산화산의 연기와 아라비아 사막 냄새가 난다.

 

그랬건만 그래도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미 있는 문화에 젖어 썩으려 했으므로 예언자가 이어 이어 일어났다. 예언자란 거의 다 야인이다. 예레미아,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세례 요한은 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이요, 예수는 순수한 들사람이었다. 그는 들의 백합을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다이 알았고, 생활 방식을 공중에 나는 까마귀에 배웠으며, 그의 눈엔 당시에 서슬이 시퍼런 헤롯도 한 마리 여우로밖에 아니 보였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할 때 그는 온전히 문화인의 테두리 밖에 섰다.

그래 내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 했다.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매양 기독교를 말하려 할 때 유대의 위치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두 문명의 통하는 길에 놓여 있는 것을 힘써 말하지만 옅은 소견이다. 기독교의 기독교된 것은 당시의 먼저 있던 문화를 배웠다는 데보다 능히 거기 물들지 않고 그와 전면적으로 겨뤄 싸워온 데 있다.

예언자의 공로는 거기 있다.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등떠리뼈 노릇을 했다면 그것은 문명긍정주의로서가 아니요, 문명 부정주의로서일 것이다.


들사람이여 오라!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들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해독을 가장 심히 받고 있는 나라다.

그 원인은 우리가 급작히 남의 문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본래 문명은 제가 스스로 낳아야 하는 것이다. 문명은 정신이 아니고 지식이요 기술이기 때문에 남의 것을 받으면 반드시 해가 된다. 받아도 천천히, 달리던 차를 정지하는 모양으로, 브레이크를 대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의 문명을 급작히 받고 망하지 않은 민족 있나 보라!

 

아시아가 물질문명에서 떨어진 것이 죄가 아니다. 차이가 심한 서양 것을 급히 받게 된 것이 불행의 원인이다. 토인에게 총을 주면 그 토인은 반드시 망한다. ? 기술 지식이란 정신이 능히 그것을 자유로 쓸이만큼 발달한 후에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기계를 주면 상할 것은 정한 일 아닌가? 정신이 서기 전에 기술 문명이 먼저 들어오면 그 사회의 자치적인 통일을 깨뜨린다. 그러기 때문에 망한다. 간디가 물레질을 주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기계가 덮어놓고 나쁘단 건 아니다. 원시적인 인도 사회에 영국의 고도로 발달된 기계와 공장 조직이 들어오면 반드시 인도 사회는 파괴될 것이므로 기계를 써도 물레질을 하여 자립하는 토대를 만든 후 끌어오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진 일 아닌가? 지금 우리는 해방 후 급작히 미국 문명이 홍수처럼 들이밀렸다. 미국 기계를 가져다 공장을 시설하는 사람은 한 때 돈을 모으겠지만, 우리 경제는 반드시 파괴된다. 사실을 보고 있지 않나? 미국 사교풍을 모방하는 사람은 일시 쾌락을 느낄 것이지만 우리 사회 질서는 깨진다. 지금 우리 당하는 혼란은 이것이지 다른 것 아니다.


그럼 달리는 차 같은 이 시대 풍조에 어떻게 하나? 누가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그 차에 브레이크를 대는 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다 죽더라도 휩쓰는 이 물결을 막으려 홀몸으로 나서는 야인, 들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이 없어 이 꼴이다.

교사도 목사도 다 약다. 다 제 몸을 보호할 줄 안다.

저봐, 저봐! 차가 내리닫는다. 저러다는 깨질 거야!”

하고 보고 서 있는 것이 우리 종교가요 교육가다. 소크라테스처럼, 세례 요한처럼, 예수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다. 막 대드는 청년들이 강도 살인을 자꾸 하는데 막으려 드는 사람이 없다.

 

이 백성만, 이 시대만 더 악해 그런 것이 아니다. 속에서 뒤끓는 혼을 누가 불러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 바로 불리기만 하면 좋은 개척자가 될 사람이다. 산 범이라도 잡을 기운을 어디다 쓰게 해 주지 않으니 그 사회에 대해 복수를 할 밖에 없지 않은가? 학생 놈들이 벌써 감투싸움을 하고 권세 있는 집 문간 드나들고, 춤추러 다니고, 그 꼴을 차마 볼 수 없지만 학생이 본래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도 고상한 사상을 주는 사람도 없고, 속에 자고 질식하려는 혼을 불러 일으켜 주지 않으니 그리 되는 것이다. 사람의 혼은 아무리 타락이 됐다가도 정말 하늘 소리를 들으면 깨는 법이다. 하늘 소리까진 몰라도 나라의 목소리라도 들으면 좀 감격하는 법이다.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는 나라의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있다. , 정부 관청의 명령이 날마다 쏟아져 나오지 않나, 학교의 훈화가 시간마다 있지 않나, 종교가의 설교가 늘 있지 않나 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 나라가 거기 있느냐?

하나님이 거기 있느냐? 나라도 하나님도 피 뛰는 심장 속에만 있다.

혼은 빈말엔 아니 움직인다.

남의 혼을 부르려면 내 혼부터 나서야 한다.


혼은 어떻게 하면 나서게 되나? 혼을 가둔 몸이 찢어져야지. 간디가 죽어서 그 공명자를 더 얻고, 예수가 죽어서 그를 믿는 자가 세계에서 일어난 까닭을 모르나? 그 혼이 육신의 가둠을 터치고 완전히 해방됐기 때문이다. 들사람이란 다른 것 아니고 스스로 제 육을 찢는 자다. 그는 문화를 모른다, 기술을 모른다, 수단을 모른다, 꾀를 모른다, 인사를 모른다, 체면을 아니 돌아본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요,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시의 사람, 독립 독행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는 사람, 다만 한 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들사람이여, 옵시사! 와서 이 다 썩어져 가는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

 

사람의 삶이 싸움인 줄을 모르나 봐! 싸움을 주먹으로 하는 줄, 무기로 하는 줄, 꾀로 하는 줄만 알고 기()로 하는 것인 줄, 얼로 하는 것인 줄을 모르나 봐. 삶은 싸움이요 싸움은 정신이다. 힘이 없고, 생각이 아니 나고, 지식이 떨어지고, 꾀가 모자라는 것은 정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혼은 우주의 근본 되는 절대의 정신과 그 바탈이 하나이기 때문에 바로만 하면 거의 무한한 능력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문명인의 잘못은 문명을 믿는 나머지 근본정신을 잊는 일이다.

 

시베리아에 있는 야만이라는 추쿠치족()의 말이 있다. 그들의 말이 옛날엔 사냥을 하면 몇십 리 밖에 있는 짐승도 보고 들을 수가 있고 창이나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는데 웬일인지 이놈의 홀레바(러시아 사탕 빵)를 먹게 된 다음부터는 도무지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문명, 더구나 제 마음이 연구해 내지 못하고, 남의 한 것 받아들인 문명은 분명히 혼의 힘을 해친다. 생명의 법칙은 스스로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자고 병들고 줄어져 있는 혼을 깨워 일으켜야 한다.

 

우주여행이라지만, 그것은 결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정신의 문제지. 요 지구에서 생긴 곰팡이 같은 정신으로 달나라에 가서도 영토 운운하고, 국기고 뭐고 그런 것을 가지고 갈 생각을 해서는, 한동안 설혹 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류 멸망의 원인 밖에 아니 될 것이다.

바벨탑 이야기를 모르나? 반대로 이제 우리가 아무리 지식 기술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정말 우주적인 크고 높은 정신에 철저하다면, 소련이나 미국의 지금 앞선 것쯤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생각과 정력을 몇 해나 더 민중을 누르고 짜먹을 수 있나 거기만 쓴단 말이냐? 너희 생각이 그렇게 작고 비루하니까 너희 자식들이 저렇게 망나니가 되지.

그러나 이제라도 아니 늦다!



새벽 195911월호

저작집30; 1-19

전집20; 2-129

 


Posted by 익은수박
,

자꾸 떠오르네

왜 이러나!

