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간 몸 담았던 곳을 이제 떠나려 한다.

아니 떠났다고 해야겠다.

이 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겪고 만나고 얻었다.

물론 만나고 겪으면서 관계 맺은 사람들의 허상도 보았고.

껍데기뿐인 나를 확인하기도 했고.


2016년,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나를 위한 새로운 기회인지도 모른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새기며 뚜벅뚜벅 가련다.


더 큰 공부가 되는 출발이기를 빌어 본다.

_()_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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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나비_2013.10.29.]

쬐끔 친한 김상욱 샘 글. 


우리 그림책은 어디로 가야 하나



1. 그림책 발전의 배경


우리 그림책의 역사는 길지 않다. 넉넉하게 잡아도 20년 남짓. 그런데도 그 발전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채롭고 또 경이롭다. 아름다운 그림책, 소중한 그림책, 뜻 깊은 그림책 등 하나하나 손에 꼽으라면 그 어떤 것이든 손가락이 부족할 지경이다. 무엇이 우리 그림책을 이다지 힘차게 밀어 올릴 수 있었을까? 그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림책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배경의 성숙일 것이다. 일정 정도의 경제적 수준이 담보되고, 독자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될 만한 문화적 역량의 축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아동의 발견'에 버금가는 새로운 아동기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 조건의 개화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 눈부신 진전을 일구어온 가장 주요한 동력은 단연 그림책 자체가 안고 있는 힘이다.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져 이야기를 빚어내는 것이 그림책이라면, 그림책 속에는 글이, 그림이, 이야기가 함께 있다. 더욱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 똑 떼어내 분리하기 힘들 정도로 견고하고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마치 아이의 얼굴에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떼어내기 힘든 것처럼. 아이의 얼굴에는 엄마와 아빠가 있고, 또 자신만의 얼굴이 있는 법이기에. 글과 그림, 이야기가 그림책에는 있다. 그러니 그림책에는 아이가 처음 세상과 마주하고, 세상을 껴안고, 세상을 담아두기에 적합한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 셈이다. 


아이는 처음 세상을 본다. 그림은 아이가 처음 보는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무엇을 중심에 두고 보아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려준다. 아이는 그림을 통해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허공 속에 있는 엄마의 얼굴을 그저 이차원적인 평면이 아니라, 초점화를 통해 배경과 대상을 구분한다. 더욱이 대상을 고정된 상태로 붙잡아둠으로써 한결 정밀하게 탐사할 수 있게 한다. 시각적 문해력Visual Literacy과 함께 그림으로 담아낸 대상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된다.


또 그림책에는 말이 있다. 글은 엄마나 아빠, 가까운 이의 입을 빌려 말이 된다. 소리가 되고, 울림이 되고, 리듬이 된다. 의사소통의 근간을 이루는 말은 높낮이와 길이, 셈과 여림의 강세 등의 반복 속에서 리듬을 타고 아이의 귀를 통해 마음속으로 울림을 건넨다. 더욱이 이 말은 생각을 불러들인다. 언어가 지닌 기호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말은 대상을 즉각 떠올리게 만들며, 이 대상들이 조밀하게 얽혀 하나의 형상으로 자리 잡게 만든다. 또 다른 그림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언어에 내재된 상상하는 즐거움이 마음속에 움을 틔운다.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이야기는 단순히 앞과 뒤가 연결되어 있는 사건이 아니라, 처음과 끝을 분절시킴으로써 경험을 완결된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킨다. 시작과 끝을 설정함으로써 쉼 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붙들고, 그 경험을 통해 세상을 사는 이치를 깨우친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그림책이 어찌 아름답고 소중하지 않으랴. 그러니 짧은 역사에도 아랑곳없이, 이처럼 수많은 작가와 독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함께 공력을 기울이게 만들고, 함께 글과 그림과 이야기의 힘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우리 그림책의 발전에 가장 큰 공은 의당 그림책 자체의 장르적 본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 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우리 그림책을 있게 만든 1세대 그림책 작가들의 노고 또한 선명하다. 대체로 1세대 그림책의 작가군들, 류재수, 정승각, 이억배, 권윤덕, 정유정 등은 대부분 민중미술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었다. 그 경험들은 그림 작가의 개인적인 예술적 표현보다 대중과의 소통을 한층 더 중시하게 만든 동인이었으며, 이 소통에의 바람이 화폭 대신 출판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우리 그림책은 그 어떤 장르보다 주제의 현실주의적 자질들이 탄탄하며, 화풍의 민족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는 상대적으로 판타지에 대한 결핍을 초래하였고, 어린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계몽적 기획을 강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그림책의 성장을 위한 가장 힘차고 강건한 주춧돌을 마련했음은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후에 이어진 그림책이 예술적 표현의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현실성과 민족성이 우회적으로 반영되어 있음도 이 때문이다.



