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명복을 빕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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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민주주의가 성립하려면 무엇보다 자기절제라는 시민적 덕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 전체가 '환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비상상황에 처해 있다. 이 상황은 언제 종식될지, 과연 종식되는 게 가능할지조차도 지금은 안갯속이다.

중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인간다운 '생존ㆍ생활'이다. 우리는 이 점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도 마스크도 손씻기도 아니다. ...
우리의 정신적ᆞ육체적 건강의 첫째 조건은 타자들ㅡ사람을 포함한 뭇 중생들ㅡ과의 평화로운 공생의 삶이다. 그리고 공생을 위한 필수적인 덕목은 단순 소박한 형태의 삶을 적극 껴안으려는 의지(혹은 급진적 욕망)이다. ...
이 세상의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김종철]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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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하다

카테고리 없음 2020. 6. 25. 15:36

타투를 했다.
언젠가 해보고 싶었다.
하고 싶은 뭔가를 하며 살 수 있는 삶은 좋다.
단단한 자아를 만들어준다고 본다.

됐고!!!
며칠은 연고를 발라줘야 한다~ :)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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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걸>을 읽고 있다. 1/3도 채 안 남았다. 

그동안 읽으며 마음이 움직인 부분을 여기 담아둔다.

문장은 조금 고친 부분이 있다. 내 눈에 거슬리는 표현을 내 맘대로 바꿨다.

뭐, 내 기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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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77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어려운 일은 환자들에게서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점점 커져가는 나의 무관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임을 깨달았다. 처음엔 수수께끼 같던 그 문장이 이제 내게 일상이 되었다. “그들은 안으로 향해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갉아먹어야 하지만, 자신의 심장은 절대 포만감을 주지 못했다.”

 

79

나는 내 삶을 구하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90

나는, 주네의 어린 시절 어떤 점이 그가 성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동시에 성공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만들었는지를 알아내는 데 거의 집착하고 있었다.

 

91

한 번은 파블로 피카소가 직접 주네의 보석금을 내주기까지 했어앞뒤가 맞질 않지.” 내가 말했다.

아마 자기 자신에게는 앞뒤가 완벽하게 맞는 일이었겠지.” 빌이 반박했다. “누구나 자기도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는 별 이상한 짓을 할 때가 있잖아. 단지 아는 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뿐이고.” 그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잠깐 생각해 봤다.

 

97

이파리들은 단 하나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만들어졌다. (~) 그 임무에 인류의 운명도 달려 있다. 이파리들은 당을 만든다. 살아 있지 않은 무기물에서 당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우주에서 식물이 유일하다. 우리가 태어나서 먹은 당은 모두 식물 잎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뇌에 포도당을 꾸준히 공급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는다.

 

106(‘오팔이라는 광물질을 처음 발견한 날)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14

그것은 새로운 아이디어, 진짜 내 첫 이파리였다. 세상의 모든 대담한 씨앗들처럼 나도 상황이 닥치면 그때그때 거기 맞는 해결책을 찾아가며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다.

 

150

버섯이 곰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남자의 성기가 곧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버섯의 머리는 그것이 엄청나게 맛있든 치명적인 독을 가졌든, 더 복잡하고 완전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유기체에 부착된 생식기에 불과하다. 모든 버섯 머리 아래에는 길게는 몇 킬로미터에 이르는 균사 조직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흙덩이를 감싸며 그물처럼 퍼져 땅의 모습을 보존한다. (~)

 

153

흙은 참 묘하다. 그 자체가 대단한 존재는 아닌데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서 생긴 산물이라는 점에서 묘해진다. 흙은 생물의 영역과 지질학의 영역 사이에 생긴 긴장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낙서 같은 것이다(~)

주변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살아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 우리 눈에 보이는 언덕들만큼이나 오래된 그 돌들은 언덕들만큼이나 호흡도 움직임도 없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두 극단의 상태, 즉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들 사이에 물리적으로 놓인 모든 물질을 바로 우리가 이라고 부른다. 흙의 맨 위층에서는 살아 있는 것들의 영향이 가장 많이 보인다. 죽은 식물이 시들고 썩고 점액들과 섞여서 어두운 갈색으로 주변을 물들인다. 흙의 맨 아래층은 바위들이 남긴 유산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물은 바위를 조금씩조금씩 녹여 반죽으로 만들고, 말랐다-젖었다-말랐다를 되풀이하면서 그 밑에 놓인 손상이 가지 않은 암석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광재(slag)를 발생시킨다.

