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9_ 실상사 보현법회 회주 도법스님


노래 : 해탈의 기쁨

 

한생각 바로돌려 얽힌번뇌 끊고보니
천상천하 넓은우주 걸릴것이 하나없고
평등한 성품속엔 너와내가 따로없네
대자재 유아독존 바로 이것인것을
해탈의 참된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윤회의 고해에서 피안언덕 이르러니
어두웠던 나의마음 한순간에 밝아지고
본래의 천진면목 진실하게 드러나네
위없는 님의진리 영원한 빛가운데에
열반의 대합창이 온누리에 가득하네

 

1. 
방금 부른 노래 가사를 보니까 ‘해탈의 참된 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열반의 대합창이 온 누리에 가득하네.’ 이렇게 되어 있네요. 해탈은 ‘자유’라는 이야기고, 열반은 ‘평화’라는 이야기인데, 어떠세요? 평소 살면서 자유를 느낀 적 있으세요? 또는 평화를 느낀 적이 있으세요?

 

인생사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해탈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열반이라고도 이야기 하죠. 해탈은 ‘자유’라는 말이고, 열반은 ‘평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자유롭고 평화로우면 행복하다’ 이런 얘기가 됩니다. 다른 건 사실 다 군더더기예요. 스스로 삶이 자유로우면, 또 평화로우면 그게 최고다, 그 얘깁니다.

 

제가 부처님의 말씀 중에 대표적으로 많이 인용해서 얘기 하는 것이 있는데요, 
첫 번째,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말 못 알아듣는 사람 빼고, 말을 알아듣는 사람의 경우 같이 얘기 했을 때,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진리고, 나의 가르침이다.
두 번째, 이해되는 대로 실천하면 즉각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진리이고 가르침이다. 
세 번째, 정말 바로 이해가 되는지, 즉각 이루어지는지 바로 증명, 검증 되는 것이 나의 진리이고 가르침이다.

 

저는 부처님 경전 중에서 이 세 가지 내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불교의 사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내용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하는데 이렇게 즉각 이해가 되고, 즉각 이루어지기도 하고, 증명되기도 하면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잘 하는 것이고, 그것이 잘 안되고 있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잘 따져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부른 노래가 ‘해탈의 기쁨’인데, 어떠세요? 바로 이해가 되시는가요? 또 자유가 바로 이루어지는가요? ‘아, 그렇네’하고 자유로움을 느끼는가, ‘아, 그렇네’하고 평화로움을 누리는가. 어떻습니까? (...)

 

그렇지 않죠? 뭔가 그럴듯하기는 한데, 왜 그게 바로 이해가 안 될까, 부처님은 분명 즉각 된다고 했는데 말이죠. 이 노래가사 자체가 부처님의 말씀을 노래로 만든 거잖아요. 부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노래도 부르고 얘기도 하고 있는데 왜 부처님 말씀처럼 자유로움을, 또는 평화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가? 참회를 열심히 안 해서 그런가? 전생의 업 때문에 그런가? (웃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 이유는 잘 몰라서 그래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자유와 평화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인거죠. 모든 생명이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해요. 어쩌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유롭고 싶다, 평화롭고 싶다고 하는 것이 생명이 가지고 있는 바람, 소망입니다. 스님들이 청춘을 불사르고 수행자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도 그 삶을, 그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지요.

 

인생살이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의 삶은 틀림없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어쩌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많이 경험하고 있어요. 경험하고 있는데 본인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경험하고 있는데 본인이 모르는 경우, 그런 경우가 많죠? 그런데 우리는 ‘아, 이런 것이 자유구나’, ‘이런 것이 평화구나'하는 것을 사실 부지기수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자유고, 평화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거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평화로움, 자유로움이 굉장히 짜릿한 무엇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감각적으로 대단히 짜릿한, 마치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짜릿함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죽어라고 더운데 죽어라고 목마르다. 그 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했다. 어때요? 그때 기분이? 짜릿하겠죠? 아니면 얼려 놓은 냉수를 시원하게 마셨다. 실제 짜릿함이 느껴지잖아요.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데 그 행복도 이런 짜릿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그러기 때문에 그 짜릿한 재미를 찾아 동네방네 쫓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그런 것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짜릿한 충족감으로 행복해지려고 하는 한 영원히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짜릿한 재미를 찾으려고 동서남북으로 항상 쫓아다니고 있죠. 그래서 바빠요. 힘도 들고. 그 짜릿한 재미를 느끼려면 공짜로 안 되잖아요. 그렇죠? 돈이 많이 들어가야 되죠.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짜릿한 즐거움의 노예가 되는 거죠. 이것이 중생이에요. 이 ‘짜릿한 즐거움이 충족되어지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하는 무지와 착각 속에 빠져 짜릿한 무엇을 쫓아 사는 거예요. 한 마디로 얘기해서 감각적인 기쁨. 눈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입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코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귀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마음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온통 감각적인 기쁨을 탐닉하는 것, 이것이 중생입니다. 거기에 노예가 되어 사는 것이 중생이고, 그 기쁨이 충족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 중생입니다. 이런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거죠.
 
이 무지와 착각을 놔둔 채로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행복해 질 수 없어요. 이 무지와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이 무지와 착각으로부터 깨어나지 않는 한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가 어려워서 불행하다, 일자리가 없어서 불행하다, 이렇게들 이야기 하고 있죠. 물론 일자리니 경제니 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경제가 좋아지면, 일자리가 많아지면 바로 행복해지는가? 그건 아니죠? 직업 있고 돈 있는 사람도 여전히 불행하다고 하잖아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대부분 더 편리하고, 더 풍족하고, 더 맛있게 먹고, 더 쉽게 가고, 더 재밌게 하고,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쓰고 그러면 행복해진다-라고 믿고 그것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 나쁜 거짓말, 대단히 위험한 거짓말임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경험하고 있어요.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온 100년 역사만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 됐어요. 지금은 죽네, 사네, 하지만 3만 불을 얘기하고 있지요. 3만 불이면 부가 몇 배로 증가한 거예요? 300배예요. 생활의 편리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훨씬 더 편리해졌어요. 민주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민주화가 후퇴한다고 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고, 그것을 막기 위해 비판도 하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죠. 비록 그렇게 후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민주화도 300배는 이루어졌을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대통령을 국민이 뽑는 거죠. 옛날에는 나라의 대표인 임금을 국민이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집안이 만들었어요. 임금을 만드는데 국민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임금격인 대통령을 누가 만듭니까? 국민이 표를 줘야만 대통령이 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대통령을 만드는 주인이에요.

 

옛날엔 감히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어요. 그랬다가는 삼족이 멸했죠.  
진안에 가면 죽도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소위 역성혁명을 일으켰던 정여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말 때문에 죽었습니다. ‘임금의 종자가 따로 있나’ 그랬던 거죠. ‘실력 있으면 임금 하는 것이다. 임금의 종자가 따로 없다. 그가 누구이든 정말로 만백성을 위해서 역할을 잘 할 사람이면 그가 임금 되어야 된다. 집안이 좋다고 해서 실력도 없는데 임금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이 이야기를 해서 결국은 죽은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실제로 실력 있으면,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면 누구든지 대통령이 될 수 있잖아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물질적으로 300배 더 풍요로워진 것보다 더 커다란 변화죠. 천지개벽하는 변화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더 물질적으로 많아지고, 더 편해지고, 더 좋아지고, 더 재미있고 등등 이렇게 해서 행복해지는 거라면 적어도 우리는 300배는 더 행복해졌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못살겠다는 아우성은 그 때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왜 그렇게 된 걸까요?

 

바로 그런 ‘감각적 기쁨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라고 하는 무지와 착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깨달음’이 다른 게 아니에요. 이것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인 거죠. ‘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첫 번째가 그거죠. 그 생각을 내려놓고 보면  우리가 사실은 일상 속에서 무수하게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감각적 짜릿함이 아닌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2. 
노래가사를 가지고 얘기를 조금 더 해 보죠. ‘생각 바로 돌려 얽힌 번뇌 끊고 보니 천상천하 넓은 우주 걸릴 것 하나 없고.’ 걸릴 것 하나 없다는 말이 곧 해탈, 자유라는 말이죠. ‘평등한 성품 속엔 너와 내가 따로 없네. 대자재 유아독존 바로 이것인 것을. 해탈 참된 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자, 여기서 ‘얽힌 번뇌 끊고 보니’라고 했습니다. 어때요? 번뇌를 끊기 위해 많이 노력하시죠? 끊어지던가요? 어떻습니까? 번뇌를 끊기 위해 부처님에게 가서 빌기도 하고, 진언도 외우고, 화두도 들고, 염불도 하고, 위빠사나도 하고, 온갖 것을 다 할 텐데, 어떻던가요? 번뇌가 끊어져야 해탈이라고 했는데 끊어지던가요? ‘천상천하 걸릴 것 하나 없고.’ 실제적으로 해보니까 어떻습니까?

