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가 자주 오르내린다. 능력이 있으면 대접해야지, 한 자리 차지해야지 하는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하지만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지 싶다. 그 능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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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에 지금의 '능력 독재'를 정확히 예언하다

 

요즘 한국 사회의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는 '능력주의'다. 촛불항쟁 이후에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당혹스럽게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 논의로 튀고, 조국 법무부장관 논란을 거치며 대학입시제도 중 수시에 대한 불만이 느닷없는 정시 예찬론으로 비화하면서, 능력주의가 현재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떠올랐다. 주간지 특집으로 거듭 등장하는가 하면 믿을만한 저자들의 책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게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국내에서 능력주의를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하면서 새삼 확인된 바는 이것이 지구자본주의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가령 최근에 번역돼 나온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서정아 옮김, 세종서적, 2020, 원제는 "능력주의 함정")은 미국 사회 역시 능력주의의 덫에 걸려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최근작 <공정하다는 착각>(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원제는 "능력 독재")은 어느 한국 필자보다 더 격렬하게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둘러싼 독서 목록의 맨 위에 올라야 하는 책은 따로 있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 자체가 이 책에서 처음 등장했으니, 이 주제에 관해서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만하다. 출간된 지 60년이 넘었는데, 최근 능력주의 논란 속에 우리말로 다시 번역돼 나왔다.

 

오래 전에 나온 저작이라 요즘 상황과는 잘 맞지 않겠지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최근에 나온 어떤 저작보다 더 명료하게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다. 나는 영의 <능력주의>를 읽으며 다른 글들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이 문제의 중요한 측면들을 새롭게 보게 됐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60년 전에 지금의 '능력 독재'를 정확히 예언하다

 

한데 영의 책을 처음 손에 든 독자는 십중팔구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능력주의'란 말을 최초로 소개한 고전이라는 정보 정도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20세기 중반에 쓰인 다른 사회과학 저작들, 가령 C. 라이트 밀즈의 <파워 엘리트>나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비슷한 책을 기대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아니다. 영의 <능력주의>는 '소설'이다!

 

<능력주의>는 영국에서 이 책보다 앞서 나온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년>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1957년에 나온 책인데, 내용은 능력주의 사회가 들어선 지 이미 오래 된 2034년에 마이클 영과 같은 이름을 한 가상의 사회과학자가 1950년대 이후에 능력주의가 발전한 과정을 회고하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 책이 좀 더 많은 독자에게 읽히길 바랐기에 이런 소설 형식을 취했다고 밝힌다. 저자의 이 전략이 통했는지, <능력주의>는 당시에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실제의 2020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이게 도리어 장애물로 다가온다. 화자가 너무 천연덕스럽게 가공의 역사 서술과 사회 분석을 전개해, 도대체 이게 1950년대 말 이후 영국 사회에서 정말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허구인지 헛갈린다. 소설이라기에는 너무 건조하고, 사회과학 저서라기에는 지나치게 상상력이 풍부한 문장들도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를 권하기가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결코 길지 않은 분량의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 시대에 쓰인 어떤 글보다 더 풍성한 교훈과 영감, 논점들을 캐낼 수 있다. 무엇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어떻게 지금 우리 사회가 도달한 지점을 이토록 정확히 예언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이 점에서 <1984년>이나 <멋진 신세계>보다 더 섬뜩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가장 명백하게 들어맞은 예언은 요즘도 능력주의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모든 저작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한, 능력주의와 세습주의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다. 능력주의는 자산과 권력, 명예를 세습하는 구 귀족정을 비판하는 이데올로기로 등장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상당수 젊은이들이 능력주의에 공감하는 것도 마치 이것이 '금수저'들의 세습 질서를 깨고 '공정'을 실현하는 수단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능력주의는 그 신봉자들을 철저히 배신한다.

