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재의 성덕일기]“돈도 지식도 신념도 지나치면 위험…행복은 권리 아닌 의무”

정리 |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ㆍ길들임 거부하는 ‘건달 할배’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옳다고 믿을수록 의심해야 돼. 신념도 옳기 때문에 더 무서운 거야. 모든 좋은 것엔 반드시 나쁜 것도 있다고!” 채현국 이사장의 은근한 말투엔 말끝마다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옳다고 믿을수록 의심해야 돼. 신념도 옳기 때문에 더 무서운 거야. 모든 좋은 것엔 반드시 나쁜 것도 있다고!” 채현국 이사장의 은근한 말투엔 말끝마다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니가 내 형님 해라! 니가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구나!”

한밤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여보세요’도 없이 격렬한, 그러나 더없는 친밀함을 담은 인사가 귓전을 때렸다. 노인의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82)이었다. 채 이사장이 있는 효암학원은 경남 양산의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한다.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를 돌아다니는 그를 학생들도 못 알아본다고 한다.

‘부당한 대우도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대한민국의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중동에 보내자’…. 동서남북 사방팔방 어디에나 자리한 유비쿼터스 ‘꼰대’들의 망발에 치여 신음하던 중 접한 그의 말, “늙으면 뻔뻔해진다” “노인들을 절대 봐주지 마라”. 그건 건강한 충격이었다. 대체 어떤 노인이길래 그런 말이 나왔을까. 이 시대를 사는 청년의 한 사람으로 궁금한 게 많았다. 솔직한 고민을 담아 질문을 추리고 미리 보여드렸다. 다행히 마음에 드셨나보다. 그렇게 좋은 인상으로 자칭 ‘건달 할배’ 채현국 이사장과 마주했다.

- 이번 인터뷰를 ‘생각하는 놀이마당’으로 만들자 하셨잖아요.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이셨어요.

“우리는 기억하는 것과 아는 것을 구별 안 하고 살아요. 기억하면 아는 줄 알아. 저 노인이 책을 들고 있네. 이건 그냥 기억이고. 저 노인은 아직도 책을 읽네, 아직도 배우려고 하네, 이런 건 아는 거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저 사람은 책을 읽어 무얼 하려고 하나, 왜 저렇게까지 알려고 할까, 이렇게 수없이 가지를 뻗어나가는 게 생각이야.”

- 준비된 질문과 답을 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면서 서로의 생각이 새롭게 뻗어나가도록 하자는 말씀이셨네요.

“그렇지. 예를 들어 우리는 요리를 가르치려고만 하지 요리로 생각하게 하지를 않아. 먹는다는 행위의 의미부터 음식의 냄새, 재료의 특성, 환경. 먹거리만 가지고도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안 하잖아.”

- 친구들한테 선생님 뵙는다고 하니 기억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간단히 자기 소개를 부탁드려요.

지난 1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뒤뜰에서 마주 앉은 채현국 이사장과 유병재씨.

지난 1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뒤뜰에서 마주 앉은 채현국 이사장과 유병재씨.

“내 소개? 진짜 나이 먹은 건달 영감이야. 돈 벌지 않아도 되고, 늙었으니까 사명감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괴롭힐 일도 없고. 좀 못났어도 남들이 봐주겠거니 하고 게으름 피워도 괜찮잖아. 걷는 것도 이미 비틀거리는데 무슨 수가 있어(웃음). 그러나 남 괴롭히지는 말아야지. 정말 누구든. 나 자신도 그 누구 중 하나야. 내가 날 괴롭히지 말아야 돼. 살아보면 자기가 자기를 못살게 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자기가 자길 못 믿고 자기를 꼴보기 싫어하고, 용납을 못하고. 결국엔 ‘자기합리화’라는 자기 속이기에 숙달이 된다고. 자기 속이는 일을 일평생 그렇게 기를 쓰고 해.”

- 저도 그럴 때가 있는 거 같아요. 오히려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는 건데. 나를 아끼려고 나를 속이는….

“부모가 자식 위한답시고 강요하는 거랑 똑같아. 자기가 자기한테 배운 거를 부모가 자식한테 써먹고, 자식이 부모한테 써먹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써먹고. 서로 그렇게 사는걸. 노인이 되고 나면 더 자동적으로 자기를 괴롭혀. 그렇게 사니까 노인이 되면 더 허무하다고. 그게 그 사람이 늙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젊어서부터 그렇게 살아서 그런 거야. 내내 뻔뻔하게 자기를 속이는 거지.”

- 예전에 인터뷰에서 하셨던 ‘늙으면 뻔뻔해진다’ ‘늙은이들 봐주지 마라’ 이런 말씀들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사실 저도 꼰대들 욕을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소통이 잘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저희 세대는 기성세대를 약간 적대시하는 느낌이 있어요. 근데 기성세대라 할 수 있는 분이 그런 말을 하시니 신선했어요.

“그게 사실 젊은 사람들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고 늙은 놈들한테 하는 소리거든. 너희 좀 제발 만년이라도 편케 살지, 이놈들아 왜 그러고 사니.”

- 늙은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몰라도 젊은 사람들한텐 울림이 컸어요.

“내 친구들이 ‘너 그러다 요새 휘발유통 들고 돌아다니는 늙은이들한테 테러당한다’ 그러더라고. 난 늙은이들이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협박을 하는지 몰랐는데, 듣고 보니 깡패잖아. 근데 사실 나도 그놈들과 똑같은 깡패거든. 그러니까 내가 탄광을 해서 성공했지. 사람이 다치고 죽고 하는 탄광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건 결국 깡패, 조폭이란 거거든.”

채 이사장은 1960년대부터 강원 삼척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 소득세 10위 안에 들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광부들에게 당시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줬고, 자녀들에겐 장학금을 줬다. 그러고도 모자라 번 돈을 광부들에게 다 나눠주고 10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당시엔 복지의 개념도 희박할 땐데 어떻게 그런 경영을 하셨어요.

“그때 탄광에 오는 사람들은 다 절망적인 사람들이었어. 더 내려갈 데 없는 밑바닥 인생. 근데 우리 탄광에서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났겠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는데. 자기가 일할 능력이 있음을 자기가 자기한테 증명하게 해주는 거야. 그러면 일(노동)은 단순히 돈벌이가 아니라 완전히 창조적인 무언가가 되는 거지. 탄광만 있던 무주공산에 사람들이 모이고 집이 지어지고 애들이 태어나고…. 기적 같은 일이었지. 한 나라가 시작된 거나 똑같은 거야.”

- 광부들과 가족들 무료 진료하는 병원도 만드셨다면서요.

“친구놈 중에 서울대 의대를 나온 놈이 있었어. 혈관에 피가 안 도는 병에 걸렸는데 결국 손발이 썩어들어가서 다 잘라냈어. 왼쪽 손 한 마디만 남았나. 집에만 처박혀 있는 놈을 탄광에 데려왔지. 아, 그랬더니 여기에 자기만큼 불행한 놈이 한가득인 거야. 그놈이 병원 원장을 맡았어. 당장 그놈부터 그렇게 삶을 건진 거야.”

- 잘되는 사업은 왜 그만두셨어요.

“돈 버는 재미가 너무 좋아서 내가 환장을 한 거야. 돈 쓰는 재미는 버는 거에 비하면 재미 축에도 못 가. 한 달 순이익이 그때 환율로 100만달러가 넘는 달이 많았어. 어마어마한 거지. 그런 돈을 가지고 있으면 친한 친구도 심지어 가족들도 아첨을 해 나한테. 관계가 전부 망가지는 거야. 결국 내가 행복해지려고 도망친 거야.”