 

- 대중 : 끊으려고 하면 더 생각이 나요.

 

그렇죠. 더 생각이 나지요? 그런데 잘 관찰해보면 사실은 염불하면 한 번 하는 만큼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어요. 실제로는 화를 한 번 안내면 덜 낸 만큼 번뇌로부터 해탈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잘 관찰 하지 않는 거예요. 관찰은 하지 않고, 번뇌가 끊어진 상태를 그림으로 그리고만 있지요. 현실이 내가 그린 그림하고 안 맞는 거예요. 이게 환상이고 착각인 거죠. ‘번뇌가 끊어지면 이럴 거야’, 이러면서 번뇌가 끊어진 상태를 스스로가 조작하고 있는 셈이죠. 
 
번뇌는 염불하는 대로 즉각즉각 끊어지게 돼 있어요. 번뇌의 감옥으로 부터 바로바로 해탈하게 돼 있어요. 화두 들면 화두 드는 대로, 염불하면 염불하는 대로, 진언 외우면 진언 외우는 대로, 즉각 이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돼요. 그러면 번뇌로부터 해탈한 거잖아요. 그렇죠? 번뇌에 갇혀 있다가도 정신 차려 염불하면, 그 순간 바로 번뇌로부터 벗어나오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즉각즉각이에요. 하는 대로 바로 되기 때문에 시간이 안 걸려요. 목마를 때 물 마시면 목마름이 즉각 해결되나요, 아니면 십 년 후에 해결되나요? 어떻습니까? 즉각 해결되죠? 이것도 똑같아요. 

- 대중 :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목마름이 또 오잖아요.

 

그러니까 또 마셔야죠. 한 번 마시고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입니다. 한 번 하면 다 끝난다는 생각이 착각인 거예요. 그런 일은 없어요. 끊임없는 연속이에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저 다리 밑에 흐르는 물과 같은 거예요. 물은 늘 있죠? 그러면서도 늘 흘러가고 있어요. 내 인생도 저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내 마음도 저렇게 흘러가고 있고요.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딱 붙잡고 싶어 해요. 내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따로 붙잡으려고 하는 이것이 집착인거죠. 망상인 것이고.

 

왜냐하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만약에 저 흐르는 물중에서 어떤 부분을 붙잡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흐르는 물이 아닌 거잖아요. 고인 물인 거죠. 고인 물은 썩습니다. 썩으면 어떻게 돼요? 독이 돼요.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늘 마치 로또 복권 당첨 되듯이 딱 한 방에 되기를 바랍니다. 한 방에 끝나기를 바라죠.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한 방에 되는 것이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무지와 어리석음이죠. 그것이 무명입니다.

 

목마를 때 물 마시면 즉각 목마름으로부터 해탈하듯이, 염불하면 즉각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물 마시는 순간, 목마름 때문에 겪는 고통이 바로 해결됩니다. 그렇지만 못 견디게 목마르지 않고 그저 평범한 상태에서 물을 마시면 어떨까요? 짜릿한 재미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별로 그런 재미가 없죠. 그것과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까 꼭 짜릿해야만 좋은 것이라고 하는 생각, 이것이 망상, 어리석음이라는 거죠. 짜릿해야만 좋은 것이라는 생각, 이것 자체가 무지와 착각이라는 거죠. 그것은 좋은 것이지도 않고, 짜릿하다고 해서 좋아지지도 않습니다. 

 

3.
구체적으로 한 번 볼까요? 번뇌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주로 ‘번뇌’라고 하면 ‘나쁜 생각’, ‘어지러운 생각’ 이렇게 생각하는데 나쁜 생각만이 번뇌는 아니에요. 예를 들어 볼게요.

지금, 여기라고 하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나의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실상사 설법전이라고 하는 세계에 있습니다. 여기서 번뇌가 무엇인가요. 실상사 큰 방에 있어야 할 시간이면,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여기 있어야 되죠. 그런데 실제 큰 방에 몸이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도 여기 앉아 있나요? 그렇지 않죠? 마음은 제멋대로 돌아다니죠. 이게 문제인거죠.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은 우리가 ‘큰 방에 앉아 있자’, 그리고 ‘큰 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듣자’ 이렇게 하기로 한 거잖아요. 이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인 거죠. 이것 말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다 망상인 거예요. 부처님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하나님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돈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누구를 속여 먹으려고 생각해도 망상이고.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이 온전하게 함께 있는 것 말고는 다 망상이에요. 꼭 나쁜 생각만 망상이 아니란 말이죠.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이 오롯하게, 온전하게 있도록 하는 걸 우리는 참선이라고 얘기하고, 염불이라고 얘기하고, 기도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참선하는 사람, 화두 드는 사람에게는 화두 말고는 어떤 생각도 다 망상인 거예요. 내가 지금 화두를 들려고 마음먹었으면 마음먹은 대로 화두를 들어야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만약 화두를 들려고 마음먹었는데 화두를 드는 중에 부처님 생각을 한다든가 또 다른 좋은 일을 생각한다든가 하면 이것은 망상일까요, 아닐까요? 이런 것도 다 망상인거예요.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서 위빠사나를 수행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그 자체에 오롯해야 되지, 이것 말고 화두를 들겠다고 생각한다든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다든지 하면 이것도 다 망상인거예요.

 

거듭 말하지만 좋은 생각이라고 해서 망상이 아닌 게 아니라는 거죠. 몸과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이 현장, 이 시간, 이 장소에 온전하게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에 오롯하게 몸과 마음이 하나로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다 번뇌인 거예요. 어제를 생각하는 것, 내일을 생각하는 것, 애인을 생각하는 것, 부처를 생각하는 것 다 번뇌인 거예요. 지금 여기에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하나가 돼 있지 않은 한 다 번뇌인 거예요.

 

여기서 ‘번뇌를 끊고 보니’ 그랬는데, 이 번뇌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 온전하게 있으면 번뇌가 끊어지는 거예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이죠. 부처를 생각해보죠. 제가 늘 ‘노는 입에 염불 하세요’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최고의 수행은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 시시하게 생각해(웃음).

 

마음도 놀리고 몸도 놀리고 입도 놀려 놓으면 뭘 할 것 같아요? 대부분 쓸데없는 짓을 해요. 술 먹으러 가자. 고기 먹으러 가자. 만날 이런 거 하는 거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 욕이나 하고.(웃음) 놀려 놓으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별로 좋지도 아니한 것들을 막 하는 거예요. 마음으로는 과거에 누가 나한테 잘못한 것들을 끌어들여가지고 막 신경질내고 화내고, 이게 다 감옥이죠. 입으로는 누구 흉이나 보고 험담이나 하고 이게 다 감옥인 거죠. 몸으로는 해야 될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빈들빈들하고 딴 짓거리하고. 이게 다 감옥이죠. 다 번뇌로 이루어지는 것들이에요. 

예를 들어서 지금 상황은 술을 먹어야 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술 먹으면 안 돼요. 그럼 지금은 뭐 해야 돼요? 지금은 여기 앉아서 얘기하고 들어야 해요. 지금은 얘기하고 듣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거 말고 다른 것을 하면 다 망상인 거예요. 그런데 술이 먹고 싶어 미치고 환장하겠어. 그래서 술 먹으려고 온갖 궁리를 한다. 그럴 수 있잖아요. 이게 망상이고 번뇌인 거죠. 이럴 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술이 먹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하겠다’라고 하는 번뇌의 감옥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즉각 정신차려서 노는 입에 염불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마음으로 ‘관세음보살’하고 생각한다. 입으로 ‘관세음보살’하고 부른다. 염불 하겠다 마음먹고 하는 거니까 그래도 정중하게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입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몸으로 ‘관세음보살’ 부르는데 집중하는 것. 마음먹고 하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아, 술 먹고 싶어 미치고 환장 하겠네’하면, 이 때 나는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한 놈일 뿐인 거예요. 왜냐면 인간이란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되는 거니까. 아무리 법당에 앉아 있어도 소용없어요. 가부좌하고 앉아 있어도 소용없어요. 아무리 참선하고 기도하고 있어도 소용없고요.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하겠네’라고 하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 그 순간은 법당에서 가부좌하고 기도를 하던, 절을 하던, 참선을 하던, 뭘 하던 그냥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 돼요. 실제로 대부분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또 그렇게 안 하려고 했는데도 그렇게 됩니다. 

