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가스파쵸와 치즈, 채소

 

 

요리 경력을 포함해, 간단한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항상 즐겁게 요리하며 살아가는 요리경력 12년 차인 셰프 채낙영입니다.

고기 대신 채식을 선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채식이나 육류, 한쪽만 선호하거나 치우치는 식단보다는 평소에 균형 있는 식단을 선호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채식을 위주로 한 맛있고 다양한 요리를 알리고 싶습니다

 

오늘 소개해주실 음식에 대한 사연, 역사, 개발하게 된 계기 등을 알려주세요.

가스파쵸는 스페인에서 주로 먹는 토마토로 만든 차가운 수프입니다. 한국에서는 6~7월경이 되면 체리를 많이 구할 수 있는데, 누구나 좋아하는 여름 과일인 체리를 사용해, 가스파쵸를 조금 색다르게 풀어보았습니다. 더운 여름날 입맛이 떨어졌을 때 식욕을 살려줄 수 있는 요리입니다.

 

체리 가스파쵸와 치즈, 채소

스페인 등 유럽에서 여름에 차갑게 먹는 수프 가스파쵸를 체리를 주재료로 이용해 만든 색다른 맛의 요리입니다. 수프와 채소, 채식 단계에 따라 부드러운 치즈를 곁들여 먹으면 상큼한 과일과 채소가 어우러지는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재료 >

체리 250g, 방울토마토 100g, 비트 50g, 샬롯 15g, 마늘 2g, 적색 파프리카 10g, 레드와인 비네거 10mL,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오일, 레몬즙, 소금, 후추

 

채소: 아스파라거스 1개, 노란 방울토마토 2개, 주황 방울토마토 2개, 아보카도 ½ 개, 레디쉬 1개, 레몬, 허브(처빌, 딜, 소렐),

* 채식 단계에 따라 부라타치즈 또는 모차렐라치즈 사용 가능

<만드는 방법>

수프 준비

1. 체리는 씨를 제거하고, 샬롯과 마늘은 잘게 다진다.

2. 방울토마토는 칼집을 내서 데친 후 찬물에 넣어 껍질을 벗긴 다음, 작은 주사위 모양으로 썬다.

3. 비트는 호일에 싸서 오븐에 구워놓고, 파프리카는 불에 그을려 껍질을 태워 제거해 속 과육만 발라낸다.

4. 체리와 모든 채소를 레드와인 비네거,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레몬즙을 넣고 믹서기나 블렌더를 사용해 곱게 간다.

채소준비

1. 아스파라거스는 레몬과 소금을 넣은 물에 데친 후, 한입 크기로 썰어 올리브유과 레몬에 버무리고, 방울토마토는 반으로 잘라 레몬즙과 올리브유에 버무린다.

2. 아보카도는 주사위 모양으로 잘라 구워 놓는다.

3. 곱게 간 체리 가스파쵸 위에 아스파라거스, 방울토마토, 아보카도를 얹고 채식 단계에 따라 부라타치즈 또는 모짜렐라치즈를 곁들인다.

Posted by 익은수박
,

그린피스 채식 캠페인에서 알려준 채식 요리

꾸준히 하나씩 따라서 해먹어 봐야겠다.

<더 게임 체인저스>에서 나온 레시피를 번역해서 올려보려다 이걸 먼저 올려본다.

 

---

요리 경력을 포함해, 간단한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경한식 오너셰프 조영호 입니다. 저는 W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10년 근무를 하며 연회업무를 담당하는 메인 주방과 다이닝 업장인 주방에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호텔에서 체인디너 및 G20, 세계지식포럼 등 각 행사를 경험하며 여러 나라의 고객을 응대하다 보니 그 나라의 요리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식 전공으로 요리를 시작하여 지금은 한식 분만 아니라 세계요리에 관심이 많아 여러 나라의 음식을 맛보고 느껴보며 우리 입맛에 맞게 요리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고기 대신 채식을 선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요리를 시작하면서 살이 많이 쪘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우선적인 것이 바로 식습관 개선이었습니다. 전보다 고기 섭취를 줄이려고 노력하며 채소를 기반으로 한 음식을 먹는 것을 습관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주실 음식에 대한 사연, 역사, 개발하게 된 계기 등을 알려주세요.

 

콘 카르네는 미국에서도 집에서 즐겨 먹는 간편식입니다. 집집마다 조금씩 조리법이 다르고 들어가는 재료도 다를 만큼 대중적이니, 멕시코풍 미국 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나초나 또띠야와 같이 먹고, 핫도그에도 곁들여 먹기도 합니다. 파스타 소스로도 사용해도 손색이 없고요.

보통 다진고기(돼지, 소, 양 등)를 넣어 먹는데, 채식을 선호하면서 글루텐 섭취를 못 하셨던 고객이 있었어요. 육류를 제외하고 파스타면(파파델레) 대신, 가지와 호박을 면처럼 얇게 썰어서 구운 후 소스와 버무려 만들어 드렸더니 굉장히 만족해하시면서 드셨던 기억이 납니다.

 

콩 카르네를 곁들인 가지구이

<재료 >

가지 3개, 양파 1개, 표고버섯 3개, 마늘 5쪽, 타임 5g, 오레가노 가루 5g, 큐민 가루5g, 강황 가루 10g, 토마토케첩 15g, 키드니빈 1캔, 베이크드빈 1캔, 루꼴라 10g. 올리브유, 소금, 후추

<만드는 방법>

1. 가지는 꼭지를 자르고 세로로 얇게 썬다.

2. 양파와 표고버섯은 작은 주사위 크기(6mm) 크기 정도로 썬다.

3. 마늘과 타임은 다져 놓는다.

4. 키드니빈은 물기를 빼고 흐르는 물에 한 번 헹구어 채반에서 물기를 뺀다.

5.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가지를 노릇노릇한 갈색이 될 때까지 앞뒤로 구우면서 소금 후추로 밑간을 한다.

6. 소스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다가 양파와 버섯을 넣고 반 정도 익은 상태까지 볶는다.

7. 키드니빈과 베이크드 빈을 넣고 소금 후추로 밑간 후 저어준다. 베이크드빈은 캔에 있는 소스와 콩을 모두 사용한다.

8. 향신료들과 토마토케첩을 넣고 원하는 농도가 나올 때까지 소스를 졸인다. 농도가 너무 진해지면 채수나 물을 넣어 농도를 조절한다.

9. 접시에 구운 가지를 올리고 콩 카르네를 얹는다. 루콜라잎을 위에 얹고 올리브유를 살짝 뿌려서 낸다.

10. 팬에 완성된 콩 카르네를 약한 불로 재가열하다가 구운 가지를 넣고 소스가 잘 엉기도록 살짝 버무린다. 약간의 올리브유로 코팅을 하고 접시에 담은 후 루꼴라를 얹는다.

Tip 1: 가지를 센 불서 장시간 조리하면 흐물흐물해져 식감이 떨어집니다. ⅔ 정도 익었을 때 건져서 남은 잔열로 익혀주세요.