 

203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게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산다.

 

251

사랑과 공부는 한순간도 절대 낭비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276쪽

날씨는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언제 겨울이 올지 알려주는 태양은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억겁의 세월 동안 나무들은 경화 과정에 의존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함을 알고 있다.

 

326쪽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해결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책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알고 있는 일이고, 내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362쪽

자신의 시간에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부여하는 기미가 있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다. 오랫동안 일한 결과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상황을 목격해야 하는 경험은 이 원칙을 시험하는 좋은 사례다. 큰 좌절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잠시 멈추고, 숨을 크게 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집에 가서 그날 저녁은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 후 날이 밝으면 다시 처음부터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즉시 그 문제에 다시 몸을 던쳐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고 바닥까지 다이빙을 해서 그 전날보다 한 시간 더 일하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첫째 방법이 적절함에 이르는 길이라면, 둘째 방법은 중요한 발견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385쪽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지 피어시(미국 소설가, 페미니스트)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와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질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더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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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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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는...

나름 열심이었는데.
그래도 내 안에 갇힌 내 탓이겠지.
벗어나는 순간, 혁명일까?
공허함은 순간이려나?
내일이면
다시 길을 갈까?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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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여성의 날이었다. 

기억해 둬야 할 날이기도 하고...

기억해 둬야 할 노래와 시를 남겨두고 싶기도 해서.

 

존 바에즈가 부르는 빵과 장미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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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d and Roses

                                                By James Oppenheim

 

As we go marching, marching, in the beauty of the day

A million darkened kitchens, a thousand mill lofts gray

Are touched with all the radiance that a sudden sun discloses

For the people hear us singing, bread and roses, bread and roses

 

As we come marching, marching, we battle too, for men

For they are women's children and we mother them again

Our days shall not be sweated from birth until life closes

Hearts starve as well as bodies, give us bread, but give us roses

 

As we come marching, marching, un-numbered women dead

Go crying through our singing their ancient call for bread

Small art and love and beauty their trudging spirits knew

Yes, it is bread we. fight for, but we fight for roses, too

 

As we go marching, marching, we bring the greater days

The rising of the women means the rising of the race

No more the drudge and idler, ten that toil where one reposes

But a sharing of life's glories, bread and roses, bread and r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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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_제임스 오펜하임

 

환한 아름다운 대낮에 행진, 행진을 하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컴컴한 부엌과 잿빛 공장 다락이

갑작스런 태양이 드러낸 광채를 받았네.

사람들이 우리가 노래하는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행진하고 또 행진할 때 남성을 위해서도 싸우네.

남성은 여성의 자식이고, 우린 그들을 다시 돌본다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린 착취당하지 말아야만 하는데,

마음과 몸이 모두 굶주리네: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

 

우리가 행진하고 행진할 때 수많은 여성이 죽어갔네.

그 옛날 빵을 달라던 여성들의 노래로 울부짖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여성의 영혼은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 우리는 빵을 위해 싸우지. 또 장미를 위해 싸우기도 하지.

 

우리가 행진을 계속하기에 위대한 날들이 온다네.

여성이 떨쳐 일어서면 인류가 떨쳐 일어서는 것.

한 사람의 안락을 위해 열 사람이 혹사당하는 고된 노동과 게으름이 더 이상 없네.

반면에 삶의 영광을 함께 나누네: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 함께 나누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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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품격>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어서

요즘 코로나19로 혼란스럽기도 한데 조금은 연결해서 생각해 볼 만도 해서.

