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생각해 볼 주제.

인간에게 진정 '자유의지'가 있는가? 그간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지만 지금 그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 소비할 자유? 우리도 멋지고 세련되어 보이는 소비자가 될 자유? 그건 아니었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뭐 그런 비슷한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이 더 눈에 들어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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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노아 하라리: 자유라는 신화


학자는 오직 진실에만 충실해야 할까요? 설사 그 진실이 사회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아니면 사회 질서가 유지되도록 거짓말을 해야 할까요? 나는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에서 자유주의(liberalism)와 관련해 바로 이런 고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한편으로 나는 자유주의에 오류가 있고 이 이론이 인간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21세기를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자유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는 여전히 오늘날 세계 질서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특히 종교와 민족 근본주의라는, 훨씬 더 위험하고 해로운 오래된 이념의 공격을 자유주의는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선동가와 독재자들이 자유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내 의도와 무관하게 내 주장을 사용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고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를 감안해 자신을 검열해야 할까요? 자신의 영역 밖에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편협함의 상징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퍼질 때, 우리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냉철한 사고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의 힘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이 자유주의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검열 보다는 자유로운 토론을 택했습니다. 자유주의는 다른 이념보다 더 유연하고 덜 교조적이라는 매우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다른 어떤 이념보다도 비판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이 그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허용하는 유일한 이념입니다. 자유주의는 이미 세 번의 큰 위기, 곧 1차 세계대전, 1930년대 파시스트들의 도전, 그리고 1950년에서 70년대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을 겪었습니다. 지금 자유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1918년, 1938년, 1968년의 위기가 얼마나 컸는지 생각해보면 됩니다.

1968년, 자유민주주의는 거의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내부에서 폭동, 암살, 테러 공격, 그리고 첨예한 이념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 날 워싱턴에서 일어난 폭동이나 1968년 5월의 파리, 그리고 1968년 8월 시카고에서 있었던 민주당 전당대회에 있었다면 자유민주주의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워싱턴, 파리, 시카고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조용했고,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20년 뒤 붕괴한 것은 소비에트 사회주의였습니다. 1960년대의 혼란을 겪으며 자유민주주의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위기 또한 자유주의가 이겨낼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주의가 겪는 위기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혹은 마치 비가 내린 뒤 여기 저기에서 우는 개구리처럼 전세계 곳곳에 등장한 선동가나 독재자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위기는 바로 실험실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인간이 가진 자유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쥐나 원숭이와 달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집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의 감정이나 선택에 궁극적인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부여합니다. 자유주의는 투표권자가 최선의 결과를 알고 있으며, 고객은 언제나 옳고,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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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유의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기독교 신학이 만든 신화일 뿐입니다. 신학자들은 어떻게 신이 죄인을 벌하고, 성자에게 상을 줄 권리가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발명했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신이 우리에게 벌을 주거나 상을 줄 이유가 없을 겁니다. 신학자들은 바로 우리의 선택이 어떤 물리적, 생물학적 속박과 무관한 우리 영혼의 자유에 의한 것이며 바로 이 때문에 신이 우리를 벌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동물들에 대해 신학자의 설명과 전혀 다른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인간은 분명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의지는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욕망을 가질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내성적일지 외향적일지, 순할지 까칠할지, 동성애자일지 이성애자일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선택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생물학적, 사회적, 개인적 조건에 영향을 받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정할 수 있고, 누구와 결혼할지,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을지 선택할 수 있지만, 이러한 선택은 자신의 유전자, 생화학적 조건, 성별, 가족력, 자신이 속한 문화권 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자신이 어떤 유전자를 가질지, 어떤 가족의 구성원으로 태어날지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며,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당신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한 번 기다려봅시다. 그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무엇을 떠올릴지 당신은 선택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신이 무엇을 생각할지에 관해 당신이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생각할지, 무엇을 느낄지, 무엇을 원할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될 겁니다.