그럴 때 얼른 정신 차려서 ‘어, 이거 아니지’, 그러고 ‘관세음보살’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부릅니다. 관세음보살을 지극하게 생각하고 부르려니까 몸도 거기에 맞게 집중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거 마음먹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술 먹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할 인간이었는데 ‘어, 이거 안 돼지’ 하고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데 집중한 태도를 견지하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될까요? 바로 술 먹고 싶어 환장한 놈에서 벗어나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사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기 위해 집중하는 사람이 되죠. 술 먹고 싶어 미치고 환장한 인간에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인간으로 태어나면 이건 환골탈태한 것 아닌가요? 한 순간도 시간이 걸리지 않고 즉각 효과가 나타나요. 늘상 되냐, 안되냐는 여러분들이 계속 하냐, 안 하냐의 문제예요.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면 하는 만큼 반드시 즉각즉각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해도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고 또 잘못 알고 잘못 믿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도 해요. 그러기 때문에 계속 뭔가 죽어라고 하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바로 즉각즉각 되고 있습니다. 마음먹고 생각하고 말하고 또 거기에 지극하게 몸과 마음을 집중하기만 하면 즉각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불교는 모든 것이 즉각 된다고 해요. 제대로만 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루어진다. 바로 증명된다. 그래서 불교가 훌륭하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가 희망의 종교라고 이야기하고 불교를 하면 행복해진다고 하는 거예요. 즉각즉각 되기 때문에 신이 나죠. 하는 만큼 바로바로 이루어지는데 왜 재미가 없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현실을 그렇지가 않지요. 10년, 20년을 해도 기대한 것처럼 안 돼요. 그러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노래 가사를 보니까 이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뭘 해야 하죠? 법성게를 해야죠. 법성게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것도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망상이죠. 왜냐하면 법성게 이야기를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지만 비록 법성게의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법성게 내용이었어요. 형식은 우리가 딴 짓거리를 한 셈인데, 내용을 보면 법성게 내용을 더 평범하게 더 일상 속에서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얘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4.
자, 그러면 오늘은 교재 35쪽을 읽어보겠습니다. 지난번에 한 데까지 읽겠습니다.

 

‘여기 한 사람 있으니 그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인드라망 무늬입니다.

이 두 마디로 표현되어진 것을 그림으로 그린 거예요.

 

천 년 전에도 저 모습이었고 천 년이 지난 오늘도 저 모습이고 앞으로도 저 모습이라는 것이죠. 이 말이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네’ 이렇게 표현되는 거죠.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진 적 없고.’ 모든 존재는 그물의 그물코처럼 전부 다 연결되어 있죠. 이것이 내 인생의 진면목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것 하고 관계없이 나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 그림에서 제일 아래 있는 사람이 나인데, 저것만 떼어내어서 ‘나는 이렇게 생기고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하고 그렇게 알고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어떨까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으로만 그렇지 실제는 나만 떨어져서 내 인생이 따로 있을 수가 없어요. 실제가 그런데도 우리는 실제와 완전히 어긋나게 알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길을 잃고 있는 겁니다.

 

‘본래 정해진 이름도 없고 본래 정해진 모습도 없으니.’

 

제가 도법인데요, 제가 도법이라는 것은 알지요? 본래부터 도법이었겠어요? 누가 만들었겠어요? 본래는 이름이 없었어요. 본래는 그냥 한 존재가 있을 뿐이죠, 인연으로 이루어진 한 존재. 거기다가 사람들이 도법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 거예요. 다른 이름을 붙이면 될까요, 안 될까요? 필요하면 다른 이름을 붙여도 관계없어요. 또 행위 하는 것에 따라 이름이 달라져요. 도둑질 하면 뭐라고 해요? 도둑놈이라는 이름이 붙어요. 사기 치면 사기꾼이라는 이름이 붙고. 역할에 따라서 이름이 붙는 거잖아요. 그래서 ‘본래 정해진 이름이 없고’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저 중에서 제일 밑에 것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끼리의 약속이에요. 본래는 사람이라는 이름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죠. 본래는 그런 것이 없어요. 저 중에서 밑에 것만 떼어내서 ‘나’라고 하는 것, 이것도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에요. 실제로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래서 ‘본래 정해진 이름도 없고 따로 정해진 모습도 없다.’라고 했어요. 도법이라고 하는 인간도 정해진 모습이 있습니까? 열 살 때하고 스무 살 때,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긴 한데 열 살 때는 아이잖아요, 스무 살 먹으면 청년이고. 모양새가 다르죠. ‘도법’이라는 이름으로 정하는 것은 인간들이 필요에 따라 그렇게 하는 거예요. 실제하고 관계없이 그렇게 규정하는 거예요.


‘그 내용은 오로지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그 밖에 다른 길이 있지 않네.’

 

(탁자 위의 물컵을 집어들다가) 어, 컵에 물이 없네? 다들 물이 있는 줄 알았죠? 저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게 착각이에요.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대중: 하하하.) 이런 것을 업대로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습관대로 한다는 거죠. 습관대로 하는 한, 업대로 하는 한 우리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길이 없어요. 업대로 하지 않고 정신 차려서 실제대료 해야죠. 지금 사실을 확인 해보니까 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없어요. (물을 가져오고 나서) 만일 습관대로 했으면 물을 마실 수가 없죠. 정신 차려서 실제대로 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 됐지요. 그랬잖아요.

 

제가 지금 물을 마셨는데요, 이 물이 시원할까요, 시원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실제 해본 저만 알 수 있죠. 이 얘기가 그 얘기예요.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여타의 다른 길이 있지 않다. 직접 해보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도 닦아서 깨달으면 도인이 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말로는 그럴듯하죠. 그래서 ‘그 분은 도인이야’라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업자득이라고 그랬어요.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된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행위 하는 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는 그냥은 알 수가 없어요. 직접 해 봐야만 알아요. 우리는 저 사람 도인인데? 이렇게 알고 믿었어요. 그런데 만일 행위 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인은 도둑질해도 도둑놈 안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행위 하는 대로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도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도둑질을 하면 그 사람은 그냥 도둑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복잡한 설명 필요 없이 직접 실천하는 것을 보면 바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다른 길은 있지 않네.’라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법성게의 전부이고, 화엄경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부연설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니.’

 

다 인연 따라 이루어지니까 물이 그릇 따라 모양을 바꾸는 것과 같은 거예요. 물이 네모난 그릇을 만나면 네모난 모양을 하고, 세모 그릇을 만나면 세모 모양이 되고. 인생도 그렇게 정해진 것 없이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거예요. 정해진 이름도 없고 정해진 모양도 없다는 거죠.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가 또한 그러하네.’

 

저 그림에서 네 발 달린 짐승이라고 하는 그물코를 쫙 끌고 가면 어때요? 다 따라오죠? 저 쪽에서 보면 뭐가 보여요? 네 발 달린 짐승만 보이는 거예요. 네 발 달린 짐승이 그대로 전 우주처럼 되는 거죠. 네 발 달린 짐승이 곧 그대로 우주다, 이렇게 얘기가 되는 거죠. 반대로 이쪽 물고기 그물코를 쫙 끌고 오면 어때요? 전체가 물고기로 딸려오는 거예요. 물고기가 곧 우주요, 이렇게 되는 거죠. 인간이라는 그물코, ‘나’라고 하는 그물코를 들면 어때요? 전체가 나라고 하는 그물코를 따라오게 돼 있죠. 이런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들도 또한 그러하네.’ 이것은 공간적 입장에서 나의 참모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대로 지금 여기 한 순간이요,

지금 여기 한 순간이 그대로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들과 지금 여기 한 순간이

함께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시간마다 따로 따로 이뤄지네.’

 

이것은 시간적 입장에서 나의 참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보면, 앞에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이것은 공간적 입장에서 지금 여기 나의 진면목을 설명한 것이고 그 다음에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것은 시간적 입장에서 지금 여기 나의 진면목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니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들도 또한 그러하네.’ 이것은 공간적 설명입니다.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대로 지금 여기 한 순간이요, 지금 여기 한 순간이 그대로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들과 지금 여기 한 순간이 함께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시간마다 따로따로 이뤄지네.’ 이것은 시간적 설명이죠. 지난달에 여기 까지 읽었는데 오늘 설명을 조금 더 해본 겁니다. 

 

5.
38쪽에 가면 그림이 세 개가 있죠? 첫 번째가 법성게 첫 구절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이것은 공간적으로 무한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것은 시간적으로 영원을 나타냅니다. 무한과 영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첫째 원상이죠. 우리의 생명은 이렇게 무한하고 영원하다, 이런 얘깁니다.

