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만나고 북미가 만나면서 팽팽한 대립 관계가 확 풀리는 분위기다. 평화의 시대가 다가온 듯 저마다 희망을 얘기한다. 감동을 잠깐 내려놓고 곰곰이 따져 보자. 각자도생이라는 아비규환의 삶을 북쪽에 또 심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건물이 세워지고 맥도널드가 들어가고 스타벅스가 들어가고, 철길이 쫙 놓이고... 장미빛 환상이 곧 실현될 듯하다. 좌나 우나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듯하다. 

입으로는 세상을 바꾼다고 하나 정작 자신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북쪽 사람들이 살았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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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칼럼] 철도여행의 꿈도 좋지만


북한은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해마다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하는 사회가 될 것임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거죽은 화려하되 속은 썩고 병든 또 하나의 낯익은 괴물 사회가 한반도 북쪽에도 형성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남북이 긴밀한 상호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함께 좋은 사회로 변화·성숙해 갈 수 있을지 모든 사회적 역량을 쏟아 치열하게 숙고·토론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6월12일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두 정상이 직접 만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나눈 얘기가 무엇이건, 회담 직후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았고,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유익한 회담이었다고 기자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부정적인 눈으로 보면 허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문구를 왜 합의문에 써넣지 못했느냐고 물고 늘어지는 기자들의 공격에 트럼프는 오히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중단을 고려하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으로 맞섰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발언은 매우 중요하다. 즉, 북핵문제란 물리적 압박이나 단 한번의 정상회담으로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 긴 시간을 들여 상호 입장을 고려하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임을 미국 대통령이 드디어 터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트럼프는 그에게 적대적인 어떤 정치가, 전문가, 언론인보다 더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들이 주문처럼 외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말은 기실 핵문제 해결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네오콘’이 만든 책략적 용어라는 점은 이미 여러 논자들이 지적했다.


예컨대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것 하나만 보더라도, 그것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목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렇게 하자면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나 핵시설뿐만 아니라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핵관련 연구·개발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야 하고, 나아가 원자력발전과 동위원소의 의학적 응용도 전부 단념해야 하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북한의 모든 핵 관련 과학기술자, 그리고 북한 땅에 매장되어 있는 우라늄도 남김없이 채굴하여 미국이나 북한 바깥으로 반출해야 한다. 가당키나 한 일인가?


놀라운 것은, 역대 미국의 어느 정부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이러한 해법을, 종잡을 수 없는 ‘미친’ 언행 때문에 조롱과 비난을 받는 인물이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트럼프의 발언이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중단이 왜 필요한지 말할 때, 그게 돈이 많이 들고, 또 ‘도발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렇다. 즉, 이 훈련은 단지 방어훈련이 아니라 (북한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협적인 군사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고, 따라서 모처럼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이때 그런 훈련을 계속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꼭 노련한 협상가가 아니라도 상대방의 처지를 최소한 이해한다면 누구라도 할 법한 당연한 사고다. 그런데도 트럼프의 이 훈련중단 발언에 대한 서방 주류 언론들의 반응은 심히 냉소적이다.(이는 오랫동안 ‘군산복합체’가 만들어놓은 세계적인 이권구조와 사고습관에서 그들이 벗어나지 못한 탓일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라는 ‘아웃사이더’의 등장은 군산복합체의 쇠락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예외적인 발언이 없지는 않다.


그중 매우 흥미로운 것은 한국 현대사에 정통한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반응이다. 커밍스 교수는 싱가포르 정상회담 직후 어느 시사주간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도발적’이라고 지칭한 미국의 정치지도자는 지금까지 트럼프 이외에는 없었음을 지적하고, 이는 그가 아무런 환상 없이 그냥 ‘맨눈’(innocent eyes)으로, 있는 그대로 사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고 보면 ‘맨눈’의 소산이라고 함직한 또 하나의 대목이 눈에 띈다. 즉, 트럼프 대통령에게 어떤 기자가 북한 쪽에 왜 인권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듯 묻자 놀랍게도 그 답변은 “뭐라고! 우리는 깨끗하다고 생각하느냐?”였다. 무수한 인종학살, 인권유린을 자행해온 자기들의 역사는 돌아볼 줄 모르는 미국인들의 위선이 통렬히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초기 개척시대 이래 미국의 역사는 일관된 자기몰입의 역사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엘리트 미국인들은 ‘미국 제일주의’에 도취한 나머지 타자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끔찍할 정도로 서툴고 무능한 모습을 드러내왔다. 그런데 그 미국에서도 자아도취 증세가 특히 심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 뜻밖에도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는 역대 어느 정권, 어느 지도자도 하지 못했던 ‘역지사지’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이런 모습은 그가 어떠한 추상적 이데올로기, 사상, 신조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어떤 이상주의적 관념에 의거하여 세상을 바로잡아야겠다는 허황한 소명감 같은 것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드러난 행태를 보면, 그의 심리와 행동은 크게 두 가지 욕망, 즉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키려는 욕망과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에 주로 좌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나아가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중단이라는 과감한 결정까지 나오게 된 배경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트럼프 자신의 두 가지 욕망이 동시에 충족될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어째서 그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말대로, 그것은 어느 대통령도 하지 못했던 것을 성취했다는 희열을 가져다줄 것임에 틀림없다.(그 결과로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것 역시 엄청난 자기만족감을 줄 것이지만, 아마도 트럼프에게는 다른 대통령이 못한 것을 이루어냈다는 자기도취감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접근이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만족감은 그것이 확실히 돈이 된다는 점일 것이다.


