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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1.01.

창간사 –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녹색평론 창간호 김종철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범람하는 인쇄물 공해의 시대에 또 하나의 공해를 추가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 조그마한 잡지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무겁다. 거의 파국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산업문명의 이 압도적인 추세 속에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게다가 이 작업이 불가피하게 삼림파손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실로 착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시도하려는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든지 간에 이것이 생태계의 훼손을 조금이라도 수반하는 것이라면, 이 작업은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망설임 끝에 결국 이 잡지를 내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크게 가치 있거나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으리라는 자기도취적인 낙관이 있어서가 아니다. 점점 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환경문제를 보면서,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체들이 지구상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단히 불투명해지는 현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은 그렇다 치고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랑을 하고 이번에는 자기 아이들을 가질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의 심중에 망설임은 없을까–하는 보다 절박한 심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회피하기 어려운 당면 현실일 것이다. 우리가 《녹색평론》을 구상한 것은 지극히 미약한 정도로나마 우리 자신의 책임감을 표현하고, 거의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결코 적지 않을 동시대인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희망하면서, 민감한 마음을 지닌 영혼들과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절박한 심정이 지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심정이 단지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의 예외적인 판단에 기인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다지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 마음으로도 지금 상황은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면적인 위기–정치나 경제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문화적 위기, 즉 도덕적 철학적 위기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의 삶이 일종의 묵시록적 상황에 임박해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애써 이것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스스로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안팎의 모든 체험에 비추어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 각자는 저마다 내심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환경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지배적인 논의 방식에서 보는 것처럼 이것을 단순한 외부적 재난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기본가정 자체의 결함으로 인식하는 데 무능력을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근원적인 공포가 사태의 정당한 인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본질적인 결핍을 느끼면서도 환경재난에 대한 기술주의적 접근방법만이 활개를 치고, 또 그러한 현실에 대체로 묵종해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환경재난이 제기하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으로부터 자꾸만 도피한다면, 모처럼 이 위기가 인간의 자기쇄신이나 성숙을 위하여 제공되는 진정한 도전에 성실하게 응답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이 생태학적 재난은 결국 인간이 진보와 발전의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이른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백여년간 서양문화로부터의 충격 속에서 거의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근대화 콤플렉스에 깊숙이 젖어온 민족의 입장에서, 하나의 인간공동체로서 번영을 누릴 뿐만 아니라 단순히 살아 남기 위해서도 모든 사람의 에너지를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어느 정도는 물질적 성공과 서구적 생활방식의 모방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으로 기대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다름 아닌 그러한 성공의 대가로 인간생존의 터전 자체의 붕괴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일 것임이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대다수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못보고, 적당히 짜깁기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랜 기간 의심할 나위 없이 믿어왔던 삶의 목표와 우선순위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만한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환상을 갖고 싶어도,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생존의 자연적 토대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만다는 냉정한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온갖 곳에서 매 순간 끊임없이 불거져 나오는 환경재난과 생명훼손의 사례들은 이 추세에 강력한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나 다음 세대들의 이 지상에서의 생존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들이다. 물론 오랜 옛날부터 예언자들은 흔히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예언은 무엇보다 종교적 열정에 근거를 둔 것임에 반해서 오늘의 묵시록적인 전망은 다분히 과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간에는 토양오염이나 온실효과나 오존층 고갈이나 세계의 사막화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한 방법에 대한 기술적 탐색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인간 자신이 생물학적 존재조건을 변경시킬 수 없는 한, 어떠한 기술적 재간으로도 생물체로서의 생존조건을 파괴하면서 살아 남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남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맑은 공기도, 푸른 하늘도, 숲도, 강물도 없는 세상에서 사람은 살고 싶은 욕망을 느낄 수 있는가?

