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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영혼이다.

온갖 빛깔의 꽃이 피는 귀한 단풍나무에서 나온 호접마마의 후손들은 나비를 영혼으로 여긴다. 그래서 먀오족(苗族) 사람들은 집으로 고운 나비 한 마리가 날아 들어오면 조상님이 배가 고파 찾아 오셨다고 여기고 상을 차려드린다. 다른 사람과 다툴 때 나비가 나타나면 조상님이 그 다툼을 못마땅해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싸움을 그만둔다. 푸른 숲 한가운데에서 홀연히 꿈처럼 날아오르는 찬란한 나비, 꿈틀거리는 몸을 벗어버리고 가볍게 훌쩍 날아오르는 나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혼’을 의미한다.

먀오족의 성인식. 마을의 지도자 군위안량에 낫으로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있다.


그 호접마마가 알록달록한 빛깔의 알 열두 개를 낳는다. 창세의 신 푸팡(府方)이 커다란 할미새를 불러다가 알을 품으라고 했다. 먀오족의 신화에는 거인 신들이 많이 등장한다. 푸팡은 다리 관절이 아홉 개나 있고 팔이 여덟 쌍 있는 거인이다. 물고기 아홉 광주리, 찹쌀 떡 아홉 통을 먹는 힘센 그가 한데 붙어있던 하늘과 땅을 갈라놓았고, 거인신 양유(養優)는 산을 만들었으며 머리에 뿔이 있는 거인 슈뉴는 강을 만들었다.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없어서 하늘과 땅이 흔들거릴 때 바오궁(寶公)과 슝궁(雄公), 쥐궁(且公)과 당궁(當公)이 머나먼 곳에서 온갖 고생 끝에 금과 은을 가져다가 녹여 금 기둥, 은 기둥을 만들어 하늘을 받쳤다.

은 장신구로 치장한 먀오족 여성들.

기둥은 만들었지만 해와 달이 없어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신들은 고민했다. 어떤 모양으로 해와 달을 만들까? 돌을 강물에 던질 때 퍼져나가는 둥근 물결무늬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 무늬를 모델 삼아 해와 달을 만들었다. 거인 신들은 금으로 열두 개의 태양을, 은으로 열두 개의 달을 만들고 남은 부스러기로 별을 만들었다. 거인 신들이 왼쪽 어깨에 태양을, 오른쪽 어깨에 달을 지고, 소매에는 별을 넣고 허리에는 은하수를 차고 푸른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을 제자리에 놓았다. 다른 버전에 의하면 하늘에 걸린 해와 달이 자꾸 흔들리니까 남은 부스러기로 별을 만들어 못처럼 하늘에 박아놓았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열두 개의 태양과 달이 질서를 무시하고 한꺼번에 떠오르니 활 잘 쏘는 신 쌍자(桑札)가 한 개의 태양과 달만 남기고 다 쏘아서 떨어뜨렸다.

한 개씩 남은 태양과 달은 겁이 나서 숨어버렸고 세상은 암흑천지가 되었다. 숨어있는 해와 달을 불러내기 위해 신들은 온갖 동물들을 보내지만 결국 수탉의 청랑한 목소리에 해와 달이 다시 나온다. 신들은 세상에 다시 빛을 가져다준 수탉의 공로를 기려 예쁜 빗을 하나 주었고, 수탉은 그것을 자랑스레 머리 위에 꽂고 다녔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는 수탉의 붉은 볏이다.

먀오족의 창세신화에는 이렇게 많은 거인 신들이 등장한다. 서구의 신화에도 세상의 시작에는 거인 신들이 있다. 그 거인 신들의 신화가 피로 물들어 있다면 먀오족 신화의 거인 신들은 선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지금의 먀오족 사람들처럼 부지런하다. 금과 은을 운반해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해와 달을 하늘로 운반하다가 실수로 해와 달을 물에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슬퍼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유쾌하게 함께 힘을 합해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창조의 거대한 작업을 마무리한다.

먀오족 여성들이 치마에 수놓는 3개의 선은 그들이 이주할 때 건너온 3개의 강을 의미한다. 역사를 옷에 기록하는 것이다.


한편 노란 알에서 나온 최초의 인간 장양(姜央)은 하얀 알에서 나온 우레신 뇌공(雷公·꺼우하오라고도 한다)과 끊임없이 다툰다. 먀오족의 오래된 노래는 열두 개의 알 이야기에서 홍수이야기로 이어진다.