트럼프는 북한과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타결되어 북한이 개방사회가 되고,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될 것을 내다보며, 북한의 ‘밝은’ 미래상을 미리 보여주는 영상물을 자신이 만들어 왔고, 그것을 북한의 젊은 지도자에게 보여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북한이라는 미개발 지역에서 자신과 미국의 사업가들이 획득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을 자기도 모르게 표출했다. 그뿐만 아니다. 실제로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모르지만, 그는 “북한은 멋진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고, 대규모 휴양시설을 짓고 싶다는 부동산업자의 본심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 동안은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북한과 미국의 관계개선은 이제 거의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지금부터는 지난 70년간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근원적으로 가로막아왔던 냉전구조가 드디어 붕괴하고, 비록 통일은 아닐지라도 남북간 화해, 교류, 협력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라는 새로운 시대 구상도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의 선례에 따라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해마다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하는 사회가 될 것임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거죽은 화려하되 속은 썩고 병든 또 하나의 낯익은 괴물 사회가 한반도 북쪽에도 형성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아니,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경제 논리를 생각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 화해 시대를 맞아 우리는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중국과 러시아로, 그리고 유럽으로 가는 철도여행의 꿈에 취하는 것도 좋지만, 남북이 긴밀한 상호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함께 좋은 사회로 변화·성숙해 갈 수 있을지 모든 사회적 역량을 쏟아 치열하게 숙고·토론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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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런던 통신]


립스틱을 발라도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Who May Use Lipstick?



"무슨 멍청한 질문이냐!" 

독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에는 당연히 모든 여성이 립스틱을 바른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보면, 다른 이들에게는 보편적인 이런 관용이 일부 여성 집단에는 아직 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여성에게는 립스틱의 사용이 허락되고 어떤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면 전통적인 윤리적 가치관을 흥미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계의 여성 성직자들은 신도들 앞에선 당연히 정갈해야 하며, 남성의 마음을 끌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치장을 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남캘리포니아 출신이 아닌 한은 말이다. 극기의 삶을 열심히 훈계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자신이 설교하는 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기색을 눈치채여선 안 된다.


사회복지사들도 립스틱을 바르면 안 된다. 그들에게 기금을 대는 숙녀들은 모두 립스틱을 바르고 있지만 말이다. 근무 중인 병원 간호사들도 자신이 돌보는 환자의 건강 말고는 어떤 데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여야 한다. 근무 시간 중에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게 꾸몄다가는 수간호사에게 질책을 받을 게 뻔하다. 


이 기묘한 금기의 희생자 중에 가장 큰 집단은 바로 교사들이다. 미국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영국에서는 매력 있게 보이려는 여교사는 누구든 뜨거운 봉변을 당하기 마련이다.


이런 제약의 철학적 기초를 잠깐 살펴보자. 첫째, 교사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까지는 동의할 수 있다. 둘째, 어떤 여성도 남성에게 무심하거나 무심한 척하지 않고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모든 여성은 남성에게 무심하거나 무심한 척해야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 젊은 여성이 이런다면 그건 위선이거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 


물론 위선이란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매우 필요한 덕목이며, 따라서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위선을 가르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두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교사들에게 이런 제약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위선을 요구하려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훌륭한 교사의 자질을 갖춘 여성들은 자신의 매력이라는 주제에 진정 무심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보기에 이 견해는 아주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신체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또 모를까, 젊은 사람이 이성에게 무심할 수 있는 경우는 어느 정도 폭력적인 억압이 가해질 때뿐이다. 이러한 억압은 필연적으로 규율 위주의 엄격한 태도로 이어져 아이들의 행복하고 자발적인 발달에 아주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성인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 하면 아무리 못마땅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인정해 준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권위의 온 무게를 실어, 미덕이란 즐겁지 않은 것이라고 가르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을 사랑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인가 보다. 교육 당국은 미덕이란 즐겁지 않은 것이란 점을 아이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즐겁지 않으면서 동시에 미덕을 갖춘 교사들을 공급하고자 애쓰고 있다. 