Tip 2: 가지 대신 애호박이나 감자 등의 채소를 얇게 썰거나 파스타를 삶아 넣어서 대체할 수 있습니다.

Tip 3: 향신료는 입맛에 따라 종류를 달리 하거나 양을 조절하세요.

 

Posted by 익은수박
,

성장 이데올로기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희망은 보일지 모른다. 자본의 큰 그림을 해체하고 그 계획 속에 줄 섰던 사회적 자본과 사람들을 재 구성 할 때 비로소 21세기의 공리주의가 뿌리 내릴 수 있다. 모빌리티 부분에서의 과제는 분명하다. 자동차 중독에서 탈출하라!

---

전기 자동차의 '더러운' 비밀

 

탄소 중립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는가? ③ 자동차 중독에서 탈출하라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사회주의 몰락으로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한 뒤로 자본주의는 진격의 거인이 되어 거침없이 달렸다. 체제경쟁의 승리자는 올림픽 구호처럼 더 멀리, 더 많이, 더 빠르게 생산하고 부를 축적했다. 최후의 역사 단계인 자본주의 유토피아는 성장의 거대 용광로가 되어 뜨겁게 달아올랐다.

 

경제학자들은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인간의 본성인 욕망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와 딱 들어맞았기에 자본주의의 승리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기업가 정신은 혁신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충족시킨다. 무한생산, 무한소비라는 한 쌍의 바퀴는 늘 전년 회계연도보다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승자의 저주라는 그림자가 질주하는 자본주의 위에 덮였다. 자본주의 체제를 공격한 것은 무너진 사회주의가 아니라 지구였다.

 

현재와 같은 시스템이 변화하거나 최소한 견제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가 없다는 경고를 지구는 계속해서 인간에게 보내고 있다. 무한 생산, 무한 소비라는 무한궤도는 유한한 지구 생태 자원을 바탕으로 한다. 또 이 무한궤도 속에 은폐된 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무한 폐기이다. 무한 폐기야 말로 인간 욕망의 결정체다.

 

새로운 기능과 사양이 매력적으로 보여서, 디자인이 죽여줘서, 멀쩡한 차나 스마트 폰을 바꾼다. 이런 행위는 지구 자원 낭비가 아니라 현대인의 미덕이다. 지적인 이미지의, 딱 봐도 성공한 주인공이 새 상품에 만족하는 이미지가 넘쳐나는 광고 스크린의 뒤에는 폐기물의 거대한 산이 있다.

 

전기자동차가 친환경 대안 모빌리티로 떠올랐다. 내연기관 자동차가 만들어 내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찬사 속에 매끈한 전기자동차가 도로를 질주한다. 전기자동차 덕분에 온난화의 파국으로 달려가는 지구에 브레이크가 걸릴 것인가? 출퇴근 길 도로를 가득 메우는 내연 자동차들을 전기자동차로 대체하면 친환경 녹색혁명이 완수되는 것일까?

 

이미 한국의 많은 도시들은 특정 지역에서 소화 가능한 차량 대수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피크 카(Peak Car)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TV 프로그램의 황금시간대 광고는 자동차 소개로 이어지고 있다. 거대 자동차 산업과 도로 인프라 숭배가 결합 된 세계적 현상의 한 단면이다. 인류가 지구를 위하는 길은 내연차로부터 전기차로의 이행이 아니라 자동차 숭배 사회로부터의 탈출이다.

 

물론 화석연료를 태우는 내연 자동차를 전기자동차로 대체하는 것은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동차의 총 통행량을 줄이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전기자동차를 환경개선의 절대 반지로 여기기도 하는데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이 적지 않다. 2020년 12월 8일자 가디언엔 "하얀 기름의 저주; 전기자동자의 더러운 비밀"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기사는 전기자동차의 배터리로 쓰이는 리튬을 채취하기 위해 파괴되는 환경을 고발하고 있다. 전기자동차를 구동하는 이차전지의 핵심 활성 물질인 리튬은 밀도가 낮은 금속이면서 무게 대비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어 전기자동차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광물이다. 은백색 알칼리 금속으로 하얀 기름이란 별명이 붙은 리튬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칠레의 리튬 채굴 광산 ⓒ가디언 홈페이지 갈무리

 

2019년 전 세계 리튬 생산량의 절반 이상(55%)이 호주에서 채굴되었다. 칠레(23%), 중국 (10%), 아르헨티나 (8%)가 뒤를 잇고 있다. 모든 생산 국가들이 리튬배터리의 주 수요처인 유럽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이 만만치 않다. 리튬배터리가 각광 받자 유럽에서는 가까운 공급처를 확보하기 위한 리튬 광산 개발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은 중북부에 향후 10년 동안 채굴 가능한 매장량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대표적 개발지가 되었다. 그러나 리튬 채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환경파괴는 내연차 대체라는 더 큰 환경적 목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리튬 채굴 문제를 제기하는 미국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 대학 리오프란코스((Riofrancos) 박사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비 및 생산 모델이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전기 자동차는 엄청난 양의 채굴, 정제 및 그와 함께 제공되는 모든 오염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인류의 새로운 도약을 약속하는 4차 산업혁명이나 내연 자동차 생산의 중단 같은 아젠다가 지금까지 세계체제를 유지해온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적 생산을 기반으로 한다면 인류는 불꽃을 향해 돌진하는 거대 나방 무리와 다를 바 없는 운명을 마주할 것이다.

 

모빌리티 연구분야의 대표적 학자인 미미 셸러(Mimi Sheller)는 현대 인류는 일상생활과 상식에 자동차화된 자아에 단단하게 연결된 자동차 감성이 깊게 침투해 있다고 말한다. 거대 자동차 산업, 인프라를 끊임없이 공급함은 물론 각종 제도로 이를 뒷받침 하는 행정부, 광고, 스포츠, 할부금융까지 자동차를 위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협업체계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이 자동차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만큼 인간이 자동차에 중독된 사회를 탈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때문에 보통의 노력으로는 탈 자동차 사회로 나아 갈 수 없다.

 

모빌리티 차원에서 본다면 인간의 이동을 사회 유지에 필요한 필수 이동이나 사회적 이동과 사적 필요에 의한 개별 이동으로 나눌 수 있다. 가능하다면 개별 이동 분야는 자원 소비나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주가 되어야 한다. 또한 집단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교통이 개별 이동 수요의 상당수를 흡수해야 한다. 이를 위한 사회적 설계는 위기가 눈 앞에 펼쳐질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필요하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모빌리티는 무한정 확대될 수 없다. 도로 공간, 혼잡, 에너지 비용 같은 교통자원의 제약과 서로 다른 모빌리티가 같는 특성의 충돌로 인해 모빌리티를 최대한 확장하는 길로 내달리면 거대한 낭비의 늪에 빠지게 된다. 또 그 대가로 교통혼잡과 온실가스, 환경파괴라는 달갑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된다.

