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가 자주 오르내린다. 능력이 있으면 대접해야지, 한 자리 차지해야지 하는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하지만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지 싶다. 그 능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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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를 뿌리부터 흔들기 위해

 

[장석준 칼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이 사라지는 능력주의 시대

 

지난 두 글에 이어 이번에는 최첨단 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가 낳는 한국 사회 불평등을 극복해갈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한데 그 전에 따져봐야 할 게 있다. 그것은 과연 능력주의가 이렇게 시끄럽게 다뤄야 할 사안이냐는 것이다. 21세기 불평등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상당히 기여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는 현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여러 부차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말하자면 불평등의 더 본질적인 측면을 해결해나가면 자연스레 누그러질 현상은 아닌가?

 

나올 만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 그저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하기에는 능력주의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너무 불길하다. 가령 우리 시대에 평등을 실현하려는 대표적인 전망들을 보자. 그 가운데에는, 자본주의 발전은 결국 경제 활동 전반의 완전 자동화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는 한편으로 다수 대중을 실업 상태로 내몰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민기본소득과 노동시간의 보편적-획기적 단축이 동반되면 자유와 평등이 만개한 세상을 낳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나는 이런 비전에 크게 공감하지만, 만약 능력주의 문제를 계속 사각지대에 놔둔다면 이 구상이 실현될지라도 새로운 불평등이 사회를 덮칠 것이라 본다. 완전 자동화의 발단이 된 제3차 산업혁명(정보화)의 추세가 그러하다. 과학기술이 경제 활동에 보다 직접적으로 통합될수록 대중이 보유하던 기존 역량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지능에 바탕을 둔 단일한 위계제가 더욱 막강한 힘을 얻는다. 시장의 지배나 관료제를 축소시킬 수도 있는 기술이 오히려 지대 수익을 빨아먹는 거대 기업이나 더 고약한 관료기구의 기반이 돼버리며, 그럴수록 이 새 시스템에서 기회를 얻은 이들과 나머지 대다수 시민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간다.

 

이런 상태에 보편적 기본소득이 추가된다면, 적어도 기본소득 없는 경우보다는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빈곤에 내몰릴 위험이 적어질 뿐, 불평등의 근본적인 측면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불평등의 가장 근본적인 층위는 소득의 불평등도, 심지어는 자산의 불평등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결정권의 불평등이다. 소득이나 자산의 불평등이 일정하게 교정되더라도 시민들 사이에서 결정권을 행사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지위의 차이가 지속된다면, 이런 사회는 민주주의를 안정되게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득이나 자산의 불평등이 언제든 재연, 확대될 수 있다.

 

한데 정보화는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자본-국가 관료체계의 중심에 얼마나 가깝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시민들의 지위가 달라지게 만들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시민들이 이런 근본적 불평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저항하기는커녕 이를 경쟁의 결과로서 스스로 정당화하게 만든다. 능력주의가 존속하는 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추세인 정보화는 세상을 항상 해방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정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 되고 말 것이다.

 

능력주의 극복 없이는, 정보화 시대에 평등 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럼 능력주의를 극복할 방안은 무엇인가? 아니, 그 전에 능력주의의 지배가 더욱 확산하지 못하게 막을 힘을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이제껏 능력주의 비판가들이 제시한 여러 대안이 모두 일리가 있다. 마이클 영이 강조한 것처럼 능력주의의 직접적 기반이 되는 공교육 제도 안에서 이에 맞설 장치들을 마련해야 하고, 능력주의의 신자가 된 지식인-중간층에게 각성을 촉구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제안들에는 중대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지난 글("우리가 부르짖던 공정론의 민낯 ... 한국의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프레시안> 2021. 1. 21)에서 나는 지식인-중간층의 성장이 능력주의 확산의 강력한 추동력이 된 반면에 노동계급 문화의 존재는 이에 맞서는 균형추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노동계급 문화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역의 상관관계가 있는데, 이는 능력주의의 성장에 꼭 필요한 능력의 일원론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문화가 주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곧바로 결론을 이끌어낸다면, 노동계급 문화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 우선 역사상 실제로 존재한 노동계급 문화는 결코 바람직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서유럽 노동계급 문화는 당대의 다른 계급-계층과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주의에 중독돼 있었고, 사회주의 같은 요소와 결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반지성주의로 쏠릴 위험(오늘날 이미 나타나고 있는 위험) 또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노동계급 문화로 단순히 되돌아가자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어느 자본주의 사회든 지구화-금융화-정보화를 거치며 노동계급 구성 자체가 심각하게 변화했다. 제1차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에 뿌리내린 전통이나 제2차 산업혁명 중에 독일에 등장한 문화가 참고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여기에 복제, 이식될 수는 없다. 심지어 지금의 영국과 독일에서조차 이는 불가능하다.