괜찮은 건가

막 흔들리네

이건 뭘까

마음 가는 데로 가!?

(쉿)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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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노래한 시


친구라는 게 참 묘하다. 어린 시절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싱겁기만 하다. 

아니 늘상 만나는 아저씨 아줌마와 다르지 않다. 좀 편하기는 할지라도...

아니 그래서 편하지 않았다.

진짜 친구가 있는 걸까?

아마 친구 같은 존재를 친구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친구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들 친구를 노래하는지도 몰라


덧 1.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참 좋기는 한데, 언뜻언뜻 남성 중심적인 냄새가 배어 있는 듯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남성들에게 친구는 어떤 느낌이고, 여성들에게 친구는 어떤 느낌일까?

다르기는 할 것이고, 사회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기도 하고....

어떤 게 진실일까? 틀 안과 밖의 경계를 들여다보기가 쉽질 않아!



덧 2.

간밤에 시 몇 편을 찾다가 박노해 시가 들어와서 몇 편 덧붙인다.


덧 3.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몇 편을 만났다.

그는 1923년에 태어난 폴란드 시인이다. <끝과 시작>이라는 책에서...


덧 4. 

시 순서를 바꿨다.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들 가졌는가>를 맨 앞으로 모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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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사회 운동가이며 종교사상가, 1901-1989)





<벗의 노래>
                       _정연복


홀로는 이슬 하나의
무게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작고 여린 꽃잎들이

층층이 포개어지고 
동그랗게 모여 
이슬도, 바람도 너끈히 이긴다

하나의 우산 속에
다정히 밀착된
두 사람이

주룩주룩 소낙비를 뚫고
명랑하게 걸으며
사랑의 풍경을 짓는다

가파르게 깊은 계곡과
굽이굽이 능선이 만나서
산의 너른 품 이루어

벌레들과 새들과 짐승들
앉은뱅이 풀들과 우람한 나무들
그 모두의 안식처가 된다

나 홀로는 많이 외로웠을 생(生)
함께여서 행복한  

참 고마운 그대여,
나의 소중한 길벗이여


(정연복·시인, 1957-)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말로 좋은 친구>


그들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그들은 짓궂은 장난을 하며 놀기도 했지만,

또 전혀 놀지 않고도, 전혀 말하지 않고도 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

전혀 지루한 줄 몰랐기 때문이다.


(장자끄 상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서)




<첫 마음>

                     - 박노해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 마음으로




<내가 나선 이유>

                     - 박노해


솔직히 나는 내 죄를 안다

나도 거품이었고 부실했다

나는 지금 누구도 탓하지 않고

내 일생을 바쳐 쌓아온 것들이

발 밑에서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이건 분명 내 탓이다

나의 불찰이고 나의 무능이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임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슬프다

이것이 내 노여움이다


이 모든 걸 내 죄로 알고 받아들이는 게

너를 조금도 참회시킬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거다

너는 어제도 오늘도 그러한 것처럼

내일 다시 숱한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미치게 하고

한 순간 통째로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너희들이 떠넘긴 이 큰 죄와 고통이

고스란히 우리의 미래로 떠밀렸을 뿐이라는 것

그것이 나의 슬픔이고 나의 분노이다

그것이 내 탓이다 내 가슴을 치면서도

너를 향해 내가 나서는 이유이다




<나에게 던진 질문>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함께 탄식하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 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 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끝과 시작>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최성은 옮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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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얼마나 될까? 수능 본 아들을 바라보며 또 그 뒤를 따라갈지 다른 길을 갈지 궁금한 딸을 바라보며,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방향을 보여주고 자극을 주고 할 수 있을까?

두텁고 단단한 콘크리트 길 위에서 살짝 눈을 돌리면 말랑말랑한 들판이 있으며, 그쪽으로 발을 딛으면 네 길을 갈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데, 단단한 콘크리트 길에 길들여진 보이지 않는 신호체계를 벗어나질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늦지 않았을 것이다. 


은유 님의 글이 조금은 자극을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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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중3 초에 그 학교를 알게 됐고, ‘공부 잘해야 가는 학교’ ‘취업 명문’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가까스로 합격했고, 잠실에서 무악재까지 왕복 서너 시간 등하굣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다. 난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일찌감치 따두었고 2학년 올라가서 5월에 국내 최대의 증권회사로 취업이 결정됐다.

그때부터 책 보고 시 베껴 쓰고 음악 듣고 학교 건물 뒤편 우애동산에서 낙엽 주우면서 한량처럼 놀았다. 금융권에서 여직원은 여상 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여상 중에서도 서울여상 출신인 나는 어딜 가나 대접받고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기죽을 일이 없었다.

낙엽

평범함 

고졸의 불편을 느낀 건 결혼할 때였다. 시가에서 노골적으로 내 학력을 문제 삼았다. 2세를 생각하면 엄마 머리가 좋아야 한다면서 ‘그래도’ 서울여상이니까 용납한다는 식이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 또래의 엄마들과 교분이 생겼다. 남편이 목동지점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갔고 그 동네 평균 학력이 높다 보니 난 또 불편을 겪었다.

“00 엄마는 몇 학번이야?”

유모차 밀다가 벤치에 앉아서 말문을 트면 그런 인사가 자연스럽게 오갔다. 그냥 멋쩍게 “고등학교 나왔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뭔가 서로 민망했다. 속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덜 무안한 대답의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고등학교만 나왔어요.’
‘고졸이에요.’
‘대학 안 다녔어요.’
‘대학 안 나왔어요.’
‘여상 나왔어요.’
‘서울여상 나왔어요.’

그 어느 것도 상황이 산뜻하지 않았고, 어딘가 구차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함.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 말대로,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난 평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사모 졸업

대학이라는 ‘평범함’ 

글을 쓴답시고 밥벌이를 하게 됐고 철학 공부를 하러 연구공동체에 다닐 때다. 나를 아끼는 선배가 말했다.

“네가 앞으로 작가로 활동하려면 그래도 대학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거기(연구공동체) 다니며 공부할 시간과 돈과 공력이라면 대학을 시도해보라고 했다. 그건 나를 위하는 말이지만 옳은 말은 아니었다.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사회는 뭐지? 그때부터 유심히 지켜봤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거의 고학력자들이었다.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면서 학벌 중심 사회를 공고화했고 그 틀을 깨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를 내면화했고 자기 자식을 명문대 보내려고 애썼고, 자신이 어느 대학 몇 학번이라는 걸 자연스레 노출했으며 그로 인한 실리를 살뜰히 챙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학벌 세탁’에 드는 자원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몰락한 중산층이 돼버려 월 백만 원에 이르는 재수 학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생계 노동에 나서야 하기에 책상에 붙어 앉아 미적분을 풀 시간이 없었고, 두 아이 양육과 살림만으로도 생체 에너지는 고갈됐다. 그 모든 한계를 떨치고 일어날 만큼 공부에 ‘한’이 맺혀 있지도 않았다. 지금 책장에 꽂힌 책만 다 읽기에도 남은 인생이 부족할 지경이었는데 내가 왜 굳이 또 그걸.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John Walker, CC BY

John Walker, CC BY

나는 평범하지 않다 

나는 운이 좋은 고졸 사람이었다. 비교적 문턱이 낮은 ‘자유기고가’ 직업에 입문해 ‘열일’했고 전세자금도 올려줬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글쓰기 관련 강의도 나간다. 학력 문제는 계속 따라다닌다. 내가 주로 강의를 나가는 곳은 시민단체다. 나랏돈을 받아 운영되다 보니 강사료 지급 기준이 박하고 엄격하다. 다른 통로로 최저 강사료를 마련해주기 위해 활동가가 애를 먹기도 한다. 작년에 모 대학 특강을 갔을 때는 강사료 지급 기준에 석박사는 있어도 고졸 학력 기준은 아예 없어서 새로 만들어야 했다고 했다.

