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국가가 우리에게 주는 것

On National Greatness



조국의 위대함은 개인에게 무엇을 해주는가? 뭔가 중요한 걸 해주기는 하는데 분석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지난 2세기 동안 누려왔던 위대한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정치적 위상의 변화가 개인의 심리에 야기하는 변화를 첨예하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내가 1896년부터 알아온 미국에서는 정반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그 변화가 완전히 성취되려면 멀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상반되는 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국가적 성공이 개인적 성취에 자극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테네인은 페르시아인을 쳐부수고 나서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고 아이스킬로스Aeschylos(BC525~BC456년,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를 낳았다. 영국인은 스페인 함대를 물리치고 나서 세익스피어를 낳았다. 프랑스 문학의 황금기는 루이 14세가 거둔 승리들과 연관이 있었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국가적 노력의 성공과 연관 짓지 않고서는 찾아보기 히든 일종의 개인적 생산성이 존재한다. 그것과 관계 없는 개인적 생산성도 있기는 하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은 자신들의 음악전 천재성을 자극하는 국가적 성공을 누린 바가 없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1632~1677년, 네덜란드 철학자로 유대인이었다)는 억압받는 민족과 패배의 과정을 밟고 있던 국가에 속했다. 개인적인 위대함과 사회적 원인에 의존하는 위대함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공적인 번영에 의지하는 성취의 가장 뚜렷한 예로 건축이 있다. 건축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금세기 건축 분야에서는 미국이 세계를 주도해왔다. 다른 나라들이 거부한 기회들을 미국의 건축가들은 따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건축이 보통 사람들에게 부응해왔다.


뉴요커는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해 말하지만 그 자부심이 언제나 뉴욕 시정 덕분에 생긴 것은 아니다. 건축가의 성공은 어느 정도는 모든 시민의 성공이기도 하다. 만약 뉴욕 시민이 외국인과 논쟁을 벌인다면 외국인에게는 내세울 만한 마천루가 없다는 점도 그에게 자신감을 주는 한 이유가 된다. 요듬 들어서는 이런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지만 당분간은 계속될 것이다. 


국가적 성공의 효과는 청년들과 관련 있는 분야에서 극대화된다. 개인적 차원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재는 능력으로, 이는 부분적으로는 타고나며 부분적으로는 교육의 결과로 얻게 된다. 둘째는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조건이다. 


어떤 멍청한 인간이 진정한 천재는 늘 신중하다는 관념을 세상에 뿌려놓았다. 사실은 정반대다. 어떤 청년이 신중하다면 설사 능력이 있더라도 부모와 동료들로부터 조롱받는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천재라고 자부해봐야 검증되기 전까지는 비웃음이나 사게 될 테니까.


젊은이들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은 누구나 위대한 업적을 남길 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주는 분위기, 따라서 그들의 자부심이 질투에 따른 조소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분위기에서 사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업과 직업 및 건축(이것은 사업인 동시에 예술이다) 분야에서의 성공이 청년이 품어야 할 자연스럽고 가치 있는 야망으로 인식되고 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음악으로 성공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주위 어른들의 그러한 기대는 젊은 시절의 야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국가적 성공의 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데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훈은 이것이다. 청년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기대하라. 그러면 당신은 그걸 얻게 될 것이다. 적게 기대하면 결코 기대하는 것 이상은 얻지 못할 것이다.(1932. 1. 20.)


Posted by 익은수박

중년에 관한 글

글쎄 아직은 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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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at Sea


내 생애 두 번째로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첫번째는 35년 전이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비교해보면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