 

지금 해야 하고 또한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시기에 노동계급이 능력주의 확산을 막는 세력이 되게 만든 요소들을 추출하는 것이다. 과거의 노동계급이 부활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사뭇 다른 사회 주체들 사이에서 이들 요소가 새롭게 배양될 수 있을지 타진해봐야 하다. 그래서 한 세기 전의 산업 노동계급과는 다른 언어와 몸짓을 통해,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주의와는 전혀 다른 평등 관념을 견지할 사회 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그럼 노동계급을 능력주의에 맞서는 역사적 대항 세력으로 만든 요소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위치'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기본적인 요소다. 자본주의 역사상 상당 기간 동안 노동계급은 교육 제도에 통합돼 있지 못했고, 국민 교육 체계가 발전한 뒤에도 고등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지금에 비하면 기계화 정도가 뒤떨어지는 만큼 노동 현장의 자율성도 컸다. 그렇기에 노동자들은 엘리트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역량과 덕성을 주장할 이유가 충분했다.

 

둘째는 '이상'이다. 혹은 '세계관', '이념'이다. 사실 위와 같은 노동계급의 위치는 패배감이나 열등의식을 낳을 수도 있으며, 실제 많은 경우 그러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위치에 이상이라는 또 다른 요소가 결합되는 경우에는 정반대 효과가 나타났고, 서유럽 노동계급의 많은 이들은 이 가능성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여러 좌파 이념을 통해 자신들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역이라 인식했다. 이럴 때에 그들의 일상은 패배자에게 남은 몫이 아니라, 엘리트들이 가진 것과는 종류가 다른 역량과 덕성의 보고가 되곤 했다.

 

셋째는 '조직'이다. 능력주의가 힘을 얻기는 너무도 쉽다. 능력주의와 친화적인 막강한 조직들, 즉 근대 국가와 이를 닮으려 하는 거대 기업들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이들 조직을 통해 능력의 일원론이 막강한 물질적 실체가 된다. 이에 맞서려면 당연히 대항 세력에게도 조직이 있어야 한다. 노동계급은 그러한 조직들을 실제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방어하는 조직이지만, 회사의 질서와는 별개로 노동자들만의 상호 인정이 작동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국가나 기업과는 상관없이 노동자 조직들을 통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역량과 덕성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독특한 위치와 이상, 조직이 결합돼 어떤 힘의 자장이 구축됐다. 이 자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엘리트들이 제시하는 기준들에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이게 핵심이다. 이것이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발전의 전위 역할을 하던 시기에 견지하던 찬란한 덕목이다. 그들은 '주눅 들지 않는' 주체였고, 그래서 시민이 시민 되게 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불평등을 자신들의 패배의 결과가 아니라, 저들의 실패의 결과라 이해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승리할 집단적 기회를 요구했다. 현재의 패배자가 아니라 미래의 진정한 승리자로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를 뿌리부터 흔들기 위해 구축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힘의 자장이다. 그러자면 이 시대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선 이들이 누구인지 식별해야 하고, 그들이 그 위치를 열등감이 아닌 항의의 기반으로 새롭게 이해하게 할 '이상'이 필요하며, 이 모두에 물질적 힘을 부여할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 이들 요소의 결합을 통해 '주눅 들지 않는' 주체들이 형성되지 않는 한, 능력주의는 단순히 지식인-중간층 내부의 각성과 전환만으로는 결코 위축되거나 해체되지 않을 것이다.

 

'주눅 들지 않는' 주체의 뒷심이 될 조직들이 있어야 한다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에서 저자 마이클 영은 가상의 미래 능력주의 사회에 맞서 궐기한 이들이 발표한 '첼시 선언'을 소개한다. 이는 <능력주의>에서 영이 능력주의 극복의 방향을 제시한, 몇 안 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일부를 옮겨본다.