원래는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면역에 관하여>(율라 비스 저, 열린책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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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제 살갗보다 그 너머에 있는 것들로부터 더 많이 보호받는다. 이 대목에서, 몸들의 경계는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혈액과 장기 기증은 한 몸에서 나와 다른 몸으로 들어가며 몸들을 넘나든다. 면역도 마찬가지다.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 집단의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들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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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누가 우물에 독을 풀었나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저기요” 하고 부르면 열에 여덟은 성난 얼굴로 돌아본다는 곳,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어디서든 빵하고 터져 나올 만큼, 그만큼 억압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바이러스가 우리를 불렀다. 누가 감염된 자인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확산된 혐오와 불안을 보면서 계속 떠오르던 말이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일본에서 분노의 표적이 되었던 그 조선인은, 중국인이 되었고, 다시 대구 사람들이 되고, 이제 ‘신천지’가 되고 있다. 그들을 격리하고 제거하면 우리 모두 안전해질 수 있을까?

 

위험한 존재를 ‘안전한 공간, 건강한 사회’로부터 제거하는 방식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식은 소독과 방역, 의심과 격리, 배제와 추방이다. 그들은 흑인이거나, 무슬림일 수도 있고, 중국인이거나 한국인일 수도 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코로나19의 세계적 전파를 알리면서 마스크를 쓴 사진과 함께 ‘메이드 인 차이나’를 표제어로 내걸었다. 미국의 CNN뉴스는 중국 소식을 전하면서 한복 입고 마스크 쓴 한국인들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냈다. 극우정치의 공통 문법인 인종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발화하는 것은 불길한 신호다. ‘유색인종’은 난민이나 트랜스젠더가 될 수도 있고,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폐쇄병동에 갇힌 정신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전염병 이전에 이미 기피되었던 존재들은 다시 병리학의 법정으로 불려 나온다.

 

내가 사는 강원도 접경지역에서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이후 멧돼지 포획 작전이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날 마을 전체가 멧돼지를 막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다. 포수들이 산에 들어갈 때는 인근 주민들에게 입산금지를 알리는 문자가 온다. 그럴 때 멧돼지의 심정이 되곤 한다. 멧돼지는 열병과도 싸우고 사냥꾼과도 싸워야 한다. 멧돼지를 막으면 돼지들이 안전해질까? 돼지들에게 살처분과 상품화를 위해 도살당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안전한 것일까?

 

2018년 한 해 동안 노동현장의 사고 사망자 수는 971명, 산재로 죽은 노동자는 2142명, 자살로 숨진 사람은 1만3670명이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노동현장은 바이러스 감염 지역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래도 그건 불안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었으니까. 작년 한 해 한국에서 도축된 돼지는 약 1800만마리, 닭은 무려 10억마리에 이른다. 그건 무섭지 않았다. 먹히는 자가 아니라 먹는 자니까.

 

하지만 아무리 모르는 척해도, 사람들은 모르지 않는다. 이 세계가 켜켜이 쌓이는 죽음 위에서 만들어진 풍요로운 세계라는 것을. 누적된 불안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미칠 듯이 터져 나와 때릴 곳을 찾기 마련이다. 광기는 언제나 약한 곳을 향해 터져나간다. 그 마지막에 파시즘과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걸 막는 길은 마땅히 증오해야 할 대상을 향해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때 정치의 물음이 필요하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서 구원을 찾고, 왜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폐쇄병동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가?

 

병든 닭을 10억마리씩 소비하고, 매년 500만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하는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재난이 그 일상을 중단시키면 사람들은 비로소 묻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 존재인지,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 재난은 함께 살자는 물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추방자들의 귀환이자, 일상을 중단시키는 ‘자연의 파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계속 더 강력한 경고를 보낼 것이다. 우리 공동의 세계에 풀려진 독은 무엇이며, 어디서 온 것인가? 과잉생산, 과잉소비, 거대한 낭비 위에 굴러가는 성장의 경제를 멈추지 않으면 재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너무 오래 감염되어 있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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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려서 논바닥에서도 하고, 학교 운동장이나 넓은 터에서도 공을 차며 놀았다. 

성년이 되어서는 조기축구도 조금 했다. 지금도 뛰고 싶기는 하다. 이젠 이 특기를 살려 테니스에 재미를 붙였다. 큰 돈이 안 들어서 좋다. 