- 그래도 처자식이 있는데, 가진 걸 다 내놓는 게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일제 때 중국에서 사업을 한 우리 아버지도 순식간에 떼부자가 됐다가 또 금방 거지가 되길 여러 번 했어. 부자일 땐 친구들한테 ‘나 축구공 있다’ 자랑도 하고 좋지. 근데 가난해도 내가 그렇게 불행하지가 않아. 첨에는 답답하고 창피하지. 근데 좀 지나면 창피할 일이 아냐. 괜찮아. 용기도 생기고. 우리 애들이 가난해진다고 불행해지지 않을 거란 걸 내가 믿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거지. 애들을 위해서도 오히려 할 만한 일인 거야.”

- 뭔가 많이 갖는 걸 천성적으로 싫어하시는 거 같아요.

“욕심은 무척 많은데 내가 쥐고 있는 건 싫어. 꾀가 많은 거야. 뭘 지니고 있으면 무겁거든. 남들은 안 그러겠어. 딴 사람들도 안 그래봐서 그렇지 막상 그렇게 왕창 가지게 되면 다 나처럼 느낄 거야.”

- 책도 일부러 순서대로 안 읽고 누가 가르치는 것도 잘 안 들으려고 하신다면서요. 남 흉내내는 게 싫어서.

“남한테 길든다는 게 아주 불쾌해. 배운다는 게 결국 남한테 길드는 거구나 느끼게 돼. 그러니 선생이 아주 잘 가르치면 나는 그때부터 자꾸 딴생각을 하지. 덜 집중하려고 하고(웃음).”

- 돈도, 지식도 많으면 위험하다. 또 뭐가 있을까요. 많이 갖으면 위험한 것이.

“신념. 그게 없다고 우리는 쩔쩔매는데, 생각해봐. 히틀러도 스탈린도, 다 신념의 사나이였어.”

- 신념도 강하면 위험하다?

“돈이나 권력처럼 신념도 다 마찬가지야. 옳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신념도 옳기 때문에 더 무서운 거야. 스탈린도 히틀러도 그 당시의 기준으로 옳다고 여겨지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좇아갔겠어. 옳으니까 그렇게 끔찍한 물건이 된 거야. 그걸 뒤집어볼 줄 알아야지. 모든 좋은 건 반드시 다른 측면이 있는 거야.”

- 행복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행복이 권리이면 우리는 투정을 하고 요구를 하게 돼. 권리니까. 남한테 거둬들이고 뺏어오는 게 그게 무슨 행복이야. 행복은 의무야. 거부하면 안돼. 행복은 물이 퍼지듯이 골고루 다 퍼져서 누구나 행복해야 되는 거야. 신이 해줬으면 하는 일을 우리 스스로 하는 수밖에 없어. 우린 행복해질 수 있어. 할 수 없는 걸 누가 의무라고 해. 할 수 있는데 안 할까봐 하는 소리지.”

- ‘임금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씀도 기억나요.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 가서 월급 많이 받는 거, 그게 어떻게 인생의 의미고 목적이 될 수 있어.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닌데. 사회 전체가 그렇게 간다는 게 바로 노예적 사태야. 머릿속이 이미 노예잖아. 임금노예란 말은 자본주의 전체에 대한 내 한마디야.”

- 요즘 청년들은 삶의 폭이 좁아서 사실 그런 틀을 넘는 사고를 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해요.

“사회가 젊은이들 시각과 가치관을 그렇게 좁고 단순하게 만들어. 그러다보니 거기 생각 없이 길들여지는 어린 동물처럼 돼가는 거야.”

- 어떻게 하라고 말해주고 싶으세요.

“그 길들임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하는 거야. 자기가 알아채야지. 내가 길들어가고 있다는 걸. 어떡하면 알아채냐고? 처음 아, 하고 느끼는 거 그건 자기 혼자 못 깨달을 수도 있어. 그럼 누군가가 발등을 밟든지 옆구리를 찌르든지 해줘야지. 그래서 서로 아차 하면 돼. 그것만 시작되면 돼. 그 다음은 각자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야.”

- 깨닫는 건 스스로가 아니라 서로 도와야 하는 거다?

“서로 하는 거지. 함께 사는 세상이잖아. 어미가 있어야 새끼가 태어나고, 씨앗을 뿌려야 열매를 맺듯이 뭔가 함께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누구나 반드시 아, 하는 순간은 있어. 조금 늦고 빠를 뿐이야. 숨은그림찾기가 처음엔 어려워도 하나가 보이면 결국 다 찾게 되잖아. 사람의 틀을 좁히는 이 제도의 모순을 젊은이들이 스스로 타개해 나가야지.”

- 요즘 ‘젊은 꼰대’란 말도 있어요. 나이가 어리다고 다 젊은 건 아닌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청년이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요.

“가능성이지. 못나도 가능성, 시시해도 가능성. 그러니까 거기엔 절로 신나는 기운이 있어요. 자기가 볼 땐 미숙하고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거 같아도, 정말 거기엔 가능성이 하나 가득이야. 뭉친 실타래를 보면 이걸 어떻게 푸나 고민이 되겠지만 그 안에는 분명 뭉친 걸 풀어내는 실 끄트머리가 여럿 있어요. 조금만 하면 돼. 그걸 스스로 믿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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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생명공동체 소식지 '월간 인드라망' 귀농탐방 꼭지를 위해 서정홍 선생을 만났다.
주인공은 서정홍 샘이 소개해준 김예슬 청년 농부. 4년차에 들어선 젊은 (여성)농부이다. 그의 삶을 조금 들여다보고 농부로 살아간 과정들을 들어보았다. 20대 중반쯤이다. 말은 천천히 느리게 하고 여려 보이지만, 내면은 단단하게 뭔가로 차 있다는 느낌이었다.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멋져 보이기도 하고. 질투가 나는 게 있었다. 글도 잘쓰고, 글씨(캘리~)도 잘쓰고, 서각도 하고, 커피도 내리고, 빵도 굽고, 농사까지 하고! 

청년농부라 불리는 게 좋다고 한다. 내공을 쌓아서 농부 시인으로 불리고 싶단다. 쭉 꽃길을 걷기를 빌어주고 싶다.^_^

자세한 건 6월에 나올 인드라망 소식지에 싣는 걸로 하고.^^

인터뷰 마치고 서정홍 샘 밭에 들렀다. 박하밭에서 서정홍 샘 아내 님(?)께서 풀을 뽑고, 박하를 거두고 계셨다.

사진 속 울타리 너머는 뭘까?
이게 바로 밭 울타리였다. 감성 넘치는 농부의 밭울타리라면 이쯤은 되어야지 싶다.ㅎㅎ

#맨 밑 사진은 김예슬 청년농부와 밭에서 얘기나누는 모습을 함께간 인드라망의 소울메이트께서 붙잡아 남겨주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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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사람 수만큼 생각은 다양한지도 모르겠다.

또 그만큼 살아가는 방법이나 모습도 다를 테고.

뭐 방향에서 비슷한 결을 만지고 느낄 수는 있겠지.


암튼 확신에 찬 의견이 나는 왠지 불편할 때가 있다.

그런 확신에는 나도 모르게 딴지를 걸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언제부터였을까?

이젠 딴지를 걸어보더라도 조금더 부드럽게 웃음으로 시도해 보고 싶다.

릴렉스~


라카페에서 <무지의 찬양-무보수의 찬양>(분도)이라는 책을 샀다.

읽고 있는 중이지만 벌써 배우는 게 크겠단 생각이다.