불편해도 괜찮았다. 나의 평범하지 않음, 소수성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여러 갈래의 경험은 내가 사회학이나 여성학, 철학을 공부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현실 문제에 부딪혀 본 것들이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자라서 불편한 게 많다 보니 피곤하긴 해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고졸이란 신분도 그랬다. 덕분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 늘 되묻고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얼마 전에는 ‘그것’과 관련해 꽤 불쾌한 일을 겪었는데 괜찮지 않았다. 나는 잊고 살아도 세상은 잊지 않으므로 ‘그것’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은유

초대필자. 작가

반갑습니다. 글쓰는 은유입니다. → 올드걸의 시집(2012) ㅣ 글쓰기의 최전선(2015)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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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전환연구소> 인터뷰 글을 퍼왔다.

곰곰이 읽어볼 만하다 싶고, 녹색당원들이 이런 일을 벌여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녹색이 일자리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인드라망에서도 고민해 볼 만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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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농촌으로 갑시다!"



- 인터뷰어 : 박이상(녹색전환연구소 편집위원)

- 인터뷰이 : 전제언(생생농업유통 부사장)



수확의 계절 가을이 왔다각 지역에서 추수가 한창이다유독 폭염이 심했던 올해는 일조량의 증가로 쌀농사가 대풍이다하지만 풍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사정은 더욱 열악해졌다생산량이 대폭 증가하자 이는 쌀값 하락으로 이어졌다쌀 80kg 한 가마니 가격이 30년 전 값으로 뚝 떨어졌다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급격한 가격 변동은 그 대상의 존재 기반을 무너트릴 수도 있는 위험한 요소 중 하나다농산물 가격을 형성하는 곳은 유통시장이지만 한 국가의 식량주권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농업이다단순히 자본논리에 의해서만 농업 경제력이 좌우되는 현 상황으로는 국민들의 식량주권을 지키기 어렵다.

 

이런 현실 속에서 농업 유통에 대한 새로운 꿈을 안고 사업을 시작한 이들이 있다. ‘생생농업유통은 농촌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도시로 판매하는 유통업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다. 20대 청년들이 만들어서 청년기업으로 유명하기도 한 이곳은 최근엔 소녀방앗간이라고 하는 식당을 창업하고 전국으로 매장을 넓혀가며 사업을 확장 중이다지난 10월 1일 생생농업유통’ 부사장 전제언씨를 만나 그들의 사업과 농촌에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1.jpg생생농업유통 부사장 전제언

 


- ‘생생농업유통은 어떤 곳인가?

 

우리는 농산물 유통업체다지역의 농산물을 사서 도시로 팔고 있다. ‘생생농업유통이란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한 것은 2012년부터지만 이 이름을 달기 전에도 이미 농산물 유통사업을 하고 있었다사장인 김가영 대표는 10년 전부터 농산물유통을 시작해왔다나는 여기서 일한지 5년 정도 되었고 가장 오래된 직원이다.

 

농산물 유통이 흔한 일은 아닌데 원래 농사를 짓거나 농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건가?

 

그렇진 않다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 출신이었고 농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에서 출발했다.농사의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배워가는 중이다비록 농사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기존의 마을 주민들과 다른 젊은 사람의 입장에서 느껴지는 감수성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산나물고춧가루양파마늘... 모든 농산물에는 농산물을 키운 어르신들의 삶이 담겨 있고 그 지역의 문화가 녹아 있다이런 농산물을 유통하는 일은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을 유통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그런 감수성이 우리 사업의 방향을 결정 지었다고 할 수 있다.

 

농산물을 수확하는 현장에 가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 있다그런 지역의 고유한 느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비자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다면 농산물의 가치도 더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그래서 단순히 농산물만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농산물을 통해 지역의 가치를 도시로 이어주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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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받은 인상을 이미지와 문구로 표현한 천막

 

- 20살부터 농산물 유통업을 시작한 김가영 대표의 이야기는 청년 사업의 성공담으로 언론을 통해 많이 소개가 되었다. ‘생생농업유통도 어느덧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것 같다현재의 회사 규모는 어떤지 궁금하다.

 

우리가 유통하는 농산물 규모는 해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대략적으로 연간 쌀은 10~15된장은 3~4산나물은 1톤 정도 유통한다. ‘소녀방앗간이 생긴 이후로는 여기 식재료를 주로 납품한다. ‘소녀방앗간이 한식당이다 보니 한식재료가 다양하게 필요하고 우리가 대는 품목도 다양하다품목 관계없이 다 하면 연간 50톤 정도 되는 것 같다.

 

직원은 총 3명이다김가영 대표와 나와 또 다른 직원이 한명 더 있다함께 하던 남자직원이 한명 더 있었는데 지금은 업무 상 소녀방앗간’ 소속으로 옮겼다. ‘소녀방앗간’ 직원들은 30여명이다이밖에 우리에게 납품하거나 같이 작업하는 어르신은 6~70명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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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서 함께 일했던 김가영전제언현동환

 


- ‘소녀방앗간과 생생농업유통은 이름도 다르고 대표도 달라서 처음에는 별개의 회사인 줄 알았다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두 회사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 같다.

 

두 개 회사가 각각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사업은 같이 굴러간다고 보면 된다기본적으로 소녀방앗간에 들어가는 대다수의 식재료를 생생농업유통이 납품하고 직원들도 함께 유기적으로 일하고 있다나도 서울에 올라오면 소녀방앗간’ 건물의 직원 숙소를 사용한다서로 일하는 지역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다는 정도가 차이 날뿐 같은 직원들이라고 생각한다. ‘생생농업유통의 김가영 대표는 소녀방앗간’ 이사로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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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방앗간 1호점 오프닝 전시회 포스터

 

그럼 생생농업유통’ 외에 소녀방앗간을 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김가영 대표가 처음 농산물 유통업을 시작했을 때 취급했던 품목은 상추였다상회음식점 등 여러 판매처에 상추를 대기 시작했는데 계속 변수가 생기는 거다농산물 유통은 온전히 우리 판단력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수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날씨서부터거래처가 도산하거나우리와 관계가 틀어져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는다거나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한다그러다보니 농가와 계약한 주문량을 지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농가와의 약속을 깨지 않고 우리 사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납품할 수 있는 소비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부분의 농가는 고춧가루마늘대파 등 우리가 한식을 만들어 먹을 때 쓰는 재료들을 재배한다농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농산물을 이용한 사업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한식당으로 이어졌다그리고 우리가 주로 거래하는 생산지에서 많이 나는 농산물을 소녀방앗간의 메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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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이 나물하는 하루 일상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전달한 전시회

 


단순히 농산물 유통에 그치지 않고 한식당 사업으로 확장한 것은 도전적이고 색다른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그럼 기존의 농산물유통업체와 생생농업유통의 가장 큰 차이점이 궁금하다.

 

우리가 기존 방식을 잘 모른다는 거모르다 보니 생산자나 소비자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게 우리 사업에 힌트가 되었다물론 기존의 업체를 통해 배울 것도 많다지금도 계속 배우는 중이다.

 

보통 유통업은 중간에서 이윤만 많이 남기고 착취하고 농민들과 소비자를 단절시키는 역할이라고 비춰지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중간 역할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농민들은 농산물을 팔면 그 시점부터 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하지만 소비자에게 가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그 중간 상황을 떠 앉는 건 유통업자의 몫이다.

