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재미난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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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읽는지가 중요합니다

2018년 10월 16일 

2016년 5월, 국제경영학회지(International Journal of Business Administration)에는 학생들이 무엇을 읽는지가 그들의 글쓰기 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이 무엇을 읽는지는 심지어 글쓰기 수업 보다도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에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학술 논문과 문학 소설, 논픽션을 읽은 학생들은 미스터리, 판타지, 과학소설과 같은 장르 소설이나 레딧, 텀블러, 버즈피드 등의 인터넷 글을 읽은 학생들 보다 더 수준 높은 문장을 구사했습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이들은 학술 논문을 읽은 학생들이었고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이들은 인터넷 컨텐츠를 읽은 이들이었습니다.

가벼운 읽기(light reading)와 꼼꼼한 읽기(deep reading)의 차이

몰입한 상태로 감각적, 감정적, 도덕적 디테일을 만끽하며 읽는 것을 의미하는 “꼼꼼한 읽기(deep reading)”는 단순히 단어를 해석하는 수준의 “가벼운 읽기(light reading)”과 크게 다릅니다. 꼼꼼한 읽기는 세부 묘사와 암시, 비유가 풍부하게 묘사된 글을 읽는 과정에서 일어나며 독자가 글에 묘사된 사건을 직접 경험할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를 직접 자극합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으며 반성과 분석을 더하며 자신의 상황을 글 속에 대입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글을 더 의미있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배우게 되며, 이를 통해 글쓰기 수준을 높일 수 있습니다.

반면 가벼운 읽기는 우리가 블로그나 속보, 연예 기사 등 몇 줄의 문장이나 이모티콘 등으로 이루어진 글을 읽을때 사용됩니다. 이런 글은 고유한 관점이 부족하며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는 분석적인 내용 또한 미흡한 경우가 많습니다. 읽고 지나치게 되는 이런 컨텐츠는 몇 분 안에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꼼꼼한 읽기는 글과 당신의 뇌를 일체화 합니다.

꼼꼼한 읽기는 뇌의 언어, 시각, 청각 영역을 자극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말하고, 읽고, 쓰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읽기와 쓰기는 언어의 리듬과 문법을 인식하는 브로카 영역을 자극하며,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베르니케 영역과 언어를 인식하고 활용하는 핵심 부위인 모이랑회(angular gyrus)를 자극합니다. 이 세 영역은 신경섬유다발로 이어져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는 글을 읽는 동안 언어 및 리듬과 일체가 되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글을 쓸 때 필요한, 복잡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리듬을 익히게 됩니다.

다음의 두 가지 꼼꼼한 읽기를 통해 글쓰기 능력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시 읽기

의식 연구(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지에 발표된 한 연구는 뇌의 “독서 신경망”은 어떤 글을 읽을 때에도 활성화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보다 감정적인 글은 우리가 음악을 들을때 활성화되는 몇몇 영역 또한 자극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시와 산문을 비교했을 때 연구진은 시의 경우 우리가 자신을 돌아볼 때 활성화되는 후대상피질(posterior cingulate cortex)과 중앙측두엽(medial temporal lobes)을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자원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읽었을 때 자원자의 뇌에서는 “독서 신경망”보다 기억과 관련된 부위가 더 크게 반응했으며,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읽는 것이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회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문학 소설 읽기

인간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복잡한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술입니다. 따라서 작가는 다층적인 인물과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의 감정 상태와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된 “마음 이론(Theory of Mind)”에 대해 연구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최근 한 연구는 문학 소설을 읽을 때, 논픽션이나 대중 소설을 읽을 때 보다 감정적 인지적 마음 이론 검사 결과가 더 올라간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는 적어도 문학 소설을 읽을 때 일시적으로라도 타인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또한, 문학 소설은 깊은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고 외향적 사고와 내향적 사고를 모두 자극합니다. 특히 잡지나 인터뷰, 인터넷의 짧은 글에 비해 인지적 능력을 더 자극합니다.

TV를 보는 대신 꼼꼼한 읽기를 시작하세요

TV를 보는 시간은 대부분 무의미한 시간이며, 뇌는 곧바로 활동을 멈추게 됩니다. 또한, 아무리 당신이 이를 정당화하려 하더라도, 가벼운 잡지나 대중 소설은 글쓰기 능력을 키워주지 못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면 당신의 뇌를 자극할 수 있는 문학 소설과 시, 그리고 수준 높은 문장으로 쓰여진 과학이나 예술에 관한 글을 읽어야 합니다.

(심리학 투데이, Susan Reyno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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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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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볼 만한 주제 같다.