열두 개의 알에 관한 노래 다 끝났네/ 이제 무얼 부를까/
다른 구연자가 와서 노래 이어 가네/ 홍수가 하늘까지 차오른 노래를 불러야지/

알에서 태어난 장양과 뇌공, 호랑이와 용 등은 누가 땅의 주인인가를 놓고 내기를 한다. 땅은 결국 꾀를 써서 승리한 장양의 차지가 되며 뇌공은 하늘로 올라간다. 그런데 뇌공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개 한 마리만 남기고 소와 말을 모조리 갖고 가버렸다. 세상에 남겨진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농사를 지으려니 농사가 잘될 리 없다. 화가 난 장양은 마침내 뇌공을 찾아간다.

“누렁이가 힘이 없어 논을 갈지 못해. 내게 너의 소를 빌려주면 논을 갈고 나서 돌려주지.”

하지만 장양은 논을 다 갈고 난 뒤에 소를 죽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고기를 다 먹어버렸다. 소의 꼬리와 뿔만 남겨 논에 묻어두고 장양은 뇌공에게 달려가 슬픈 척 하며 말했다.

“뇌공아. 이를 어떡하지? 논이 질척이고 소는 무거워서 논을 다 갈고 나니 소가 그만 논에 빠져 묻혀버렸단다.”

구이저우성 동남부의 계단식 논.


뇌공은 그 와중에 녹색 비단옷을 챙겨 입고 상투를 잘 매만지고서 논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정말 소의 꼬리와 뿔만 보이는 것이었다. 놀란 뇌공이 소의 꼬리를 잡아 당겨보고 나서 피가 묻어있지 않은 것을 보고 장양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네 이놈, 남의 소를 빌려다가 다 먹어버려? 내가 하늘로 돌아가 쇠망치와 도끼를 들고 돌아와 네 놈을 죽일 것이다.”

비단옷을 챙겨 입고 상투까지 틀고 왔는데 장양에게 속아 공연히 힘을 쓰느라 비단옷은 더럽혀지고 상투는 흐트러진 것이 생각할수록 분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싸움은 팽팽하게 이어진다. 뇌공이 마침내 장양에게 잡혔지만 장양이 외출 한 사이에 장양의 두 아이는 뇌공이 보여주는 현란한 마술에 정신을 빼앗겨 그가 원하는 물과 도끼를 가져다준다. 오누이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뇌공은 오누이에게 조롱박 씨앗을 준다.

“나를 살려줘서 고맙구나. 이 씨앗을 심어라. 이틀 후에 창고보다 큰 조롱박이 열릴 거야. 속을 파내고 그 안에 들어가렴. 큰 배가 되어 너희를 보호해 줄 거야.”

하늘로 돌아간 뇌공은 ‘하늘의 배꼽’을 열어 비를 퍼부어 홍수를 일으켰고 착한 오누이는 거대한 조롱박 속에 숨어 대홍수에서 살아남는다. 뇌공과 싸우러 하늘로 올라간 장양은 그곳에 남고, 오누이만 돌아와 우여곡절 끝에 혼인을 하게 된다. 마침내 먀오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바사 먀오족 마을의 군위안량(滾元亮)이 바로 그 장양의 화신이다. 그의 키는 정말 작다. 군위안량이 어려서 키가 자라지 않자 어머니가 마을의 장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고 장로는 귓속말로 어머니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장양의 화신이야.”

먀오족 여성의 치마에 나비 무늬의 자수가 새겨져 있다.

중국 국무원에서 유일하게 총을 지니고 다녀도 된다고 허락해주었다는 바사 먀오족 마을의 지도자 군위안량, 그가 지니고 다니는 총의 크기만큼 키가 자랐을 때 그는 이제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강렬한 지도력으로 마을을 이끈다. 숲 속의 통과 의례에서 오랜 전통에 따라 낫으로 머리를 밀어주는 그의 얼굴에서 단풍나무의 후손, 강인한 장양의 모습을 본다. 오랜 옛날, 동쪽에서 살던 먀오족의 인구가 늘어나고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하게 되자 그들은 좋은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들을 이끌었던 신화 속의 영웅이 바로 슝궁(雄公)이다. 그는 지혜로움과 용기로 부족을 이끌고 서쪽으로 온다.