 

예를 들어배추 10톤을 떼 온다 치자소비자는 이걸 한 번에 다 살 수 없다. 1톤씩 매월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면 10개월 간 다 소진할 수 있다이럴 때 중간자 역할이 분명 있다이런 필요에 의한 역할이 유통업에게 있다는 걸 알지 못하면중간에서 폭리만 취하는 나쁜 놈이라 생각하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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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방앗간 입구마다 소개된 나물과 할머니들의 이야기

 

우리가 기존 업체와 또 다른 점은 서로의 상황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는 거다. ‘소녀방앗간에서는 산나물 재배하는 어르신고춧가루 빻는 어르신간장 담그는 어르신... 농산물을 만든 어르신들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한다사실 식당에서 농작물 작황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식당에 납품할 농산물 수량과 품질만 잘 맞추면 되는 거지이건 식당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서빙 잘하고 요리만 잘하면 되는 거지 농산물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지은 농산물을 먹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농사지을 때도 더 정성을 쏟게 된다.할머니할아버지들이 손주들 주려고 재배한 건 얼마나 알찬가그리고 이 농산물이 어떻게 생산됐으며 그 작은 열매 하나에 수십년의 노하우와 수고가 들어갔는지 알게 된다면요리할 때도 더 공들여 요리를 하게 된다이렇게 농산물을 따라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게 되는 일이 농촌과 도시가 연결되는 지점일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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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어르신들과의 나물수확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농산물 유통을 단순히 자본의 이동이 아닌 문화와 가치의 이동으로 본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과도 비슷해 보인다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농민과 만나는 방식은 아마 생협과 비슷할 거다생협도 농산물에 대해서 농민들과 계약 재배를 한다고 알고 있다우리도 사전에 가격을 책정하고 계약 재배를 한다하지만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으로 크기 위해서는 규모도 훨씬 커져야 하고 사람도 더 많이 함께 해야 하는 등 제약사항이 많은 것 같다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중이다.

 

개인적인 삶의 이력도 궁금하다농업에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나?

 

전혀 아니었다대학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정작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 문제가 더 크다고 느끼고 있었다내 안의 많은 불만들이 다 모난 성격 때문인 건가 싶어서그러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나의 그런 불만들이 내 개인의 탓이 아닌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가부장제여성억압나이억압 등 여러 가지 억압적인 문제들이 바로 사회적인 문제라는 걸 알았으니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권력을 가져서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그런 큰 야망이 있는 건 아니었고그저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사회생활도 그런 기대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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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서 도전한 무농약 무퇴비 무비닐 농사 중볏짚으로 두둑을 멀칭

 

첫 근무지는 희망청이란 곳이었다당시엔 청년이 사회적 화두가 되어 많은 얘기들이 나오던 시점이었다하지만 정작 청년 당사자들이 뭐라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얘기가 별로 없어서 그들 스스로 이야기하고 액션을 취하는 게 필요하다 싶어 만들어진 곳이어서 청년 문화사업 관련된 일을 주로 했었다.

 

그곳에서 마포는 대학처럼 마을과 지역을 바탕으로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와 주변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그런데 태어난 이후 줄곧 도시에서 살았음에도 도시가 내 동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다출퇴근 시간의 지옥철을 벗어나 내가 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그래서 희망청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럼 농산물 유통을 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생생농업유통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처음엔 전주의 사회적기업 이음에 들어갔다전주는 소도시여서 차 타고 10분 정도 나가면 다 논밭일 정도로 자연과 가깝고 문화적 인프라가 많아서 살기 좋았다그곳에서 하는 일이 농촌에서 하는 문화 사업과 마을 사업이어서 인근 지역을 차로 많이 돌아다녔다에어컨도 안 나오는 달달거리는 트럭을 타고 산이며 하늘이며 구름이며 음미하면서 달려가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내가 그동안 본 것 중에 가장 큰 하늘을 거기서 봤다그렇게 전주 생활을 즐기다가 김가영 대표가 제안해서 함께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김가영 대표와는 어떻게 같이 사업을 하게 되었나.

 

대학 때 같은 과 친구였다그땐 별로 안 친했는데 내가 전주에 내려와 농촌에서 일하면서 친해졌다김대표는 대학시절에도 지리산 농산물 유통업을 하느라 바빴다나는 대학 때 탈춤 동아리를 열심히 했는데한참 탈춤 연습하다가 수업에 늦어서 교실 맨 뒤에 앉아 숨 돌리고 있으면 누가 조용히 들어와 내 옆에 앉는 거다그래서 쳐다보면 김대표였다그러다 곧 전화가 오면 다시 조용히 사라지고... 그런 모습을 보며 쟤는 뭐지 했던 기억이 난다아마 김대표도 당시엔 나를 보며 지하실에서 탈춤이나 추는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음에서 했던 일이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거였고 그러다 보니 농촌 구석구석을 많이 돌아다녔다탈춤 출 때는 탈춤 추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 보이듯이농촌에 사니까 농사 짓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 보였다그래서 농사도 한번 지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김대표가 전북 완주에서 고추농사를 지어보자고 제안해 왔다돌부터 골라내야 하는 척박한 땅이었지만 주변에서는 어떻게 농사 짓는 지 잘 보고 눈치껏 따라하면서 고추농사를 지었다농사짓는 과정 자체가 다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어서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움이 더 컸다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김대표와 함께 유통업에 뛰어들었다시작은 고춧가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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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고추농가와 계약 재배한 고추를 수집하는 날, 5톤 트럭과 트렉터 동원

 

문화기획 일을 하다가 농업유통으로 바꾼 셈이다청송에 있을 때 산나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지의 메리트라는 잡지도 만들었다고 들었다지역의 문화생산에 계속 참여하고 있었던 셈인데 문화기획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앞으로도 유통업을 계속 할 생각인지 궁금하다.

 

사실 지금 딱 유통업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우리가 지금 하는 유통업은 문화기획이 함께 들어가 있다고 본다물론 농가와 만나서 가격 흥정하고 물건 받아와서 납품하고기본적으로 하는 유통에 필요한 업무들이 있다하지만 이 외에도 농산물로 다양한 문화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작년에는 정부 지원금으로 청송 지역 단체들과 협력하여 청송창조지역사업단을 꾸리고 다양한 지역 문화 사업도 벌였다. ‘오지의 메리트는 그 일부였다.

 

예를 들어 소녀방앗간에 산나물을 따는 어르신들의 하루를 사진과 문구로 전시를 한 적 있다유통업자로서 일하면서 그분들의 삶을 지켜보고그 이야기와 가치를 전하기 위한 문화적 노력의 결과가 전시로 나온 거였다.

 

우리가 유통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 사업방식으로는 부족했다그래서 도시에서 살면서 길러진 감성과 습성을 유통업에 접목해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냈다지난번엔 농촌에서 간장 담그는 어르신쌀 빻는 어르신 등 우리와 같이 작업하는 어르신들을 모셔서 소녀방앗간’ 매장에 가서 밥을 먹었다그분들도 내가 따온 나물이내가 담근 간장이이렇게 밥과 찬으로 나오는 걸 처음 보신 거다서울에서 우리 농산물로 이렇게 식당을 하는 구나 알게 되니까 관계가 더 두터워지게 된다.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다어르신들을 얘기로만 듣다가 직접 보게 되면서 자신이 요리하는 식재료에 더 믿음이 가게 된다그래서 소녀방앗간’ 메뉴판을 보면 각 식재료를 만든 어르신 이름이 들어가 있다지금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농산물을 매개로 도시와 농촌을 잇는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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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공연과 함께 한 가을청송창조지역사업단에서 함께 만들었던 청송별밤축제

 

도시에서 지역으로문화기획자에서 유통업자로그리고 다시 지역에서 도시로유통업자에서 문화기획자로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삶의 이력이 흥미롭다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된다추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리가 농담 반진심 반으로 뉴욕에 가자는 말을 하고 있다. ‘소녀방앗간’ 매장을 뉴욕에 오픈하고 싶은 꿈이 있다최근에 제주도에도 매장이 하나 생겼는데 제주도만 해도 우리에게는 외국이나 다름없는 새로운 도시다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한다우리의 또 다른 도전이다.