무심고 종이 봉투가 훨 친황경적이고 진보적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글을 읽다 보면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다.

아이들과 토론해 볼 만한 주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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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 봉투 대신 종이 봉투를 쓰는 것이 정말 환경에 도움이 될까요?

2016년 6월 24일  |  By:   |  과학  |  댓글이 없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비닐 봉투를 사용하는 일은 마치 담배처럼 그저 꼴보기 싫은 일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악한 행동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달 뉴욕 시 의회는 모든 일회용 봉투에 5센트의 비용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 시켰습니다. 또한 지난 주 메사추세츠 상원은 소매점들이 비닐 봉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재생종이 봉투와 재활용 봉투에 10센트의 비용을 물리도록 만드는 조례를 통과시켰습니다. 메사추세츠 주의 범안이 올해 내에 실행될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비닐 봉투 산업이 이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메사추세츠의 32개 도시 혹은 마을은 이미 비닐 봉투를 금지하거나 비용을 물리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LA 와 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한 캘리포니아의 88개 시군 역시 마찬가지이며 다른 여남은 개의 주에서도, 그리고 여남은 개의 나라에서도 같은 법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비닐 봉투의 해악은 확실합니다. 비닐 봉투는 하수구를 막고 나무 사이에 끼어 거리를 어지럽힙니다. 바다에서는 물고기와 바다새 그리고 다른 해양생물이 이를 먹고 목이 막혀 죽게 됩니다. 대표적인 비닐 봉투 반대 운동가인 이안 프레이지어는 최근 뉴요커에 실은 기사에서 “2014년, 식료품 비닐 봉투는 해양보전센터의 국제해안청소운동(Ocean Conservancy’s International Coastal Cleanup)이 발표한 바다에서 많이 발견된 쓰레기 중 담배와 빨대, 병뚜껑 다음인 7번째를 차지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뉴욕 공중위생국은 매주 1,700톤의 일회용 봉투를 수거하며 이를 처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비용은 연간 140억원에 이릅니다.


비닐 봉투 금지 법안은 이 문제들을 원천적으로 해결합니다.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비닐 봉투를 금지하자, 도시의 하수구를 막는 비닐 봉투의 수는 89% 감소했습니다. 비용을 물리는 제도는 이보다는 작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큰 효과를 냅니다. 워싱턴 DC 정부는 5센트의 비용을 물리는 것 만으로 비록 수치에 논란은 있지만, 전체 비닐 봉투 사용이 60% 줄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비닐이 정말 종이보다 나쁠까요?

그러나 이 법안을 지지하는 이들은, 무엇이 비닐 봉투를 대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대안들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종종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쨌든 가게에서 산 물건들을 들고 가기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비닐 봉투를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대안은 종이 봉투입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 문제를 따지느냐에 따라 종이는 비닐 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봉투 금지 운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메사추세츠의 법안은 모든 일회용 봉투를 막으려 하는 법안이지만 여전히 종이 봉투를 비닐 봉투보다 더 선호하게 만드는 법안입니다. 뉴욕시의 법안은 모든 일회용 봉투를 동일하게 대합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일회용 봉투가 재사용 가능한 가방보다 정말로 나쁜가라는 의문은 남습니다.


봉투가 만들어져 사용 후 처리되기 까지의 과정에서 환경이 받는 영향을 밝힌 연구들이 내놓는 결론은 매우 다양합니다. 비닐 산업 종사자들의 모임인 “미국진보봉투협회(American Progressive Bag Alliance)”(재미있는 이름이지 않나요?)의 지원을 받은 연구들이 있습니다. 순수한 의도로 이루어진 연구들 역시 몇몇 가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면 토트 백은 몇 개의 비닐 봉투를 대신하는 것일가요? 만약 어떤 이가 가게에서 가지고 온 비닐 봉투를 다시 화장실 쓰레기 봉지로 사용한다면 그 비닐 봉투는 다른 비닐 봉투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당신의 가장 큰 걱정이 기후변화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2007년 호주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봉투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연구는 종이 봉투가 비닐 봉투보다 더 많은 온실 개스를 만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는 종이 봉투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쓰이며 또한 이를 운반하기도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이는 썩으니까 환경에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후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레곤 주립대의 화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타일러의 말입니다. 종이가 더 많은 온실 개스를 만드는 이유는 복잡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종이 봉투가 비닐 봉투보다 더 두껍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온실 개스는 그 대상의 질량에 비례합니다.” 예를 들어 종이 봉투는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를 수송하는 데 더 많은 트럭이 필요합니다.