좋은 곳은/ 하늘 저편에 있어요/
좋은 생활 하려면/ 산 저쪽으로 가야 해요/

살던 땅을 바라보며 눈물 짓는 이들을 이렇게 달래며 그는 목말라 하는 할머니에겐 찬물 한 모금, 힘들어하는 할아버지에겐 담배 잎 하나를 드리며 그들을 이끈다. 마침내 그들은 세 개의 강을 지난다. 강의근원에 금이 있는 누런 강, 강의 근원에 은이 있는 하얀 강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말한다.

“은이 있는 곳으로 가자. 은이 가장 귀해. 희고 예쁘잖아. 옷에 장식할 수 있는 은이 많은 곳으로 가자.”

“아니야. 금이 은보다 귀해. 누런 강물을 따라 금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러나 슝궁이 말한다.

“금과 은은 다 파내면 끝이지요. 벼꽃 향기 가득한 강으로 갑시다.”

그들은 금과 은을 버리고 벼꽃 향기를 택했고,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욕심을 버린 조상들 덕분에 그 후손들은 지금도 구이저우성 동남쪽 벼꽃향기 아름다운 곳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이루고 있으니. 

〈김선자 중국신화연구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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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貴州)성. 중국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지금도 구이저우성이라는 이름은 무척이나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석유 같은 것이 엄청나게 묻혀있어 주목 받는 곳도 아니고 번쩍이는 대도시가 즐비한 화려한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중국 최대의 폭포인 황궈수(黃果樹)폭포가 있고 산둥성 취푸(曲阜)의 공자 사당만큼이나 멋진 건물을 가진 문묘(文廟)가 있다. 명나라 때 중원에서 내려온 군인들의 후손이 몇백년 동안 똑같은 풍습을 지닌 채로 단란하게 살아가는 모습도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곳에는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도 단결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먀오족(苗族)이 가장 많이 모여 산다. 그뿐인가, 구이저우성에는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 갈피갈피에 통족, 이족, 토가족(土家族) 등 여러 민족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 소수민족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숨어있는 보석과 같은 곳이다.

구이저우성 공자사당 문묘의 용조각 기둥.


구이저우성의 성회인 구이양(貴陽)에서 동쪽으로 카이리(凱里)까지 가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고요하게 흐르는 두류강(都流江)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먀오족과 동족들이 사는 첸동남 지역으로 접어든다. 구이저우성은 간략하게 ‘첸(黔)’이라고 불린다. 그러니까 첸동남이란 구이저우성 동남부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두류강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아득한 산꼭대기에 먀오족의 마을들이 있다. 사람들이 찾아오기 힘든 높은 산꼭대기에 먀오족의 마을이 생긴 것은 청나라 때 먀오족이 기의를 일으켰을 때 그들을 토벌하려는 중앙정부의 군사들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아픈 역사는 지금도 그들의 피 속에 여전히 남아있어 10여 년쯤 전에는 자신들이 조상이라고 여기는 ‘치우(蚩尤)’를 모욕한 자들과 일전불사의 의지를 불태웠던 적도 있다. 소수인 그들을 그렇게 당당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먀오족 사람들은 아득한 옛날 자신들이 머나먼 중원 땅에서 세 개의 큰 강을 건너 지금의 구이저우성으로 이주해왔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전해지는 오랜 전설은 이렇다.

두류강 건너편으로 먀오족의 마을이 보인다.


“치우가 황제(黃帝)와 싸워서 졌어. 그래서 치우가 아들들에게 묘족을 이끌고 떠나라고 했지. 아들들은 혼수와 청수, 흑수를 건너 이곳으로 왔어. 우리 바사 사람들은 바로 치우 셋째 아들의 후손이야.”

구이저우성 동남부 충장현(從江縣) 근처 바사(沙) 먀오족 마을 노인의 말이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은 중국신화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쟁이다. 중원의 신 황제와 동이의 신 치우가 탁록에서 맞붙었고, 그 치열한 전투에서 치우가 패하여 목이 잘린다. 그리고 치우의 손과 발을 묶었던 수갑과 차꼬에 묻은 피에서 이루지 못한 치우의 한처럼 붉디붉은 단풍나무가 자라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단풍나무’를 잘 기억해두시라.

구이저우성에는 명나라때 중원에서 내려온 군인들의 후손이 그 시절의 풍습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이마의 머리카락을 뽑은 여성을 매력적으로 여긴다.


