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한홍구 "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과거는 오늘의 교훈이다.  

'걸어 다니는 현대사'라 불리는 역사학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냉철한 비판에는 지난 역사의 교훈이 담겨 있다. 침묵하기를 강요하는 현실에서 기형적 근대화 산물인 '종북'이라는 낙인찍기는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폭식투쟁, 냄비폭발물 투척, 언론의 마녀사냥 등 극단적으로 과잉된 행동이 '애국(愛國)'이라는 이름으로 집결되는 데는 분명 왜곡된 담론이 수용된 결과다.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터. 새도 좌우의 양 날개가 균형을 갖춰야 고공비행을 할 수 있듯 우리 사회의 왜곡된 좌와 우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때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야당성을 잃은 진보와 합리적 보수의 부재를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 정말 큰 문제는 진보가 약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보는 충분하진 않지만 많이 복원됐다. 그러나 합리적인 보수는 복원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동의하는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어야 한다."

돈과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슬프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주의, 즉 돈과 욕망의 지배 속에 살고 있다. 그는 룰을 강조한다. 

"'룰(rule)을 지키지 않으면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구나, 룰을 어기면 망하는 거구나'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룰을 지키는 놈이 바보가 된다. (중략) 대중들이 정당한 욕망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그 욕망을 충족하는 방식이 적법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장발장은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 옥살이를 했다. 바로 그 유명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 이야기다. 가난한 것도 죄라는 한탄이 쏟아지고, 가난이 곧 형벌인 현재가 지금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최근 '장발장 은행'이 출범했고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겐 자베르의 잣대는 너무 가혹한 것 같다.


돈이 없어 벌금형을 받고도 감옥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1년에 4만 명이 넘는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 시작할 때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병역 거부로 수용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몇 명이나 징역을 살고 있나?'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1600명이나 감옥에 있더라. 이들은 벌금 수십만 원이 없어 노역장에 간다. 그곳 하루 일당이 5만 원이다.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한가? 누구는 '황제 노역'이라 해서 하루 5억 원씩 깎아주고, 누구는 수십만 원이 없어 하루 5만 원씩 감옥살이하고…. 징역형에는 집행유예가 있어, 훨씬 무거운 죄를 짓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인권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세심한 눈길이 필요하다. 구치소 강연을 많이 다닌 서해성 작가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등이 이 문제를 제기했고 홍세화 선생님, 김희수 변호사, 도재형 교수 등 많은 전문가가 발 벗고 나섰다. 나는 그냥 이름을 올린 정도다. 우리 벌금 체계가 재벌이나 날품팔이, 실업자, 기초생활자나 다 똑같이 벌금을 매긴다. 이건 평등이 아니다. 소득에 따라 벌금도 차등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조선시대 학자 한백겸 선생의 14대손, 한치응(韓致應) 선생의 7대손, 독립운동가 한기악 선생님의 손자, '일조각(一潮閣)' 창업주이자 언론인 한만년 선생의 4남, 교육자 유진오 선생의 외손이다. 명문가 집안 출신이라, 어렸을 때 교육환경도 남달랐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하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아버지가 출판사를 했는데, 상업적으로 큰 출판사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학술서적에 있어서는 권위가 있었다. 특히 한국사 분야는 거의 독점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책밖에 없어 책과 친숙하게 지냈다. 물론 표지나 목차 정도지만, 중고생 때부터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봐야 할 책을 다 봤다. 우리 세대 전체를 놓고 봐도 지금에 비해 그때가 청소년 입장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기에 좋은 시절이었다. 나는 한 10살 때쯤부터 사학자(史學者)가 되고 싶었다. 대한민국에서 10살 때 하고 싶었던 것을 지금까지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역사가 재밌었고, 의미 있는 일도 많이 할 수 있다. 

- '걸어 다니는 한국 현대사'라 불리고,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일성 전문가'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금기다. 김일성을 연구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만 30살이 안 돼 미국을 갔는데, 그때까지 공부하면서 느낀 책임감 같은 게 있었다. 사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보다 우리 또래가 현대사를 먼저 공부했다. 서중석 교수는 나보다 11년쯤 윗 학번인데, 이분이 학교 졸업 후 <신동아> 기자로 오래 있다 대학원을 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대학원에서 현대사를 해야 한다고 왔다갔다 설치고 다녔었다. 80년대엔 현대사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 현대사에 대한 수요가 폭발할 때였다. 당시 젊은 나이였지만, 여기저기 강연을 다녔다. 1987~88년 무렵엔 내가 어디 가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항상 "김일성이 진짜냐, 가짜냐?"였다. 이 질문을 받아보지 않은 적이 없다. 흔히 '주사파'라고 불리는 집단도 이보다 2~3년 전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북한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번질 때였다. 그때는 '북의 지도자 김일성이 진짜냐, 가짜냐'가 절박하게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우리 사회에 대한 절절한 호소력이 분명하게 있었다. '북한을 추종한다'는 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말이 안 되지만, 북에 대한 정당한 관심이었다. 그래서 김일성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북한바로알기운동'이라는 게 적극적으로 일어났는데, 그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박사논문에서 '김일성은 도대체 누구며, 항일무장투쟁은 무엇이고, 또 이것이 분단된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 

