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퍼옴]

[놀이가 밥이다]공 뜨면 우르르… 아이들 단순한 놀이에 웃고 숨이 차도록 달려

ㆍ(11) 자발적·대안적 놀이찾기

특별히 놀이터나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학부모 모임 ‘행복한 우리들’은 놀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가릴 것 없이 아이들과 함께 어디든 찾아가 놀았다. 볕이 따스할 때면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돈까스’(땅에 원을 그리고 한 발로 원을 짚은 채 남은 발로 다른 사람들의 발등을 밟는 놀이)를 하고, 서강대 인근 재개발 예정지 골목길에서 ‘열발뛰기’를 하거나 뒷산을 탐험했다. 겨울엔 눈 쌓인 대신교회 건물 옥상에서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도 놀았다.

골목길에서 놀 때 처음 한두 번은 엄마들이 ‘보물찾기’하듯 골목 여기저기에 쪽지들을 숨겨놨다. 각 쪽지엔 ‘○○야 환영해’ 등 아이들을 향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상품이나 보상도 없는 보물찾기에 흠뻑 빠져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돌 틈에서, 수풀에서 쪽지를 하나 발견할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나중엔 이런 엄마들의 도움 없이도 아이들은 스스로 작은 나뭇가지로, 버려진 스티로폼 조각으로 훌륭한 놀이를 만들어 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즐거운 놀이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놀이모임 ‘행복한 우리들’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이 지난달 봄볕이 드는 이화여대 캠퍼스의 한 언덕에서 나무막대를 땅에 세우고 있다(위 사진). 지난해 여름엔 마포구의 한 재개발 예정지 골목길에서 열발뛰기 놀이를 하고(위에서 두번째), 가을엔 방과 후에 떨어진 낙엽을 갖고 놀았으며(위에서 세번째), 지난 겨울엔 눈 쌓인 대신교회 옥상에서 두꺼운 패딩점퍼를 입고 신나게 놀이기구를 탔다(아래 사진). | 행복한 우리들 제공


▲ 학부모 모임 ‘행복한 우리들’
못 노는 아이들 위해 사계절 놀이 품앗이 나서
대학 캠퍼스·골목길·옥상 등 놀 곳만 있으면 찾아가


수업이 끝난 학교도 훌륭한 놀이터가 됐다.

지난 12일 오후 서대문구에 있는 한 초등학교.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가방을 휘두르며 달려간 곳은 운동장이었다. 공이 한번 날면 아이 15명이 우르르 같은 방향으로 뛰었다. 지극히 단순한 이 놀이에 아이들은 웃고,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런닝맨’ 놀이를 하자며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여자아이 대여섯은 ‘겨울왕국’ 놀이를 한다며 역할을 나눈다. 조금씩 비가 흩날렸지만 아이들은 누구 하나 비 피할 생각 없이 놀거리를 찾아 뛰어다녔다.

‘행복한 우리들’은 뜻이 맞는 학부모들끼리 육아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함께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자고 결성한 모임이다. 현재는 16명의 학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놀러’다니는 중이다. 방과후에 학교에서 많이 놀지만, 장소는 딱히 제한을 두지 않고 동네를 누비고 있다.

아이들이 처음부터 잘 놀았던 것은 아니다. 양모씨(41)는 2010년 3월의 어느날을 기억한다. 두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몇 년 전부터 신축 공사를 위해 운동장에 컨테이너로 임시 교실을 짓고 수업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고 운동장이 다시 주어졌을 때도 아이들은 노는 법을 몰라 “뭐하고 놀아요?”라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대부분 수업이 끝나면 기다리던 엄마와 함께 칼같이 집과 학원으로 향했다.

변화는 외아들을 키우는 학부모 김모씨(43)의 헌신에서 시작됐다. 김씨는 방과후에 오후 내내 학교를 지키며 ‘놀이모임’을 만들었다. 누구든 아이를 맡길 수 있었고, 한 명이라도 노는 아이가 있으면 어스름까지 손전등을 들고 운동장을 지켰다. 놀이모임에 아이를 보냈던 학부모 몇 명이 품앗이를 하면서 놀이모임은 커져갔다. 점차 ‘놀이’에 공감하는 엄마들이 늘었고, 학교에선 아이들이 방과후 늦게까지 뛰노는 풍경이 일상이 됐다.

1~6학년이 섞여 놀다보니 처음엔 싸움도 잦았다. 사소한 다툼이 ‘패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있었고, 한 아이는 다투다가 텃밭에 있던 호미를 던지기도 했다. 하루에 한 번은 어른들이 나서서 아이들을 뜯어말려야 했다. 그러다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룰’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따로 규칙을 만들고 가르친 적도 없는데 아이들끼리 스스로 폭력 없이 문제를 풀어갔다. 그렇게 나이가 달라도 나란히 모래성을 쌓거나 축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아이들 스스로 놀면서 갈등을 조율하고, 관계를 지속해가는 ‘놀이의 생태계’가 생긴 것이다. 양씨는 “이런 경험은 초등학교 때가 아니면 하기 힘들다”며 “어릴 때 다양한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도 성숙하게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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