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화를 다시 보게 해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그의 목소리.

변화와 진보를 위한 그럴싸한 이론이나 논리는, 어찌 보면 '그저 좀 괜찮은 상품 하나 장착'한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경계에서 비틀거리고 버겁고 힘들더라도, 아주 사소한 변화나 전환을 시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세계 여성 지성과의 대화](1)쥘리에트 비노슈 

“분노는 변화의 욕망…파괴적 작동 막으려면 진심 담아야”


ㆍ“테러에 떠는 파리, 이민자 분노 풀 때 치유”

드리우 & 티아고 제공

드리우 & 티아고 제공

촛불의 힘이 정치의 방향을 돌리고, 진실을 이끌고 있다. 광장은 각성한 개개인이 연대해 가져온 변화의 힘이 응집된 곳이다. 2017년은 집단에 주눅들고 경쟁에 눌려온 개개인이 각성을 통해 변화의 에너지를 분출하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도 활발하다. 분노는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동시에 국가주의를 불러오기도 한다. 분노의 근원은 불평등의 심화다. 이를 극복하고 타인과 공존하는 대안의 삶은 없을까. 개인의 힘은 스스로의 존엄을 회복하고 목소리를 찾을 때 비로소 차오른다. 세계 여성 지성과의 대화를 통해 개인이 ‘믿고 밀고 나갈 수 있는’ 변화의 힘은 무엇인지 성찰해본다.


첫 회는 프랑스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이다. 1990년대 초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등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그는 올해 촬영에 들어갈 <펄 벅>에 이르기까지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또 영역을 넓혀 안무가 아크람 칸과 함께한 현대무용을 비롯, 고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통해 선과 악을 넘어 작동하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했다. 프랑스 문화계는 그에 대해 배우를 넘어 인간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완숙한 예술가라고 인정한다. 그는 사회 활동가로 이민자, 여성, 아동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고 제한 없는 언론의 역할을 보장하기 위해 ‘국경 없는 기자회’와 오래도록 함께해 왔다.

쥘리에트 비노슈와의 만남은 지난해 11월30일 로스앤젤레스, 곧 개봉할 <공각기동대> 작업이 한창인 스튜디오 인근에서 이뤄졌다. 화장기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그에게서는 명성도 대배우의 아우라도 다 잘라내 버린 듯 소박함뿐이었다. 한국의 촛불집회에 대해 전하자, 배경에 대한 자세한 질문이 오가면서 대화는 자연스레 프랑스에서도, 아랍에서도 있어온 광장의 열기에 대한 내용으로 옮겨졌다.

안희경: 한국의 촛불집회에는 고등학생을 비롯해 젊은 학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프랑스라면 68혁명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당시 청년의 힘은 이후 시대의 문화를 바꿨습니다.

쥘리에트 비노슈: 네, 엄청난 혁명이 거리에서 일어났죠. 청년들은 낡은 권력에 분노했고 감옥 같은 억압을 깨고자 인권을 위해 싸웠어요. 권력은 그들의 식민지를 계속 유지하려 했고요. 시민들이 달려나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외치지 않는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모든 시스템에서 되살리고자 했어요. 그때 귀족의 목을 치며 얻어낸 피의 대가를요. 당시의 변화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고, 피를 요구함에 있어 프랑스인들이 심장과 의식 속에서 침통한 죄의식을 감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나폴레옹이 등장했을 때 다 잊고 권력을 용인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죠. 왕을 쫓아낸 자리에 더 절대적인 황제가 앉다니요. 저는 정치는 위험한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겐 사회를 기능하게 하는 제도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권력을 잡고 수많은 소유를 해야 하는데요. 거기에 다수에 대한 존중, 존재론적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면 이는 더 나빠집니다. 정치에는 너무나 많은 농단이 있어요. 분노는 강제하는 물리력인데 잘 사용한다면야 대단하죠. 이는 불이니까요. 변화를 만들겠다는 욕망의 부분이고요. 그런데 우리가 분노 속에 갇혀 버린다면, 이때는 파괴적으로 작동합니다. 분노는 뭔가 다른 것으로 승화되어 가는 여정 속에 있어요. 승화되려면 진심을 갖고 말해야 하죠. 서로 존중하는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안: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의 해방을 말하나요?

비노슈: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 권력에 대한 욕구, 즐거움에 대한 욕구는 동물적인 면에서 나와 인간적인 면으로 도달해야 하죠. 욕망하면서 동시에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가 인간적인 면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전환이 필요한 이유예요. 수도 없는 전쟁과 위기 속에서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은 오직 함께 나누는 삶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까지 꽤 걸릴 겁니다.

안: 경쟁에 치여 사는 젊은 친구들은 세상에 참여하고 싶어도, 앞가림부터 해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유폐시킵니다. 그만큼 경제적 자립은 빙벽 등반처럼 준비된 자들만의 도전이 돼버린 거죠. 많은 걸 포기하고 미룰 수밖에요.

비노슈: 물론 요즘에는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프랑스 젊은이들은 심각한 구직난을 겪죠. 저는 뭐라도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보잘것없다 생각하는 일이라도 해보라고요. 선뜻 나서기 쉽지는 않아요.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이 아닌데 하는 것을 굴복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일 속에서 우리는 성장할 수 있거든요.

제가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준비할 때 18세였는데,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어요. 저는 뭐라도 해보려고 쫓아다녔죠. 상점에서 계산도 했고, 시장에서 채소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극장에서는 공짜로 일했고요. 그건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이니까 돈 안 줘도 매달려 배웠습니다. 앞으로 놓여질 여러 종류의 가림막들을 넘으려면 많은 시도를 해봐야 합니다. 준비는 그 속에서 이뤄지는 거죠.

안: 최고의 배우가 되고자 할 때 경험하는 모든 일은 자양분이 되죠. 그렇지만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사람한테는 경력에 도움이 안되고….

비노슈: 인간이 되어가는 거예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당신이 공손하게 대한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남에게 서비스를 하면서 스스로 폄하되는 느낌을 받지 않게 됩니다. 나중에 더 나은 자리에 있더라도 남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는 거죠. 무언가를 경험하면 마음에 새겨지니까요.

안: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자는 것을 목표나 꿈으로 삼아 보지는 못했습니다. 울컥하는데요.

비노슈: 인생의 게임은 바로 마음을 성장시키는 거예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목표는 마음을 진화시켜내는 것뿐입니다.