기후변화를 넘어

물론 많은 환경주의자들은 비닐이 종이보다 나쁘다고 말합니다. 즉 기후 변화는 우리가 걱정해야할 환경 오염 중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종이가 생산에 드는 에너지 때문에 환경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메사추세츠 시에라 클럽의 대표 에밀리 노튼의 말입니다. “그러나 종이와 비닐의 가장 큰 차이는 종이는 스스로 썩는다는 것입니다. 비닐은 환경에 오래도록 남아 악영향을 일으킵니다. 수중 생물들이 이를 먹음으로써 결국 우리의 뱃속에도 비닐이 들어오게 됩니다.”


도시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정의 활동가들 또한 비닐 봉투가 특별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쓰레기들은 도시의 빈민가로 모이게 됩니다.” 브루클린의 사회정의 및 환경 단체인 UPROSE 의 대표 엘리자베스 얌피에르의 말입니다. “비닐 봉투는 도시 시설을 파괴할 뿐 아니라” 그녀는 하수구 등을 언급했습니다, “온실 개스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녀는 또한 저소득층이 수산물을 섭취하기 때문에 비닐에 의한 바다 오염 역시 문제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뉴욕 시의 법안이 비록 저소득층에게 부담이 되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싱글 맘이나 투잡을 뛰는 이들은 토트 백을 준비할 겨를 없이 퇴근 시간에 급히 장을 보아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UPROSE 는 비닐 봉투가 지역 사회를 오염시키는 일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환경주의자들은 모든 일회용 봉투에 비용을 물리며, 또한 종이 봉투는 재활용 종이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법안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메사추세츠 주에 계류중인 조례 중에는 일회용 종이 봉투는 적어도 40%의 재활용 성분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메사추세츠 시에라 클럽이 지지하는 법안입니다.


복잡한 문제

그러나 재사용 가능한 가방 조차도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이야기한 호주의 연구는 면으로 된 가방이 매우 큰 환경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전 세계 농경지 중 면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비율은 2.4% 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병충해 약은 24%, 살균제는 11%에 달한다고 세계야생기금(World Wildlife Fund)는 밝혔습니다. 1파운드의 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5,000 갤런의 물이 필요하며, 이는 어떤 야채보다도 많고 대부분의 고기보다도 많은 양입니다. 면은 또한 종이와 달리 대부분의 경우 재활용가능하지 않습니다.


앞서 호주의 연구에서 내린 최선의 방법은 재사용 가능한 가방을 사용하되 면을 사용한 토트백이 아닌 재활용 비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보다 튼튼한 가방을 사용하는 것이 온실 개스를 조금이라도 덜 만들며, 에너지와 물의 사용을 줄이는 방법이며 자원의 낭비를 막고 쓰레기를 줄이는 길입니다.” 연구의 결론입니다. “다른 종류의 일회용 백으로 옮겨가는 것은 다른 종류의 환경 문제로 옮겨가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호주나 유럽에서 진행된 연구를 그대로 미국의 환경에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문제가 기후변화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는 나라마다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국의 경우 주마다 에너지원은 다릅니다.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뉴욕시의 법안을 지지하는 천연자원관리국 뉴욕시 부장인 에릭 골드스타인의 말입니다. “너무 많은 변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이 봉투를 만드는 종이가 스테튼 아일랜드의 재활용 제지소에서 만든 종이냐 아니면 캐나다 북부의 숲에서 만들어진 종이냐라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아는 한, 누구도 이런 수많은 요소들을 고려한 연구를 진행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마치 ‘주차 딱지를 받을래, 세무 조사를 받을래’ 처럼 상황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질문입니다. 물론 두 경우를 모두 피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요.” 골드스타인은 면으로 된 토트 백이라 하더라도, 꾸준히만 사용한다면 일회용 봉투보다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정책은 뉴욕시처럼 일회용 봉투에 비용을 부과하면서, 동시에 재사용 가능한 재활용 비닐 가방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특히 저소득층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부유한 이들은 PBS 나 홀푸즈에서 받은 토트백이 집에 넘칠 겁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봉투도 기후변화, 해양 오염, 물 부족, 병충해 약 사용 등의 환경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만성적인 과소비를 줄이고자 자신이 좋아하는 재활용 봉투를 사용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봉투가 어떤 재질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고기를 한 번만 덜 먹는다면, 당신은 환경에 진정한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타일러의 말입니다. “봉투안에 어떤 걸 담아오는가가 진짜 중요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G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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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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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왔어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는 없다