2. 그림책의 장르적 특성


그림책은 그림책이다. 그 무엇도 아닌 그저 그림책이다. 그럼에도 그림책이란 통칭 장르를 하위 장르로 구분해 본다면, 정보 그림책과 이야기 그림책으로 나뉜다. 정보 그림책이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야기 그림책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다. 어쩌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보 그림책이라면 이야기 그림책은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야기 자체의 즐거움을 건네주는 것이 목적이다. 이른바 칸트의 ‘무목적성’이 이야기 그림책의 특성이다. 더러 ‘시 그림책’이란 용어로 그림책을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를 바탕으로 만든 그림책이지만, 그림책이 되는 순간, 시는 자취를 감추고 32쪽의 그림이 펼쳐내는 이야기로 전화된다. 그러니 우리가 탐구하는 그림책은 오로지 이야기 그림책만 우두커니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장르는 비평가나 연구자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연구의 필요를 위해 거듭 새로운 장르는 만들어지고 지칭된다. 예컨대 판타지 그림책은 현실성을 넘어서는 요소나 장치, 플롯을 가질 경우의 작품들을 묶어 논의할 수 있다. <눈사람 아저씨>나 <사과가 쿵> 같은 작품들을 한꺼번에 묶어 논의할 수 있다. 심지어는 장르적 특성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칼데콧 수상 그림책'이 설정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는 넘쳐나는 지경이다. 우리 그림책 논의에서도 다양한 공모제에 수상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도 있다. 그러니 이러저러하게 새로운 장르명칭을 끌어와 논의를 한층 선명하게 밝히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다. 그러나 여전히 '영유아그림책'이란 명칭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나머지 또렷하게 특정한 작품군들을 지칭하는 명칭은 아니다.


애초 그림책의 주된 독자는 영유아들이다. 그림책의 지평이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책이 담아내는 경험의 세계가 확장되었기에 초등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 독자들까지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들도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그림책이 지닌 표현의 영역 또한 독자와 조응하기보다 그림 작가의 개인적 예술 표현을 더욱 중시하게 됨으로써 특정한 연령층의 독자에 더 이상 초점을 맞추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그림책 고유의 독자는 단연 영유아들이다. 이는 그림책을 수용하는 연행의 방식을 미루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영아의 경우 그림책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림책이지, 혼자 힘으로 읽고 보는 방식으로 수용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경계의 확장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나 중심의 설정은 여전히 종요롭다. 다른 한편 영유아 그림책이란 경계의 설정을 망설이는 까닭은 의식적으로 독자를 설정하고 제한한다면, 그림책 표현의 경계는 점차 협소해지고 자칫 양식화될 우려가 적지 않다. 오히려 느슨한 넘나듦을 허용하는 정도의 선에서 중심을 명료하게 확인해 두는 정도로 영유아 그림책의 특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요청되는 것은 영아 그림책이다. 유아의 그림책은 오히려 그림책 일반의 특성과 평가의 준거만으로 충분하다. 거듭 강조하건대 유아 그림책이야말로 그림책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반면 영아 그림책은 충분히 장르적 특성, 그 특성의 중심*을 살펴볼 수 있다. 영아의 경우, 인지의 발달보다 정서적 발달이 중요하다. 자신을 보살펴 줄 따사롭고 편안한 가족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요람과도 같은 따스함과 안락함이야말로 영아 그림책의 핵심적인 자질이다. 헝겊 인형과 늘 덮고 자던 담요의 역할을 그림책이 해야만 한다. 그림책을 통해서도 헝겊 인형과 같은, 담요와 같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부분은 C.Huck 외(2001)의 논의와 J.Rocklin(2001)의 논의를 바탕으로 필자가 보완한 내용이다. C. Huck, S.Helper, J.Hickman, B.Kiefer, Children's Literature in Elementary School, 2001, p.123. J.Rocklin, "Inside the Mind of Child", Opinion Papers, ED 458 602


