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아니 투표만 습관에 따라 하는 건 아닐 테다. 많은 일상이 습관처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성찰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은 탓이지 싶다. 적어도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찰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도 이미 세상의 일부이잖은가. 결국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안 바뀔 테니까. 이번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 이 글을 읽은 게 조금은 아쉽다. 뭐, 선거 전에 읽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 달랐을 텐데!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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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투표를 하는 진짜 이유

On Politician



나라가 민주적으로 될수록 그 통치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귀족들과 외국인 정복자들은 증오를 받을지는 몰라도 경멸을 받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다스릴 사람을 국민이 선출하니 당연히 다수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가 뽑히고,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살피는 섬세함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자리이니 가장 현명하고 우수한 사람이 선택될 듯싶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군가를 정치가라고 부르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조롱하는 행위가 된다. 공동체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투표에서 이기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고, 설령 시도하더라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반면 투표에서 이기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훌륭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이기 일쑤다(최고 관직을 차지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개척자들도 이 역설적인 상황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의 시대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민주주의가 새로운 것일 때는 위대한 사람들이 부상(浮上)하지만,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 이 장점을 잃어버린다. 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누구나 준비된 대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정당 조직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대답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정당 조직에 복종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니까. 만약 사탄과 바알세불(신약성서에 나오는 악귀의 우두머리)이 후보로 공천을 받고 대천사가브리엘이 무소속으로 나온다면 대천사가 당선될 확률이 전혀 없을 터이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이상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한 가지 이유는, 무소속 후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선거 자금을 주무르지 못하며 따라서 정치가들의 숙달된 기술로 대중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모든 것을 해명하지는 못한다. 왜 사람들이 무소속 후보에게 선거 자금 기부하기를 그렇게 꺼리는가 하는 궁금증은 남기 때문이다. 그 대답은 물론 무소속 후보들이 당선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소속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답은 우리를 맨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만들 뿐이다. 왜 그들은 당선될 가능성이 없는가?


내가 볼 때 그 궁극적인 이유 가운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게 바로 습관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특정 후보의 장단점을 따지지도 않은 채 자신들이 늘 투표해왔던 대로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가 늘 투표해왔던 대로 표를 던진다. 이는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개혁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영국에 사는 나로 말하자면 아버지가 급진파였으므로 노동당에 투표한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자유당 지지자였으므로 급진파가 됐고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휘그당 지지자였으르모 자유당 지지자가 됐다. 그리고 그분이 휘그당 지지자가 된 것은 선조들이 헨리 8세로부터 수도원 토지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급진주의는 이처럼 금전상의 원인에서 비롯했으니 그럼 나는 보수당 지지자로 돌아서야 할까? 생각만 해도 심란해진다. 습관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설사 벗어난다 하더라도 의혹에 시달리는 상태가 되어 결국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습관이 지배하는 한, 훌륭한 사람들이 정치에서 기회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해결책이 없는가? 아니 있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습관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지만 지금보다는 그 정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줄어든 부분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 민주주의에서 우리의 정치가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준이 곧 정치가의 수준이다. (1931.12.16.)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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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1+1=1이어야 한다는 착각에 많이들 빠져 있다. 빠져나오지 않는 한 갈등뿐이라고 본다. 

성평등이나 민주주의가 확장될 수록 결혼 제도는 많이 바뀌지 않을까 싶다. 아주 많이!

바뀌어야지. 

사회를 구성할 존재가 되는 아이 돌봄을 가족(가정) 또는 부부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사실 야비해 보인다. 사회가 책임져 줘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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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Marriage



며칠 전 뉴욕에서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돌아보며 물었다. "실례지만 버트런드 러셀 씨 아니세요?"


부인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 내 강의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건 지적이었던 옛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은 유부남이다 보니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살죠."


