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직설'에서

 

놓친 점을 놓치지 않고 조금씩 바뀌어 가는 모습을 담아낸 글이다. 

시각장애인 구독자 한 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를 바꾸는 일은 이런 작은 부분에 눈길을 두는 데서 시작된다.

부지런함이다. 게으름뱅이가 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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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청각 정보와 함께하는 글

 

‘일간 이슬아’ 연재를 하며 구독자로부터 아주 많은 e메일을 받는다. 체력의 한계 때문에 모든 피드백과 요청에 응답할 수는 없으나, 수백 통의 메일 목록에서도 특히 중요한 이야기는 놓치지 않고 알아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시각장애인 구독자인 김 선생님의 이야기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 글쓰기 교사

 

2018년 겨울. 김 선생님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시각장애인 독자가 내 글을 듣는 속도에 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김 선생님은 일반적인 컴퓨터에 ‘센스리더’라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쓰신다. 화면을 음성 언어로 변환하는 프로그램이다. 변환된 나의 글을 샘플로 보내주시기도 했다.

 

샘플 파일을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낭독 속도가 너무 빨라서였다. 내 글이지만 모르는 래퍼가 쓴 가사처럼 들렸다. 놀랍게도 선생님께서는 평소에도 그 속도로 책을 듣는다고 대답하셨다. ‘워낙 듣기에 단련된 몸’이라서 그렇다고. 나는 파일을 몇 번이고 돌려들으며 선생님이 단련해오신 듣기 능력에 관해 계속 생각했다. 대단한 경지로 느껴졌다. 선생님께서는 콘텐츠의 종류에 따라 재생 속도를 다르게 조절한다면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팟캐스트 뉴스는 주로 2배속으로 듣고, 독서 관련 방송은 정속으로 정중하게 듣습니다.”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내 글을 들어주시는 김 선생님과 ‘센스리더’의 개발자님께 감사함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내가 쓴 글을 내 목소리로 읽어드리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어떤 단어는 힘주어 발음하고 어떤 단어는 무심히 발음하며 나의 평소 말투와 속도로 낭독하면 가장 정확하게 전달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간 이슬아’ 2년차부터 낭독 서비스를 추가했다. 작가가 한 달에 한 번씩 직접 글을 읽고 음성 파일을 첨부해서 텍스트와 함께 발송하는 방식이다. 요즘엔 시각장애인 구독자뿐 아니라 비장애인 구독자들도 낭독을 기다려주신다. 나는 편안하고 듣기 좋은 말소리를 연습한 뒤 긴 글을 녹음한다.

 

‘일간 이슬아’ 3년차에 추가한 것은 ‘인터뷰 음성 지원’ 서비스다. 인터뷰 코너는 애독자가 많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정중하면서도 경쾌하게 상호작용하는 장르다. 유능한 동료 사진가가 동행해서 찍은 사진도 사랑받았다. 인터뷰이의 모습, 주름, 웃음,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사진에 담겨서 대화를 입체적으로 만드니까. 그런데 매번 인터뷰 사진을 신중하게 편집하면서도 김 선생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다. 사진이라는 시각 정보는 선생님께 전달되지 못할 텐데 말이다.

하루는 선생님이 이런 메일을 보내주셨다. “사진을 볼 수 없는 저로선 그분들의 인터뷰 음성을 짧게라도 들어봤으면 하는 욕심이 듭니다. 그럴 수 있다면 더 생생하게 그분들을 느낄 것 같습니다.” 나는 반성한 뒤 다음날 ‘인터뷰 음성 지원’ 기능을 추가했다. 녹취 파일 중 인터뷰이의 특징이 유독 잘 담긴 구간을 3분 분량으로 편집해서 올렸다. 그러자 문경에서 만난 농부님의 목소리뿐 아니라 평상 위에서 수박 써는 소리, 바람이 벼를 스치는 소리, 하우스에서 오이를 따는 소리도 인터뷰 원고에 포함되었다. 시각 정보와는 또 다르게 강렬하고 구체적이었다. 김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행복한 소리’라고 말씀하셨다.

 

‘일간 이슬아’는 비장애인에게 더 편리한 매체로 시작했지만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수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시각장애인 구독자를 만나면서 그렇게 되었다. 내가 놓친 부족한 점이 여전히 많을 텐데 필요한 것을 알아챌 때마다 빠르게 개선하고 싶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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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세상읽기']에서 가져온 글

 

언어는 중요하다. 누구의 언어로 말하는가도 참 중요하다. 