안: ‘마음을 진화시킨다’ 자기 계발서의 메시지와 연결되는 부분도 있는데요.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강조하는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북돋우는 메시지가 때론 블랙커피처럼 반짝 각성시켰다 사라질 때가 있거든요. 자칫 사회구조에 대해 눈감게 만들기도 하고요.

비노슈: 제 경우, 자기 계발은 실패 속에서 이뤄졌어요. 실패를 통과해 나오면서 겸손함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됐죠. 이 인식은 남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한테 새로운 시각을 줍니다. 보다 더 현실에 있도록 도와주고요. ‘나는 강하고 최고다’라는 등의 환상에 덜 빠지게 되거든요. 환상을 깨 나가는 일이 중요해요. 이는 누군가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해내야 하는 거예요. 안다는 것은 지식과는 다릅니다.

안: 어떻게 배우게 됐죠?

비노슈: 시간 속에서요. 자기를 아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있었어요. 대단한 분이신데, 제가 18세 때 연기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입니다. 어느 날, 열심히 연기를 하는데 선생님이 ‘그만 멈춰’라고 하시는 거예요. 다시 했죠. 또 ‘그만’ 하시더군요. 처음부터 다시 했어요. 그런데 계속 다시, 다시를 반복하셨습니다. 정말 더 이상 어쩔 줄 몰라 멍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죠. 뭘 해야 할지 다 잃어 버렸고, 선생님이 무얼 바라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그 상태에서 비집고 나오는 게 있었습니다. 내 안에서 몰랐던 뭔가가 나왔어요. 나의 의지란 의지는 다 씻겨 떠내려간 그 지점에서요. 바로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는 그걸 하기 시작한 거죠. 연기에 대한 나만의 앎을 향한 첫발을 뗀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도하지 않는 것. 그냥 충분한 상태로 거기 머무르는 것. 내가 어떠한 감정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감정이 내게 다가오는 것 말이죠. 열고 받아들이면 됐어요. 사랑과 같습니다. 사랑은 좇으면 발견할 수 없잖아요? 대신 사랑이 들어오도록 열어둔다면, 우리는 더 큰 가능성을 갖게 되죠. 왜냐하면 의지는 종종 우리 자신을 가두는 벽이 되거든요.

안: 이해가 갈 듯 말 듯 합니다. 지식과 아는 것은 다르니 저도 경험으로 느껴봐야겠어요. 그동안 주요 배역으로 출연한 영화만도 70여편이 되는데요. 최근에 제게 생소하게 다가온 배역이 영화 <33>에서 칠레 여성으로 나온 모습이었습니다. 광산이 붕괴되고 33명이 지하에서 두 달 동안 구조를 기다린 실화를 다룬 건데요. 매우 전투적인 생존자 가족으로 또 백인이 아닌 짙은 피부색의 가난한 여인으로 나왔는데, 이질적이지 않았나요? 매우 다른 삶을 연기하는데….

엘리나 케치체바 제공

엘리나 케치체바 제공

비노슈: 그래요. 하지만 역할은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에요. 배역은 내면에서 끄집어내는 거죠. 진정으로 누군가에게 귀 기울인다면, 우리 안에서 변화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다들 각자의 믿는 시스템이 있는데, 제 경우는 아이들 하고 비슷합니다. 누가 자기 이야기를 하면 난 이미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있어요. 일종의 경계나 영역이라는 것이 제게는 없나 봅니다. 저의 연민의 정은 빠르고 즉각적이죠. 이는 나의 존재 방식이지 선택이 아니에요. 마리아 세고비아 역시 보자마자 서로 알아봤어요. 함께 정부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마리아가 아주 비판하더라고요.

안: 칠레 정부는 다큐를 만들 만했다고 봐요. 그들은 광부들을 구해냈으니까요.

비노슈: 하지만 정부는 광부들이 땅 밑에 갇히고 사흘이나 지나서 왔어요. 마리아와 가족들은 첫날부터 달려나와 시위를 했고요. 마리아가 들려준 진실은 많이 달랐죠. 그 덕분에 정치가 자신들 이익에 맞게 얼마나 왜곡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보상금으로 가족을 달래서 어쩔 수 없는 재난으로 끝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가족들이 최선을 다해 싸웠고, 국제적인 주목까지 끌어냈고 땅을 파게 만든 거죠. 지상에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시작은 오직 가족들뿐이었습니다. 기업과 정부로부터 매우 괄시당했죠.

안: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 상념이 일었습니다. 하나는 땅 밑에 갇히는 것은 바닷속보다는 좀 더 긴 시간 뭔가를 해 볼 수 있겠구나, 다른 하나는 비록 처음에는 재난으로 처리하고 덮으려 했지만, 칠레 정부는 최선을 다했구나였습니다. 우리 세월호가 떠올라서 몹시 힘들었습니다.

비노슈: 세월호는 저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고, 지금도 기억합니다. 하지만 생존자와 가족들이 그동안 당한 고통은 잘 알지 못했어요. 힘 내시길. 마음 깊이 응원하고, 진실이 밝혀지길 바랍니다.

안: 배우이신데 왜 정치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시나요?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선 녹색당 후보인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를 지지하셨죠.

비노슈: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도시사람들이 균형감을 잃고 혼돈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자연과 단절되어 있어서라고 생각하니까요.

안: ‘국경 없는 기자회’ 활동에는 15년 넘게 목소리를 보태고 있고,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는 서류미비 노동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는데요.

비노슈: 네. 아프리카 사람들이 프랑스로 들어오도록 돕기도 하고 그랬죠. 정부에서는 그들에게 체류허가서를 안 내주려고 해요. 남쪽 사람들은 지금 북쪽으로 몰려오고 정부는 막으려 하죠. 하지만 막지 못할 거예요. 이제 곧 남쪽 전체가 북으로 이동할 테니까요. 전격 개시가 됩니다.

안: 왜 그들은 북쪽으로 가죠?

비노슈: 아프리카에 프랑스가 갔고, 벨기에, 포르투갈, 미국, 중국이 갔으니까요. 아프리카 사람들한테는 땅도 일자리도 이제 없습니다. 그들 정부는 어떤 때는 왕궁도 헐값에 팔아넘겼어요. 국민을 먹여살리지 못합니다. 게다가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니 재해가 반복되는 땅을 떠날 수밖에요. 이제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 삶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거예요.

