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정희진 칼럼을 여러 편 읽게 된다. 

나의 지금 상황에도 견줘보게 되고, 읽고 있는 <사이보그가 되다>와도 이어지는 지점이 있는 듯하다. 

새로운 영화와 감독을 알게 해준 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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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 팬데믹과 ‘혼자임’

 

 

인간의 몸은 친밀한 타인 대신

바이러스와 백신이 ‘교류’하는 시대

이 시대 몸들의 연결과 분리는

방역과 개인, 모두에게 어려운 문제

개인성, 혼자임, 외로움이 좌충우돌

“혼자는 너무 적고, 둘은 너무 많은”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

 

내가 자주 이용하는 서울의 어느 지하철역. 나란히 붙은 광고 두 개가 눈에 띈다. 하나는 결혼정보회사의 선전 문구, “결혼이란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것”, 다른 하나는 서울시가 연말연시 5대 행동수칙과 함께 내놓은 포스터,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혼자임’이 좌충우돌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여 산다. 아니라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자연인’의 삶도 사회적이다. 팬데믹 시대, 거리두기는 혼자인 상태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다. 학교, 군대, 감옥, 병원, 직장에서 언제까지, 어디까지 거리두기를 할 것인가. 코스타리카처럼 군대와 감옥은 ‘해방’시킨다 해도, 학교와 병원에서 대면은 필수적이다. 육아는?

 

자본주의의 가속으로 인한 고실업은 근대 초기 제도들의 개념과 기능을 변화시키고 있다. 속도 조절 중일 뿐, 이미 인류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팬데믹은 인간이 아닌, 지구 주도의 재촉이다. 이런 재촉 와중에 저토록 시대착오적인 결혼 개념이라니. 결혼한다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사람은 없다. 타인과 함께든 혼자든, 외롭지 않은 사람도 없다. 더구나 외로움을 피하자고 결혼을? 동성이든 이성이든 결혼 제도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자질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다.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구는 “어느 마스크를 쓰시겠습니까? 남이 씌워줄 땐 늦습니다”와 함께 코로나 공포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혼정보회사의 문구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이 역시, 문제는 조건이다. 적절한 공간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좁은 고시원의 1인 가구나 ‘13평에서 4명’이 아님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구겨 산다’.

 

융합의 발전, 개인에서 몸으로

 

기업의 외로움에서 벗어나자는 광고와 방역을 책임진 지방자치단체의 혼자임에 대한 강조는, 기존 사회의 개념을 새로 쓰고 있다. 팬데믹 시대에는 물리적 모임(gathering)과 공동체(society)의 안전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리의 개념도 세분화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화된 몸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지, 마음의 거리(“마음은 가깝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편, 안 보면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도 현실이다.

 

나는 두치펑(杜琪峰) 감독의 팬인데, 그의 영화에는 자신을 살해하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죽어가는 몸이 자주 나온다. 권투에서 그로기 상태의 선수가 자신을 때리는 상대에게 몸을 맡기는 모습과 비슷하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고 때리는 사람한테도 의존하는 존재다. 의존은 열등한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다. 한자의 ‘사람 인’(人)은 맞대어 의지하는 모습, 인간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서구 철학에서는 상호의존적인 인간 개념이 도출되기까지 200여년 동안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 필요했다.

 

서구 철학에 한정한다면, 인류는 신과 자연이 지배하던 중세를 ‘극복’한 후, 앎을 관장하는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이후 사람 개념의 변화는 해부학에서 사회운동까지 인간 활동의 공로가 크다. 이제 우리는 시공간에 따라 사람의 의미가 다름을 안다. 추상적 의미의 인권에서, 누가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의 권리인가라는 사회적 성원권(membership)으로서 인권 개념은 융합의 성취다.

