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공사 현장에 갔다.

 

프리로 일을 하게 되면 비는 시간이 많을 듯하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안정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다 싶지만, 내 안에 자유가 소심한 실험을 하는 듯하다.

자유로이 다양하게 일을 하면서도 책 만드는 이로서 정체성도 이어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이랄까?

 

마침 동네 아는 분이 있어 리모델링하는 건물에서 사흘 정도 일을 하게 됐다.

4층인데 병원이 들어오나 보다. 7~80평은 넘겠지? 겁나 넓음!

주된 일은 내부 전체를 페인트 칠하는 작업인데, 사전 작업이 더 많은 듯하다. 

배치도에 맞춰서 뜯어낼 건 뜯어내고 바닥도 맞추고 기타 등등.

오늘은 벽에 있던 기존 시설들 거의 뜯어내고 페인트 칠을 할 수 있게 마무리하는 일.

 

일단 남은 벽지 뜯어내기, 한쪽 벽면 석고보드 붙이기, 군데군데 망가진 쫄대 다시 붙이기, 벽 아래쪽 걸레받이(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붙이기 정도다. 20대에 3년 정도 공사판에서 했던 일이 스멀스멀 떠오르고 몸이 조금씩 기억을 되살린다. ㅎㅎ 평소 목공 작업하면서 익힌 작업도 있다. 나무 재단, 타카 등등등

 

몽고에서 온 젊은이도 있고, 아마 몽고에서 온 듯한 어르신도 있고. 1시간쯤 일하다 쉬는 패턴이 좀 낯설다. 

넘 자주 쉬어!ㅋㅋ 이 사람들 담배는 징하게 피워 댄다. 나도 옆에서 쪽~ 흡~ 후~ 직접 말아 만든 수제담배!

 

동네 아는 분이 대빵인데, 일당이 얼만지도 안 알려줌! 설마 백지.....?

 

어떤 일을 하든 필드에 있어야겠다. 

그게 편하고 재밌다. 

책 만들기든 시골이든 조직이든 공사판이든 선거판이든 하하하!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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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길을 나서야 할 때가 와 버렸다. 

늘 마음에 담아주고는 있었지만, 막상 곧 길을 나서야 하는 상황이 닥치니 좀 그렇다.

 

어쩌면 다른 길을 찾는 일은 하루하루 허덕이는 이에게는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좌충우돌하며 길을 찾는 이들은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우러러봐야지 않을까...;;

 

여유 있는 이들이 외치는 다른 길은 그래서 가끔은 공허하게 들리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만 했다는 느낌이다. 

나는 여기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싶지만.

 

얼기설기 잡스럽게 얽힌 일들로 허덕이면서도 다른 길을 붙잡으려도 애쓰긴 했지만 보이는 건 여전히 초라해 보이는구나. 바쁜 듯하지만 게으른 탓이 클 테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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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희진 칼럼을 여러 편 읽게 된다. 

나의 지금 상황에도 견줘보게 되고, 읽고 있는 <사이보그가 되다>와도 이어지는 지점이 있는 듯하다. 

새로운 영화와 감독을 알게 해준 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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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 팬데믹과 ‘혼자임’

 

 

인간의 몸은 친밀한 타인 대신

바이러스와 백신이 ‘교류’하는 시대

이 시대 몸들의 연결과 분리는

방역과 개인, 모두에게 어려운 문제

개인성, 혼자임, 외로움이 좌충우돌

“혼자는 너무 적고, 둘은 너무 많은”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

 

내가 자주 이용하는 서울의 어느 지하철역. 나란히 붙은 광고 두 개가 눈에 띈다. 하나는 결혼정보회사의 선전 문구, “결혼이란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것”, 다른 하나는 서울시가 연말연시 5대 행동수칙과 함께 내놓은 포스터,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혼자임’이 좌충우돌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여 산다. 아니라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자연인’의 삶도 사회적이다. 팬데믹 시대, 거리두기는 혼자인 상태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다. 학교, 군대, 감옥, 병원, 직장에서 언제까지, 어디까지 거리두기를 할 것인가. 코스타리카처럼 군대와 감옥은 ‘해방’시킨다 해도, 학교와 병원에서 대면은 필수적이다. 육아는?

 

자본주의의 가속으로 인한 고실업은 근대 초기 제도들의 개념과 기능을 변화시키고 있다. 속도 조절 중일 뿐, 이미 인류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팬데믹은 인간이 아닌, 지구 주도의 재촉이다. 이런 재촉 와중에 저토록 시대착오적인 결혼 개념이라니. 결혼한다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사람은 없다. 타인과 함께든 혼자든, 외롭지 않은 사람도 없다. 더구나 외로움을 피하자고 결혼을? 동성이든 이성이든 결혼 제도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자질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다.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구는 “어느 마스크를 쓰시겠습니까? 남이 씌워줄 땐 늦습니다”와 함께 코로나 공포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혼정보회사의 문구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이 역시, 문제는 조건이다. 적절한 공간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좁은 고시원의 1인 가구나 ‘13평에서 4명’이 아님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구겨 산다’.

 

융합의 발전, 개인에서 몸으로

 

기업의 외로움에서 벗어나자는 광고와 방역을 책임진 지방자치단체의 혼자임에 대한 강조는, 기존 사회의 개념을 새로 쓰고 있다. 팬데믹 시대에는 물리적 모임(gathering)과 공동체(society)의 안전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리의 개념도 세분화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화된 몸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지, 마음의 거리(“마음은 가깝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편, 안 보면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도 현실이다.