 

만약 뉴욕에 매장을 연다고 하면뉴욕까지 한국 농산물을 이송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 소비량과 탄소 배출량이 증가하게 된다이런 환경적인 측면으로 뉴욕 진출을 고려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 지역에서 나는 음식물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만 먹는다면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음식물을 못 먹고 살아야 되는 건가 질문해 볼 수도 있다이 문제는 주말농장과도 비슷한데주말농장도 자연 속에서 생태적인 삶을 얘기하지만 거기까지 가려고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탄소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농장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농장생활을 직접 접했을 때 농작물에 대한 이해도 생기고 파급력도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도 청송에서 뉴욕으로 식재료를 이동했을 때 드는 비용과 오염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그 음식을 먹으면서 청송과 한국 농촌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파생되는 효과와 가치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뉴요커가 우리 음식을 먹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와 가까운 지역에서 생태적인 활동을 하고 싶은 꿈을 키울 수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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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창조지역사업단에서 폐교를 청년 지역정착 실험공간으로 꾸밈

 

지금까지 나왔던 이야기처럼 농산물 유통을 토대로 도시와 농촌이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전환이 만들어지길 꿈꿔본다끝으로 녹색전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녹색전환은 환경을 생각하는 삶 같다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면 농촌생활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환경을 생활의 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유럽연합에서는 농사 짓는 사람을 단순히 식량 생산으로 의미화 하는 게 아니라 이 지구의 녹지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자라고 규명하기도 한다그래서 이들에 대한 지원사업도 보면 이들이 농촌에 살면서 논과 밭을 일구고 나무 심고 환경숲을 가꿔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원한다는 개념이 들어가 있다그래서 농업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녹색전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농촌에 살면서 삶의 전환을 경험했다온종일 머리로만 씨름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도시생활에서직접 몸을 움직여 땅을 갈고 풀을 베고 농작물을 수확하면서 머리도 더 상쾌해지고 활력이 솟았다삶 자체가 건강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래서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같이 농촌으로 갑시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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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작가도 있고, 낯선 작가도 있는데....

암튼  세계 여러 작가들이 글쓰기에 관해 도움말을 준 것들 47가지를 정리했네요.

위키트리에서 가져온 것임.


-> 위키트리 기사 바로가기(클릭!)




세계 여러 작가들이 전하는 글쓰기 조언 47가지



1. 누구도 좋은 책을 읽으며 자살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책을 쓰면서는 많은 이들이 자살했다. (로버트 번)

 

2. 캐릭터가 스타일이다. 나쁘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캐릭터에선 좋은 스타일이 나올 수가 없다. (노먼 메일러)

 

3. 없애는 건, 남아 있는 걸 응축시킨다. (트레이시 세발리에)

 

4. 다른 출판물에서 익숙하게 본 비유나 직유, 상징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 (조지 오웰)

 

5. 캐릭터는 작가가 창조하는 게 아니다. 원래 존재하고 있었는데, 발견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보웬)

 

6. 다 완성하기 전까진, 절대 이렇게 이렇게 쓸거야 남에게 말하지 마라. (마리오 푸조)

 

7. 우울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지한 작가가 될 수 없다. (커트 보네거트)

 

8. 언어 사용은 우리가 죽음과 침묵에 맞서 싸우게 할만한 유일한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

 

9.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려선 안된다. 몽둥이를 들고 그걸 쫓아가야 한다. (잭 런던)

 

10. 작가가 지켜야할 규율은 가만히 서서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는 것이다. (레이첼 카슨)

 

11. 글쓰기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형태의 정신분열증이다. (E.L. 독토로우)

 

12. 그 순간 나오는 생각을 적어라. 골똘히 짜내지 않은 생각들이 보통 가장 가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13. 내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냐고? 지어낸다. 다 내 머리 속에서 나온다. (닐 가이먼)

 

14. 난 글을 쓸 때, 정확한 방향성을 가진 약간의 증오가 유용하다는 걸 발견했다. (앨리스 워커)

 

15. 너무 멀리 갈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T.S. 엘리어트)

 

16. 소설을 써야겠다면 써라. 하지만 돈을 버는 건 우연한 사고(accident)라고 생각해라. 보상은 쓰는 것 자체로부터 얻어라. (펄 벅)

 

17. 아마추어들이 영감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프로들은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 (스티븐 킹)

 

18. 픽션의 문제점은 그게 너무 말이 된다는 점이다. 반면 현실은 결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앨더스 헉슬리)

 

19.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두려움이 '잘 해내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초월할 때, 비로소 일하기 시작한다. (알랭 드 보통)

 

20. 저널리즘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를 목격하게 하지만, 픽션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를 살게 한다. (존 허시)

 

21. 난 항상 하나의 아이디어, 심지어 지루한 하나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한다. 그건 내가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질문이 된다. (토니 모리슨)

 

22. 좋은 작가가 되는 건 3%는 재능이고, 97%는 인터넷에 주의를 뺏기지 않는 것이다. (무명)

 

23. 재능은 싸구려다. 중요한 건 훈련이다. (앙드레 드뷔)

 

24. 아이디어에 대해 큰 소리로 논의하는 건, 종종 그걸 완전히 죽이는 거라는 걸 발견했다. (조앤 K. 롤링)

 

25. 모든 이야기는 끝까지 계속 가면 죽음으로 끝난다. 그 사실을 숨기려 하는 자는 진정한 스토리텔러가 아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26. 테크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열정을 가져야 한다. 테크닉 그 자체는 수를 놓은 냄비받침대에 불과하다. (레이먼드 챈들러)

 

27. 젊은 작가들을 쓰도록 독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작가라는 생각은 못하게 해야 한다. (월러스 스테그너)

 

28. 썼을 때와 그걸 고칠 때 사이에 꽤 시간 간격을 둬라. (제이디 스미스)

 

29. 가능한 한 자주 글을 써라. 그게 출판될 거라는 생각으로가 아니라, 악기 연주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J.B. 프리슬리)

 

30. 매일 글을 써라. 강렬하게 독서해라. 그리고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자. (레이 브래드버리)

 

31. 당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존중해라. 심지어 별볼일 없는 캐릭터까지도. 예술에선 실제 인생에서처럼, 모든 이들이 각자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사라 월터스)

 

32. 매우 일찍 일어나서 바로 일을 시작해라. 먼저 일하고, 씻는 건 나중에 해라. (W.H. 오든)

 

33. 명확하게 쓰는 사람들은 독자를 갖게 되고, 불명확하게 쓰는 사람들은 평론가를 갖게 된다. (알베르트 카뮈)

 

34. 의식은 편집자고, 무의식은 작가다. (스티브 마틴)

 

35. 글쓰기의 목적은 여러분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끄러워서 졸도하게 만드는 데 있다. (J.P. 돈리비)

 

36. 픽션은 거짓말이다. 좋은 픽션은 그 거짓말 속에 감춰진 진실이다. (스티븐 킹)

 

37. 핵심 감정(key emotion)을 발견해라. 이게 단편을 쓰기 위해서 알아야할 전부다. (스콧 피츠제랄드)

 

38. 자기 글을 가차 없이 대해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럴 것이다. (존 베리먼)

 

39. 내게 작가란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을 뜻한다. (수전 손택)

 

40. 좋은 작가란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러다. 학자나 인류의 구원자가 아닌. (아이작 싱어)

 

41. 난 한 문장, 한 아이디어, 한 이미지를 갖고 시작한다. 그 이상으론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따라 간다. (데이빗 라비)

 

42. 작가의 규칙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걸 말하는 것이다. (아나이스 닌)

 

43. 결말을 서두르거나 강요하지 말아라. 당신이 알아야할 전부는 다음 장, 그 다음 몇 장이다. (척 팔라닉)

 

44. (글을 쓰러) 출석해라, 출석해라, 출석해라. 그러다보면 얼마 후에 뮤즈도 출석할 것이다. (이사벨 아옌데)

 

45. 새가 해답을 갖고 있어서 지저귀는 게 아니다. 부를 노래가 있어서 지저귀는 것이다. (조앤 월시 앤글런드)

 

46. 나만의 목소리를 갖기 위해선, 그 목소리가 전달될지 여부는 잊어버려야 한다 (앨런 긴즈버그)

 

47. 굽히지 말아라. 희석시키지 말아라. 논리적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아라. 유행에 맞춰서 당신의 영혼을 편집하지 말아라. 당신의 가장 강렬한 집착들을 무자비하게 따라가라. (프란츠 카프카)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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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쓰지 말고,

모든 생물을 그 어느 것이나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이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연정에서 우환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친구를 동정한 나머지 마음이 얽매이면 손해를 본다.