- 주간지 <한겨레21>에 2001년부터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를 연재하며 한국 현대사의 금기를 많이 고발했다. 어조가 굉장히 강했는데,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  

처음에는 현대사를 대중화하는 역할을 했다. 내가 민청련(故 김근태 상임고문이 초대 의장을 지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약칭) 선전국 출신이라 대중화에 책임감이 있었다(웃음). 우리 현대사에서 꼭 짚어야 할 주제를 대충 50개 정도 뽑아서 연재를 시작했는데, 몇 번 연재하다 보니 그때그때 발생하는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생겼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다 역사적인 맥락이 있고, 역사가 왜곡된 부분도 많다. 

미국 유학 후 돌아오니, '호주제 폐지' 문제가 한참 논쟁이었다.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토론자들이 TV 토론회에서 호주제와 관련해서 미풍양속이 어쩌고저쩌고하더라. 그런데 여성 쪽 토론자가 이 부분에 대해 방어를 잘 못 하더라. 호주제가 무슨 미풍양속이냐. 이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대표적인 친일 잔재다. 이런 건 박살을 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었지만, 시시각각 사건이 터지며 논쟁거리가 되다 보니 민족문제, 친일파문제, 민간인 학살 문제 등 50가지 주제에 대해 차근차근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때그때 벌어지는 현상을 역사적으로 풀어서 설명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또 그런 요구도 생겼다. '시민사회에 내가 이걸로 기여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연재했다. 주위에서 걱정도 많이 했지만,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왔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말을 세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인데, 내가 이분들과 친하게 지냈다. 주간지에 몇 번 글을 쓰자, 그분들이 "한 박사, 그렇게 글 써도 됩니까. 조심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며 "몸조심하라"고 하더라.(웃음)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로 투고한 글을 묶은 책 <대한민국史>(한겨레출판사 펴냄)가 2008년 국방부 불온서적으로 지정돼 논란이 있었다. 그때 기분이 어땠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한 게 당시 내 책이 처음이었는데, 요즘은 책이든 온라인상에서든 이런 관점에서 쓴 글이 많아졌다. 당시만 해도 칼럼니스트 조갑제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조선일보사 펴냄)는 박정희에 대해 '백마 타고 온 초인', '고독한 철학자' 등으로 평가하던 분위기였다. 그런데 내가 박정희의 젊은 시절을 기회주의자라고 해석한 것이 대중들에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은 사실 한발 늦은 학문이다. 다른 학문에 비하면 현실 대응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나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현실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나름대로 재밌게 시도해볼 수 있었던 것이 <대한민국史>였다. 

ⓒ프레시안(최형락)

불온서적으로 지정됐을 땐 한국 민주화의 취약성, "아! 세상이 아직 다 안 바뀌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밌었던 건,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으로 책이 훨씬 많이 팔렸다는 점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한민국 史>가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데에는 약간의 비화도 있었다. 당시 군대에서 후배 대학생들이 책 보내주기 운동을 하면서 추천도서를 선정했는데, 그 도서 전부 금서가 됐다. 권정생 선생의 동화책이 왜 금서가 돼야 하나. 그런데 그 운동을 한 친구들이 조금 NL 쪽에서 학생운동 하던 친구들이었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좌파들이 쓴 책이 오히려 불온서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민주정책연구원 우석훈 부원장, 동양대 진중권 교수 등이 쓴 책도 빠져 있더라. 그들 중 몇몇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국방부를 야유했고, 불온서적 필자들은 그들을 보고 '축에도 끼지 못한다'라고 낄낄대기도 했다.(웃음)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불온(不穩)으로 낙인찍거나, 검열과 통제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벌어질 텐데, 되도록 이런 건 유쾌하게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물론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민주사회에 불온이라는 말이 어디 있나. 불온한 것이 역사를 발전시켰다. 

- <대한민국史>에서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아니고 친일파에게 역으로 청산을 당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됐는데, 식민국에 빌붙은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면, 정의, 상식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일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친일파 청산 문제, 어떻게 하면 근원을 해결할 수 있나?