소수 엘리트나 지배권력의 언어로 민중 또는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하는 모습은 그래서 위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언어를 들여다보는 눈이 그래서 필요하다.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럴싸한 가르치려는 언어는 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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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그린뉴딜’은 누구의 말인가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2020-09-08

 

‘그린뉴딜’은 어려운 말이다. ‘그린’이야 직관적으로 이해된다고 해도, ‘뉴딜’은 암호다. 설명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그 말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맥락을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그냥 새로운 정책패키지의 브랜드에 그칠 뿐이다. 그럴 때 혼동과 위험이 발생한다. 9월4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 사업 추진을 위해 ‘뉴딜펀드’를 포함하는 대규모 금융지원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동안 환경운동 내의 제안자들은 그린뉴딜을 ‘기후위기를 막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 대전환’ 프로젝트라고 설명해왔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정부의 그린뉴딜은 지구환경을 파괴한 성장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오히려 더 촉진하는 정책이었다. 정부는 디지털, 수소전기자동차, 재생에너지 산업 지원을 위해 170조원의 금융투자 지원과, 여기에 20조원의 뉴딜펀드까지 조성해서 투자자들의 수익률과 원금 보장을 약속한다. 한마디로 녹색으로 분칠한 ‘카지노 자본주의’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그린뉴딜이 왜 이렇게 된 걸까? 2008년 오바마 정부의 그린뉴딜이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론으로 처음 수입되었을 때만 해도 국내 환경단체들은 ‘가짜 녹색’의 가면을 벗겨내고 ‘녹색경제’의 기만성을 폭로했다. 당시 금융시장 붕괴에서 위로부터 도입이 추진된 그린뉴딜은 새로운 녹색시장을 열며 위기의 돌파구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자본은 기후시장을 통해 디지털, 에너지, 바이오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고자 한다. 달라진 것은 정부와 시민사회의 관계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라면 이런 뉴딜에 맞서 앞장서서 싸웠을 사람들이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처음 도입될 때부터 이 개념은 위험을 노정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의 급진적인 기후운동에서 상징을 가져왔지만, 내용적으로는 정부, 기업, 투자자들이 주도하는 EU의 보수적이고 친시장적인 그린딜에 가까웠다. 친정부 단체와 여당이 그린뉴딜 담론을 주도하면서,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요구와 방향에 대한 논의는 실종되고, ‘탈탄소론’에 치우친 기후관리와 기술정책담론으로 흡수되었다. 가장 중요했던 불평등 문제도 마치 노동자를 산업 분야 좌초 자산의 일부인 양, 쓸모없게 된 노동의 처리 문제처럼 다뤄졌다. 지금 한국판 뉴딜에서 노동전환 대책은 전무하다. 전환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분명했지만, ‘규모’와 ‘속도’의 조급함 속에, 철학과 방향을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린뉴딜은 노동자 민중의 말이 아니었다.

 

미국의 노동자계급에 뉴딜이란 말은 1930년대의 기억으로부터 정치적 상상력을 불러온다. 그것은 자본과 노동이 한판 세게 붙었던 시대의 기억이다. 루스벨트 시대의 뉴딜은 어떤 훌륭한 대통령이 노동자들에게 준 선물이 아니라 사회적 투쟁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였다. 노동조합운동, 실업자운동, 흑인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광범위한 민중연대가 자본가를 밀어붙여 새로운 협약(new deal)을 만들어내고 노동자 권리를 쟁취한 그 역사의 힘이, 뉴딜이란 말 속에 담겼다. 특히 금융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뉴딜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을 때 월가의 금융가들은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새로운 협약’을 요구하는 미국 민중들은 이겨봤던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뉴딜’이란 말은 그런 힘을 갖지 못한다. 역사성이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말은 누구에게 힘을 주는가? 관료와 전문가들은 늘 대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정책용어로 선호한다. 그런 말은 지배자들에겐 용이하게 쓰이지만 저항자들에겐 힘을 박탈한다. 자기가 모르는 말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싸우기는 힘든 법이다. 그린뉴딜은 점점 더 우리에게 상상력을 주는 말이 아니라 가로막는 말이 되어간다. 그래도 이 말을 계속 써야 할까? 그린뉴딜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지구 곳곳에서 기후정의운동은 번져가고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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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됐으되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글이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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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칼럼] 전월세 / 김훈

 

인간의 주거의 권리에 대한 나의 소견은 서울에서 자라면서 목격한 무허가 주택 철거 현장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먹고살려는 사람들은 서울로 몰려들었고 집은 없었으므로 무허가 주택의 대단지가 생겨나는 것은 자연현상이었다. 이 단지를 행정행위로 때려 부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그 자리가 국유지이거나 사유지라는 것이었다. 국토는 모두 국유지이거나 사유지이기 때문에 철거민들은 땅 위에 엉덩이를 붙일 자리가 없었고, 인간의 생존은 ‘허가’의 대상이었다.

 

철거 현장은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쫓겨나는 사람들은 소주병에 분뇨를 담아서 던지며 저항했다. 저녁에는 가루가 되어버린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쓰레기 더미에서 울었다. 이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정책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변두리에 모여서 다시 마을을 이루면 그 동네를 또 부수었다.

 

지금, 전월세 값에 짓눌린 인간고의 바탕은 그때의 철거 현장의 기본구도와 다르지 않다. 철거 현장에서는 도끼와 망치로 집을 부수어서 사람들을 추방했지만, 지금은 시장의 질서 속에서 가격의 조정능력이 추방의 기능을 수행한다. 집 없는 사람들은 다주택자나 임대사업자에게 돈을 내고 그 공간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데, 이 돈은 집 많은 사람들의 재산 형성에 기여하고, 집 없는 사람들의 작은 재산을 증발시킨다. 전월세 값의 문제는 부동산 수익의 문제나 시장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존망의 문제이고 추방과 저항의 문제이다. 시장은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의 생각이 철거 현장의 충격에 가위눌린 것이라 해도, 나는 나의 거칠고 낙후된 소견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김훈 ㅣ 작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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