 

마침 리버풀의 감독 '클롭'에 관한 글이 있어 읽다가 적어두고 싶은 대목이 있어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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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의 변화에 감명받은 존 비숍이 클롭과 대담을 통해 그의 리더십을 탐구했다. 존 비숍은 아마추어 축구선수 출신인 영국 코미디언이다. 둘의 대담 내용은 <포포투> 지면을 통해 공개됐고, 지난해 말 영국에서 발간한 단행본 < A Game of Two Halves>에도 수록됐다.

 

(중략)

 

비숍
신앙심이 자신감의 원천인가?

 

클롭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기자회견에서 ‘언젠가 하나님이 판단해주실 것’이라고 말한 적은 있다. 실제로 그렇게 믿는다. 죄를 짓지 않는다. 타인을 해하거나 다치게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선수단 안에서는 신념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다. 누군가를 엔트리에서 빼거나 팔아야 할 때가 그렇다. 내 일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경기에서 패하면 나는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내게 아주 간단하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 것. 내가 제일 중요하겠지만 너무 이기적이면 곤란하다. 내가 들어섰을 때 방 안의 분위기가 별로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경청할 준비가 부족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매번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독실한 신자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따위를 설교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신앙심은 좋은 것이다.”

 

비숍
당신의 신앙을 ‘이성적 인간의 타당한 행동’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을 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클롭
“그렇다. 나뿐 아니라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와 차이가 있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런 믿음에 관한 질문을 받지 않고, 나는 받는다는 점이다. 그뿐이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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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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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혜정의 마을에서]어찌할까, 이 깊은 우울을!

 

다시 칼럼을 쓰기로 하면서 상큼한 글만 쓰자고 다짐했는데 쉽지 않다. 오늘도 우울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는다. 스마트폰을 켜지 말았어야 했는데…. 호주 산불은 여전히 번지고 있고 미국은 호르무즈 파병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쟁터에 가고 싶다는 청년의 댓글이 올라와 있다.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될 테니 한 가지에만 관여하라던 사사키 아타루의 조언을 떠올려보지만 무력감은 이미 내 몸에 들어와 버렸다.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글처럼 “나는 그것을 물속에서 느끼고, 대지에서도 느낄 수 있고, 공기 속에서 냄새로 느낀다. 그 모든 것은 이제 사라졌다. 그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도 사라졌다”.

 

2016년 말 광화문광장에서 콜드플레이의 노래 ‘Viva La Vida’가 울려 퍼질 때 잠시 희망을 걸어보기도 했다. 이제는 그때 신나게 불렀던 그 노래가 왕이 되고자 했던 우리 모두의 마지막을 노래한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제 난 홀로 잠을 자고 내가 한때 지배했던 거리를 배회하지. 난 알아차렸네. 나의 성은 소금 기둥, 그리고 모래 기둥 위에 서 있었다는 걸. 오 누가 왕이 되고 싶어 하겠나? 절대로 진실한 말 따위는 없다네.” 자신에게 닥친 비극적 사건을 두고 신에게 울부짖을 수 있었던 고대인들이 부럽다. 인간에 의해 자행된 “설명할 수 있는 비극”을 견뎌야 하는 현대인은 얼마나 우울한가?

 

나는 이런 시대에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위험한 존재라 생각한다. 크레이그 리슨 감독의 다큐 <플라스틱 바다>에 나오는 죽은 새의 위장에는 플라스틱과 비닐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다. 이런 불편한 장면을 줄기차게 보게 만드는 넷플릭스는 전 지구 시민을 위한 대학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 속편을 보면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이 의외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정상회의 직전에 일어난 파리 테러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잠시 세계 정치인들이 평상심을 잃고 죽음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끔찍한 뉴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챙겨 보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난다
코에 빨대가 낀 거북이를 본 아이
더 이상 빨대를 찾지 않는데…
되레 나이든 어른들은 무감각하다

 