과거 청산은 과거의 영역에서 싸워서는 이길 수가 없고 이겨도 무의미하다. 나는 과거 청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과거 청산을 잘하는 길은 현재(現在)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바로잡음으로써 과거에 잘못된 부분까지 역사적인 의미에서 바로 잡히는 것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결국은 과거를 지배하게 된다. 지금 친일파는 현실적으로 다 죽었다. 그러나 친일파의 후예들이 여전히 현실을 잡고 있다. 친일파를 찬양하거나 그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태도가 지배적인 위치가 되지 않게 하려면, 현재가 바뀌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민주화되면 민주화 된 것으로써 친일문제를 청산할 수 있다. 그래야 뒤늦게나마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늦었지만, 이제야 좋은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친일문제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개혁하거나 청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민주주의를 잘하면 친일문제를 제기할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하려면 친일파, 그리고 그 후손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를 바꿔야 하는데 이것이 민주화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구를 그런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국가란, 양면적인 성격이 있다. 약자의 보호기구이면서도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인권 탄압을 할 수 있는 것이 국가다. 극악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살인하면, 몇십 명이 죽는 것이지만 국가는 몇십만 명을 죽인다. 단위 자체가 다르다. 이런 국가를 유영철보다 나을 게 없는, 더 흉악한 이들에게 맡겨둬서는 안 된다. 그놈들이 국가를 장악하는 과정이 바로 민간인 학살이었다. 수십만 명을 죽이며 힘의 불균형을 만들어 지배했는데, 그나마 우리가 민주화해서 턱밑까지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의 해결은 과거로 돌아가 친일문제를 파헤쳐 승부가 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바꿔 독립투사들이 꿈꿨던 세상을 만들어야, 처절히 죽어간 독립투사들에게 "죄송합니다. 근 70년 걸렸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청산 작업을 했다면, 아주 관대하게 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을 밀고하고 체포하고, 학살한 놈들 빼고는 웬만한 건 다 봐줘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바로 이런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거다. 이런 놈들이 민족적 양심을 가진 합리적 보수들까지 다 잡아 죽인 거다. 합리적 보수의 씨가 마른 이유는 바로 악질 친일파가 합리적인 보수를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조차 빨갱이란 소리를 들었다. 장준하 선생 같은 극우파가 왜 재야의 원조가 됐겠는가. 친일파가 양심적인 보수를 몰아냈기 때문이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잡혀간 사람들도 좌파가 아니라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였다. 해방 직후, 좌파 대부분은 북으로 넘어가고 5.10선거에는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들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세울지'를 고민하며, 공산당에게 넘길 수도 친일파에게 넘길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공산당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개혁해야 되고 개혁을 하려면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친일파가 진짜로 위기감을 느끼고 이들을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1946년 백범을 쏴 죽였다. 

이렇게 민족을 중시하는 진짜 보수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이 중 일부가 재야인사가 된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나 장준하 선생은 해방 직후의 기준으로 볼 때 진짜 보수적인 분 아니었나? 문익환 목사는 70년대 카터(Jimmy Carter)가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니, 주한 미군 철수 반대 서명 운동을 했다. 리영희 선생은 국군 장교였다. 김수영 시인은 반공 포로였다. 이들의 우산 밑에서 진보가 컸는데, 원래 진보는 아니었다. 해방 후, 진짜 진보는 전쟁 때 다 죽거나 북으로 갔다. 그 이후 한국의 진보는 진짜 보수의 그늘서 컸다. 진짜 보수들이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젖을 물려준 거다. 진보는 진짜 보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동의하는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어야 한다.

- 일간베스트(일베)나 서북청년단 재건 논란 등 금기시되어야 할 용어와 움직임이 다시 태동하는 것 같다.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왜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인가.  

솔직히 이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이다. '일베', '서북청년단' 같은 세력이 형성될 때 이에 기겁해 억누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사실 보수여야 한다. 유럽도 극우파의 등장을 제일 경계한 이들은 좌파가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였다. 한국 사회는 합리적인 보수가 없다. 사실 친일 청산할 때 친일파에게 청산 당한 사람들이 합리적인 보수다. 지금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구도가 너무 이상하게 형성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 정말 큰 문제는 진보가 약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보는 충분하진 않지만 많이 복원됐다. 그러나 합리적인 보수는 복원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동의하는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어야 한다. 

지금은 80년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보수는 책을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진보는 책을 쓰고 읽긴 하지만, 자기들 책만 읽는다. 콘텐츠로도 비교가 안 된다. 해방 전 독립운동 과정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해 제 한 몸을 바친 보수인사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보수인사, 찾을 수 있나? 참으로 슬프고 다시 되풀이돼선 안 될 일이지만, 진보진영에는 공동선을 위해 분신하고 투신한 열사들과 관련해 '별걸 다 기억하는 역사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나도 다 기억 못 할 정도로 열사가 많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보수를 보라.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보수가 어디 있나. 콘텐츠를 갖고 방향을 제시하거나 이 사회가 위기에 빠졌을 때 헌신할 수 있는 보수가 없다. 보수 중에 병역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 없다. 진보진영은 수감생활로 차마 군대로 끌고 가지 못한 사람 빼고는 거의 다 의무를 마쳤다. 백낙청 선생은 미국 유학시절, 입대하기 위해 귀국했다. 하지만, 병역의 의무를 충실히 하기 위해 귀국했다는 보수는 없다. 