이 “자유의지”는 비록 항상 신화였지만, 적어도 지난 세기 이 신화는 인류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덕분에 사람들은 종교재판관 혹은 신으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믿어졌던 국왕, 또는 KGB나 KKK와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 신화를 유지하는 데는 큰 비용도 들지 않았습니다. 1776년이나 1945년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선택이 생화학, 뇌과학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자유의지”의 결과라 믿는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은 이제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정부와 기업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의식을 해킹하는 데 성공하게 될 경우, 가장 조종하기 쉬운 상대는 바로 이 자유의지를 믿는 이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대로 해킹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바로 생물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강력한 컴퓨터 성능입니다. 종교재판관이나 KGB는 생물학 지식도, 컴퓨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기업과 정부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게 될 것이며, 일단 그들이 인간을 해킹하는 데 성공하게 될 경우 당신의 선택만이 아니라 당신의 감정 또한 그들의 조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업과 정부가 당신을 완벽하게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지 당신 자신보다만 당신을 더 잘 알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그렇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기존의 자유주의 이념을 잘 알고 있다면, 당신은 이러한 주장을 쉽게 무시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유전자나 뉴런, 알고리듬보다도 훨씬 더 깊숙한 곳에 진정한 내가 있으며 따라서 누구도 인간의 정신을 해킹할 수 없습니다. 내 선택은 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고, 누구도 내 선택을 예측하거나 조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과학적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믿음을 지닌 당신은 더 쉽게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이미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눈에 띄는 기사 제목을 보게 됩니다. “이민자들이 여성을 강간했다.” 당신은 이 기사를 클릭합니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이웃은 다른 기사 제목을 보게 됩니다. “트럼프는 이란에 핵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는 이 기사를 클릭합니다. 이 두 기사는 모두 가짜 뉴스이며 러시아의 트롤, 혹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광고 수익을 올리하는 어느 인터넷 언론이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당신과 당신의 이웃은 그 기사를 자유의지를 따라 클릭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두 사람은 모두 정신을 해킹당한 것입니다.

물론 선전과 조작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선전이 무차별 폭격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정밀한 유도탄처럼 행해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히틀러가 라디오를 통해 연설할 때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출 수 없었고, 따라서 모두가 동의할 최소한의 공통 분모만을 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선전과 조작이 가능해 졌습니다. 알고리듬은 당신이 이민자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이웃이 트럼프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며,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기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영리한 사람들이 바로 이 작업, 사람들의 뇌를 해킹해 기사를 클릭하고 광고를 보게 만들며, 물건을 사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물건만이 아니라 정치인과 이념 또한 팔고 있습니다.

이는 시작일 뿐입니다. 아직 해커들이 분석하는 신호와 행동은 바깥 세계의 정보로 당신이 무엇을 사고, 어디를 가고, 어떤 단어를 검색하는지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몇 년 이내에 생체인식 센서는 해커들이 당신의 내적 세계에 접속할 수 있게 해줄 것이며, 당신의 마음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주의라는 판타지가 애정해 마지 않는, 마음이라는 은유를 가진 심장은 그저 당신의 뇌 활동에 피를 공급하는 근육 펌프로 격하될 것입니다. 해커들은 당신의 심박과 신용카드 사용을 연관지을 것이고, 혈압과 구글 검색 내용의 관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종교재판관이나 KGB가 당신의 기분과 감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 생체인식 팔찌를 가질 수 있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자유주의는 억압적인 정부와 편협한 종교로부터 독립적인 개인을 지킬 수 있는 훌륭한 논리와 제도를 만들어냈지만, 개인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곧 “개인”과 “자유” 두 개념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근대 계몽 시대의 유산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유산이기도 한 이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순진한 개념에서 벗어나, 인간은 해킹될 수 있으며 곧 타의에 의해 조종될 수 있는 동물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는 새로운 조언이 아닙니다. 고대의 철학자와 성자들은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시대나 부처, 공자의 시대에는 당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자신을 충분히 잘 알지 못해도, 여전히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정부와 기업은 당신을 해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 자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게 된다면, 이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곧 그것이 제품이든 정치인이든 당신에게 팔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의 약점을 아는 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약점은 그들에게 당신을 해킹할 수 있는 지름길을 안내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해킹은 코드 상의 오류를 이용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해킹은 인간이 가진 공포, 혐오, 편견, 그리고 욕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해커들은 공포나 혐오를 그저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되면 그 감정을 적절히 자극해 무척 쉽게 이를 더 큰 공포로 키워낼 수 있습니다.