 

한국 사회는 자동차 운행 감축을 위한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 그린뉴딜이 선포되었지만 방점은 온실가스 감축이 아니라 경제성장에 찍혔다. 정치인들은 다가오는 선거를 위해서도 그래프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화살표야 말로 확실한 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사회는 보아왔다. 성장의 단 열매는 소수에게만 전유 됐다. 대다수 민중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이제는 성장의 떡고물조차 서민들의 몸에는 달라붙지 않는다. 노동을 비웃는 불로소득이 성능 좋은 진공청소기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깨끗이 털어낸다.

 

성장 이데올로기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희망은 보일지 모른다. 자본의 큰 그림을 해체하고 그 계획 속에 줄 섰던 사회적 자본과 사람들을 재 구성 할 때 비로소 21세기의 공리주의가 뿌리 내릴 수 있다. 모빌리티 부분에서의 과제는 분명하다. 자동차 중독에서 탈출하라!



Posted by 익은수박
,

공감하는 글이다.

나도 두 냥이를 기르지만, 늘 한편으로는 시골에 가서 풀어놓고 서로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먹이를 주는 사이가 되고 싶다. 가정사로 일부러 둘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본 마음은 조심스러웠다.

동물도 생명이고 감정이 있는데, 사람이 '기른다'는 상황이 모순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늘 있다.

 

친구들과 해볼 토론 주제로서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

 

점점 더 많은 동물 윤리학자들이 애완동물(pet)을 길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 

 

2020년 12월 11일

(가디언, Linda Rodriguez McRobbie)

원문 보기

 

제시카 피어스가 애완동물 기르기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락앤락 속에 든 새끼쥐들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녀는 미국의 애완동물 체인인 펫스마트에서 딸이 기르는 도마뱀의 먹이로 귀뚜라미를 사고 있었습니다. 플라스틱 통 안에서 찍찍대던 쥐들은 아마 애완동물로, 아니면 뱀의 먹이로 팔렸을 것입니다. 어느 쪽인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명윤리학자로써 분명한 문제의식을 느꼈지요.

 

“쥐에겐 공감능력이 있습니다. 어미쥐로부터 강제로 떼내어진 새끼쥐들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있습니다. 이들이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녀는 말을 이었습니다. “뺨을 때리는 행동을 생각해보세요. 동물의 빰을 때리는 것이 과연 올바른 행동일까요?”

 

피어스는 애완동물 기르기를 반대할 목적으로 2015년에 책 “당신 개는 살쪘어요(Run, Spot, Run)”를 썼습니다. 고양이와 개의 사료가 되는 동물들과 순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문제들을 감수하는 사육장, 비닐백이나 종이상자에 포장돼 팔리는 금붕어와 귀뚜라미 등의 애완동물을 기르는 행위는 동물이 가진 자기결정권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기르는 이유는 순전히 우리가 원해서이며, 그들이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 살지, 어떻게 생활할지, 어떻게 보일지 그리고 심지어 이들의 성기를 제거할지 말지도 우리가 결정하니까요.

 

동물을 물건처럼 여기는 것은 새로운 흐름이거나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육식을 해왔고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자신의 애완동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각하면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국의 애완동물 산업 시장은 15조원에 달하며 2016년 미국인이 애완동물을 위해 쓴 돈은 70조원이 넘습니다. 올해 초 영국에서 이루어진 한 조사에서 자신의 애완동물을 배우자보다 더 사랑한다고 답한 사람은 12%, 아이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답한 사람은 9%, 가장 친한 친구보다 더 사랑한다고 답한 사람은 24%였습니다. 다른 조사에서는 애완동물을 소유한 영국인의 90%가 이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긴다고 답했으며 16%는 2011년 인구총조사에서 이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포함시켰습니다.

 

“윤리적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애완동물을 사람처럼 여깁니다. 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가장 친한 친구라 여기며, 수백만 달러에도 팔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웨스턴캐롤리나 대학의 심리학자이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간동물학(anthrozoology)을 만든 이들 중의 한 명인 할 헤르조그의 말입니다. 또한, 최근 연구들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금붕어와 같은 동물조차 우리가 한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3년 뉴욕타임스에는 뇌과학자 그레고리 번스의 “개도 사람처럼 생각한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가 동물에게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할수록 우리는 그들의 삶에 우리가 관여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헤르조그의 말입니다.

 

그럼 앞으로 50년이나 100년 뒤에는 애완동물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일까요? 서커스처럼 동물을 학대하는 산업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동물권리 운동가들은 올해 링링브라더스 서커스의 해산을 매우 중요한 승리로 생각합니다. 또 동물원에 대해서도 이를 없애거나 적어도 사람들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006년에서 2016년 사이에 절대채식주의자(vegan)를 자임한 사람의 수는 350% 증가했습니다.

 