모택동의 아들도 한국전쟁에서 죽었고, 벤 플리트(Van Fleet) 미 8군 사령관 아들도 한국전쟁에서 죽었다. 미군 고위직 아들 중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만 35명이라고 한다. 한국 장관이나 장성, 국회의원 아들 중에서 한국전쟁에서 희생됐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있었으면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3페이지 쓰고 전쟁박물관에 별도 공간도 만들었겠지만, 없지 않나. 우리 사회에 진짜 보수가 없다는 증거다. 건전한 보수가 있다면, '일베 현상'이 나올 수 없다. 건전한 보수가 없어 진보에 밀리다 보니, 한다는 게 폭식투쟁 등 턱도 없는 조롱만 하는 것이다. 

- 합리적 보수를 다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보수들이 진짜 각성하고 깨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보수는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우리나라 보수의 역사를 스스로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보수의 계보는 김창룡이나 노덕술, 서북청년단 같은 자들이 아니라, 백범을 중심으로 또는 그도 아니라면 김성수나 방응모 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재정리해야 한다. 김성수, 방응모가 친일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한 것도 사실이지만, 해방 직후 <동아>나 <조선>이 친일 신문이니 복간하면 안 된다'고 한 사람이 있는가. 

김성수는 친일한 게 맞지만 재평가해야한다. 제헌헌법 86조에 농지개혁이 명시되어 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조선 8도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김성수가 제헌헌법을 만들 때 그 조항에 반대하지 않았다. 자기 땅을 다 뺏어서 나눠준다는데도 동의했다. 지금의 수구꼴통과는 격이 달랐다.

친일 문제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장덕수는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학도병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내가 "장덕수가 학도병 연설을 하고 젊은이를 군대로 내보내지 않았느냐"라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야 이놈아, 내가 그 연설을 들었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장덕수가 그 연설을 울면서 했고, 아버지와 학생들도 울면서 들었다는 거다. "장덕수가 진짜로 친일파여서 그런 연설을 했으면, 이철승 같은 깡패가 돌아와서 장덕수를 때려죽였지 가만뒀겠느냐"며, 학도병으로 갔던 학생들이 살아 돌아와 장덕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하시더라. 학도병 연설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학도병들은 장덕수를 아무도 친일파라고 보지 않았다는 거다. 

한국 역사의 복잡함 속에서 보수의 계보를 다시 세워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진보를 실제 진보로 바꾸는 과정을 진보가 했나, 보수가 했나. 진보는 악을 썼고, 진보의 주장과 헌신적인 투쟁을 보면서 '세상이 바뀔 수밖에 없구나!'를 깨달은 보수가 그동안 범죄시 되고 탄압받던 진보의 주장을 제도화해 세상을 바꾸는 거다. 그런 역할을 보수가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큰 문제는 보수파가 자신들의 진짜 족보를 모른다는 거다. 지금 진보에서 장준하 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며 '재야의 큰 어른'이라고 하는데, 이 분은 사실 문창극보다 더한 보수다. 백범을 극우라고 얘기하지만, 장준하는 백범보다 훨씬 더한 극우였다. 백범의 수행 비서였던 장준하가 백범과 갈라선 이유는 백범이 남북협상에 대해 '빨갱이와 무슨 협상이냐'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우파가 뭐냐? 민족을 얘기하는 거다. 그런데 한국에는 글로벌스탠다드에 맞는 우파가 없다. 우리나라 우파는 '앞잡이 우파'다. 친일파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들이 '반공'으로 갈아타면서 우파가 된 거다. 그러니 민족 대신 동맹을 얘기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민족을 얘기하면 잡아 죽였다. 진보당 조봉암 선생이 그렇게 죽었고, <민족일보> 조용수가 그렇게 죽었다. 인민혁명당, 통일혁명당, 남조선해방전략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가 또 그렇게 죽었다. 한국의 자칭 우파들은 정말 주인으로서의 자격이 없고 자부심과 책임이 없다. 그러니 공동체를 위한 책임감과 헌신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합리적인 보수가 있는 곳에는 일베나 서북청년단이 설 자리가 없다.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해서 댓글을 다는데도 보수는 침묵하고 있다.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을 막는데, 진보와 보수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걸 비판하면 '종북좌파'가 된다. 이런 구도를 만들어야만 서식할 수 있는 게 일베와 서북청년단이다. 그러니 이 환경이 무너질까 봐 통일도 반대하는 거다.  