 

"계급 없는 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소유하는 동시에 그런 가치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사회가 되리라.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닌 트럭 운전사보다 상 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모든 인간은 ... 세상에서 출세할 기회가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이끌기 위해 자기만의 특별한 역량을 발전시킬 기회를 균등하게 누리게 되리라." (268쪽)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른 평가라? 너무 천진난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게 대안이라면, 능력주의 사회란 난공불락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여기에 '조직'이라는 변수가 개입된다면, 어떻겠는가? 가령 누가 뭐래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에 따라 평가할 조직들과 나란히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 평가하려 하는 조직들이 버티고 있다면 말이다.

 

영이 열거한 너무나 감성적인 단어들을 곧바로 평가 기준으로 들이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들 사이에는 소유인과 지능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참으로 다양한 역량과 덕성이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경작인이 있고, 공작인이 있으며, 예능인이 있고, 돌봄인과 봉사인이 있다. 바로 이런 각각의 능력을 중심으로 뭉친 대중의 조직들이 있다면? 모르긴 해도, 이 경우에는 누구도 '첼시 선언'의 문구들을 그저 웃어넘기기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대안 사회는 결코 개인과 국가, 기업만으로 이뤄진 사회일 수 없다. 그게 아무리 헌법상의 권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개인이나, 민주화된 국가, 사회화된 기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반드시 이들 사이에는 대중의 자발적 결사체들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다양한 능력과 덕성을 대표할 조직들이 있어야 한다.

다만, 현실과 목표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금도 우리에게는 대중의 자발적 결사체라 할 수 있는 조직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거의 모든 현대 헌법이 특별한 존재로 다루는 노동조합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조합과 이 글이 논하는 조직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더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 간극이 유례없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조직이 필요하다. 만약 지금 있는 조직조차 바람직한 조직으로 전환시킬 수 없다면, 우리에게 그런 조직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에 대한 독후감에서 시작된 잇단 논의의 마지막 순서가 될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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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가 자주 오르내린다. 능력이 있으면 대접해야지, 한 자리 차지해야지 하는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하지만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지 싶다. 그 능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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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르짖던 공정론의 민낯...한국의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장석준 칼럼]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으로 나아간 오랜 여정

 

지난번에 이 지면에서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를 읽으며 떠오른 단상을 풀어보았다("60년 전에 지금의 "능력 독재"를 정확히 예언하다", <프레시안>, 2021. 1. 4). 영의 책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뚜렷한 지지 집단이 있음을 환기시킨다는 점이었는데, 이들은 "지식인-중간층"이라 불리는 게 가장 적당한 이들이다.

 

이번에는 이들 지식인-중간층이 자본주의 역사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역사적 과정을 엉성하게나마 소묘해보고 싶다. 영이 "소설" <능력주의>에서 전개하는 가상 역사 말고 그것과 비슷하면서 또 다른 실제 역사 말이다. 칼럼 한 편에서 한 대목으로 다루기에는 벅찬 주제인데도 이에 도전하는 이유는 단지 한국 사회가 도달한 현재 모습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으로 나아간 오랜 여정

 

지난 글에서 능력주의가 자본주의와 친화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부속물은 결코 아니며 처음부터 역사를 함께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능력주의와 더 뿌리 깊이 얽힌 것은 국가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만인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단일한 척도로 일원화하려는 열망을 처음 세상에 선보이고 이후 줄곧 이 열망의 대표자가 돼온 조직이 국가다. 이런 국가가 유럽에 비해 훨씬 일찍부터 정연하게 발전한 유라시아 대륙 반대쪽(동아시아)에서 근대적 능력주의의 조숙한 원형이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될 때만 해도 자본과 능력주의 사이에서 이 정도로 친근한 관계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친근성의 기준이란 단지 세습에 반대해 능력을 내세운다는 것 이상이다. 더 나아가, 능력을 측정 가능한 무엇으로 만들고 그래서 모든 인간을 그 측정 결과에 따라 배열할 수 있어야 한다. 제1차 산업혁명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은 자본주의 현실이 아직 이를 강렬히 요구하지 않았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근대 능력주의의 본격적인 역사는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열렸다. 새로운 산업혁명의 핵심은 전기를 주된 동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기계를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중화학공업 작업장이 당대 산업의 중심이 됐다. 생산 과정과 과학기술 지식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게 유기적으로 결합하자 당연히 이런 지식의 담당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그러나 이보다 더 커다란 변화를 낳은 것은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기업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산업 혁신을 선도한 두 나라, 미국과 독일에서 흔히 "독점기업"이라 불리는 거대 기업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엄청난 생산력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으로까지 발전시켜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는 만큼, 이런 지배의 대선배인 다른 조직을 닮아갔다. 다름 아닌 국가기구다. 국가기구를 모태 삼아 발전해온 관료제가 신흥 대기업들로 확산돼 기업 관료제가 대두했다. 그리고 이는 공학도에 대한 수요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기업 공무원의 수요를 늘렸다.