 

과학기술이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도 오늘의 크나큰 비극을 가중시키는 주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도 기술공학도 결코 만능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사태의 악화에 훨씬 더 많이 기여해 왔다는 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 각자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품고 있는 맹목적인 숭배나 신뢰는 과학은 거짓이 없고 실패가 없다는 전연 근거 없는 미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이 널리 유포된 데에는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비역사적 사고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현재 능력이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 해야 옳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힘이 막강하고, 부분적이나마 과학기술 수준이 찬탄스러운 것이라 해도, 과학은 여전히 우리의 삶의 바탕과 이 세상과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해명하는 데에는 너무나 미약하고 부적절한 수단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물며, 기계론적 우주관과 선형적 진보사관에 의지하여 전개되어온 지난 수 세기의 근대과학기술의 성과는 이제 인류의 파멸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지구생태계의 대 재난을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 온 것이 아닌가? 삶의 태반을 망가뜨리면서 그것을 진보와 발전이라고 믿어온 것은 실로 우매의 극치라 할 만하고, 완전한 미치광이 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관계, 그리고 근대과학의 근본가정에 깔려 있는 폭력성에 대한 뿌리로부터의 철저한 반성 없이, 계속하여 더 많은 과학과 더 정교한 기술만을 구한다면 파멸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 닥친 위기가 민족단위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사 전체의 경험으로서도 미증유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그러니만큼 여기에 관한 한 어디에서 빌려올 수 있는 손쉬운 처방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유례없는 위기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의 현상적 측면에 대한 이러저러한 부분적, 임시적, 외면적 수습책으로는 절대로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공간에 빚어지고 있는 공해, 오염, 자연파괴의 문제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회관계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적의와 긴장에 차있을 뿐더러 우리의 사회상황이 극심한 부패와 윤리적 타락으로 고통 당하고 우리각자의 내면이 날로 피폐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 정확히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그러니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개인의 자기자신에 대한관계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문제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정치 경제의 문제이자 동시에 철학과 도덕과 종교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예의주목하고 그것을 혁파하는 일에 주력해 온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사회사상은 그것이 사람에 이한 사람의 지배, 착취를 반대해 왔다는 점에서 존경 받아 마땅한 사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의 관점에서 머무르고 있는 한, 특히 자연세계와의 조화가 중심문제로 된 오늘날 그것은 크게 미흡한 사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때때로 인간과 자연의 동시적인 해방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맑스주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을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 제한하여 본다는 점에서는 부르주아 철학과 궤를 같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수렵채취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산업적 생활방식에 이르는 직선적인 진화의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관점은 이 지구상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온 인류생활의 최신의 전재가 반드시 바람직한 생활형태를 기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 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점이다. 생산과 소비의 양적 증가는 도리어 인간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비극적인 경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바로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산업화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해 왔다고 할 수 있는 맑스주의에서 인간 속에 뿌리깊이 내재한 정신적 종교적 욕구가 흔히 등한시되어 온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는 볼셰비키 혁명 후 러시아의 민중이 빵을 고르게 먹는 것은 가능해졌으나 그 빵이 맛이 없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인간 영혼의 근원적 요구를 외면하는 사상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그 자신의 불신을 표명한 바 있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불가결한 차원의 하나가 초월에 대한 욕구라는 것은 아무래도 부인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초월에 대한 욕망은 인간성에 깊이 내재하고 있는 충동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자연이나 우주적 연관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봄으로써 획득되는 정신적 체험을 통해 비로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삶의 최고형태를 명상하는 삶에서 찾았을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고대인들이 품고 있었던 조화와 균형과 통일의 세계관을 요약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문화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사람의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이 자기보다 더 큰 전체, 공동체나 자연이나 우주적 전체 속의 작은 일부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사색할 줄 아는 습관 속에서 길러지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좁고, 미약하고, 일시적인 자기의 개인적인 삶의 테두리를 늘 보다 큰 지평 속에 관계시킴으로써 영속적인 거대한 우주적 생명활동에 스스로를 참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고대사회에서나 토착전통사회에서나 혹은 이른바 미개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었다. 현대 산업사회의 핵심적인 비극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몰각해 왔다는 점에 있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삶의 우주적 연관이나 자연적 근거를 완전히 망각한 문화라는 것은 거의 낯선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사람의 에너지를 온통 소득과 소비의 경쟁 속에 쏟아 붓도록 강요하는 오늘의 지배적인 산업문화는 인류사에 극히 예외적인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로 요약되는 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끔찍스럽기도 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결국 우리들 각자가 자기 개인보다 더 큰 존재를 습관적으로 이식할 수 있게 하는 문화를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문화의 재건은 우리 각자의 인간적인 자기쇄신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이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현대 기술문명의 기저에는 정복적 인간의 교만심이 완강하게 버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자연의 도를 따르는 순리의 생활을 우습게 여기면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통제와 조종 속에 종속 시키려고 하는 야만적인 폭력이 끝없이 창궐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연적 환경이든 인문적 환경이든 나날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와 우리들의 자식들이 살아 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생활의 창조적 재조직이 가능하려면,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겸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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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관련 글을 읽고 찾고 하다가 만난 글.

