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 귄'의 2014 ‘미국 도서상’ 수상 소감

벅찬 감동을 주는 할머니 작가의 말씀을 나누고 싶어서 퍼왔습니다.


이윤 추구와 예술의 목적은 종종 갈등을 빚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힘은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하지만 절대왕정 시절 왕의 권력도 그랬습니다.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권력도 사람이 저항하고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저항과 변화는 예술에서 출발합니다. 그 중에서도 많은 경우, 그것은 우리의 예술, 즉 말의 예술에서 출발합니다.

번역된 글은 이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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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왔어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는 없다

2014년 10월 6일  |  By:   |  과학칼럼  |  1 comment

네덜란드 이펜베르그의 모래 언덕에 바람이 부는 날이면 당신은 커다란 버스 크기의 조형물이 언덕을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 튜브와 나무, 돛이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다리를 움직여 이동하는 이 물체는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예술가 테오 얀센의 작품입니다. 그의 웹사이트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1990년부터 나는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작품들을 스트랜드비스트(strandbeest)라고 부릅니다. “나는 언젠가는 이들을 해변가에 무리지어 흩어놓고 싶어요. 그러면 이들은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되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트랜드비스트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이들이 살아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이들은 정교하고 아름답지만 생명을 가지지 않은 어떤 기계에 불과하다고 말이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이런 생각에 동의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내가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을 가지기 전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스트랜드비스트가 곰팡이나 식물과같은 다른 생명체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나는 어떤 것도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과학이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생명의 보편적이고 정확한 정의를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오늘날의 교과서에는 생명은 조직적이며, 성장하고, 번식하고, 진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써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의에 맞지 않는 수많은 예외적 생명체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수정 결정은 매우 조직적이며, 성장하고, 자신의 형태를 충실히 복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정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번식하고, 짝을 짓고, 진화하지만 이들 역시 우리는 생명체로 여기지 않습니다. 반대로, 젤리 모양의 미생물인 완보동물(tardigrades)이나 아르테미아 새우는 수 년 간의 동면기간 동안 먹지도 않고, 성장하거나 형태를 바꾸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을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NASA의 과학자들은 다른 행성의 생명을 찾기 위해 생명을 임시로 정의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진화능력을 갖추고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생명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물론 이 정의도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DNA와 RNA를 단순한 단백질로 감싸고 있는 바이러스를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다른 세포에 침입해 자신을 복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생명체보다도 빠르게 진화합니다. 그러나 생물학자들은 이들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길 것인지에 대해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NASA 에 참여했던 생물학자 제랄드 조이스는 바이러스는 “스스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생명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바이러스는 자신이 감염시킨 다른 세포 안에서만 진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른 기생 생명체들을 비록 이들이 홀로 살아갈 수 없다 하더라도 당연히 살아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내장의 기생충이나 다른 식물의 수액을 빠는 덩굴식물, 거미를 감염시켜 죽인 후 그 사체에서 오렌지 색의 뿔을 키우는 곰팡이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바이러스처럼 그 숙주에 번식과 진화를 의존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살아있는 생물로 여겨집니다.

제랄드 조이스는 10년 동안 NASA와 함께 일한 이후, 자신들이 내렸던 생명의 정의를 더 위태롭게 만드는 한 실험과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때때로 서로를 복제하는 두 RNA 분자 쌍을 발견했습니다. 40억년 전, 지구가 원시 수프 상태일 때 이와 비슷한 RNA 들이 우연히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이러스보다 더 간단한 형태이지만 번식과 진화가 가능합니다. 조이스는 이들이 NASA 의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들이 살아있다고는 쉽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모순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왜 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것을, 그리고 바이러스가 생명체인지를 결정하기를 그렇게 어려워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실재하지 않는 어떤 개념을 정의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의 결론입니다. 생명이란 그저 관념일 뿐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존재하고 구별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내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는 마음속에 떠올리는 모형과 순수한 개념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우리의 두뇌는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 표상을 만들어냅니다. 눈에 들어온 소나무에서 반사된 빛과 코를 자극하는 솔잎의 분자들의 자극들이 더해져 우리는 나무에 대한 기억을 만들게 됩니다. 뇌는 다른 대상에 대한 개념들 역시 이러한 관찰을 기반으로 만들어내며, 이는 세상을 인식하는 유용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나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순수한 개념으로의 나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나무”는 우리의 마음속에만 존재합니다. 세상에 우리가 나무라고 뭉뚱거려 표현하는 수십억의 식물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신은 식물학자들이 나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식물이 나무(tree)인지, 관목(shrub)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때로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무”와 “관목”은 식물이 가진 고유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붙인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생명(life)”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들을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종종 유용할 수 있지만, 그러한 구분은 사실 우리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실 생명을 정의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일 뿐 아니라 그 대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불필요하기까지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것은 그 대상을 이루는 원자들과 다른 입자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잡도의 척도에는 물 분자 하나처럼 극히 간단한 대상에서부터 개미집처럼 놀랄만큼 복잡한 대상들이 존재합니다. 생명의 특징이라 여겼던 대사, 번식, 진화와 같은 활동들은 이 복잡도 척도상의 여러 다른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생명의 경계로 딱 떨어지는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들이 때로 우리가 생명체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그런 활동들을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그런 특성을 갖추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들을 단 하나의 기준, 곧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려 했으며, 현실에서 아무런 의미없는 경계선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이란 개념이 그저 우리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실용적인 개념일 뿐이며, 우주의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여러모로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얀센의 작품들이 살아있는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트랜드비스트가 우리를 매혹시키는 이유는, 이들이 “살아있는 것들”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그 특성들을 정확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들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고, 바로 그 복잡함 속에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트랜드비스트의 돛이 바람에 의해 흔들릴 때, 다리들은 규칙을 가지고 굽혀지고 펴지며, 이 물체의 움직임은 시작됩니다. 나는 스트랜드비스트의 의지와 집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장엄한 존재가 살아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뉴욕타임즈)