가까이 사귀면 이런 우려가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애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하고,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마음을 산산이 흐트러 놓는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우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이 내게는 재앙이고 종기이고 화이며

병이고 화살이고 공포다.

이렇듯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그러한 두려움이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치 어깨가 떡 벌어진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나 마음대로 숲속을 거닐 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임(集會)을 즐기는 이에게는

잠시 동안의 해탈에 이를 겨를이 없다.

태양의 후예(부처님)가 한 말씀을 명심하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다투는 철학적 견해를 초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결론에 도달하여 도(道)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남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벗을 멀리 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에게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널리 배워  진리를 아는,

고매하고 총명한 친구와 사귀라.

온갖 이로운 일을 알고 의혹을 떠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이나 쾌락에 만족하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은 집착이구나.

이곳에는 즐거움도 상쾌한  맛도 적고 괴로움뿐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시이다’ 라고 깨닫고,

현자(賢者)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는 것처럼,

또는 불이 다 탄 곳에는 다시 불 붙지 않는 것처럼,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러러 보거나 헤매지 말고,

모든 감관(感官)을 막아 마음을 지켜 번뇌가 일어나는 일 없이,

번뇌의 불에 타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음의 다섯 가지 덮개를 벗겨 버리고,

모든 수번뇌(隨煩惱)를 잘라 버려 의지하지 않으며

애욕의 허물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전에 경험했던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리고,

또 쾌락과 우수를 버리고

맑은 고요와 안식을 얻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최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 정진하고,

마음의 해이를 물리치고 행동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며,

힘차게 활동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홀로 앉아 선정(禪定)을 버리지 말고,

모든 일에 늘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 가는 데 있어 우환을 똑똑히 알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애착을 없애기 위해 게으르지  말고,

벙어리도 되지 말고,

진리를 배우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理法)를 

확실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어  

뭇짐승의 왕이 된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종벽한 곳에 살기를 힘쓰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간(世間)을 저버림이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매임을 버리고,

매듭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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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페북,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에서 펴왔어요.

https://www.facebook.com/nongisnong/posts/429123370591265


경제교육협동조합 <푸른살림>의 박미정 센터장 인터뷰 글.

-> http://www.mbalanc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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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맥경화! 확 뚫어드립니다!
-경제교육협동조합 ‘푸른살림’ 박미정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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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을 쓰는 행위는 심리적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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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떤 일을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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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문제에 대한 교육과 워크샵, 일대일 상담일을 하고 있어요. ‘푸른살림’에서 하는 가장 큰 세 가지 사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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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미래에셋생명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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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펀드가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꼬꾸라질 때 문제인식이 들었는데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고객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돈은 어디로 갔는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투자’에 대해 너무 모르고 덤벼들었구나 싶어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취득했죠. 그 후 ‘미래에셋생명’을 나와서 ‘전앤김웰스펌’에서 부유한 고객들을 담당했어요. 그런데 부자들을 만나보니 그들은 하나같이 돈이 많아서 외로운 사람들이더라고요. 돈이 많으니까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자기 얘기를 누군가에게 터놓고 할 수가 없어요. 고객이었던 한 여의사 같은 경우는 병원이 잘되니까 퇴근을 제때 못해서 아이와 놀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울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냥 퇴근하시면 되잖아요.’ 그랬더니 거느린 직원이 100명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처음에는 재미있게 굴리기 시작했던 페달을 이제는 도저히 놓을 수 없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부자들을 만나면서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사람들이 적정선보다 돈이 없어도 피폐해지지만 너무 많은 돈이 있어도 피폐해질 수 있다는 걸 금융영업을 하면서 깨닫게 됐죠. 그리고 알면 알수록 금융시스템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는 것도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나는 부자들을 위해 일을 하는 걸까, 내 주위의 수많은 이들이 다 나처럼 서민의 삶을 사는데...’ 그래서 내 주위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금융시스템에 무지한 서민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얘기, 내가 보고 느낀 바를 얘기해줘야겠다고 결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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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돈을 쓰는 게 심리적인 것과 연관이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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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많이 벌게 되면 흥청망청 쓰는 사람들과 미래를 위해 계획을 짜는 사람들로 나뉘는데 저는 전자였어요. 남들에게 과시하고 멋있게 보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죠. 사람들은 좋아하는 이미지의 지향점이 있어요. 그런 이미지 때문에 돈을 써요. 실제 자기 자신을 잘 보려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싫어하고 자꾸 멋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거예요. 결국 비싼 것을 사는 건 그 액수만큼 자신의 부족을 드러내는 거거든요. 이 가방을 안 들고 이 옷을 안 입었다고 해서 내가 초라해질 것 같다면 자존감에 엄청난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그 물건이 없으면 내 얼굴조차 밖에 내보일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자아가 있는 거니까요. 돈이 많이 필요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에요. 정말 불행한 거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돈이 많이 필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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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저 같은 경우는 신랑을 만난 후로 씀씀이가 확 줄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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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대화가 되는 사람이 곁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씀씀이가 줄어들거든요. 좋은 배우자를 만난 후로 카드 값이 줄었다는 사람들이 많고요, 나와 뜻이 맞는 동료들을 만나서 씀씀이가 사라졌다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결국 좋은 물건을 사는 것도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술 마시는 것도 다 대화예요. 만약 돈을 막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내가 허하구나.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줄 누군가가 필요하구나.’ 생각하시면 되요. 물론 돈으로 그걸 얻는 게 제일 슬픈 일이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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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물건을 살 때마다 스스로를 책망하게 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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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돈쓰는 걸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만약 고가인 물건을 사고 싶다면 그런 자신을 질책하지 마세요. ‘왜 또 비싼 걸 지르려고 하지?’ 가 아니라 스스로와 대화를 할 기회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왜 이걸 갖고 싶을까? 이걸 사면 기분이 좋아질 거 같은데 왜 그럴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해야 되요. 그래야 다음번에 같은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극복할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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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돈 관리 상담이 아니라 심리상담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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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신청하는 분들 중에는 돈관리가 힘들고 돈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런데 푸른살림에서 진행하는 상담의 베이스는 정신분석에 있어요. 총 4번의 미팅을 하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돈과 자기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고 효율적인 돈 관리를 배우게 되거든요. 기본적으로 현대사회 사람들은 나르시스적 경향이 강해요.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거죠. 왜냐면 남들이 서로에게 애정을 안 주니까 나라도 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내면에는 수치와 질투가 있어요. 가령, 이효리블로그를 보던 이들 가운데 ‘너는 돈이 많으니까 그러고 살지.’라고 비난한 사람들이 많아서 이효리가 블로그를 그만 뒀잖아요. 무언가가 너무 갖고 싶은데 남이 그걸 가지고 있으면 ‘아, 저 애는 저걸 가졌구나.’가 안 되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질투나 시기가 생기면 ‘내가 왜 저걸 보면서 질투가 생기는 걸까? 내가 저걸 갖고 싶은가 보다.’하고 마음을 헤아리면 되요. 그런 훈련을 하지 않으면 남의 행복이 곧 나의 고통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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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깟 가계부 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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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격적으로 실질적인 돈 관리에 대한 얘기를 해볼 텐데요. 가계부를 쓰는 게 도움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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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는 쓰지 마세요. 쓰지 말라고 하는 건 소비한 내용을 쓰면서 생각이 건강해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가령 외출해서 분위기 있게 커피 한잔 마시고 왔다 해도 집에서 가계부를 쓰면 ‘아, 내가 분위기 때문에 너무 비싼 커피를 마셨어.’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자괴감 같은 게 생기거든요. 그냥 돈 쓰고 잊어버리면 정신 건강상 제일 좋은데 가계부를 쓰다보면 계속 그런 일이 생기거든요. 낮에 쇼핑하러 돌아다닐 때는 이성이 사라졌다가 밤만 되면 이성이 오시거든요. 그냥 통장에 자기가 늘 쓰는 만큼을 딱 넣어놓고 쓰고 사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가계부를 쓰면서 매일 밤 반성하는 삶은 지옥이 따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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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접 개발하신 ‘M밸런스 노트’는 가계부와 다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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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밸런스 노트‘는 일목요연하게 자신의 소비패턴을 볼 수 있게 만들었어요. 저 같은 경우는 2년쯤 쓰다보니까 내 패턴이 이렇구나 알겠더라고요. 제가 얘기하는 건 회계 개념이거든요. 먼저 소비 예산을 결정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늘 쓰는 한도 내에서 살아요. 어느 정도 자신의 소비패턴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매달 통장 안에 어느 정도 넣어두고 그 한도 안에서 쓰면 되는 거죠. 이런 과정이 없이 무작정 가계부를 쓰면서 월요일은 얼마 썼고, 화요일은 얼마 썼고, 그걸 주간 통계내고 월간 통계 내봤자 그게 적게 쓴 건지 어떤 건지 파악이 안 되거든요. 지출한 걸 무턱대고 기록하고 후회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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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험과 연금을 좇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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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정 지출 중에 보험이나 연금으로 많이 비용이 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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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험을 가입해서 심적 위로를 받는다면 비용이 얼마가 되든지 저는 가입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보통 혼자사시는 분들이나 한 부모 가족을 보면 가입한 보험이 상당히 많거든요. 하지만, 보통 노처녀들에게 가이드 할 때는 6만 원대 실손보험 하나만 가입하라고 해요. 내가 한창 젊은데 병원비까지 남에게 의지할 수는 없으니 그 비용은 스스로 충당하는 게 옳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조차도 나이 들면 계속 유지를 못해요. 그래서 나이 들면 보험을 끊는 게 맞아요. 대신 나이 들었을 때는 모아놓은 돈이 있어야 되는 거죠. 대개 2-3천 만원 모아놓으면 웬만한 응급의료비는 되거든요. 젊을 때는 내가 돈이 없으니까 보험을 들어놓고 대비하지만, 55세 정도 되면 보험은 해약하고 대신 수중에 모아놓은 돈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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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보험 상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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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이렇게 물어보는 분들이 계세요. ‘요즘 암도 많이 걸리고 병원비도 많이 든다고 하던데 제가 보험을 어떻게 맞춰야 되죠?’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답이 안 나와요. 보험회사의 요구에 따르기로 맘먹지 마시고요.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 먼저 결정하는 게 우선이에요. 만약 암에 걸리면 나는 보험으로 할 건지, 돈을 모아 할 건지, 아니면 그냥 죽겠다든지 (웃음) 정해야 되요. 또 어떻게 알아요? 앞으로 암은 무조건 건강의료보험으로 다 해결될지도 모르고(현재 95% 국가에서 부담) 또 암이 정복될 지도 몰라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지나치게 걱정해서 돈을 거기에 맞춰 준비하는 건 말이 안 돼요. 보험은 자각이 왔을 때가 바로 정리해야 되는 타이밍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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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결국 자신의 소비 계획 안에 있어야 하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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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내 중심성이 서야 되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버는 돈을 어떻게 쓰고 싶은지 생각해야 되요. ‘나는 집을 사야겠어.’ 혹은 ‘집이고 나발이고 차를 사고 싶어.’ 라든지 ‘나는 맛있는 걸 먹으며 여행하며 살 거야.’ 등등 자기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정하는 게 우선이죠. 그런 것 없이 보험 수백 개 가운데 ‘뭐가 좋아?’ 하면서 찾아다니다보면 답이 안 나와요. 삶의 여러 선택지에서 이게 좋다더라, 저게 좋다더라 하며 남들이 하는 말을 좇는 분들은 나중에 ‘왜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이렇지?’ 하게 되요. 하지만 자신이 먼저 좋아하는 것을 정하고 사는 분들은 후회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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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타인의 불행 위에 나의 집을 짓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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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진 돈을 투자하고 싶은 분들이 유의할 건 뭔가요?