 

능력주의는 구 귀족정을 타파하는 데 효과적인 무기인 듯 보이지만, 능력주의가 만들어놓는 새 질서는 결국 신 귀족정이다. 왜냐하면 능력이란 항상 학교나 시험 같은 역사적 제도들을 통해 육성되고 검증되는데, 이런 제도들은 늘 기득권층에 의해 또 다른 세습의 통로로 쉽게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승리를 구가하는 초기에는 실제 노동계급이나 하위 중산층의 자제들 중에 계급-계층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한 세대만 지나도 사정은 달라진다. 이미 사다리 위로 올라간 이들의 자녀가 다름 아닌 '능력'이라는 명분 아래 부모의 지위를 물려받게 된다. 능력주의는 어느덧 새로운 세대의 세습주의가 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오늘날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공정'론이 중산층 세습화 현상을 극복하는 데 무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전자는 후자를 지탱해주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능력주의>는 전후 영국 사회에서 아직 능력주의가 대세가 되기도 전에 이를 정확히 예견했다. 다만 <능력주의>가 잘못 짚은 게 있다면, 현실에 등장한 능력주의 사회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사회를 예상했다는 점이다. <능력주의>가 그리는 21세기 사회는 모든 시민에게 '균등급'이라는 이름으로 수당을 지급하며, 일자리가 없는 시민에게는 공공이 나서서 가내 하인 일거리라도 만들어준다. 말하자면 기본소득제와 고용보장제가 실시된다. 게다가 능력주의를 통해 계급-계층 사다리의 맨 위로 올라간 이들이 자산 투기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지도 않는다.

 

<능력주의>가 그린 능력주의 디스토피아는 모종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인 셈이다. 아마도 영은 사회민주주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화한 사회조차 만약 능력주의와 결합된다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이렇게 설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최악의 자본주의가 결합된 사회를 '실제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의 <능력주의>가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니라 유토피아 소설로 보일 지경이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담지자, 지식인-중간층

 

여기까지는 실은 능력주의를 다룬 다른 책들도 흔히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능력주의>는 이 모든 저작들의 맨 앞에 서 있다는 점에서 탁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굳이 21세기에 쓰인 저작들 말고 잘 읽히지도 않는 이 책을 찾아 읽을 이유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한데, 다른 미덕이 있다. 내가 <능력주의>를 읽으면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그 장점이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배양하고 확산시키며 그 승리를 관철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즉, 이 책은 어떤 사회 집단, 사회 세력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담지자인지에 주목한다.

 

물론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에 친화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처음부터 능력주의를 동반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그 내적 필요 때문에 세상에 없던 능력주의를 불러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시킨 것도 아니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와 역사적 계보를 달리 하며, 그래서 자본주의와 때로 충돌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대의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가 그렇듯이 최상의 한 쌍을 이루고야 한다.

 

가령 미국에서는 능력주의가 자본주의와 처음부터 거의 동의어나 마찬가지였지만, 저 늙은 대륙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오랫동안 자본주의와 세습주의가 어울리지 않는 동맹을 이어갔고, 그래서 상당 기간 동안 '세습주의 대 능력주의'의 대립 구도가 진실의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지구자본주의 곳곳에서 대의민주주의와 함께 자본주의에 최적의 상부구조를 제공해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에 뚜렷한 담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자 문학의 맛을 잃지 않으려는 <능력주의>는 그 담지자로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을 지목한다. 저자 마이클 영은 자신을 윌리엄 모리스, G. D. H. 콜, R. H. 토니의 사회주의 계보 위에 올려놓는 반면, 그 반대편에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을 놓는다. 전자는 누구이고, 후자는 누구인가? 전자는 노동계급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 노동계급의 시각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리려 한 이들이다.

 

그럼 후자는? 노동계급을 위한 것은 분명했지만, 노동계급의 시각으로 새 세상을 그리지는 않는 이들이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무계획적인 오합지졸 민주주의는 민주적 귀족주의로 대체돼야 한다. 곧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이해하면서 그 신성한 목표를 향한 질주를 이끌 수 있는 5퍼센트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되어야 한다." (<능력주의> 65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페이비언협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 버나드 쇼의 유명한 말이다. 이 발언에서 너무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쇼는 프롤레타리아 전체가 아니라 "5% 프롤레타리아트"의 시각에서 새로운 사회를 전망했다. 그 '5%'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물론 능력주의다.