- 책 <특강>(한겨레출판 펴냄)에서 "그들이 공포의 정치는 놓아버렸지만 욕망의 정치를 더욱 강화한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욕망을 향해 뛰고 있다. 공포의 국가에서는 무서워서 뛰었다. 하지만 욕망의 정치 속에서는 거기에 세뇌되어 우리 스스로 쫓아가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어렵고 힘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현재 욕망의 정치, 돈을 숭배하는 마몬의 정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여실히 드러난 관피아의 문제 역시 욕망과 마몬의 정치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룰(rule)을 지키지 않으면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구나, 룰을 어기면 망하는 거구나"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룰을 지키는 놈이 바보가 된다. 그러나 욕망을 거세하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가 다들 수도승은 아니지 않나. 다 잘 먹고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 아닌가. 대중들이 정당한 욕망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그 욕망을 충족하는 방식이 적법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기회는 균등하게, 과정은 공평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고 했는데,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9회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을 담당했던 유현 피디가 한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했다. 자신은 '독재자 박정희가 정권 유지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해서 간첩 만든 것을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보니 박정희의 더 큰 죄악은 부동산 투기에 올라타지 못한 채 그저 성실하게 일해 온 우리 숱한 아버지들을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죄악을 어떻게 씻겠느냐'는 얘길 하더라. 정말 명언이다. 1966년도 국민학교 입학식 때 '회풍각'이라는 집 앞 중국집 짜장면이 30원이었다. 이번에 평당 4억 원에 팔린 한국전력 부지 땅값이 그때 30원이었다. 짜장면값이 100배, 150배 오르는 동안 땅값은 수백만 배 뛰어버렸다. 성실한 아버지를 무능력자로 만들어 버린 게 바로 부동산 투기다. 박정희가 한 건 바로 공포의 정치와 욕망의 정치다. 

- 2013년 10월 한 인터뷰에서 "자칭 진보라는 민주당과 지식인, 언론이 손을 놓고 있었으니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민생을 도외시한 채, 그들만 '민주화'가 된 것이다"라며 야당이 야당성(野黨性)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 야당이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중도'라는 개념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에서 중도라는 용어는 미래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이념 사이에서 양자를 아우른 제3의 길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겠다는 거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해 댓글을 다는데, 이런 짓을 하는 놈과 하면 안 되는 놈 사이에 중도가 어디 있나. 이건 아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포장하는 게 현재 한국 야당의 병폐가 됐다.  

그리고 야당이 '486', '친노'라고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가 '말만 세게 한다'는 거다. 물론 민주당이 새누리당보다는 더 많이 얘기하지만, 선거 때 비정규직이 누구를 찍나? 새누리당을 찍는다. 왜냐하면, 야당이 말로만 떠들기 때문이다. 절박함이 묻어나지 않는 연설과 떠들지 말자는 중도를 표방하는 놈들은 싸우지 않겠다는 거다. 이걸 우린 옛날에 '사쿠라(さくら,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놈의 중도냐. '한국 사회가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방향성의 중도를 얘기한다면, 그걸 누가 비판하겠는가. 이런 의미의 중도라면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대상이 될 수도, 서로 자극하는 경쟁자가 될 수 있다. 단테는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자식들에게 차려질 것이다"고 했다. 

한국 사회 대의정치는 정말 문제가 있다. 비정규직이 670만 명(2014년 통계청)이면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자가 국회에 적어도 2~30명은 있어야 하지 않나. 세상이 변하면서 호남이 가졌던 동력도 떨어졌다. 호남 출신 의원들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역 토호들의 이익을 대변하다 보니, 야당이 비리비리 맥을 못 추고 있다. 야당성과 투쟁성을 회복하고 야당이 야당다워야 한다. 현재 호남은 하나의 지역이지만, 6·70년대와 80년대 호남은 그냥 하나의 지역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성격이 죽어버렸다. 호남 정치의 복원, 투쟁성의 복원을 해야 한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 임기가 2년 남았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박근혜 하는 걸 봐라. 저렇게 못하는데, 저걸 못 바꾸면 바보 아니냐." 그런데 야당이 하는 걸 보면, (정권)을 바꾼다고 바뀔 리가 없다. 박 대통령도 '어쩜, 저렇게 못할 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야당을 보면, 저들보다 훨씬 더 못한다. 박 대통령이 '축복받았다'라는 건 바로 이런 거다. 