바사 먀오족 마을은 충장현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321번 국도가 마을 앞으로 지나간다. 그런데도 바사 사람들은 중국어를 하지 않는다. 마을의 대표자 노릇을 하는 군위안량(滾元亮)만이 중국어를 할 뿐, 다른 사람들은 그저 환한 미소로 자신들의 마음을 대신할 뿐이다.(이 마을은 중국 구이저우성의 인물 사진작가인 루셴이(盧現藝)의 강렬한 사진들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2003년 7월에 프랑스 아를에서 열린 세계 사진전에 ‘바사 먀오족사람들’이라는 사진을 출품하여 상당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도 베이징의 다산쯔 예술인 지역(大山子藝術區) 어디쯤에서는 아마 그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을 것이다.)

마을은 숲속에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바사’라는 마을 이름이 ‘풀과 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임을 밝혀주는 돌 하나가 서있다. 바사 사람들에게 나무는 바로 생명이며 조상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고 적혀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고 사람이 죽어도 나무를 심는 곳, 나무가 없는 그들의 삶은 생각할 수도 없다. 오래된 나무일수록 신성이 깃들어 있다. 나무가 말라죽어도 그들은 그 나무가 저절로 쓰러질 때까지 절대로 베지 않는다.

바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엄청나게 굵은 향장목(香樟木) 뿌리가 모셔져 있다. 앞에는 ‘나무의 신(樹神)’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1976년 어떤 사람이 마오쩌둥기념관을 만드는 데 바치겠다며 다른 마을 청년들을 동원해 그 나무를 베었다. 나무가 쓰러질 때 비바람이 몰아쳤고 붉은 액체가 흘러나와 놀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고 한다. 그 사건에 대해서 듣고 난 뒤 당 중앙에서 그 나무의 뿌리를 원래 자리에 그대로 모셔두라고 허락하여 지금의 ‘신수정(神樹亭)’이 생긴 것이다. 나무에 신이 깃들어있다고 믿는 그들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모든 통과 의례는 숲속에서 행해지고 죽으면 숲에 묻히며, 그 숲에는 성스러운 단풍나무가 있다.

바사의 대표자 역할을 맡고 있는 군위안량의 뒷모습.

단풍나무는 그들의 생활에서도 주로 제의와 관련되어 있다. 먀오족 사람들의 큰 제사인 고장절에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의 뿔을 묶는 나무도 단풍나무이며 조상들의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여겨지는 북 역시 단풍나무로 만든다. 집을 지을 때에도 가운데 큰 기둥은 단풍나무로 세운다. 단풍나무에서 메이방이 태어났네
단풍나무에서 메이류가 태어났지
찬미하고
노래하네

지금도
아빠 엄마가 너와 나를 낳으시지
탄생에 대한 이야기,
들려줄 만한 것이라네
아득한 옛날을 생각해보세
단풍나무가 메이방메이류를 낳았어
어머니가 계셔야
너와 내가 있는 것,
어머니를 위한 노래를 불러야 하지.

메이방의 탄생을 노래해
메이류의 탄생을 노래해


먀오족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라고 여기는 ‘먀오족의 오래된 노래(苗族古歌)’에 들어있는 ‘단풍나무의 노래(楓木歌)’의 한 대목이다. ‘메이방메이류(妹榜妹留)’는 ‘호접마마’ 즉 ‘나비엄마’라는 뜻을 가진 여신이다. 그녀는 이렇게 단풍나무에서 태어났다.

메이방이 다 자랐네
메이류가 다 자랐어

이제 짝을 찾아 나서네
무슨 옷을 입었나?
무슨 치마를 걸쳤나? 방류가 짝을 찾아가네
꽃무늬 옷을 입고
꽃무늬 주름치마를 두르고
꽃무늬 옷 몸에 잘도 맞네
주름치마도 몸에 꼭 맞아

호접마마 방류
오얏나무 아래에서 짝을 찾아가네
누구와 함께 갈거나?
짝을 찾을까? 못 찾을까?

강물과 짝 이뤄볼까 했으나
강물은 너무 거칠어
짝이 되지 못했네
태양과 짝 이뤄볼까 했으나
짝이 되기 직전
검은 구름이 나타나 막았네

그들은 짝이 되지 못했네

호접마마 방류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
누가 그와 함께 짝을 이룰까?