35년 전에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이는 없었으며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성공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게 가족이란 자유를 구속하는 외부의 권력으로 다가왔고 세상은 개인적인 모험의 대상일 뿐이었다. 전통이나 윗사람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나만의 생각을 하고 싶었고, 나만의 친구를 사귀고 싶었으며, 나만의 보금자리를 찾고 싶었다. 버팀목에 기대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느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가 넘치는 활력 덕분이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때 나는 바다에서 맞는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즐거운지 알게 됐고, 승무원들이 최대한 축제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도 흥겨웠다. 배는 좌우로 엄청나게 흔들렸는데,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납작한 선박용 트렁크들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객실 이쪽저쪽으로 미끄러졌다. 그 소음이 커질수록 내 웃음소리도 커졌다. 모든 게 끝내줬다.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누군가의 애정이, 차가운 세상의 한기를 몰아내 줄 사람의 온기가 필요해진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대개 그렇듯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즉 죽음이나 노화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세속적인 갖가지 불행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좀 더 형이상학적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살다 보면 겪게 마련인 중대한 재난들, 이를테면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평범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잔인성을 발견하는 일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드는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뒤로 35년 동안 이런 나쁜 일들을 경험하며, 인생에 대해 내가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태도마저 바뀌었다. 도덕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도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가의 기분으로 즐기지는 못할 거다. 나는 자식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고, 가족과 더불어 따뜻한 난롯가에 앉고 싶고, 역사의 연속성과 위대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고 싶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중년들이 크리스마스에 즐기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기쁨이다. 그 점에서는 철학자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평범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음울한 고독을 달래는 데 있어 그런 기쁨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즐거운 모험이었던 바다에서의 크리스마스가 지금은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대중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으면서 홀로 서기를 택한 사람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감미로운 즐거움이 모두 그러하듯 가정에서 얻는 기쁨도 의지를 약화시키고 용기를 훼손할 수 있다. 가정에서 따뜻하게 보내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수평선이 선사하는 해방감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이런 아름다움은 어리석고 사악한 인간들의 손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비틀거리는 중년의 이상주의에 힘을 불어넣는다.(1932. 1. 13.)


Posted by 익은수박

정치, 아니 투표만 습관에 따라 하는 건 아닐 테다. 많은 일상이 습관처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성찰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은 탓이지 싶다. 적어도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찰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도 이미 세상의 일부이잖은가. 결국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안 바뀔 테니까. 이번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 이 글을 읽은 게 조금은 아쉽다. 뭐, 선거 전에 읽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 달랐을 텐데!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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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투표를 하는 진짜 이유

On Politician



나라가 민주적으로 될수록 그 통치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귀족들과 외국인 정복자들은 증오를 받을지는 몰라도 경멸을 받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다스릴 사람을 국민이 선출하니 당연히 다수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가 뽑히고,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살피는 섬세함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자리이니 가장 현명하고 우수한 사람이 선택될 듯싶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군가를 정치가라고 부르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조롱하는 행위가 된다. 공동체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투표에서 이기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고, 설령 시도하더라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반면 투표에서 이기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훌륭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이기 일쑤다(최고 관직을 차지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개척자들도 이 역설적인 상황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의 시대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민주주의가 새로운 것일 때는 위대한 사람들이 부상(浮上)하지만,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 이 장점을 잃어버린다. 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누구나 준비된 대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정당 조직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대답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정당 조직에 복종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니까. 만약 사탄과 바알세불(신약성서에 나오는 악귀의 우두머리)이 후보로 공천을 받고 대천사가브리엘이 무소속으로 나온다면 대천사가 당선될 확률이 전혀 없을 터이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이상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한 가지 이유는, 무소속 후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선거 자금을 주무르지 못하며 따라서 정치가들의 숙달된 기술로 대중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모든 것을 해명하지는 못한다. 왜 사람들이 무소속 후보에게 선거 자금 기부하기를 그렇게 꺼리는가 하는 궁금증은 남기 때문이다. 그 대답은 물론 무소속 후보들이 당선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소속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답은 우리를 맨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만들 뿐이다. 왜 그들은 당선될 가능성이 없는가?


내가 볼 때 그 궁극적인 이유 가운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게 바로 습관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특정 후보의 장단점을 따지지도 않은 채 자신들이 늘 투표해왔던 대로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가 늘 투표해왔던 대로 표를 던진다. 이는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개혁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영국에 사는 나로 말하자면 아버지가 급진파였으므로 노동당에 투표한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자유당 지지자였으므로 급진파가 됐고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휘그당 지지자였으르모 자유당 지지자가 됐다. 그리고 그분이 휘그당 지지자가 된 것은 선조들이 헨리 8세로부터 수도원 토지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급진주의는 이처럼 금전상의 원인에서 비롯했으니 그럼 나는 보수당 지지자로 돌아서야 할까? 생각만 해도 심란해진다. 습관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설사 벗어난다 하더라도 의혹에 시달리는 상태가 되어 결국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습관이 지배하는 한, 훌륭한 사람들이 정치에서 기회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해결책이 없는가? 아니 있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습관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지만 지금보다는 그 정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줄어든 부분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 민주주의에서 우리의 정치가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준이 곧 정치가의 수준이다. (1931.12.16.)


Posted by 익은수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