나는, 가장 훌륭한 사람에 관해 견해가 좀 다르다. 나는 사람들이 유쾌하고 명랑하고 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니오'보다는 '예'란 대답을 더 많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특히 아이들에게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까닭에 나는 어린 세대와 접촉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일반적으로는 도덕 기준의 유지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범죄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31. 9.14.)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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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몸에 안 맞는다고 여긴 옷 같은, 선거를 치렀다. 

공부도 됐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듯하여 부끄럽기도 하다. 

괜찮은 결과라고들 하지만, 난 생각보다 못한 결과라는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유로운 시간이 그리우면서도 막상 여유로움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오묘하다.

책을 집어드는 걸로 시작!



버트런드 러셀이 쓴 [런던 통신]을 읽는다.

1930년대에 쓴 글이 어쩌면 이토록 지금 읽어도 울림을 줄까 싶다.

이왕 읽는 김에 한 챕터씩 옮겨 써 봐야겠다.

뭐, 군데군데 내 식으로 슬쩍 바꾼 대목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직업병을 발휘해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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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는다면

In Praise of Artificiality



세상에는 두 종류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인위적이기 때문에 자연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공적인 것(art)을 찾양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자연 찬양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는 인공물이 너무 많아 나타나는 반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반작용으로서는 쓸모가 있지만 인생론으로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은 갈까마귀와 그 짝이 먹이를 먹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먹이는 날고기였는데 어떤 부위는 연하고 어떤 부위는 질겼다. 수컷이 먼저 연한 부위를 모두 먹어치웠다. 그러면서 암컷이 감히 접근하려고 하면 부리로 거칠게 쪼아댔다. 암컷은 먹을 만한 것이 전혀 남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잔뜩 달아오른 식욕을 충족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도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 기운이 넘치는 젊은 사내들 입장에서야 아주 흐뭇한 결과가 나오겠지만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에게는 예의 바른 태도라는 규범에 따르는 편이 더 유리할 것이다.


문명은 모두, 특히 미적인 측면에서는, 인공적이다. 매너, 훌륭한 말하기, 훌륭한 글쓰기, 훌륭한 음악, 훌륭한 무용---. 삶에 우아함을 부여하는 이 모든 것들은 자연스러운 충동을 거부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들을 단련시켜 잔인한 방식이 아닌 유쾌한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나는 어제 갓 개업한 스페인 해안의 작은 식당을 방문했다. 그 식당은 거의 술을 공급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었다. 지배인은 매력적인 동성애자 청년이었는데 벽에다가 유쾌하지만 매우 인공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여가를 보냈다. 그는 배 두 척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꼈다. 한 척은 번개에 맞아 부서진 프랑스 배였고 또 한 척은 고요히 떠다니는 스페인 배였다. 지배인은 세련된 사람이어서 손님들을 세련되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 음주를 단지 심한 갈증을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인공적이고 스타일 있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을 복음으로 삼는 북유럽 나라들이 잃어버린 우아함이 여기 남유럽에서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아직도 살아 있다. 일이라는 복음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지 결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없는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단지 양분을 공급하는 음식을 먹으며, 사랑도 없이 자식을 낳아 자발성과 우아함을 파괴하는 교육을 시킨다. 


과정이 즐거워야 스타일이 생기고, 생산 활동이 그 자체로 미적 특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계에 동화되어 일 그 자체가 아니라 일의 결과만을 가치 있게 생각할 때, 스타일은 사라진다. 그리고 사실은 더 야만적인데도 기계회된 인간의 눈에는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이 스타일의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이 점점 기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불행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이 우리를 지나치게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기계를 육체와 정신노동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충분히 활용하지도 못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모두는 더 많은 여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한 집단의 편리한 부속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충동에 예술적 표현을 부여할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보다 힘을 사랑하기 때문에다. 


그러나 오직 힘만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최선의 길인지는 의심스럽다. 인간의 본성에는 적어도 힘만큼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다른 요소들도 많다. 기계화 시대가 그 요소들에게 마땅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깨닫기 전까지는 새로운 문명이 온전히 정상화될 수 없을 것이다. (1931. 9. 9.)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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