그러자면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계몽의 목소리로 어른들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생활 속의 단초들을 결합하고 연상해낼 수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펼쳐져야 한다. 그러자면 이야기가 단순해야 함은 물론이다. 나아가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결말을 지녀야 한다. <맥스의 첫 번째 말>과 같은 의외의 상황 역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상의 경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림은 이야기와 짝을 이룬 채, 밝고 명료한 그림이 바람직하다. 명확한 테두리를 통해 대상이 뚜렷하게 지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반면 배경은 거의 없거나 두드러지지 않아야 한다. 이야기를 형성해 가는 글 또한 명확하고 자연스러운 언어여야 한다. 자칫 정밀한 묘사를 욕심내거나 서술에 치중할 경우 영아의 그림책은 친숙함에서 멀어지게 된다. 글은 반복을 강화해야 하며, 리듬과 라임을 가져야 한다. 우리말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압운과 라임을 얻기가 쉽지 않다면, 호흡의 반복을 통한 율격을 갖추어야 하며, 어휘나 통사의 반복과 변형을 통해 리듬감을 한층 더 강화해야 한다. 리듬과 반복을 통해 영아들은 그림책의 세상이 인식할 수 있는, 통제 가능한 세상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서사의 내적인 진행과 반복과 변형을 통한 예측가능성이야말로 아이들이 그림책을 대상화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고 관여할 수 있는 세계로 만든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유머러스해야 한다. 그 웃음이 상황에 의해 빚어진 것이든, 말과 행동에 의해 빚어진 것이든 아이들은 책을 통해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웃음은 주로 아이들 자신보다 열등한 인물들의 어리석음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웃음이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에서 보듯 커다란 이웃집 개 한스에게 앙갚음을 하는 두더지의 우스꽝스러움이 그림책 전체를 웃음으로 밀어간다. 똥이 떨어지는 각양각색의 소리들 또한 즐거움을 건네주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영아 그림책의 이들 특성과 달리 유아들을 위한 그림책은 그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책의 장르적 특성에 부응하기만 한다면 그림의 요소들과 글의 요소들, 그 둘이 결합되어 빚어내는 이야기의 요소들 모두가 허용되어야 한다. 다만 그림책 일반에 요구되는 한층 더 적절한 그림책의 요건들은 고전적인 모범들에 견주어 언제나 숙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림책은 짧아야 한다. 고전적인 그림책인 펼침면 1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쇄상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길어질 경우 집중적인 관심 또한 멀어질 우려가 있기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32쪽에 만족해야 한다. 또한 그림책은 어린이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그 보살핌은 원경에서 존재해야지 그림책의 전면에 등장할 필요가 없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엄마처럼. 물론 어른이 주인공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어른은 아이 같은 어른이어야 하며, 독자인 어린이들이 동일시할 수 있을 만큼 소박하고 어리석어야 한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다르지 않다. 아이의 형상이나 성격적 특성들이 동물에게서도 확연하게 각인되어야 한다. 센닥의 괴물들이 ‘삼등신’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도 어린이보다 한층 더 어린이다운 외형을 통해 독자와 눈을 맞춘다. 또한 그림책은 서사가 지닌 갈등을 가능한 한 주인공인 어린이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어야 하며, 그 해결은 만족할 만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 단순한 서사의 끝이 아니라, 완결이란 말 그대로의 의미에 부합해야 한다. 글과 그림의 조화가 빚어낸 아름다운 한 세상이 완벽하게 끝을 맺어야 한다. 물론 이 밖에도 그림책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요건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그림책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셈이다.



3. 창작 그림책의 과제


우리 그림책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적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단연 서사의 결핍이다. 그림책의 본령인 이야기 자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사의 결핍 대부분은 글에서 비롯된다. 글은 명료한 시간의 축에서 전개되며, 그림은 정지된 순간을 묘사한다. 정지된 그림에 시간을 각인시키는 것은 장면과 장면의 연결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주요하게는 초점화된 글의 연쇄를 통해 이루어진다. 글은 초점과 초점을 연결하는 내용상의 결속성과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는 형식상의 응집성을 통해 이야기를 빚어낸다. 