투자에 관한 흔한 거짓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첫째로 인플레이션은 전 세계적으로 과장되어 보도된다는 거예요. 왜냐면 부의 역사는 땅을 가진 이들이 땅을 쪼개 팔아서 현금부자가 된 역사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인플레이션을 과장해 계속 땅값이, 집값이 오를 거라고 보도해왔다는 거죠. 하지만 점점 더 팔만한 땅이나 집이 없어진단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돈의 가치가 올라가게 되거든요. 그러니 현금을 가지고 있는 게 낫습니다. 여기저기 괜히 투자하지 마시고 그냥 모으세요.
두 번째 거짓말은 복리의 혜택이에요. 단리는 원금대비로 이자만 늘어나는 거고, 복리는 원금에 이자가 붙어서 그게 다시 원금이 되고 또 이자가 붙는 식인데요. 실제적으로 복리의 혜택은 20년부터 발생해요. 그 전까지는 단리나 복리나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까 복리상품은 내 자식을 위해 돈을 꽁꽁 묶어둘 분들에게 추천해요. 하지만 대부분의 복리상품이 수수료를 떼기 때문에 진짜 복리상품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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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 독신여성들이 쓴 재테크책을 보면 ‘요는 주식투자’라고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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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많이 하시는 질문이에요. 노처녀가 재테크 시장에서 제일 끌어들이기 쉬운 대상이에요. 왜냐면 금융적으로 상당히 무지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금융시장에서 노처녀들이 안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순전히 노처녀들이 ‘새가슴’이기 때문이에요. (웃음)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유통되는 돈은 한정돼 있는데 투자는 머니게임이잖아요. 내가 딴만큼 누가 잃을 거거든요. 저는 상식적인 생각을 하게 되요. 굳이 내가 누군가 돈을 잃게 하면서까지 돈을 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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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너무 박애주의적인 생각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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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리면요, 예전에 상담하러 온 분이 집값이 올라서 집을 팔았다는 거예요. 갑자기 무슨 기류를 잘 타서 1억 5천에 샀는데 3억에 팔았다면서 금세 떨어질 거라고 자랑하시더라고요. 실제로 얼마 후에 집값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타이밍을 잘 타서 그분은 1억 5천을 버셨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어떤 바보는 그 집을 3억에 샀단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분께 여쭤봤죠. 친한 지인이었다면 3억에 파셨을까요? 그랬더니 ‘못 팔죠.’ 하시더라고요. 만약 그분이 1억 5천 차익을 보겠다는 마음을 접으셨다면 누군가가 무리하게 1억 5천을 대출내서 집을 사놓고 그 집값이 계속 떨어지는 걸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걸 막을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걸 포장하는 게 문제예요. 고통을 전가하는 거죠. 남들을 왜 걱정하느냐고. 하지만 우리는 다 연결돼 있어요. 같이 사는 사회예요. 만약 집을 산 그 사람이 결국 대출을 못 갚고 빚에 허덕이다 복지계층으로 떨어지면 그 사람의 기본생계비를 우리 모두가 세금으로 부담해야 하는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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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후,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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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노후 걱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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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회사들이 다 조장해 놓은 거예요. ‘10억이 필요하다, 20억이 필요하다, 돈을 준비해놓지 않으면 당신은 엄청 불쌍한 노인이 될 것이다.’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죠. 하지만 은퇴 시기를 한 번 생각해 보자고요. 보통 60세를 은퇴시기로 생각하시는데 이제 100세 시대잖아요. 100세 인생에서 60세를 은퇴라고 생각하면 60세 이후의 시간들은 난감해지거든요. 가령 일반적인 남자의 경우, 30세에 직장에 들어갔다고 가정하면 은퇴까지 30년간 돈을 벌게 되거든요. 30년 동안 번 돈으로 60세까지의 생활도 지탱해야 하고 은퇴 후 남은 40년도 책임져야 하는 거예요. 말이 안 되죠. 예전에 비해 수명이 20년이 늘어났어요. 그 기간을 '3rd Age'라고 부르는데요. 어떤 부자도 그 기간 동안 펑펑 놀면서 마냥 돈을 쓸 수는 없어요. 어느 누가 10년, 20년을 놀고먹을 수 있을까요? 결국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시기가 늘어난 것이 기정사실이에요. 받아들여야 합니다. 60세에 은퇴하고 여행가고 쉴 생각하니까 막막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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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노후는 어느 시기를 의미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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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준비는 결국 간병기를 준비하는 것이 노후준비예요. 몸이 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시기, 누군가의 수발을 들어야만 하는 시기를 대비하는 거죠. 60세까지 번 돈으로는 주거를 안정화시키고 자녀들도 잘 키우고 최대한 건강하게 몸도 돌보고요, 자기계발에도 투자하시고요. 60세 이후에 버는 돈으로는 아파서 눕게 되는 간병기를 대비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후 준비의 개념을 내가 60세 이후에 어떤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을지 지금부터 투자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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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노후 역시 스스로 결정해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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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저는 노후 걱정을 안 하는데요. 먼저 노화를 어떻게 보느냐가 시작이에요. 늙어가는 것에 대한 관점이 중요하거든요. 늙는 것이 질병인지, 자연현상인지 생각해 보세요. 대부분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회 전반에서는 질병으로 보고 안티에이징 해야 할 것처럼 부추기잖아요. 정답은 그냥 늙으면 되요. 그런데 늙는 걸 돈으로 막으려고 하니까 돈이 드는 거예요. 우리 그냥 늙자. (웃음) 노후에 대해서도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죠. 가령 나는 몇 살까지 나 자신을 유지 보수할 것인지, 그리고 몇 살 이후부터는 고장 난 것을 받아들일지 결정해야죠. 보통 80세 이후는 암에 걸려도 치료하지 않아요. 체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치료 중에 죽을 수 있거든요. 자기 스스로 몇 살 이후는 내가 저 세상에 갈 준비를 해야 겠다 그렇게 정하고 나면 공포도 줄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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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노화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준비해야 할 자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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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 만나면 민폐 얘기를 많이 하시는데요. 나이 들면 자기 자신이 돈만 축내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사실이 무척 괴로워진대요. 그런 느낌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돈이 하던 일을 직접 하는 거예요. 실제로 도시 농업이다, 텃밭이다 해서 여름내 채소를 직접 재배해 먹는 이들이 많아졌잖아요. 이미 일본에서는 돈이 하던 것을 몸으로 직접 하는 것이 노인들 사이에 트렌드가 된 지 오래예요. 어쩔 수 없어요. 귀찮았던 일들을 하나 둘 해보는 거예요. 요리의 기술이라든가 재배의 기술을 배우면 식료품비를 줄일 수 있고, 착실히 운동을 하면 병원비 줄어드는 거고, 노화를 인정하면 안티에이징 같은 미용비 줄어드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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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돈쓰는 게 익숙해서 몸을 쓴다는 게 매우 힘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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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돈이 하는 일을 몸으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조카에게 인터넷으로 선물을 보내주는 것 대신에 제가 직접 가서 세 시간 정도 같이 놀아줘요. 놀아주는 게 힘들고 귀찮으니까 그걸 안하려고 선물만 보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웃음) 원래 자신이 해야 될 일을 돈에게 대신 시켜놓고 돈 없다고 징징거리는 거잖아요. 흔히들 ‘부모님 선물로 현금 드리는 게 제일 낫다.’고 하지만 사실 현금이 나은 게 아니라 현금이 편한 거죠. 직접 뵈러 가서 얘기 나누고 어깨나 발이라도 주물러드리는 걸 하지 않고 돈으로 드리는 거거든요. 다들 돈이 하는 일을 직접 하면 좋다는 걸 알긴 알아요. 그런데 힘들어서 안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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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끝으로 언젠가 결혼을 할 수도 있지 않겠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노처녀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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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에 대한 준비는 미리 하지 말라고 당부 드리고 싶어요. 결혼하게 되면 제3의 주거지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집을 사두는 것은 피하라고 말씀드리고 싶고, 모을 수 있다면 그냥 돈을 쓰지 말고 무조건 모아두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내가 열 살 정도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지 않는 이상은 이변이 없는 한 남자가 여자보다 모아둔 돈이 적어요. 경제활동기간을 따져보면 당연한 거죠. 그런데 만약 남자가 집을 해온다고 하면 그건 분명 시부모님 도움을 받은 거거든요. 그러면 이상하게 결혼생활이 힘들어 질 겁니다. (웃음) 공짜가 없는 거거든요. 아들 가진 부모가 집을 해주고 나서 며느리한테 갑질을 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왜나면 그분들 노후자금에서 떼어준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 갑질은 대출이자인 거죠. (웃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언은 이 모든 걸 지금 고민하지 말아라. 남자가 생긴 후에 고민하라! (웃음)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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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닌 다른 것(사람)에 관심이 있다면 소통이, 소통의 과정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서로 자기 얘기만 한다면 이미 대화는 소통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 관해 물꼬를 터주는 글이 있어 소개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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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예숙의 마음의 집] 말하기와 질문하기
김민예숙 : 여성주의상담가·춘해보건대 교수



