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장했는가? 하고 있는가?

머물렀는가? 성장을 회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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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장을 북돋는 공적 공간

김찬호

 

“낮은 기대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는 없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때까지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스티븐 리츠 [식물의 힘] 중에서 -

 

몇 해 전에 포항의 지진으로 수능이 갑자기 일주일 연기되었을 때, 수험생들이 시험을 하루 앞두고 내다버렸던 교과서와 참고서들을 부랴부랴 다시 찾는 장면이 보도된 적이 있다. 지긋지긋한 학생(더 정확하게는 수험생) 신분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려는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확인시켜준 일이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애쓴 시간이 혐오스러워 지워버리고만 싶은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지만, 그 시간을 생애의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학창 시절의 낭만적 추억이라는 것도 옛날이야기가 되어가는 듯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연기된 15일 오후 한 입시학원에서 학생들이 버렸던 수험서적을 찾기 위해
책더미를 뒤지고 있다. (출처:동아일보 2017.11.16_기사_‘포항지진에 수능 연기’ 학생들)

 

거기에 맞물려, 졸업 이전에 학교를 떠나거나 아예 거부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른 바 ‘탈(脫)학교’ 또는 ‘학업 중단’인데, 가정환경으로 인해 삶이 무너지다시피 해서 학교에서 방출되는 경우도 있고, 학교 교육의 경쟁과 통제를 견디지 못해 적극적으로 새로운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공부 자체를 그만둔 것이 아니기에 ‘학업 중단’이라는 개념에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공교육 내지 제도권 바깥에서 자기 나름의 학습과 성장을 모색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학교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 의식이 깔려있고, 일찍이 이반 일리치가 말한 ‘deschooling'이라는 개념이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아시아경제 2018.10.06_기사_‘10대 문제, 알고 계신가요’)

 

어떤 맥락에서 문제가 제기되는가. 고도성장기에는 학교에서 직업 세계로의 이행(school to work transition)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래서 학교 시스템에서 성실하게 학업을 이수하면 고졸 학력으로도 웬만한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IMF 금융 위기 이후 저성장 경제가 지속되고 기술 혁명으로 일자리 자체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그 경로가 뒤틀리고 곳곳에 균열이 일어난다. 우수한 스펙을 갖고서도 노동 시장으로 진입하는 과정이 너무 버겁고, 고달픈 취준생으로 오랜 시간 삶을 유예 당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취업 한 이후에도 계속 불안정한 신분에 머물거나 정규직이라 해도 미래가 불안해서 이직을 꿈꾸는 경우가 늘어난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노동 시장이 성인기로 이행하는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경로였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것이 유일한 경로로 자리 잡은 것은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체제 때문이었다. 인류사 대부분의 시기에 노동은 생활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고, 그것은 사회라는 커다란 틀 속에 담겨 있었다. 거기에서 성인기로의 이행은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그러다가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어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고 생계의 수단을 노동 시장에서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취직은 성인의 자립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수축기에 들어선 지금, 그러한 모델은 점점 작동하기 어려워진다.

 

지금 경제의 변동에는 ‘경제외적’ 변수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데 예를 들어 <환경 문제>를 들 수 있고, <사회>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점점 더 많은 요소들이 얽혀 돌아가는 것이다. 예전에는 오로지 시장만 분석하면 대개 예측되고 설명되었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 사회의 동향이나 집단 심리의 영향력이 커진다.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개인의 생애 설계에서도 얼개가 점점 복잡해진다. 웬만한 직장에 입사하면 이후 인생이 비교적 평탄했던 시절은 지나갔다.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업무가 단순하지 않다. 커뮤니케이션, 문제 해결 역량, 창의성 등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고 시험에서도 거의 측정되지 않은 ‘비인지 능력’이 강조된다. 수험 공부에는 초인적인 실력을 입증했지만 기본적인 일머리가 갖춰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난다.

 

생애의 회로가 복잡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위에서 언급한바 저성장과 기술혁명에서 비롯되는 ‘탈고용 사회’로 바뀐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성인기로 이행하는 경로는 학교-직업세계라는 단선적 구조에 계속 묶여 있을 수 없다. 노동 세계에서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해도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면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생활을 넘어서고 노동 세계와도 구별되는 공적 영역이 다양하게 열려야 한다. 외형적인 것으로 등급이 매겨지지 않고 한 인간으로 환대받는 경험, 안전한 공간에서 타인과 유대를 맺어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존귀함을 자각할 수 있다. 오디세이학교 등 대안학교 내지 전환학교는 바로 거기에 힘을 쏟는다.