 

개인의 개념은 프로이트에 의해 확고해졌다.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고통스럽게 독립을 쟁취한 자율성(auto/nomy)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자율성은 스스로 규범을 만든다는 의미다. 반대로 의존은, 연결과 협력과 혼동된 채 열등한 가치로 간주되었다. 우리의 몸은 사회와 타인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음에도 피아(彼我)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는 환상, 영토성(금 긋기 놀이)은 안보 이데올로기의 전제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지만, 여성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후 낸시 초도로 등 여성주의 정신분석학자들이 근대적 남성성을 분석하면서, 인간의 자율성 개념은 이성애자 가족에서 제도화된 모성의 산물, 즉 성별 분업의 결과이지 인간의 보편적 특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자아는 극복되어야 할 개념이다. 즉 “내가 누구다”라는 자의식은 누군가를 부정하거나 외부와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만들어진 문명의 골치 아픈 산물이다. 외로움도 타인과의 비교에서 온다. 안정적인 자아,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인과 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연속적이지도, 일관적이지도 않다. 실존주의, 불교는 말한다. 고통은 ‘내 안의 어린아이’ 때문이 아니다. 세상은 본디 고해(苦海)다.

 

인간이 자연과 동물과 구별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왔던 합리성은 근대성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러나 지구상 곳곳에서 멈추지 않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이성의 예외 상태(광기)가 아니라 권력의 의지로서 이성의 실현이다. 전쟁은 기획된다. 이를테면, 가정폭력, 성폭력 가해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후 여성주의, 현상학, 인류학 등은 인간에 대한 연구 주제를 몸으로 이동시켰다. 모든 개인은 ‘몸’이다. 그 몸은 사회적이다(mindful body, social body). 마음은 몸의 ‘일부’이다. 마음이 몸을 빠져나갈 때, 우리는 죽음을 맞는다. 사회적 몸으로서 인간 개념은 개인과 구조의 이분법을 반박한다. 구조는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만, 개인의 대응은 다를 수 있다. 이 같은 포스트 구조주의는 구조주의도 자유주의도 모두,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융합이다.

 

코로나 시대의 외로움

 

코로나 시대 외로움은 방역 사회와 개인의 대응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과 팬데믹의 지속을 알고 있는 모두의 무기력함 때문이다. 물론 생계 불안도 외로움의 큰 주제다.

 

영어 속담에 “둘은 친구지만, 셋부터는 군중이다(two’s company, three’s a crowd)”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발전(?)한 “혼자는 너무 적고, 둘은 너무 많다”도 있다. 둘의 의미는 다르다. 전자의 둘은 배타적인 파트너로 생각할 수 있지만, 후자의 둘은 피곤한 외부 세계다. 최근 출간된 김혜진의 소설집 <너라는 생활>은 고립된 개인과 그런 개인들이 사회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결된 상황에서, ‘내가 본 너’를 그린다. 내가 본 너는, 나인가 너인가. 도착(倒錯)을 그린 수작이다. 나는 김혜진을 읽고 나만 그런 상태(도착)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받았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시대이다. 이때 ‘개인’은 해방된 자아가 아니라 고립, 주체적 종속 상태다. 지금 우리는 전염병 때문에 이러한 자유마저 공동체를 위해 조절하고 있다. 본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불가능한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정말로 불가능하다. 무의식적으로 부정할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시대 몸은 인간과의 연결이 아니라 바이러스와 백신이 ‘교대’하는 장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와중에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을.

 

2019년 개봉한 폴 슈레이더 감독의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는 환경 파괴로 인한 인류 멸망을 묘사한다. 에스에프(SF)도 아니고 영웅도 없다. 영화평론가 김혜리의 표현대로 “우리는 지구의 수명에 관한 구체적 수치를 받아든 최초의 세대이다”. 몸의 ‘반’은 방역 시스템에 맡기고, 나머지 ‘반’은 혼자임을 감당해야 한다. 항시적 방역이란 이런 상태다.

 

인간은 각기 닿을 수 없는 섬들이지만(독자성), 바닷속에서 보면 연결된 땅이라는 말이 위로를 준 시절이 있었다. 소외, 고립, 심심함, 마음의 허기, 마음 둘 곳 없음? 팬데믹 시대에는 이도 저도 아니다. 나의 혼자임과 외로움이 글로벌 경제와 기후위기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의 ‘대안’은, 자신을 잊는 몰아(沒我)밖에 없다. 쉽지 않다. 그래도 인간이 지구에 지은 죗값을 70억명분의 1로 나눈 것이니,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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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삶이 실사구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만, 좀더 탐구하고 공부해야 내 언어가 되겠지. 

