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관한 글

글쎄 아직은 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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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at Sea


내 생애 두 번째로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첫번째는 35년 전이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비교해보면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


35년 전에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이는 없었으며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성공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게 가족이란 자유를 구속하는 외부의 권력으로 다가왔고 세상은 개인적인 모험의 대상일 뿐이었다. 전통이나 윗사람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나만의 생각을 하고 싶었고, 나만의 친구를 사귀고 싶었으며, 나만의 보금자리를 찾고 싶었다. 버팀목에 기대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느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가 넘치는 활력 덕분이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때 나는 바다에서 맞는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즐거운지 알게 됐고, 승무원들이 최대한 축제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도 흥겨웠다. 배는 좌우로 엄청나게 흔들렸는데,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납작한 선박용 트렁크들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객실 이쪽저쪽으로 미끄러졌다. 그 소음이 커질수록 내 웃음소리도 커졌다. 모든 게 끝내줬다.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누군가의 애정이, 차가운 세상의 한기를 몰아내 줄 사람의 온기가 필요해진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대개 그렇듯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즉 죽음이나 노화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세속적인 갖가지 불행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좀 더 형이상학적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살다 보면 겪게 마련인 중대한 재난들, 이를테면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평범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잔인성을 발견하는 일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드는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뒤로 35년 동안 이런 나쁜 일들을 경험하며, 인생에 대해 내가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태도마저 바뀌었다. 도덕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도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가의 기분으로 즐기지는 못할 거다. 나는 자식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고, 가족과 더불어 따뜻한 난롯가에 앉고 싶고, 역사의 연속성과 위대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고 싶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중년들이 크리스마스에 즐기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기쁨이다. 그 점에서는 철학자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평범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음울한 고독을 달래는 데 있어 그런 기쁨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즐거운 모험이었던 바다에서의 크리스마스가 지금은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대중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으면서 홀로 서기를 택한 사람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감미로운 즐거움이 모두 그러하듯 가정에서 얻는 기쁨도 의지를 약화시키고 용기를 훼손할 수 있다. 가정에서 따뜻하게 보내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수평선이 선사하는 해방감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이런 아름다움은 어리석고 사악한 인간들의 손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비틀거리는 중년의 이상주의에 힘을 불어넣는다.(1932. 1. 13.)


Posted by 익은수박

정치, 아니 투표만 습관에 따라 하는 건 아닐 테다. 많은 일상이 습관처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성찰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은 탓이지 싶다. 적어도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찰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도 이미 세상의 일부이잖은가. 결국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안 바뀔 테니까. 이번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 이 글을 읽은 게 조금은 아쉽다. 뭐, 선거 전에 읽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 달랐을 텐데!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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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투표를 하는 진짜 이유

On Politician



나라가 민주적으로 될수록 그 통치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귀족들과 외국인 정복자들은 증오를 받을지는 몰라도 경멸을 받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다스릴 사람을 국민이 선출하니 당연히 다수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가 뽑히고,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살피는 섬세함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자리이니 가장 현명하고 우수한 사람이 선택될 듯싶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군가를 정치가라고 부르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조롱하는 행위가 된다. 공동체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투표에서 이기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고, 설령 시도하더라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반면 투표에서 이기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훌륭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이기 일쑤다(최고 관직을 차지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개척자들도 이 역설적인 상황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의 시대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민주주의가 새로운 것일 때는 위대한 사람들이 부상(浮上)하지만,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 이 장점을 잃어버린다. 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누구나 준비된 대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정당 조직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대답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정당 조직에 복종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니까. 만약 사탄과 바알세불(신약성서에 나오는 악귀의 우두머리)이 후보로 공천을 받고 대천사가브리엘이 무소속으로 나온다면 대천사가 당선될 확률이 전혀 없을 터이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이상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한 가지 이유는, 무소속 후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선거 자금을 주무르지 못하며 따라서 정치가들의 숙달된 기술로 대중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모든 것을 해명하지는 못한다. 왜 사람들이 무소속 후보에게 선거 자금 기부하기를 그렇게 꺼리는가 하는 궁금증은 남기 때문이다. 그 대답은 물론 무소속 후보들이 당선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소속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답은 우리를 맨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만들 뿐이다. 왜 그들은 당선될 가능성이 없는가?