한편 식구들도 이런 책을 함께 읽고 마음을 나누면 좋겠는데 

그럴 기회가 없다.

서로 생각이 자꾸만 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아픈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일욜.

사랑하는 친구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라는 연극을 봤다.

이 연극을 소개해 주고, 표까지 구매해 준 친구에게 한 없는 애정과 감사와 존중을 보낸다.

보면서 먹먹해지기도 하고 목이 매이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보고 나서 마음을 나누며 골목길을 걷는 시간이 좋았다.


덕분에 토욜까지 이어진 몸살로 골골거리던 몸이 살아난 듯하다.


사흘째였구나!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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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어젯밤 달빛이 참 고왔다.

물빛과 그 위에 안개, 가끔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

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구름.


손에서 전해오는 온기

걷고 걷고 또 걸으며

저려오는 다리를 타고

온몸으로 올라오는 온기


*뭔 소린지 모르겠지? 나만 알려고 읊조리는 것이니 당연하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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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크는 아이들'이 나오고 독자들을 만나는 행사 자리에서 몇 차례 얘기도 나누고, 당시 우리 출판사에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눈 백화현 샘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마련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독서가 왜 앞으로 우리에게 밥 먹여주는 시대를 열어줄지를 말이다. 뭐 비슷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고속도로로 고속도로로 몰려들어 가고 있는데, 나만 슬쩍 국도로 빠져 가기가 두려운 것이다. 고속도로가 꽉 막혀 지체가 아닌 정체가 되고 있는 걸 두 눈으로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아이들 공부 문제로 아내와 다투던 기억이 많다. 

사실 나도 미래를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자신은 없었다. 다만 현재 교육 방법이나 제도 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싶었다. 우리가 자란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하며 키운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 18세기 19세기 제도로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의문을 품지 않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나?

다만 표현 방식 등으로 아내에게나 나에게 상처를 남기고 자존감을 떨어뜨린 듯해 정말 크게 후회하고 반성한다. 너무 늦은 후회이고 반성이려나...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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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밥 먹여주는 시대 

                                                                    - 백화현 샘(독서운동가, <책으로 크는 아이들> 저자)


아이가 책을 많이 읽고 자라면 좋겠다는 건 웬만한 부모들의 바람이다. 그러나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 내지 중학생이 됐는데도 독서를 권하는 부모는 드물다. 당장 눈앞에 닥친 시험에 우선비중을 두게 되는 것이다.

이게 정말 아이를 위한 길일까. ‘사교육 걱정 없는 초등사용설명서네 번째 강사로 나선 백화현씨는 독서가 이미 선택이 아닌 필수인 시대가 됐다고 잘라말한다. 독서야말로 존재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줄 뿐더러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힘이라는 것이다. 교사에서 독서운동가로 변신한 그의 강의를 지상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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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이며,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사실 초등학교 때는 웬만한 아이들이 거의 다 책을 읽는다. 부모님도 그걸 권장한다. 그러나 중학교에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당장 독서보다는 코앞에 닥친 시험을 걱정하게 돼 있다. 우리의 수업이나 평가 시스템 자체가 독서를 못 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독서를 멀리한 채 학원 뺑뺑이를 도는 게 과연 아이를 위한 길일까? 단순히 독서가 아이 인성에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독서는 앞으로 아이가 먹고 사는 문제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게 오늘 내가 강조하고픈 얘기다.

 

먼저 왜 독서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내게 독서는 무엇보다 존재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주는 행위다. 독서 하면 책을 읽는 행위만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제대로 된 독서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하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이렇게 읽고 쓰고 토론하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주변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간다. 돈과 명예, 그리고 지위를 향해 정신없이 질주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누군지, 왜 사는지, 이 세상은 무엇이고 또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지,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학교·학원을 다니는지, 대학은 왜 가야 하는지 질문을 던질 틈도 없이 숨가쁘게 살아간다. 그러나 이럴 때 책을 읽으면 나보다 앞서 훨씬 깊이 고민하다 간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고민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뭔가 잡히는 게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존재의 뿌리는 결국 자존감이 튼튼할 때 탄탄해진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언제 어떻게 탄탄해질까. 자기를 있는 그대로존중받을 때다. 생각해 보시라. 남편이 날마다 친구 와이프 음식 솜씨며 옷 맵시를 칭찬하면, 시어머니가 날마다 이웃집 며느리와 나를 비교하면 좋으시겠나.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때 자부심이 생기고 행복해지면서 살 맛이 나는 존재다.

 

물론 남이 나를 인정해 준다고 모든 게 해소되는 건 아닐 것이다. 철이 들고 나면 스스로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 답을 스스로 찾고 나면 남들이 뭐라 해도 나만의 철학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면서 자존감이 충만해진다. 이를 도와주는 것 또한 독서다. 삶의 이유를 찾고, 삶의 철학을 갖도록 돕는다.

  

산은 산이고, 아이는 아이일 뿐


내 경우에도 책이 준 가장 큰 미덕은 내 중심을 탄탄하게 잡게 해줬던 점이었다. 우리 큰아이는 공부를 못했다. 처음에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리반 아이들이 공부를 못할 때면 괜찮아, 공부 못한다고 기죽을 것 없어. 사람은 누구나 다른 존재고 각자 잘하는 게 있어라고 격려하던 나였지만, 막상 내아이가 공부를 못하게 되니 잠이 오질 않았다. 도대체 얘는 왜 이럴까 싶으면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런 데 대한 답을 독서를 통해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백인백색이라 아이들에게 말해 왔던 게 진짜 내 생각이었을까? 혹시나 남의 생각을 내 생각인 양 착각하고 살았던 건 아닐까?’ 묻고 또 물으면서 내 철학을 찾아갈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찾은 해답은 아이는 내가 아니구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 입장이 아닌 아이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연습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은 병법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키울 때도 너를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 나만 알고 고집하면 아무 것도 안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아이는 아이일 뿐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부모님들께도 이제는 자신있게 말씀드리고 싶다. 어찌 보면 아이를 키우는 일은 아주 쉽다. 나를 버리면 된다. 오직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시라.

 

나아가 독서는 스스로 배울 수 있는 힘을 주며, 더 나은 사회를 꿈꾸게 한다. 내가 몰랐던 걸 책을 통해 습득하게 되는 데다 이 세상의 구조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열심히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 차원에서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아가 더 나은 사회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이를테면 오늘날 부모들이 아이를 학원으로 내모는 건 결국 밥 문제곧 생존 문제 때문일 것이다. 하루 종일 학교·학원을 뺑뺑이 도는 식으로 공부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고, 그런 아이가 불쌍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가 공부를 잘하기 힘들 테니까, 나아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좋은 대학에 가거나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도 힘들 테니까 아이 등을 떠미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달라진 시대의 밥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독서라고. 나는 산업화 시대 한복판을 살아온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 잠깐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져 방황했지만 고3때 어머니가 쓰러지시는 것을 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재수를 한 결과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임용고시를 통과해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때는 교과서와 문제집만 열심히 풀고도 대학에 갈 수 있었으니까.

산업화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윗사람 또는 시험관이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이해력이 있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인내심과 성실함, 책임감만 있다면 큰 걱정없이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상징되는 지식 정보화 시대다. 사람들의 취향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왜 그런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끊임없이 변화에 맞춰가야 한다.

 

그러려면 지식정보가 토대가 돼야 한다. 창조라는 게 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거다. 독서는 읽기 능력뿐 아니라 창의성과 평생학습 능력을 길러주고, 타인과 협력할 수 있는 힘도 키워주니까. 지식 정보화 시대야말로 읽기의 시대이자 창의성의 시대’ ‘평생학습의 시대’, 나아가 협력의 시대라 하지 않나.