2014년 10월 6일  |  By:   |  과학칼럼  |  1 comment

네덜란드 이펜베르그의 모래 언덕에 바람이 부는 날이면 당신은 커다란 버스 크기의 조형물이 언덕을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 튜브와 나무, 돛이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다리를 움직여 이동하는 이 물체는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예술가 테오 얀센의 작품입니다. 그의 웹사이트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1990년부터 나는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작품들을 스트랜드비스트(strandbeest)라고 부릅니다. “나는 언젠가는 이들을 해변가에 무리지어 흩어놓고 싶어요. 그러면 이들은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되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트랜드비스트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이들이 살아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이들은 정교하고 아름답지만 생명을 가지지 않은 어떤 기계에 불과하다고 말이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이런 생각에 동의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내가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을 가지기 전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스트랜드비스트가 곰팡이나 식물과같은 다른 생명체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나는 어떤 것도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과학이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생명의 보편적이고 정확한 정의를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오늘날의 교과서에는 생명은 조직적이며, 성장하고, 번식하고, 진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써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의에 맞지 않는 수많은 예외적 생명체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수정 결정은 매우 조직적이며, 성장하고, 자신의 형태를 충실히 복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정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번식하고, 짝을 짓고, 진화하지만 이들 역시 우리는 생명체로 여기지 않습니다. 반대로, 젤리 모양의 미생물인 완보동물(tardigrades)이나 아르테미아 새우는 수 년 간의 동면기간 동안 먹지도 않고, 성장하거나 형태를 바꾸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을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NASA의 과학자들은 다른 행성의 생명을 찾기 위해 생명을 임시로 정의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진화능력을 갖추고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생명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물론 이 정의도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DNA와 RNA를 단순한 단백질로 감싸고 있는 바이러스를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다른 세포에 침입해 자신을 복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생명체보다도 빠르게 진화합니다. 그러나 생물학자들은 이들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길 것인지에 대해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NASA 에 참여했던 생물학자 제랄드 조이스는 바이러스는 “스스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생명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바이러스는 자신이 감염시킨 다른 세포 안에서만 진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른 기생 생명체들을 비록 이들이 홀로 살아갈 수 없다 하더라도 당연히 살아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내장의 기생충이나 다른 식물의 수액을 빠는 덩굴식물, 거미를 감염시켜 죽인 후 그 사체에서 오렌지 색의 뿔을 키우는 곰팡이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바이러스처럼 그 숙주에 번식과 진화를 의존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살아있는 생물로 여겨집니다.

제랄드 조이스는 10년 동안 NASA와 함께 일한 이후, 자신들이 내렸던 생명의 정의를 더 위태롭게 만드는 한 실험과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때때로 서로를 복제하는 두 RNA 분자 쌍을 발견했습니다. 40억년 전, 지구가 원시 수프 상태일 때 이와 비슷한 RNA 들이 우연히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이러스보다 더 간단한 형태이지만 번식과 진화가 가능합니다. 조이스는 이들이 NASA 의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들이 살아있다고는 쉽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모순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왜 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것을, 그리고 바이러스가 생명체인지를 결정하기를 그렇게 어려워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실재하지 않는 어떤 개념을 정의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의 결론입니다. 생명이란 그저 관념일 뿐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존재하고 구별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내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는 마음속에 떠올리는 모형과 순수한 개념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우리의 두뇌는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 표상을 만들어냅니다. 눈에 들어온 소나무에서 반사된 빛과 코를 자극하는 솔잎의 분자들의 자극들이 더해져 우리는 나무에 대한 기억을 만들게 됩니다. 뇌는 다른 대상에 대한 개념들 역시 이러한 관찰을 기반으로 만들어내며, 이는 세상을 인식하는 유용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나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순수한 개념으로의 나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나무”는 우리의 마음속에만 존재합니다. 세상에 우리가 나무라고 뭉뚱거려 표현하는 수십억의 식물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신은 식물학자들이 나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식물이 나무(tree)인지, 관목(shrub)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때로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무”와 “관목”은 식물이 가진 고유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붙인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생명(life)”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들을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종종 유용할 수 있지만, 그러한 구분은 사실 우리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실 생명을 정의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일 뿐 아니라 그 대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불필요하기까지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것은 그 대상을 이루는 원자들과 다른 입자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잡도의 척도에는 물 분자 하나처럼 극히 간단한 대상에서부터 개미집처럼 놀랄만큼 복잡한 대상들이 존재합니다. 생명의 특징이라 여겼던 대사, 번식, 진화와 같은 활동들은 이 복잡도 척도상의 여러 다른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생명의 경계로 딱 떨어지는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들이 때로 우리가 생명체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그런 활동들을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그런 특성을 갖추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들을 단 하나의 기준, 곧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려 했으며, 현실에서 아무런 의미없는 경계선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이란 개념이 그저 우리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실용적인 개념일 뿐이며, 우주의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여러모로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얀센의 작품들이 살아있는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트랜드비스트가 우리를 매혹시키는 이유는, 이들이 “살아있는 것들”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그 특성들을 정확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들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고, 바로 그 복잡함 속에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트랜드비스트의 돛이 바람에 의해 흔들릴 때, 다리들은 규칙을 가지고 굽혀지고 펴지며, 이 물체의 움직임은 시작됩니다. 나는 스트랜드비스트의 의지와 집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장엄한 존재가 살아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뉴욕타임즈)