 

하지만 제2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19세기 말부터 곧바로 지식인-중간층이 자본주의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변수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능력주의 역시 아직은 "주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미국, 독일에서 시작된 새로운 산업 구조가 무르익고 널리 퍼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려서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지식인-중간층을 대량 배출할 사회적 기반이 갖춰지지 못한 데 있었다. 그러려면 미국에서 발전한 대중적 고등교육 체계가 다른 중심부 국가들에도 뿌리내려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결국 서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하위 중산층과 노동계급 가족의 실질 소득이 상승하고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의 수용 능력이 확대되면서 이들 계급-계층의 자녀 가운데 대졸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들 중 다수는 물론 대자본이 요구하는 기업 관료, 기술 관료로 진출했지만,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이 집단(하위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대졸 1세대)이 체제에 어떤 충격을 낳을지는 아직 불분명했다. 영의 <능력주의>가 나온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이 충격이 영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향, 그러니까 자본주의에게는 가장 불길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듯 보였다. 1960년대에 자본주의 중심부 곳곳에서 대학 분규와 학생운동, 신좌파운동이 폭발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사자 가운데 단호히 민족해방전선 쪽에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각목이나 화염병을 들고 거리에 나선 이들의 이념이 지금도 모두 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들을 능력주의의 주역으로 보기는 힘들었고 오히려 "대학 해체" 등의 주장을 통해 그 정반대 편에 섰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패배했다. 적어도 이때 이들이 대변하던 그 역사적 가능성은 철저히 패배했다. 1970년대에 자본주의가 발 빠르게 착수한 세 가지 자기혁신운동, 즉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가 지식인-중간층의 대규모 등장을 1960년대 대학가에 잠재하던 가능성과는 전혀 다른 역사의 방향과 접합시켰다.

 

첫째, 지구화. 중심부 자본이 생산 설비를 해외로 옮기면서 생산직 일자리는 줄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 생산 사슬을 관리하는 초국적기업의 관료 체계가 확장되는 바람에 중심부 국가들의 전문직-관리직 일자리는 반대로 늘어났다. 20세기 후반부터 일상적으로 대량 배출된 지식인-중간층은 노동계급의 패배로 두텁던 중산층의 다른 부분이 와해되는 시대에도 이 사다리를 부여잡고 중산층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금융화. 영의 <능력주의>에서 능력주의의 수혜자인 새로운 지배 계급은 지금 우리 현실에 견줘보면 차라리 청빈한 편이다. 그들은 그저 능력에 따른 급여 격차에 만족한다. 그들에게는 "재테크"의 세계가 없는 것이다. 주식 투자도, 부동산 투기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실현된 능력주의는 영이 상상한 능력주의보다 더 강력하고 반동적이다. 중심부 국가들에서 전문직-관리직 일자리를 획득한 지식인-중간층은 금융화에 가담해 거대한 불로소득자 집단을 형성했다. 더불어, 불로소득자의 세습주의("세습 중산층")와 기묘하게 결합된 우리 시대의 능력주의가 부상했다.

 