순전한 노력으로 자기자신을 잘 알기 어렵다면, 해커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기술을 이용해 자신을 이해하고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에서 백신 프로그램이 바이러스를 막아내듯 우리에게도 뇌를 위한 백신 프로그램이 필요해질 것입니다. 당신의 인공지능 비서는 당신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 그것이 유쾌한 고양이 비디오든, 짜증나는 트럼프 이야기든간에 – 파악해 당신이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막아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정말 조종 가능한 동물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선택과 의견이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면, 정치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난 300년 동안 자유주의자들은 가능한한 많은 개인이 가능한한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좇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을 정치적인 이상으로 삼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꿈을 이루게 될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순간도 동시에 눈앞에 와 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꿈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준 바로 그 기술에 의해 정부와 기업은 사람들의 꿈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 꿈이 진정한 나 자신의 꿈인지를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이러한 발견이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그 욕망을 실현할 자유를 추구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간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이 생각과 감정, 욕망이 진정한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과라 믿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주의깊게 지켜보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왜 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라고 묻게 된다면 어떨까요?

일단 자신의 생각과 욕망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우리는 이에 덜 얽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 보고 자신의 욕망이 세상과 무관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개체와 다른 존재로 생각하게 됩니다. 곧, 자신은 독립된 존재이며 따라서 나머지 세상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될 뿐더러, 자신의 변덕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게 되어, 자신이 이 우주에서 가능한 모든 욕망 중에 바로 그 욕망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다른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조종하고 바꾸도록 노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신의 변덕에 기반해 전쟁을 일으키고, 숲을 태웠으며, 생태계를 파괴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욕망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그 욕망을 덜 추구하게 될 것이며 또한 나머지 세상과 더 연결된 느낌을 가질 수 있게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자유의지” 개념을 버리게 될 경우 감정이 없는 존재가 될 것이며, 막다른 골목에 갇혀 멸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 개념에 대한 포기는 두 가지 반대되는 효과를 불러옵니다. 첫째, 우리를 나머지 세상과 더 강력하게 연결하며, 이웃과 주변 환경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이와 대화할 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며, 이때 모든 사람은 자신이 말할 기회만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옆으로 제쳐둘 때 우리는 갑자기 다른 이의 말이 귀에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둘째, “자유의지” 신화를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심오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과 욕망에 매달리는 사람은 자신을 더 잘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아니야, 그저 뇌의 생화학적 변화일 뿐이야!”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됩니다. 이는 모든 인류 각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가장 힘들고 흥미로운 여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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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한 의심이나 인간 본성에의 탐험은 아주 오래된 주제입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이런 주제를 두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이제 모든 것을 바꾸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철학의 문제였던 것이, 이제 공학과 정치에서 다뤄야 할 실용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하던대로 이 문제를 천천히 생각하는 동안 – 그들은 한 주제로 어떤 결론 없이도 3천 년을 논쟁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 공학자들은 조바심을 내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급한 이들입니다.