안: 이민사회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노동자들은 값싼 노동력이 밀려들어오는 상황에 대해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들 국가 경제가 흔들릴 거라는 공포에 난민 이민자에게 등을 돌리잖아요.

비노슈: 저는 다른 두려움이 있습니다. 파리에 폭탄이 터지는 두려움이죠. 사람들이 점점 더 마음을 닫고 수전노가 되어 사람답지 못하게 되는 것이 저의 공포입니다. 폭탄이 터지는 이유는 프랑스 사람들이 과거에 식민지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해요. 특히 북아프리카에서요. 프랑스인으로서 저는 이민 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갖습니다. 이제는 치유하려고 애써야 해요. 예술로 뭔가 이뤄질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술은 삶을 전환시켜내는 힘이 대단하니까요. 이민자들이 자기의 분노를 표현하고 좌절을 풀어내고, 스스로의 비전을 표현해 내도록 함께할 때, 두려움은 녹아내릴 거예요. 제 생각에 언젠가 이민은 인류에게 가장 대단한 일이 될 거 같아요. 세상이 하나가 되는 거니까요.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우리 각각은 모두 다르다는 정의였습니다. 맞잖아요? 한 식구라고 해도 다 다르죠. 바로 이 점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죠. 제가 이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는 관용(톨레랑스)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에 대한 문제겠죠. 저는 우리가 신성의 근원(the one)에서 통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교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경구가 있는데, 영어로는 모릅니다만, 의미 중심으로 옮겨 보면요. 누군가는 이를 근원적 신(God Primary)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각자의 삶의 원리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원리를 드러내는 표출’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우리의 의지가 아닌 우리가 온 그 근원의 자연스러움을 존중함으로써 드러내는 것인데, 그러려면 자기 스스로를 고양시켜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안: 근원이라 함은 신을 뜻하나요?

비노슈: 아니죠. 존재의 근원입니다. 신은 거기에 이미지를 넣은 거예요. 우리가 알 듯이 도교에서는 비움을 명상하죠. 왜냐하면 실제 비어 있고, 우리가 존재하는 속에서 신성이 우리에게로 내려오는 것을 허락하니까요. 거기에 단어를 집어넣거나 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붙잡고 있을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근원의 원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은 가슴을 통해서, 정신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느끼는 거라고 봐요. 이는 모든 곳에 있어요. 사랑을 알아차리는 것은 모든 인간 속에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기에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하지 말아요. 그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니까요. 모든 살아 있다는 표현은 곧 신성이 발현된 것입니다. 모두가 다 다르다고 해도 말이죠.

안: 그러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세계적으로 증오가 커지는 만큼 사람 사이의 골이 깊어요. 국가주의를 우려하는 것도 작은 범위 속에 작동하는 지노사이드인 차별, 왕따를 용인하고 부추기기 때문인데요. 달라이 라마는 ‘용서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어요. 한 심리학자에게 이 말을 하니까 강하게 거부하더라고요. 유대인인데, 자신이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면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폴란드에서 나치수용소 생존자 속에서 자랐기에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고요.

비노슈: 제가 정말 관심 있어 하는 주제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 범죄를 조사하는 진실과 화해위원회에 대한 영화를 할 때였어요. 그때 재판에 대해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어떤 흑인은 아주 끔찍한 고문을 받았고, 아이들을 잃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했죠. 그들은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할 방법이 있었어요. 그 재판이 바로 회복을 위해 한 발 내딛는 디딤돌이 됐거든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할 기회죠. 차별 속에 있으면 제일 먼저 부서지는 게 바로 이 존엄입니다.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게 하니까요. 이는 대단히 중요한 방식입니다. 재판이 항상 악을 처벌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말해지고, 미래를 위해 기록되어질 수는 있으니까요. 모든 상처, 분노가 가해자 앞에 들려지고 기록되어지니까요. 사회 속에서 엄청난 트라우마가 있을 때 이를 헤쳐나갈 길을 보여줬어요. 그리고 저는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을 완전하게 이해합니다. 트라우마는 정말 어마어마한 고통이니까요.

안: 보살핌으로 연결해야 할 세상을 위해 개인은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요?

비노슈: 모든 개인은 뭔가를 꼭 바꿔낼 수 있습니다. 변화는 우리의 말과 생각, 감성으로도 만들어 낼 수 있고요. 생각은 좋은 영향을 만들고 행동은 생각을 완성시키죠. 저는 대단한 선언을 공표하기보다는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변화를 만들려고 해요. 지구라는 병들어가는 행성을 회복시키는 일도 바로 생활방식을 바꾸는 데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순하게 사람들을 돕는 작은 행동 또한 혁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는 이미 혁명이죠. 태도를 바꾸는 것, 더욱이 행동하는 것, 돕는 것은 혁명입니다.

쥘리에트 비노슈와 인터뷰하게 된 계기는 그가 주도하는 ‘천사와의 대화’(Dialogues avec l’ange)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나치 치하에서 네 명의 예술가들이 나눈 개인과 사회의 고통에 대한 대화를 담은 같은 제목의 책을 오늘의 언어로 대중과 이야기하고 있다. 그와 함께하는 방혜자 화백을 통해 만남이 이어졌고, 쥘리에트 비노슈는 대화 전반에 내면과의 대화를 강조하였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쥘리에트 비노슈는 누구?

프랑스 저명 배우이자 화가이며 사회활동가다. 196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983년 영화 <리버티 벨>로 데뷔한 후 30여년간 영화, 연극, 미술 등 문화예술계 전반을 아우르며 예술가로 활동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세 가지 색: 블루> <잉글리시 페이션트> 등에 출연하며 1990년대 프랑스 영화에 새 물결을 일으켰다. 젊은 시절부터 인권과 환경을 위해 앞장서왔다. 최근에는 개인의 내면적 성찰이 사회변화의 중심임을 전하는 데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안희경은

[세계 여성 지성과의 대화](1)쥘리에트 비노슈 “분노는 변화의 욕망…파괴적 작동 막으려면 진심 담아야”

재미 저널리스트. 불교방송 PD 출신으로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서구의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 모색을 소개하는 글을 써왔다. 윌리엄 켄트리지 등을 인터뷰한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2014), 노엄 촘스키 등 세계 석학 7인과의 대담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2013), 재레드 다이아몬드 등 세계 지성 11명과의 대담을 엮은 <문명, 그 길을 묻다>(2015) 등을 출간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1032247005&code=970100#csidx1d48a2562b96abe89d60379cf89a1a5 

Posted by 익은수박
,

조류독감, 살처분, 밀집사육, 공장식 축산. 