 

그리고 영은 이 능력주의를 하나의 간명한 공식으로 정리한다. 그것은 "능력주의 = 지능 + 노력"(<능력주의> 152쪽)이다. 여기에서 '노력'이란 다소 기만적인 항목이다. 진정한 기준은 '지능'이다. 이 점에서 영은 자신이 해부하려 한 이데올로기에 너무도 이데올로기적인 이름을 붙여주고 말았다. '능력주의(meritocracy)'란 '노력'이라는 허깨비 같은 항목을 통해 진실을 가리는 명칭이다. 진짜 이름은 '지능주의'다.

 

<능력주의>에서 '능력 있는 자'는 노골적으로 IQ 테스트를 통해 선발된다. 너무 조야한 체제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껏 존재한 모든 근대적 시험 제도는 이 IQ 테스트의 복잡한 변주일 뿐이다. IQ 테스트를 십수년의 공식 교육 과정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더 세련되게 만들고, 마치 '노력'이라는 변수도 함께 검증되는 양 설계해 정당성을 높인 것일 따름이다. 결국은 '지능'이라는 기준을 통해 선별된 자들이 정한 그 '지능'이라는 기준으로 모든 인간을 분류, 배열하는 체계다.

 

역사상 이 기준을 상대적으로 쉽게 충족시킬 수 있었던 인간 군상을 우리는 '지식인-중간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을 기준으로 유능함을 인정받아온 이들의 역사적 명칭이 그러하기에 '지식인'이며, 바로 그 능력을 통해 사회의 밑바닥에서 맨 위를 향해 상승 운동을 벌이곤 하기에 일단 '중간층'이다. 쇼가 "5% 프롤레타리아"라 하면서 염두에 둔 집단이 이들이며, 실은 쇼 자신이 이들의 일원이다.

 

영의 <능력주의>는 이들 지식인-중간층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확산시키며 그것이 관철된 사회에서 승자가 되는 사회적 주체라 지목한다. 물론 이렇게 분명한 명제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가 등장시키는 이들, 가령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하위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야심찬 자녀들,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대학 졸업장을 따낸 이들을 '일반화'하면, 지식인-중간층 정도로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평등주의가 곧 능력(지능)주의이며, 이들이 마이클 영이 그린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이든 아니면 우리가 실제 사는 우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현존 체제의 중심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때에 능력주의 사회가 열린다.

 

우리의 우주에서는 이들이 <능력주의> 속 가상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말고도 다른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 중에는 토마 피케티가 만들어낸 '브라만 좌파'라는 명칭도 있고, "우리 모두 능력주의자가 되자"고 너무도 적나라하게 외쳐서 마이클 영에게 호통을 들은 토니 블레어 같은 '사회적 리버럴(social liberal)'들도 있다.

 

그럼 마이클 영의 대체 역사물 말고 현실 역사에서 지식인-중간층은 어떻게 새로운 불평등사회의 승자 동맹에 낄 수 있었는가? 한국 사회에서 이들에 해당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또한 능력주의의 담지 세력이 지식인-중간층이라는 사실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지면에 올릴 다음 글에서는 이 물음들에 대해 내 나름의 답을 찾고자 한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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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에서 가져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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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육식

[워커스 사전]

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

 

 

 