애완동물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둥물은 가축이었고, 사람들은 이들을 감정적인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698년 영국 도싯 지방의 한 농부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기름을 얻기 위해 늙은 개 큐온을 죽였다. 11파운드의 기름이 나왔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도시 생활이 늘어나면서 보통 사람들은 가축을 기르지 않게 된 반면, 소득의 증가와 함께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애완동물을 지극히 사랑하던 사람들조차 동물의 삶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 개는 살쪘어요”에는 1877년 뉴욕시가 762마리의 유기견을 철제 상자에 넣어 크레인을 이용해 이스트 강에 익사시킨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중에 수의사가 된 철학자 버나드 롤린은 1960년대에만 하더라도 개 주인들은 휴가 기간에 개를 어딘가에 맡기는 대신 휴가를 떠나기 전 개를 죽인후 휴가를 다녀와서 새로운 개를 사곤 했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러는 편이 더 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점점 더 많은 국가가 동물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2015년 뉴질랜드 정부는 퀘벡 정부가 한 것처럼 동물은 의식이 있는(sentient) 존재이며, 따라서 그들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뉴질랜드 정부는 최근 “주머니쥐 잡기 운동(war on possum)”을 벌였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군요.) 영국은 아직 애완동물을 소유물로 인정하지만, 2006년 입법된 동물복지법(Animal Welfare Act)은 애완동물 소유주가 기본적인 수준의 보호를 반드시 제공해야 함을 명시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애완동물은 소유물이지만, 푸에르토리코, 워신턴 D.C.와 함께 32개 주는 가정폭력금지 조항에 애완동물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2001년 로드아일랜드주는 애완동물 소유주를 “보호자(guardian)”로 명명하게 했으며 몇몇 동물권리 옹호자들은 이를 커다란 진전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실제로 바뀐 것은 이름 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성숙함을 찬양하기에는 이릅니다. 미국에서 매년 안락사되는 보호소의 동물 수는 150만 마리(67만 마리의 개와 86만 마리의 고양이를 포함한)에 이릅니다. 영국에서 안락사되는 유기견의 수는 3,463마리로 훨씬 적지만, 동물학대예방왕립협회(RSPCA)는 동물학대 건수가 2016년 하루 400건이었으며 매년 5%씩 증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개를 차에 넣고 수의사에게 가서 ‘나는 이 개를 원치 않습니다. 죽여주세요.’라든지 유기견 보호소에 가서 ‘이 개를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 없어요. 다른 주인을 찾아주세요.’라고 말해도 될까요?” 동물권의 지지자이며 뉴저지에 위치한 럿거스 로스쿨의 교수인 개리 프란시온의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도 된다면, 그가 그럴 권리를 가졌다면, 그 개는 여전히 그 사람의 소유물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동물들이 자신이 애완동물로서 행복한지를 우리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보다 동물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되고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저 우리 인간의 생각을 그들의 생각에 투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피어스는 “부모(parents)”의 재치있는 말과 함께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수많은 애완동물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인간화함으로써 사실상 그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동물을 소유하는 데 도덕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문제는 이 거대한 산업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입니다. 헤르조그는 2010년 펴낸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먹는 것(Some We Love, Some We Hate, Some We Eat)”에서 동물 권리 운동가들의 동기가 감정적인지 지적인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는 운동가 중 한 명이 “매우 매우 논리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운동가는 절대채식주의자가 된 후, 가죽 신발도 신지 않았고 자신의 여자친구 또한 자신과 같은 채식주의자가 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르던 앵무새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는 슬픈 눈빛으로 그 일을 회상했습니다. 자신이 앵무새를 야외로 데려가 날아가도록 해 주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새가 야생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죽었을 겁니다. 나는 그 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피어스와 프란시온은 애완동물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애완동물이 있습니다. 피어스는 개 두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를 기르고 있고, 프란시온은 유기견 여섯 마리를 기르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애완동물 소유를 둘러싼 담론이 이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애완동물은 존재하며, 이들을 버리는 것은 더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이지요. 프란시온은 또한 많은 이들이 동물을 잘 보살피는 행동이야말로 동물을 바르게 대하는 방법으로 생각하며,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동물복지 전문가로 펫 채리티의 대표이며 전 RSPCA 수장이었던 팀 워스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오늘날의 현실은 시장의 힘과 인간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 수천만 가정에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 현실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그들에게 적절한, 올바른 보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하지만 애완동물 소유의 짧은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아주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완동물과의 관계는 계속 바뀌어 왔습니다. 길게 보면, 나는 애완동물을 기르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유행으로 지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로봇이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소수의 사람들만 계속 애완동물을 기를 수도 있습니다. 유행은 계속 바뀝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애완동물을 인간처럼 생각하게 될수록, 그들을 기르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익은수박
,

다큐 영화 <더 게임 체인저스>를 본 뒤, 비건에 더 다가가야겠다 싶었다. 

마침 영화 자막이 올라가면서 영화 속 맛깔스러운 비건 요리 레시피를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알려줬다.

죄다 영어!

공부 삼아 하나씩 우리말로 옮겨가며 요리도 배워보자! 캬캬캬~~~

>0<

---

JAMES’ OVERNIGHT OATS

 

준비 시간 : 5분                  / 단백질 : 26.8G                 / SERVINGS : 1 (1인분)

 

이 단백질 가득한 아침식사는 짱이다! 준비가 전날 밤에 끝나거든.

그대가 할 일이라곤 일어나서 냠냠 먹기만 하면 된당!ㅋㅋㅋ

 

This protein-packed breakfast option is great because the prep work is done the night before. All you need to do is wake up and enjoy.

 

INGREDIENTS

  • 1 cup soy milk, preferably unsweetened
  • ½ cup oatmeal
  • 1 tablespoon ground flaxseed
  • 2 tablespoons hemp seeds
  • 1 tablespoon peanut butter
  • 1 cup mixed frozen berries
  • 1 medium banana

DIRECTIONS

  1. Mash banana in a bowl with a fork, add other ingredients and stir well. Cover and leave in refrigerator overnight.
  2. The next day, just stir and enjoy. You can eat it cold, or warm it up.

Nutrition FactsAmount Per Serving

Calories

639.5

Protein

26.8g

Total Fat:

26.7g

Sat. fat:

3.7g

Trans fat:

0g

Cholesterol:

0mg

Total Carbohydrate:

82.8g

Dietary Fiber:

16.3g

Total Sugars:

28.8g

Added Sugars:

0g

Sodium:

109.8mg

TIPS

  • Once you've mastered the recipe, experiment with different fruits, nut butters, and plant milks to keep it fresh and exciting.
Posted by 익은수박
,

경향신문 '직설'에서

 

놓친 점을 놓치지 않고 조금씩 바뀌어 가는 모습을 담아낸 글이다. 

시각장애인 구독자 한 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를 바꾸는 일은 이런 작은 부분에 눈길을 두는 데서 시작된다.

부지런함이다. 게으름뱅이가 되지 말아야겠다!

 

---

[직설]청각 정보와 함께하는 글

 

‘일간 이슬아’ 연재를 하며 구독자로부터 아주 많은 e메일을 받는다. 체력의 한계 때문에 모든 피드백과 요청에 응답할 수는 없으나, 수백 통의 메일 목록에서도 특히 중요한 이야기는 놓치지 않고 알아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시각장애인 구독자인 김 선생님의 이야기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 글쓰기 교사

 

2018년 겨울. 김 선생님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시각장애인 독자가 내 글을 듣는 속도에 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김 선생님은 일반적인 컴퓨터에 ‘센스리더’라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쓰신다. 화면을 음성 언어로 변환하는 프로그램이다. 변환된 나의 글을 샘플로 보내주시기도 했다.

 

샘플 파일을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낭독 속도가 너무 빨라서였다. 내 글이지만 모르는 래퍼가 쓴 가사처럼 들렸다. 놀랍게도 선생님께서는 평소에도 그 속도로 책을 듣는다고 대답하셨다. ‘워낙 듣기에 단련된 몸’이라서 그렇다고. 나는 파일을 몇 번이고 돌려들으며 선생님이 단련해오신 듣기 능력에 관해 계속 생각했다. 대단한 경지로 느껴졌다. 선생님께서는 콘텐츠의 종류에 따라 재생 속도를 다르게 조절한다면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팟캐스트 뉴스는 주로 2배속으로 듣고, 독서 관련 방송은 정속으로 정중하게 듣습니다.”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내 글을 들어주시는 김 선생님과 ‘센스리더’의 개발자님께 감사함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내가 쓴 글을 내 목소리로 읽어드리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어떤 단어는 힘주어 발음하고 어떤 단어는 무심히 발음하며 나의 평소 말투와 속도로 낭독하면 가장 정확하게 전달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간 이슬아’ 2년차부터 낭독 서비스를 추가했다. 작가가 한 달에 한 번씩 직접 글을 읽고 음성 파일을 첨부해서 텍스트와 함께 발송하는 방식이다. 요즘엔 시각장애인 구독자뿐 아니라 비장애인 구독자들도 낭독을 기다려주신다. 나는 편안하고 듣기 좋은 말소리를 연습한 뒤 긴 글을 녹음한다.