성장에 갇힌 우리의 상상력...

---

[중앙일보] 입력 2017.01.05

살처분 32.9% vs 1.1%…AI 참사 부른 밀집사육



4일 오전 세종시 전동면의 한 산란계(알 낳는 닭) 농가. 닭 울음소리는커녕 사람의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AI(조류인플루엔자) 예방 방역실시·외부인 출입금지’란 플래카드와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 붙인 통제선만 있었다. 지난해 11월 말 세종시에서 최초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에 닭이 감염된 농장이다. 병아리 30만 마리를 포함해 70만 마리의 닭을 살처분했다. 이곳은 닭 한 마리당 사육 공간이 A4 용지 한 장에도 못 미칠 정도로 빽빽한 공장형 축산 농가였다. 이곳에서 AI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번졌다.

추천 기사

전남 화순군 춘양면에 위치한 산란계 농장 ‘쉴만한 농원’. 이 농원 이상근 대표는 2개 동에 총 1만2000마리의 닭을 기르고 있다. 닭은 넓은 사육 공간에서 종종걸음을 하거나 날갯짓을 하며 지냈다. 알은 연간 200~250개 정도 낳았다. 이곳에서 10여㎞ 떨어진 나주시 남평읍에서 AI에 감염된 닭이 발견됐지만 이 농장의 닭은 모두 건강했다. 이 대표는 “열악한 사육 환경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일반 양계 농가의 닭에 비해 친환경 농장의 닭은 외부 바이러스 등에 상대적으로 강하다”고 말했다.

지난 3일까지 AI로 살처분된 닭과 오리, 메추리는 3036만 마리에 이른다. 피해는 산란계(2245만 마리)에 집중됐다. 전국에서 사육 중이던 산란계 가운데 32.9%가 살처분됐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친환경적 사육 환경으로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산란계다. 89개 동물복지 인증 농장에서 기르는 103만3000마리 산란계 가운데 살처분된 닭은 1개 농장 1만3000마리(1.1%)에 불과하다.

3036만 마리 살처분 대란
친환경 농장 피해는 1곳뿐
공장식 사육방식으론 한계
“AI 대응에 수천억 쓰느니
친환경 양계로 전환 도와야”

32.9% 대 1.1%. 어떤 방식으로 키웠느냐에 따라 AI에 대한 저항력은 달랐다. 기존의 살처분 방식과 방역체계로는 해마다 독해지는 AI를 차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올해 AI 확산이 그 방증이다. 가축 감염병 확산에 취약한 공장식 밀집 사육과 원가 낮추기 경쟁을 반복하면 AI 대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는 지적한다.

 

친환경 땐 닭값 급등…“비싼 국내산, 값싼 수입산 이원화를”

장형관 전북대 수의학과 교수는 “방역을 제대로 못한 게 1차 원인이지만 대량 밀집 사육 환경 때문에 AI가 빠른 속도로 퍼졌다”며 “친환경 사육을 한다고 AI 발생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6일 AI 발생 이후 3일까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살처분 보상금으로만 2300억원(닭·계란·오리 등 가금류 합산)을 지급했다. 2003년 첫 AI 발생 이후 지금까지 닭 살처분 보상금 등으로 들어간 돈은 총 8500억원이 넘는다. 여기에 매몰 비용, 방역 비용 등을 더하면 최소 1조원 이상이 들어갔다. 국민 1인당 2만원 정도 부담한 셈이다.

사실상 매년 수백억~수천억원의 예산을 살처분 등에 투입하기보다는 친환경 동물복지형 농장 지원에 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종인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는 “단순히 동물학대 금지가 아니라 국내 소비자 건강을 위협하는 감염병 예방 차원에서 양계산업을 친환경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걸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문제는 가격이다. 친환경 사육으로 산업 체계를 바꾸면 닭과 달걀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다. 최농훈 건국대 수의학과 교수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비싼 국내산과 값싼 수입산으로 가격을 자연스럽게 이원화해야 한다”며 “점점 친환경 사육 비중을 높이는 장기 플랜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Posted by 익은수박
,

팟캐스트 '시시한 다방'이 있다. 김사인 시인이 진행을 하는 팟캐스트다.

그의 목소리가 참 좋았다.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시를 읽어주는 데 딱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제 진행을 그만두신단다.

마지막 진행 때는 손님으로 나왔는데, 이때 진행자가 김사인 시인이 2006년 대산문학상을 받았을 때

소감을 읽어주었다.

이 방송을 들은 한 벗이 그것을 손수 적었단다.

흘러가는 소리로 듣는 것과 새겨진 글씨로 읽는 것은 참 다르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도 여기 새겨두고자...^^


옛날 '노동해방문학'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걸 이 분이 만드셨더라.ㅎㅎ


-------


제가 소중히 여기는 우리 말 중에 '섬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을 입 안에서 굴려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좀 더 순해지고 맑아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외람되지만, 저는 제 시 쓰기가 적으나마 세상의 목숨들을 섬기는 한 노릇에 해당하기를 조심스레 빌고 있습니다. 섬김의 따뜻하고 순결한 수동성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어떤 간곡함이 제 시 쓰기이 내용이자 형식이기를 소망합니다.


저의 시가, 제 말을 하는 데 바쁜 시이기보다 묵묵히 기다리는 시이기를, 할 말을 잘하는 시인 것도 좋지만, 침묵해야 할 때에 침묵할 줄 아는 시이기를 먼저 바랍니다. 저의 시가 이기는 시이기보다 지는 시이기를 바랍니다. 맑고 드높은 웃음도 아름답지만, 영혼은 언제나 설움과 쓰디쓴 쪽에서 더 온전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감히 그들을 위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비 맞는 풀과 나무들 곁에서 함께 비 맞고 서 있기로서 저의 시 쓰기를 삼고자 합니다. 우산을 구해 오는 일만 능사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겠습니다. 그 찬비 맞음에 외로움과 슬픈 평화를 마음 다해 예배하겠습니다. 그 곁에 서서 함께 비 맞음의 극진함으로써 제 몫의 우산을 삼겠습니다. 그것으로서 저의 리얼리즘을 삼고, 전복적 글쓰기를 삼고, 할 수만 있다면 저의 생태적 상상력과 저의 페미니즘을 삼을 수 있기 바라겠습니다. 이 소망이 과한 것이라면 부디 저의 시 쓰기가 누군가를 사하게 하는 노릇만이라도 아닐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강구하겠습니다. 