나는 결혼 생활의 안타까운 결과를 보는 듯싶어 자연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인격의 실현이어야 마땅할 결혼을 왜 정반대로 느껴야 하는 걸까? 택시 기사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는 단서는 없었다. 그가 이 비참한 결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결혼 그 자체였다. 나 자신은 결혼함으로써 그런 결과를 경험했던 적은 없지만 그 택시 기사가 아주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바를 털어놓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경제 탓이고 부분적으로는 사회적인 관습 탓이다. 후자가 좀 더 쉽게 정리되므로 그것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남편과 아내가 여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건 나쁜 관습이다. 그 택시 기사의 아내가 강연 따위를 좋아할 리 없고, 남편이 자기를 버려두고 혼자 강연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리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배우자가 원하리라 짐작되는 즐거움을 경계하다가 자기 자신의 즐거움마저 포기하고 사는 남편과 아내가 부지기수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에 반감을 갖는 것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소한 이기주의보다 훨씬 더 해롭다. 따라서 부부가 함께 지루해지고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한다면 남편과 아내가 어느 정도는 각자의 사회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측면에서는 한결 괜찮은 관습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이다. 미혼 남성은 자신의 소득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기혼 남성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물론 대다수 미혼 남성이 아내를 물색하는 행위를 포함해 한낱 오락거리에 여가를 바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폐와 동전의 보상이 전혀 없는 종류의 교육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일정 비율 있다. 이런 남성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자신의 여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또 설령 여가가 나더라도 여윳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성의 경우, 특히 이른바 '지적인' 여성들이 결혼해서 느끼는 상실감은 아이 없이 살지 않는 한, 남성보다 훨씬 더 크다. 결국 남녀 모두가 결혼에 대해 어느 정도 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고충은 국가가 육아 비용 전액을 맡아주지 않는 한, 아니 맡아주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치유될 수 없는데, 우리 시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성싶지 않다. 그러나 육아 부분에서 과거에는 보편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흔한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현명한 태도를 취한다면 이 고충을 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육아는 엄청난 기술과 과학을 요구하는 동시에 대단히 흥미로운 관찰의 영역을 제공하기도 한다. 기술과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애정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애정을 보완할 수는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잘못 이해할 경우 본래 의도했던 바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유년기의 과학적 성질을 이해하게 되면 가족생활이라는 주제에서 지식인들이 우위를 차지하는 현상도 줄어들 것이라고 본다.


아는 게 많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는 사람보다는 무지하지만 애정이 있는 사람이 아이에게는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경우보다는 제대로 알면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낫다. (1931. 11. 13.)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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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삶에서 떨어져 있는 무엇으로 여기기 쉽다. 그런 식으로 유혹하는 무리들이 설치기도 하고.

살아가는 힘을 주는 명상이 필요하고, 그런 명상을 볼 줄 아는 눈도 필요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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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 사라진 시대

The Decay of Meditation



100년 전에는, 그리고 150년 전에는 더욱더 그랬는데, 부유한 사람들이 지금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확실히 좀 더 교양이 풍부했다. 그 시절 부자는 당연히 라틴시를 인용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품평하고 고전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부자들은 대개 자기 나라의 문학과 (프랑스인이 아니더라도) 프랑스 문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박식함을 교수들에게서나, 게다가 분야별로만 기대할 수 있다. 이 교수는 라틴어를 알고 저 교수는 옛날의 대가들을 안다. 또 음악을 아는 교수가 있고, 그 와중에도 현대문학의 가장 쓸데없는 지식까지 아는 교수도 있다. 부자들은 그런 지식을 갖춘다는 걸 체면이 깎이는 일로 생각할 것이며, 무지는 사회적 지위의 보증서가 되어왔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홉 뮤즈들의 이름이나 황도 12궁의 별자리를 알아야만 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어린 시절 이 모두를 배웠고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현대 세계에는 여가라고는 거의 없다. 사람들이 옛날보다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라 오락도 일처럼 수고로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리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지혜란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씩 농축되는 것인데 누구도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쟁 방지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절박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고민하지 않아도 상황이 저절로 해결되리라 기대하면서 어깨만 한 번 들썩하고는 깨끗이 잊어버린다. 그러나 손 놓고 있어도 상황이 그렇게 친절하게 전개될 리는 없다.


이런 결과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절약하는 장치들 때문에 초래됐다. 한 예로 이동이란 문제를 살펴보자. 여행 속도가 빨라질수록 여행에 들어가는 시간도 많아진다. 요즘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집에서 한 시간 걸리는 사무실까지 간다.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같은 얘기가 적용된다. 예전에는 자신의 말이 심하게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이웃들을 방문했지만 지금은 100마일 이내라면 어디든 방문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전화에 대해 따져 보자. 언젠가 귀가 어두운 노신사가 전화를 걸어와 장거리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말했다. "네, 버트런드 러셀입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요?" 나는 좀 더 큰 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지만 노신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요?" 마침내 내가 허파가 터져나갈 정도로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알아듣고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 그건 알고 있었소." 대화를 더 나눌 시간은 없었다. 전화, 참 유용한 발명품이다.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쌓여 바쁜 하루하루를 채우면서 마치 일이 마무리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완전히 허구다. 퀘이커 교도들은 대다수 현대인들보다는 좀 더 지혜로운데, 내 생각에는 그들이 수행하는 침묵의 명상 덕분이 아닌가 싶다. 나는 우리가 매일 30분씩만 말없이 부동자세로 있을 수 있다면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모든 사안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맑은 정신으로 처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휴전 기념일(제1차 세계대전 휴전을 기념하는 11월 11일)에 단 2분만이 침묵에 할애되고 한 해의 나머지 모든 시간이 대체로 무익한 소란에 바쳐진다. 참으로 부당한 비율이 아닐 수 없다. 침묵이 좀 더 길어지면 무익한 소란도 좀 더 줄어들 텐데 말이다. (1931. 11. 4.)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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