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장했는가? 하고 있는가?

머물렀는가? 성장을 회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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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장을 북돋는 공적 공간

김찬호

 

“낮은 기대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는 없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때까지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스티븐 리츠 [식물의 힘] 중에서 -

 

몇 해 전에 포항의 지진으로 수능이 갑자기 일주일 연기되었을 때, 수험생들이 시험을 하루 앞두고 내다버렸던 교과서와 참고서들을 부랴부랴 다시 찾는 장면이 보도된 적이 있다. 지긋지긋한 학생(더 정확하게는 수험생) 신분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려는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확인시켜준 일이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애쓴 시간이 혐오스러워 지워버리고만 싶은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지만, 그 시간을 생애의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학창 시절의 낭만적 추억이라는 것도 옛날이야기가 되어가는 듯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연기된 15일 오후 한 입시학원에서 학생들이 버렸던 수험서적을 찾기 위해
책더미를 뒤지고 있다. (출처:동아일보 2017.11.16_기사_‘포항지진에 수능 연기’ 학생들)

 

거기에 맞물려, 졸업 이전에 학교를 떠나거나 아예 거부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른 바 ‘탈(脫)학교’ 또는 ‘학업 중단’인데, 가정환경으로 인해 삶이 무너지다시피 해서 학교에서 방출되는 경우도 있고, 학교 교육의 경쟁과 통제를 견디지 못해 적극적으로 새로운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공부 자체를 그만둔 것이 아니기에 ‘학업 중단’이라는 개념에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공교육 내지 제도권 바깥에서 자기 나름의 학습과 성장을 모색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학교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 의식이 깔려있고, 일찍이 이반 일리치가 말한 ‘deschooling'이라는 개념이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아시아경제 2018.10.06_기사_‘10대 문제, 알고 계신가요’)

 

어떤 맥락에서 문제가 제기되는가. 고도성장기에는 학교에서 직업 세계로의 이행(school to work transition)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래서 학교 시스템에서 성실하게 학업을 이수하면 고졸 학력으로도 웬만한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IMF 금융 위기 이후 저성장 경제가 지속되고 기술 혁명으로 일자리 자체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그 경로가 뒤틀리고 곳곳에 균열이 일어난다. 우수한 스펙을 갖고서도 노동 시장으로 진입하는 과정이 너무 버겁고, 고달픈 취준생으로 오랜 시간 삶을 유예 당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취업 한 이후에도 계속 불안정한 신분에 머물거나 정규직이라 해도 미래가 불안해서 이직을 꿈꾸는 경우가 늘어난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노동 시장이 성인기로 이행하는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경로였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것이 유일한 경로로 자리 잡은 것은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체제 때문이었다. 인류사 대부분의 시기에 노동은 생활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고, 그것은 사회라는 커다란 틀 속에 담겨 있었다. 거기에서 성인기로의 이행은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그러다가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어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고 생계의 수단을 노동 시장에서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취직은 성인의 자립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수축기에 들어선 지금, 그러한 모델은 점점 작동하기 어려워진다.

 

지금 경제의 변동에는 ‘경제외적’ 변수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데 예를 들어 <환경 문제>를 들 수 있고, <사회>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점점 더 많은 요소들이 얽혀 돌아가는 것이다. 예전에는 오로지 시장만 분석하면 대개 예측되고 설명되었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 사회의 동향이나 집단 심리의 영향력이 커진다.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개인의 생애 설계에서도 얼개가 점점 복잡해진다. 웬만한 직장에 입사하면 이후 인생이 비교적 평탄했던 시절은 지나갔다.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업무가 단순하지 않다. 커뮤니케이션, 문제 해결 역량, 창의성 등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고 시험에서도 거의 측정되지 않은 ‘비인지 능력’이 강조된다. 수험 공부에는 초인적인 실력을 입증했지만 기본적인 일머리가 갖춰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난다.

 

생애의 회로가 복잡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위에서 언급한바 저성장과 기술혁명에서 비롯되는 ‘탈고용 사회’로 바뀐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성인기로 이행하는 경로는 학교-직업세계라는 단선적 구조에 계속 묶여 있을 수 없다. 노동 세계에서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해도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면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생활을 넘어서고 노동 세계와도 구별되는 공적 영역이 다양하게 열려야 한다. 외형적인 것으로 등급이 매겨지지 않고 한 인간으로 환대받는 경험, 안전한 공간에서 타인과 유대를 맺어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존귀함을 자각할 수 있다. 오디세이학교 등 대안학교 내지 전환학교는 바로 거기에 힘을 쏟는다.

