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홍성에 다녀왔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소식지에 실을 '귀농탐방'을 위해 그리고 홍성씨앗도서관 취재를 위해. 홍성에서 귀농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장곡면과 홍동면을 느긋하게 둘러보고 왔다.

귀농탐방을 위해 장곡면으로 2007년쯤 이사와서 농사짓고 사는 분(녹색당원이기도 하다)을 인터뷰하고, 돌아와서 이분 관련 글을 찾아보고, 운영하시는 블로그 글을 뒤적거리다 권정생 선생님 글을 만나서 반가웠다. 반가운 마음에 퍼오고 말았네!^^

이틀 동안 장곡면에서 홍동면까지 가는 큰 길을 3~40분 정도 걸어서 왔고, 동네 이곳저곳 들판을 거닐고, 홍동에서는 마을활력소,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씨앗도서관, 밝맑도서관, 느티나무헌책방, 마을 생협(빵집이기도 함), ㅋㅋ만화방, 동네 밥집, 술집 들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마을이 되기까지 과정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지는 않고 그저 둘러보기만 했다. 그건 좀 아쉬웠다. 씨앗도서관 인터뷰는 했지만. 조만간 남원 산내면에 가게 되면 이곳 마을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묻고 듣고 해야겠다.   

(소식지 원고는 안 쓰고 잠깐 이렇게 딴짓을...)

------

(여기서부터 권정생 선생 글)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부들은 다음해 농사지을 씨앗을 갈무리해야 한다. 

나락씨는 봉태기에 담아 시렁에 얹어두고 조와 수수는 이삭째 엮어 방 안 보꾹에 매달아 놓는다. 참깨씨, 팥씨, 녹두씨 같은 자잘한 것은 무명주머니에 담아 역시 보꾹 서까래에 달아 놓는다. 

목화씨는 박두구미에 담아 바깥 처마 밑에 매달아두고 삼(대마초)는 촘촘하게 엮은 짚오쟁이에 담아 역시 서까래에 매단다. 어떻게 해서라도 쥐한테 먹히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해 씨앗이 썩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감자씨와 토란씨는 무를 묻은 땅 속에 함께 묻어놓는다. 

농부가 여름에 농사를 지어 추수를 끝냈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다. 다음해에 또 심고 가꿀 씨앗까지 갈무리를 하고 난 다음에야 마음놓고 겨울을 난다. 

우리 인간들이 남자 여자 서로 만나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라 가정을 이루어 손자를 보고 나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제야 대를 이을 후손이 생긴 것에 마음놓고 죽는다. 

우리집 마당가 은행나무엔 지난 겨울 까치가 집을 지었다. 2월 한 달 동안 조금씩 조금씩 나뭇가지를 물어다 쌓아가더니 6월에야 새끼 한 쌍을 키워 떠나보냈다. 

이땅 위에 살아 있는 목숨은 이렇게 하나같이 자손을 낳아 키우며 퍼뜨린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정작 수박농사 짓던 농부들은, 그런 다음해 수박농사를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한편으론 무슨 요술 같은 수박을 만들겠나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씨 없는 수박은 소문만 떠돌았지 그 시절 사람들은 구경조차 못 했다. 그런데 이제는 씨 없는 것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도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농부들은 해마다 씨앗을 그냥 사다 쓰면 된다. 씨앗은 종묘사에서 팔고 집에서 애지중지 보관하는 농부는 아무도 없다. 아예 씨앗을 보관했다가 심는 것을 잊어버렸다. 

<문학동네> 지난 여름호에서 김진경 선생은 콩씨를 심었더니 싹이 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내 경험은 조금 다르다. 

몇 해 전에 어째서 씨앗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지 궁금해서 그해 말린 고추에서 씨앗을 받아뒀다가 다음해 텃밭에다 직접 심어보았다. 

씨앗은 싹이 트더니 아무 탈 없이 자랐다. 가지가 뻗어나가고 꽃이 한두 개쯤 필 때까지는 정상으로 자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하게 문제가 생겼다. 종묘사에서 사다 심은 것과 비교해보니 사다 심은 고추 포기엔 마디마디 고추가 열리는데, 내가 직접 받아 심은 것은 두세 마디씩 건너 띄엄띄엄 열리는 게 영 시원치 않았다. 고추 열매의 크기는 별로 다르지 않고 고추 맛도 괜찮은데 도무지 열매가 달리지 않는 것이다. 거름을 아무리 줘도 가지만 무성하지 꽃이 안 핀다. 결국 종묘사에서 사다 심은 고추에 비해 십분의 일도 열리지 않았다. 

