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8.07.03 [시]첫눈에 반한 사랑(쉼보르스카)
  2. 2017.11.21 [시]끝과 시작 _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3. 2016.12.05 나에게로 온 '시를 노래한 시'
  4. 2016.11.21 친구 그리고 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는 참 좋다.

근데 좀 길긴 하더라.ㅎㅎㅎ

그래도 좋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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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한 사랑

                                  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갑작스러운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으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 속에서 주고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오,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야.

어쩌면 삼 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손잡이가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오랜만에 만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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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_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열심히 끄덕인다.

어느 틈에 주변에는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Posted by 익은수박

시를 노래한 시를 모아 보았다.

다음 시 모임에서 '시'를 노래한 시를 주제로 잡아서이기도 하다.



덧. 1

틈틈이 들어오는 시를 채우는 걸로!^^


덧. 2

'쉼보르스카'의 시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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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두의 시>


가두의 시

                        - 송경동


길거리 구둣방 손님 없는 틈에

무뎌진 손톱을  가죽 자르는 쪽가위로 자르고 있는

사내의 뭉툭한 손을 훔쳐본다

그의 손톱 밑에 검은 시()가 있다


종로5가 봉제골목 헤매다

방 한칸이 부업방이고 집이고 놀이터인

미싱사 가족의 저녁식사를 넘겨본다

다락에서 내려온 아이가 베어먹은 노란 단무지 조각에

짜디짠 눈물의 시가 있다


해질녘 영등포역 앞

무슨 판촉행사 줄인가 싶어 기웃거린 텐트 안

시루 속 콩나물처럼 선 채로

국밥 한 그릇 뚝딱 말아먹는 노숙인들의 긴 행렬 속에

끝내 내가 서보지 못한 직립의 시가 있다


고등어 있어요 싼 고등어 있어요

저물녘 "떨이 떨이"를 외치는

재래시장 골목 간절한 외침 속에

내가 아직 질러보지 못한 절규의 시가 있다

그 길바닥의 시들이 사랑이다



2. <다시 시에 대하여>


다시 시에 대하여

                                      - 김남주


시의 내용은 생활의 내용 내 시에는

흙과 노동이 빚어낸 생활의 얼굴이 없다

이제 그만 쓰자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

가자 씨를 뿌리기 위해 대지를 갈아엎는 농부의 들녘으로

가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물과 싸우는 가뭄의 논 바닥으로

가자 추위를 막기 위해 북풍한설과 싸우는 농가의 집으로

내 시의 기반은 대지다

그 위를 찍어내리는 곡괭이와 삽의 노동이고

노동의 열매를 지키기 위한 피투성이의 싸움이다

대지 노동 투쟁...

생활의 이 기반에서 내가 발을 떼면

내 시는 깃털 하나 들어올리지 못한다

보라 노동과 인간의 대지에 쁘리를 내리고

생활의 적과 싸우는 이 사람들

피와 땀과 눈물로 빚어진 이 사람의 얼굴을



3. <칼날의 시>


칼날의 시

                         - 문정희


불 속에 사는 새가 있다

얼음 속에서 날개를 펼치는 물고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어디에도 둘 수 없어

번개처럼 날카로운

칼날 위에 둔다

위태하게 대롱거리는

붉은 눈물방울

이대로 내 사랑 백 년만 가거라




4. <단어를 찾아서>


단어를 찾아서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 보고, 헤아려 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피로 흥건하게 물든 고문실 벽처럼

네 안에 무덤들이 똬리를 들지언정,

나는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고 싶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고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 없다.

도무지 찾을 수 없다.




5.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 이선영


나는 종이 위에 나를 한자 한자 새겨넣는다

나는 이리저리 흐트러진 나의 육체를 끌어모아 글자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꽉 닫는다

한글자 한글자 씌어질 때마다 한치 한치 오그라드는 내 육체는 수천 수만 가지 글자들로 다시 태어나고

새로 만들어지는 글자들마다에 나의 육체는 자신의 새로운 집을 짓는다

나는 수만 채의 집을 거느리고 산다,

나의 살점을 나누어 조금씩 떼내어서는 각 집의 관리인으로 둔 채

그런데 이즈음 내 육체는 "이 안은 왜 이리 어둡고 갑갑한가?"라고 말한다

나는 공들여 지은 내 집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늙어 눈이 어두워진 도장공처럼

나는 지금 끙끙대며 나를 글자 속에 구겨넣으려 안간힘쓴다

내 커진 몸집의 풍요를 맛본 내 육체가 더 이상 좁은 집에 살려 하지 않기에




6. <시를 쓰기 위하여>


시를 쓰기 위하여 _ 연필


                                      - 김연신


연필을 깍는다.