우리 그림책에 서사가 부족하다는 것은 대부분의 그림 작가들이 한두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글 작가와 그림 작가, 그리고 편집자 등의 협응을 통해 작업하기보다 한 사람의 작가가 글과 그림을 모두 감당하려고 들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 영아를 위한 그림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글은 아주 빈약한 단어로 혹은 몇몇  문장으로 서사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그도 아니라면, <천하무적 고무 동력기>나 <우리 가족입니다>와 같은 일인칭의 대화체를 사용함으로써 그림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정보만을 글이 감당하고는 한다. 이들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옛이야기 그림책에서 소용되는 분량의 글이 나와야만 서사는 한결 풍부해지고 유려해질 것이다. 그리고 글의 분량과 함께 요구되는 것은 반복과 변형 속에서 통사적 리듬과 같은 글의 음악적 자질들을 한층 더 강화되어야 하는 것도 또 다른 과제이다. 시적 리듬을 갖지 못한 채 정보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글로는 서사의 결핍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런데 서사의 결핍은 이야기성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단순히 설명되지 않는다. 한층 면밀한 탐구가 필요하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주동적으로 서사를 꾸려가는 인물, 곧 그림책의 인물인 어린이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센 수탉>에서 확인되듯, 그림책의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가 없는 그림책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없으면 어린이의 경험을 담을 수 없게 됨은 분명하다. 나아가 어린이가 형상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어린이가 지금의 어린이가 아닌 것도 문제다. 최근 가장 멋진 그림책의 하나라고 거론했던 <심부름 말>(김수정 글/백보현 그림, 상출판사)*의 어린이는 지금의 어린이가 아닌 옛날의 어린이를 탐구하고 있다. 작가들의 어린 시절을 경험의 내용으로 설정한 것이다. 물론 그림책이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곡진하게 담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은, 그림책은 구체성, 직접성 속에 표현되는 것이기에 보편성은 상상력을 통해 얻어지지 경험 자체가 보편성을 저절로 갖지는 않는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지금의 어린이가 아니다. 옛날 어린이일 뿐이다. 물론 어른들은 그 어린이를 통해 흔쾌히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러나 지금의 어린이들은 그 어린이를 통해 즉각적으로 스스로를 동일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어린 독자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 지금의 어린이일 것이다. 그러자면 경험 속 현실의 어린이와 어린이문학이 쉼없이 발견하는 상상의 어린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또 어린이가 없고, 지금의 어린이가 없는 또 따른 이유는 작가들이 선택하는 서사가 어린이들이 듣고/보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 작업이 많은 부분 계몽적인 기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또한 서사를 빈약하게 만드는 동인임은 분명하다. 계몽성을 덜어내고 한층 더 현실에 착근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현실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옮겨오는 것만은 부족하다. 상상 속에서 은유와 상징을 최대한 증폭시킬 필요가 있다. 기계적인 재현인 아닌 상상적인 의장이 필요한 것이다.


* 졸고, “상상과 모험의 심부름말”, <시사인>, 2013.05.16. “나는 이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따스하고도 놀라운 협응이 옛날 어린이를 만나는 지금의 어른이 아니라, 지금의 어린이를 만나는 또 다른 지금 어린이를 형상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조금은 간절하게.” 


서사의 결핍과 함께 또 다른 문제는 표현의 양식이다. 작가는 어쩔 수 없이 개인의 양식 속에서 작업한다. 그러나 글이, 이야기가 무엇이든 동일한 양식으로 시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밀도를 떨어뜨린다. 최숙희나 김영진의 그림과 같이 캐릭터로 안착한 개인적 양식화는 어쩔 수 없지만, 어떤 이야기이든 동일한 양식, 곧 기법, 재료, 인물 등이 반복될 때 너끈히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모리스 센닥이 <토끼 아저씨와 멋진 생일 선물>에서는 인상주의적인 표현의 양식을, <한밤중 부엌에서>에서는 만화 컷과 같은 양식을,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펜을 활용한 크로스해칭의 양식을 활용한 것은 작품에 부응하는 양식적 실험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권윤덕의 거듭 새로운 모색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개인의 양식이 고착되는 것과 함께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예술적 자기 표현에 치중한 나머지 그림책의 본질적 표지의 하나인 단순성이 희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도한 표현의 욕구가 단순성과 배치된다면, 어린이의 명료한 시선을 사로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단순성은 서투름이 아니다. 무릇 뛰어난 화가의 그림들이 최대한의 단순화를 통해 시각적인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것은 결코 서투르기 때문에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호안 미로, 레오 리오니, 에릭 칼, 존 버닝햄 등의 그림이 단순한 것은 마침내 도달한 단순함이지 비로소 시작하는 단순함은 결코 아닐 것이다. 가브리엘 샤넬이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비결은 단순화하고 덜어내어 오직 정수만을 남겨두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어린이를 사로잡는 비결은 단순화하고 덜어내어 오직 정수만을 남겨두는 것”이 아닐까.



4. 전망을 생각하며


그림책이 의당 갖추어야 할 자질과 우리 그림책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문제라는 프레임으로 살폈기에 당연 한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그럼에도 우리 그림책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그림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림작가들 역시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림책에 입문하고, 또 더미를 구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이 많다. 