내가 볼 때 그 궁극적인 이유 가운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게 바로 습관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특정 후보의 장단점을 따지지도 않은 채 자신들이 늘 투표해왔던 대로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가 늘 투표해왔던 대로 표를 던진다. 이는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개혁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영국에 사는 나로 말하자면 아버지가 급진파였으므로 노동당에 투표한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자유당 지지자였으므로 급진파가 됐고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휘그당 지지자였으르모 자유당 지지자가 됐다. 그리고 그분이 휘그당 지지자가 된 것은 선조들이 헨리 8세로부터 수도원 토지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급진주의는 이처럼 금전상의 원인에서 비롯했으니 그럼 나는 보수당 지지자로 돌아서야 할까? 생각만 해도 심란해진다. 습관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설사 벗어난다 하더라도 의혹에 시달리는 상태가 되어 결국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습관이 지배하는 한, 훌륭한 사람들이 정치에서 기회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해결책이 없는가? 아니 있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습관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지만 지금보다는 그 정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줄어든 부분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 민주주의에서 우리의 정치가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준이 곧 정치가의 수준이다. (1931.12.16.)


Posted by 익은수박

결혼은 1+1=1이어야 한다는 착각에 많이들 빠져 있다. 빠져나오지 않는 한 갈등뿐이라고 본다. 

성평등이나 민주주의가 확장될 수록 결혼 제도는 많이 바뀌지 않을까 싶다. 아주 많이!

바뀌어야지. 

사회를 구성할 존재가 되는 아이 돌봄을 가족(가정) 또는 부부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사실 야비해 보인다. 사회가 책임져 줘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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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Marriage



며칠 전 뉴욕에서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돌아보며 물었다. "실례지만 버트런드 러셀 씨 아니세요?"


부인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 내 강의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건 지적이었던 옛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은 유부남이다 보니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살죠."


나는 결혼 생활의 안타까운 결과를 보는 듯싶어 자연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인격의 실현이어야 마땅할 결혼을 왜 정반대로 느껴야 하는 걸까? 택시 기사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는 단서는 없었다. 그가 이 비참한 결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결혼 그 자체였다. 나 자신은 결혼함으로써 그런 결과를 경험했던 적은 없지만 그 택시 기사가 아주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바를 털어놓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경제 탓이고 부분적으로는 사회적인 관습 탓이다. 후자가 좀 더 쉽게 정리되므로 그것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남편과 아내가 여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건 나쁜 관습이다. 그 택시 기사의 아내가 강연 따위를 좋아할 리 없고, 남편이 자기를 버려두고 혼자 강연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리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배우자가 원하리라 짐작되는 즐거움을 경계하다가 자기 자신의 즐거움마저 포기하고 사는 남편과 아내가 부지기수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에 반감을 갖는 것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소한 이기주의보다 훨씬 더 해롭다. 따라서 부부가 함께 지루해지고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한다면 남편과 아내가 어느 정도는 각자의 사회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측면에서는 한결 괜찮은 관습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이다. 미혼 남성은 자신의 소득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기혼 남성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물론 대다수 미혼 남성이 아내를 물색하는 행위를 포함해 한낱 오락거리에 여가를 바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폐와 동전의 보상이 전혀 없는 종류의 교육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일정 비율 있다. 이런 남성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자신의 여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또 설령 여가가 나더라도 여윳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성의 경우, 특히 이른바 '지적인' 여성들이 결혼해서 느끼는 상실감은 아이 없이 살지 않는 한, 남성보다 훨씬 더 크다. 결국 남녀 모두가 결혼에 대해 어느 정도 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고충은 국가가 육아 비용 전액을 맡아주지 않는 한, 아니 맡아주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치유될 수 없는데, 우리 시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성싶지 않다. 그러나 육아 부분에서 과거에는 보편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흔한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현명한 태도를 취한다면 이 고충을 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육아는 엄청난 기술과 과학을 요구하는 동시에 대단히 흥미로운 관찰의 영역을 제공하기도 한다. 기술과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애정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애정을 보완할 수는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잘못 이해할 경우 본래 의도했던 바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유년기의 과학적 성질을 이해하게 되면 가족생활이라는 주제에서 지식인들이 우위를 차지하는 현상도 줄어들 것이라고 본다.


아는 게 많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는 사람보다는 무지하지만 애정이 있는 사람이 아이에게는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경우보다는 제대로 알면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낫다. (1931. 11. 13.)