정부와 기업이 인간을 해킹할 수 있게 된 이 시대에 자유민주주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유권자의 선택이 최선이다” 혹은 “고객은 언제나 옳다”와 같은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이 해킹될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 당신의 지지가 정부의 조종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 당신의 편도(amygdala)가 푸틴을 위해 일하고 있고 당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는 알고리듬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을 당신이 깨닫게 될 때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흥미로운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대개 이런 질문을 여전히 피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환상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탐험하기보다 더 오래된 환상이 제공하는 피난처를 찾아 숨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생체공학의 도전에 응전하기보다 자유주의보다도 더 과학적 현실과 거리가 먼 종교적, 민족적 환상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적 모델을 찾는 대신 20세기 혹은 더 오래된 사상의 찌꺼기를 다시 모으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억 속 환상에 젖어있는 나라에서는 성경의 진실성이나 민족의 신성함(특히 당신이 나처럼 이스라엘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면)에 대한 논쟁을 보게 됩니다. 학자로써 이는 정말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은 볼테르의 시대에나 의미 있는 학문이었고, 민족주의는 20세기 최신 사조였습니다. 하지만 2018년인 지금 이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심각한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인공지능과 셍체공학은 진화 과정 자체를 바꾸고 있으며, 이 기술을 어떻게 써야 할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몇십 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두 가지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합니다. 먼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더 인간적인 정부를 가진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일 뿐 아니라, 또한 인류의 미래에 대해 가장 제한을 덜 가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전통적인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21세기의 과학적 진실 및 기술의 진보와 일관성을 지니는 새로운 정치적 시스템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강력한 신인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여신 테티스를 두고 싸웠습니다. 하지만 테티스가 그의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내려지자 모두 테티스를 포기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세상을 지배하고 싶었기에 그들과 경쟁하게 될 더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테티스는 인간인 펠레우스 왕과 짝지어졌고, 아킬레스를 낳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손이 더 훌륭한 존재가 되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 신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줍니다. 권력을 영원히 가지려는 지배자는 자신을 밀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탄생을, 설사 그 아이디어가 자신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라 해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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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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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된 산업화 시대 이후를 홀로세를 넘어 인류세라 이름 붙이기도 한다. 

인간이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명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지구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지구를 살릴 구세주이기도 한 인류. 

희망은 있을까? 기대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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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왈, 2050년을 위해 인류는 뭘 준비해야 하나


1부: 오직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만 유효하다

인류는 전례없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과거의 이론이 붕괴하고 있으며 어떤 새로운 이론도 이를 대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례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2050년에 겨우 30대 초반일 겁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2100년, 곧 22세기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살아갈 겁니다. 오늘날 태어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이들이 2050년 또는 22세기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시대에도 직장을 얻고 세상을 이해하고 인생의 미로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기술을 가져야 할까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누구도 2100년, 아니 2050년의 세상 조차도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누구도 이 질문의 답을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인류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했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신체와 뇌, 마음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오늘날, 과거에는 고정되었고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모든 사실들을 이제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인 1018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미래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기본적인 요소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1018년의 중국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1050년 쯤 송 제국이 멸망하고 거란족이 침입하며, 또 역병이 돌아 수백 만 명이 죽는 것을 겪게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1050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부와 베짜는 직공으로 일하고, 정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와 관료를 가질 것이며, 가부장제가 유지될 것이며, 평균수명은 여전히 40세 언저리일 것이고, 인간의 육체적 특징 또한 전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1018년, 가난한 이들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쌀을 파종하고 비단을 짜야할 것인지를 가르쳤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아들에게는 공자의 가르침과 서예, 말을 타고 싸우는 법을 가르쳤고, 딸에게는 검소하고 성실한 부인이 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1050년에도 이런 기술이 유용하리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중국만이 아니라 다른 세계 역시 2050년에 어떤 특징을 가질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으로 돈을 벌지, 군대와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마 지금보더 훨씬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며, 생명공학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을 통해 인간의 육체 또한 과거와는 비할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는 대부분의 기술이 2050년에는 쓸모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희귀한 것이었고 부족한 정보 마저도 검열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없었기에, 이는 매우 합리적인 교육방법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1800년 멕시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바깥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신문, 도서관 등 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어떤 도구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글을 알고 책을 접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소설이나 종교 서적을 제외한 책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페인 제국은 모든 국내 인쇄물을 철저하게 통제했고, 외국 서적 또한 검열을 통과한 것들만 드물게 허용했습니다. 당시의 러시아, 인도, 터키, 중국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근대적 학교 제도가 등장했을 때, 모든 아이들을 읽고 쓸 수 있게 만드는 것과 지리학, 역사, 생물학의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곧 인류의 거대한 진보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를 막으려 하는 이도 없습니다. 그 대신 어떤 이들은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며, 우리의 관심을 불필요한 것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당신이 지금 멕시코의 한 마을에 살며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대부분의 시간을 위키피디아를 읽고, TED 강연을 보며, 온라인 수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정부도 그들이 원하지 않는 정보를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이제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것이 극도로 쉬워졌습니다. 전세계의 사람들이 클릭 한 번으로 시리아 알레포에 떨어진 폭격 소식과 북극의 빙산이 녹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또한 수많은 반대되는 주장들이 있어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알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역시 수많은 다른 주제들 때문에 사람들은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으며, 또한 정치와 과학이 너무 어렵게 보일 때, 고양이 비디오나 연예인 소식, 포르노 영상은 더욱 유혹적이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장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이 더 많은 정보일 것입니다. 이미 학생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그 정보가 합리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며, 무엇보다도 수많은 작은 정보를 모아 세상에 대한 폭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이는 서구의 진보적 교육이 수백년 동안 추구해온 목표이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서구 학교에서는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정보를 직접 먹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진보적인 학교로 하여금 거대담론에 대한 특별한 공포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과 약간의 자유를 줄 경우 학생들이 알아서 세상을 이해하고, 설사 그들 세대가 모든 지식을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이를 해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라 가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일이십 년 내에 우리가 내릴 결정은 인류의 미래 자체를 결정할 것이며, 우리는 오직 우리가 지금 가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이 세대가 우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가지지 못한다면, 인류의 운명 또한 그저 던져진 주사위에 의존하게 될 뿐입니다.