더욱이 북스타트와 같은 그림책과 어린이들을 중개하는 활동들이 점차 확장되고 있다. 10년 동안 북스타트는 어린 영유아를 위한 그림책을 정성껏 선정해 왔고, 또 독자와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통로를 마련해 왔다. 어린이도서연구회의 활동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좋은 책을 좋은 독자와 마주치게 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왔음에랴.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부모들은, 유치원 선생님들,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우리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책 그림책을 따뜻한 마음으로 쓰다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 그림책의 미래가 어두울 리가 있겠는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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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감으로도 좋겠다.

이런 걸 소재로 한 이야기도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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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이는 파란색, 여자 아이는 분홍색? 언제부터 그랬을까?

2015년 9월 10일  |  By:   |  문화  |  댓글이 없습니다

루즈벨트(F.D.R.) 전 미국 대통령의 세 살적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하얀 치마에 깃털 달린 모자를 꼭 움켜쥔 손과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보다 더 긴 머리, 애나멜가죽으로 댄 구두까지 지금 기준에서 보면 어여쁜 여자 아이 같습니다. 분명 지금 기준에서 보면 남자 아이에게 왜 저렇게 옷을 입혔을까 의아할 수 있지만, 사진이 찍힌 1884년 기준에서 보면 지극히 평범한,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옷차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일고여덟 살 때까지 치마를 입혔고, 머리도 자르지 않았습니다. 사진 속 루즈벨트의 옷차림은 당시에는 아주 흔했던 중성적인(gender-neutral) 아이 옷차림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이를 보고 한 눈에 성별을 구분해야만 하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아직 머리숱이 거의 없는 아기의 머리에도 굳이 분홍색 헤어밴드를 씌우고, 사람들은 또 그걸 보고 아이가 여자 아이라고 짐작하잖아요.”

<분홍과 파랑: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를 분간해내는 미국(Pink and Blue: Telling the Girls From the Boys in America)>이란 책의 저자 메릴랜드대학교의 역사학자 파올레티(Jo B. Paoletti) 교수의 말입니다. 파올레티 교수는 30년 동안 아기와 어린이의 옷차림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루즈벨트의 사진이 찍힌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130여 년은 길다면 긴, 하지만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옷을 색깔별로 구분해서 입혔을까요?

파올레티 교수는 중성적인 옷차림의 소멸 과정을 살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수세기 동안 아이들은 일곱 살 정도가 될 때까지 (남녀 가리지 않고) 하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실용적인 이유가 있는데, 흰 옷감은 때가 타고 더러운 것이 묻어도 다시 표백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하얀 옷을 입히지 않으면 부모들이 잘못이라고 느낄 정도로 오랫동안 어린이에겐 하얀 옷을 입히는 게 사실상의 규범이었습니다.”

성별에 따라 다른 색깔, 다른 종류의 옷을 입히는 건 하루아침에 나타난 트렌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서서히 굳어진 관행이라고 보기도 어렵긴 합니다. 우선 19세기 중반쯤 사람들은 아이 옷에 색깔을 넣기 시작합니다. 분홍색, 파란색을 비롯해 여러 색깔이 선을 보였죠. 하지만 그저 옷 색깔이 다양해졌을 뿐,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도 특정 색상이 성별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 건 아닙니다. 1918년,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어린이 패션 잡지라고 할 수 있는 <Earnshaw’s Infants’ Department>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분홍색은 남자 아이에게 어울리고, 파란색은 여자 아이에게 어울리는 색깔이다. 확실하고 더 힘찬 색깔로 여겨지는 분홍이 남자 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고, 여자 아이들은 연약하고 앙증맞은 색깔인 파랑을 입었을 때 더 예뻐 보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파란색이 금발에 더 잘 어울리고 분홍색은 검은 머리에 더 잘 어울린다거나, 파란 옷은 눈이 파란 아이에게, 분홍색 옷은 눈이 갈색인 아이에게 입혀야 한다는 등 지금 기준과는 상당히 다른 설명들도 많습니다.

1927년 <타임>지가 미국의 주요 백화점에서 아이의 성별에 따라 어떤 색깔 옷을 권장하는지를 정리한 표를 보면 보스톤과 뉴욕, 클리블랜드, 시카고 등 많은 곳에서 남자 아이에게 권하는 옷은 분홍색이었습니다.

