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기획하는 데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데도 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또 지금 동네서 아이들과 하는 디베이트에도 적용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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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질문 100가지를 할 수 있으면 책을 쓸 수 있다



강원국의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행복했던 순간 떠올려 보니
연애하며 상대에게 질문이 많았던 때
한국, 질문·반문하기 어려운 구조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질문 잘하는 이 많아야 사회 행복해져


“저 친구 참 삐딱해.”

‘삐딱’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관계가 매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퍼즐 조각 맞출 때 아귀가 딱딱 맞아야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채워야 할 공간에 맞는 모양으로 주무르기 쉽게 물컹해야 한다. 고분고분해야 한다. 딱딱하게 모난 돌은 끼워 넣기 힘들다. 어디에 포섭되지 않는다. 묻어가지 않는다. 비탈에서 홀로 서 있다. 눈에 띈다. 아니, 튄다. 결국 정 맞는다. 관계 역시 그러하다. 모난 돌, 내 편이 아닌 돌, 내 말에 순응하지 않는 돌, 물 흐르듯 스며들지 않는 돌은 외톨이가 된다.

인간은 언제 행복한가. 궁금해서 못 견딜 때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꼽으라면 연애 기간이다. 연애 감정이란 실은 궁금증이다. 연애 시절을 떠올려 보라. 사귀는 상대가 나를 좋아할까,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내가 청혼하면 받아줄까. 모든 것이 궁금하다. 데이트하고 헤어지면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그 사람이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그 집 앞으로 달려가고, 그런 시간을 도저히 감당 못 해 결혼한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어떤가. 꼴도 보기 싫지 않던가. 눈앞에서 알짱알짱하지 않는 게 고맙지 않던가. 그때 궁금해지면 병이다. ‘출장 간다고 했는데 정말 갔는지.’ 의심하면 질환이다. 물론 내 얘기는 아니다. 나는 지금도 아내가 그립다. 여전히 궁금하다. 늘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를 웅얼거린다.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가장 궁금한 건 그녀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지이다. 그녀가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술상도 치워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한다. 그녀가 지시한 일을 해놓아야 한다. 그래도 그 시간이 가슴 떨리게 무섭고 행복하다.

연애할 때 말고 행복한 시절은 또 있다. 바로 어린 시절이다. 왜 행복한가.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모르는 게 많아서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는 모든 게 신기하다. 이것은 무엇인지, 왜 그런지, 오늘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다. 하루하루가 새롭다. 그래서 엄마에게 묻는다. 학교에 가선 선생님께 질문한다. 그것이 본성이다. 왜 알고 싶어 하나. 알아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가야 먹을거리가 있는지, 어딜 가면 위험한지 알아야 살아남는다. 알았을 때 안전하다. 그래서 알고 싶고, 알았을 때 행복하다. 어쩌면 인간의 호기심은 그런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나는 질문 못 하는 사람이다. 최근 어쭙잖게 라디오 진행을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진행자는 청취자 입장에서 궁금한 걸 물어야 한다. 방송국 프로듀서는 나의 연설비서관 경력을 높이 샀다. 대통령 글을 쓰려면 궁금한 걸 대통령께 물어야 하고, 국민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써야 하니 질문 하나는 잘할 것으로 믿고 있다. 착각이다. 나는 받아쓰는 사람이었다. 묻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통령 말귀를 알아듣고 대통령의 생각을 읽는 사람이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기자들, 질문하는 것이 본업인 기자들도 묻지 않았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가 끝나고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개최국인 한국 기자들에게만 질문 기회를 줬지만, 끝내 질문하지 않았다. 한국말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어디 기자뿐인가. 삼성전자, 현대차에 가도, 공무원 조직에 가도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는 것은 학습이 잘된 결과다. 우리 사회는 궁금해지면 위험하다. 어렸을 적 엄마에게 주야장천 묻는다. 그러다 혼난다. 특히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엄마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다 한 대 맞는다. “시끄러워. 사람들 많은 데서 그러는 것 아냐!” 학교에 들어가면 더욱 본격화된다. 모르는 것을 물으면 그것도 모르냐고, 무슨 그리 허접한 질문을 하느냐고 타박한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묻는다. 선생님이 ‘질문 있나?’ 하면 모르는 아이들은 묻지 않는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묻는다. 학창시절 내내 그랬다. 학교에 왜 가는가. 알려고 가는 것 아닌가. 알려면 모르는 건 물어야 하지 않는가. 질문은 학교 가는 이유이고 학생의 권리 아닌가.