2부: 변화는 시작되었다

학교는 너무 많은 정보를 주입하는 것 외에도 미분방정식 풀이나 C++ 프로그래밍, 시험관의 원소 식별과 중국어 대화 같은 특정한 기술을 가르치는데 너무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2050년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기술이 가치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C++ 프로그래밍이나 중국어 대화에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있지만, 막상 2050년이 되었을 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프로그래밍을 더 잘하며, 새로운 구글 번역 앱이 만다린, 칸토니즈, 하카를 거의 불편함 없이 통역해줄지 모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 기술을 가르쳐야 할까요?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가 다음의 “네 가지 C”, 곧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소통(communication), 협력(collaboration), 창의력(creativity)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학교는 구체적인 기술 교육을 줄이고 보다 범용적인 삶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신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2050년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품을 발명하는 능력 못지 않게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재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변화의 속도와 함께 경제적 변화 외에 “인간의 조건” 또한 변화하고 있습니다. 1848년, 공산당 선언에는 “모든 확실한 것들이 공기중으로 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였습니다. 2048년에는 물리적, 인지적 구조 또한 공기중으로, 혹은 데이터 클라우드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1848년에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농장에서 직장을 잃었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공장에서도 자신의 성별을 바꿀 필요나 새로운 감각을 개발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직물공장에서 일자리를 찾고 나면 남은 인생은 그 일을 하며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48년 사람들은 어쩌면 가상 공간으로 이주해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별 역시 바뀔 수 있으며 인체에 이식된 컴퓨터에 의해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하게될 수 있습니다. 3차원 가상 현실 게임에서 최신 의상을 디자인하는 직업이 이미 존재하며, 10년 내로 이 특정한 직업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예술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 인공지능이 도입될 수 있습니다. 즉, 25살 때 연애 사이트 프로필에 “런던의 옷가게에서 일하는 25살의 이성애 여성”이라고 썼던 여인이 35살 때는 “나이는 조정 중이고 성별도 따로 없음. 뉴코스모스 가상세계에서 신피질 활동을 하며, 인생의 목적은 지금까지 어떤 패션 디자이너도 가보지 못한 영역을 가보는 것”이라고 쓰게될 수 있습니다. 45살 때는 연애나 자기소개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저 적절한 알고리듬이 내게 딱 맞는 상대방을 찾거나 – 아니면 만들어 – 줄 겁니다. 패션 디자인 예술 분야는 알고리듬이 너무나 발달한 나머지 과거 당신이 만들었던 가장 뛰어난 작품 조차도 자부심 보다는 창피함만을 느끼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45살이면 아직도 지켜보아야 할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충분히 더 남아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구도 우리가 보게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미래도 실제 진실과는 거리가 멀겁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21세기 중반의 세상을 설명하고 그 내용이 마치 과학 소설처럼 느껴진다면, 그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다른 이가 21세기 중반을 당신에게 설명하는데 그 내용이 전혀 과학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확실히 맞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미래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 뿐입니다.