나는 끔찍한 뉴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꼬박꼬박 챙겨 보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코에 낀 빨대로 괴로워하는 거북이 동영상을 보고 아이는 더 이상 빨대를 찾지 않는데 어른들은 무감각하다. 언젠가 친구에게 왜 이런 현실을 보면서 흥분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는 자기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나서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이 바로 그 편협한 전문가주의를 벗어나야 할 때 아닌가? 그간의 전문성이 지금의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새로운 눈으로 현상을 보기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현대 문명은 인간에게 신이 되라고 부추겼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했던 현대인, 엄격한 신과 고루한 가부장과 가난한 마을을 떠나 자수성가한 청년들은 이제 자기 확신에 가득 찬 노인이 되었다. 수시로 시시비비를 가리며 국가 권력의 분신인 듯, 영원불멸의 신인 듯 행동하는 그들·나·우리는 지금 강박증과 분열증을 앓고 있다. 치유가 가능할까? 추운 광화문광장에 시위하러 어김없이 나가는 부모와의 반목을 정치 이야기를 하면 벌금을 내는 것으로 해결했다며 자랑하는 후배가 있다. 가족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서로 마주하기 때문에 ‘현생인류’가 탄생했는데 7만년이 지난 지금, 신이 된 호모데우스는 더 이상 서로를 마주하려 들지 않는다.

 

조건의 변화 없이 의식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지금은 현상을 바라보는 의식을 바꿀 때가 아닌가 싶다. 유일신의 이름 아래 구축된 근대를 해체하는 것. “타 종교에도 진리의 빛이 있다”며 종교 간 대화를 시작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런 면에서 탁월한 이 시대의 선각자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다양한 신과 정령 중 하나로 살아가는 세계를 상상해보자. 그 신들의 세계에서는 개와 고양이와 나무와 정령들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배안에 비닐과 플라스틱이 들어차 있는 새와 거북이와 고래도 아프다고 소리친다. 나는 ‘사회’를 살려내기 위해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말해왔지만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적 존재로서의 회복을 해내지 못하면 기본소득 제도도 효과를 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신들과 인간, 다종 다기한 생명체와 인공지능의 존재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지구의 시간이 열리고 있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신들과 아침마다 지구인에게 우울의 화살을 쏘아대는 정령들과도 친해져야 할 시간.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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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 이분법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흐름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마침 '동백꽃 필 무렵'을 넷플릭스로 막 보기 시작한 터라...ㅋ

(뉴스페퍼민트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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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엄웹스터 사전이 뽑은 올해의 단어는 “They” 

2019년 12월 13일 

 

어느 오후, 당신이 자주 가는 카페. 늘 앉던 자리에 앉으려던 당신은 누군가 놓고 간 핸드폰을 발견합니다. 당신은 종업원에게, 아니면 (카페가 얼마나 큰지에 달렸지만) 카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누가 핸드폰 놓고 갔나 봐요.”라고 외치겠죠. 이 말을 영어로는 어떻게 말할까요? 모든 표현이 그렇듯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보통 아래와 같이 말할 겁니다.

 

“Someone left their phone behind.”

 

“동백꽃 필 무렵” 속 홍자영 변호사처럼 문법을 깐깐하게 따지고 틀린 건 고쳐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언어 계의 세종대왕님 같은 사람이 영어권에 있다면 바로 불편해했을지 모릅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영어를 쓰는 나라의 중학교, 고등학교 국어(영어) 선생님들이 저 문장을 봤다면 바로 빨간펜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눈치채셨나요? 위의 문장은 엄밀히 따지면 인칭대명사 사용이 잘못됐습니다. 주어 ‘someone’은 누구를 뜻하는 단수인데, 뒤에 따라오는 대명사로 복수인 ‘they’의 소유격인 ‘their’를 썼기 때문이죠. 우리말로 직역해도 “누군가 그들의 핸드폰을 놓고 가셨어요.”가 되니까 뭔가 잘못되기는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저 말을 한 사람에게 문법이 틀렸다고 지적한다면, 그 사람은 이렇게 항변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단수 인칭대명사를 쓰려면 남자 아니면 여자를 지칭하는 his 아니면 her밖에 없는데, 그럼 이 폰 주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합니까?”