암튼, 요 말이 자꾸 남는다.

 

"니어링 부부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사는 대로 생각했다. 살아가는 그대로가 저항이 되는 삶을 추구했다. 매일매일 사는 모습이 달랐기 때문에 확신이 아니라 모색의 삶이었다. 이들 사상의 핵심은 지속성, 일관성의 부재다. 원칙 없음이 이들의 원칙이었다. 이들은, 지금 우리를 절망케 하는, 기후 위기와 실업을 가져온 발전주의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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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 니어링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생각대로 사는 삶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

 

후퇴하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없어

사는 대로 생각하고, 자신을 정의해야

 

생각대로’는 미래형

발전주의적 사고방식

인간과 지구를 망치는 지름길

 

깊은 밤 라디오 방송, 누군가의 일기, 온라인의 자기만의 방, 멘토의 조언,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의 다짐…. 이런 순간에 자주 만나는 문구가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잠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의 출처는 프랑스의 문학가 폴 부르제(1852~1935)지만, 대개는 영어권의 스콧 니어링(1883~1983)과 헬렌 니어링(1904~1995) 부부로 알고 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반전, 환경주의를 실천했던 니어링 부부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로이자 동경의 생애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백세가 되던 해, 스콧은 생명 연장을 위한 의학적 조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맞았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각을 게을리 말고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살자? 언뜻 “개념 있게 살자”는 뜻으로 들리지만, 생각이 곧 개념은 아니다. 생각보다 존재가 먼저라는 점에서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가장 문제는 매우 위험한 가치관이라는 점이다. 니어링 부부는 이와 정반대로 살았다. 그들의 삶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소름 끼치는 자유”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단어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수호”처럼 기이한 말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지구상에서 이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민주주의는 수호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자유의 의미는 ‘무엇으로부터 자유’(free from what ~ )인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경쟁사회, 소음과 먼지, 신분차별, 타인의 시선, 돈, 피곤한 인간관계로부터의 자유…. 이처럼 자유의 개념은 극복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자유들은 주어지지 않는다. 투쟁으로 쟁취해야 하는 가치다. 대개는 투쟁이 힘들어서 그냥 부자유 상태로 산다.

 

반면, 개인적 차원의 자유가 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인생이다. 나 역시, 내 맘대로 살고 싶다. 일 안 하고, 여행하고, 은둔하면서 책만 읽고…. 모두 돈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꿈만 꾼다. 소신대로 살기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소신대로 살려면 역설적으로 소신이 없어도 되는 삶, 즉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회적 매장과 노후의 비참 혹은 중대한 상실과 결핍을 극복하면서까지 소신을 내거는 이들은 드물다. 소신(발언)은 잃을 것이 많지 않은 중산층의 관념이다.

 

니어링 부부에게 영향을 준 랠프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소름 끼치는 자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아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생각의 자유’는 희망, 욕망, 망상이든 비현실의 연속선을 이루면서,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정말 소름 끼치는 현실! 에머슨이 살았던 시대와 달리, 당대는 “소름 끼치는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인프라마저 생겼다. 온라인이 그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표현, 형상화되기 전까지는 한계가 없다. 개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무정형의 한없는 작용일 뿐이다. “당신 생각은 자유”, “네 맘대로 생각하세요”가 조롱인 이유다. 생각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와 다르다. 생각의 자유는 권리가 아니다.(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자유일 때만 성립하며, 혐오는 사상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산다. 인간사는 협력, 의존, 공조로 가능한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원하는 “내 맘대로”는 고립일 뿐이다. 타인과 ‘나’ 사이를 조율하는 일이, 인생고다. 인내심, 성숙함, 타인을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존재 때문이다. 나만의 자유, 나만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가능한 이들이 있다면 신, 조물주, 게임 속의 가상의 왕이다. 많은 이들이 니어링 부부가 자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신이나 조물주가 아니라 농부로 살았다.