Posted by 익은수박

명상은 삶에서 떨어져 있는 무엇으로 여기기 쉽다. 그런 식으로 유혹하는 무리들이 설치기도 하고.

살아가는 힘을 주는 명상이 필요하고, 그런 명상을 볼 줄 아는 눈도 필요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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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 사라진 시대

The Decay of Meditation



100년 전에는, 그리고 150년 전에는 더욱더 그랬는데, 부유한 사람들이 지금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확실히 좀 더 교양이 풍부했다. 그 시절 부자는 당연히 라틴시를 인용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품평하고 고전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부자들은 대개 자기 나라의 문학과 (프랑스인이 아니더라도) 프랑스 문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박식함을 교수들에게서나, 게다가 분야별로만 기대할 수 있다. 이 교수는 라틴어를 알고 저 교수는 옛날의 대가들을 안다. 또 음악을 아는 교수가 있고, 그 와중에도 현대문학의 가장 쓸데없는 지식까지 아는 교수도 있다. 부자들은 그런 지식을 갖춘다는 걸 체면이 깎이는 일로 생각할 것이며, 무지는 사회적 지위의 보증서가 되어왔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홉 뮤즈들의 이름이나 황도 12궁의 별자리를 알아야만 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어린 시절 이 모두를 배웠고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현대 세계에는 여가라고는 거의 없다. 사람들이 옛날보다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라 오락도 일처럼 수고로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리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지혜란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씩 농축되는 것인데 누구도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쟁 방지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절박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고민하지 않아도 상황이 저절로 해결되리라 기대하면서 어깨만 한 번 들썩하고는 깨끗이 잊어버린다. 그러나 손 놓고 있어도 상황이 그렇게 친절하게 전개될 리는 없다.


이런 결과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절약하는 장치들 때문에 초래됐다. 한 예로 이동이란 문제를 살펴보자. 여행 속도가 빨라질수록 여행에 들어가는 시간도 많아진다. 요즘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집에서 한 시간 걸리는 사무실까지 간다.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같은 얘기가 적용된다. 예전에는 자신의 말이 심하게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이웃들을 방문했지만 지금은 100마일 이내라면 어디든 방문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전화에 대해 따져 보자. 언젠가 귀가 어두운 노신사가 전화를 걸어와 장거리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말했다. "네, 버트런드 러셀입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요?" 나는 좀 더 큰 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지만 노신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요?" 마침내 내가 허파가 터져나갈 정도로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알아듣고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 그건 알고 있었소." 대화를 더 나눌 시간은 없었다. 전화, 참 유용한 발명품이다.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쌓여 바쁜 하루하루를 채우면서 마치 일이 마무리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완전히 허구다. 퀘이커 교도들은 대다수 현대인들보다는 좀 더 지혜로운데, 내 생각에는 그들이 수행하는 침묵의 명상 덕분이 아닌가 싶다. 나는 우리가 매일 30분씩만 말없이 부동자세로 있을 수 있다면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모든 사안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맑은 정신으로 처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휴전 기념일(제1차 세계대전 휴전을 기념하는 11월 11일)에 단 2분만이 침묵에 할애되고 한 해의 나머지 모든 시간이 대체로 무익한 소란에 바쳐진다. 참으로 부당한 비율이 아닐 수 없다. 침묵이 좀 더 길어지면 무익한 소란도 좀 더 줄어들 텐데 말이다. (1931. 11. 4.)


Posted by 익은수박

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지만, 눈에 띄게 보기 그럴 때도 있다.

비겁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길은 있을 텐데... 하면서도 나도 여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싶기도 하다.

'자격 없음'을 덮으려는 안쓰러운 몸부림 비슷한 모습이기는 할 텐데...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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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해서 좋은 점