이스라엘에 간 적이 있다. 질문하지 않는 학생은 선생님이 상담한다고 한다.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그런 친구는 아예 모르거나 학습 의욕이 없기 때문인데, 학생에게 이보다 더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0.2%도 안 되는 인구로 25% 가까운 노벨상을 휩쓰는 이유가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하브루타’ 학습과 당돌하고 뻔뻔하게 묻는 ‘후츠파’ 정신에 있다고 한다.

모르는 것을 들킬 때만 위험한 게 아니다. ‘그게 맞나?’ ‘저래도 되나?’ 의문이 들 때도 위험하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참고서를 소개했다. 우리 반 친구 중에 누군가 물었다. “선생님, 그 책 사라는 말씀이신가요?” “이리 나와. 누굴 책장사로 알아?” 그 친구 한 시간 내내 맞았다. 학교뿐 아니다. 직장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하면 안 된다. 상사 생각에 의문을 품거나 의심하는 사람은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이 된다. 대차게 끄덕여야 한다. 리액션이 좋아야 한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기에 그렇게 고명한 생각을 하실 수 있느냐’고 감탄을 금치 못해야 한다. 당신의 말씀 단 한 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각오로 받아 적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우아하게 차려입고 청와대 상춘재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대통령 옆에 포진해 있는 기자는 어찌 그리 리액션이 좋은지. 대통령은 착각했을 법도 하다. 기자들 반응으로 봐선 모든 게 완벽하게 해명됐다고. 이뿐인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종범실록’은 또 어떤가. 대법원장을 옥에 가두는 결정적 증거도 깨알같이 받아쓴 수첩이었다지 않은가.

받아 적는 게 장땡이다. 밑줄 쫙쫙 긋고 번호 매기고 별표치고 ‘야마’ 잘 잡고 상사 의중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분위기와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묻는 건 하수다. 행간을 읽고 빈칸을 채워줘야 중수는 되고, 시키지 않은 짓도 잘해야 고수다. 그래야 출세한다.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이유도 질문하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글쓰기는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였지?’ ‘누구였더라?’ ‘이것에 관한 내 생각은 뭐지?’ 물을 수 있으면 쓸 수 있다.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는 내가 아는 것,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게 아니다. 상사가 궁금해하는 것,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답하는 것이다. 하물며 일기도 ‘오늘 내가 뭘 했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이명박 당선인이 정부 조직개편안을 발표하자, 쉰한 가지 질문으로만 연설문을 작성했다. 첫 문장을 질문으로 시작해보라. 마무리로 질문을 던지며 끝내보라. 질문 100가지를 할 수 있으면 책을 쓸 수 있다. 답을 몰라 못 쓰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못 해 못 쓰는 것이다.

대답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도 잘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받아 적는 사람이 아니라 의문을 품고 반문하는 사람,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문제의식을 갖고 이의 제기하는 사람, 문제를 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 내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더 도약하고 구성원 역시 행복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따로 있다고요?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강원국(작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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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얼마나 될까? 수능 본 아들을 바라보며 또 그 뒤를 따라갈지 다른 길을 갈지 궁금한 딸을 바라보며,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방향을 보여주고 자극을 주고 할 수 있을까?

두텁고 단단한 콘크리트 길 위에서 살짝 눈을 돌리면 말랑말랑한 들판이 있으며, 그쪽으로 발을 딛으면 네 길을 갈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데, 단단한 콘크리트 길에 길들여진 보이지 않는 신호체계를 벗어나질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늦지 않았을 것이다. 