 

오디세이학교를 다니면서 뭐가 제일 좋은지를 묻자 한 학생이 답했다. (...) 그동안의 학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고. “왜”냐고 묻는 행위는 대드는 것, 버릇없는 것, 되바라진 것, 당돌한 것으로 취급되어 질문을 거세당하는 경험만 하다 이곳에서 들은 “넌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은 신선했다. 존중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고도 했다. 오디세이학교에서 제일 힘든 점은 무엇이었는지 묻자 학생은 같은 답을 내놓았다. “제 생각이 뭐냐고 묻는 거요” 어떤 사안에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덧붙여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피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고.- 장희숙 [학교의 안과 밖]“넌 어떻게 생각해?” [경향신문] 2018.11.05 -

 

 

청(소)년들이 온전하게 성장하려면 자신을 온 마음으로 존중해주는 타인, 가슴을 열고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생각만이 아니라 감정도 표출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매력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격려와 지지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만남이 절실하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상호작용과 지적 교섭이 일어나는 가운데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주체적으로 관계를 열고 사회를 창조해나가는 힘을 자각할 수 있다. 세상은 전쟁터가 아니라 나의 존재가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더불어 좋은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 내지 이웃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그 자체를 자기만의 촉수로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경험이 이뤄질 수 있을까. 기존의 학교 교육의 방식을 넘어서면 여러 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김선호 교사가 소개하는 사례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학급 단위로 인솔해서 어딘가에 견학하러 나가면 몇몇 아이들이 엉뚱한 샛길로 빠져 골치를 썩이는데, 교사들은 그때 마다 꾸중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큰 잘못인가 하고 김선호 교사는 자문한다. 미지의 길로 발걸음을 내미는 호기심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소규모 테마형 현장 학습체험이라 해도 스무 명 이상의 아이를 교사 혼자 감당해야 하는 지금의 학교 시스템에서는 방법이 없다.

 

김선호 교사는 스카우트 활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거기에서는 5~6인의 아이들이 한 모둠이 되어 지도 한 장과 함께 열 가지 정도의 미션을 부여받는다. 예를 들어 안중근 기획전에 가서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우다’라는 뜻의 한자를 적어온다거나, 외국인에게 한국에 관한 주어진 질문들을 던져 답을 받아오는 것 등이다. 아이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정해진 지역을 찾아가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 명예 교사인 학부모가 한 명씩 배정되어 안전을 감시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대원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에서 뒤따라간다는 것이다. 엉뚱한 길에 들어서도 절대로 관여하지 않고, 위험해 보일 때만 개입한다. 아이들은 최소한의 간섭 속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지는 활동을 경험하면 만족도가 높고 미션을 완수하지 못해도 깊은 성취감을 느낀다고 한다.김선호 [초등직관수업](항해. 2018) 112~113쪽

 

(출처 : 뉴스에듀 2019.02.21_기사 ‘한국스카우트연맹, 이사회 개최’)

 

교사와 부모가 파트너가 되어 안전함을 지켜주는 가운데 학교 밖 공간을 탐사하는 아이들은 불확실성을 다루는 기법을 체득한다. 시행착오가 학습의 일부임을 배우면서, 우연과 돌발 상황에 대해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혼돈을 겪고 미로를 헤매는 자신을 긍정하고, 좌충우돌해도 세상이 자기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긴다. 실패에 대한 내성과 회복력이 자라나는 것이다. 도태에 대한 공포심이 만연한 시대에 아이들이 사회와 다양하게 접속하는 경험은 존재의 안정감을 심어주고 세상과 타인에 대한 신뢰의 싹을 틔운다.

 

세상과 자기를 새롭게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현장으로 도서관도 들 수 있다. 가난과 범죄와 인종차별을 겪으며 성장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당신이 남긴 증오]의 작가 엔지 토마스는 도서관을 처음 접한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린다. “6살 때, 공원에서 두 명의 마약상이 총격전을 벌이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서부영화 속 장면 같았죠. 다음 날 엄마가 저를 도서관에 데려가셨어요. 그날 눈앞에서 본 것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죠.”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대출하거나 독서하는 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준비하는 모태라고 작가의 어머니는 생각한 것이다.