 

나는 두치펑(杜琪峰) 감독의 팬인데, 그의 영화에는 자신을 살해하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죽어가는 몸이 자주 나온다. 권투에서 그로기 상태의 선수가 자신을 때리는 상대에게 몸을 맡기는 모습과 비슷하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고 때리는 사람한테도 의존하는 존재다. 의존은 열등한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다. 한자의 ‘사람 인’(人)은 맞대어 의지하는 모습, 인간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서구 철학에서는 상호의존적인 인간 개념이 도출되기까지 200여년 동안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 필요했다.

 

서구 철학에 한정한다면, 인류는 신과 자연이 지배하던 중세를 ‘극복’한 후, 앎을 관장하는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이후 사람 개념의 변화는 해부학에서 사회운동까지 인간 활동의 공로가 크다. 이제 우리는 시공간에 따라 사람의 의미가 다름을 안다. 추상적 의미의 인권에서, 누가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의 권리인가라는 사회적 성원권(membership)으로서 인권 개념은 융합의 성취다.

 

개인의 개념은 프로이트에 의해 확고해졌다.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고통스럽게 독립을 쟁취한 자율성(auto/nomy)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자율성은 스스로 규범을 만든다는 의미다. 반대로 의존은, 연결과 협력과 혼동된 채 열등한 가치로 간주되었다. 우리의 몸은 사회와 타인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음에도 피아(彼我)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는 환상, 영토성(금 긋기 놀이)은 안보 이데올로기의 전제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지만, 여성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후 낸시 초도로 등 여성주의 정신분석학자들이 근대적 남성성을 분석하면서, 인간의 자율성 개념은 이성애자 가족에서 제도화된 모성의 산물, 즉 성별 분업의 결과이지 인간의 보편적 특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자아는 극복되어야 할 개념이다. 즉 “내가 누구다”라는 자의식은 누군가를 부정하거나 외부와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만들어진 문명의 골치 아픈 산물이다. 외로움도 타인과의 비교에서 온다. 안정적인 자아,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인과 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연속적이지도, 일관적이지도 않다. 실존주의, 불교는 말한다. 고통은 ‘내 안의 어린아이’ 때문이 아니다. 세상은 본디 고해(苦海)다.

 

인간이 자연과 동물과 구별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왔던 합리성은 근대성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러나 지구상 곳곳에서 멈추지 않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이성의 예외 상태(광기)가 아니라 권력의 의지로서 이성의 실현이다. 전쟁은 기획된다. 이를테면, 가정폭력, 성폭력 가해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후 여성주의, 현상학, 인류학 등은 인간에 대한 연구 주제를 몸으로 이동시켰다. 모든 개인은 ‘몸’이다. 그 몸은 사회적이다(mindful body, social body). 마음은 몸의 ‘일부’이다. 마음이 몸을 빠져나갈 때, 우리는 죽음을 맞는다. 사회적 몸으로서 인간 개념은 개인과 구조의 이분법을 반박한다. 구조는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만, 개인의 대응은 다를 수 있다. 이 같은 포스트 구조주의는 구조주의도 자유주의도 모두,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융합이다.

 

코로나 시대의 외로움

 

코로나 시대 외로움은 방역 사회와 개인의 대응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과 팬데믹의 지속을 알고 있는 모두의 무기력함 때문이다. 물론 생계 불안도 외로움의 큰 주제다.

 

영어 속담에 “둘은 친구지만, 셋부터는 군중이다(two’s company, three’s a crowd)”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발전(?)한 “혼자는 너무 적고, 둘은 너무 많다”도 있다. 둘의 의미는 다르다. 전자의 둘은 배타적인 파트너로 생각할 수 있지만, 후자의 둘은 피곤한 외부 세계다. 최근 출간된 김혜진의 소설집 <너라는 생활>은 고립된 개인과 그런 개인들이 사회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결된 상황에서, ‘내가 본 너’를 그린다. 내가 본 너는, 나인가 너인가. 도착(倒錯)을 그린 수작이다. 나는 김혜진을 읽고 나만 그런 상태(도착)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받았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시대이다. 이때 ‘개인’은 해방된 자아가 아니라 고립, 주체적 종속 상태다. 지금 우리는 전염병 때문에 이러한 자유마저 공동체를 위해 조절하고 있다. 본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불가능한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정말로 불가능하다. 무의식적으로 부정할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시대 몸은 인간과의 연결이 아니라 바이러스와 백신이 ‘교대’하는 장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와중에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을.

 

2019년 개봉한 폴 슈레이더 감독의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는 환경 파괴로 인한 인류 멸망을 묘사한다. 에스에프(SF)도 아니고 영웅도 없다. 영화평론가 김혜리의 표현대로 “우리는 지구의 수명에 관한 구체적 수치를 받아든 최초의 세대이다”. 몸의 ‘반’은 방역 시스템에 맡기고, 나머지 ‘반’은 혼자임을 감당해야 한다. 항시적 방역이란 이런 상태다.

 

인간은 각기 닿을 수 없는 섬들이지만(독자성), 바닷속에서 보면 연결된 땅이라는 말이 위로를 준 시절이 있었다. 소외, 고립, 심심함, 마음의 허기, 마음 둘 곳 없음? 팬데믹 시대에는 이도 저도 아니다. 나의 혼자임과 외로움이 글로벌 경제와 기후위기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의 ‘대안’은, 자신을 잊는 몰아(沒我)밖에 없다. 쉽지 않다. 그래도 인간이 지구에 지은 죗값을 70억명분의 1로 나눈 것이니,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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