 

이 그림을 놓고 보았을 때, 시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80년 전에 태어나서 내 인생이 시작되고 80년쯤 살다가 내 인생이 끝나서 죽게 됩니다. 하지만 이 그림으로 봤을 때 시작이라고 하는 의미의 태어남과 끝이라는 의미의 죽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그런데 왜 시작으로서의 태어남과 끝으로서의 죽음이 있다고 믿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시작으로서의 태어남이 있다고 생각해서 태어남은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끝으로서의 죽음이 있다고 생각해서 죽음은 나쁜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태어나면 웃고 죽으면 곡을 하고 그러잖아요. 다 무지와 착각의 결과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실제로는 이 원상 같은 겁니다. 시작으로서의 태어남과 끝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 망상, 번뇌가 만들어낸 것일 뿐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이 무지와 착각으로부터 깨어나자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거예요.


두 번째는 뭐예요? 점이 세 개 있죠? 이것은 불, 법, 승을 나타내는 그림입니다. 이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은 영원과 무한의 존재인 생명, 영원과 무한이라고 하는 지금 여기 나의 참모습, 이 내용대로 삶을 잘 알고 살아간 사람이 부처님이에요. 두 번째, 이 내용대로 잘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뭐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세 번째, 이 가르침 내용대로 삶을 살고 이 가르침 내용대로 이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불교인들의 모임 즉, 승가공동체이죠. 요즘 우리는 사부대중 공동체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두 번째입니다. 이것은 조계종단을 상징하는 표시죠. 

제일 아래 그림은 뭘까요? 이런 내용을 일반화 시킨 겁니다. 기독교도 할 수 있고, 불교도 할 수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도 할 수 있고, 종교가 있는 사람도 할 수 있고, 동양 사람도 할 수 있고, 서양 사람도 할 수 있고, 진보도, 보수도, 좌파도, 우파도,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누구나 다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세 번째 것이죠. 원래 원상은 안 넣었었는데 이것을 불교 쪽에 좀 친하게 하려고 원상을 넣은 거예요. 이것이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거예요. 이것을 잘 보면 법성게의 내용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설명한 것까지가 우리가 알아야 될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고요, 그 다음은 능인 즉, 석가모니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삶을 살아가니까 ‘그 삶이 좋더라’하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누구예요?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라고 표현되었는데,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들이죠. 부처님이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니까 참 좋았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가자는 내용이 시고행자(是故行者) 그 뒤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또는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보니까 참 좋더라. 석가모니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니까 좋았듯이 우리도 이제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자. 왜? 그렇게 살면 좋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법성게라는 거죠. 일단 여기까지 하고 다른 설명을 좀 더 하겠습니다.

 

 

6.
우리 인생은 흐르는 강물, 그보다 더 정확하게 비유를 들면 망망대해 같은 거죠. 우리의 생명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바다처럼 활동하고 있다. 어떻게 흘러가고 활동하고 있는가?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활동하고 흘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활동하고 흘러가는데 그 삶이 괜찮을 것인가, 괜찮지 않을 것인가는 누구한테 달려있는가? 본인한테 달려있다는 얘깁니다. 본인이 ‘인생이란 강물 같은 것이구나.’ ‘인생은 바다와 같은 것이 구나’ 이것을 잘 알고 거기에 주체적으로 잘 적응하고 활용해서 살면 그 삶은 괜찮은 삶이 됩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게 되면 그 삶은 늘 고달프게 되는 거죠. 죽음이 늘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죠. 반면 변화활동, 순환활동이 있을 뿐 끝으로서의 죽음이란 본래 없다라는 사실을 잘 알면 죽음이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죠.


이것을 작품으로 잘 표현한 것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라는 책입니다. [싯다르타]는 조그만 책이니까 가능하면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특히 나이 드신 분들. 거기에는 인생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뱃사공인데 후계자한테 뱃사공 일을 넘겨주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난 살만큼 다 살았어. 나 이제 갈게. 잘 있어.’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유유히 떠나갑니다. 어디로 가느냐? 숲 속으로 갑니다. 숲 속으로 간다는 것은 바로 죽으러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보내는 사람도 ‘그래, 그 동안 참 애썼소. 참 잘 살았소. 잘 가시오.’ 이렇게 보냅니다. 굉장히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죠?

 

죽음은 나쁜 거야. 죽으면 끝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태어나서 사는 것이 생명활동의 하나인 것처럼, 강물 흐름의 하나인 것처럼, 바다 파도의 하나인 것처럼, 죽음도 강물 흐름의 하나야, 바다 파도의 하나야. 이렇게 죽음을 잘 알고 보면 사실은 그렇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되는 거죠. 그래, 난 파도 노릇을 할 만큼 했어. 잘 했어. 난 이제 바다로 돌아갈 거야. 숲으로 간다는 것은 이런 거잖아요. 삶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소화시키면 우리 삶은 그야말로 바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마치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가듯이.

 

어떻게 생각되세요? 인생을 그렇게 살면 좀 괜찮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살다가 떠나면. 떠나는 사람도 괜찮고, 보내는 사람도 괜찮고. 젊은 사람들한테는 이것이 별로 실감나지 않을 거예요. 나이 많은 분들은 보시면 대단히 도움이 될 겁니다. 저도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그 정도인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최근에 그것 가지고 공부하자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봤어요. 다시 보니까 놀랍게 잘 설명하고 있더라고요. 법성게를 잘 설명한 책, 화엄경을 잘 설명한 책, 인생을 잘 설명한 책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권하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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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393호 2015. 6. 5>에 실린 글.

공부가 되고 자극을 주는 말씀이 참 많네. 나를 돌아보게 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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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되는’ 책을 만드는 즐거움을 알려주마

— 알마 정혜인 대표

 

김수한 편집자 popnamu@hanmail.net

 

 


지난 봄 <한겨레>에 실린 김민기 선생의 인터뷰 기사가 꽤나 화제였던 것 같다. 이진순 씨가 오랜만에 지면으로 불러낸 김민기의 근황은 특유의 목소리와 제스처의 질감이 생생히 전달되는 듯했다. 시종 어눌하면서도 단호하고, 수줍어하면서도 뚜렷하게 삶의 마디마디에 새겨진 요철의 시말을 전하는 ‘조용한 거장’의 일대기는 그를 아는 이들에겐 당대의 깊이를 새삼스레 확인하는 계기가, 그 이름이 낯선 이들에겐 신선한 꼰대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의 문화판에서 이리도 묵묵히 제 뜻과 길을 벼려온 ‘딴따라’가 몇 있겠는가. “문 닫을 때까지 돈 안 되는 일을 할 거다”라는 한결같은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 갈수록 귀중하고 드문 시대. 그처럼 뚝심 있게 ‘돈 안 되는 책’을 만들어가는 출판사도 몇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어떻게 일하고 먹고살아 갈까. 그 노하우를 알고 싶어 지난 5월 15일 스승의날 연남동에 자리한 알마 출판사에서 정혜인 대표를 만났다.

 

알마는 어떤 출판사입니까

김수한(김) — 10년 전에 연남동으로 출근하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조용한 주택가라 산책하기 좋은 동네였는데, 그 사이 변화도 있지만 여전히 사람 냄새가 나고 ‘저녁이 있는 삶’이 있는 동네 같습니다. 알마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 2년 정도 되지요? 장소의 기운일까요? 그 사이 알마 책들도 더 부드럽고 환해진 것 같습니다.

 


정혜인(정) — 파주에 있을 때보다 일하기 편해요. 저자 미팅이나 서점 방문도 파주보다 수월해요. 인쇄 감리는 파주로 들어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요. 로케이션의 의미는 근무자의 일상과도 관계가 커요. 창문을 열어두면 이웃 카페에서 커피 볶는 냄새도 흘러들어오고, 더러 물건 파는 분들의 스피커 소리도 들립니다. 사람 사는 동네죠. 파주출판단지는 그런 면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김 — 알마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여 몇 편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었습니다. 반가운 사실 하나가 눈에 띄더라고요. 보통 출판사 인터뷰는 대표이사의 사진만 실리는데, 알마는 책을 만드는 식구들 단체 사진이 주로 소개되어 보기 좋았습니다.

 

정 — 대표 혼자 책을 만드는 건 아니니까요. 안타깝지만, 오늘은 신간을 마무리하는 날이라 단체 사진은 찍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 — 예전에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꼭 가난하라는 법 없듯이, 편집자가 가난한 직업일 까닭은 없다’고 말씀해주셨지요. 편집일을 해서도 넉넉히 먹고살 수 있다는 말씀에 힘이 났는데, 지금도 그러한지 갸우뚱합니다. 알마 살림은 괜찮은지요?