 

(출처: 한겨레 2006.10.15. 기사 -‘두려움 컸죠 모험하는게 아닐까?변화요?…’)

 

더 나아가 도서관을 통해서 의외의 만남과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용인의 느티나무도서관은 지역사회와 긴밀한 연계 속에서 탄생하고 운영되는데, 특히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와 집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지적 성장을 경험한다. 박영숙 관장은 [꿈꿀 권리]라는 저서에서 여러 가지 일화들을 전해주는데, 책의 부제가 ‘어떻게 나같은 놈한테 책을 주냐고’로 되었다. 그 말을 한 아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했다가 이 도서관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종 도서관의 창문을 깨고 들어와 물건을 훔쳐다가 파는 등 계속 사고를 쳤다. 하지만 관장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품어주었고, 책을 함께 읽자고 권유도 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지내다가 청년이 된 이후에 이렇게 글을 썼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못 믿었어요. 이 사람이 도대체 아무것도 아닌 나한테 왜 이렇게 자상하게 굴지? 왜 이렇게 나한테 착하게 대해 주지? 그런 생각들만 들다가 하루 일 년 이 년 지나다 보니 진심이라는 걸 알겠더라구요

정성원 ‘도서관 문화 :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 평생학습웹진 [와] 2014. 7

 

타인에 대한 신뢰는 일상의 존립 기반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도 스스로를 사회에서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창조해갈 수 있는 바탕이다. 그것은 또한 사회 자체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토대가 된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가꾸는 데 소홀했고, 성장 기조가 급격하게 둔화되면서 그나마 있었던 사회자본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교육은 그 부정적 결과가 집약되어 드러나는 영역이면서, 동시에 사회 자본의 복구에 힘을 쏟아야 하는 소임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학교의 몫이지만, 교사들이 오롯이 떠맡기에는 너무 버거운 과제다. 학교의 안과 밖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어야 한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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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

카테고리 없음 2019. 5. 29. 11:12

집에 오자마자 대충 정리하고, 냥이들 똥 치우고 밥 주고

저녁밥 먹을 준비해서 먹고...

다시 설거지하고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면 깊은 밤.

 

내 일은, 책 볼 시간은, 뭘 만들어 볼 시간은

없다.

살림에서 시작과 끝은 없다!

불가피한 일이라고?

 

대체 왜 잔고 마이너스는 좀처럼 줄지 않을까?

어디에 쓰기에

뭐에 빠져 나가기에

맘잡고 조사하기도 귀찮다.

조사하고 쳐내고 하면 불가피하지 않으려나?

 

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생계와 살림과 데이트와 토론과 제2의 삶 준비와

몸이 삐거덕거리는 걸 불가피한 과도기인가?

이 나이에도 하고 싶은 일만 많고 길을 찾지 못하다니...

 

까먹은 일정이 비집고 오니

갑작스레 데이트 일정에 혼란이.

숨고르고 

정돈된 그러나 단호한 언어로

무릎꿇고 미뤘어야 하나?

 

둘다 잡으면 불가피하게 파국이 와

젠장.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바에는...

고래 없이가 불가피해?

마음은 불가피하지 않은데??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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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겨보는 편인 '김종철 칼럼'

어쩌면 우리는 이상한 안경을 쓴 채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착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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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이 세계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인류사회의 최대 현안은, 말할 것도 없이, 기후변화 문제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반도 비핵화를 어떻게 풀어나갈지가 큰 숙제이지만, 한반도나 동북아시아도 지구사회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설령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기후변화라는 총체적인 파국이 덮치면 그 평화도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여러 자리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우리에게는 절실한 현안이지만, 세계 전체로 보면 녹색화가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과제다. 한반도 녹색화라는 대명제하에서 비핵화를 추진할 때라야만 비핵화도 의미가 있다. 또 그럴 경우에만 한반도 문제에는 무관심하지만 지구환경 문제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진 많은 외국인들을 우리의 우군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예외가 없진 않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하다. 기성세대일수록 고령층일수록 그렇다.

 

한국인들이 미세먼지 외에 기후변화를 비롯한 토양오염과 사막화, 허다한 생물종의 사멸, 죽어가는 해양 생태계 등등, 보다 근본적인 환경위기에 대한 의식이 약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먹고살기 바빠서일까? 그러나 비교적 여유가 있는 생활인이나 지식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그것으로는 만족스럽게 설명이 안 된다. 따져보면, 오늘날 한국은 세계의 손꼽히는 부국 중 하나이다. 국토나 인구로는 큰 나라가 아니지만 남한의 원유 수입량은 세계 7위인데다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독일이나 일본을 훨씬 능가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환경위기에 소극적인 것은 어째서일까?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언론에 있음이 분명하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내게는 언론 지면을 들여다보는 게 갈수록 공허하게 느껴진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의 언론 지면은 정치권의 유치한 말싸움, 유명인사나 ‘스타들’에 얽힌 가십성 기사, 사회적 부조리나 불의에 대한 단세포적 고발과 폭로, 너절한 해외여행담, 상투적인 ‘위로’와 ‘힐링’ 등등, 시시한 잡담으로 늘 넘쳐난다. 한국의 언론만 보고 있으면 지금 세계가 얼마나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 인류문명이 어떻게 붕괴 직전까지 왔는지 거의 알 수 없게 돼 있다.