The Advantage of Cowardice



프랑스 혁명 중에 공포 정치가 끝나고 나니, 머리를 계속 달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재빨리 소신을 갈아치운 약삭빠른 비겁자들 말고는 살아남은 정치가가 아무도 없었다. 그 결과 군부의 전성시대가 20년이나 이어졌다. 장군들을 통제할 만큼 용기 있는 정치가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이야 예외적인 시기로 치더라도, 조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비겁함이 용기보다 유리한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기업이나 학교, 정신병원 따위의 윗자리에 읹아 있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독자적 판단력을 가진 입바른 사람보다는 나긋나긋한 아첨군을 선호할 것이다. 정계에서는 당의 강령을 공언하고 지도자들에게 아첨할 필요가 있다. 해군에서는 해군 전략에 관한 케케묵은 견해를 공언할 필요가 있다. 육군에서는 만사에 대해 중세적 관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언론계에서는 임금 노예들이 백만장자들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만 한다. 그리고 교육계에서는 문맹자들의 편견을 존중하지 않으면 교수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에 따라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오랜 세월 비겁함을 수련해온 자들이 최고 자리에 오르고,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구빈원이나 감옥에서만 찾을 수 있게 됐다. 유감스럽지 않은가?


산업주의로 말미암아 현대 세계는 지금까지 세계사의 그 어떤 시기보다도 사회적 협력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당신이 어떤 사람과 협력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사람을 사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당신도 약탈품을 나눠 갖고 싶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동기는 인간이 서로 협력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자마다 중요성을 띠고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 동기는 출산을 좌우하고, 세 번째 동기는 정치를 좌우한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든 각종 사회 제도 차원에서든 일상적이고 평범한 통치 업무는 두려움에 기초해 있다. 두려움이 없는 자들의 집단을 통치할 수는 없다. 바이킹은 노르웨이 국왕이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자들로, 왕의 지배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기에 노르웨이를 떠났다. 수세기에 걸친 모험을 한 다음 그들은 동토의 아이슬란드 계곡에 사는 농민이 되었다. 


대조적인 경우로 저 위대한 말보로 공작Duke of Marlborough(1650~1722년, 영국/네델란드 연합군 총사령관을 지낸 영국 군인으로 본명은 존 처칠)을 살펴보자. 그는 자기 누이를 제임스 2세의 정부로 만들어 경력의 첫 단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가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 것은 자기 아내와 앤 여왕의 열렬한 우정 덕분이었다. 그는 프랑스인들과 싸울 때마다 그들을 격퇴했으나 프랑스 국왕이 휴전의 명분만 제공한다면 언제든 자제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이름과 막대한 재산을 남겼으며, 오늘날까지 그의 후손들은 애국자의 귀감으로 통하고 있다.


이름뿐인 민주주의의 도래에도 성공의 기술은 그의 시대 이후로 거의 달라진 게 없다. 오늘날 당신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과거에도 그랬듯이 대담하게 굴거나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소심하게 굴며 환심을 사야만 한다. 


따라서 은행 지점장들에게 존중받고, 친구와 이웃에게 존경받고, 진정한 시민의 모범으로 널리 인정받다가 신성한 향기 속에서 죽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충고는 이런 것이다. 당신의 견해를 표명하지 말고 당신 상관의 견해를 표명하라. 당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애쓰지 말고 백만장자들의 지원을 받는 단체가 정해놓은 목표를 추구하라. 개인적인 우정을 쌓을 때는 가능한 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가려서 사귀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사귀어라.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공동체의 최고 인물들 전원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게 될 것이다. 


나무랄 데 없는 충고이긴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이 충고를 따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1931.11.2.)



Posted by 익은수박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글이지 싶다. 기본소득의 근거를 찾는 글인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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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향한 희망, 돈에 의한 공포

Hope and Fear



사람의 삶에는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요소들이 있는가 하면, 행운이든 불행이든 변하기 쉬운 요소들도 있다. 변하지 않는 요소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변하는 것들은 희망과 공포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한 사람의 감정적인 삶의 특징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의 감정이란 확실한 쪽보다는 의심스러운 쪽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소득이 고정되어 있다면 돈 생각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의 사회적 지위가 불변이라면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속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기 조국의 위대함이 확고하다고 믿는다면 맹렬한 국수주의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가치 집합을 살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구제 불능일 정도로 어리석다고 생각한다면 지적 야망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미적 감각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예술적 탁월함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이 구제 불능일 정도로 평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명성을 바라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 바깥의) 현대 세계에서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가 평균적으로 과거 어느 시절보다 가변적이다. 누군가는 투기로 1년에 100만 달러를 벌었다가 다음 해에 그 돈 전부를 날릴 수도 있다. 그가 100만 달러를 소유하고 있을 때는 훌륭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지만 돈을 날리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서구 세계 전역에 걸쳐 대다수 사람들이 2년 전보다 지금 훨씬 더 가난하다. 반대로 경기가 좋은 시절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부유해진다.