  

독서는 개인이 아닌 국가의 문제

그렇다면 지식 정보화 시대에는 독서야말로 밥과 인성 두 가지를 가질 수 있게 해줄 수단이다. 독서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라고 내가 주장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이걸 개인에게만 맡겨두면? 자연스럽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난다. 좋은 독서 환경을 갖춘 데서 자란 아이들과 달리 책이 읽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점점 더 책에서 멀어지면서 불평등이 심화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게 또 밥의 문제로 이어지게 돼 있다.

 

그런데도 다들 시대가 달라졌다는 걸 뼛속 깊이 인지하지는 못하시는 것 같다. 지식 정보화 시대 내지 4차 산업혁명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정부나 지도자들이 학교를 지금 같은 시스템으로 유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찌감치 이것부터 부숴놨을 것이다. 부모들 또한 하루 빨리 수능부터 폐지하라고 다 데모하고 일어났을 것이다.

 

내가 이런 얘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 선진국을 돌아다니며 교육이 실제로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에 드와이트학교라는 데가 있다. 상류층이 밀집해 있다는 뉴저지주 잉글우드 지역 사립학교다. 그런데 이 학교의 경우 초등학교 1,2학년에는 사서교사와 함께하는 수업이 일주일에 한 시간씩 의무적으로 배치돼 있었다. 이 시간이면 주로 사서교사가 책을 읽어주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이 수업을 참관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을 다 읽어준 뒤 아이들에게 소감을 말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한국 같으면 이 시간에 교사가 일정하게 개입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흥부전>을 기껏 읽어줬는데 아이들이 놀부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돼야 해요” “흥부처럼 아이를 막 낳으면 안 될 것 같아요이런 말을 하면 곤란하지 않나? 그런데 드와이트학교 사서는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건 톰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제인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라는 식으로 다 받아줬다. 우리나라 교사들처럼 객관적인 코멘트는 전혀 하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수업이 끝난 뒤 물었더니 사서 왈, 이 수업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책의 재미를 온몸에 심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책이 재미있어야지 스스로 읽게 되고, 평생 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 그런가? 정답을 잘 맞추는 아이는 늘 칭찬을 받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아이는 다시 생각해 보렴하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러다 보니 책이 재미가 아닌 긴장 내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이 되면 도서관에서 검색하는 방법을 기본적으로 가르치면서 모둠별로 독서·토론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교과서가 있기는 하지만 교사들이 교과서로 수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대신 도서관에 있는 책이나 인터넷에 있는 정보들을 검색하면서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간다는 것이다.

 

중고등학생이 되면 훨씬 더 넓은 도서관으로 옮겨가 수업을 받게 되는데, 도서관 내에 작은 모임방이 여러 개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 자기 모둠끼리 시끌벅적 토론한 내용을 벌인 다음 수업시간에 이를 발표와 리포트로 이어가고, 교사들은 이를 평가하고 있었다. 당연히 ‘1또는 ‘4처럼 사지선다형이나 똑같은 답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핀란드는 미국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몇 천만원씩 내고 이런 교육을 받는 미국과 달리 핀란드는 공교육 시스템으로 같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었다. 내가 방문한 종합학교의 경우 가난한 지역에 있는 일반 종합학교였는데도 초등 1,2학년은 반별로 학생 10~15명에 교사 두 명이 배치돼 있었다. 읽기, 쓰기, 셈하기를 저학년 때 충분히 익힐 수 있게끔 이들 교사가 학생 한 명 한 명을 세심하게 케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만이 아니었다. 핀란드인에게 독서는 일상이었다. 핀란드에서는 대개 4~4시 반이 퇴근 시간인데, 이 시간이 지나면 퇴근을 하고 난 아빠들이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동도서관도 있었다. 이동버스 정류장마다 책을 실은 버스가 정차하면서 몇 시에는 이 마을, 몇 시에는 저 마을 하는 식으로 온 마을을 돌고 있었다. 노르웨이에서는 버스 대신 배가 책을 실어나르며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21세기는 유목의 시대라더니, 사람뿐 아니라 도서관도 유목의 시대에 접어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조이스 초등학교는 도서관 공간 배치 자체가 도서관은 학교의 심장이라는 철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본래 이 학교는 극빈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성적도 꼴등이고 폭력이 난무하기로 소문나 있었다고 한다.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민자 자녀도 많았다. 그런데 이 학교에 부임한 교장선생님이 독서를 통해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읽기 능력을 키워줘야겠다고 결심한 뒤 도서관 벽을 헐어버리는 혁신적인 실험에 나선 것이다. 실제로 이 학교 도서관에서는 문을 열면 곧바로 5학년, 6학년 교실로 통하게 돼 있었다. 저학년은 아예 교실에 서가를 꾸며 책을 집어넣어 준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접근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 접하도록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진국 독서교육을 보고 충격받다

  

이들 현장을 보며 선진국이 괜히 선진국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실감했다. 이들은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미래사회가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보고 돌아와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부터 바꿔야 하나 싶어서였다. 근대화에 뒤졌던 우리는 한 발 앞섰던 일본에 식민 지배까지 당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그 피해가 얼마나 컸던가? 양반들은 그나마 먹을거리라도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갈 뿐이었다. 그런데 거대한 패러다임이 바뀌는 오늘날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사실 현재로서 떠올릴 수 있는 대안은 교과서를 한쪽으로 치우고 평가 방식을 바꾸는 정도다. 교과서 대신 도서관의 수많은 책과 인터넷 속 정보를 활용해 살아 있는 공부를 하게 하고, 이미 정해져 있는 정답이 아닌 자기만의 생각을 말하게 하고 이를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하겠나. 백번을 양보해, 정책은 자유학기제 도입하듯 극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을 바꾼들 현장에서 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이런 교육을 위해서는 교사 스스로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물론 글을 쓰고 토론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교사들은 그렇게 교육받고 선생님이 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정책이 바뀌고 교사들이 준비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수밖에. 가정에서는 부모님이 먼저 책을 읽고 사회적으로는 독서 인프라를 조성하게끔 요구하는 등 독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기본이다. 내가 급한대로 한 가지 제안하는 것은 책모임 내지 독서동아리를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부모님들도 아이에게 어떻게 독서교육을 시킬지 혼자 고민할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그룹을 만들어 책을 읽고 쓰고 토론하게끔 지원하셨으면 한다.

 

우리 큰아이의 경우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작은아이의 경우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무려 십 년 가까이 친구들과 함께 책모임을 진행했다. 책모임은 일요일마다 우리집에서 진행됐는데, 일단 탄력이 붙고 나니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저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간식을 대주고 자리를 비켜줬을 뿐이다. 그 자리에 있으면 내 자식 못난 꼴이 눈에 들어와 못마땅하고, 아이 또한 부모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초창기만 해도 무슨 책을 고를지 우왕좌왕하던 아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테마를 정해 책을 읽는다든가, 벤다이어그램이나 마인드맵을 그리며 독서 소감을 나누는 식으로 자기들끼리 활동을 만들어 갔다. 때로는 독서여행을 직접 기획해 떠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책모임에서 아주 수준높은 대화가 오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위안을 받는 듯했다. 책모임에 오면 뭔가 채워지는 느낌도 있고, 평상시 친구들과 잡담 나눌 때와는 달리 정신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책모임은 결국 아이들의 인생행로마저 바꿔놓았다. 공부에 뜻이 없어 시골에 가 농사를 짓겠다던 큰아이는 책모임을 통해 공부가 재미있어졌다며 대학에를 진학했다. 현재는 지방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만화 스토리작가 지망생으로 글을 쓰고 있다. 공부는 잘하지만 사회성이 약했던 둘째 또한 책모임을 통해 사회성을 키웠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 대신 다른 책들도 폭넓게 읽게 되면서 성적이 쑥쑥 오르더니 이른바 명문대에 제 힘으로 합격했다.