셋째, 정보화. 제3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환원하고 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는 오늘날의 능력주의에까지 이르게 된, 고대 국가 이래의 유구한 열망에 전에 없던 날개를 달아줬다. 만인의 능력을 지능이라는 단일한 기준에 따라 판정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배열하려는 열망 말이다.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노동이 맡던 역할을 완전히 자동화하려는 기획("제4차 산업혁명"이라 잘못 명명된)은 이런 열망을 완성하려는 시도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기획이 자본주의 구조 아래에서 실현된다면 오직 지식인-중간층만이 "1% 지배자들"과 함께 "능동 시민"의 범주에 들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가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사적 결합에 기여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패배다. 지식인-중간층이 성장하고 능력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부상하던 바로 그 시기에 그간 대안 세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항 세력으로는 상당한 역량을 과시했던 중심부 국가들의 노동계급이 돌이킬 수 없이 패퇴하고 해체됐다. 이는 단지 비극적인 대비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어쩌면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얼핏 이야기했지만, 능력주의란 단순히 다른 가치에 비해 능력이 중시된다고 하여 대두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만인을 "단일한" 능력 관념과 기준에 따라 재단하려 할 때에 능력주의가 부상하고 힘을 얻는다. 반대로 말하면, 능력의 다원론이 무너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능력주의가 지배할 수 없다. 능력주의의 필수 구성요소가 능력의 일원론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말까지 중심부 자본주의, 특히 서유럽에서는 노동계급이야말로 이러한 능력의 다원론을 지탱하는 주역이었다. 자본가, 관리자, 정치인, 대학 교수가 뭐라 떠들든 노동자는 늘 그들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고, 그들이 믿는 제대로 된 삶이 따로 있었다. 그들이 버티고 있을 때에 자본주의 사회는 능력의 일원론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반면에 지식인-중간층은 능력의 일원론의 신실한 신자가 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한때 노동계급에 뿌리를 둔 지식인-중간층의 대규모 등장은 "지식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름으로 일부 좌파의 환영을 받은 바 있다. 이들의 부상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노동계급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데 새롭고 결정적인 자원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결과는 정반대다. 지식인-중간층은 자본주의가 계급투쟁에 선수 치며 선택한 방향, 즉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에 편승하고 여기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자원을 더해주면서, 오히려 위로부터의 진지전, 즉 수동혁명의 강력한 토대가 됐다. 이들을 통해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사적 결합이 완성되려 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능력주의 결합의 최첨단?

 

이런 자본주의 역사의 전반적 흐름과 비교해보면, 한국 사회가 처한 상황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우선 한국은 근대 능력주의의 조숙한 원형이 등장하고 오랫동안 지속된 동아시아의 두세 나라 가운데 하나다. 이 기억은 지금도 대학 입시나 대기업 입사 시험, 공무원 시험 등을 현대판 과거제도로 여기는 관성으로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양반신분제가 과거제도와 결합됐던 경험 역시 세습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설적인 결합이 재연될만한 예외적인 토양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에 이미 이렇게 오랜 능력주의의 역사가 있더라도 이것이 자본주의 현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남한은 처음부터 제2차 산업혁명이 도달한 결론을 학습하고 재연하는 방식으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국가가 주도해 포항제철을 만들고, 재벌 독점기업들을 키워 중화학공업에 진출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국가 관료기구와 기업 관료기구를 채울 인력이 대규모로 필요했다. 이는 먼저 산업화한 나라들과 달리 지식인-중간층과 노동계급이 동시에 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이런 지식인-중간층 수요를 충족시킬 사회적 기반도 급하게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대학이 빠르게 성장했고, 이를 통해 자격 증서를 획득하려는 젊은이들의 숫자도 충분했다. 농지 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민층은 마치 전후 복지국가의 노동계급 가족처럼 적어도 집안에 한 명은 대학에 보낼 여력을 확보했다.

 

이렇게 하여 20세기 말에 한국에서는 어느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지식인-중간층 집단이 성장했고, 그만큼 능력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될 만한 토대 역시 강력히 구축됐다. 영이 <능력주의>에서 제시한 IQ 테스트보다 훨씬 더 세련된 현대판 과거시험들을 통해 경제사회적 위치를 나누며 부와 권력을 배분하는 체계가 완성되어갔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중간층 역시 민주화 이후에 동시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 즉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에 올라타며 전 지구적인 지식인-중간층 대열에 합류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가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서구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도 이것과 노동계급 형성(혹은 탈-형성)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의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가 이미 고도화 단계에 접어들던 1980년대 말에야 사회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몇 년간을 돌아보면, 한국 사회에서도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속도는 지식인-중간층 헤게모니가 확산되는 속도에 종내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뒤늦게 타올랐던 노동운동조차 1997년 외환위기의 일격으로 기세가 꺾여 버렸다.

