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여성의 날이었다. 

기억해 둬야 할 날이기도 하고...

기억해 둬야 할 노래와 시를 남겨두고 싶기도 해서.

 

존 바에즈가 부르는 빵과 장미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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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d and Roses

                                                By James Oppenheim

 

As we go marching, marching, in the beauty of the day

A million darkened kitchens, a thousand mill lofts gray

Are touched with all the radiance that a sudden sun discloses

For the people hear us singing, bread and roses, bread and roses

 

As we come marching, marching, we battle too, for men

For they are women's children and we mother them again

Our days shall not be sweated from birth until life closes

Hearts starve as well as bodies, give us bread, but give us roses

 

As we come marching, marching, un-numbered women dead

Go crying through our singing their ancient call for bread

Small art and love and beauty their trudging spirits knew

Yes, it is bread we. fight for, but we fight for roses, too

 

As we go marching, marching, we bring the greater days

The rising of the women means the rising of the race

No more the drudge and idler, ten that toil where one reposes

But a sharing of life's glories, bread and roses, bread and r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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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_제임스 오펜하임

 

환한 아름다운 대낮에 행진, 행진을 하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컴컴한 부엌과 잿빛 공장 다락이

갑작스런 태양이 드러낸 광채를 받았네.

사람들이 우리가 노래하는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행진하고 또 행진할 때 남성을 위해서도 싸우네.

남성은 여성의 자식이고, 우린 그들을 다시 돌본다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린 착취당하지 말아야만 하는데,

마음과 몸이 모두 굶주리네: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

 

우리가 행진하고 행진할 때 수많은 여성이 죽어갔네.

그 옛날 빵을 달라던 여성들의 노래로 울부짖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여성의 영혼은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 우리는 빵을 위해 싸우지. 또 장미를 위해 싸우기도 하지.

 

우리가 행진을 계속하기에 위대한 날들이 온다네.

여성이 떨쳐 일어서면 인류가 떨쳐 일어서는 것.

한 사람의 안락을 위해 열 사람이 혹사당하는 고된 노동과 게으름이 더 이상 없네.

반면에 삶의 영광을 함께 나누네: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 함께 나누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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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품격>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어서

요즘 코로나19로 혼란스럽기도 한데 조금은 연결해서 생각해 볼 만도 해서.

원래는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면역에 관하여>(율라 비스 저, 열린책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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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제 살갗보다 그 너머에 있는 것들로부터 더 많이 보호받는다. 이 대목에서, 몸들의 경계는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혈액과 장기 기증은 한 몸에서 나와 다른 몸으로 들어가며 몸들을 넘나든다. 면역도 마찬가지다.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 집단의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들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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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누가 우물에 독을 풀었나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저기요” 하고 부르면 열에 여덟은 성난 얼굴로 돌아본다는 곳,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어디서든 빵하고 터져 나올 만큼, 그만큼 억압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바이러스가 우리를 불렀다. 누가 감염된 자인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확산된 혐오와 불안을 보면서 계속 떠오르던 말이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일본에서 분노의 표적이 되었던 그 조선인은, 중국인이 되었고, 다시 대구 사람들이 되고, 이제 ‘신천지’가 되고 있다. 그들을 격리하고 제거하면 우리 모두 안전해질 수 있을까?

 

위험한 존재를 ‘안전한 공간, 건강한 사회’로부터 제거하는 방식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식은 소독과 방역, 의심과 격리, 배제와 추방이다. 그들은 흑인이거나, 무슬림일 수도 있고, 중국인이거나 한국인일 수도 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코로나19의 세계적 전파를 알리면서 마스크를 쓴 사진과 함께 ‘메이드 인 차이나’를 표제어로 내걸었다. 미국의 CNN뉴스는 중국 소식을 전하면서 한복 입고 마스크 쓴 한국인들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냈다. 극우정치의 공통 문법인 인종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발화하는 것은 불길한 신호다. ‘유색인종’은 난민이나 트랜스젠더가 될 수도 있고,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폐쇄병동에 갇힌 정신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전염병 이전에 이미 기피되었던 존재들은 다시 병리학의 법정으로 불려 나온다.

 

내가 사는 강원도 접경지역에서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이후 멧돼지 포획 작전이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날 마을 전체가 멧돼지를 막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다. 포수들이 산에 들어갈 때는 인근 주민들에게 입산금지를 알리는 문자가 온다. 그럴 때 멧돼지의 심정이 되곤 한다. 멧돼지는 열병과도 싸우고 사냥꾼과도 싸워야 한다. 멧돼지를 막으면 돼지들이 안전해질까? 돼지들에게 살처분과 상품화를 위해 도살당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안전한 것일까?

 

2018년 한 해 동안 노동현장의 사고 사망자 수는 971명, 산재로 죽은 노동자는 2142명, 자살로 숨진 사람은 1만3670명이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노동현장은 바이러스 감염 지역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래도 그건 불안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었으니까. 작년 한 해 한국에서 도축된 돼지는 약 1800만마리, 닭은 무려 10억마리에 이른다. 그건 무섭지 않았다. 먹히는 자가 아니라 먹는 자니까.

 

하지만 아무리 모르는 척해도, 사람들은 모르지 않는다. 이 세계가 켜켜이 쌓이는 죽음 위에서 만들어진 풍요로운 세계라는 것을. 누적된 불안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미칠 듯이 터져 나와 때릴 곳을 찾기 마련이다. 광기는 언제나 약한 곳을 향해 터져나간다. 그 마지막에 파시즘과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걸 막는 길은 마땅히 증오해야 할 대상을 향해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때 정치의 물음이 필요하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서 구원을 찾고, 왜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폐쇄병동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가?

 

병든 닭을 10억마리씩 소비하고, 매년 500만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하는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재난이 그 일상을 중단시키면 사람들은 비로소 묻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 존재인지,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 재난은 함께 살자는 물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추방자들의 귀환이자, 일상을 중단시키는 ‘자연의 파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계속 더 강력한 경고를 보낼 것이다. 우리 공동의 세계에 풀려진 독은 무엇이며, 어디서 온 것인가? 과잉생산, 과잉소비, 거대한 낭비 위에 굴러가는 성장의 경제를 멈추지 않으면 재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너무 오래 감염되어 있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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