왜 이런 걸까? 이것이 바로 씨앗 장수들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땅호박이라고 하는 채소용 호박은 직접 열매에서 씨앗을 받아 심으면 잎만 무성하지 아예 열매는 맺지도 않았다. 참으로 요술 같은 세상이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원은 매점매석으로 돈을 벌어들였다지만 첨단과학시대는 더욱 지능적이다. 

이젠 농민들은 이런 지독한 장사꾼들에게 꼼짝없이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다. 농민들은 해마다 각종 농약에 비료에다 비닐 같은 농자재와 씨앗까지 모든 걸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며칠 전엔 우리 마을에서는 새 고추건조기를 주문하라고 이장님이 마을 스피커를 통해 알려주었다. 얼마 안 있으면 양파씨에 겨울을 나는 비닐하우스 감을 사라고 할 것이다. 1월이면 고추씨 장수가 오고 이어서 각종 채소와 참외, 수박씨 장수가 온다. 돈 쓸 데가 끝이 없다. 

중간 고샅집 윤씨 어르신네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 혼자 계시는 집에 가봤더니 할머니가 그러신다. 

"저것 봐, 영감이 죽으면서 남긴 거야." 

마당가 둘레엔 경운기를 비롯해서 고추건조기, 관리기, 이앙기, 이런저런 농기계들이 널려 있고 모두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옛날 소작농사를 지을 때는 가을이면 타작마당에서 양쪽에 가마니를 놓고 곡식을 나누었다. 먼저 땅주인 쪽 가마니에 한 말 붓고 다음엔 소작인집 가마니에 한 말 부었다. 그럿게 번갈아 한 말씩 한 말씩 똑같이 나누었다. 

그런데 타작마당에는 으레 북데기라고 해서 찌꺼기 곡식이 남는다. 좀 욕심 많은 땅주인은 그 찌꺼기 곡식마저 정확히 나누어 가졌다. 

나는 어린 시절 보아온 소작농사의 조건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땅임자니까 반을 가져가는 것이 꼭 나쁘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땅임자는 빌려준 것이니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했지 다른 나쁜 감정은 없었다. 다만 가을이면 힘들여 거둔 곡식을 반씩이나 주어버리는 게 아깝고 섭섭하다는 마음은 들었다. 부모님들도 언제나 우리 땅에서 온근농사를 지어보고 싶어하셨지만 역시 땅주인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지금은 이 소작농사가 도지(도조)라고 해서 몇 년씩 임대료를 내고 있다. 사용료는 그다지 비싸지 않다. 비교적 좋은 땅이라도 일 년에 이백 평당 십 만원이 조금 넘는다. 그래서 남의 땅이라도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게 빌려 쓰고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옛날에는 농사가 식량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돈을 얻기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한두 가지 작물에 집중되어 오곡농사라는 게 없어졌다. 이곳 안동 지방에서는 고추농사와 양파농사가 주된 농사다. 

그러니 심으면서 값을 먼저 계산하게 된다.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도 값이 폭락하니 그것도 걱정이다. 사람 살아가는 데 걱정 없는 곳이 어디 있겠냐만 농산물을 거두어 값이 어떻게 되나 걱정부터 하는 건 옛날에는 없었다. 그냥 풍년만을 들면 즐거웠다. 그런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농사꾼도 장사꾼이 되어버렸다. 

돈을 계산하게 되면 밑지는지 남는지 따지게 된다. 좀더 남기기 위해서는 깍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장사꾼 속이는 건 하늘도 눈감아준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지금 농사꾼이 허생원처럼 매점을 하거나 매석을 하는 직업 장사꾼이란 건 아니다. 농사꾼은 어떻게 해서라도 소비자가 좋아하는 농산물을 생산해내는 것이 목적이다. 사먹어주지 않으면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사꾼은 소비자라는 또다른 상전을 모시게 되었다. 

언젠가 북한에서 양계장을 닭공장이라 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닭공장이란 말이 솔직할지는 모르지만 우리네 정서에는 아무래도 살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농촌의 모드든 것이 공장이 되어버렸다. 

아랫마을 김씨가 처음 제초제를 쳤을 때 풀이니 벌레니 모조리 죽어가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제는 면역이 생겨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 농촌의 중심이 이렇게 변한 것도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세상에 착한 사람이 별로 없다. 착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진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먹어라, 입어라, 마셔라, 신어라, 발라라.....이렇게 돈 쓰게 하는 광고 천지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어찌 보면 강요하다 못해 협박을 하는 듯도 하다. 마치 그렇게 안 하면 좋지 못할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요즘 시골 버스를 타보면 아주 깨끗해졌다. 시골 사람들도 옷차림이 말쑥하게 세련되어졌다. 겉모습만으로는 잘사는 선진국처럼 따라가고 있다. 