 

정 — 사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웃음) 제가 평소에 그런 말을 자주 해왔으니 그 기억이 맞을 겁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50만 부, 100만 부 넘게 팔린 책들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실제로 그 책들로 큰돈을 벌기도 했고요.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다만 하고 싶은 일 재미있게 하면서 건강한 소시민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넉넉한 거 아닌가요? 알마 살림살이는 직원 10명이 먹고살 정 도는 됩니다. 작년에 전년 대비 매출액이 28% 올랐고, 영업이익도 6% 정도 됐어요. 시장이 좋지는 않지만 나름 잘 지냅니다. 책의 물성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고, 원고 계약도 활발한 편이라 현금 운용은 빠듯하지만요.

 

셀러로 기획하는 책은 별도로 계획을 짜지만, 대체로 손익분기를 1000부에서 맞추려고 합니다. 합리적인 관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책값을 제대로 받으려고 해요. 거칠게 말해서 초판을 소화할 수 있다면 다른 책 한 권을 다시 출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는 거예요. 알마에서는 1000부 나가는 책을 실패로 보지 않습니다. 물론 1000부도 안 나가는 책이 있긴 하지만, 더 나가는 책도 있으니 상쇄가 됩니다. 중요한 지점이 몇 있는데,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알마는 구간 대 신간 매출이 5대 5에서 4대 6 사이인데, 매년 큰 변동이 없습니다. 알마가 문을 연 지 올 6월이면 만 9년이 되는데, 절판된 책이 총 출간종수의 5%가 안 돼요. 연 500부만 팔려도 중쇄를 찍습니다. 그래서 알마는 주문부수에 비해 일일주문장이 길어요. 작은 부수가 모여 알마의 총매출이 되는 거죠. 지난달에 재론칭한 『남해 유배지 답사기』(박진욱)도 악성 재고라 할만한 800여 부를 제목도 바꾸고 표지도 새롭게 해서 출고했는데 죽었던 책이 살아나서 500부를 더 찍었어요. 기쁜 일이죠. 출판업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우리가 만든 책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김 — 알마 하면 책 본문 뒤에 제본한 간이 도서목록 리플릿이 떠오릅니다. 몇몇 출판사들이 때때로 하지만 알마처럼 꾸준히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정 — 권당 리플릿 비용이 10만 원 정도 들어요. 그만하면 비용 대비 훌륭하죠. 노출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단행본 시장에서 마케팅 비용을 아끼면서 홍보하려는 몸부림이죠.(웃음) 홈페이지는 따로 없고요. 페이스북과 트위터 정도 하고 있는데요. 출간 이후 저자와 독자가 직접 만나는 이벤트를 자주 엽니다. 독자들도 예전처럼 수동적이지 않고 저자를 만나려는 분위기라 출판사로서는 책을 적극적으로 알리기에 좋은 기회죠.

 

김 — 문학동네 계열사로 있다가 독립해 이사하시면서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셨지요? 협동조합 절차는 완료가 되었는지요?

 

정 — 아이쿱생협이 55% 지분을 투자하고, 45%의 지분을 저와 직원들, 몇몇 저자 분들이 나눴어요. 협동조합 기본법의 후속 입법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여서 ‘세금폭탄’을 우려해 아직 법적으로는 주식회사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내용 면에서는 일부 변화가 있었는데요, 사안에 따라 결정권에 자잘한 변화들이 있었고, 핵심은 이익 배분 시스템을 사실상 협동조합 체제로 전환했다는 겁니다. 대부분 출판사들의 매출 대비 인건비 비율이 통상 10~15%로 압니다. 알마는 전년도 기준 24% 가까이 됩니다. 어떻게 회사를 유지하느냐고 걱정해주시는 분도 계십시다. 편집자는 책으로 말하고, 회사는 인건비로 말하라?! 투자 대비 이익을 많이 내는 것만이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전부터 노조 설립도 독려했는데, 드디어 노조도 만들어졌어요. 올해 노조와 첫 연봉협상을 하면서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연봉협상 시기가 다가왔는데도 인상폭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인상폭을 제시해달라고 했더니 그제야 회의를 거쳐 3% 인상안을 제시하더라고요. 어용노조 만들지 말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죠. 그동안 마땅한 이런 과정들이 무시되었는데, 반성할 지점입니다.

 

김 — 출판공동체를 지향하시는데, 일반 기업의 일하는 방식과 크게 다른가요?

 

정 — 출판공동체라고 해서 일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매사에 회의와 토론을 거쳐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권한에 따른 책임과 리더십의 집중도 당연히 필요한 거니까요. 또 제가 살펴야 하는 것들도 분명 있고요. 많은 부분을 직원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게 하려고 애쓰는 건 있어요. 이건 출판공동체와는 무관하고요. 슬슬 은퇴 준비를 하려는 제 속셈인 거죠.(웃음)

 

김 — 정혜인 대표님은 ‘무서운 분’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카리스마 작렬이라는….

 

정 —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감정 표출의 강약이 분명한 편이죠. 제 나름의 원칙이 있는데요. 제작 사고를 낸다든지, 교정 과정에서 본문 일부가 날아가 책을 다시 찍어야 한다든지, 표지에서 글자 하나가 사라졌다든지, 이런 큰 실수는 한두 마디로 끝냅니다.

 


더러 위로도 하죠. 편집자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다고. 본인은 얼마나 황망하고 부끄럽겠어요. 저까지 보탤 필요 없죠. 하지만 작은 실수들, 실수도 능력인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결국 책을 만드는 일은 ‘안다’ ‘알고 있다’에서 그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체화되어야 하는 거죠. 가령 조사나 접속사의 쓰임을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잘못된 부분을 짚어내지 못한다면 그건 조사와 접속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디테일입니다. 최고인 사람은 작은 것에 강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작은 것이 큰 변화를 불러오듯, 소소한 요소들이 모여 좋은 책이 만들어진다고 봅니다.

 

알마는 어떤 책들을 만듭니까

김 — 지난 5월 14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무죄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희생자는 참기 힘든 고통 속에 무연한데, 가해자는 어느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 이 기묘한 상황이 참괴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지, 말문이 막힙니다. 누군가 이 사건을 추적해 논픽션을 만들어주길 고대했는데, 신문을 보니 『거짓말 잔치』라는 제목으로 조만간 출간된다는 소식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혹시 이렇게 뜨거운 책이라면, 알마에서 나오나 하고 잠깐 기대가 일었습니다.

 

정 — 알마는 아니에요. 그런 책은 꼭 필요하죠. 밀양이나 세월호, 쌍용자동차 같은 안타깝고 충격적인 일에 알마가 함께하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책도 인연인 것 같아요.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닌데, 마음먹는다고 해서 책을 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김 — 알마에서 펴내는 책들을 보면 뜨겁고 위험한 이슈를 건드리는 출판사라는 느낌이 듭니다. 재미나고 술술 읽히는 책보다는 무겁고 딱딱한 책들도 많고, 어떤 뚝심과 결기의 집요함이 느껴지는 목록입니다.

 

정 — 그런 책들은 이슈를 타고 드러나는 것이고, 차분하고 재미있는 책도 꽤 있습니다. 알마 책들의 무거움에 대해 변을 좀 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책을 만든다는 것은 여전히 운동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인데요. 현재성의 가치를 높이 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샘깊은오늘고전’ 시리즈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오늘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놓을 수가 없어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행본도 매체라는 사실입니다. 신문이나 TV 같은 제도권 매체는 큰 목소리만 노출시킵니다. 단행본은 다기한 작은 목소리로 다양성을 확보하고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작은 단행본 출판사들이 기획력을 발휘한다면 한국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때 다양성은 책을 왜 읽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김 — 현재성과 다양성에 대한 강조는 요즘 소란스러운 고전과 인문학 열풍과는 좀 거리가 있는 듯합니다.

 

정 — 열풍은 어차피 지나가는 것입니다. 고전 열풍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요. 문자나 텍스트는 현재의 욕망을 기록하기 마련입니다. 기원전 2000~3000년 전 수메르 문명으로 거슬러 가볼까요? 그들은 문자로 무엇을 거래했는지 기록했습니다. 서양이 그렇게 거래 기록을 문자로 남겼다면, 동양의 문자는 당대의 체제 유지와 상류층을 위한 자기 계발의 도구였습니다. 한무제의 필요에 의해 그가 다시 불러낸 공자 말씀이 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필독서가 됐는지…. 물론 연구자나 깊이 공부를 해볼 목적이라 면 당연히 읽어야겠지요. 전 국민의 필독서, 혹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그런 책들이 들어가 있다는 건 기이한 일입니다.