풀과 돌의 이름을, 거기 그렇게 있는 그들의 참다움을 내 시를 꾸미려고 앗아오지 않겠습니다. 지어낸 억지 이름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제 이름을  꽃피울 때를 오래 기다리겠습니다. 그들이 열어 허락한 만큼만을 저의 시로서 받들겠습니다. 그리하여 큰 수행이자 큰 과학이자 큰 예배로서 저에게 시 쓰기가 오래도록 다함이 없기를 기원할 따름입니다.


                                                                                                        - 시 쓰는 김사인 

Posted by 익은수박
,

내가 파로흐자드에 견줄 깜냥은 안 되지만...

나는 나의 태양에게 다시 인사할 수 있을까?

갈수록 태양과 멀어지는 건 아니겠지?


좋아하는 벗의 소개로 알게 된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가 이 분의 시였다는 걸 계기로 

파로흐자드를 더 알고 싶어졌다. 영화 제목의 시집을 구하기로 했다.

------





<나는 태양에게 다시 인사하겠다>

                                                                                    포루그 파로흐자드
 
나는 태양에게 다시 인사하겠다
내 안에서 흐르던 개울에게도
내 오랜 생각이었던 구름들에게도
나와 함께 가뭄의 계절을 견뎠던
정원 사시나무들의 고통스러운 성장에게도
밤이 스며든 밭의 향기를
나에게 선물로 가져왔던
한 떼의 까마귀들에게도
거울 속에 살고 있던
내 늙은 모습을 하고 있던 어머니에게도
내 반복되는 욕망 속에서 자신의 뜨거운 열기를
푸른 씨앗으로 채웠던 땅에게도
나는 또다시 이들 모두에게 인사할 것이다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내 머릿결과 함께
땅 밑에서 물씬 풍기는 냄새
내 두 눈과 함께
어둠의 빽빽한 경험들
담장 너머 숲에서 꺾은 꽃다발 들고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문지방은 사랑으로 넘친다
그 문지방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직 그곳,
사랑 넘치는 문지방에 서 있었던 그 소녀에게
또다시 인사할 것이다


Posted by 익은수박
,

줄곧 나 자신을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존재로 여겨왔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좋게 보면 겸손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고, 조심성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고, 신중함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고, 우유부단함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고...


나에게는 늘 후회였거나 타이밍을 놓침이었거나 했던 것 같고. 


이런저런 생각들은 파편화된 채, 하나로 꿰어지지 않아 나 자신을 내 안에 있는 것을 물 흐르듯 유창한 '언어'로 표현해내지 못했다. 그건 늘 괴로움이었다. 속으로만 삭이는.... 상대에게는 답답함이었겠지. 미안하다.


자꾸 말을 해야 늘었을 텐데. 


하지만 어쩌랴. 이것 또한 내가 안고 가야 할 짐. 교통사고(갈등)에서 100% 과실이 거의 없듯, 관계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이젠 비우는 쪽으로 정했다. 그대가 어느 쪽으로 정하든 흘러가는 대로 가는 거지.


세상 모든 것이 내 안에 응축되어 있기에 나 또한 우주이고, 내 안에 우주가 가리키는 방향 따라 가보고자 한다. 


성찰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하고 배우되, 새해에는 가고자 하는 길을 구체적으로 찾고,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조금더 짐을 얹더라도 가보자. 1년이면 길을 만들 것 같다.


사주 따라 가겠다. 기꺼이. 무거운 짐을 이고 가더라도.


내년에는 한두 가지 짐이 더 얹혀지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만들고, 재미지게 가겠다.

그대도 그대 바람대로 더 자유로워지기를 빌고.


그렇게 두어 해가 지나면 새로운 나를 새로운 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익은수박
,

어디서 퍼왔음요!

노래가 좋아서.

존 바에즈가 멋져서!



존 바에즈 - 도나도나





​ 


존 바에즈 - 메리 해밀턴 

​ 

존 바에즈 - Ace of Sorrow 






존 바에즈 -
Donna Donna(도나 도나) 가사


On a wagon bound for market
there's calf with a mournful eye.

High avove him there's swalow,
wingling swiftly through the sky.

장터가는 마차위에
슬픈눈의 송아지야
머리위로 제비 한마리
날쌔게 하늘을 나르네






How the winds are laun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바람들 웃는것 봐
허리꺽고 웃어대네
온종일 웃고 또 웃고
여름밤이 다 가도록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돈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돈


"Stop complaining" said the farmer,
"Who told you a calf to be?

Why don't you have wings to fly with,
like the swallow so pround and free?"

주인이 말했네. "불평일랑 그만해"
누가 너더러 송아지가 되랬나?

왜 당당하고 자유로운 제비처럼
날 수 있는 날개를 달지 못했니?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바람들은 계속 웃고 있네
온 종일 웃고 또 웃고,
여름 밤이 다 가도록
웃고 있네.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돈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돈






Calves are easily bound and slaughtered,
never knowing the reason why.

But whoever treasures freedom,
like the swallow has learned to fly.

송아지는 묶이어 죽음을 당하면서도
그 이유는 까맣게 모른다네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면
누구나 제비처럼 나는 법을 배우지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바람들은 계속 웃고 있네
온 종일 웃고 또 웃고,
여름밤이 다 가도록
웃고 있네.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존바에즈 도나도나?

이 곡은  극작가 Aaron Zeitlin이 제작한
연극 Esterke(1940~1941)가 1940년에
유태인의 언어인
이디시어(Yiddish)로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조국없이 떠돌아다니며
세계인의 핍박을 받았던
유태인의 불행한 삶을
노래했다는 해석이 있다.

이 곡이 그 후
20여년간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가사가 다소 개사되어
1960년  Joan Baez와
1965년 Donovan이 리바이벌 하면서
인기를 얻게 된다.



3절로 구성된 이 곡은
유대인 대량학살(Holocaust)과
비유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바람(Wind)은 독일국민들로
농부(farmer)는  포로수용소 운전수들,
제비(swallow)는 유태인이 아닌 사람들,
송아지(calf)는 유태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조안 바에즈
(Joan Baez, Joan Chandos Baez)?


존바에즈: 1941년 1월 9일 미국출생.