여기 가져와 남겨두어 틈틈이 읽고자...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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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공부 모임/ 2004년 11월 1일 월요일 오후 2시-5시

한국에서 이반 일리치를 가장 잘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인 김종철 선생님을 모시고 이반 일리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날의 자리는 자유대학의 일리치 공부모임 사람들이 만들었고 자유대학의 다른 모임 친구들이 참여해 3시간동안 진행되었다. 김종철 선생님은 광주에 10월 31일 오셔서 운주사에서 강의를 하시고, 11월 1일 오후에 일리치 공부모임과의 대화, 저녁엔 빛고을생명평화학교 강의를 하셨다. 매우 피곤한 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열정적인 강의와 사람들과의 만남을 보여주셨다.

서로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20대 초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반 일리치의 삶과 사상에 대해 김종철 선생님이 전반적으로 이야기하시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토막 토막으로....

○ 이반 일리히라고 번역해 나온 책들이 있는데 정확히 이반 일리치다. 이반 일리치는 독일 사람도 아니고, 친구들도 이반 일리치라고 부르고 본인이 자신을 이반 일리치라고 불러주길 원했다. 미토 출판사에서 적어도 이반 일리치 사상 전집을 내려 했다면 그 정도의 성실성과 조사는 있어야 했지 않을까. 그런 불성실성이 번역에도 그대로 전해진다. 사상가의 이름 하나 제대로 번역을 못하면서 책은 얼마나 제대로 번역을 했겠는가

○ 이반 일리치의 사상에 여러 평가가 존재한다. 이반 일리치 클럽의 제자들-사실 그는 어떤 사제관계도 맺은 적이 없지만, 그의 사상에 영향 받은 사람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중 일부는 그의 사상이 쓸모가 없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터 버거는 " 20세기 현대사를 보는 관점을 일리치를 통해서 얻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 그의 사상은 쓸데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읽지 않았다"라고 말했고, 오래된 미래로 잘 알려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80년대 이후의 일리치는 거의 도움이 안되었다고 말한다.

아마 그 이유는 이반 일리치 사상의 전반기-Deschooling society(학교없는사회), tools for conviviality(공생공락을 위한 도구, 성장을 멈춰라로 출판됨), limits to medicine(의학에 한계를 가해야 한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로 출판됨), energy and equity(에너지와 평등,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로 출판됨) 등의 팜플렛을 저술한 시기-엔 적어도 사회정치적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신뢰했다면, 후반기로 갈수록 사회정치적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고 그런 프로그램이 별 의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반 일리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독일 그린피스 의장을 지냈던 볼프강 작스의 경우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는 세계의 흐름에 실천적으로 어떻게든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흐름에서 리우 회의와 리우+10 회의에 적극 개입한 바 있다. 그의 화두는 ecology and justice, 생태적 가치와 사회적 정의를 조화시키는 문제였다. 그는 서구가 풍요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시달린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그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당장 독일이 가진 부의 9/10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10%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풍요에 시달리지 않고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선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볼프강 작스가 브레멘의 일리치를 방문했을 때 일리치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볼프강 작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고 다니냐고". 아마 그린피스 일과 녹색당 일을 지칭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 일리치의 팜플렛-그는 책을 근사하게 내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그것들을 팜플렛으로 불렀다. 그래서 그의 책들은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거의 요약본이라 할 정도로..-들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근본의 자리에서 명쾌하게 해설해 준다. 너무 명쾌하고 너무 근본적이다 보니 현실의 표피적인 개혁 프로그램으로는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답답해진다. 늘 묻듯이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라는 질문이 쇄도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리치 사상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성급히 묻는다. 누군가 답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 일리치의 우정 이야기엔 고개가 갸웃해진다. 우정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하고 말이다. 일리치 후기 사상엔 우정(friendship)과 환대(hospitality)를 많이 강조한다. 김종철 선생님은 우정이 결국 세상을 구원할 열쇠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늘 이 우정에 관한 이야기는 화두이다. 간디와 많은 사상가들에게서 이 우정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 날 김종철 선생님의 설명을 나름대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 subsistence, 자급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내 생각에 이런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은 자본주의 밖의 사람들 - 예를 들어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안에서 패배해 밀려났거나, 자본주의 시스템을 거부한 사람들 -이 보여주는 모습인데 이들은 서로에 상호의존하고 우정에 기반한 보살핌이 없이는 삶을 꾸려갈 수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우정이나 인정 같은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고,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어 잘 살면 된다고 말한다. 점점 우정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파괴된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는 것은 피폐함 뿐이다.