ⓒ프레시안(최형락)


- 2004년부터 3년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밝힌 내용을 <한겨레>에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로 연재했다.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 '오욕'의 역사가 과거의 지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사법 체계와 판결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사법부에 절망스러운 부분과 희망적인 부분이 공존하고 있다. 절망만 얘기해서는 안 된다. 국정원 과거사 보고서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사법부 얘기다. 과거사의 모든 심급이 결국은 사법부에 가서 판결을 어떻게 받느냐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걸 할 수 있는 게 바로 '국정원 과거사위'다. 나로서는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  

<한겨레>에 연재한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에 부제를 단다면, '바짓가랑이를 올려보라 하지 않은 죄에 관한 보고서'라고 하고 싶다. 그 사람들이 "여기 아직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라며 고문당했다고 하소연하면, 사법부가 "거, 바짓가랑이 한번 올려보시오"라는 얘길 하지 않고 간첩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 죄를 어떻게 물어야 할까? 정말 착잡했다. 그래도 그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좋은 판결이 더 많이 나온다. 50년대 진보당 판결과 관련해 반공 청년들이 법원에 쳐들어가 '빨갱이 판사'를 때려잡자고 했고, 60년대엔 군인들이 법원 앞에 가서 왜 영장을 발부하지 않느냐며 데모했다. 하지만 70년대부터 그런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 조금씩 다시 나타난 게 '미네르바 사건'과 강기갑 전 의원의 이른바 '공중부양 사건', 'PD수첩 사건', '한명숙 전 의원 사건' 등의 판결을 앞두고 보수단체 회원들(일명 '가스통 할배들')이 사법부 앞에서 데모를 했다. 그만큼 사법부에서도 양심적인 판결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법부는 여전히 보수적인 구성이 지배적이지만, 그럼에도 세대가 교체되면서 건강한 부분이 돋아난 것이다.  

사법부의 '회한과 오욕의 역사'를 쓴 탓인지 재판에 자주 불려 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도 피고로 여러 번, 또 전문가 증언으로 불려 갔다. '국가보안법 문제'와 '정수장학회 사건' 때도 그랬고, '이석기 사건'에도 증인으로 참석했다. 아직도 이런 재판을 해야 한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정말 시대착오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수 생활을 했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나라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이 참 대단한 나라다. 사형수를 17년 만에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난 미국에 있었지만, '아, 다시는 한국에서 내란음모 사건은 일어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국민의 정부 이후 17년 만에 내가 내란음모 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역사적으로 내란음모 사건이 많았는데, 대개 쇼였다. 보도 간첩, 보도 내란이란 말을 적용할 수 있다. 내란죄로 일단 잡아서 기소할 때는 '소요죄(騷擾罪)'로 이름 붙인다. 내란죄에 비해 소요죄는 훨씬 약하다. 데모를 조금만 세게 하면, 소요죄 적용이 가능하다. 그런데 내란죄는 다르다. 조직적인 무장동원 체계를 갖고 국가기관을 점거하고 파괴하는 행동이 있어야 내란인데, 내란으로 뻥튀기해서 걸어놨다가 막상 기소할 때는 '내란'을 슬그머니 빼고 기소할 때가 잦다. 

- 헌법재판소에 의해 결국 정당이 해산됐다. 역사적 의미를 따지자면?

우리가 어렵게 이룩한 민주화가 공안 세력들에 의해 다시 짓밟혔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대한민국을 국민의 것이 아니라 자기들 것으로 천년만년 누리고자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무게 중심을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누리려고만 하는 자에게서 일반 국민 대중으로 옮겨야 한다. 통합진보당이 부당하게 해산됐을 때 새정치민주연합이나 정의당이 보인 태도는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웠다. 우리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왜 당당하게 선언하지 못하나. 통합진보당이 여러 가지 잘못으로 대중에게 외면받은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들 역시 이 문제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글 <그들이 처음 왔을 때>가 다시 생각나는 밤이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지난해 12월 19일 헌재의 통진당 해산 판결 후, <한겨레> 특별 기고를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는 김일성만이 얘기한 것이 아니라 백범 김구 선생도 했고, 임시정부 헌법도 진보적 민주주의 기초위에 섰다. 지금 학교들에서 제헌헌법을 가르치지 않는데, 이유는 통합진보당의 강령보다 더 세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제헌헌법도 그동안 충실히 배우지 못한 것인가.  