호접마마 방류
작은 물거품을 사랑했네
말도 할 줄 알고 노래도 할 줄 알아
생긴 것도 아름다우니
그와 함께 떠나

마침내 짝이 되었네

이렇게 그녀는 ‘작은 물거품’과 혼인하여 열두개의 알을 낳는다. 최초의 인간 장양(姜央)이 그 알 속에서 나왔다. 나머지 알에서는 우레신과 용, 뱀, 호랑이, 코끼리, 지네 그리고 착한 신과 나쁜 신들이 나왔다. 인간이라고 해서 자연계의 다른 것들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인 장양은 동물, 귀신과 마찬가지로 알에서 태어난다. 그 모든 것들을 품어주고 지켜주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 여신, 호접마마이며 그 호접마마는 단풍나무에서 태어났다. 앞에서 치우의 영혼이 단풍나무로 변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자. 먀오족 사람들, 그들은 단풍나무의 후손이며 또한 치우의 후손이다. <다음 편으로 이어짐>

〈김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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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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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네요.

이 갈등으로 아이들을 비롯해 민간인 희생만 자꾸 늘어가고 있어요.

물론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고 있지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도대체 어떤 관계이고 어떤 역사를 갖고 있기에 이런 갈등이 끊이지 않을까요?

관련 글을 좀 퍼왔습니다.

출처 : 뉴스페퍼민트(http://newspeppermi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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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x)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1)

옮긴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 보복 공세를 퍼붓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의 사상자 숫자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곳에서는 피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걸까요? 지난 4월 Vox가 정리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1. 이스라엘(Israel)과 팔레스타인(Palestine)은 어떤 나라인가? 왜 싸우는가?

지중해 동쪽 연안 국가인 이스라엘은 지구 상에 유일한 유대인의 국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영토는 아랍인들이 살던 땅을 빼앗은 것입니다. 아랍인들은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팔레스타인이라 부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한 줄로 요약하면 같은 땅을 주고 자신의 영유권과 통치권을 주장하는 두 민족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땅의 주인이 원래 자신이라는 양측의 주장 모두 역사적 근원을 갖고 있고,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결국 이 문제는 힘이 센 쪽이 이기는 폭력으로 비화했는데, 1차대전 이전 오스만제국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이 나라를 세우고자 영국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아랍인들의 반발과 양쪽 모두에게 영토를 분배하려던 UN의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현재 이스라엘과 이웃들의 국경선은 대체로 1948년과 1967년 일어났던 중동 전쟁의 결과라고 보면 됩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 하면 크게 이스라엘 내 두 지역을 합쳐 일컫는 말입니다. 우선 요르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요르단강 서안(West Bank)은 팔레스타인이 명목상 통치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곳에 끊임없이 정착민을 이주시키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서서히 내쫓아 왔는데, 정착민들이 새로 터전을 잡을 때마다 이곳은 이스라엘군과 경비병력의 보호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남서쪽,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가자지구(Gaza Strip)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이곳은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이자 군대 조직까지 갖춘 하마스(Hamas)가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지상군을 가자지구에 상주시키지 않고 있지만, 가자지구를 오가는 모든 물자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이곳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노선 차이로 좀처럼 손을 잡지 않던 하마스와 요르단강 서안의 파타(Fatah)가 2007년 이후 처음으로 단일 정부 구상을 논의하자 이스라엘이 즉각 이를 가로막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끝내고 평화와 공존으로 나아갈 방안이라는 평가를 받는 해법입니다. 현재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대부분을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을 새로운 독립국으로 인정해주고, 나머지 영토는 이스라엘 땅으로 하여 두 민족이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죠. 아랍 민족이 살고 있던 땅을 영국이 식민지로 경영하던 곳에 원주민을 쫓아내고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영구적인 평화 정착안으로서 두 국가 해법은 사실상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부터 있던 셈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실행할지를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단 한 번도 실질적인 합의에 이른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한 국가 해법(One-state Solution)은 둘 중 하나의 정부가 상대방을 함께 다스리는 것으로 평화적인 공존과는 거리가 먼 해법으로 평가됩니다. (V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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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x)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2)