  

책모임 30만개를 꿈꾸는 까닭


그러니 여러분께서도 선택하시라. 학원을 열심히 보낼 것인지, 독서모임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인지. 이런 독서모임을 전국적으로 30만개까지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 나의 꿈이다. 가정, 학교, 기관, 직장 등 어디라도 좋다. 이 일을 하고 싶어 다니던 학교도 그만뒀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제 얘기를 듣고 우리아이한테 독서를 빨리 시키고 독후감도 쓰게 해 봐야지?’ ‘책 모임도 해 봐야지?’ 하면서 괜히 마음이 급해진 부모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부모 마음이 아니라 아이 마음이 그래야 한다. 아이가 그런 마음이 돼야 하는 것이다. 나비를 붙잡고 싶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가 주인공인 그림책이 있다. 아이가 붙잡으려 들수록 나비는 더 먼 데로 도망을 간다. 지친 아이는 결국 할머니가 만들어준 꽃향기 나는 이불을 덮고 잠이 든다. 그러자 나비가 제발로 아이를 찾아온다.

마음이 조급해질 때면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부모 자신을 다독일 수 있으면 좋겠다. F.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위험하고, 자유가 없는 배움은 헛되다. 아이 스스로 배움을 좋아하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한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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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홍성에 다녀왔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소식지에 실을 '귀농탐방'을 위해 그리고 홍성씨앗도서관 취재를 위해. 홍성에서 귀농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장곡면과 홍동면을 느긋하게 둘러보고 왔다.

귀농탐방을 위해 장곡면으로 2007년쯤 이사와서 농사짓고 사는 분(녹색당원이기도 하다)을 인터뷰하고, 돌아와서 이분 관련 글을 찾아보고, 운영하시는 블로그 글을 뒤적거리다 권정생 선생님 글을 만나서 반가웠다. 반가운 마음에 퍼오고 말았네!^^

이틀 동안 장곡면에서 홍동면까지 가는 큰 길을 3~40분 정도 걸어서 왔고, 동네 이곳저곳 들판을 거닐고, 홍동에서는 마을활력소,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씨앗도서관, 밝맑도서관, 느티나무헌책방, 마을 생협(빵집이기도 함), ㅋㅋ만화방, 동네 밥집, 술집 들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마을이 되기까지 과정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지는 않고 그저 둘러보기만 했다. 그건 좀 아쉬웠다. 씨앗도서관 인터뷰는 했지만. 조만간 남원 산내면에 가게 되면 이곳 마을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묻고 듣고 해야겠다.   

(소식지 원고는 안 쓰고 잠깐 이렇게 딴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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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권정생 선생 글)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부들은 다음해 농사지을 씨앗을 갈무리해야 한다. 

나락씨는 봉태기에 담아 시렁에 얹어두고 조와 수수는 이삭째 엮어 방 안 보꾹에 매달아 놓는다. 참깨씨, 팥씨, 녹두씨 같은 자잘한 것은 무명주머니에 담아 역시 보꾹 서까래에 달아 놓는다. 

목화씨는 박두구미에 담아 바깥 처마 밑에 매달아두고 삼(대마초)는 촘촘하게 엮은 짚오쟁이에 담아 역시 서까래에 매단다. 어떻게 해서라도 쥐한테 먹히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해 씨앗이 썩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감자씨와 토란씨는 무를 묻은 땅 속에 함께 묻어놓는다. 

농부가 여름에 농사를 지어 추수를 끝냈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다. 다음해에 또 심고 가꿀 씨앗까지 갈무리를 하고 난 다음에야 마음놓고 겨울을 난다. 

우리 인간들이 남자 여자 서로 만나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라 가정을 이루어 손자를 보고 나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제야 대를 이을 후손이 생긴 것에 마음놓고 죽는다. 

우리집 마당가 은행나무엔 지난 겨울 까치가 집을 지었다. 2월 한 달 동안 조금씩 조금씩 나뭇가지를 물어다 쌓아가더니 6월에야 새끼 한 쌍을 키워 떠나보냈다. 

이땅 위에 살아 있는 목숨은 이렇게 하나같이 자손을 낳아 키우며 퍼뜨린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정작 수박농사 짓던 농부들은, 그런 다음해 수박농사를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한편으론 무슨 요술 같은 수박을 만들겠나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씨 없는 수박은 소문만 떠돌았지 그 시절 사람들은 구경조차 못 했다. 그런데 이제는 씨 없는 것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도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농부들은 해마다 씨앗을 그냥 사다 쓰면 된다. 씨앗은 종묘사에서 팔고 집에서 애지중지 보관하는 농부는 아무도 없다. 아예 씨앗을 보관했다가 심는 것을 잊어버렸다. 

<문학동네> 지난 여름호에서 김진경 선생은 콩씨를 심었더니 싹이 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내 경험은 조금 다르다. 

몇 해 전에 어째서 씨앗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지 궁금해서 그해 말린 고추에서 씨앗을 받아뒀다가 다음해 텃밭에다 직접 심어보았다. 

씨앗은 싹이 트더니 아무 탈 없이 자랐다. 가지가 뻗어나가고 꽃이 한두 개쯤 필 때까지는 정상으로 자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하게 문제가 생겼다. 종묘사에서 사다 심은 것과 비교해보니 사다 심은 고추 포기엔 마디마디 고추가 열리는데, 내가 직접 받아 심은 것은 두세 마디씩 건너 띄엄띄엄 열리는 게 영 시원치 않았다. 고추 열매의 크기는 별로 다르지 않고 고추 맛도 괜찮은데 도무지 열매가 달리지 않는 것이다. 거름을 아무리 줘도 가지만 무성하지 꽃이 안 핀다. 결국 종묘사에서 사다 심은 고추에 비해 십분의 일도 열리지 않았다. 

왜 이런 걸까? 이것이 바로 씨앗 장수들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땅호박이라고 하는 채소용 호박은 직접 열매에서 씨앗을 받아 심으면 잎만 무성하지 아예 열매는 맺지도 않았다. 참으로 요술 같은 세상이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원은 매점매석으로 돈을 벌어들였다지만 첨단과학시대는 더욱 지능적이다. 

이젠 농민들은 이런 지독한 장사꾼들에게 꼼짝없이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다. 농민들은 해마다 각종 농약에 비료에다 비닐 같은 농자재와 씨앗까지 모든 걸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며칠 전엔 우리 마을에서는 새 고추건조기를 주문하라고 이장님이 마을 스피커를 통해 알려주었다. 얼마 안 있으면 양파씨에 겨울을 나는 비닐하우스 감을 사라고 할 것이다. 1월이면 고추씨 장수가 오고 이어서 각종 채소와 참외, 수박씨 장수가 온다. 돈 쓸 데가 끝이 없다. 

중간 고샅집 윤씨 어르신네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 혼자 계시는 집에 가봤더니 할머니가 그러신다. 

"저것 봐, 영감이 죽으면서 남긴 거야." 

마당가 둘레엔 경운기를 비롯해서 고추건조기, 관리기, 이앙기, 이런저런 농기계들이 널려 있고 모두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옛날 소작농사를 지을 때는 가을이면 타작마당에서 양쪽에 가마니를 놓고 곡식을 나누었다. 먼저 땅주인 쪽 가마니에 한 말 붓고 다음엔 소작인집 가마니에 한 말 부었다. 그럿게 번갈아 한 말씩 한 말씩 똑같이 나누었다. 