 

그렇다. 지식인-중간층 헤게모니가 유례없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절반쯤은 노동계급 쪽의 도전이 실패한 탓이었다. 지구자본주의의 오래 된 중심부에서 세기 전환기에 벌어진 것과 비슷한 상호작용이다. 다만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다. 오래 된 중심부에서는 한때 성장했던 노동계급 문화가 해체됐지만, 이 나라에서는 그런 문화가 채 등장도 하지 못하고 압살됐다. 현재는 똑같이 그런 문화가 부재하지만, 적어도 한 쪽에는 기억 정도는 살아 있다.

 

이런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잠정 결론은 능력주의 문제에서 한국은 (아마도 중국과 함께) 지구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서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능력주의가 심각하다면, 이는 과거제도의 기억 같은 전자본주의 유산이 너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런 기억은 강렬하다. 그러나 이는 다름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가 밟은 독특한 궤적 때문에 살아남아 재활용되고 번성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다른 사회가 100여 년은 훨씬 넘는 여정 끝에 도달한 결론, 즉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을 불과 한, 두 세대만에 그것도 가장 순도 높은 형태로 달성했다.

 

영미 자본주의보다 더 앞서간, 자본주의적 능력주의의 이상형이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더 투명한 능력 검정을 요구하는 이른바 "공정"론이 세습-능력주의 결합체를 더욱 강화하는 자기 모순적 주장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시험제도나 고등교육 체계에 대한 개혁론이 그것만으로는 무력한 제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진짜 과제는 우리도 모르는 새 도달하고 만 자본주의의 가장 첨단의 형태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이다.

 

그러려면 답해야 할 근본적 물음이 여전히 많다. 노동계급 문화가 부재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부재했던 사회에서 능력의 다원론은 어떻게 복구될 수 있는가? 지금이라도 우리는 21세기에 맞는 그런 대항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가? 나는 감히 능력주의 극복의 가능성이 온전히 이 물음들에 대한 답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음 글에서는 부족하나마 이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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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가 자주 오르내린다. 능력이 있으면 대접해야지, 한 자리 차지해야지 하는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하지만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지 싶다. 그 능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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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에 지금의 '능력 독재'를 정확히 예언하다

 

요즘 한국 사회의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는 '능력주의'다. 촛불항쟁 이후에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당혹스럽게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 논의로 튀고, 조국 법무부장관 논란을 거치며 대학입시제도 중 수시에 대한 불만이 느닷없는 정시 예찬론으로 비화하면서, 능력주의가 현재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떠올랐다. 주간지 특집으로 거듭 등장하는가 하면 믿을만한 저자들의 책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게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국내에서 능력주의를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하면서 새삼 확인된 바는 이것이 지구자본주의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가령 최근에 번역돼 나온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서정아 옮김, 세종서적, 2020, 원제는 "능력주의 함정")은 미국 사회 역시 능력주의의 덫에 걸려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최근작 <공정하다는 착각>(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원제는 "능력 독재")은 어느 한국 필자보다 더 격렬하게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둘러싼 독서 목록의 맨 위에 올라야 하는 책은 따로 있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 자체가 이 책에서 처음 등장했으니, 이 주제에 관해서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만하다. 출간된 지 60년이 넘었는데, 최근 능력주의 논란 속에 우리말로 다시 번역돼 나왔다.

 

오래 전에 나온 저작이라 요즘 상황과는 잘 맞지 않겠지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최근에 나온 어떤 저작보다 더 명료하게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다. 나는 영의 <능력주의>를 읽으며 다른 글들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이 문제의 중요한 측면들을 새롭게 보게 됐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60년 전에 지금의 '능력 독재'를 정확히 예언하다

 

한데 영의 책을 처음 손에 든 독자는 십중팔구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능력주의'란 말을 최초로 소개한 고전이라는 정보 정도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20세기 중반에 쓰인 다른 사회과학 저작들, 가령 C. 라이트 밀즈의 <파워 엘리트>나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비슷한 책을 기대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아니다. 영의 <능력주의>는 '소설'이다!