2. 시온주의(Zionism)는 무엇인가?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의 삶을 규정하는 사상이자 종교입니다.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에 근거해 조상 대대로 살았던 땅 이스라엘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걸 지상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신에 의해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들은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을 세우는 걸 신의 뜻이라고 믿고 실행에 옮겼지만, 그들이 선택한 땅은 유대인과 다른 신을 믿는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이라 이름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왕과 솔로몬왕에게서 유대민족의 뿌리를 찾는 유대인들이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열망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건 근대 민족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19세기부터입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 헤르즐(Theodor Herzl)은 유럽에서 점점 극심해지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직접 겪으며 유대인들의 국가를 건설하지 않고는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게 됐습니다. 언론인이었던 그는 신문에 글을 써 시온주의의 정당성과 지금의 이스라엘이 된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들이 집단 이주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헤르즐이 글을 쓰기 전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약 2만 명이었는데,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을 때쯤엔 16만여 명이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에는 이견을 보이지 않던 시온주의 내부에도 소위 좌파와 우파가 있습니다. 1970년대까지 이스라엘의 정치권력을 좌우했던 시온주의 좌파는 이스라엘이 점유한 땅 일부를 아랍 국가들에 돌려주고 평화협정을 맺는 이른바 땅과 평화의 맞교환(Land for Peace) 정책을 지지하고, 경제적으로는 큰 정부의 개입을 선호했습니다. 또한, 종교 색을 가급적 배제한 세속적 정부를 원했죠. 반면 현재 집권세력이라 할 수 있는 시온주의 우파는 땅과 평화의 맞교환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고 있고, 정부보다는 시장에 경제를 맡기려는 쪽입니다. 종교 원리를 현실 정치에 인용하는 데도 훨씬 거부감이 덜합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국가들은 시온주의를 규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온주의는 선택받은 민족은 오직 유대인뿐이라는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에 따라 전 세계 어디에 있는 유대인은 원하면 이스라엘 국적을 바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권리는 유대인 말고는 누구도 누릴 수 없는 것이죠. 때문에 아랍인들은 시온주의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땅에서 내쫓기 위한 계책이나 종교의 탈을 쓴 제국주의 내지 인종주의로 규정해 왔습니다. 아랍 국가들은 1975년 유엔 총회에서 “시온주의는 인종주의, 인종차별의 한 형태”라는 결의안을 이끌어내기도 했는데, 이 결의안은 1991년 폐지됩니다. (V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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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x)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3)

3. 이스라엘 건국 과정

19세기 말 유럽의 민족주의가 강화되면서 유럽에 있던 유대인들도 유대 민족의 나라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당시 전체 유대인의 90%가 유럽에 살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수천, 수만 명이 1896 ~ 1948년 사이 유럽에서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반유대주의를 피해, 그리고 세속적 민족주의를 좇아 선택받은 땅으로 이주합니다. 그곳은 바로 당시 영국이 관할하고 있던 아랍의 팔레스타인 땅이었습니다.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의 계속된 이주를 유럽의 또 다른 식민 침탈이라 여기며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크고 작은 폭력이 잇따랐죠.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경영했고,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결과적으로 이주를 부추긴 영국은 계속되는 폭력을 막을 방법을 찾지 못했고, 갓 결성된 UN이 나섰습니다.

UN은 팔레스타인 땅을 둘로 나눠 65만 명의 유대인을 한 쪽에, 그리고 인구가 유대인의 두 배 가까이 됐던 아랍인들을 다른 한 쪽에 배치하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UN의 계획을 계속되는 유대인 이주와 식민 침탈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 아랍인들은 계획을 거절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곱게 보지 않던 이집트와 요르단, 이라크, 그리고 시리아 등 주변국들은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민병대와 아랍 국가의 연합군을 물리칩니다. UN의 첫 분리안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56%를 이스라엘에 주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시점에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과 요르단이 통치하는 예루살렘 동쪽 일부, 이집트가 통치하는 가자지구 일부를 제외한 팔레스타인 영토의 77%를 장악합니다.