그런데 타작마당에는 으레 북데기라고 해서 찌꺼기 곡식이 남는다. 좀 욕심 많은 땅주인은 그 찌꺼기 곡식마저 정확히 나누어 가졌다. 

나는 어린 시절 보아온 소작농사의 조건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땅임자니까 반을 가져가는 것이 꼭 나쁘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땅임자는 빌려준 것이니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했지 다른 나쁜 감정은 없었다. 다만 가을이면 힘들여 거둔 곡식을 반씩이나 주어버리는 게 아깝고 섭섭하다는 마음은 들었다. 부모님들도 언제나 우리 땅에서 온근농사를 지어보고 싶어하셨지만 역시 땅주인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지금은 이 소작농사가 도지(도조)라고 해서 몇 년씩 임대료를 내고 있다. 사용료는 그다지 비싸지 않다. 비교적 좋은 땅이라도 일 년에 이백 평당 십 만원이 조금 넘는다. 그래서 남의 땅이라도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게 빌려 쓰고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옛날에는 농사가 식량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돈을 얻기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한두 가지 작물에 집중되어 오곡농사라는 게 없어졌다. 이곳 안동 지방에서는 고추농사와 양파농사가 주된 농사다. 

그러니 심으면서 값을 먼저 계산하게 된다.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도 값이 폭락하니 그것도 걱정이다. 사람 살아가는 데 걱정 없는 곳이 어디 있겠냐만 농산물을 거두어 값이 어떻게 되나 걱정부터 하는 건 옛날에는 없었다. 그냥 풍년만을 들면 즐거웠다. 그런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농사꾼도 장사꾼이 되어버렸다. 

돈을 계산하게 되면 밑지는지 남는지 따지게 된다. 좀더 남기기 위해서는 깍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장사꾼 속이는 건 하늘도 눈감아준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지금 농사꾼이 허생원처럼 매점을 하거나 매석을 하는 직업 장사꾼이란 건 아니다. 농사꾼은 어떻게 해서라도 소비자가 좋아하는 농산물을 생산해내는 것이 목적이다. 사먹어주지 않으면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사꾼은 소비자라는 또다른 상전을 모시게 되었다. 

언젠가 북한에서 양계장을 닭공장이라 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닭공장이란 말이 솔직할지는 모르지만 우리네 정서에는 아무래도 살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농촌의 모드든 것이 공장이 되어버렸다. 

아랫마을 김씨가 처음 제초제를 쳤을 때 풀이니 벌레니 모조리 죽어가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제는 면역이 생겨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 농촌의 중심이 이렇게 변한 것도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세상에 착한 사람이 별로 없다. 착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진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먹어라, 입어라, 마셔라, 신어라, 발라라.....이렇게 돈 쓰게 하는 광고 천지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어찌 보면 강요하다 못해 협박을 하는 듯도 하다. 마치 그렇게 안 하면 좋지 못할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요즘 시골 버스를 타보면 아주 깨끗해졌다. 시골 사람들도 옷차림이 말쑥하게 세련되어졌다. 겉모습만으로는 잘사는 선진국처럼 따라가고 있다. 

시골 사람도 고무신 신은 사람은 없다. 깨끗한 구두에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짧은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를 하나같이 짧게 파마를 했다. 남자들도 여느 도시의 신사처럼 차림새가 깨끗하다. 

전에는 신문지를 오려 뒤를 닦는 것도 황송했는데 이제는 부드러운 두루마리 화장지가 익숙해졌다. 텔레비전도 작은 것은 답답해서 못 보겠다고 일흔 살이 넘은 큰대추나무집 할머니도 대형 텔레비전으로 바꿨다. 텔레비전에서 선전하는 대로 모두 잘 따라 살고 있다. 

마을 집들도 깨끗해지고 골목길도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집집마다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뺍자구라고 하는 질경이풀이 돋아나고 봄이면 민들레가 노랗게 피던 고샅길도 모두 사라졌다. 시멘트에 뒤덮인 속에서 모두 질식해 죽었을 테고, 거기다 빈틈이 있는 곳에 풀이 돋아나면 여지없이 제초제를 쳐버린다. 제초제는 집 안 마당에도 어디에도 뿌려대어 아예 상비약처럼 되어버렸다. 

수돗물이 들어오고 나서 집 안에 목욕실이 생기고 세탁기도 생겼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편리해졌고 풍요로워졌다. 

이런 것을 아랫마을 손씨가 우리집까지 목욕을 하러 왔다. 우리집엔 따로 목욕실이 없어 마당가 수돗물로 몸을 씻었다. 손씨는 아랫마을에 수도관이 고장나서 수리를 하느라 모든 집에 물이 나오지 않아 우리집으로 왔다고 했다. 들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일을 하고 왔는데 씻을 물이 없으니 답답했을 게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농촌의 개울물이 몸을 씻을 만큼 깨끗한 곳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집 안이 깨끗해진들 개울물이 시궁창처럼 더럽다면 그게 어떻게 농촌이 되겠는가. 참으로 모순된 삶이 오늘의 농촌인 것이다. 

유리알처럼 맑았던 시냇물은 이젠 아무 데도 없다. 

우리가 걱정하는 씨앗 문제는 한 부분일 뿐이다. 아이엠에프(IMF) 당시 우리 종묘회사가 모두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고 걱정을 했다. 우리 농민의 삶의 일부가 외국 자본에 예속된 것이다.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우리 농촌의 주체적 삶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옛날엔 농민이란 말을 안 쓰고 '여름지기'라고 했다.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열매는 모든 목숨이 먹어야 살 수 있는 귀한 생명의 씨앗이다. 밥이 하늘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 있었을 게다. 하늘이란 말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우리 농민들이 수백년, 수천년 동안 그토록 알뜰살뜰 보관했던 우리 토종 씨앗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렸지만 지금이라도 제자리를 찾았으면 한다. 

토종 씨앗은 오랜 세월 우리 기후와 토질에 맞게 진화되어 웬만한 질병에도 면역이 생겨 있다. 그래서 농약이 없어도 깨끗하게 자라 열매를 맺어 탈없이 먹고 살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토종 씨앗 이름들을 적어보면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돼지나락, 까투리나락, 쌍두배나락, 오두바리수수, 눈까막이수수, 개파리콩, 어금니콩, 게발차조, 개똥차조, 물푸레차조, 오누이강냉이, 모두 정답다. 

감자는 자주감자, 흰감자, 분홍감자 세 가지가 있었다. 돌아가신 박실 어르신네는 자주감자를 자지감자라 하고 분홍감자를 보지감자라 했다. 

"야아들아, 자지감자캉 보지감자캉 한데 두지 마라. 바람피운다." 

그렇게 한바탕 웃었다. 

이렇게 우리 토종 씨앗엔 웃음이 있고 시(詩)가 있고 동화가 담겨 있었다. 

우리 씨앗을 잃어버리면 우리 혼도 함께 잃어버릴 것이다.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권정생. 

1937년 일본 도쿄 출생. 1969년 기독교아동문학상에 동화 <강아지 똥>이,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 한국아동문학상 수상. 동화<강아지 똥><사과나무밭 달님><몽실 언니><바닷가 아이들><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먹구렁이 기차><밥데기 죽데기> 등과, 수필집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시집<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등이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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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블로그 글에서 퍼왔어요.

나도 좀 배우려고...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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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 할 때 필요한 준비물 두가지가 필요하죠? 

 

개인이 마음에 드는 과 실에 따른 뜨개질 바늘! 