 

‘일간 이슬아’ 3년차에 추가한 것은 ‘인터뷰 음성 지원’ 서비스다. 인터뷰 코너는 애독자가 많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정중하면서도 경쾌하게 상호작용하는 장르다. 유능한 동료 사진가가 동행해서 찍은 사진도 사랑받았다. 인터뷰이의 모습, 주름, 웃음,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사진에 담겨서 대화를 입체적으로 만드니까. 그런데 매번 인터뷰 사진을 신중하게 편집하면서도 김 선생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다. 사진이라는 시각 정보는 선생님께 전달되지 못할 텐데 말이다.

하루는 선생님이 이런 메일을 보내주셨다. “사진을 볼 수 없는 저로선 그분들의 인터뷰 음성을 짧게라도 들어봤으면 하는 욕심이 듭니다. 그럴 수 있다면 더 생생하게 그분들을 느낄 것 같습니다.” 나는 반성한 뒤 다음날 ‘인터뷰 음성 지원’ 기능을 추가했다. 녹취 파일 중 인터뷰이의 특징이 유독 잘 담긴 구간을 3분 분량으로 편집해서 올렸다. 그러자 문경에서 만난 농부님의 목소리뿐 아니라 평상 위에서 수박 써는 소리, 바람이 벼를 스치는 소리, 하우스에서 오이를 따는 소리도 인터뷰 원고에 포함되었다. 시각 정보와는 또 다르게 강렬하고 구체적이었다. 김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행복한 소리’라고 말씀하셨다.

 

‘일간 이슬아’는 비장애인에게 더 편리한 매체로 시작했지만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수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시각장애인 구독자를 만나면서 그렇게 되었다. 내가 놓친 부족한 점이 여전히 많을 텐데 필요한 것을 알아챌 때마다 빠르게 개선하고 싶다.



Posted by 익은수박
,

[경향신문 '세상읽기']에서 가져온 글

 

언어는 중요하다. 누구의 언어로 말하는가도 참 중요하다. 

소수 엘리트나 지배권력의 언어로 민중 또는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하는 모습은 그래서 위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언어를 들여다보는 눈이 그래서 필요하다.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럴싸한 가르치려는 언어는 췟이다!

 

---

[세상읽기]‘그린뉴딜’은 누구의 말인가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2020-09-08

 

‘그린뉴딜’은 어려운 말이다. ‘그린’이야 직관적으로 이해된다고 해도, ‘뉴딜’은 암호다. 설명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그 말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맥락을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그냥 새로운 정책패키지의 브랜드에 그칠 뿐이다. 그럴 때 혼동과 위험이 발생한다. 9월4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 사업 추진을 위해 ‘뉴딜펀드’를 포함하는 대규모 금융지원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동안 환경운동 내의 제안자들은 그린뉴딜을 ‘기후위기를 막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 대전환’ 프로젝트라고 설명해왔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정부의 그린뉴딜은 지구환경을 파괴한 성장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오히려 더 촉진하는 정책이었다. 정부는 디지털, 수소전기자동차, 재생에너지 산업 지원을 위해 170조원의 금융투자 지원과, 여기에 20조원의 뉴딜펀드까지 조성해서 투자자들의 수익률과 원금 보장을 약속한다. 한마디로 녹색으로 분칠한 ‘카지노 자본주의’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그린뉴딜이 왜 이렇게 된 걸까? 2008년 오바마 정부의 그린뉴딜이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론으로 처음 수입되었을 때만 해도 국내 환경단체들은 ‘가짜 녹색’의 가면을 벗겨내고 ‘녹색경제’의 기만성을 폭로했다. 당시 금융시장 붕괴에서 위로부터 도입이 추진된 그린뉴딜은 새로운 녹색시장을 열며 위기의 돌파구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자본은 기후시장을 통해 디지털, 에너지, 바이오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고자 한다. 달라진 것은 정부와 시민사회의 관계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라면 이런 뉴딜에 맞서 앞장서서 싸웠을 사람들이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처음 도입될 때부터 이 개념은 위험을 노정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의 급진적인 기후운동에서 상징을 가져왔지만, 내용적으로는 정부, 기업, 투자자들이 주도하는 EU의 보수적이고 친시장적인 그린딜에 가까웠다. 친정부 단체와 여당이 그린뉴딜 담론을 주도하면서,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요구와 방향에 대한 논의는 실종되고, ‘탈탄소론’에 치우친 기후관리와 기술정책담론으로 흡수되었다. 가장 중요했던 불평등 문제도 마치 노동자를 산업 분야 좌초 자산의 일부인 양, 쓸모없게 된 노동의 처리 문제처럼 다뤄졌다. 지금 한국판 뉴딜에서 노동전환 대책은 전무하다. 전환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분명했지만, ‘규모’와 ‘속도’의 조급함 속에, 철학과 방향을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린뉴딜은 노동자 민중의 말이 아니었다.

 

미국의 노동자계급에 뉴딜이란 말은 1930년대의 기억으로부터 정치적 상상력을 불러온다. 그것은 자본과 노동이 한판 세게 붙었던 시대의 기억이다. 루스벨트 시대의 뉴딜은 어떤 훌륭한 대통령이 노동자들에게 준 선물이 아니라 사회적 투쟁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였다. 노동조합운동, 실업자운동, 흑인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광범위한 민중연대가 자본가를 밀어붙여 새로운 협약(new deal)을 만들어내고 노동자 권리를 쟁취한 그 역사의 힘이, 뉴딜이란 말 속에 담겼다. 특히 금융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뉴딜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을 때 월가의 금융가들은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새로운 협약’을 요구하는 미국 민중들은 이겨봤던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뉴딜’이란 말은 그런 힘을 갖지 못한다. 역사성이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말은 누구에게 힘을 주는가? 관료와 전문가들은 늘 대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정책용어로 선호한다. 그런 말은 지배자들에겐 용이하게 쓰이지만 저항자들에겐 힘을 박탈한다. 자기가 모르는 말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싸우기는 힘든 법이다. 그린뉴딜은 점점 더 우리에게 상상력을 주는 말이 아니라 가로막는 말이 되어간다. 그래도 이 말을 계속 써야 할까? 그린뉴딜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지구 곳곳에서 기후정의운동은 번져가고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

압축됐으되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글이라는 느낌이다. 

---

 

[거리의 칼럼] 전월세 / 김훈

 

인간의 주거의 권리에 대한 나의 소견은 서울에서 자라면서 목격한 무허가 주택 철거 현장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먹고살려는 사람들은 서울로 몰려들었고 집은 없었으므로 무허가 주택의 대단지가 생겨나는 것은 자연현상이었다. 이 단지를 행정행위로 때려 부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그 자리가 국유지이거나 사유지라는 것이었다. 국토는 모두 국유지이거나 사유지이기 때문에 철거민들은 땅 위에 엉덩이를 붙일 자리가 없었고, 인간의 생존은 ‘허가’의 대상이었다.