데뷔: 1959년 1집앨범
<<Folksingers 'Round Harvard Square>>




 
한때  밥 딜런,
스티브 잡스의 연인이었으며,
60년대를 풍미한
"포크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평안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이지만

소수자와 약자, 아프고 힘든 민중들을 위해

평생을 노래하며 살아온

"노래하는 인권운동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녀의 노래는 
항상 힘없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위안이 되는 노래들이었고,

소외받는 약자들에게 힘이 되었다.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음악에서 그렇듯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없죠."

-존 바에즈-



멕시코인  물리학자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비교적 평안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렸을때 반전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인권과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중학교시절에  백인들은 그녀가

피부가 검은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그녀를 따돌림을 당하게 하고

존 바에즈는 그때 느낀
 "고립" 그리고 "다름"이

음악을 하기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한때 마킨 루터킹의 연설을 듣고

그의 사상을 배웠으며

어릴때 인종차별을 느꼈던 그녀는

마틴 루터킹과 비폭력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마틴 루터킹이 
 존 바에즈의 사상을 다지고,

신념에 따라 행동할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을 대표하는 곡을
부르기 시작하여,
1960년대 반전운동의 기수,
흑인민권운동가,
평화주의자,
포크계의 여왕으로 유명해진 그녀는
그래미상 후보에 6번씩이나 선정되었고,

2007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
(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수상했다.

인권과 평화운동의 공로로
2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2개의 주로부터
존 바에즈의 날
(Joan Baez Day)을 지정받는
명예를 얻는다.





양희은이 불렀던
"아름다운 것들"의 원곡은
존 바에즈의 노래 "Mary Hamilton" 이다.


우리나라에서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라는 노래가
"The River In the Pines",


들을수록  슬프면서도
가슴에 스며드는 노래
"Ace of sorrow"  등




들을수록 영혼을 맑게하고

스며들게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찬바람이 부는 가을과 겨울

이맘때 들으면

더 가슴에 스며드는것 같다.


Posted by 익은수박
,

트랙(tracks)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트랙.

2730킬로미터 사막 길을 혼자, 아니 낙타 넷과 검은개 '디기티'랑 걸은 이야기.

그(녀)는 왜 혼자 걷고 싶었을까?


지금 나와 비슷한 마음일까?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트랙이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싶으니까. 그런데 너무 많이 트랙 위를 걸었나?

트랙 밖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트랙 안에 있던 길인지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듯한 이 기분! 맘에 안 든다.


힘들고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지만 트랙 밖에서 걷고 싶다.


올 한 해 참 많이 헝클어진 실타래 같으면서도 언뜻 실마리를 본 듯도...


하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삶은 영 엉터리!


말없이 무작정 걷고 싶다.

이제 절반은 혼자가 될 수밖에 없으니...

Posted by 익은수박
,

일요일 모처럼 걷고 걷고 걸었다. 서울 골목골목을.


전날 집회에다 날마다 생겨나는 일들로 피로가 쌓이기는 했지만, 

일요일 오전, 좋아하는 벗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다. 마음 한구석에 영화가 중심인지 함께하는 벗이 중심인지 모호하기는 하지만... 암튼!^^


장면 하나하나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을 법한 현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채, 그대로를 담은 듯했다. 사실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조각난 파편들이기에 그 이어짐을 쉬이 알아차리기 힘든 것 같다. 조각난 현실 자체마저도 갈수록 버겁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보리밭에 부는 바람'이 더 좋은 듯. 아직까지는)


지극히 현실을 그냥 보여주기만 하는 듯한데도, 제도화된 시스템이 한 인간의, 아니 인간의 자존감을 짓밟고 '기'마저 빼앗으며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 이르게 하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었다. 켄 로치 감독의 힘일까?영화를 보고 나서 쉬이 자리에서 일어나지지 않았다. 좀 많이 우울하기도 했고, 댄(다니엘 블레이크)의 죽음이 너무 가슴 아팠다. 


댄의 온정과 관심으로 삶을 버텨낸 케이티와 그의 두 아들딸이 현실을 잘 이겨낼까? 아니 이겨냈으면 하는 응원을 보내면서도 제2의 댄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서글픔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후 약속은 땡땡이 치고 그저 걸었는지도...^^


벗의 소개로 본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라는 영화 속 시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속 댄의 대사가 유난히 연결되는 듯하여, 영화 끝나고 골목골목을 걸으며 함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음이 위안이었다고나 할까?


함께 걸으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그냥 바람과 함께 나누는 걸로!


암튼 두 영화는 다시 봐야겠다.


----

덧. 시 한편~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 포루그 파로흐자드


나의 작은 밤 안에, 아,

바람은 나뭇잎들과 밀회를 즐기네

나의 작은 밤 안에

적막한 두려움이 있어


들어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나는 이방인처럼 이 행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절망에 중독되어 간다


들어 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지금 이 순간, 이 밤 안에

무엇인가 지나간다

그것은 고요에 이르지 못하는 붉은 달

끊임없이 추락의 공포에 떨며 지붕에 걸쳐 있다

조문객 행렬처럼 몰려드는 구름은

폭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순간

그 다음엔 무

밤은 창 너머에서 소멸하고

대지는 또다시 숨을 멈추었다

이 창 너머 낯선 누군가가

그대와 나를 향하고 있다


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른 이여

불타는 기억처럼 그대의 손을

내 손에 얹어 달라

그대를 사랑하는 이 손에

생의 열기로 가득한 그대 입술을

사랑에 번민하는 내 입술의 애무에 맡겨 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Posted by 익은수박
,

시를 노래한 시를 모아 보았다.

다음 시 모임에서 '시'를 노래한 시를 주제로 잡아서이기도 하다.



덧. 1

틈틈이 들어오는 시를 채우는 걸로!^^


덧. 2

'쉼보르스카'의 시를 발견했다! 