이런 불확실성의 결과로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돈에 집착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집착이 소수 집단에 국한됐지만 지금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 됐다. 경제적 불확실성의 당연한 결과로서 사람은 이제 이 쟁탈전에서 거둔 성공에 비례하여 존경받게 됐다. 그 길에서 비켜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존경받지도 못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은 많은 돈보다 다른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소심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는 사람들 대부분이, 금전적 성공이라는 이상을 젊은이들에게 제시한다. 젊은이들은 영화에서 사치에 관한 묘사들을 접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갑부들이 대리석 홀이 있는 집에서 눈부신 드레스 차림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기 마련이다. 주인공은 대개 끝에 가서 이 성공한 계층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심지어 예술가들조차도 그가 버는 돈의 양에 따라 평가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돈으로 특정할 수 없는 가치는 무시당하게 됐다. 이 투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하는 모든 종류의 감수성을 실패의 증후로 여기는 것이다. 


100년 전에는 부자들이 교육과 문화 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렇지 못하면 존경도 받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교육과 문화가 가난뱅이라고 무시당하는 교사와 교수들에 국한되는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우리 사회 체제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서는 이러한 문명의 손실이 개선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일단은 이 손실을 실감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손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세계가 전적으로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근거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재정적인 지위를 잃는 일이 별로 없고 그 상태를 쉽게 개선할 수도 없는 세상에서는 돈보다는 다른 어떤 것의 가치가 더 무게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는 금전욕을 줄이고자 한다면, 모두가 필요한 만큼 가지되 누구도 과하게 가지지는 않는 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첫걸음을 떼야 할 것이다.(1931.10.7.)


Posted by 익은수박

버트런드 러셀 [런던 통신]


립스틱을 발라도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Who May Use Lipstick?



"무슨 멍청한 질문이냐!" 

독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에는 당연히 모든 여성이 립스틱을 바른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보면, 다른 이들에게는 보편적인 이런 관용이 일부 여성 집단에는 아직 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여성에게는 립스틱의 사용이 허락되고 어떤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면 전통적인 윤리적 가치관을 흥미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계의 여성 성직자들은 신도들 앞에선 당연히 정갈해야 하며, 남성의 마음을 끌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치장을 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남캘리포니아 출신이 아닌 한은 말이다. 극기의 삶을 열심히 훈계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자신이 설교하는 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기색을 눈치채여선 안 된다.


사회복지사들도 립스틱을 바르면 안 된다. 그들에게 기금을 대는 숙녀들은 모두 립스틱을 바르고 있지만 말이다. 근무 중인 병원 간호사들도 자신이 돌보는 환자의 건강 말고는 어떤 데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여야 한다. 근무 시간 중에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게 꾸몄다가는 수간호사에게 질책을 받을 게 뻔하다. 


이 기묘한 금기의 희생자 중에 가장 큰 집단은 바로 교사들이다. 미국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영국에서는 매력 있게 보이려는 여교사는 누구든 뜨거운 봉변을 당하기 마련이다.


이런 제약의 철학적 기초를 잠깐 살펴보자. 첫째, 교사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까지는 동의할 수 있다. 둘째, 어떤 여성도 남성에게 무심하거나 무심한 척하지 않고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모든 여성은 남성에게 무심하거나 무심한 척해야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 젊은 여성이 이런다면 그건 위선이거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 


물론 위선이란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매우 필요한 덕목이며, 따라서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위선을 가르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두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교사들에게 이런 제약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위선을 요구하려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훌륭한 교사의 자질을 갖춘 여성들은 자신의 매력이라는 주제에 진정 무심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보기에 이 견해는 아주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신체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또 모를까, 젊은 사람이 이성에게 무심할 수 있는 경우는 어느 정도 폭력적인 억압이 가해질 때뿐이다. 이러한 억압은 필연적으로 규율 위주의 엄격한 태도로 이어져 아이들의 행복하고 자발적인 발달에 아주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성인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 하면 아무리 못마땅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인정해 준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권위의 온 무게를 실어, 미덕이란 즐겁지 않은 것이라고 가르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을 사랑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인가 보다. 교육 당국은 미덕이란 즐겁지 않은 것이란 점을 아이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즐겁지 않으면서 동시에 미덕을 갖춘 교사들을 공급하고자 애쓰고 있다. 