 

오디세이학교를 다니면서 뭐가 제일 좋은지를 묻자 한 학생이 답했다. (...) 그동안의 학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고. “왜”냐고 묻는 행위는 대드는 것, 버릇없는 것, 되바라진 것, 당돌한 것으로 취급되어 질문을 거세당하는 경험만 하다 이곳에서 들은 “넌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은 신선했다. 존중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고도 했다. 오디세이학교에서 제일 힘든 점은 무엇이었는지 묻자 학생은 같은 답을 내놓았다. “제 생각이 뭐냐고 묻는 거요” 어떤 사안에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덧붙여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피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고.- 장희숙 [학교의 안과 밖]“넌 어떻게 생각해?” [경향신문] 2018.11.05 -

 

 

청(소)년들이 온전하게 성장하려면 자신을 온 마음으로 존중해주는 타인, 가슴을 열고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생각만이 아니라 감정도 표출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매력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격려와 지지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만남이 절실하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상호작용과 지적 교섭이 일어나는 가운데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주체적으로 관계를 열고 사회를 창조해나가는 힘을 자각할 수 있다. 세상은 전쟁터가 아니라 나의 존재가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더불어 좋은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 내지 이웃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그 자체를 자기만의 촉수로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경험이 이뤄질 수 있을까. 기존의 학교 교육의 방식을 넘어서면 여러 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김선호 교사가 소개하는 사례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학급 단위로 인솔해서 어딘가에 견학하러 나가면 몇몇 아이들이 엉뚱한 샛길로 빠져 골치를 썩이는데, 교사들은 그때 마다 꾸중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큰 잘못인가 하고 김선호 교사는 자문한다. 미지의 길로 발걸음을 내미는 호기심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소규모 테마형 현장 학습체험이라 해도 스무 명 이상의 아이를 교사 혼자 감당해야 하는 지금의 학교 시스템에서는 방법이 없다.

 

김선호 교사는 스카우트 활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거기에서는 5~6인의 아이들이 한 모둠이 되어 지도 한 장과 함께 열 가지 정도의 미션을 부여받는다. 예를 들어 안중근 기획전에 가서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우다’라는 뜻의 한자를 적어온다거나, 외국인에게 한국에 관한 주어진 질문들을 던져 답을 받아오는 것 등이다. 아이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정해진 지역을 찾아가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 명예 교사인 학부모가 한 명씩 배정되어 안전을 감시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대원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에서 뒤따라간다는 것이다. 엉뚱한 길에 들어서도 절대로 관여하지 않고, 위험해 보일 때만 개입한다. 아이들은 최소한의 간섭 속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지는 활동을 경험하면 만족도가 높고 미션을 완수하지 못해도 깊은 성취감을 느낀다고 한다.김선호 [초등직관수업](항해. 2018) 112~113쪽

 

(출처 : 뉴스에듀 2019.02.21_기사 ‘한국스카우트연맹, 이사회 개최’)

 

교사와 부모가 파트너가 되어 안전함을 지켜주는 가운데 학교 밖 공간을 탐사하는 아이들은 불확실성을 다루는 기법을 체득한다. 시행착오가 학습의 일부임을 배우면서, 우연과 돌발 상황에 대해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혼돈을 겪고 미로를 헤매는 자신을 긍정하고, 좌충우돌해도 세상이 자기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긴다. 실패에 대한 내성과 회복력이 자라나는 것이다. 도태에 대한 공포심이 만연한 시대에 아이들이 사회와 다양하게 접속하는 경험은 존재의 안정감을 심어주고 세상과 타인에 대한 신뢰의 싹을 틔운다.

 

세상과 자기를 새롭게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현장으로 도서관도 들 수 있다. 가난과 범죄와 인종차별을 겪으며 성장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당신이 남긴 증오]의 작가 엔지 토마스는 도서관을 처음 접한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린다. “6살 때, 공원에서 두 명의 마약상이 총격전을 벌이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서부영화 속 장면 같았죠. 다음 날 엄마가 저를 도서관에 데려가셨어요. 그날 눈앞에서 본 것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죠.”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대출하거나 독서하는 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준비하는 모태라고 작가의 어머니는 생각한 것이다.

 

(출처: 한겨레 2006.10.15. 기사 -‘두려움 컸죠 모험하는게 아닐까?변화요?…’)

 

더 나아가 도서관을 통해서 의외의 만남과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용인의 느티나무도서관은 지역사회와 긴밀한 연계 속에서 탄생하고 운영되는데, 특히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와 집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지적 성장을 경험한다. 박영숙 관장은 [꿈꿀 권리]라는 저서에서 여러 가지 일화들을 전해주는데, 책의 부제가 ‘어떻게 나같은 놈한테 책을 주냐고’로 되었다. 그 말을 한 아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했다가 이 도서관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종 도서관의 창문을 깨고 들어와 물건을 훔쳐다가 파는 등 계속 사고를 쳤다. 하지만 관장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품어주었고, 책을 함께 읽자고 권유도 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지내다가 청년이 된 이후에 이렇게 글을 썼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못 믿었어요. 이 사람이 도대체 아무것도 아닌 나한테 왜 이렇게 자상하게 굴지? 왜 이렇게 나한테 착하게 대해 주지? 그런 생각들만 들다가 하루 일 년 이 년 지나다 보니 진심이라는 걸 알겠더라구요

정성원 ‘도서관 문화 :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 평생학습웹진 [와] 2014. 7

 

타인에 대한 신뢰는 일상의 존립 기반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도 스스로를 사회에서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창조해갈 수 있는 바탕이다. 그것은 또한 사회 자체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토대가 된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가꾸는 데 소홀했고, 성장 기조가 급격하게 둔화되면서 그나마 있었던 사회자본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교육은 그 부정적 결과가 집약되어 드러나는 영역이면서, 동시에 사회 자본의 복구에 힘을 쏟아야 하는 소임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학교의 몫이지만, 교사들이 오롯이 떠맡기에는 너무 버거운 과제다. 학교의 안과 밖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어야 한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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