-----


1. <가두의 시>


가두의 시

                        - 송경동


길거리 구둣방 손님 없는 틈에

무뎌진 손톱을  가죽 자르는 쪽가위로 자르고 있는

사내의 뭉툭한 손을 훔쳐본다

그의 손톱 밑에 검은 시()가 있다


종로5가 봉제골목 헤매다

방 한칸이 부업방이고 집이고 놀이터인

미싱사 가족의 저녁식사를 넘겨본다

다락에서 내려온 아이가 베어먹은 노란 단무지 조각에

짜디짠 눈물의 시가 있다


해질녘 영등포역 앞

무슨 판촉행사 줄인가 싶어 기웃거린 텐트 안

시루 속 콩나물처럼 선 채로

국밥 한 그릇 뚝딱 말아먹는 노숙인들의 긴 행렬 속에

끝내 내가 서보지 못한 직립의 시가 있다


고등어 있어요 싼 고등어 있어요

저물녘 "떨이 떨이"를 외치는

재래시장 골목 간절한 외침 속에

내가 아직 질러보지 못한 절규의 시가 있다

그 길바닥의 시들이 사랑이다



2. <다시 시에 대하여>


다시 시에 대하여

                                      - 김남주


시의 내용은 생활의 내용 내 시에는

흙과 노동이 빚어낸 생활의 얼굴이 없다

이제 그만 쓰자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

가자 씨를 뿌리기 위해 대지를 갈아엎는 농부의 들녘으로

가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물과 싸우는 가뭄의 논 바닥으로

가자 추위를 막기 위해 북풍한설과 싸우는 농가의 집으로

내 시의 기반은 대지다

그 위를 찍어내리는 곡괭이와 삽의 노동이고

노동의 열매를 지키기 위한 피투성이의 싸움이다

대지 노동 투쟁...

생활의 이 기반에서 내가 발을 떼면

내 시는 깃털 하나 들어올리지 못한다

보라 노동과 인간의 대지에 쁘리를 내리고

생활의 적과 싸우는 이 사람들

피와 땀과 눈물로 빚어진 이 사람의 얼굴을



3. <칼날의 시>


칼날의 시

                         - 문정희


불 속에 사는 새가 있다

얼음 속에서 날개를 펼치는 물고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어디에도 둘 수 없어

번개처럼 날카로운

칼날 위에 둔다

위태하게 대롱거리는

붉은 눈물방울

이대로 내 사랑 백 년만 가거라




4. <단어를 찾아서>


단어를 찾아서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 보고, 헤아려 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피로 흥건하게 물든 고문실 벽처럼

네 안에 무덤들이 똬리를 들지언정,

나는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고 싶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고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 없다.

도무지 찾을 수 없다.




5.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 이선영


나는 종이 위에 나를 한자 한자 새겨넣는다

나는 이리저리 흐트러진 나의 육체를 끌어모아 글자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꽉 닫는다

한글자 한글자 씌어질 때마다 한치 한치 오그라드는 내 육체는 수천 수만 가지 글자들로 다시 태어나고

새로 만들어지는 글자들마다에 나의 육체는 자신의 새로운 집을 짓는다

나는 수만 채의 집을 거느리고 산다,

나의 살점을 나누어 조금씩 떼내어서는 각 집의 관리인으로 둔 채

그런데 이즈음 내 육체는 "이 안은 왜 이리 어둡고 갑갑한가?"라고 말한다

나는 공들여 지은 내 집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늙어 눈이 어두워진 도장공처럼

나는 지금 끙끙대며 나를 글자 속에 구겨넣으려 안간힘쓴다

내 커진 몸집의 풍요를 맛본 내 육체가 더 이상 좁은 집에 살려 하지 않기에




6. <시를 쓰기 위하여>


시를 쓰기 위하여 _ 연필


                                      - 김연신


연필을 깍는다.

시를 쓰기 위하여

연필이 뾰족하게 깎인다.

연필은 뾰족한 끝으로 내 배를 지그시 찌른다,

연필만 깎아서 시가 써지느냐고.

손가락을 깎으면 시가 써지느냐고 내가 묻는다.

연필은 대답도 없이 더 찌른다.

아픈 것이 손가락 열 개를 다 뾰족하게 깎는 것이 차라리 좋겠다.

연필은 아무 말도 없이 찌른다. 또 찌른다.

나를 덥석 안아서 연필깎이 속에 집어넣는다.

갑자기 날들이 낄낄 웃으며 돌아가고 

머리통부터 나는 뾰족해진다.


나를 잡고 시를 쓸 그를 기다린다.




7. 






Posted by 익은수박
,


왜 모든 강간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는가 




신형철의 격주시화(隔週詩話)
_40년 전 시를 지금 여기에서 읽으며
강간(rape)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밤 사냥꾼이면서 아버지이기도 한, 어느 경찰이 있다.
그는 당신과 같은 동네 출신이고 당신의 남자형제들과 자랐으며
어떤 이상(理想)도 갖고 있다.
부츠를 신고 은(銀) 배지를 달고 말 위에서 한 손으로 총을 만질 때의 그는
당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를 알게 되어야만 한다.
그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는 기구에 접근 가능한 사람.
그와 그의 종마(種馬)가 군벌(軍閥)들처럼 쓰레기 사이를 어슬렁댄다.
그의 이상이 공중에 서 있다.
웃음기 없는 입술 사이에서 생겨난, 얼어붙은 구름.

그리하여, 때가 되면, 당신은 그에게 의지해야 한다.
미치광이의 정액이 아직도 허벅지에 끈적이고
정신은 실성한 듯 빙빙 도는데.
당신은 그에게 자백을 해야만 한다, 당신은
당신이 당한 그 범죄에 대해 유죄이므로.

그리고 당신은 그의 푸른 눈이, 당신이 알고 지내 온 그 모든 가족들의 푸른 눈이 
가늘어지면서 번들거리는 것을 본다.
그의 손이 세부사항들을 타이핑한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당신 음성에 실린 격렬한 흥분.

당신은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이제 당신을 안다고 여긴다.
그는 당신의 최악의 순간을 타이프라이터로 적어 내렸고
그것을 서류철에 넣어 보관했다.
그는 안다, 혹은 안다고 여긴다, 당신이 얼마나 많이 상상했는지를.
그는 안다, 혹은 안다고 여긴다, 당신이 무엇을 은밀히 소망했는지를.

그는 당신을 처넣을 수도 있는 기구에 접근 가능한 사람.
만약, 경찰서의 그 역겨운 불빛 속에서
만약, 경찰서의 그 역겨운 불빛 속에서 
당신이 말하는 세부사항들이 고해신부의 초상을 그려내는 것처럼 들린다면
당신은 삼킬 것인가, 모두 부정할 것인가, 거짓말을 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Diving into the wreck, 1973) 수록. 
* 에이드리언 리치 시선집 <문턱 너머 저편>(한지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의 번역이 빼어나지만 달리 읽은 부분도 있어 졸역을 여기에 보탠다.