4. 나크바(Nakba)

1948년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인구 7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됐습니다. 나크바는 아랍어로 “재앙”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슬픈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48년 전쟁과 나크바를 이스라엘이 수년 동안 치밀하게 계획한 아랍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라고 비난하는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이 불가피했던 측면을, 그리고 아랍 군대를 비난합니다.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나크바 때 난민 70만 명과 그들의 후손, 그리고 계속해서 이스라엘로부터 쫓겨나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불어나 이제는 700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기본적으로 이들 난민들이 원래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인구는 약 800만 명인데 이 가운데 이미 아랍인들이 150만 명쯤 됩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난민 700만 명을 이스라엘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한다면, 유대인의 나라여야 하는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소수 민족이 되는 셈이죠. 유대민족 국가라는 위상이나 1인 1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에 관한 어떤 사항도 협상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고수해 왔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합의할 수 있는 한에서 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방안이 오랫동안 협상 의제로 다뤄졌고, 난민에 대한 금전적인 지원을 확충하고 유대인들이 무차별적인 이주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잠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지만, 양측은 실천 방안을 두고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V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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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x)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4)

5. 요르단강 서안(West Bank)

고유명사 West Bank는 여느 강의 서쪽 편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요르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구를 일컫는 말입니다. 팔레스타인인 260만 명이 살고 있는 땅으로 여러모로 팔레스타인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이죠.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곳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해서 확장해 왔습니다. 반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여러 나라, 단체들은 이스라엘이 불법으로 땅을 점유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발포로 시작된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주변국가의 군대를 사실상 궤멸시키고 승리합니다. 특히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과 고대 유대인들의 유적이 많은 요르단강 서안을 빼앗은 건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현재 요르단강 서안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들은 약 50만 명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사실상의) 이스라엘 국경 가까이에 살고 있는데, 두 국가 해법안대로 협상이 이뤄진다면 이들 가운데 일부는 땅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반납하고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은 국경을 어디에 어떻게 그어야 할지를 두고 합의 다운 합의를 이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6. 예루살렘 (Jerusalem)

유대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종교적 성지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경계선에 걸쳐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예루살렘을 정신적 수도로 삼고 싶어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안에서 양측의 경계선을 어떻게 나누느냐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건국 후 처음 20년 동안 이스라엘은 서쪽을, 요르단은 고대도시 유적을 포함한 동예루살렘을 다스렸습니다. 특히 요르단은 성산(聖山, Temple Mount)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유대교 성지인 통곡의 벽(Western Wall)과 이슬람교 성지인 알 악사 사원(al-Aqsa Mosque),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 모여 있습니다. 1967년 이전에는 통곡의 벽과 유대교 사원에 접근이 금지됐던 유대인들은 전쟁으로 아예 성산을 점령해버리고 예루살렘을 유대인들의 수도로 선포해버립니다. 동예루살렘을 정복한 건 명백한 국제법 위반으로 이스라엘을 물심양면 지지하는 미국조차도 예루살렘이 온전히 이스라엘 소유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안 478호를 통해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합병을 비난하고 타협안을 도출할 것을 촉구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땅을 나눌지는 여기서도 역시 합의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는 사이 유대인들은 꾸준히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왔고, 현재 예루살렘 땅의 2/3는 유대인 주거구역이 됐습니다.


7. 가자 (Gaza)

이스라엘 남서쪽, 이집트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가자지구는 요르단강 서안과는 또 다른 팔레스타인 인구 밀집지역입니다. 동예루살렘을 요르단이 통치했던 것처럼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통치해 왔는데, 역시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점령했습니다. 가자지구에 점령군으로 상주하던 이스라엘군은 2005년에 철수했지만, 여전히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당국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습니다. 선거로 선출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을 향한 로켓 공격을 감행하는데, 이는 종종 팔레스타인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스라엘 매파의 입지를 다져주는 계기가 됩니다. 하마스가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일 만한 물자를 가능한한 가자지구로 들여보내지 않는 이스라엘의 봉쇄정책 때문에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전기와 연료, 식량, 의약품 등 생필품이 만성적으로 부족합니다. (V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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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x)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5)