스트랜드비스트 유튜브 영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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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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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별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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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대하여

2014년 10월 23일  |  By:   |  과학  |  댓글이 없습니다

프랭크린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매우 정확한 말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은 보통 두려움 그 자체보다 더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물론 이 말에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두려움을 싫어하며, 이는 당연하게 들립니다. 두려움은 아래와 같이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어떤 현상이나 경험을 예상했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불안한 감정.

의학 전문가들은 우리가 두려울 때 느끼는 불안한 감정이 생물학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개에게 물릴까 봐, 연인에게 차일까 봐, 그리고 세무조사를 받을까 봐 두려워 할 때 우리는 똑같은 신체적 반응을 나타냅니다.

두려움은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이해하고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는 기본으로 다섯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다른 거의 모든 두려움은 이 기본 요소들의 조합입니다.

  1. 소멸(Extinction)—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이 이 두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높은 장소에서 바닥을 내려볼 때 가지는 공포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1. 절단(Mutilation)— 신체의 부분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인체의 기관이나 부분, 자연적 기능을 다른 존재에 의해 잃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곤충, 거미, 뱀 또는 다른 징그러운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이 절단의 두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1. 자유의 상실(Loss of Autonomy)— 움직일 수 없게 되거나, 마비되거나, 제한되거나, 갇히거나, 덫에 빠지거나, 묻히는 것과 같이 어떤 환경에 의해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는 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흔히 “폐소공포증(claustrophobia)”로 알려져 있으며, 사회적 관계에서도 이런 두려움이 가능합니다.

  1. 분리(Separation)— 버려지고, 거부되고, 관계를 잃어버리는 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또 다른 이에게 갈망의 대상으로, 존중의 대상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집단으로부터 주어지는 “침묵의 벌(silent treatment)”이 개인에게 심각한 심리적 영향을 끼치는 이유입니다.

  1. 자아의 죽음(Ego-death)— 창피함, 수치심 등은 스스로를 부인하게 만들며 자아를 위협합니다. 자아가 파괴됨으로써 더 이상 다른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사거나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간단한 위계 구조를 가집니다. 가장 아래에는 소멸의 공포가 있고 가장 위에는 자아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들을 바탕으로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소공포증은 기본적으로 소멸의 두려움에 기반합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는 것은 자아의 죽음에 기반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 역시 자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거나 결혼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질투는 분리의 두려움에 기반합니다. “그녀는 나보다 그 사람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 같아.” 질투가 극단에 이르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무가치한 인간이야.” 부러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부끄러움과 죄책감 역시 분리와 자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합니다. 당황스러움과 창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은 종종 분노의 원인이 됩니다. 억압받는 이들이 억압하는 이들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자유의 상실, 그리고 자아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문화나 종교를 무시할 때 역시 자아의 죽음을 느낍니다.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입니다.

종교적으로 극단적인 행위들은 자아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확장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신이 진짜 신이 아니라면, 혹은 최고의 신이 아니라면, 나는 신이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나는 비정한 자연 앞에 홀로 버려질 것이다.”

당연히 어떤 두려움들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학습된 반응이며 따라서 없애거나 줄일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은 다소 어색하게 들리지만 아래와 같은 우리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어색할 것 같은 모임에 초대 받았을 때 그 모임에 가지 않습니다. 의사와의 약속을 이유 없이 연기하며, 연봉을 올려 달라는 말을 그저 꺼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과거 두려웠던 기억 때문에 생기는 본능적 반응입니다. 이 반응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행동에서는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않습니다. 단지 진짜 두려움에 대한 압축된 반응인 “미세 공포”를 경험합니다. 이 순간적 감정에 대해 우리는 진짜 두려움을 느낄 때와 같은 회피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런 반응을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그저 자신의 감정이자 정보로 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려움의 원인을 더 명확하고 냉정하게 분석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고 조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싸이칼러지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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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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