은유 님의 글이 조금은 자극을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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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중3 초에 그 학교를 알게 됐고, ‘공부 잘해야 가는 학교’ ‘취업 명문’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가까스로 합격했고, 잠실에서 무악재까지 왕복 서너 시간 등하굣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다. 난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일찌감치 따두었고 2학년 올라가서 5월에 국내 최대의 증권회사로 취업이 결정됐다.

그때부터 책 보고 시 베껴 쓰고 음악 듣고 학교 건물 뒤편 우애동산에서 낙엽 주우면서 한량처럼 놀았다. 금융권에서 여직원은 여상 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여상 중에서도 서울여상 출신인 나는 어딜 가나 대접받고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기죽을 일이 없었다.

낙엽

평범함 

고졸의 불편을 느낀 건 결혼할 때였다. 시가에서 노골적으로 내 학력을 문제 삼았다. 2세를 생각하면 엄마 머리가 좋아야 한다면서 ‘그래도’ 서울여상이니까 용납한다는 식이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 또래의 엄마들과 교분이 생겼다. 남편이 목동지점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갔고 그 동네 평균 학력이 높다 보니 난 또 불편을 겪었다.

“00 엄마는 몇 학번이야?”

유모차 밀다가 벤치에 앉아서 말문을 트면 그런 인사가 자연스럽게 오갔다. 그냥 멋쩍게 “고등학교 나왔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뭔가 서로 민망했다. 속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덜 무안한 대답의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고등학교만 나왔어요.’
‘고졸이에요.’
‘대학 안 다녔어요.’
‘대학 안 나왔어요.’
‘여상 나왔어요.’
‘서울여상 나왔어요.’

그 어느 것도 상황이 산뜻하지 않았고, 어딘가 구차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함.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 말대로,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난 평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사모 졸업

대학이라는 ‘평범함’ 

글을 쓴답시고 밥벌이를 하게 됐고 철학 공부를 하러 연구공동체에 다닐 때다. 나를 아끼는 선배가 말했다.

“네가 앞으로 작가로 활동하려면 그래도 대학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거기(연구공동체) 다니며 공부할 시간과 돈과 공력이라면 대학을 시도해보라고 했다. 그건 나를 위하는 말이지만 옳은 말은 아니었다.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사회는 뭐지? 그때부터 유심히 지켜봤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거의 고학력자들이었다.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면서 학벌 중심 사회를 공고화했고 그 틀을 깨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를 내면화했고 자기 자식을 명문대 보내려고 애썼고, 자신이 어느 대학 몇 학번이라는 걸 자연스레 노출했으며 그로 인한 실리를 살뜰히 챙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학벌 세탁’에 드는 자원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몰락한 중산층이 돼버려 월 백만 원에 이르는 재수 학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생계 노동에 나서야 하기에 책상에 붙어 앉아 미적분을 풀 시간이 없었고, 두 아이 양육과 살림만으로도 생체 에너지는 고갈됐다. 그 모든 한계를 떨치고 일어날 만큼 공부에 ‘한’이 맺혀 있지도 않았다. 지금 책장에 꽂힌 책만 다 읽기에도 남은 인생이 부족할 지경이었는데 내가 왜 굳이 또 그걸.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John Walker, CC BY

John Walker, CC BY

나는 평범하지 않다 

나는 운이 좋은 고졸 사람이었다. 비교적 문턱이 낮은 ‘자유기고가’ 직업에 입문해 ‘열일’했고 전세자금도 올려줬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글쓰기 관련 강의도 나간다. 학력 문제는 계속 따라다닌다. 내가 주로 강의를 나가는 곳은 시민단체다. 나랏돈을 받아 운영되다 보니 강사료 지급 기준이 박하고 엄격하다. 다른 통로로 최저 강사료를 마련해주기 위해 활동가가 애를 먹기도 한다. 작년에 모 대학 특강을 갔을 때는 강사료 지급 기준에 석박사는 있어도 고졸 학력 기준은 아예 없어서 새로 만들어야 했다고 했다.