알마 저자인 백지연 선생이 출연하는 드라마라 요즘 <풍문으로 들었소>를 챙겨 보고 있는데요. 대형 로펌 대표인 상류층 주인공이 자식들에게 플라톤의 『국가』를 읽히고, 자신의 속물성을 치장하기 위해 공자님 말씀을 들먹입니다. 어이없어 실소가 나오더라고요. 제국의 통치, 기득권 체제 유지를 위해 『논어』를 읽힌 맥락이 지금 한국사회와 어떻게 접속하고 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지요. 지금은 오히려 묵자를 읽어야 할 때 아닌가요? 고전을 다루더라도 그것의 현재적 의미에 주목하고 새로 읽기를 강조해야 합니다. 저희 사마천의 『사기』 완역 시리즈가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의 의미, 좋은 책이란 무언가를 역사적으로 탐문한 『책의 정신』(강창래)도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책입니다.

 

김 — 출판 기획은 반 발 앞서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한 발 앞서면 너무 이르다는 말이기도 한데, 알마 책들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일반 독자들의 관심사와 독서 습관의 경계를 살짝 넘어간 책들이라고 할까요? 무척 낯설거나 무거워 보이는 기획들, 가령 『누가 무지개 깃발을 짓밟는가』(스티븐 V. 스프링클)나 『이븐 할둔』(이브 라코스트), 올리버 색스 전작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에세이들,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장 마르크 드루앵),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제이 그리피스), 『난학의 세계사』(이종찬) 같은 책들은 어느 출판사에서 시도할 수 있을까요?

 

정 — 거대 담론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와 문체를 찾습니다. 더해서 한국사회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그 비밀과 작동 방식을 들추는 책들,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세상의 여러 문제를 추적하는 논픽션 책들을 펴내려 합니다. 가령 『우유의 역습』(티에리 수카르), 『감시의 시대』(아르망 마틀라르), 『검열에 관한 검은책』(에마뉘엘 피에라 외),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빌프리트 봄머트), 『질병판매학』(레이 모이니헌 외) 등이 그런 책들인데, 판매도 꾸준하고 반응도 느껴져 보람을 느낍니다. 학제간의 경계에 갇히지 않은 연구, 성소수자나 장애인 등 마이너리티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려 합니다.

 

김 — 한 발 앞선 기획인 데다가, 책을 만드는 물리적 시간이 길어 한 발 더 늦어 판매 포인트를 놓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정 — 알마에서 내는 책들의 시의성이 부분적으로 지속되고 보편성을 갖는 터라 약간의 수익을 내는 데는 부족하지 않아요. 판매 포인트를 놓치는 건 매우 안타깝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힘 쏟아 만들어서 길게 가는 겁니다.

 

김 — 기획의 대부분을 대표님이 주관하시나요?

 

정 — 전에는 그랬어요. 올해부터는 편집자들의 기획 역량을 강화하려 합니다. 1월부터 2시간씩, 주 2회 기획회의를 하고 있어요. 자율적으로 진행해보라고 맡겨 뒀는데, 기획안들이 느슨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초부터 다지자는 뜻에서 기획회의를 정례화하고, 트렌드와 매체 분석 등을 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획안을 작성합니다. 기획안의 완성과 실현은 어차피 기획자의 몫이니 기대하고 있습니다.

 

알마는 어떻게 기획하고 편집합니까

김 — 알마에는 스타일이 강하고 까다로운 필자들이 많아 보입니다. 고종석, 손석춘 선생부터 올리버 색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까지 국내외 필자들의 면면이 ‘세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 — 네, 저자 관리가 쉽지 않아요. 모든 편집자의 고민일 텐데요. 그래도 한 가지는 지키려고 애씁니다. 쉽지 않지만 저자들의 사소한 말에도 귀 기울이는 것. 번역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저자가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알아야 편집자도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펼칠 수 있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어떤 맥락에서 이 문장이 들어갔는지 꼼꼼히 살피고 매사에 의문을 가지는 태도가 우선돼야 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히친스의 『논쟁』에 썼던 표지글인데, 편집자에게도 꼭 필요한 태도라고 봅니다.

 

김 — 필자와의 대면 접촉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안과 설득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 — 중간에 아는 사람을 통한 소개로 필자를 접촉하는 방식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이메일, 편지, 만남의 단계로 관계를 트는데, 필자의 이야기를 진득이 듣고 우리의 생각을 타진합니다. 저는 지난해부터 기획 미팅에 거의 나가지 않고 편집자들이 전담하고 있습니다. 판단을 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살펴보는 경우는 있지만, 실무 교정에서도 손을 뗐어요. 『고종석의 문장』이 제가 마지막으로 본 교정지입니다.

 

김 — 이제 알마의 주요 책들을 훑어보지요. 먼저 인터뷰집 전문 출판사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터뷰 대담집의 본격 성공을 이끄셨잖아요?

 

정 — 그건 사실 창업 초기에 수익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한 처방전이었어요. 창업 초기 60권 정도 기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대만큼 수익을 얻지 못했어요. 만들고 싶은 무거운 책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살아남자 싶어서 좀 가벼운 책을 기획한 겁니다. 제가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데, 평전 시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만큼 미미하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좀 캐주얼하게 접근해볼 방법을 고민하다가 인터뷰집이라는 형식을 찾게 되었어요. 한국사회를 모자이크 해보자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들, 우리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김 — 이어진 인터뷰이들의 면면이 익숙하다가, 갈수록 신선한 인물이 세팅되었습니다. 광고인 박웅현, 만화가 이원복 선생 편까지는 출판과 먼 전문 분야가 아닌데, 이어 빗물박사 한무영, 법의학자 문국진 선생 편은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들려주어 반가웠습니다. 배우 신성일이나 영화감독 양익준, 김조광수, 뮤지션 신대철 편은 우리 대중문화의 두께와 너비를 새롭게 확인시켜준 반가운 기획인데요.

 

정 — 평전과 달리 그가 일궈낸 한 분야의 주제에 집중하자는 게 애초 기획 의도였으니까요. 뒤로 갈수록 주제가 더 잘 드러났을 뿐입니다. 철학자나 사상가, 학자들의 필생의 학문 주제를 집중 대담하는 책을 기획하고 싶은데 인터뷰어 섭외가 너무 어려워요.

 

김 — 알마 소개글에 ‘살아 숨 쉬는 인문 교양’과 ‘대안을 담은 교육 비평’을 펴낸다고 밝히셨어요. 주요 출간 토픽들을 보니 빈곤과 인권 및 평화 문제 등을 다룬 인문 사회 논픽션, 교양 과학과 환경 생태 관련서, 자녀 교육과 청소년 심리, 의료사회학과 음식 및 질병 관련 논픽션, 책읽기와 도서관 관련 책, 협동조합 관련 기획, 폐사지와 유배지 기행 등 문화 지리서, 대중문화 에세이 등이 여럿 보이고 특히 뇌과학과 범죄심리학, 언어학에 관한 책들이 많아 이채롭습니다.

 

정 — 수많은 인문 교양, 논픽션을 도서관 10진 분류법에 모두 채워 넣을 수 있을까요? 고전적인 장르 범주보다는 변화하는 지식장을 반영한 작은 계열, 겹쳐 읽을 수 있는 주제, 현재성을 띤 의제들로 기획 방향을 갈래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류와는 다른 시각, 생성중인 지식, 새로운 필자들의 책들을 주로 소개하게 된 거죠. 가령 범죄와 이상 심리, 법의학은 인간의 이해를 넓히는 창입니다. 선악의 구분을 넘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묻는 책들. 만드는 재미도 있고 판매도 좀 되어 범죄 덕을 봤어요.(웃음)

 

김 — 올리버 색스는 거의 전작이 소개된 듯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색스의 『편두통』은 읽어보려다 편두통이 나는 듯했습니다. 말기 암 투병중인 색스가 올초 <뉴욕타임스> 에 기고한 「나의 삶(My Own Life)」이라는 겸허한 성찰의 글이 감동과 화제를 주었는데, 책 판매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었나요?

 

정 — 『편두통』은 색스의 초기 작품이라 원문이 난삽합니다. 번역하고 감수하고, 두 분 선생님이 엄청 고생하셨어요. 교정 작업도 거의 6개월이 걸렸어요. 그렇게 어렵게 나왔는데도 편집자로서 부족함을 느끼는 책이에요. 색스의 저작물은 소량으로 꾸준히 나가는데요, 기사가 뜬 이후에 큰 폭은 아니고, 좀 움직이긴 했어요. 『뮤지코필리아』 는 순출고가 8000부를 넘어섰고요. 다른 타이틀들은 1000~2000부 선이에요. 큰 수익은 아니지만 손익분기는 충분히 넘어섰다고 봐야지요. 번역비도 많이 들고 교정 난 이도도 최상급이지만, 휴머니티가 살아 있는 그의 글은 매력이 넘칩니다. 올해 안으로 올리버 색스 자서전을 펴내려 하는데, 판매를 기대해봅니다.