 

생각대로의 삶은, 멸망

 

니어링 부부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사는 대로 생각했다. 살아가는 그대로가 저항이 되는 삶을 추구했다. 매일매일 사는 모습이 달랐기 때문에 확신이 아니라 모색의 삶이었다. 이들 사상의 핵심은 지속성, 일관성의 부재다. 원칙 없음이 이들의 원칙이었다. 이들은, 지금 우리를 절망케 하는, 기후 위기와 실업을 가져온 발전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들이 강조한 자급자족의 삶은 다른 생계를 위한 귀농이 아니라 한 지역에서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로컬 푸드(local food) 운동이다. 지금 우리의 먹을거리는 칠레, 남아공, 러시아, 중국 혹은 생산 불명지에서 이동한 것이다. 냉장 기술의 발달과 글로벌 자본의 대량 구매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백년 이러한 삶의 결과가 기후 위기, 팬데믹이다.

 

사람들은 ‘반(反)개발주의자’인 내게 묻는다. “발전의 장단점이 있잖습니까. 백신도 나올 것이고….” 장단점은 의미 없는 논의다. 어느 현상이나 양면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류 스스로가 미래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논쟁 능력을 갖추는 일인데, 모두가 전지구적 매체를 통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대로의 삶은 언뜻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생각은 미래와 지향으로 구분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삶을 지향할 수 있다. 무주택, 전기를 덜 쓰는 삶, 육류를 안 먹거나 덜 먹기, 옷가지와 신발을 주워서 재활용, 월급을 물 부족 국가에 기부하기. 모두가 이렇게 살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는 가능하다. ‘마이너스’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대로의 삶은 더 잘 사는, 더 나은 삶이기에 불가능하다. 그런 삶의 목표는 끝이 없다. 니어링 부부의 “생각한 대로의 삶”은 친환경, 전쟁 반대, 자본주의 반대, 평화주의, 채식주의, 함께 나눔으로써 덜어내는 삶이었다.

 

역사는 진보하거나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다. 역사가 시간상 배열이라는 사고, 즉 역사주의는 근대의 산물이다. 생각하는 대로의 삶은, 미래를 상정한 욕망이다. 근본적으로 달성할 수 없으므로 현재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미래를 위한 삶? 투기든 구매든 부동산이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모두가 부동산이 미래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있는 자는 있는 자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부동산에 매달려 현재를 살지 못한다.

 

세상은 급격히 나빠졌다. 이제 우리는 니어링 부부처럼 살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이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한 ‘지나간 미래’(책 제목)다. 생각대로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90점이면 100점을, 세계 10위면 8위를, 100만원이면 200만원을, 책을 두 권 읽으면 더 많이…. 후퇴하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없다. 오늘날 생각하는 대로의 삶은 프랭클린 다이어리처럼 계획이 뚜렷하고, 자기를 발전시키며 정신 차리고 살자는 자기 계발의 의미가 강하다.

 

한국 사회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나’ 그리고 ‘내 인생의 본질’은 대개 직업이나 정체성을 말한다. 교사, 국회의원, 자영업자, 환경미화원, 여성…. 사람의 의미는 이런 개념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 인간은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존재이다. 본질적인 상태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친다. 자기가 누구라는 사실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도 불안해서 다른 사람에게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대답은 한 가지, “왜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니체, 데리다, 버틀러를 ‘잇는’ 현대철학의 가장 큰 성과는 인간의 본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인간은 단지 자기 행위로서 구성 중(in process)인 존재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그 외 생각은 요즘 말로 모두 ‘뇌피셜’이다. 사는 대로 정의하면, 일부 국회의원은 “땅 투기꾼”, 일부 사회운동가는 “횡령범”, 일부 페미니스트는 “난민을 반대하는 사람, 트랜스젠더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이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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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서

그냥 책 2021. 3. 3. 17:00

독서에서 중요한 부분은

 

글의 핵심을 파악하기, 글의 논리구조를 이해하기, 

그리고 글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까지 추론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줄 아는 능력이다.

 

_ <하브루타 독서토론 교과서>에서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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