“채식주의자는 왜 좌파가 되는가?” 2000년대 초반 독일 대학에서 이런 시험 문제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채식주의가 정치적 담론은 아니었고, 채식하는 사람들의 동기는 건강, 종교, 윤리적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환경운동이 동트기 시작할 때지만 좌파는 파묻히고 있을 때다. 그러니 저 질문은 그 당시로써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은 개인적으로 채식을 시작한 사람들이 좌파가 될 수 있는 가능한 경로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건강한 음식을 찾아 채식을 시작했다고 해도 정작 ‘건강한 음식’이 무엇인지 물어가다 보면 자본주의적 식품생산체제가 근본적으로 건강한 음식을 생산할 수 없게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식품의 여정을 역으로 쫓아가다 보면 채식주의를 결심한 사람은 반자본주의자가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부분의 식품이 동물에 대한 착취, 토지에 대한 착취, 농민에 대한 착취,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끝에 장바구니에 담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채식주의 극우 정치인도 있었고, 채식주의 인종주의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채식을 지향했고, 나치당은 유기농을 장려하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환경보호법을 만들었다. 종종 극우 정치는 녹색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와 결합하기도 한다. 페이스북의 CEO 셰릴 샌드버그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지만, 여성 노동자를 해고할 때는 그 이념을 적용하지 않는다. 반동성애를 표방하는 독일 극우 정당인 아에프데(AfD)의 당수는 레즈비언이다. 세상은 참 복잡하다. 그러니 “채식주의자는 왜 좌파가 되는가?”라는 질문의 반대편에는 “채식주의자는 왜 우파가 되는가?”라는 물음도 성립할 수 있다. 동물착취와 노동착취의 산업체제와 연결하지 않고 채식 자체를 절대선으로 주장하는 채식주의자는 육식주의자를 상대로 문화적·인종적 우위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이들에게 동물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야만인이며, 열등하고, 사악한 인간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절대적 빈곤선에 있는 사람들과 영양결핍 상태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는 음식에 대한 기본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음식을 제대로 먹는 일에는 음식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공간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 제때 제대로 밥을 먹어본 적이 언제인지 모를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채식을 정언명령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위선적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 계급 구조에서 높은 계층의 사람들일수록 에너지 소비와 음식 낭비, 쓰레기 배출량도 더 많다. 비행기를 타고 휴가를 떠나고, SUV승용차를 몰고, 대형마트에서 풍족하게 장을 보는 사람들이 라면이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에게 채식을 권고하는 것. 이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고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파리 민중이 가졌던 것과 같은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올 만하다. 구의역 전철문에 끼여 숨진 김군, 태안 석탄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노동자 김용균의 가방에 들어있던 것이 ‘컵라면’이었다. 컵라면은 가난한 청년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징이다. 아마 햄이 들어간 저렴한 김밥도 자주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정치적 채식주의’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미국에서 시위에 나온 한 실업자가 이런 피켓을 든 것을 봤다. “우리가 라면도 못 먹을 지경이 되면 그땐 부자를 먹을 것이다.” 