시를 쓰기 위하여

연필이 뾰족하게 깎인다.

연필은 뾰족한 끝으로 내 배를 지그시 찌른다,

연필만 깎아서 시가 써지느냐고.

손가락을 깎으면 시가 써지느냐고 내가 묻는다.

연필은 대답도 없이 더 찌른다.

아픈 것이 손가락 열 개를 다 뾰족하게 깎는 것이 차라리 좋겠다.

연필은 아무 말도 없이 찌른다. 또 찌른다.

나를 덥석 안아서 연필깎이 속에 집어넣는다.

갑자기 날들이 낄낄 웃으며 돌아가고 

머리통부터 나는 뾰족해진다.


나를 잡고 시를 쓸 그를 기다린다.




7. 






Posted by 익은수박

친구를 노래한 시


친구라는 게 참 묘하다. 어린 시절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싱겁기만 하다. 

아니 늘상 만나는 아저씨 아줌마와 다르지 않다. 좀 편하기는 할지라도...

아니 그래서 편하지 않았다.

진짜 친구가 있는 걸까?

아마 친구 같은 존재를 친구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친구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들 친구를 노래하는지도 몰라


덧 1.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참 좋기는 한데, 언뜻언뜻 남성 중심적인 냄새가 배어 있는 듯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남성들에게 친구는 어떤 느낌이고, 여성들에게 친구는 어떤 느낌일까?

다르기는 할 것이고, 사회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기도 하고....

어떤 게 진실일까? 틀 안과 밖의 경계를 들여다보기가 쉽질 않아!



덧 2.

간밤에 시 몇 편을 찾다가 박노해 시가 들어와서 몇 편 덧붙인다.


덧 3.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몇 편을 만났다.

그는 1923년에 태어난 폴란드 시인이다. <끝과 시작>이라는 책에서...


덧 4. 

시 순서를 바꿨다.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들 가졌는가>를 맨 앞으로 모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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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사회 운동가이며 종교사상가, 1901-1989)





<벗의 노래>
                       _정연복


홀로는 이슬 하나의
무게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작고 여린 꽃잎들이

층층이 포개어지고 
동그랗게 모여 
이슬도, 바람도 너끈히 이긴다

하나의 우산 속에
다정히 밀착된
두 사람이

주룩주룩 소낙비를 뚫고
명랑하게 걸으며
사랑의 풍경을 짓는다

가파르게 깊은 계곡과
굽이굽이 능선이 만나서
산의 너른 품 이루어

벌레들과 새들과 짐승들
앉은뱅이 풀들과 우람한 나무들
그 모두의 안식처가 된다

나 홀로는 많이 외로웠을 생(生)
함께여서 행복한  

참 고마운 그대여,
나의 소중한 길벗이여


(정연복·시인, 1957-)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말로 좋은 친구>


그들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그들은 짓궂은 장난을 하며 놀기도 했지만,

또 전혀 놀지 않고도, 전혀 말하지 않고도 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

전혀 지루한 줄 몰랐기 때문이다.


(장자끄 상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서)




<첫 마음>

                     - 박노해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 마음으로




<내가 나선 이유>

                     - 박노해


솔직히 나는 내 죄를 안다

나도 거품이었고 부실했다

나는 지금 누구도 탓하지 않고

내 일생을 바쳐 쌓아온 것들이

발 밑에서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이건 분명 내 탓이다

나의 불찰이고 나의 무능이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임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슬프다

이것이 내 노여움이다


이 모든 걸 내 죄로 알고 받아들이는 게

너를 조금도 참회시킬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거다

너는 어제도 오늘도 그러한 것처럼

내일 다시 숱한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미치게 하고

한 순간 통째로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너희들이 떠넘긴 이 큰 죄와 고통이

고스란히 우리의 미래로 떠밀렸을 뿐이라는 것

그것이 나의 슬픔이고 나의 분노이다

그것이 내 탓이다 내 가슴을 치면서도

너를 향해 내가 나서는 이유이다




<나에게 던진 질문>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함께 탄식하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 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 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끝과 시작>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최성은 옮김)



Posted by 익은수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