시골 사람도 고무신 신은 사람은 없다. 깨끗한 구두에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짧은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를 하나같이 짧게 파마를 했다. 남자들도 여느 도시의 신사처럼 차림새가 깨끗하다. 

전에는 신문지를 오려 뒤를 닦는 것도 황송했는데 이제는 부드러운 두루마리 화장지가 익숙해졌다. 텔레비전도 작은 것은 답답해서 못 보겠다고 일흔 살이 넘은 큰대추나무집 할머니도 대형 텔레비전으로 바꿨다. 텔레비전에서 선전하는 대로 모두 잘 따라 살고 있다. 

마을 집들도 깨끗해지고 골목길도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집집마다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뺍자구라고 하는 질경이풀이 돋아나고 봄이면 민들레가 노랗게 피던 고샅길도 모두 사라졌다. 시멘트에 뒤덮인 속에서 모두 질식해 죽었을 테고, 거기다 빈틈이 있는 곳에 풀이 돋아나면 여지없이 제초제를 쳐버린다. 제초제는 집 안 마당에도 어디에도 뿌려대어 아예 상비약처럼 되어버렸다. 

수돗물이 들어오고 나서 집 안에 목욕실이 생기고 세탁기도 생겼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편리해졌고 풍요로워졌다. 

이런 것을 아랫마을 손씨가 우리집까지 목욕을 하러 왔다. 우리집엔 따로 목욕실이 없어 마당가 수돗물로 몸을 씻었다. 손씨는 아랫마을에 수도관이 고장나서 수리를 하느라 모든 집에 물이 나오지 않아 우리집으로 왔다고 했다. 들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일을 하고 왔는데 씻을 물이 없으니 답답했을 게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농촌의 개울물이 몸을 씻을 만큼 깨끗한 곳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집 안이 깨끗해진들 개울물이 시궁창처럼 더럽다면 그게 어떻게 농촌이 되겠는가. 참으로 모순된 삶이 오늘의 농촌인 것이다. 

유리알처럼 맑았던 시냇물은 이젠 아무 데도 없다. 

우리가 걱정하는 씨앗 문제는 한 부분일 뿐이다. 아이엠에프(IMF) 당시 우리 종묘회사가 모두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고 걱정을 했다. 우리 농민의 삶의 일부가 외국 자본에 예속된 것이다.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우리 농촌의 주체적 삶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옛날엔 농민이란 말을 안 쓰고 '여름지기'라고 했다.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열매는 모든 목숨이 먹어야 살 수 있는 귀한 생명의 씨앗이다. 밥이 하늘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 있었을 게다. 하늘이란 말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우리 농민들이 수백년, 수천년 동안 그토록 알뜰살뜰 보관했던 우리 토종 씨앗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렸지만 지금이라도 제자리를 찾았으면 한다. 

토종 씨앗은 오랜 세월 우리 기후와 토질에 맞게 진화되어 웬만한 질병에도 면역이 생겨 있다. 그래서 농약이 없어도 깨끗하게 자라 열매를 맺어 탈없이 먹고 살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토종 씨앗 이름들을 적어보면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돼지나락, 까투리나락, 쌍두배나락, 오두바리수수, 눈까막이수수, 개파리콩, 어금니콩, 게발차조, 개똥차조, 물푸레차조, 오누이강냉이, 모두 정답다. 

감자는 자주감자, 흰감자, 분홍감자 세 가지가 있었다. 돌아가신 박실 어르신네는 자주감자를 자지감자라 하고 분홍감자를 보지감자라 했다. 

"야아들아, 자지감자캉 보지감자캉 한데 두지 마라. 바람피운다." 

그렇게 한바탕 웃었다. 

이렇게 우리 토종 씨앗엔 웃음이 있고 시(詩)가 있고 동화가 담겨 있었다. 

우리 씨앗을 잃어버리면 우리 혼도 함께 잃어버릴 것이다.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권정생. 

1937년 일본 도쿄 출생. 1969년 기독교아동문학상에 동화 <강아지 똥>이,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 한국아동문학상 수상. 동화<강아지 똥><사과나무밭 달님><몽실 언니><바닷가 아이들><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먹구렁이 기차><밥데기 죽데기> 등과, 수필집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시집<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등이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