육식을 넘어 ‘식인’을 말하는 이 ‘야만인’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좌파의 채식주의는 빈자의 채식과 야만인의 채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로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채식 컵라면’ 같은 시장의 경로가 아니라, 보다 정치적인 경로여야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동료 살해’를 금지하는 정치적 규칙을 확장하는 상상 같은 것이다. 고대 폴리스에서 시민의 첫 번째 규칙은 동료 시민을 살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다른 폴리스의 구성원은 살해해도 좋다는 뜻이다. 근대 국가의 법도 마찬가지다. 동료시민을 살해하면 엄벌에 처하지만 전쟁에서 살인자는 호국 영웅으로 대접한다. 평화운동과 인권운동은 이와 같은 ‘국가의 규칙’을 깨트려왔다. 내셔널리즘의 시대에 노동자들은 민족의 국경을 넘어 연대했다. 그런데 왜 비인간동물을 동료 시민으로 대할 수는 없을까. ‘인간-동물’로 취급되었던 노예가 시민이 된 역사가 있었다면, 동물해방의 역사도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만이 아니라 노동자들도 다른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살아가게 만들지만, 노동자들은 그런 착취적 관계를 거부하고, 다르게 관계 맺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안하고 발명해왔다. 만약 우리가 ‘탈육식’을 그와 같은 반자본주의적 실천으로 생각한다면, 인류의 다른 노동자와 연대하듯이 비인간동물-노동자와도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현재의 동물착취는 노동착취의 수단이며 결과다. 동물해방은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농업노동자의 해방 및 시민권의 재구성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기후위기 시대에 탈육식은 핵심 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 축산업은 농업분야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한다. 브라질에는 사람보다 많은 소가 살고 있다. 인구는 2억700만인데, 소는 2억2000만 마리다. 이 소를 브라질 사람들이 다 먹는 것도 아니다. 매년 2000만 톤의 소고기가 수출된다. OECD 회원국의 육류소비를 3분의 1만 줄여도 독일만 한 경작지가 생겨나고 여기서 인간을 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 고기는 숲과 경작지를 집어삼킨다. 지구상의 농지 가운데 4분의 3이 육류생산을 위해 쓰인다. 콩만 단작하는 남미의 대두벨트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합친 면적보다 더 크다. 여기서 생산된 대두의 98%는 사람의 위가 아니라 동물의 사료통으로 들어간다. 유럽은 대두와 육류의 주요 수입국이다. ‘고기’의 대량생산체제를 만든 것은 거대 글로벌 식품기업과 유통업체들이다. JBS라는 세계에서 제일 큰 육류생산 기업이 전 세계에서 거래하는 소고기의 4분의 1을 공급한다. 유럽연합에서 소비하는 고기를 위해 대두를 심는 라틴아메리카 경작지는 영국 면적에 맞먹는다.(1) 생산과 유통을 장악한 기업은 날마다 엄청난 동물을 도살해서 햄버거 패티와 통조림, 프랜차이즈와 패스트푸드에 갈아 넣는 주범이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세계에서 매 맞고 죽임당하는 것은 동물, 여성, 아이들이다. 남성이 노동자나 약자로서 착취의 대상이 될 때 종종 여성, 동물, 아이로 치환된다. ‘두유나 먹는 계집애 같은 놈’이라는 뜻의 ‘소이 보이(soy boy)’란 속어는 육식과 성차별주의의 연관성을 잘 드러낸다. 그것은 반대로 동물-여성-아동의 동물정치적 연결과 연대의 고리이기도 하다.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 시위의 주요 주체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여성, 청소년, 어린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매 맞고 죽임당하는 자’의 공통감각이 그들을 광장으로 불러냈다. 당시 청소년들은 소에게 소를 먹이는 것은 학교가 자신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라고 비난하고, 동물이 처한 지옥 같은 상황을 자신이 처한 입시지옥에 빗댔다. 우리도 머지않아 소처럼 미치게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여성들은 송아지에게 소부산물로 만든 동물사료를 먹이는 것은 ‘자식에게 어미를 먹이는 짓’과 같다고 비판했다. 이런 목소리는 ‘과학적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촛불시위는 이런 중요한 쟁점들이 발아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탈육식 논의와 동물정치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런 언어들을 ‘비언어’와 ‘비논리’라고 생각하는 과학자와 전문가들이 공론장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우병 사태는 ‘안전 담론’과 ‘진실 검증 문제’로 넘어갔다. 하지만 분명 그때 분노한 사람들의 요구는 단지 ‘안전한 고기’와 과학적 진실’만은 아니었다.