 

실이 두껍다면 바늘 굵기도 굵어야 해요. 

 

(* 뜨개질 바늘은 5~6 바늘 추천합니다) 

 

  

그럼 뜨개질 하는 법을 알아볼까요? 

 

뜨개질의 기초라고 하는 겉뜨기안뜨기를 배워볼꺼에요. 시작하겠습니다. 

 

 

 

코뜨기 

 

뜨개질 할 때 제일 먼저 해야하는 작업이죠! 

 

사진 참고 하세요~

 

  

 

 

 

그다음 배울 것은 바로 겉뜨기입니다. 

 

 

 



 

겉뜨기 

 

하트모양으로 촘촘하게 꼬인 모양이에요. 

 

처음 시작할 때 겉뜨기로 많이 합니다. 

 

저도 처음 뜨개질 배울 때 겉뜨기 먼저 배웠답니다 

 

사진 참고 하세요~ 

 

  

 

그다음은 안뜨기! 

 

 

 

 

 

 

안뜨기 

 

흔히 물결무늬라고 말하는 안뜨기겉뜨기와 반대로만 해주면 된답니다. 

 

안뜨기는 겉뜨기 배우고 나서 바로 배우시는 분들에게 다소 헷깔릴 수도 있어요. 

 

헷깔리지 않게 연습많이 해주세요. 안뜨기 하는 방법 사진 첨부할게요.

 

 

 

여서기 잠깐!!! 

 

조금만 더 응용해서 겉뜨기와 안뜨기를 섞어서 해주는 것도 예쁘답니다. 

 

겉뜨기와 안뜨기가 익숙해지면 그때 섞어서 만들어보세요. 

 

 

 

 

 

마지막으로 코 마무리 하는 법 알아보도록할게요.

 

 

사진 바로 첨부 할게요.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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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에서 온 글을 읽고 퍼담아  둔 시.

시가 위로를 줄 수 있겠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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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오규원

 


비상하는 새의 꿈은

날개 속에만 있지 않다 새의 꿈은

그 작디작은 두 다리 사이에도 있다

날기 전에 부드럽게 굽혔다 펴는

두 다리의 운동 속에도 그렇고

하늘을 응시하는 두 눈 속에도 있다

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우리의 몸속에 숨어서 비상을

욕망하는 날개와 다리와 눈을 보라

언제나 미래를 향해 그것들을 반짝인다

 

모든 나무의 꿈이 푸른 것은

잎이나 꽃의 힘에만 있지 않다

나무의 꿈이 푸른 것은

막막한 허공에 길을 열고

그곳에서 꽃을 키우고 잎을 견디는

빛나지 않는 줄기와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깜깜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숨어서 일하는 혈관과 뼈를 보라

우리의 새로움은 거기에서 나온다

 

길이 아름다운 것은

미지를 향해 뻗고 있기 때문이듯

달리는 말이 아름다운 것은

힘찬 네 다리로

길의 꿈을 경쾌하게 찍어내기 때문이듯

새해가 아름다운 것은 그리고

우리들의 꿈이 아름다운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비상하는 날개와 다리와 눈과

하늘로 뻗는 줄기와 가지가

그곳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

 

 

                                                   우대식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직선의 거리를 넘어

흔드는 손을 눈에 담고 결별의 힘으로

휘돌아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짧은 탄성과 함께 느릿느릿 걸어왔거늘

노을 앞에서는 한없이 빛나다가 잦아드는

강물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강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굽은 곳에 생명이 깃들기 때문이다

굽이져 잠시 쉬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들이 악수를 나눈다

물에 젖은 생명들은 푸르다

푸른 피를 만들고 푸른 포도주를 만든다

강이 에둘러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것은

강마을에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감사 때문이다

  

 


이 길의 끝

 

                                           – 아메리카 원주민 격언 



내가 걸어가는 길의 끝에는

깊은 계곡이 있다.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나는 주저앉아 절망한다.

 

새 한 마리가 계곡 위로 날아오르면,

새가 되길 원한다.

절벽 저편에서 꽃 한 송이가 빛나면,

꽃이 되길 원한다.

한 조각구름이 하늘 위를 떠가면

구름이 되길 원한다.

 

자신을 잊는다.

심장이 가벼워진다.

마치 깃털처럼

한 송이 데이지처럼 부드럽게

하늘처럼 후련하게.

 

눈을 들어보면,

계곡은 이제 한 번에 뛰어 건널 수 있는

시간과 영원 사이일 뿐이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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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생명공동체 '심심학교'를 소개하는 글에서 만난 시.

참 좋은 시다. 누가 골랐을까? 짐작은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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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_ 파블로 네루다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맨 처음 맡을까


소나무는 언제

자신이 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을까


오렌지는 언제

태양과 같은 믿음을 배웠을까


연기들은 언제

공중을 나는 법을 배웠을까

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고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왜 나뭇잎은 초록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질문하다 사라질 뿐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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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배움은 성찰이 아닐까 싶다. 좋아 보이는 상품을 차곡차곡 소비하듯 지식을 머릿속에 주둥이에 쟁여 두는 게 아닌. 궁시렁거리기만 하지 말고, 궁시렁거리면서 눈곱만큼일지라도 뭔가를 시작해야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티끌만큼이라도 삶을 바꿔야! 그게 쌓이고 쌓이면 내가 바뀌고 이어져 있는 사람들도 세상도 바뀌겠지. 그런 게 인드라망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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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배우는가: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는 배움의 기예

자공공아카데미 오프닝 강연 리뷰

 

 

지난 3월 17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하자센터 허브홀에서 자공공 아카데미 오프닝 강연이 열렸습니다. 하자작업장학교, 오디세이학교, 영세프스쿨, 로드스꼴라, 산어린이학교 청소년 100여 명을 포함한 200여 명의 시민이 자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날 현장 소식을 강연 요약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연사 엄기호(문화학자,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공부중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의 저자)

 

 

이 강연 제목은 다소 협박 같이 들립니다. 얼마 전 파면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마 늘 하던 대로 해왔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대로, 전임자들이 하던 방식대로 그대로 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촛불시위자들은 이전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위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보편적 준칙이 급변하고 있는 시대

 

요즘 대학에서는 ‘단톡방 성희롱 사건’, ‘OT 성희롱·성폭력 사건’ 등 여러 사건이 벌어지고 있어요. 단톡방 사건에 연류 되어 감옥에 간 학생들은 억울해합니다. ‘왜 나만 걸렸나?’, ‘내가 뭘 특별히 잘못했냐?’, ‘그저 농담한 건데, 왜 나만 감옥 가나?’ 등의 이유로요. 그런데 바로 그렇게 농담했기에 감옥 가는 겁니다. 대통령에서부터 학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전방식대로 그냥 살다가는 좀 지질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가 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이런 것을 보편적 준칙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 시대는 보편적 준칙, 규범이라는 게 급격히 변하고 바뀌고 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배우지 않으면 감옥 가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직업을 갖고 사회인이 되거나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거나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고 가장이 되어 가족을 지키거나, 이전까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회적 자존감을 줬던 것들 역시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자존감이 무너진 상태에서 보편적 규범이나 준칙이라고 하는 것들도 급속도로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누가 제일 억울할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이전 하던 방식대로 공부하고 살던 사람들은 다 억울하게 되겠지요. 촛불시위 이후 ‘이전처럼 살지 않겠다,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겁니다. 이 사람들의 결정적 승리의 징표가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입니다.