2012년 3월에 에이드리언 리치가 82살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한국에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쓴 매체는 거의 없었다. 현재 검색되는 것은 다음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여성신문>의 기사뿐이다. “리치는 미국 여성운동에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여성의 권리를 대변하는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해 여성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1970년대 대학들이 여성학과를 개설한 후엔 가장 많이 읽힌 작가가 됐다.” 그러나 한국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훌륭하게 번역된 시선집 <문턱 너머 저편>(2011)이 나온 지도 5년이 넘었지만, 아직 학계 바깥의 독자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1960년대 여성운동에 참여하면서 레즈비언 성정체성을 깨닫고 남편과 결별한 후 리치의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데, 이와 더불어 그의 문학도 독자적인 깊이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시집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1973)는 20여권에 이르는 리치의 시집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시집으로 그가 1974년에 전미도서협회상을 수상한 것은 특별한 이유로 인상적인데, 애초 수상을 거부하려던 그는, 함께 후보에 오른 동료 여성 시인들과 공동 명의로 “가부장적 세계에서 그 목소리를 무시당해왔고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의 이름으로” 상을 받겠다는 소감을 발표하고, 상을 수락했다. ‘강간’이라는 시가 이 시집에 수록돼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사건의 관찰자이자 해석자다. 첫 행에서 ‘경찰’을 소개할 때 시인은 대조적인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해서 그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그는 제 자식에게는 ‘아빠’(father)이지만, 다른 여성들에게는 폭력성을 감추고 있는 ‘남성’(prowler)이기도 하다. (‘prowler’는 심야에 거리를 배회하며 절도를 하고 위해를 가하는 이를 뜻하는데, 시선집의 역자는 “먹이를 찾아 헤매 다니는 사냥꾼”이라 풀어 옮겼고, 나는 궁여지책으로 ‘밤 사냥꾼’이라 했다.) 같은 동네 주민이자 오빠/남동생과 함께 자란 사람인데도 ‘당신’이 그 경찰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이중성 때문이다. 그때 화자가 불길하게 예언한다. 언젠가 그를 잘 알게 되리라고.

불행하게도 “때”가 왔다. 당신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했다. 알지만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그 남자가 근무하는 경찰서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즉각적인 보호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그게 아니다. “당신은 그에게 자백을 해야만 한다.” 자백은 죄를 지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왜 피해자인 당신이 그것을 하고 있는가. 이 기괴한 상황의 아이러니를 리치는 역설의 수사학으로 적발해낸다. “당신은 당신이 당한 그 범죄에 대해 유죄이므로.” (시선집의 역자는 원문의 우회적 표현을 과감히 축약했다. “당신은 강간을 당한 죄를 졌으니까.”)

어떤 말의 종류는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번들거리는” 것은 그가 당신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느낀 게 고통이 아니라 쾌락이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건의 “세부사항”을 듣기 원하고 그것을 포르노그래피처럼 즐긴다. 당신의 고통이 초래한 “격렬한 흥분”(hysteria)조차 그의 쾌락을 위해 소비될 때, 어느새 당신은 무고(誣告)를 행하는 자가 되어 있다. 무고가 아님을 증명해야 할 책임은 이제 당신에게 있고, 당신은 자신의 고통이 진실한 것임을 필사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모든 가족들”을 포함한) 이웃들의 눈이 경찰의 눈을 닮아갈 것임을 예감하며 심리적으로 고립된다.

다음 대구가 이 상황을 요약한다. “당신은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이제 당신을 안다고 여긴다.” 당신이 강간을 “은밀히 소망”하고 “많이 상상”해왔다고 결론지은 그는 이제 당신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 타인을 ‘안다고 여기는’ 태도는 언제나 위험한 것이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완전한 폭력이다. 이런 폭력은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에게 권력이 있을 때 발생한다. 당신을 “죽일 수도 있는”(2연) 혹은 “처넣을 수도 있는”(6연) 기구(machinery)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이 그에게는 있다. 이를테면 당신은 무고죄로 감옥에 갈 수도, 정신이상자로 병원에 넣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피해자가 어느새 피의자가 됐다. 실제로도 빈번한 일이었다. 이 시에서 리치는 여러 사례 중 하나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례들의 공통 구조를 추출해낸 것이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이 출간된 것은 1973년이고, 미국에서 최초로 ‘강간피해자보호법’(Rape Shield Law)이 제정된 것은 1974년이다. 수사 도중 피해자의 과거 성경험이 들춰져 무고를 입증하는 증거인 양 다뤄지고는 했는데, 그것이 증거가 될 수도 없고 판결에 영향을 미쳐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 그 법이었다. (우리의 경우 이에 준하는 법률 개정안이 발의 준비 중이다. 즉, 아직은 피해자 보호 장치가 불완전하다는 것. 이상의 내용은 신나리, ‘무고죄, 명예훼손에 발목 잡힐 수 없다’, 격주간 <워커스 23호>)

이제 마지막 연이 남았다. “당신이 말하는 세부사항들이 고해신부의 초상을 그려내는 것처럼 들린다면”이라는 구절은 기묘해 보인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가해자의 얼굴이 고해신부의 얼굴을 닮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세부사항을 말하면서 오히려 죄인이 되어가고 있는 이 상황이 고해신부 앞의 상황과 흡사하다는 것일까. 어떤 식으로 읽건 이 구절이 암담한 것은 이제 ‘강간범’과 ‘경찰’과 ‘고해신부’가 더 이상 구별되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시 안에서는 ‘강간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당신은 완전히 무력해진다.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인가.

제목은 ‘강간’이지만 이 시는 ‘강간 이후’의 상황만을 보고한다. 피해자를 피의자로, 진술을 자백으로 바꿔버리는 남성적 권력의 개입 역시 ‘강간’이라 불러야 마땅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메시지를 이렇게 정리해야 할까. ‘모든 강간은 두 번 일어난다.’ 육체적 강간과 정신적 강간, 혹은, 개인적 강간과 사회적 강간. 40년도 더 된 시다. 자신을 희생하며 싸워온 이들 덕분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시 안에는 ‘지금’과 ‘여기’가 있고, 무엇보다도 ‘나’가 있다. 구조가 폭력적일 때 그 구조의 구성원으로 살아온 사람은 아무리 축소해 말해도 결국 ‘구조적 가해자’일 뿐이다. 일단 이 점을 자인하는 부끄러움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으리라.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Posted by 익은수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