이러한 심오한 변화는 삶의 기본적인 구조마저도 그 가장 확실한 특징을 바꾸면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만들기 전의 오랜 과거부터 인간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일을 배우는 시기와, 그 일을 하는 시기입니다. 삶의 전반부에 우리는 지식을 축적하고, 기술을 갈고 닦으며,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세우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었습니다. 열 다섯살의 나이로 학교를 가지 않고 하루 종일 가족이 소유한 논에서 일하더라도, 그 시기 가장 중요한 것은 논 농사를 하는 방법과, 대도시에서 온 욕심 많은 곡물 매매상을 상대하는 법, 옆 논의 주인과 물과 땅을 두고 생기는 충돌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삶의 두 번째 시기에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돈을 벌며 세상을 탐험하고, 사회에 기여하게 됩니다. 물론 50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쌀에 대해, 상인과 이웃에 대해 배울 수 있지만, 이는 일찌감치 배웠던 내용을 조금더 섬세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21세기 중반의 세상에서, 급격한 변화의 속도와 길어진 수명은 이러한 과거의 모델을 무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인생은 점점 더 잘게 쪼개지며, 각 구간은 연속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그 어느때 보다도 더 중요하고 복잡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수준의 스트레스를 포함합니다. 변화는 언제나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일정한 나이 이후 사람들은 변화를 꺼려하게 됩니다. 15세의 아이에게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는 것입니다. 신체가 자라고 생각이 깊어지며,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며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개발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십대는 이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이를 신나는 일로 즐깁니다. 그러나 50살이 되면, 이제 변화는 두려운 것이 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과 싸우기를 포기합니다. 이미 가 보았고, 직접 해 보았고, 남은 것은 티셔츠 뿐입니다. 안정적인 삶을 선호합니다. 지금 가진 기술과 경력, 정체성과 세계관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일수록 이를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나갈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50대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격을 크게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뇌과학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비록 성인의 뇌 또한 과거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는 더 유연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십대의 유연한 뇌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뉴런을 다시 연결하고 시냅스를 추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21세기는 안정성을 추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정체성을, 직업을,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떨어진 사람이 될 뿐입니다. 기대수명의 증가는 당신을 살아있는 화석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이제 50살은 충분히 젊은 나이일 것이며, 따라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 단순히 경제적인 면을 넘어 사회적으로 –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을 재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소함이 새로운 표준이 되는 시대에 당신의 과거 경험과 다른 모든 인류의 과거 경험은 예전처럼 믿을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개인으로써의 한 사람과 전체 인류는 초지능 기계나 강화 신체, 인간의 감정을 믿을 수 없이 정밀하게 조종하는 알고리듬, 인류에 의한 기후 격변, 매 십년 마다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급격한 변화 등 지금까지 어떤 인류도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대해야 합니다. 완벽하게 전례가 없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막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이를 흡수하거나 분석할 방법이 전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청난 불확정성이 세상의 우연한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특성일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적 적응력과 충분한 감정적 균형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당신이 가장 잘 아는 영역을 때로 포기해야 하며,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히도, 아이들을 알 수 없는 것들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게 만들도록 가르치는 것은 물리학 공식이나 1차대전이 발발한 이유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으로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 역시 20세기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문에 21세기가 요구하는 지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산업혁명의 결과 우리는 마치 생산라인과 같은 교육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을 한 가운데 커다란 콘크리트 빌딩이 서 있고, 내부에는 수많은 동일한 교실이 있으며, 각 교실에는 책상과 의자가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종이 울리면, 같은 해에 태어난 서른 명의 아이들과 함께 그 중 한 교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매 시간, 어른 한 명이 들어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 일로 정부에서 봉급을 받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지구의 형태를 이야기하고, 다른 이는 인류의 역사를, 또다른 이는 인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비록 인류가 이 방법으로 커다란 진보를 이루어냈다는 것을 부정할 이는 없겠지만, 이제 이 모델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쓸만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캘리포니아 교외와 같은 선진국 뿐만 아니라 멕시코 시골에도 적용가능한 모델은 없습니다.