불편해도 괜찮았다. 나의 평범하지 않음, 소수성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여러 갈래의 경험은 내가 사회학이나 여성학, 철학을 공부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현실 문제에 부딪혀 본 것들이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자라서 불편한 게 많다 보니 피곤하긴 해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고졸이란 신분도 그랬다. 덕분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 늘 되묻고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얼마 전에는 ‘그것’과 관련해 꽤 불쾌한 일을 겪었는데 괜찮지 않았다. 나는 잊고 살아도 세상은 잊지 않으므로 ‘그것’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은유

초대필자. 작가

반갑습니다. 글쓰는 은유입니다. → 올드걸의 시집(2012) ㅣ 글쓰기의 최전선(2015)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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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작가도 있고, 낯선 작가도 있는데....

암튼  세계 여러 작가들이 글쓰기에 관해 도움말을 준 것들 47가지를 정리했네요.

위키트리에서 가져온 것임.


-> 위키트리 기사 바로가기(클릭!)




세계 여러 작가들이 전하는 글쓰기 조언 47가지



1. 누구도 좋은 책을 읽으며 자살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책을 쓰면서는 많은 이들이 자살했다. (로버트 번)

 

2. 캐릭터가 스타일이다. 나쁘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캐릭터에선 좋은 스타일이 나올 수가 없다. (노먼 메일러)

 

3. 없애는 건, 남아 있는 걸 응축시킨다. (트레이시 세발리에)

 

4. 다른 출판물에서 익숙하게 본 비유나 직유, 상징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 (조지 오웰)

 

5. 캐릭터는 작가가 창조하는 게 아니다. 원래 존재하고 있었는데, 발견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보웬)

 

6. 다 완성하기 전까진, 절대 이렇게 이렇게 쓸거야 남에게 말하지 마라. (마리오 푸조)

 

7. 우울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지한 작가가 될 수 없다. (커트 보네거트)

 

8. 언어 사용은 우리가 죽음과 침묵에 맞서 싸우게 할만한 유일한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

 

9.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려선 안된다. 몽둥이를 들고 그걸 쫓아가야 한다. (잭 런던)

 

10. 작가가 지켜야할 규율은 가만히 서서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는 것이다. (레이첼 카슨)

 

11. 글쓰기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형태의 정신분열증이다. (E.L. 독토로우)

 

12. 그 순간 나오는 생각을 적어라. 골똘히 짜내지 않은 생각들이 보통 가장 가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13. 내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냐고? 지어낸다. 다 내 머리 속에서 나온다. (닐 가이먼)

 

14. 난 글을 쓸 때, 정확한 방향성을 가진 약간의 증오가 유용하다는 걸 발견했다. (앨리스 워커)

 

15. 너무 멀리 갈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T.S. 엘리어트)

 

16. 소설을 써야겠다면 써라. 하지만 돈을 버는 건 우연한 사고(accident)라고 생각해라. 보상은 쓰는 것 자체로부터 얻어라. (펄 벅)

 

17. 아마추어들이 영감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프로들은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 (스티븐 킹)

 

18. 픽션의 문제점은 그게 너무 말이 된다는 점이다. 반면 현실은 결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앨더스 헉슬리)

 

19.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두려움이 '잘 해내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초월할 때, 비로소 일하기 시작한다. (알랭 드 보통)

 

20. 저널리즘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를 목격하게 하지만, 픽션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를 살게 한다. (존 허시)

 

21. 난 항상 하나의 아이디어, 심지어 지루한 하나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한다. 그건 내가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질문이 된다. (토니 모리슨)

 

22. 좋은 작가가 되는 건 3%는 재능이고, 97%는 인터넷에 주의를 뺏기지 않는 것이다. (무명)

 

23. 재능은 싸구려다. 중요한 건 훈련이다. (앙드레 드뷔)

 