 

저는 이제껏 학교에서 해온 공부를 ‘배움 없는 공부’라 부릅니다. 우리는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하는데 배우는 게 없어요. 공부하면 할수록 무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삶의 무능력자가 체계적으로 양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는 자의 용기와 가르치는 자의 환대

 

교육철학자 존 듀이는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고 합니다. 우리는 경험을 ‘한다’고 얘기합니다. 경험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영어로 ‘trying(해봄)’과 ‘undergoing(겪어봄)’입니다. 무언가를 하게 되면 겪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불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뜨겁다는 걸 배우죠. 경험을 통해 뭔가 배움이 발생합니다. 듀이는 배움은 겪음으로부터 온다고 봤어요. 해보는 것 자체가 어떤 교훈을 주지는 않습니다. 해봤을 때 뭔가를 겪는 것이죠.

 

우리는 공부를 ‘한다’고 정신이 없어요. 배우기 위해 계속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에 손을 넣었다 뺐다고 바로 배움이 발생하진 않아요. 배움이라고 하는 게 이렇게 즉자적으로 발생하진 않습니다. 불에 손을 넣다가 뺏을 때, ‘앗 뜨거워, 이건 뭐지?’라는 반응을 하지요. 뭔가를 해보고 나서야, 뭔가를 겪고 나서야 나오는 게 질문입니다. 뭔가를 겪지 않으면 질문이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모르는 걸 질문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가요? 모르는 걸 모른다고 드러내는 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는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때문에 질문하는 것 자체는 자랑스러운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학생들이 보통 질문 잘못했다가는 ‘내가 설명하는 동안 집중 안 하고 뭐했냐?’고 봉변을 당하곤 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환대를 받는 경험한 것이 아니라 봉변을 당한 경험을 합니다. 수치심을 느끼면 다시는 질문하고 싶지 않아집니다. 이렇게 질문을 안 하는 상태로 넘어가게 되면 자기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해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면 궁금해지지도 않아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로 가면, ‘노답’이에요.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고, 까마득한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환대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배움이 발생하려면 배우는 쪽에서는 용기를, 가르치는 쪽에서는 그 용기를 환대해야 합니다.

 

질문하려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겪는다고 해서 바로 배움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시도하는 게 있으면 겪고, 질문하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이라는 걸 통해 배우게 된다. 한 단계 단계마다 다 중요한데 중간 과정을 생략하다 보니 공부하는 게 귀찮고, 재미없어집니다. 학교에서 누가 주로 질문하나요? 모르고 있는 학생보다 주로 아는 학생들이 질문합니다. 학교는 왜 만들어졌나요? 학교는 무식한 자, 무지한 자를 환대해야 합니다. 그게 목적이니까요.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중심에 누가 있어야 할까요? 우리가 경험한 학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중심에 두고 있죠. 그러나 학교는 모르는 자를 중심에 두고, 그 사람들의 질문을 중심에 두고, 환대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는 것

 

모르고 있는 것을 질문하려면 하나는 알고 있어야 해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모르는 게 뭔지 알려면 해봐야 합니다. 배움이라는 게 겪음으로부터 오긴 하지만, 겪음은 또 해 보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자꾸 하다 보면 잘 안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한계’에 부딪힙니다. 우리는 이 한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마도 한계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 극복되어야 하고 돌파해야 하는 것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계를 발견했을 때, 그 순간에 뭘 깨우쳐야 할까요? ‘아, 이게 지금 나구나’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해녀학교가 있어요. 처음 들어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게 물속에서 자신이 참을 수 있는 숨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가르칩니다. ‘내 숨의 길이’를 알게 한다는 것은 그 교육의 목적이 ‘내 숨의 길이’ 그 이상을 하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교육은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받아들이게 하는 게 아니라 ‘넌 할 수 있어, 극복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지치고 소진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시도하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에 걸쳐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아야 무리하지 않아요. 우리는 지금 너무나 무리하며 무리수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네가 하고 싶은 게 뭐야? 그걸 찾아야 해’라는 것으로 들었어요. ‘하고 싶은 것’을 찾아 계속하는 것, 해보는 것trying에만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잘 활용하는 것
숨의 길이가 1분에서 5분까지라고 하면 이중 누가 탁월한가요? 다들 5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간이 탁월해진다는 것은 나에게 1분의 숨이 주어진다면 1분의 숨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에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뭘 할 수 있는지 발견하고 연마하는 것이 공부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1분이라는 한계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연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1분의 숨을 잘 다룰 수 있을 것인가를 연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하시길 바라요. 공부의 가장 최종적 목적은 뭔가를 잘 다루는 사람이에요. 다루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알기 위해서라거나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때문에 공부하는 과정,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할 것은 ‘나는 뭘 다루고 싶은가?’입니다. 내가 뭔가를 잘 다루게 되는 것, 그것을 ‘익힘’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공부할 때, 익힌다고 하죠. 뭔가 하나를 배우면 충분히 잘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거든요. 보통의 학교에서는 ‘여러분 아시겠죠?’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요. 배우고 익히는 게 아니라, 배우고 끝나고 다음 배움으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배우는 게 많은데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익히는 건 어느 정도까지일까요? 잘 다루는 것,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 다른 말로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그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 공부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자유에요. 공부는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연습을 계속해서 언제 자유로워질 수 있냐면, 내가 다루고 싶은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뭘 다루고 있는가?’, ‘나는 얼마만큼 다룰 줄 아는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입니다.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대단하다고 느껴지지 않을까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멋있게 살아갑니다. 공부하는 목적은 바로 이렇게 멋지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지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멋지게 살기 위해서 공부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럼 뭐가 멋진 것인가요? 뭔가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나옵니다. ‘나만의 스타일’은 주어진 대로 살아온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 되겠죠. 내가 살아가는 내 삶의 방식이 나만의 스타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멋지게 살아간다고들 합니다.

 

 

자유롭게, 멋지게 살아가기 위해서

 

이렇게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나 혼자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이 만듭니다. 자유로운 개인,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에, 뭔가를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사회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같이 궁리도 하고 의논도 합니다.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를 도모하고 협력하는 것은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나의 무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내가 아는 게 무엇이고 모르는 게 뭔지를 알고, 할 줄 아는 게 뭐고 할 줄 모르는 게 뭔지를 알아나가는 과정. 이것은 바로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자기에 대해 알아나가면서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보다 잘 다루려고 연습하고, 익혀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이것을 얼마나 잘 다루고 있는지 ‘자기를 발견해가는 과정’이 학교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발견해가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꿈꿀 수 있고, 최종적으로는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을 도모해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멋지게 살아가는 것을 도모하는 것이 나 혼자서 하는 노력이 아니라 같이 모여 도모하는 것, 그 자체가 모여 있는 목적이 되는 것이 학교였으면 합니다. 서로서로 훌륭해지는 것, 그것을 공통의 목적으로 두고 함께 도모해보자고 하는 것이 우리가 여기 함께 모여 배우는 이유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멋지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리 | 최은주 (거품, 학습생태계팀) schaum@haj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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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공 아카데미 5

돌본다는 것서로 의논한다는 것그리고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것

 

① 엄기호 오프닝 강연 우리는 왜 배우는가:죽음의 골짜기를 건너는 배움의 기예’_ 3월 17()

② 첫 번째 라운드테이블 ‘성장과 돌봄: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_3월 30일(목)

③ 두 번째 라운드테이블 ‘사회와 시민 Ⅰ: 위켄즈’_4월 13일(목)

④ 세 번째 라운드테이블 ‘사회와 시민 Ⅱ: 야근 대신 뜨개질’_4월 27일(목)

⑤ 네 번째 라운드테이블 ‘노동의 종말과 시민배당: 나 다니엘 블레이크’_5월 11일(목)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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