 

철거 현장은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쫓겨나는 사람들은 소주병에 분뇨를 담아서 던지며 저항했다. 저녁에는 가루가 되어버린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쓰레기 더미에서 울었다. 이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정책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변두리에 모여서 다시 마을을 이루면 그 동네를 또 부수었다.

 

지금, 전월세 값에 짓눌린 인간고의 바탕은 그때의 철거 현장의 기본구도와 다르지 않다. 철거 현장에서는 도끼와 망치로 집을 부수어서 사람들을 추방했지만, 지금은 시장의 질서 속에서 가격의 조정능력이 추방의 기능을 수행한다. 집 없는 사람들은 다주택자나 임대사업자에게 돈을 내고 그 공간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데, 이 돈은 집 많은 사람들의 재산 형성에 기여하고, 집 없는 사람들의 작은 재산을 증발시킨다. 전월세 값의 문제는 부동산 수익의 문제나 시장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존망의 문제이고 추방과 저항의 문제이다. 시장은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의 생각이 철거 현장의 충격에 가위눌린 것이라 해도, 나는 나의 거칠고 낙후된 소견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김훈 ㅣ 작가

Posted by 익은수박
,

_()_

 

 

1991.11.01.

창간사 –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녹색평론 창간호 김종철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범람하는 인쇄물 공해의 시대에 또 하나의 공해를 추가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 조그마한 잡지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무겁다. 거의 파국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산업문명의 이 압도적인 추세 속에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게다가 이 작업이 불가피하게 삼림파손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실로 착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시도하려는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든지 간에 이것이 생태계의 훼손을 조금이라도 수반하는 것이라면, 이 작업은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망설임 끝에 결국 이 잡지를 내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크게 가치 있거나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으리라는 자기도취적인 낙관이 있어서가 아니다. 점점 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환경문제를 보면서,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체들이 지구상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단히 불투명해지는 현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은 그렇다 치고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랑을 하고 이번에는 자기 아이들을 가질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의 심중에 망설임은 없을까–하는 보다 절박한 심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회피하기 어려운 당면 현실일 것이다. 우리가 《녹색평론》을 구상한 것은 지극히 미약한 정도로나마 우리 자신의 책임감을 표현하고, 거의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결코 적지 않을 동시대인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희망하면서, 민감한 마음을 지닌 영혼들과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절박한 심정이 지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심정이 단지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의 예외적인 판단에 기인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다지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 마음으로도 지금 상황은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면적인 위기–정치나 경제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문화적 위기, 즉 도덕적 철학적 위기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의 삶이 일종의 묵시록적 상황에 임박해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애써 이것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스스로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안팎의 모든 체험에 비추어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 각자는 저마다 내심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환경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지배적인 논의 방식에서 보는 것처럼 이것을 단순한 외부적 재난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기본가정 자체의 결함으로 인식하는 데 무능력을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근원적인 공포가 사태의 정당한 인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본질적인 결핍을 느끼면서도 환경재난에 대한 기술주의적 접근방법만이 활개를 치고, 또 그러한 현실에 대체로 묵종해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환경재난이 제기하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으로부터 자꾸만 도피한다면, 모처럼 이 위기가 인간의 자기쇄신이나 성숙을 위하여 제공되는 진정한 도전에 성실하게 응답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이 생태학적 재난은 결국 인간이 진보와 발전의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이른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백여년간 서양문화로부터의 충격 속에서 거의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근대화 콤플렉스에 깊숙이 젖어온 민족의 입장에서, 하나의 인간공동체로서 번영을 누릴 뿐만 아니라 단순히 살아 남기 위해서도 모든 사람의 에너지를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어느 정도는 물질적 성공과 서구적 생활방식의 모방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으로 기대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다름 아닌 그러한 성공의 대가로 인간생존의 터전 자체의 붕괴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일 것임이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대다수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못보고, 적당히 짜깁기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랜 기간 의심할 나위 없이 믿어왔던 삶의 목표와 우선순위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만한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환상을 갖고 싶어도,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생존의 자연적 토대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만다는 냉정한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온갖 곳에서 매 순간 끊임없이 불거져 나오는 환경재난과 생명훼손의 사례들은 이 추세에 강력한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나 다음 세대들의 이 지상에서의 생존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들이다. 물론 오랜 옛날부터 예언자들은 흔히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예언은 무엇보다 종교적 열정에 근거를 둔 것임에 반해서 오늘의 묵시록적인 전망은 다분히 과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간에는 토양오염이나 온실효과나 오존층 고갈이나 세계의 사막화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한 방법에 대한 기술적 탐색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인간 자신이 생물학적 존재조건을 변경시킬 수 없는 한, 어떠한 기술적 재간으로도 생물체로서의 생존조건을 파괴하면서 살아 남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남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맑은 공기도, 푸른 하늘도, 숲도, 강물도 없는 세상에서 사람은 살고 싶은 욕망을 느낄 수 있는가?

 