24. 아이디어에 대해 큰 소리로 논의하는 건, 종종 그걸 완전히 죽이는 거라는 걸 발견했다. (조앤 K. 롤링)

 

25. 모든 이야기는 끝까지 계속 가면 죽음으로 끝난다. 그 사실을 숨기려 하는 자는 진정한 스토리텔러가 아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26. 테크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열정을 가져야 한다. 테크닉 그 자체는 수를 놓은 냄비받침대에 불과하다. (레이먼드 챈들러)

 

27. 젊은 작가들을 쓰도록 독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작가라는 생각은 못하게 해야 한다. (월러스 스테그너)

 

28. 썼을 때와 그걸 고칠 때 사이에 꽤 시간 간격을 둬라. (제이디 스미스)

 

29. 가능한 한 자주 글을 써라. 그게 출판될 거라는 생각으로가 아니라, 악기 연주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J.B. 프리슬리)

 

30. 매일 글을 써라. 강렬하게 독서해라. 그리고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자. (레이 브래드버리)

 

31. 당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존중해라. 심지어 별볼일 없는 캐릭터까지도. 예술에선 실제 인생에서처럼, 모든 이들이 각자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사라 월터스)

 

32. 매우 일찍 일어나서 바로 일을 시작해라. 먼저 일하고, 씻는 건 나중에 해라. (W.H. 오든)

 

33. 명확하게 쓰는 사람들은 독자를 갖게 되고, 불명확하게 쓰는 사람들은 평론가를 갖게 된다. (알베르트 카뮈)

 

34. 의식은 편집자고, 무의식은 작가다. (스티브 마틴)

 

35. 글쓰기의 목적은 여러분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끄러워서 졸도하게 만드는 데 있다. (J.P. 돈리비)

 

36. 픽션은 거짓말이다. 좋은 픽션은 그 거짓말 속에 감춰진 진실이다. (스티븐 킹)

 

37. 핵심 감정(key emotion)을 발견해라. 이게 단편을 쓰기 위해서 알아야할 전부다. (스콧 피츠제랄드)

 

38. 자기 글을 가차 없이 대해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럴 것이다. (존 베리먼)

 

39. 내게 작가란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을 뜻한다. (수전 손택)

 

40. 좋은 작가란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러다. 학자나 인류의 구원자가 아닌. (아이작 싱어)

 

41. 난 한 문장, 한 아이디어, 한 이미지를 갖고 시작한다. 그 이상으론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따라 간다. (데이빗 라비)

 

42. 작가의 규칙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걸 말하는 것이다. (아나이스 닌)

 

43. 결말을 서두르거나 강요하지 말아라. 당신이 알아야할 전부는 다음 장, 그 다음 몇 장이다. (척 팔라닉)

 

44. (글을 쓰러) 출석해라, 출석해라, 출석해라. 그러다보면 얼마 후에 뮤즈도 출석할 것이다. (이사벨 아옌데)

 

45. 새가 해답을 갖고 있어서 지저귀는 게 아니다. 부를 노래가 있어서 지저귀는 것이다. (조앤 월시 앤글런드)

 

46. 나만의 목소리를 갖기 위해선, 그 목소리가 전달될지 여부는 잊어버려야 한다 (앨런 긴즈버그)

 

47. 굽히지 말아라. 희석시키지 말아라. 논리적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아라. 유행에 맞춰서 당신의 영혼을 편집하지 말아라. 당신의 가장 강렬한 집착들을 무자비하게 따라가라. (프란츠 카프카)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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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꿰매면서

박노해

 

이불 호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

 

욕이 아닌, 배설이 아닌, 비판의 글이 되고 살아있는 글이 되려면 나에서 출발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오도엽님께서  ^^

그러면서 인용한 박노해 시인의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를 달아놓았다.

저 바늘이 나를 찌르는 것 같다.

박노해 님의 시와 오도엽 님의 글을 보며, 서정홍 선생님의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 노릇은 해야지요'가 자꾸 떠오른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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