 

<능력주의>는 영국에서 이 책보다 앞서 나온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년>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1957년에 나온 책인데, 내용은 능력주의 사회가 들어선 지 이미 오래 된 2034년에 마이클 영과 같은 이름을 한 가상의 사회과학자가 1950년대 이후에 능력주의가 발전한 과정을 회고하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 책이 좀 더 많은 독자에게 읽히길 바랐기에 이런 소설 형식을 취했다고 밝힌다. 저자의 이 전략이 통했는지, <능력주의>는 당시에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실제의 2020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이게 도리어 장애물로 다가온다. 화자가 너무 천연덕스럽게 가공의 역사 서술과 사회 분석을 전개해, 도대체 이게 1950년대 말 이후 영국 사회에서 정말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허구인지 헛갈린다. 소설이라기에는 너무 건조하고, 사회과학 저서라기에는 지나치게 상상력이 풍부한 문장들도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를 권하기가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결코 길지 않은 분량의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 시대에 쓰인 어떤 글보다 더 풍성한 교훈과 영감, 논점들을 캐낼 수 있다. 무엇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어떻게 지금 우리 사회가 도달한 지점을 이토록 정확히 예언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이 점에서 <1984년>이나 <멋진 신세계>보다 더 섬뜩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가장 명백하게 들어맞은 예언은 요즘도 능력주의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모든 저작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한, 능력주의와 세습주의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다. 능력주의는 자산과 권력, 명예를 세습하는 구 귀족정을 비판하는 이데올로기로 등장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상당수 젊은이들이 능력주의에 공감하는 것도 마치 이것이 '금수저'들의 세습 질서를 깨고 '공정'을 실현하는 수단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능력주의는 그 신봉자들을 철저히 배신한다.

 

능력주의는 구 귀족정을 타파하는 데 효과적인 무기인 듯 보이지만, 능력주의가 만들어놓는 새 질서는 결국 신 귀족정이다. 왜냐하면 능력이란 항상 학교나 시험 같은 역사적 제도들을 통해 육성되고 검증되는데, 이런 제도들은 늘 기득권층에 의해 또 다른 세습의 통로로 쉽게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승리를 구가하는 초기에는 실제 노동계급이나 하위 중산층의 자제들 중에 계급-계층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한 세대만 지나도 사정은 달라진다. 이미 사다리 위로 올라간 이들의 자녀가 다름 아닌 '능력'이라는 명분 아래 부모의 지위를 물려받게 된다. 능력주의는 어느덧 새로운 세대의 세습주의가 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오늘날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공정'론이 중산층 세습화 현상을 극복하는 데 무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전자는 후자를 지탱해주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능력주의>는 전후 영국 사회에서 아직 능력주의가 대세가 되기도 전에 이를 정확히 예견했다. 다만 <능력주의>가 잘못 짚은 게 있다면, 현실에 등장한 능력주의 사회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사회를 예상했다는 점이다. <능력주의>가 그리는 21세기 사회는 모든 시민에게 '균등급'이라는 이름으로 수당을 지급하며, 일자리가 없는 시민에게는 공공이 나서서 가내 하인 일거리라도 만들어준다. 말하자면 기본소득제와 고용보장제가 실시된다. 게다가 능력주의를 통해 계급-계층 사다리의 맨 위로 올라간 이들이 자산 투기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지도 않는다.

 

<능력주의>가 그린 능력주의 디스토피아는 모종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인 셈이다. 아마도 영은 사회민주주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화한 사회조차 만약 능력주의와 결합된다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이렇게 설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최악의 자본주의가 결합된 사회를 '실제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의 <능력주의>가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니라 유토피아 소설로 보일 지경이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담지자, 지식인-중간층

 

여기까지는 실은 능력주의를 다룬 다른 책들도 흔히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능력주의>는 이 모든 저작들의 맨 앞에 서 있다는 점에서 탁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굳이 21세기에 쓰인 저작들 말고 잘 읽히지도 않는 이 책을 찾아 읽을 이유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한데, 다른 미덕이 있다. 내가 <능력주의>를 읽으면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그 장점이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배양하고 확산시키며 그 승리를 관철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즉, 이 책은 어떤 사회 집단, 사회 세력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담지자인지에 주목한다.

 

물론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에 친화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처음부터 능력주의를 동반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그 내적 필요 때문에 세상에 없던 능력주의를 불러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시킨 것도 아니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와 역사적 계보를 달리 하며, 그래서 자본주의와 때로 충돌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대의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가 그렇듯이 최상의 한 쌍을 이루고야 한다.