 

영어에는 이렇게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중성 단수 인칭대명사가 마땅히 없었습니다.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 사전을 편찬하는 출판사가 10일 올해의 단어를 발표했는데, 여기에 “They”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보통 사전 편찬 출판사가 뽑는 올해의 단어에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현상을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신조어나 사람들이 기존의 용례와 다르게 쓰는 사례가 두드러지게 늘어난 단어가 선정되는데, “They”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리엄웹스터는 올해의 단어 11개 가운데 하나로 “they”를 선정하면서, “성별을 특정하지 않는 단수 인칭대명사 ‘they'”라고 용례를 밝혔습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they”를 어떻게 쓰는지 살펴보면, 갈수록 “그들”이나 “그 사람들”처럼 복수로 옮기면 오역이 되는 상황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영어에는 마땅한 중성 단수 인칭대명사가 없었다. ‘everyone’이나 ‘someone’처럼 성별을 특정하지 않는 단어를 받아줄 대명사가 없는 상황에서 지난 600년간 그 역할을 해온 건 ‘they’였다. – 메리엄웹스터

 

이렇게 문법상의 맹점을 그동안 덮어준 ‘they’가 문화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쓰임새를 얻게 된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로 기계적으로 빨간펜을 들려던 선생님은 유기체처럼 진화하는 언어의 속성을 모른다는 핀잔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세상에 성별이 남자 아니면 여자 둘밖에 없다고 가정하시느냐”는 핀잔까지 받을지도 모릅니다. 메리엄웹스터의 선정 이유를 좀 더 살펴보죠.

 

또한, 최근 들어 ‘they’는 스스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여기는 이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대화나 소셜미디어는 물론이고, 문법을 검수하고 교정한 뒤 출판하는 글에서도 제3의 성을 지칭하는 대명사 ‘they’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메리엄웹스터

 

명백하게 남성을 뜻하는 대명사(he/his/him)도, 명백하게 여성을 뜻하는 대명사(she/her/her)도 모두 맞지 않는 옷으로 여기던 이들에게 복수 “그들”도 아니고, 단수이면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 혹은 성별이 없는 단수 “그사람”을 뜻하는 대명사(they/their/them)가 새로운 옷이 됐고, 그 옷이 큰 유행을 탄 겁니다.

 

인터넷 검색 건수가 유행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라면 확실히 단수 ‘they’는 올해의 대세 단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리엄웹스터가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는 기준 가운데 실제로 검색 동향이 있고, ‘they’는 올 한 해 지난해보다 검색 빈도가 313%나 늘었습니다. 메리엄웹스터의 선임 에디터 에밀리 브루스터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단수 인칭대명사를 쓸 필요가 있는 상황이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럴 때 ‘they’를 써도 되는지 확인해보고자 온라인 사전을 검색해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남성 혹은 여성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여기는 성소수자들은 자동으로 투명인간 취급을 받습니다. 이들에게는 대단히 폭력적인 세상인 셈이죠. 그래서 성소수자들은 ‘they’라는 단수 인칭대명사를 더욱더 반기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커밍아웃한 가수 샘 스미스(Sam Smith)는 오랫동안 중성 혹은 제3의 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샘 스미스가 9월에 올린 트윗: “이제 나를 지칭하는 대명사는 ‘they/them’이다. 오랫동안 나의 성정체성을 두고 씨름해왔는데, 기나긴 전쟁에서 해방된 느낌이다. 이제는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끌어안으려 한다.”

 

메리엄웹스터가 9월 they의 용례에 단수 인칭대명사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추가한 데 이어 미국심리학회(APA)도 올해 들어 they를 단수 인칭대명사로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심리학회는 그 이유로 “단수 인칭대명사 they의 용례를 보면 그동안 소외된 이들을 포용하는 쓰임새가 있다. 또한, they를 단수 인칭대명사로 쓰면 글쓴이가 성별에 대해 가지게 되는 무의식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동안 문법적으로 옳지 않으므로 ‘they’를 단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기준을 굽히지 않던 AP통신도 비판이 끊이지 않자, 지난 2017년 마지 못해 기준을 정정했습니다. 이제 AP통신의 취재기자와 편집기자는 특정 성별을 지칭하지 않는 단수 대명사 ‘they’를 기사에 써도 교열팀의 지적을 받지 않습니다. AP 스타일북의 편집자인 파울라 프로크는 당시 기준을 바꾸기로 한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사실 단수 인칭대명사 ‘they’를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사를 쓸 수 있다. 그래도 이제 기준을 바꾸기로 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먼저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사람들의 구어에 ‘they’가 단수 인칭대명사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남성이나 여성으로 지칭할 수 없는 사람들을 표현할 대명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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