제헌헌법은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다룬다. 우리 사회에서 제헌헌법은 잘 가르치지 않는다. 수능시험에 나오지도 않는다. 이유는 너무 빨갛기 때문이다. 이석기 전 의원의 항소심 증인으로 법정에 갔을 때도 얘기했다. "현행 헌법을 보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임시정부 헌법을 읽어본 적 있나?"라며, 임시정부 의회인 임시의정원 의사록과 선언문, 백범이 쓴 성명서 등을 제시했다. 1944년 개헌 이래, 임시정부의 헌법 자체를 역사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에 기초해서 만들었다. 그리고 '제헌헌법 해설서'인 유진오 박사의 <헌법해의>를 보면, 대한민국 헌법은 경제 질서에 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 되어 있다. 또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성격을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조화한 것이라고 했다. <헌법해의>에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정치적 민주주의가 흔히 말하는 자유 민주주의고 여기에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더한 게 '진보적 민주주의'다. 경제 민주화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원래 제헌헌법에도 제기된 과제인데 친일파가 우리나라를 접수하면서 사라졌던 것이 뒤늦게 나온 것이다. 옛날 백범이나 임시정부에서 얘기한 내용과 조금 달라질 수는 있지만, 기본정신은 이거다. 제헌헌법이 이런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인데, 그 약속의 내용을 가르쳐야 할 것 아닌가. 이 큰 약속보다도 약한 약속(강령)을 내건 사람을 '헌법 위반'이라고 잡는 나라가 어디 있나. 이게 '반(反) 헌법'이고 '반(反)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법정에서 악을 쓰고 나왔다(웃음). 

- <대한민국史>·<특강>·<유신>·<지금 이 순간의 역사>(한겨레출판 펴냄), <장물바구니>(돌아온산 펴냄) 등 다양한 책을 썼다. 앞으로 꼭 쓰고 싶은 책이 있다면?

지금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아, 이 형 별 볼 일 없었네. 나랑 같은 과(課)네?' 하고 느낄 수 있도록 역사 속 인물들을 친근하게 푼 '형과 누나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중근이 형', '봉길이 형', '봉창이 형'처럼 말이다. 요즘은 위인전이 너무 거룩하게만 쓰여 있다. 안중근이 지금 고등학교에 다녔다면 어떤 과였을까? 비범한 인물이었을까? 껌 좀 씹고, 다리 좀 떨고, 침 좀 뱉고, 삥 좀 뜯으며 어디선가 일진 노릇했겠지(웃음). 위인전을 보면 애들이 안중근을 따라 배우지 못하게 만들어 놨다.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고, 오색구름이 뜨고 등 안중근처럼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이 한 몸 던져서 총을 쏘려면 등에 하다못해 별을 7개는 달고 태어나야 한다'는 식으로 만들어 놨다. 안중근도 삥도 뜯고 좌충우돌하며, 총도 뽑아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오각성해서 정의를 위해서 나선 거다. 안중근 어머니도 대단하다. "아들아, 더 살려고 하지 마라. 넌 이미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이런 얘기들이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 김 알렉산드라(1885~1918)는 한국인 최초의 외국 장관이었다. 러시아극동인민공화국이라고 잠깐 세워졌다가 없어진 나라지만, 100년 전에 한국 여성이 외무담당 인민위원(외무부장)을 했다. 그녀가 사형당할 때 마지막 소원이 "8보(步)만 걷게 해다오" 였다고 한다. "왜 하필 8보냐?"라고 물으니,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민중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라고 하면서 죽었다. 얼마나 멋진가. 매일 영어 단어 외워야 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읽혀야 하지 않겠나. 

또 과거사와 관련해 고문과 용공조작 등 '조작 간첩 사건'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 것인가 등 '반헌법행위자열전'을 쓰고 싶다.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 생각했다. 거기서 나오는 국밥집 아들 진우가 현실에선 내 나이 또래다. 나중에 아들딸이 커서 영화를 보며 "아빠, 송 변호사는 어떻게 됐어?"라고 물으면, "음…. 정의를 세우려고 왔다 갔다 하다가 잘못돼서 죽었어“라고. 또 "그럼 차동영은 어떻게 됐어? 감옥 갔어?"라고 물으면 "연금 또박또박 받아먹다가 얼마 전에 늙어 죽었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차동영이 하다못해 감옥에는 못 보냈지만, 국밥집에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했어."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고, 사죄를 안 한다면 현실 법정에는 못 세웠지만 역사의 법정에는 세워야 하지 않겠나. 그 사람들의 자료를 모아서 전기를 써주려고 한다. 물론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 같이 쓰는 방식을 구상 중이다.  

- 2011년 한 인터뷰에서 청년들을 향해 "지금 20대가 능력은 예전보다 뛰어난데, 패기와 저항정신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슬슬 자기 싸움을 시작할 때"라고 조언했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지금은 젊은이들에겐 단군 이래 가장 야박한 사회다. 개인의 역량이나 세대를 놓고 보면 가장 능력이 있지만, 사회적으로 기가 죽어 있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게 가장 적은 시대다.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자신을 내던질 때 비로소 참된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젊은 사람들에게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 한홍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어렸을 때 김수영 시인을 참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김수영 시집 하나만 가방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그중에 제일 이해가 안 되었던 시가 '푸른 하늘을'이었다. 김수영 시는 굉장히 난해하고 헷갈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푸른 하늘을'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득도(得到)하는 느낌이었다. 첫 구절이 "푸른 하늘을 制壓(제압)하는 노고지리가 自由(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시인)의 말은 修訂(수정) 되어야 한다"다. 당시 내가 고1 때였으니, 유신시대였다.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날면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라. 