그때 더 나아가지 못했던 질문은 보다 급진적인 형태로 돌아온다. 얼마 전 제이슨 무어의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란 책에서 “동물은 노동계급의 일원인가?”라는 질문을 만났다. 이 질문 역시 반대로도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계급은 동물의 일원인가?”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무어는 노동을 ‘생명의 일/에너지’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인간의 경제와 자연의 경제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시킨다. 동물의 노동, 여성의 노동이 없이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지만 동물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처럼 경제에 필수적이면서도 무상으로 전유된다. 그들은 쉼 없이 노동하지만 ‘노동자(Workers)’라고 불리지 않는 존재다. 자본이 전유를 위해 그들의 노동을 임노동체제 바깥에, 다시 말해 ‘자연의 영역’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같은 노동계급의 일원으로 대한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동료 노동자’를 학대하고, 착취하고,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을까.

모든 삶에는 죽음이 있고,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고서 살아간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다. 탈육식은 자연의 이치에 반하는 것일까? 정말로 자연의 이치에 반하는 것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돼지를 도살하고, 죽음을 쓰레기로 만들면서, 하루에 수천수만 마리씩 대량 학살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먹는다는 것은 물질대사를 위해 영양소를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생명과 생명을 나누며 공생하는 일이다. 그 생명의 삶을 자연의 이치에 거슬러 억압하고 착취하는 힘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저항은 개인적 차원의 ‘식품 선호’가 아니라 거대한 착취의 사슬을 끊기 위해 연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동물해방 활동가들은 ‘채식 운동’이 아니라 ‘탈육식 운동’이라고 부른다. 채소를 먹자는 운동이 아니라 육식산업과 동물착취에 저항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식품기업이 제공하는 ‘채식 상품’도 경계해야 한다. 인도의 에코 페미니스트 반다나 시바는 콩고기 같은 ‘가짜 고기’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육식 대체재로 개발 중인 체세포 복제기술을 이용한 ‘클린 미트’나, 메탄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소의 트림을 줄이는 약을 먹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술주의적 해법에는 상품화에는 동반되는 반생태적 위험성이 항상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나이키 운동복이 여성해방을 가져오지 않듯이, 이케아 베지볼과 롯데리아 채식버거도 동물해방에 기여하지 않는다. 채식이 대량생산체제로 들어간다는 것은 저렴한 채식상품을 대량 공급하기 위해 또 다른 생명과 대지와 그들의 노동이 착취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탈육식을 위해선 채식상품의 선택보다 현재와 같은 식품대량생산 체제의 해체와 프랜차이즈 외식산업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유통업체와 홈쇼핑의 대량 판매 방식에 대한 제한, 낭비를 막기 위한 식량에 대한 계획경제, 광고나 먹방에서 끊임없이 송출하는 푸드 포르노에 대한 제재와 여기에 맞선 미학적, 윤리적, 계급적 투쟁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대규모 공장형 축산업이 나타나기 전에, 노동자 민중이 동물과 관계 맺는 방식은 분명 이와 달랐다. 귀족들은 소유하고 먹지만, 돌보고 죽이고 음식으로 만드는 일은 모두 민중의 몫이다. 존 버거의 소설집 《그들의 노동에1- 끈질긴 땅》에는 소와 돼지를 잡는 장면이 나온다. 일 년에 한 번 돼지 잡는 날, 농촌의 일과는 제의처럼 전개된다. 노인은 평생 해온 방식대로 테이블 위에 정해진 자리에 하나도 남김없이 뼈와 살과 내장을 정리한다. 죽은 돼지의 몸에서 버려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가족이 일 년 동안 먹을 양식을 마련해놓고, 노인은 숨을 거둔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이란 소설에서, 마을에서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평생 돼지를 잡아 온 아버지가 죽은 날이다. 이들의 마음에는 더 빨리 죽이고 더 많이 죽여서 더 많은 돈을 벌자는 욕심 같은 것이 들어설 수 없다. 백정이 죽음 앞의 짐승에 대해 지키는 도는 노비를 패 죽이는 양반들보다 더 윤리적이다. 이런 장면들을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다면, 그만둬야 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이해의 기반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장이네 식구들이 무너지는 담장 옆에서 마지막으로 먹던 것도 고기다. 문학 작품 속에서 닭고기, 돼지고기는, 서민들의 애환을 그리며 자주 등장하는 소재지만, 육식을 민중문화로 설명하고 미풍양속으로 그리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현실의 참극을 노스탤지어로 대체할 위험이 있다. 자본주의적 현대 축산업은 존 버거의 작품에 나타나는 그런 인간과 돼지의 관계가 전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먹더라도, 그런 돼지나 그런 닭은 없다. 그러니 고통 속의 존재를 외면하기 위해 자신을 속이지는 않아야겠다. 노예해방, 여성해방, 장애인해방, 노동자해방 등 모든 해방운동의 시작은 지금 여기서 고통받는 존재의 비명이 아니었던가.


[각주]
(1) 카트린 하르트만 지음, 이미옥 옮김. 『위장환경주의 - ‘그린’으로 포장한 기업의 실체』. 에코리브르, 2020. 6장 고기와 피 참고.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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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플라토닉하지는 않다.
둘 중 하나로 가르는 이분법 또한 이상적일 뿐이다.

곁에 누가 있어도 혼자인 듯하고
혼자 있을 때 자꾸 뭘 하려는 모습도
외로움일까?

세월을 먹었음에도 자꾸 흔들린다.
마음이 흔들리는 거겠지.
이미 입은 옷을 다 벗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새 옷 또한 가끔 딱 맞지 않을 때가 있고
옷만으로 나를 데워주진 못한다.

자꾸 혼술 하면 안 되는데...;;
둘 이상 섞는 혼술이어야 할 텐데...;;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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