● 중요한 것은 우정을 되살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밖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만들고, 그 땅을 선택한 사람들(자본주의의 부를 거부하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 우정과 보살핌에 기대고 상호의존하면서, 그 자본주의 바깥의 땅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할 것이고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또한 그런 근본적 삶과 도구, 운동이 기반이 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 일리치는 자신을 역사가이자 시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겐 어떤 레테르도 정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사회학자라 하는데 그의 초기 저서들도 엄밀히 말하면 사회학적 저서라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근대가 만들어낸 분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 사회 시스템, 인간적 규모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복잡하고 완벽한 시스템안에는 인간의 자리가 없다.(doing theology) 생명과학을 논하고 DNA를 논하는 것,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경이다. 인간은 알 권리도 있지만 모를 권리도 있다. 침묵으로 대답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모를 권리가 있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자꾸 알려고 하는 것이 자꾸 어떤 문제를 만들어낸다.

○ Tools for conviviality;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가 세 가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시와 자전거와 도서관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시인이고 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We are called to be poets. poetic ability; 근대사회로 오면서 이 시적 능력, 자율적 능력이 퇴화했다. 배움(leaning)이 교육(education)으로 대체되면서 시적 정서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속도의 한계, 인간 교통 수단의 한계를 말하고, 도서관은 배움(learning)이 가능한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침략할 때 군대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the transformation of learning into education; 배움의 교육으로의 변화, 이것이 근대교육의 실체이다. 시스템은 삶을 오염시키고 Education은 인류의 행복을 해치는 바이러스다.
 
○ 녹색평론에서 복지체제에 대해 거론하고 비판하는 이야기를 지금 다루어야 할지 여러모로 고민이다. 

○ 일리치는 경이로움(surprise)을 높이 평가했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움으로 가득차 있는가, 얼마나 인생은 시적인 것인가?, 복지시스템은 경이로움을 감소시키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능력을 감퇴시킨다. 녹색평론의 독자 중에 경북에서 양로원을 운영하는 분이 있다. 이 양로원에서 지역통화를 실험했는데 노인들의 삶에 생기와 활력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런 경이로움이 복지시스템안에서는 존재하기 쉽지 않다.

어떤 영화감독이 스웨덴이 제일 형편없는 사회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영화작업을 예술이 아닌 사무 보듯이 했기 때문이었다. 9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고, 시스템만 있고 열정이 없다. 영화를 어떻게 그런 시스템으로 찍을 수 있는가? surprise, 경이로움이 없는 사회, 시적이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아름다운 사회인가?
 
○ 쿠에르나바카에 있던 CIDOC의 여러 프로그램 중 스페인어 학교는 남미로 파견될 예비 선교사들의 스페인어 교육을 담당하면서 그들을 탈세뇌화하였다. 그들에게 일리치는 변해야 할 곳은 라틴아메리카가 아니라 미국이고, 미국의 풍요가 문제이고, 풍요에 시달리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교육들은 교황청의 경계를 일으켰고 급기야 교황청 심문실로 호출되어 알 수 없는 고문을 당했고, 결국 일리치는 사제직을 반납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어머니 교회의 종으로 살았다.