과학기술이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도 오늘의 크나큰 비극을 가중시키는 주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도 기술공학도 결코 만능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사태의 악화에 훨씬 더 많이 기여해 왔다는 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 각자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품고 있는 맹목적인 숭배나 신뢰는 과학은 거짓이 없고 실패가 없다는 전연 근거 없는 미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이 널리 유포된 데에는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비역사적 사고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현재 능력이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 해야 옳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힘이 막강하고, 부분적이나마 과학기술 수준이 찬탄스러운 것이라 해도, 과학은 여전히 우리의 삶의 바탕과 이 세상과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해명하는 데에는 너무나 미약하고 부적절한 수단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물며, 기계론적 우주관과 선형적 진보사관에 의지하여 전개되어온 지난 수 세기의 근대과학기술의 성과는 이제 인류의 파멸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지구생태계의 대 재난을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 온 것이 아닌가? 삶의 태반을 망가뜨리면서 그것을 진보와 발전이라고 믿어온 것은 실로 우매의 극치라 할 만하고, 완전한 미치광이 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관계, 그리고 근대과학의 근본가정에 깔려 있는 폭력성에 대한 뿌리로부터의 철저한 반성 없이, 계속하여 더 많은 과학과 더 정교한 기술만을 구한다면 파멸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 닥친 위기가 민족단위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사 전체의 경험으로서도 미증유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그러니만큼 여기에 관한 한 어디에서 빌려올 수 있는 손쉬운 처방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유례없는 위기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의 현상적 측면에 대한 이러저러한 부분적, 임시적, 외면적 수습책으로는 절대로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공간에 빚어지고 있는 공해, 오염, 자연파괴의 문제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회관계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적의와 긴장에 차있을 뿐더러 우리의 사회상황이 극심한 부패와 윤리적 타락으로 고통 당하고 우리각자의 내면이 날로 피폐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 정확히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그러니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개인의 자기자신에 대한관계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문제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정치 경제의 문제이자 동시에 철학과 도덕과 종교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예의주목하고 그것을 혁파하는 일에 주력해 온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사회사상은 그것이 사람에 이한 사람의 지배, 착취를 반대해 왔다는 점에서 존경 받아 마땅한 사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의 관점에서 머무르고 있는 한, 특히 자연세계와의 조화가 중심문제로 된 오늘날 그것은 크게 미흡한 사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때때로 인간과 자연의 동시적인 해방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맑스주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을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 제한하여 본다는 점에서는 부르주아 철학과 궤를 같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수렵채취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산업적 생활방식에 이르는 직선적인 진화의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관점은 이 지구상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온 인류생활의 최신의 전재가 반드시 바람직한 생활형태를 기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 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점이다. 생산과 소비의 양적 증가는 도리어 인간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비극적인 경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바로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산업화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해 왔다고 할 수 있는 맑스주의에서 인간 속에 뿌리깊이 내재한 정신적 종교적 욕구가 흔히 등한시되어 온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는 볼셰비키 혁명 후 러시아의 민중이 빵을 고르게 먹는 것은 가능해졌으나 그 빵이 맛이 없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인간 영혼의 근원적 요구를 외면하는 사상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그 자신의 불신을 표명한 바 있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불가결한 차원의 하나가 초월에 대한 욕구라는 것은 아무래도 부인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초월에 대한 욕망은 인간성에 깊이 내재하고 있는 충동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자연이나 우주적 연관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봄으로써 획득되는 정신적 체험을 통해 비로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삶의 최고형태를 명상하는 삶에서 찾았을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고대인들이 품고 있었던 조화와 균형과 통일의 세계관을 요약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문화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사람의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이 자기보다 더 큰 전체, 공동체나 자연이나 우주적 전체 속의 작은 일부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사색할 줄 아는 습관 속에서 길러지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좁고, 미약하고, 일시적인 자기의 개인적인 삶의 테두리를 늘 보다 큰 지평 속에 관계시킴으로써 영속적인 거대한 우주적 생명활동에 스스로를 참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고대사회에서나 토착전통사회에서나 혹은 이른바 미개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었다. 현대 산업사회의 핵심적인 비극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몰각해 왔다는 점에 있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삶의 우주적 연관이나 자연적 근거를 완전히 망각한 문화라는 것은 거의 낯선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사람의 에너지를 온통 소득과 소비의 경쟁 속에 쏟아 붓도록 강요하는 오늘의 지배적인 산업문화는 인류사에 극히 예외적인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로 요약되는 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끔찍스럽기도 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결국 우리들 각자가 자기 개인보다 더 큰 존재를 습관적으로 이식할 수 있게 하는 문화를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문화의 재건은 우리 각자의 인간적인 자기쇄신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이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현대 기술문명의 기저에는 정복적 인간의 교만심이 완강하게 버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자연의 도를 따르는 순리의 생활을 우습게 여기면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통제와 조종 속에 종속 시키려고 하는 야만적인 폭력이 끝없이 창궐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연적 환경이든 인문적 환경이든 나날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와 우리들의 자식들이 살아 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생활의 창조적 재조직이 가능하려면,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겸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익은수박
,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관련 글을 읽고 찾고 하다가 만난 글.

여기 가져와 남겨두어 틈틈이 읽고자..._()_

---

 

 

이반 일리치 공부 모임/ 2004년 11월 1일 월요일 오후 2시-5시

한국에서 이반 일리치를 가장 잘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인 김종철 선생님을 모시고 이반 일리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날의 자리는 자유대학의 일리치 공부모임 사람들이 만들었고 자유대학의 다른 모임 친구들이 참여해 3시간동안 진행되었다. 김종철 선생님은 광주에 10월 31일 오셔서 운주사에서 강의를 하시고, 11월 1일 오후에 일리치 공부모임과의 대화, 저녁엔 빛고을생명평화학교 강의를 하셨다. 매우 피곤한 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열정적인 강의와 사람들과의 만남을 보여주셨다.

서로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20대 초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반 일리치의 삶과 사상에 대해 김종철 선생님이 전반적으로 이야기하시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토막 토막으로....

○ 이반 일리히라고 번역해 나온 책들이 있는데 정확히 이반 일리치다. 이반 일리치는 독일 사람도 아니고, 친구들도 이반 일리치라고 부르고 본인이 자신을 이반 일리치라고 불러주길 원했다. 미토 출판사에서 적어도 이반 일리치 사상 전집을 내려 했다면 그 정도의 성실성과 조사는 있어야 했지 않을까. 그런 불성실성이 번역에도 그대로 전해진다. 사상가의 이름 하나 제대로 번역을 못하면서 책은 얼마나 제대로 번역을 했겠는가

○ 이반 일리치의 사상에 여러 평가가 존재한다. 이반 일리치 클럽의 제자들-사실 그는 어떤 사제관계도 맺은 적이 없지만, 그의 사상에 영향 받은 사람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중 일부는 그의 사상이 쓸모가 없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터 버거는 " 20세기 현대사를 보는 관점을 일리치를 통해서 얻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 그의 사상은 쓸데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읽지 않았다"라고 말했고, 오래된 미래로 잘 알려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80년대 이후의 일리치는 거의 도움이 안되었다고 말한다.

아마 그 이유는 이반 일리치 사상의 전반기-Deschooling society(학교없는사회), tools for conviviality(공생공락을 위한 도구, 성장을 멈춰라로 출판됨), limits to medicine(의학에 한계를 가해야 한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로 출판됨), energy and equity(에너지와 평등,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로 출판됨) 등의 팜플렛을 저술한 시기-엔 적어도 사회정치적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신뢰했다면, 후반기로 갈수록 사회정치적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고 그런 프로그램이 별 의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반 일리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독일 그린피스 의장을 지냈던 볼프강 작스의 경우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는 세계의 흐름에 실천적으로 어떻게든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흐름에서 리우 회의와 리우+10 회의에 적극 개입한 바 있다. 그의 화두는 ecology and justice, 생태적 가치와 사회적 정의를 조화시키는 문제였다. 그는 서구가 풍요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시달린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그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당장 독일이 가진 부의 9/10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10%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풍요에 시달리지 않고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선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볼프강 작스가 브레멘의 일리치를 방문했을 때 일리치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볼프강 작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고 다니냐고". 아마 그린피스 일과 녹색당 일을 지칭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 일리치의 팜플렛-그는 책을 근사하게 내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그것들을 팜플렛으로 불렀다. 그래서 그의 책들은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거의 요약본이라 할 정도로..-들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근본의 자리에서 명쾌하게 해설해 준다. 너무 명쾌하고 너무 근본적이다 보니 현실의 표피적인 개혁 프로그램으로는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답답해진다. 늘 묻듯이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라는 질문이 쇄도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리치 사상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성급히 묻는다. 누군가 답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 일리치의 우정 이야기엔 고개가 갸웃해진다. 우정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하고 말이다. 일리치 후기 사상엔 우정(friendship)과 환대(hospitality)를 많이 강조한다. 김종철 선생님은 우정이 결국 세상을 구원할 열쇠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늘 이 우정에 관한 이야기는 화두이다. 간디와 많은 사상가들에게서 이 우정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 날 김종철 선생님의 설명을 나름대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 subsistence, 자급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내 생각에 이런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은 자본주의 밖의 사람들 - 예를 들어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안에서 패배해 밀려났거나, 자본주의 시스템을 거부한 사람들 -이 보여주는 모습인데 이들은 서로에 상호의존하고 우정에 기반한 보살핌이 없이는 삶을 꾸려갈 수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우정이나 인정 같은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고,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어 잘 살면 된다고 말한다. 점점 우정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파괴된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는 것은 피폐함 뿐이다.