옮긴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 보복 공세를 퍼붓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의 사상자 숫자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마스가 거대한 땅굴을 파고 이를 통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했다는 주장과 이스라엘이 소형 강철 화살인 플레셰트탄(flechette)을 사용해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려 했다는 증거도 나왔습니다. 정전이나 휴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양측은 안타깝게도 총부리를 내려놓기보다는 갈수록 서로의 심장부를 겨누는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상자 숫자를 비롯한 속보는 우리 언론에도 상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보고 싶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곳에서는 피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걸까요? Vox가 지난 4월에 정리했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에 최근 양측의 충돌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5편에서는 이 글을 소개합니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망자 숫자가 500명을 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들과 이스라엘의 이번 충돌은 지난달 10일 이스라엘 청년 3명이 납치, 살해된 사건에서 시작됐습니다. 요르단강 서안에서 정통 유대교 대학인 예시바에 갔던 청년 3명이 괴한에 납치됐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하마스의 소행이라고 보고 가자지구는 물론 요르단강 서안까지 팔레스타인 전역을 이 잡듯이 뒤졌습니다. 하지만 사라졌던 청년들은 지난달 30일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이 명백했습니다. 나중에 나온 보도들을 종합해보면, 이스라엘 당국은 이미 청년들이 숨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기회에 하마스 세력을 약화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쳤고, 공식적으로 시신이 발견된 이후로는 가자지구에 대대적인 폭격을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무장세력들도 이스라엘 영토를 향해 로켓포를 쐈는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하마스는 처음에는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틀 뒤인 7월 2일, 16살 팔레스타인 청년 무하메드 아부 케디르(Muhammed Abu Khedir)가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불에 타 숨진 채로 발견됩니다. 팔레스타인 경찰은 이스라엘인 6명을 용의자로 체포한 뒤, 이 사건을 이스라엘 청년들의 죽음에 대한 보복 살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버즈피드의 프렌켈(Sheera Frenkel)은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이 이스라엘의 극우 인종주의 훌리건(축구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극우 정치인들은 보복 살인을 옹호하며 반(反) 팔레스타인 정서를 부추겼습니다. 무하메드가 숨진 지 사흘 뒤인 7월 5일, 그의 미국인 사촌 동생인 타리크 아부 케디르(Tariq Abu Khedir)가 이스라엘 경찰에게 심하게 폭행당한 영상이 공개됩니다. 계속되는 가자지구 공습과 케디르 형제의 사건 등을 계기로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도 격렬해졌습니다.

하마스는 7월 8일,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포 공격을 감행합니다. 지난 2012년 말, 여드레 간의 전투 이후 처음이었죠.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기다렸다는듯이 가자지구를 향한 공세를 한층 강화했습니다. “하마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7월 14일을 기점으로, 사상자 숫자는 이미 2012년 전투 때의 사상사 수를 넘어섰고, 이튿날인 15일, 이집트의 중재로 한시적인 정전이 성사되는 듯했으나, 하마스 내부 강경파가 이를 거부한 채 계속해서 로켓포 공격을 이어가 다시 전투가 속개됐습니다. (Vox)


8. 유대인 정착촌


1967년 6일 전쟁 이후 요르단강 서안을 군사력으로 장악한 이스라엘은 자국민들의 이주를 장려합니다. 원래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고 유대인들이 점점 정착촌을 늘려갔는데, 종교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단지 이곳의 집값이 상대적으로 싸고 이스라엘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이사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공격적으로 확장을 거듭한 유대인 정착촌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평화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 땅 안에 있는 유대인 정착촌 130여 곳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국민은 모두 합해 50만 명인데, 이 가운데 75% 정도는 요르단강 서안 중에서도 이스라엘과 가까운 쪽에 있는 정착촌에 살고 있습니다. 원래 팔레스타인 땅이라고 해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와서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하면서 원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점점 땅과 연관된 영유권을 잃었습니다. 정착촌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가운데는 요르단강 서안이 오롯이 이스라엘 영토로 편입돼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의 믿음은 이스라엘 경찰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불심검문을 당하고 유대인이 아니면 접근할 수도 없는 구역이 늘어나면서 점점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변호사들은 대부분 무력으로 점령한 땅에 자국민을 이주시키는 것을 금하는 제네바협약 4조를 이스라엘이 명백히 어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15.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세계의 여론

이슬람 국가들을 제외한 전체 국가들 가운데 83%가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거나 이스라엘을 나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나라들은 이스라엘의 요르단강 서안 정복과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핍박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이스라엘보다 팔레스타인 편을 드는 의견이 대부분 훨씬 높습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라보다는 싫어하는 나라로 꼽힙니다. 요르단강 서안에 마구잡이로 유대인 정착촌을 설치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낸 게 비난을 산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많은 변호사, 법률가들이 이스라엘의 요르단강 서안 점령을 제네바 협약과 국제법을 위반한 범법 행위라고 보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친 이스라엘 성향 법률가들의 주장은 다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을 불법 점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제네바 협약이 금지하고 있는 건 국민들의 강제 이주이지 유대인 정착촌에 모여드는 이스라엘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주를 선택했기 때문에 유대인 정착촌이 제네바 협약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V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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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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