 

가령 미국에서는 능력주의가 자본주의와 처음부터 거의 동의어나 마찬가지였지만, 저 늙은 대륙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오랫동안 자본주의와 세습주의가 어울리지 않는 동맹을 이어갔고, 그래서 상당 기간 동안 '세습주의 대 능력주의'의 대립 구도가 진실의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지구자본주의 곳곳에서 대의민주주의와 함께 자본주의에 최적의 상부구조를 제공해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에 뚜렷한 담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자 문학의 맛을 잃지 않으려는 <능력주의>는 그 담지자로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을 지목한다. 저자 마이클 영은 자신을 윌리엄 모리스, G. D. H. 콜, R. H. 토니의 사회주의 계보 위에 올려놓는 반면, 그 반대편에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을 놓는다. 전자는 누구이고, 후자는 누구인가? 전자는 노동계급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 노동계급의 시각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리려 한 이들이다.

 

그럼 후자는? 노동계급을 위한 것은 분명했지만, 노동계급의 시각으로 새 세상을 그리지는 않는 이들이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무계획적인 오합지졸 민주주의는 민주적 귀족주의로 대체돼야 한다. 곧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이해하면서 그 신성한 목표를 향한 질주를 이끌 수 있는 5퍼센트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되어야 한다." (<능력주의> 65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페이비언협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 버나드 쇼의 유명한 말이다. 이 발언에서 너무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쇼는 프롤레타리아 전체가 아니라 "5% 프롤레타리아트"의 시각에서 새로운 사회를 전망했다. 그 '5%'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물론 능력주의다.

 

그리고 영은 이 능력주의를 하나의 간명한 공식으로 정리한다. 그것은 "능력주의 = 지능 + 노력"(<능력주의> 152쪽)이다. 여기에서 '노력'이란 다소 기만적인 항목이다. 진정한 기준은 '지능'이다. 이 점에서 영은 자신이 해부하려 한 이데올로기에 너무도 이데올로기적인 이름을 붙여주고 말았다. '능력주의(meritocracy)'란 '노력'이라는 허깨비 같은 항목을 통해 진실을 가리는 명칭이다. 진짜 이름은 '지능주의'다.

 

<능력주의>에서 '능력 있는 자'는 노골적으로 IQ 테스트를 통해 선발된다. 너무 조야한 체제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껏 존재한 모든 근대적 시험 제도는 이 IQ 테스트의 복잡한 변주일 뿐이다. IQ 테스트를 십수년의 공식 교육 과정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더 세련되게 만들고, 마치 '노력'이라는 변수도 함께 검증되는 양 설계해 정당성을 높인 것일 따름이다. 결국은 '지능'이라는 기준을 통해 선별된 자들이 정한 그 '지능'이라는 기준으로 모든 인간을 분류, 배열하는 체계다.

 

역사상 이 기준을 상대적으로 쉽게 충족시킬 수 있었던 인간 군상을 우리는 '지식인-중간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을 기준으로 유능함을 인정받아온 이들의 역사적 명칭이 그러하기에 '지식인'이며, 바로 그 능력을 통해 사회의 밑바닥에서 맨 위를 향해 상승 운동을 벌이곤 하기에 일단 '중간층'이다. 쇼가 "5% 프롤레타리아"라 하면서 염두에 둔 집단이 이들이며, 실은 쇼 자신이 이들의 일원이다.

 

영의 <능력주의>는 이들 지식인-중간층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확산시키며 그것이 관철된 사회에서 승자가 되는 사회적 주체라 지목한다. 물론 이렇게 분명한 명제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가 등장시키는 이들, 가령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하위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야심찬 자녀들,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대학 졸업장을 따낸 이들을 '일반화'하면, 지식인-중간층 정도로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평등주의가 곧 능력(지능)주의이며, 이들이 마이클 영이 그린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이든 아니면 우리가 실제 사는 우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현존 체제의 중심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때에 능력주의 사회가 열린다.

 

우리의 우주에서는 이들이 <능력주의> 속 가상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말고도 다른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 중에는 토마 피케티가 만들어낸 '브라만 좌파'라는 명칭도 있고, "우리 모두 능력주의자가 되자"고 너무도 적나라하게 외쳐서 마이클 영에게 호통을 들은 토니 블레어 같은 '사회적 리버럴(social liberal)'들도 있다.

 

그럼 마이클 영의 대체 역사물 말고 현실 역사에서 지식인-중간층은 어떻게 새로운 불평등사회의 승자 동맹에 낄 수 있었는가? 한국 사회에서 이들에 해당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또한 능력주의의 담지 세력이 지식인-중간층이라는 사실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지면에 올릴 다음 글에서는 이 물음들에 대해 내 나름의 답을 찾고자 한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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