● 중요한 것은 우정을 되살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밖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만들고, 그 땅을 선택한 사람들(자본주의의 부를 거부하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 우정과 보살핌에 기대고 상호의존하면서, 그 자본주의 바깥의 땅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할 것이고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또한 그런 근본적 삶과 도구, 운동이 기반이 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 일리치는 자신을 역사가이자 시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겐 어떤 레테르도 정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사회학자라 하는데 그의 초기 저서들도 엄밀히 말하면 사회학적 저서라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근대가 만들어낸 분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 사회 시스템, 인간적 규모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복잡하고 완벽한 시스템안에는 인간의 자리가 없다.(doing theology) 생명과학을 논하고 DNA를 논하는 것,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경이다. 인간은 알 권리도 있지만 모를 권리도 있다. 침묵으로 대답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모를 권리가 있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자꾸 알려고 하는 것이 자꾸 어떤 문제를 만들어낸다.

○ Tools for conviviality;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가 세 가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시와 자전거와 도서관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시인이고 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We are called to be poets. poetic ability; 근대사회로 오면서 이 시적 능력, 자율적 능력이 퇴화했다. 배움(leaning)이 교육(education)으로 대체되면서 시적 정서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속도의 한계, 인간 교통 수단의 한계를 말하고, 도서관은 배움(learning)이 가능한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침략할 때 군대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the transformation of learning into education; 배움의 교육으로의 변화, 이것이 근대교육의 실체이다. 시스템은 삶을 오염시키고 Education은 인류의 행복을 해치는 바이러스다.
 
○ 녹색평론에서 복지체제에 대해 거론하고 비판하는 이야기를 지금 다루어야 할지 여러모로 고민이다. 

○ 일리치는 경이로움(surprise)을 높이 평가했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움으로 가득차 있는가, 얼마나 인생은 시적인 것인가?, 복지시스템은 경이로움을 감소시키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능력을 감퇴시킨다. 녹색평론의 독자 중에 경북에서 양로원을 운영하는 분이 있다. 이 양로원에서 지역통화를 실험했는데 노인들의 삶에 생기와 활력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런 경이로움이 복지시스템안에서는 존재하기 쉽지 않다.

어떤 영화감독이 스웨덴이 제일 형편없는 사회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영화작업을 예술이 아닌 사무 보듯이 했기 때문이었다. 9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고, 시스템만 있고 열정이 없다. 영화를 어떻게 그런 시스템으로 찍을 수 있는가? surprise, 경이로움이 없는 사회, 시적이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아름다운 사회인가?
 
○ 쿠에르나바카에 있던 CIDOC의 여러 프로그램 중 스페인어 학교는 남미로 파견될 예비 선교사들의 스페인어 교육을 담당하면서 그들을 탈세뇌화하였다. 그들에게 일리치는 변해야 할 곳은 라틴아메리카가 아니라 미국이고, 미국의 풍요가 문제이고, 풍요에 시달리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교육들은 교황청의 경계를 일으켰고 급기야 교황청 심문실로 호출되어 알 수 없는 고문을 당했고, 결국 일리치는 사제직을 반납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어머니 교회의 종으로 살았다.

○ conviviality는 subsistence, 근근히 생활을 영위하는 수준, 그러한 경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데 일리치 그룹은 이를 지극히 normal한 상태로 보고 이를 벗어날 때 불경이 발생한다고 본다. subsistence는 단순히 경제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 CIDOC이 십년이 되어가면서 안정화되었고 이에 따라 점점 관성적이 되면서 의욕과 열정이 떨어져갔다. 일리치는 해체를 결심했고 2년의 기간을 두고 직원들과 국제 정세와 CIDOC의 역할 등에 대한 세미나를 계속했다. 2년 동안 수입을 적립해 직원들에게 이를 나눠주고 CIDOC을 해체하였다. 어떤 일이던 안정상태(Security)가 되면 시스템화되고 인간의 의욕과 열정에 의해 일이 진행되기 어려워지는 위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 평화는 개발로부터 연결고리를 잘라야 가능한 것이다. 경제는 19세기까지 인간 생활의 다만 일부였을 뿐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전부가 되었다. 바로 homo economicus, 경제적 동물이 된 것이다. 경제, 돈이 전부가 된 세상에서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 세계화는 개발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평화는 파괴될 것이다.

○ 일리치가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식사를 하던 중 그 집 아이가 사투리와 슬럼가의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때마다 부모들이 제지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일리치는 그 집에는 교육만 있지 자유가 없다고 말했다. 1492년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뒤 Nebrija는 여왕에게 스페인어 문법 사전을 편찬하는 데 돈을 투자하라고 꼬시면서, 그 문법사전이 신대륙 발견보다 더 많은 이익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전이 만들어졌고, 당연히 이 사전은 도시 귀족들의 말을 표준말로 해서 만들어졌다. 이후 subsistence culture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개발과 세계화로 이어졌다.

○ 일리치는 80년대 이후 중세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근대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근원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를 느꼈다. 이 때 나온 책이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라는 것인데 이것은 빅토르의 휴의 학습론을 분석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일리치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독서가 monastic reading(소리내 읽은 육체적 경험과 함께 읽기)에서 scholastic reading(묵독, 시각적 읽기, 학자적 읽기)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책이란 원래 포도를 한알 한알 따서 음미하듯이 한 자 한 자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때문에 소리내어 함께 읽는 일이 중요하다. 독서란 과거의 지혜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때문에 서울에선 일리치 '읽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 일리치는 기독교의 타락을 강조하는데, 초기 기독교 가정엔 세 가지의 보물이 늘 구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양초와 담요와 마른 빵인데, 모르는 손님이나 여행자가 왔을 때 그가 문지방을 넘어 방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밝힐 양초와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마른 빵과 따뜻하게 잠잘 수 있도록 담요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교회가 그 기능을 빼앗아감으로써 기독교 가정은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할 필요가 없고 점차 귀찮은 일이 되어갔다. hospitality; 환대가 사라진 것이다. 산업사회를 넘어서는 길을 모색함에 있어 이 자발적 환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현재 비산업사회 일부에서 틈새로 남아있는 이 환대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 hope against hope

[출처] 광주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에서 김종철 선생을 초대하여 만남

Posted by 익은수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