 

김 — 알마 책의 물성 또한 눈에 두드러집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늘 “겉과 속이 따로 놀지는 않는가” “과하게 포장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자기 점검을 한다 하셨지요. 맞춤한 만듦새라는 감탄을 하면서도 과하게 비용을 쓰시진 않나 궁금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나온 『징비록』은 최근 만난 책들 가운데 최고의 물성을 보여주지 않나 부러웠습니다만, 1만 3800원에 그게 가능한지요?

 

정 — 그 책은 어린이용 징비록을 성인용으로 새로 편집, 디자인한 건데, 해설을 풍부하게 붙인 장점이 있습니다. 제작 비용이 커서 500부 단위로는 제작 단가가 안 나와요. 책 팔아 큰돈 벌려 하지 않으니 설계가 가능했던 건데요. 다행히 이부록 그림작가와 안지미 디자이너가 계약금 일부에 인세를 받는 방식으로 계약에 동의해주어 작업이 가능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현재 7000부 찍었고, 순출고가 5500부 정도 됩니다.

 

김 — 이슈북 시리즈는 참여한 필자들의 이름이 쟁쟁합니다. 크게 출판 이슈가 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계속되나요?

 

정 — 매체로서 단행본의 기능과 형식을 고민해본 한국형 신서인 셈인데, 반응이 책마다 편차가 있어요. 세로로 길쭉한 판형이 아무래도 낯선가 봅니다. 궁리 중이에요.

 

김 — 개정도서정가제 실행 이후에 출간량이 줄어들긴 했습니다만, 일주일에 100~200여 권의 신간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개중에 ‘새로운 책’은 그리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알마는 젊은 필자들이나 신진 필자의 등장을 심심치 않게 보여주셨는데, 『현시창』(임지선)은 놀랐고, 『검색되지 않을 자유』(임태훈), 『모서리에서의 사유』(최태섭)도 반가웠습니다. 『가장 사소한 구원』의 라종일, 김현진 조합도 의외였습니다.

 


정 — 2012년에 나온 『현시창』은 성기승 차장이 기획한 책이에요. 단행본 출판사의 의무 가운데 하나가 단행본 경험이 전무한 이들에게 필자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현장형 논픽션 필자를 찾아내려 합니다. 최근에 몸으로 글을 생산하는 멋진 필자 한 분과 접촉하고 있는데, 이런 만남들이 흥분됩니다. 라종일 선생은 『가장 사소한 구원』을 하면서 새삼 글을 잘 쓰시는 분이란 걸 알았습니다. 세대를 달리하는 두 작가가 편히 주고받은 메일을 통해 일상의 관찰과 고민을 담아보자는 의도였는데, 넉넉한 글쓰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도 좀 팔리고 있어요.

 

김 — 『MB의 비용』(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엮음) 역시 잘 나가지요? 시기도 적절했고, 여기저기 노출도 많이 되었고요.

 

정 — 한 10만 부 나갔느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1만 8000부 찍었어요. 앞서 출간된 이명박 자서전에 기댄 기획이 아니라 오래전에 유종일 선생의 기획 아래 차분히 써 내려간 글입니다. <프레시안>에 오랫동안 연재되었고, 거기에 인포그래픽을 추가하고 꼭지별로 들어가는 말을 넣어 단행본다운 포스를 지니게 되었어요. MB의 과욕과 실정에 대한 배설 차원의 까발림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분석과 비판이 담긴 책입니다. 판매부수 듣고는 많이들 놀라더라고요. 대한민국은 그렇게 훌륭한 사회가 아닙니다.(웃음) 좀더 널리 읽혔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아직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어요.

 

김 —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을 취재한 르포르타주 『노동여지도』(박점규)도 고마운 책입니다. 책 제목도 좋은데요?

 

정 — <주간경향>에 연재한 원고를 묶은 책인데 그때 썼던 제목이에요. 꼭 필요한 책인데 너무 늦게 나온 감이 있죠. 출판이 사회와 연대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그래서 노동사를 간략히 정리해 꼭지별로 넣자는 의견이 나왔고, 연재 원고지만 단행본스러운 원고가 완성된 것입니다. 추가 원고와 지도 등 원고 보강에 힘을 썼어요. 노동절에 맞춰 내느라 저자 분도 편집자도 고생이 많았지요. 그 책도 2쇄를 찍었어요.

 

김 — 고종석 선생의 책들도 반응 좋지요? 알마 아니면 만들기 쉽지 않은 책 같은데요.

 

정 — 문화계의 중요한 필자로 그분의 글을 즐겨 읽는 독자였어요. 절필 선언 후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나 글쓰기에 관한 책을 내자는 제안을 하게 됐고요. 절필한 분이라 가능한 방식을 고민하다 강연을 기획해 책으로 엮기로 한 것이지요. 수강료 부담이 적지 않았는데, 예상보다 많은 독자들이 신청했습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정원을 다 채우고 미처 신청하지 못해 강의를 듣지 못한 분들도 꽤 있었어요. 강의로 수익을 내려는 의도는 아니었기에 강사료를 충분히 드릴 수 있었고, 출간에 따른 인세는 당연히 따로 보장해 드렸어요. 녹취를 풀어 문체를 다듬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어찌하면 고종석 선생의 스타일을 실어 나를 수 있을지 고민했고 초기 작업이 만만치 않았어요. 고생 좀 했죠. 이후 필자의 첨삭 과정을 거쳐 책이 나왔습니다.

 

김 — 이런 경우 편집자에게 큰 역량이 필요하겠습니다.

 

정 —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역으로 뺄셈을 하듯이 책 출간 과정을 복기해보면, 편집자는 그 모든 과정에 관여하는 사람입니다. 쉽지 않지요.

 

알마는 어디로 계속 가고 있습니까

김 — 최근에 「선녀와 나무꾼」을 비튼 짧은 연극 한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당에서도 선녀가 늘어 정규직 자리를 구하기 어렵게 된 한 선녀가 나무꾼을 꼬셔 결혼(취업)에 성공합니다. 자식 둘을 낳고 근근이 살아가던 어느 날, 귀가한 나무꾼이 전업의 고민을 피력합니다. 사람들이 나무 대신 땅속에서 캐낸 ‘검은 돌’만 찾으니, 나무 캐서 어찌 먹고사느냐고. 무슨 까닭인지, 선녀는 나무꾼은 나무꾼이어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저렇게 산에 나무가 많은데 쓸모가 없어질 리 없다’고. 감동이지요! 다음 장면에서 나무꾼이 이번엔 ‘검은 물’이 쏟아진다는 소식을 전하는데도 선녀는 나무꾼을 격려하지요. 저는 여기까지 보고서는 나무꾼이 책 만드는 사람, 편집자로 동일시되어 잠시 낙담하였습니다. 각설하고,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인터넷 시대에 이렇게 돈 안 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알마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알마의 독자들은 누구입니까?

 

정 — 알마의 독자들은 연령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 같아요. 책에 담긴 생각과 내용으로 다른 출판사의 목록과 차별된다고 생각하는데, 독자들의 호불호도 분명한 편입니다. 알마의 방향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계속 늘려가려 합니다.

 

김 — 빅데이터로 산출해 해당 독자가 관심 가질만한 책의 출간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시대입니다. 저도 그렇게 추천 받은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아 둡니다. 종종 출판의 성공 사례를 운을 빌어 설명하곤 했는데, 이제 그런 축복은 드물어질 것 같습니다. 또한 책의 경쟁력 상실은 책 내용의 경량화로도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솔직한 제목의 베스트셀러도 그렇고,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선전을 보면 이제 지식을 어떻게 편집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정 — 책은 앞으로 기호품이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책을 읽거나, 아예 보지 않거나. ‘인문학’이니 ‘고전’이니 ‘책이 답’이라느니, 하는 동어반복은 이제 길을 잃었다고 봅니다.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봤는데요. 게임하는 아이들에게 이거 너무 중요한 것이니 꼭 해라, 하고 나서는 무조건 후기도 써야 한다고 하면 지레 도망가지 않을까요? 반면 책 읽는 건 금지시키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야만 읽을 수 있는 거죠. 그 세계가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일면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 뭐가 저렇게 재미있어서 어른들은 책을 끼고 살까, 이런 상황이 오면 아이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몰래 숨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찾지 않을까요? 독서 환경이 바뀌어야만 하는 거죠. 그때까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 텐데요. 책은 책다울 때 책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책만큼은 경량화가 답은 아닌 것 같아요. 역행이라 할지 모르겠는데, 알마는 절판된 훌륭한 책들을 재번역하고, 재출간하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당연히 돈 안 되는 일입니다. 책이 사라지는 시대에 책의 운명을 지키고 연장하는 사람들이 편집자입니다. 알마는 지난해에는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과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의 『모성애의 발명』을 새로이 다시 펴냈고, 다음 달에는 린 헌트의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을 재출간합니다. 계속 이런 작업들을 해나갈 겁니다.