 

그러나 언론보다 더 크고 직접적인 책임이 정치가들에게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오랫동안 거짓과 위선의 정치에 치를 떨면서 상식과 이성을 존중하는 ‘민주정부’의 등장을 학수고대하며 살았다. 과연 기대한 대로 집권 초기에 문재인 정부는 매우 합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원전 문제를 ‘공론조사’를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 등은 국민주권의 원칙에 충실한 자세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재인 정부의 열성적인 노력이었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그 평화구축 과정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초기의 압도적인 지지율이 급격히 가라앉는 분위기에서 다시 기세가 살아난 수구파 정치세력의 무차별적 사보타주로 국회가 기능부전에 빠져 있는 동안, 문재인 정부는 어딘가 나침반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노정하기 시작했다. 하기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제1야당의 시대착오적 행태가 고쳐지지 않는 한 문재인 정부의 개혁 노력이 ―그게 무엇이든―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막연히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마치 자신들을 구해줄 ‘야만인들’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던 멸망 직전의 로마인들처럼?

 

하기는 오늘날 정치가 문제 해결의 열쇠이기는커녕, 정치 그 자체가 가장 골치 아픈 문젯거리가 되어 있는 현상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아마도 선거로 정치가들을 뽑는 거의 모든 나라의 정치가 기본적으로는 이렇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치가들이 임기 내내 하는 일이란 다음 선거에서 또 이기기 위한 궁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외의 문제는 그들에게 모두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매우 흥미로운 발언이 지난 4월23일 스웨덴의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영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왔다. 지금 기후변화에 대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민감한 이 소녀는, 영국의 국회의원, 장관, 언론인, 일반시민들을 향한 연설에서 “지금 정치가들은 인기를 잃을까봐 두려워서 녹색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오늘날 대의제 정치가 어째서 기후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명쾌히 드러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구환경을 위해서는 산업의 대폭적 축소가 필요함을 모르지 않는 정치가일지라도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성장 논리에 깊이 중독돼 있는 유권자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고, 그 때문에 ‘녹색 성장’이라는 기만적인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이 어린 소녀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류사회가 기후위기에 옳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긴급한 비상상황으로 간주하고, 이를테면 ‘녹색 총동원 체제’를 강구하는 게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의제 정당정치가 과연 이러한 비상상황에 대응할 능력이 있을지 혹시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권위주의적 통치체제가 더 효과적인 시스템이 아닐지 따져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어리석음을 자초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만으로는 결코 위기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하고, 예를 들면 ‘숙의민주주의’와 같은 제도를 적극 도입·활용함으로써 국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정치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돌아보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산업혁명기에 발흥하여 근대적 산업체제와 더불어 성장해왔다. 그러므로 기후변화라는 근본적 한계에 부닥침으로써 근대적 산업체제의 수명이 사실상 끝났듯이 대의제 정당정치도 이제 근본적인 탈바꿈이 필요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과감한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시기이다. 기후과학자들에 의하면 향후 12년, 즉 2030년까지가 결정적인 기간이다. 그 기간 내에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체제를 극적으로 청산하지 않는다면 대파국은 필연적이라는 과학적 경고를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정치적 결단을 미루면서 우물쭈물 이대로 갈 수는 없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그 어디서든, 국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경하기 위한 치열한 논의가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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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드러내는 분노, 슬픔, 열정, 기쁨 등은 말 그대로의 그것들인가 아닌가?

순수하지 않겠지. 순수하기 쉽지 않지. 순수하다면 이미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결국, 밖으로만 향하지 말고 그 절반은 안으로 향하라는 뜻이 아닐까?

둘이 긴장하듯 조화를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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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수한가

 

박노해

 

 

찬 새벽

고요한 시간

나직이 내 마음 살피니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나의 슬픔은 깨끗한가 

나의 열정은 은은한가

나의 기쁨은 떳떳한가

오 나의 강함은 참된 강함인가

 

우주의 고른 숨

소스라쳐 이슬 털며

나팔꽃 피어나는 소리

어둠의 껍질 깨고 

동터오는 소리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나는 순수한가'

『참된 시작』 수록 詩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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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 누님이 시상식에서 이 대사로 소감을 대신했나 보다.

어쩌면 이 대사는 책 <당신이 옳다>를 압축한 내용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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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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