3부: 인간에 대한 해킹

지금 내가 멕시코나 인도, 앨라배마의 구식 학교를 다니는 15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어른들을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들 또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방법이었고, 이는 그들이 세상을 잘 알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이 느리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릅니다. 점점 더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며, 어른들이 말하는 정보가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지, 아니면 오래된 편견인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요? 기술일까요? 하지만 기술은 더 위험요소가 많은 도박입니다. 기술은 여러 면에서 당신을 도와줄 수 있지만, 기술이 당신의 주도권을 가져갈 경우 이제 당신은 기술의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전, 인류는 농업을 발명했지만, 이 기술은 소수의 엘리트만을 살찌웠고 다수 인류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가 뜰 때 부터 해가 질 때 까지 잡초를 뽑고, 물을 나르고, 뜨거운 태양 아래헤서 옥수수를 수확해야 했습니다. 같은 일이 지금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술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가 확실하다면, 기술은 당신이 이를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삶에서 원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면, 기술이 당신의 목표를 조종하고 당신 삶을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기술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당신은 점점 더 기술이 당신에 봉사하기 보다 당신이 기술에 봉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환한 스마트폰에 처박고 배회하는 좀비들을 본 적이 있나요? 당신은 그들이 기술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기술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럼 당신 자신에게 의지해야 할까요? 이 말은 세서미 스트리트(역주: 미국의 교육용 프로그램)나 옛날 디즈니 영화에서 나올때는 그럴듯하게 들렸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디즈니도 이제 이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 앤더슨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려 할 때 조차도 외부에서 가해지는 조작의 희생양이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의 소리는 절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우리 뇌가 본래 가지고 있는 생화학적 오류 외에도 국가나 이데올로기, 상업적 광고에 쉽게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생명공학 기술과 기계학습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은 더 쉽게 조작될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코카콜라, 아마존, 바이두 혹은 정부가 당신을 조종하는 방법을 파악하고 당신이 반응하는 약점을 누를 때, 과연 당신은 당신의 진짜 자신과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자신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 교훈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교훈이기도 합니다.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죠. 사실 철학자와 선지자들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충고는 21세기 오늘날 그 어떤 과거보다도 더 중요한 조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자나 소크라테스의 시대와 달리, 이제 당신을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이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코카콜라, 아마존, 바이두, 그리고 정부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스마트폰이나 당신의 컴퓨터, 당신의 은행 계좌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을 속속들이 이해하려 합니다. 당신은 오늘날이 컴퓨터 해킹의 시대라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은 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는 바로 인간을 해킹하는 시대입니다.

알고리듬은 지금도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사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보고 있습니다. 곧, 당신의 모든 걸음걸이, 모든 호흡, 모든 심장 박동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빅데이터와 기계학습 기술을 이용해 당신에 대해 점점 더 잘 알게될 것입니다. 이 알고리듬이 당신을 당신보다 더 잘 알게되는 순간, 이제 그들은 당신을 조종하고 조작하게 될 것이며, 당신은 그저 이를 지켜볼 수 밖에 없게될 것입니다. 당신은 매트릭스와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는 매우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알고리듬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신보다 더 잘 이해한다면, 당신을 움직이는 권력 또한 알고리듬이 가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은 알고리듬에게 모든 권력을 기꺼이 이양하고 알고리듬이 당신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해 주리라 믿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저 편안하게 세상의 발전을 지켜보면 됩니다. 사실 당신이 특별히 해야할 일도 없습니다. 알고리듬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줄테니까요. 그러나 혹시 당신이 자신의 존재와 미래에 어느 정도 주도권을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알고리듬보다, 아마존과 정부보다 더 빨리 뛰어야 하며, 그들이 당신에 대해 파악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더 잘 알아야 합니다. 빨리 뛰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모든 환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건 매우 무겁기 때문입니다.

(와이어드, Yuval Noah Har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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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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