 

김 — 생각난 김에, 저 ‘고색창연’한 이지누 선생의 책은 누가 읽나요?

 

정 — 가장 안타까운 책들이에요. 이지누 선생의 텍스트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저 같이 이지누라는 스타일에 대한 향수를 지닌 독자가 많지 않아요. 어떤 종이를 쓰든 이지누의 것으로 보이는 사진과 종이의 물성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가진 저자는 이제 거의 없을 겁니다. 사실 어디에서 만들어도 그렇게 나올 책들인데, 그 문체를 알아보는 독자에게 값진 책을 제공하는 것도 출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 슬슬 예정된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올해 준비 중인 책 몇 권 소개해주세요.

 

정 — 뉴턴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벽돌 책’을 몇 년째 준비 중인데, 하반기에는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빅히스토리 관련한 대작도 준비 중이고요. 그 정도만 공개하지요.

 

김 — 끝으로, 꼭 만들고 싶었던 책이 있다면?

 

정 — 사전류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주제별, 테마별로 항목이 구성된 독특한 사전이요. 사라지는 사물의 세부 명칭을 도해로 해제하는 사전 같은 건 정말 만들어보고 싶죠. 지식의 변동과 언어의 소멸에 대한 아카이브가 필요한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합니다.

 

김 — 처음이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정 —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입니다. 크게 아프면 세상이 달라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웃음)

 

김 —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5년 안에 내부 일꾼들에게 회사를 넘겨주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 꿈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정 — 회사를 잘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어요. 나는 터를 보여주는 사람이니까요.

 

출판사를 찾아가는 즐거움 중 하나는, 서가에 꽂힌 그 출판사의 책들을 한눈에 일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책들을 한꺼번에 훑으면서 이 출판사는 이런 지도를 그려 왔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의 안심이 좋다. 그 지도가 알아볼만한 형상일 경우 얼마나 반가운지. 게다가 두 시간 동안 두서없는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오는 길에, 정혜인 대표는 알마 책 중 보고 싶은 책을 한 권 선사할 테니 골라보라고 하였다. 날카로운 질문 하나 준비하지 못했으니 ‘풍문으로 들었던’ 『크리티컬 매스』(백지연)는 밀쳐 두고, 『뮤지코필리아』를 꼽아 들었다. 책 표지에 실린 음악을 듣는 올리버 색스의 황홀한 표정에 끌렸다. 나는 그게 책에 흠씬 빠진 사람의 얼굴로 보였는데, 이 ‘비블리오필리아’의 이름이 혹시 알마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애칭이 알마alma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책이 한데 모여 있었다는 인류 지성의 성소, 그 도서관은 번역과 출판일도 겸했다고 한다. 알마는 또한 스페인어로 영혼, 정신,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아랍어로는 기르다, 양육하다의 의미. 다양한 뜻이 근사하다. 알마 출판사의 등장 이후 ‘알’ 자가 들어간 출판사들이 여럿 뒤를 이었다. 알랩, 알키, 알투스, 알비 등. 모두 특색 있는 책들을 내는 곳들이다. 엉뚱하지만, 앞으로 알마를 ‘알짜’ 출판사의 시작이라 부르련다.

 

강상중 교수는 최근 출간된 『마음의 힘』(사계절, 2015)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무지막지한 시장경제의 힘에 쓸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고통만 남은 동시대인들을 근심한다. 그는 다른 삶을 상상할 용기를 잃은 병든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마음의 힘’을 키우자고 제안한다. 그가 제안하는 방법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생산성이나 합리성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는 세계에 풍덩 뛰어드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이다. 마음의 체력을 기르기 위한 삶의 잠시 유예. 그게 바로 책읽기의 시간이 아닐까. 일단 읽기 시작하는 것. 읽다 보면 어디로든 움직이리라. 오늘 ‘알마 도서관’ 정혜인 대표와 나눈 이야기가 겹쳐 떠올랐다.

 

‘기획회의’ 393호 2015. 6. 5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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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는 인지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2015년 7월 13일  |  By:   |  과학  |  1개의 댓글

컴퓨터 사용이 주를 이루자 몇몇 미술 학교에서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수업이 손으로 그리는 수업을 대체하였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그리는 것이 글을 읽고 쓰는 데 필수 요소라고 지난 몇 년간 주장해온 사람들은 컴퓨터를 이용한 미술 프로그램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이자 ‘그림 그리기는 곧 생각하기’라는 2008년 논문의 저자인 밀톤 글래이저는 “손으로 물건을 그릴 때 우리는 완전하게 집중하게 되며, 이렇게 집중할 수 있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무언가를 정말로 파악하고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펜과 종이를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새로 나온 두 권의 책은 낙서나 스케치, 그리기 등이 우리의 사고를 촉진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추켜세웁니다. 또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다양한 브랜드의 맞춤형 스케치북이나 일기장, 수첩도 다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컴퓨터나 디지털 기기가 점한 우위에 대한 일종의 미적 반란이라 말할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 그리는 것의 필요성이 인간의 뇌리에 뿌리내려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낙서건 이보다 정교한 그림이건, 인류가 이미지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언어를 사용한 것보다 앞서며, 그린다는 것은 어떤 개념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필수입니다.

예술가만이 연필이나 펜, 또는 붓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낙서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행위입니다. 더구나 ‘응용 인지 심리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 의하면, 낙서를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약 29% 더 정보를 잘 기억해냅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예술가의 전유물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낙서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정교함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원시적인 방법일지라도 그리기는 종종 단어만 사용해서는 불가능했을 통찰력이나 발견을 촉발시키기도 합니다. 냅킨이나 쪽지에 적었던 아이디어가 수백만 달러의 가치로 돌아왔던 예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림을 이용해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에 대한 ‘낙서 혁명’이라는 책을 최근 발간한 수니 브라운은 “낙서를 하는 사람에게 그리는 기술과 학습의 질 사이에 관계가 없기 때문에 사실 낙서의 미적 가치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합니다. 아주 엉망인 그림도 그것을 그린 사람에게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미적인 정교함이 아닌 무언가를 배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브라운은 기술적인 낙서방법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 시각적 언어는 재주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열려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낙서 지지자로서 그녀는 낙서의 실용적 측면에 기초해 낙서를 잘하도록 연습하는 것은 글을 잘 쓰는 사람만이 문장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다고 믿습니다.

브라운의 낙서와의 인연은 나중에 빛을 발하게 됩니다. 자라면서 그녀는 공책의 가장자리에 주로 낙서를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The Grove라는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면서,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간단하며 적용할 수 있는 시각적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2008년 그녀 스스로 창의적 컨설팅 회사를 시작한 이후, 그녀는 이 적용할 수 있는 시각적 언어를 낙서라는 단어를 사용해 설명하고 ‘인식의 행위’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옳았습니다. 사실 낙서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바꾸어 놓습니다. 낙서는 사람들을 정신 산만한 상태에서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상태로 이끌어주는 차분한 행위입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낙서를 한 순간에 신체와 신경에 변화를 주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리기에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이 낙서를 통해 열반을 경험한다면, 직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매일 천국에 사는 것 같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동서적 삽화가로 수상 경력이 있으며, 최근 ‘그리기는 마법’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한 존 헨드릭스는 예술가들이 나이를 더해가면서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리기를 즐기는데, 우리는 더 이상 그리기를 즐기지 못해요. 자라면서 사람들은 미술 학교에 들어가서 이미지를 그리는 데 어떤 방법이 옳고 그른지를 배워요. 학교에서 빛, 공간, 구도, 자세, 선, 모양을 그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요. 하지만 그 이후에 우리는 즐기는 것을 배우기 위해 또 다시 훈련 받아야 하죠.” 헨드릭스에게 즐거움을 찾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를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첫 걸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언제 그리기를 시작했어요?”가 아니라 “언제 그리기를 그만두었어요?”입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우리 모두는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예술가와 일반인 모두에게 그리기는 예술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기는 바로 생각의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원문출처: 디아틀랜틱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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