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에 새 책을 읽게 되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그런데 누구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결은 달라진다. 꽃잎이 피어나듯 아름답게 펼쳐질 수도 있고, 봉오리 상태에서 벌어지지도 못한 채 그대로 땅에 떨어질 수도 있다.

대체로 듣는 사람의 반응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상대방이나 상대방이 꺼내는 주제에 대해 질문하는 편인가, 아니면 상대방이 꺼낸 주제와 연관된 자신의 경험, 정보, 지식 등을 더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편인가. 다시 말해 새로운 것을 더 알려고 하는 편인가, 아니면 듣지 않아도 안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편인가.

한 사람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서로 질문과 답으로 교류한다면, 마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며 한 폭의 천을 짜듯이 새로운 대화의 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실이 어떻게 교차하느냐에 따라 베, 면, 비단 등 다양한 천이 짜지듯이 질문의 종류에 따라 대화의 질도 달라질 것이고, 만들어진 맥락 안에서 두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으로 새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책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다른 사람이 더 이상 듣지 않고 다 안다는 듯이 그 작가의 다른 책 또는 다른 작가에 관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면, 서로 만나기 전과 후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로워지는 것이 별로 없다면 함께 시간을 보내기는 했으나 정신적 발전을 가져올 마음의 천을 짜는 교류는 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떤 여성 작가가 파티에 가서 한 남성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여성 작가가 자신이 책을 썼다는 말을 했는데도 그 남성은 그 책의 주제에 대해서 작가에게 묻지 않고 자신이 더 많이 아는 것처럼 설명한 것이다. 그 남성이 책을 썼다는 작가의 말을 받아서 그 책에 대해 질문했다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실수도 하지 않고 그 주제에 대해 더 알게 되는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일화는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라는 단어를 결합한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신조어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맨스플레인의 의미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특히 남자가 여자에게 거들먹거리거나 잘난 체하는 태도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2010년 <뉴욕 타임스>가 ‘올해의 단어’ 중 하나로 선정했고, 2012년 미국언어연구회에서 ‘가장 창조적인 단어’의 후보로 올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르는 것을 알려고 질문하기보다는 자신이 아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하기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역사상 남성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어왔고 설명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통해 우월감을 확인해왔기에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조명을 받았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의 뜻은 지혜로운 인간이다. 지혜가 있어 인간은 발견과 발명을 하고 문명을 만들었다.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더 알려고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의무는 물려받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그러려면 더 알아야 한다. 더 알려면 질문해야 한다. 인간관계도 상대를 더 알려고 하며 질문할 때 깊어질 수 있다. 질문하려고 생각해야 하고 답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기보다 질문하기를 조금 더 하는 가을이 되면 좋을 듯하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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