○ conviviality는 subsistence, 근근히 생활을 영위하는 수준, 그러한 경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데 일리치 그룹은 이를 지극히 normal한 상태로 보고 이를 벗어날 때 불경이 발생한다고 본다. subsistence는 단순히 경제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 CIDOC이 십년이 되어가면서 안정화되었고 이에 따라 점점 관성적이 되면서 의욕과 열정이 떨어져갔다. 일리치는 해체를 결심했고 2년의 기간을 두고 직원들과 국제 정세와 CIDOC의 역할 등에 대한 세미나를 계속했다. 2년 동안 수입을 적립해 직원들에게 이를 나눠주고 CIDOC을 해체하였다. 어떤 일이던 안정상태(Security)가 되면 시스템화되고 인간의 의욕과 열정에 의해 일이 진행되기 어려워지는 위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 평화는 개발로부터 연결고리를 잘라야 가능한 것이다. 경제는 19세기까지 인간 생활의 다만 일부였을 뿐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전부가 되었다. 바로 homo economicus, 경제적 동물이 된 것이다. 경제, 돈이 전부가 된 세상에서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 세계화는 개발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평화는 파괴될 것이다.

○ 일리치가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식사를 하던 중 그 집 아이가 사투리와 슬럼가의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때마다 부모들이 제지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일리치는 그 집에는 교육만 있지 자유가 없다고 말했다. 1492년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뒤 Nebrija는 여왕에게 스페인어 문법 사전을 편찬하는 데 돈을 투자하라고 꼬시면서, 그 문법사전이 신대륙 발견보다 더 많은 이익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전이 만들어졌고, 당연히 이 사전은 도시 귀족들의 말을 표준말로 해서 만들어졌다. 이후 subsistence culture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개발과 세계화로 이어졌다.

○ 일리치는 80년대 이후 중세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근대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근원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를 느꼈다. 이 때 나온 책이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라는 것인데 이것은 빅토르의 휴의 학습론을 분석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일리치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독서가 monastic reading(소리내 읽은 육체적 경험과 함께 읽기)에서 scholastic reading(묵독, 시각적 읽기, 학자적 읽기)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책이란 원래 포도를 한알 한알 따서 음미하듯이 한 자 한 자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때문에 소리내어 함께 읽는 일이 중요하다. 독서란 과거의 지혜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때문에 서울에선 일리치 '읽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 일리치는 기독교의 타락을 강조하는데, 초기 기독교 가정엔 세 가지의 보물이 늘 구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양초와 담요와 마른 빵인데, 모르는 손님이나 여행자가 왔을 때 그가 문지방을 넘어 방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밝힐 양초와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마른 빵과 따뜻하게 잠잘 수 있도록 담요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교회가 그 기능을 빼앗아감으로써 기독교 가정은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할 필요가 없고 점차 귀찮은 일이 되어갔다. hospitality; 환대가 사라진 것이다. 산업사회를 넘어서는 길을 모색함에 있어 이 자발적 환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현재 비산업사회 일부에서 틈새로 남아있는 이 환대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 hope against hope

[출처] 광주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에서 김종철 선생을 초대하여 만남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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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명복을 빕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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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민주주의가 성립하려면 무엇보다 자기절제라는 시민적 덕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 전체가 '환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비상상황에 처해 있다. 이 상황은 언제 종식될지, 과연 종식되는 게 가능할지조차도 지금은 안갯속이다.

중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인간다운 '생존ㆍ생활'이다. 우리는 이 점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도 마스크도 손씻기도 아니다. ...
우리의 정신적ᆞ육체적 건강의 첫째 조건은 타자들ㅡ사람을 포함한 뭇 중생들ㅡ과의 평화로운 공생의 삶이다. 그리고 공생을 위한 필수적인 덕목은 단순 소박한 형태의 삶을 적극 껴안으려는 의지(혹은 급진적 욕망)이다. ...
이 세상의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김종철]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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