파올레티 교수는 소매업계와 의류 제조업체들이 소비자들의 기호를 고려하고 동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194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아이의 성별에 따른 색깔이 정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은 이전 세대와는 달리 ‘남자답게’, 혹은 ‘여자답게’ 옷을 입으면서 자랐습니다. 여기서 남자답게, 여자답게는 남자 아이는 아빠처럼, 여자 아이는 엄마처럼 입는 것을 뜻합니다.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치마를 입고 가야만 했습니다. 아무 무늬도 없는 치마나 뛰어놀기 편한 말괄량이 스타일의 옷이라도 치마는 치마여야 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들어 나타난 여성주의, 여성해방 운동의 영향으로 이른바 “여성스러운 옷”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다시 어린이들에게 중성적인 옷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여자 아이도 남자 아이처럼, 혹은 옷 입은 것만 봐서는 성별을 알아차릴 수 없는 식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 몇몇 백화점의 아동복 코너에서는 분홍색 옷이 한동안 자취를 감췄습니다.

“당시 여성주의자들, 혹은 여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회 전체가 여성들이 보다 순종적으로 길들여지는 이유가 옷차림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자 아이에게도 남자 아이처럼 옷을 입히면 이 아이가 자라서 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사람이 될 거라고 여겼죠. 성역할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학습된다(nurture not nature)는 믿음이 널리 받아들여지던 시기였습니다.”

중성적인 옷차림은 1985년쯤까지 계속됐습니다. 파올레티 교수가 이를 연 단위로 정확히 기억하는 건 1982년에 그녀의 첫째 딸이 태어났고, 1986년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온 매장에 갑자기 파란 옷이 깔린 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면 풋볼을 들고 있는 테디베어 마네킹이 파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마네킹이 갑자기 매장 어디를 가나 눈에 띄었죠.”

이어 분홍색, 파란색 기저귀가 출시됐습니다.

이런 변화는 뱃속의 아기의 성별을 미리 알 수 있게 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부모는 태어날 아이가 남자 아이일지 여자 아이일지를 알고 나서 미리 옷을 사두고 방을 꾸미게 된 것이죠. 항목과 특성을 보다 세분화할수록 물건을 더 많이 팔 수 있고 매출이 늘어나는 법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신발부터 아기 이불, 장난감, 보행기, 차량용 아기 의자에 이르기까지 분홍색이 대유행합니다. 첫째가 딸이면 온통 분홍색으로 물건들을 샀다가 둘째가 아들이면 다시 전부 다 파란색 물건을 사야 했지만, 여유가 있는 부모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파올레티 교수는 또한 중성적인 옷차림이 여전히 유행하던 1980년대 초반에 어린 시절을 보낸 엄마들이 자신의 딸들에게는 중성적인 옷차림을 잘 입히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들이 다시 순종적인 여성상을 이상적으로 여기기 때문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여성주의자들과는 조금 이유가 다른데, 예를 들어 딸들이 외과 의사와 같은 여전히 남성이 많은 직업을 갖더라도 충분히 여성스러운 외과 의사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린이들의 소비, 정확히 말하면 유아용품, 어린이들의 물건에 대한 부모들의 소비가 크게 늘어난 것도 중요한 변화입니다. 아동발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아이들은 만 나이 3~4세 즈음 처음으로 성적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6~7살 때까지는 자신이 남자라는, 혹은 여자라는 의식이 확고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오늘날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진 ‘남자다운 것, 여자다운 것’에 끝없이 노출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어린 아이들도 머리가 길고 치마를 입는 건 여자 아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저 그렇다는 사실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파올레티 교수는 책을 쓰는 내내 사회가 규정한 성적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의 부모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성별에 맞춰 옷을 입혀야 할까요? 아니면 그런 데 아이들을 얽맬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대로 옷을 입고 생각을 말하도록 놔둬야 할까요? 파올레티 교수는 이 지점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성적인 옷차림의 소멸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남자 아이다운 것, 여자 아이다운 것을 명확하게 나눠버린 고정관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원래부터 정해져있던 것도 아니니까요. 중성적인 옷차림에 대한 수요가 다시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성적인 옷차림의 가치에 대해 다같이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애는 사내 아인데 늘상 옷을 여자 아이처럼 입으려고 해서 걱정이라는 부모가 여전히 많잖아요. 그것이 결코 문제가 아닌데 말이죠. 패션 업계는 남자 옷, 여자 옷을 구분해서 팔면 매출이 늘어나서 좋을지 모르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게 명백하게 남성성, 여성성을 분간할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Smithson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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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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