김남주 시인도 "싸울 때 자유로워진다"고 했듯이 정말 자유라는 게 싸움을 통해 꿈꾸는 것을 얼마만큼 밀고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지만, 자유는 실천하는 것이다. 1974년에 '자유언론실천선언(自由言論實踐宣言)'에 참여했는데, 한국 언론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언론 자유를 수호하라"에서 "자유는 실천하는 거다"라고 전환한 것이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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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이들을 잘 모른다>


훈민이, 정음이.


나는 이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해 왔다. 

내 눈에 비치는 이들 모습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단정하기도 했지.

하지만 나는 이들을 잘 모른다.

티끌만큼이나 알까...?


잘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이 사람들과 나 사이에 비극은 시작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깨달음은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머물 뿐.

몸과 마음, 나아가 그런 관계로 나아가기까지는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내 몸을 빌려서 세상에 나왔을 뿐이다.


- 당신과 나누고픈 얘기를 여기에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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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퍼민트]


이제는 버려야 할 과학적 아이디어 I

2014년 1월 14일  |  By:   |  과학  |  No Comment

1996년 시작된 Edge.org는 출판 대리인 존 브록만에 의해 창설된 재단입니다. 리처드 도킨스, 소설가 이언 맥퀸 등 ‘인류의 사고를 확장시킨’ 이들로 구성된 이 재단은 1999년부터 매년 중요한 질문을 정하고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방식은 바로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 질문에 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1971년 제임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나는 질문에는 답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 질문을 던질 수 있을만큼 영리할까?”

올해의 질문은 “이제 어떤 과학적 아이디어는 그만 버려야 할 것인가?”입니다. 14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홈페이지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가디언지는 그중 몇 개의 답을 미리 골랐습니다.

  • 아즈라 라자(과학자): “의학실험에서 인간의 대용물로의 쥐” 이제 쥐를 통해 사람의 질병을 연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쥐의 백혈병을 1977년 완치했지만 그 방법은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한 연구는 수천억 원이 든 150종의 패혈증 치료제가 모두 임상 단계에서 실패했음을 보고했습니다. 이는 이 약들이 쥐를 대상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쥐의 패혈증은 인간의 패혈증과 전혀 다른 질병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실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MIT의 로버트 와인버그의 말처럼 “첫째, 불쌍한 쥐를 대신할 동물이 없다는 이유, 그리고 둘째, 미국 식품의약국이 습관적으로 쥐에 대한 실험결과를 최선의 도구로 생각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너무나 많은 연구장비가 쥐를 대상으로 개발된 점과, 너무나 많은 연구인력이 평생 쥐를 연구해왔다는 점이 있습니다. 마크트웨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 조나단 가찰(작가): “예술은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는 생각” 오랜 시간 동안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이 주장한 것처럼 예술과 과학은 다른 영역(magisteria)에 속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데니스 더튼이 “예술본능(The Art Instinct)”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거의 동일한 예술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나 인간의 도구와 같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예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왜 우리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지, 왜 인간은 예술작품을 만들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예술의 정확한 정의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최근 신경과학은 인문학의 주제들을 과학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제 과학을 사용해야 할 때입니다.
  • 스튜어트 브랜드(작가): “낮은 방사능도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 아이젠하워의 과학조언자 조지 키스티아코프스키의 책 “백악관의 과학자(A Scientist at the White House)”에는 방사능 위험기준이 결정된 1960년 그가 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낮은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 어떠한 개인도 자연에서 받는 방사능의 3배가 넘는 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정에서 사실 3이라는 숫자는 임의로 정해진 숫자입니다… ” 그리고 이 기준은 그 후 63년동안 모든 규제에 사용되었고, 원자력에 대한 공공의 두려움을 자극해 왔습니다. 이 기준을 지키기 위해 발전소와 폐기물 저장소에 사용되는 돈은 수십조 원에 이릅니다. 체르노빌 사태가 벌어졌을 때, 사람들의 공포는 소련과 유럽에서 10만 건의 유산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연간 100 밀리시버트 이하의 노출에서는 방사능 증가가 암 발병을 증가시킨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경우 사람들은 평균 연간 6.2 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노출됩니다. 북동부 지역의 값은 낮고, 콜로라도 지역은 높은 값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암 발생률은 오히려 북동부 지역이 더 높습니다. 이란의 람사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10배 이상 높은 자연방사능을 가지고 있지만, 암 발생률은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습니다. 낮은 방사능에 대한 공포의 진정한 문제는 이 가설이 증명되거나 반증되기 힘든 가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염려와 경제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 가설을 떠나 측정가능한 의학적 영향을 바탕으로 전체 시스템의 손익을 계산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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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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