스트랜드비스트 유튜브 영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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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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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사경제 2010년 12월 기사(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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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 토론으로 아이 논술 걱정 끝


독서로 아이 키우는 10가지 비법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지난해 통계청에서 발표한 생활시간 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가정의 아내는 가족을 보살피는 데 하루 평균 42분의 시간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맞벌이가 아닌 가정의 아내가 2시간 7분을 쓰는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한편 맞벌이 여부와 상관없이 남편들은 가족을 보살피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맞벌이 가정의 남편은 13분, 맞벌이가 아닌 가정의 남편은 20분을 쓰는 게 고작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 대부분의 맞벌이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맡긴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많지 않을 텐데 말이다. 

지난 2일 서울시교육청(교육감 곽노현)에서 주최한 '사교육 없는 자녀교육 성공사례' 발표회에서 알게 된 자녀교육 비법들을 소개한다. 20여 명의 수상자들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평범한 진리를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선생님은 '엄마와 아빠'라는 사실이다. 


◆독서로 아이 키우는 10가지 비법 

이날 발표회에서 눈길을 끈 정채린(16ㆍ봉원중 3) 학생의 어머니 호경환씨는 "아이가 엄마와 눈을 맞출 수 있게 되면서부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순히 어려서부터 책만 열심히 읽어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며 '꾸준히 독서하는 아이로 키우는 비법 10가지'를 공개했다. 

1. 어릴 때부터 밥 먹고 잠자듯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어주겠다는 각오부터 하자. 

2. 아이가 읽는 책을 엄마도 같이 읽자. 그래야만 아이와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3.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말자. 아이들 학원 보낼 돈으로 책을 사주자. 

4. 집안 곳곳에 책 읽는 분위기를 조성하자. 거실, 안방, 부엌, 심지어 화장실에까지 책꽂이를 두고 언제 어디서나 책을 꺼내 읽을 수 있게 만들어 놓으면 아무래도 책을 더 많이 접하게 된다.

5. 서점에 되도록 자주 가자. 아이들에게 책의 내용을 보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구비되어 있는 만큼 아이들이 다양한 책을 접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6. 책을 읽은 후 독후감 쓰기를 강요하지 말고 독후감 대신 토론을 생활화하자. 논술에 대비해 독후감을 쓰도록 강요하다 보면 아이들이 책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7. TV를 끄고 살아보자. 안되면 꼭 필요한 것만 시청한다는 원칙을 세우자.

8. 아이들이 책을 잘 읽게 도와주고 싶다면 순수한 동기를 가져라. 책을 많이 읽혀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만들겠다고 접근하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생각이 깊은 아이, 마음이 넓은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접근하라.

9. 공부하는 시간과 책 읽는 시간 사이에서 갈등하다 보면 책과 멀어지니 주의하라. 책 읽는 시간을 아깝게 여긴다거나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 책을 읽으려 하면 꾸준히 읽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10. 책을 읽고 토론을 습관화하면 입시 논술도 해결된다.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책 읽고 이야기하세요

올해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딸을 둔 한희석씨(48)는 이번 발표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가난한 살림에 논술학원을 보낼 수 없어 모든 걸 집에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논술 대비는 독서와 토론 두 가지가 전부라는 소신으로 본인이 직접 챙긴 것이다. 

딸이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아빠와 함께 매일 준비한 것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과 신문 칼럼이었다. 책과 신문 칼럼처럼 논술시험에 응용하는 데 좋은 자료가 없다는 것이 확고한 그의 신념이다. 그는 "특히 칼럼은 쟁점토론에 효과 만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이의 정치, 학문적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성향이 다른 두 가지 신문을 구독해 그날의 칼럼을 가위로 잘라 아이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화장실에 갈 때 잘라놓은 칼럼을 가지고 들어가 읽는다. 그 다음 단계가 바로 토론이다. 그는 "독서든 칼럼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며 아이와 밥상머리에 함께 앉아 식사하면서 함께 이야기 나누는 교육을 강력히 추천했다. 

그래서일까? 사교육 한번 받아본 적 없는 딸은 중 1때 학급에서 38명 중 27등을 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논술대회에 나가 상도 받고,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대 경영학과에 합격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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