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런 삶이 실사구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만, 좀더 탐구하고 공부해야 내 언어가 되겠지.
암튼, 요 말이 자꾸 남는다.
"니어링 부부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사는 대로 생각했다. 살아가는 그대로가 저항이 되는 삶을 추구했다. 매일매일 사는 모습이 달랐기 때문에 확신이 아니라 모색의 삶이었다. 이들 사상의 핵심은 지속성, 일관성의 부재다. 원칙 없음이 이들의 원칙이었다. 이들은, 지금 우리를 절망케 하는, 기후 위기와 실업을 가져온 발전주의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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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 니어링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생각대로 사는 삶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
후퇴하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없어
사는 대로 생각하고, 자신을 정의해야
‘생각대로’는 미래형
발전주의적 사고방식
인간과 지구를 망치는 지름길
깊은 밤 라디오 방송, 누군가의 일기, 온라인의 자기만의 방, 멘토의 조언,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의 다짐…. 이런 순간에 자주 만나는 문구가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잠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의 출처는 프랑스의 문학가 폴 부르제(1852~1935)지만, 대개는 영어권의 스콧 니어링(1883~1983)과 헬렌 니어링(1904~1995) 부부로 알고 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반전, 환경주의를 실천했던 니어링 부부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로이자 동경의 생애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백세가 되던 해, 스콧은 생명 연장을 위한 의학적 조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맞았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각을 게을리 말고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살자? 언뜻 “개념 있게 살자”는 뜻으로 들리지만, 생각이 곧 개념은 아니다. 생각보다 존재가 먼저라는 점에서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가장 문제는 매우 위험한 가치관이라는 점이다. 니어링 부부는 이와 정반대로 살았다. 그들의 삶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소름 끼치는 자유”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단어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수호”처럼 기이한 말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지구상에서 이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민주주의는 수호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자유의 의미는 ‘무엇으로부터 자유’(free from what ~ )인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경쟁사회, 소음과 먼지, 신분차별, 타인의 시선, 돈, 피곤한 인간관계로부터의 자유…. 이처럼 자유의 개념은 극복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자유들은 주어지지 않는다. 투쟁으로 쟁취해야 하는 가치다. 대개는 투쟁이 힘들어서 그냥 부자유 상태로 산다.
반면, 개인적 차원의 자유가 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인생이다. 나 역시, 내 맘대로 살고 싶다. 일 안 하고, 여행하고, 은둔하면서 책만 읽고…. 모두 돈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꿈만 꾼다. 소신대로 살기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소신대로 살려면 역설적으로 소신이 없어도 되는 삶, 즉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회적 매장과 노후의 비참 혹은 중대한 상실과 결핍을 극복하면서까지 소신을 내거는 이들은 드물다. 소신(발언)은 잃을 것이 많지 않은 중산층의 관념이다.
니어링 부부에게 영향을 준 랠프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소름 끼치는 자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아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생각의 자유’는 희망, 욕망, 망상이든 비현실의 연속선을 이루면서,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정말 소름 끼치는 현실! 에머슨이 살았던 시대와 달리, 당대는 “소름 끼치는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인프라마저 생겼다. 온라인이 그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표현, 형상화되기 전까지는 한계가 없다. 개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무정형의 한없는 작용일 뿐이다. “당신 생각은 자유”, “네 맘대로 생각하세요”가 조롱인 이유다. 생각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와 다르다. 생각의 자유는 권리가 아니다.(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자유일 때만 성립하며, 혐오는 사상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산다. 인간사는 협력, 의존, 공조로 가능한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원하는 “내 맘대로”는 고립일 뿐이다. 타인과 ‘나’ 사이를 조율하는 일이, 인생고다. 인내심, 성숙함, 타인을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존재 때문이다. 나만의 자유, 나만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가능한 이들이 있다면 신, 조물주, 게임 속의 가상의 왕이다. 많은 이들이 니어링 부부가 자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신이나 조물주가 아니라 농부로 살았다.
생각대로의 삶은, 멸망
니어링 부부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사는 대로 생각했다. 살아가는 그대로가 저항이 되는 삶을 추구했다. 매일매일 사는 모습이 달랐기 때문에 확신이 아니라 모색의 삶이었다. 이들 사상의 핵심은 지속성, 일관성의 부재다. 원칙 없음이 이들의 원칙이었다. 이들은, 지금 우리를 절망케 하는, 기후 위기와 실업을 가져온 발전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들이 강조한 자급자족의 삶은 다른 생계를 위한 귀농이 아니라 한 지역에서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로컬 푸드(local food) 운동이다. 지금 우리의 먹을거리는 칠레, 남아공, 러시아, 중국 혹은 생산 불명지에서 이동한 것이다. 냉장 기술의 발달과 글로벌 자본의 대량 구매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백년 이러한 삶의 결과가 기후 위기, 팬데믹이다.
사람들은 ‘반(反)개발주의자’인 내게 묻는다. “발전의 장단점이 있잖습니까. 백신도 나올 것이고….” 장단점은 의미 없는 논의다. 어느 현상이나 양면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류 스스로가 미래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논쟁 능력을 갖추는 일인데, 모두가 전지구적 매체를 통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대로의 삶은 언뜻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생각은 미래와 지향으로 구분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삶을 지향할 수 있다. 무주택, 전기를 덜 쓰는 삶, 육류를 안 먹거나 덜 먹기, 옷가지와 신발을 주워서 재활용, 월급을 물 부족 국가에 기부하기. 모두가 이렇게 살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는 가능하다. ‘마이너스’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대로의 삶은 더 잘 사는, 더 나은 삶이기에 불가능하다. 그런 삶의 목표는 끝이 없다. 니어링 부부의 “생각한 대로의 삶”은 친환경, 전쟁 반대, 자본주의 반대, 평화주의, 채식주의, 함께 나눔으로써 덜어내는 삶이었다.
역사는 진보하거나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다. 역사가 시간상 배열이라는 사고, 즉 역사주의는 근대의 산물이다. 생각하는 대로의 삶은, 미래를 상정한 욕망이다. 근본적으로 달성할 수 없으므로 현재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미래를 위한 삶? 투기든 구매든 부동산이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모두가 부동산이 미래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있는 자는 있는 자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부동산에 매달려 현재를 살지 못한다.
세상은 급격히 나빠졌다. 이제 우리는 니어링 부부처럼 살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이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한 ‘지나간 미래’(책 제목)다. 생각대로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90점이면 100점을, 세계 10위면 8위를, 100만원이면 200만원을, 책을 두 권 읽으면 더 많이…. 후퇴하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없다. 오늘날 생각하는 대로의 삶은 프랭클린 다이어리처럼 계획이 뚜렷하고, 자기를 발전시키며 정신 차리고 살자는 자기 계발의 의미가 강하다.
한국 사회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나’ 그리고 ‘내 인생의 본질’은 대개 직업이나 정체성을 말한다. 교사, 국회의원, 자영업자, 환경미화원, 여성…. 사람의 의미는 이런 개념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 인간은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존재이다. 본질적인 상태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친다. 자기가 누구라는 사실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도 불안해서 다른 사람에게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대답은 한 가지, “왜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니체, 데리다, 버틀러를 ‘잇는’ 현대철학의 가장 큰 성과는 인간의 본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인간은 단지 자기 행위로서 구성 중(in process)인 존재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그 외 생각은 요즘 말로 모두 ‘뇌피셜’이다. 사는 대로 정의하면, 일부 국회의원은 “땅 투기꾼”, 일부 사회운동가는 “횡령범”, 일부 페미니스트는 “난민을 반대하는 사람, 트랜스젠더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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