나는, 가장 훌륭한 사람에 관해 견해가 좀 다르다. 나는 사람들이 유쾌하고 명랑하고 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니오'보다는 '예'란 대답을 더 많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특히 아이들에게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까닭에 나는 어린 세대와 접촉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일반적으로는 도덕 기준의 유지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범죄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31. 9.14.)


Posted by 익은수박

어쩌면 내 몸에 안 맞는다고 여긴 옷 같은, 선거를 치렀다. 

공부도 됐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듯하여 부끄럽기도 하다. 

괜찮은 결과라고들 하지만, 난 생각보다 못한 결과라는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유로운 시간이 그리우면서도 막상 여유로움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오묘하다.

책을 집어드는 걸로 시작!



버트런드 러셀이 쓴 [런던 통신]을 읽는다.

1930년대에 쓴 글이 어쩌면 이토록 지금 읽어도 울림을 줄까 싶다.

이왕 읽는 김에 한 챕터씩 옮겨 써 봐야겠다.

뭐, 군데군데 내 식으로 슬쩍 바꾼 대목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직업병을 발휘해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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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는다면

In Praise of Artificiality



세상에는 두 종류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인위적이기 때문에 자연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공적인 것(art)을 찾양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자연 찬양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는 인공물이 너무 많아 나타나는 반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반작용으로서는 쓸모가 있지만 인생론으로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은 갈까마귀와 그 짝이 먹이를 먹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먹이는 날고기였는데 어떤 부위는 연하고 어떤 부위는 질겼다. 수컷이 먼저 연한 부위를 모두 먹어치웠다. 그러면서 암컷이 감히 접근하려고 하면 부리로 거칠게 쪼아댔다. 암컷은 먹을 만한 것이 전혀 남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잔뜩 달아오른 식욕을 충족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도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 기운이 넘치는 젊은 사내들 입장에서야 아주 흐뭇한 결과가 나오겠지만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에게는 예의 바른 태도라는 규범에 따르는 편이 더 유리할 것이다.


문명은 모두, 특히 미적인 측면에서는, 인공적이다. 매너, 훌륭한 말하기, 훌륭한 글쓰기, 훌륭한 음악, 훌륭한 무용---. 삶에 우아함을 부여하는 이 모든 것들은 자연스러운 충동을 거부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들을 단련시켜 잔인한 방식이 아닌 유쾌한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나는 어제 갓 개업한 스페인 해안의 작은 식당을 방문했다. 그 식당은 거의 술을 공급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었다. 지배인은 매력적인 동성애자 청년이었는데 벽에다가 유쾌하지만 매우 인공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여가를 보냈다. 그는 배 두 척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꼈다. 한 척은 번개에 맞아 부서진 프랑스 배였고 또 한 척은 고요히 떠다니는 스페인 배였다. 지배인은 세련된 사람이어서 손님들을 세련되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 음주를 단지 심한 갈증을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인공적이고 스타일 있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을 복음으로 삼는 북유럽 나라들이 잃어버린 우아함이 여기 남유럽에서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아직도 살아 있다. 일이라는 복음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지 결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없는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단지 양분을 공급하는 음식을 먹으며, 사랑도 없이 자식을 낳아 자발성과 우아함을 파괴하는 교육을 시킨다. 


과정이 즐거워야 스타일이 생기고, 생산 활동이 그 자체로 미적 특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계에 동화되어 일 그 자체가 아니라 일의 결과만을 가치 있게 생각할 때, 스타일은 사라진다. 그리고 사실은 더 야만적인데도 기계회된 인간의 눈에는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이 스타일의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이 점점 기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불행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이 우리를 지나치게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기계를 육체와 정신노동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충분히 활용하지도 못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모두는 더 많은 여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한 집단의 편리한 부속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충동에 예술적 표현을 부여할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보다 힘을 사랑하기 때문에다. 


그러나 오직 힘만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최선의 길인지는 의심스럽다. 인간의 본성에는 적어도 힘만큼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다른 요소들도 많다. 기계화 시대가 그 요소들에게 마땅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깨닫기 전까지는 새로운 문명이 온전히 정상화될 수 없을 것이다. (1931. 9. 9.)


Posted by 익은수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