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들어와서 글 하나 퍼옴.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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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게 못되게 굴지 마세요


“내게 가장 혹독한 비평가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 없이 자기 위안으로 삼고 말 글귀도 아닙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실제보다 더 과장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부정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성공보다 실패, 실수, 결함 등 부정적인 대상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도록 진화했다는 것이죠.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심리학 및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같은 대학의 건강한 마음 연구소(Center for Healthy Minds)를 설립한 리처드 데이비드슨 소장은 “자기비판이 몸과 마음에 해로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비판은 부정적이고 반성적인 사고로 이어져 생산성을 저하할 뿐 아니라 우리 몸속에서 염증 반응을 일으켜 만성 질병과 노화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낙담하긴 이릅니다. 이런 부정 편향은 극복할 수 있으며, 자기비판 속에서 얼마든지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왜 그렇게 나 자신에게 가혹한 걸까요?

가장 먼저 인간의 진화 과정을 탓할 수 있겠네요.

데이비드슨 박사에 따르면 인간의 뇌에는 생각과 행동을 계속해서 모니터링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 실수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실수했다는 사실부터 인지해야 하니까요.”

과식하거나 오늘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하는 등 자신의 기대나 목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스스로 비난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특히 개인의 안전이나 도덕성 등이 관여된 상황에서는 뇌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명확하게 하여 해당 경험으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데이비드슨 박사는 경험과 행동에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불필요한 자기반성의 덫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누군가와 나눴던 어색한 대화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또는 사소한 오타를 낸 것을 잊지 못하고 밤잠을 설친다면 자기비판이 오히려 해로운 역효과를 낳은 것이죠.

심리치료 통합 학술지(Journal of Psychotherapy Integration)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종류의 자기비판은 우울증, 불안, 약물 남용, 부정적인 자아상 등의 원인이 되고 의욕 및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는 등 개인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격과 사회심리학 게시판(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에 게재된 또 다른 연구는 사람들이 자기비판으로 인해 실패에 집착하게 된다고 밝혔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로 정해둔 5개 목표 중에서 아직 3개밖에 못 끝냈다고 나 자신을 질책하고 스스로 화를 내면 낼수록 나머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확률이 줄어든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우리는 어김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Catch-22, 즉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처럼 느껴진다면 정확하게 짚으신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결함을 찾아내어 사소한 것까지 들춰내고 비판하도록 진화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역효과가 발생한 것이죠.

해결책은요? 소위 말하는 ‘자기자비(self-compassion)’입니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 심리학과의 크리스틴 네프 교수는 자기자비란 자신의 결함이나 실패와 마주했을 때 이해심을 바탕으로 관대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목표 달성에 있어 자기비판보다 자기자비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경쟁력을 잃고 안주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자비를 실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연구 결과를 보면 이러한 두려움은 전혀 근거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실제로 몇몇 연구를 통해 자기자비가 동기 부여와 긍정적인 변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지난 2016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자기자비를 통해 나를 더욱 폭넓게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고, 이는 곧 자기계발로 이어지며, 자기자비에 집중함으로써 후회가 닥치는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죠. 전문가들은 결국 자기자비의 핵심은 자신의 실수에 집착하여 자기 파괴적인 굴레에 갇히는 상황을 피하는 동시에 자신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바탕으로 실수를 떨쳐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돌봄 연구소(Center for Mindfulness)의 소장이기도 한 매사추세츠 대학교 의과대학의 주드슨 브루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뇌에 나 자신을 바라보고 생각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반성이나 걱정을 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때, 혹은 스스로 판단할 때 자기관계적 사고(self-referential thinking)에 빠지면서 뇌에서 자기관계적 사고를 담당하는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 나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때 해당 뇌 부위가 진정됩니다.

자기자비를 실천하고 스스로 너그러워지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자기자비를 위한 3단계 실천 전략

첫째,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데 있어 새로운 접근법을 최소한 시도라도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세요. 나 자신을 너무 재단하고 판단하지 않기,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 자기자비 실천하기 등 어떤 방법이어도 좋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최선을 다해 나 자신에게 친절하게 행동하세요. 나를 아껴주는 겁니다.

“스스로 가혹하고 못되게 행동하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드는지 돌아보고, 자신에게 친절하게 행동할 때와 비교하여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지를 느껴보는 연습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브루어 박사의 말입니다.

생각과 감정을 인지하고 내려놓는 훈련 중 일상에서 가장 실천하기 쉽고 검증된 방법의 하나가 명상입니다. 마음을 돌보는(mindfulness) 명상을 시도해 보세요. 수많은 판단과 이야기와 추측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호흡을 통해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마음돌봄 명상입니다. (더 읽기: 명상하는 방법)

부정적인 자기대화(self-talk)의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방법의 하나는 에너지를 외적인 활동에 집중함으로써 올바른 관점을 정립하고 자신 이외의 삶의 요소에서도 의미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The Power of Meaning: Crafting a Life That Matters>의 저자 에밀리 에스파니 스미스는 다른 활동을 활발하게 해보라는 조언을 건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머릿속에서 스스로에 관한 생각을 멈추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 거에요.”

둘째, 자신에 대한 비판을 마주하면 친절함으로 대응하세요. 내면의 비평가가 “넌 게으르고 쓸모없어”라고 비난할 때 이렇게 맞서보는 겁니다. “난 최선을 다하고 있어.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니?”

브루어 박사는 자기자비를 장기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세 번째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셋째, 자기비판에 갇혔을 때와 자기비판을 내려놓았을 때, 각각 어떤 기분이 드는지 그 차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자 노력하세요.

그래야지만 보상에 의해 작동하는 뇌의 학습 체계를 가동할 수 있어요.

브루어 박사는 우리 뇌에는 안와전두피질이라는 부위가 있는데, 이 부위는 언제나 “더 크고 좋은 보상(the bigger better offer)”을 갈망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와전두피질은 X와 Y를 비교해서 Y가 덜 고통스럽거나 더 많은 기쁨을 주는 선택지일 경우 Y를 선택하도록 학습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실수하고 나서 자신을 호되게 나무라는 대신 심호흡하는 것이 훨씬 더 기분 좋은 대안이겠죠?

네프 박사는 “친구와 대화한다고 생각해 보면 쉬워요. 만약 여러분이 ‘나는 뚱뚱하고 게으르고 직장에서도 실수투성이야’라고 친구에게 말했을 때, 친구가 ‘맞아. 넌 완전 루저야. 그냥 포기해. 왜 살아?’라고 대답한다면 과연 의욕이 생길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스스로 친절해지는 것의 핵심은 바로 ‘친구를 대하듯 자기 자신을 대하라’입니다. 자기학대를 자기자비로 대체하려면 습관이 들 때까지 꾸준히 연습해야 하죠.

다음번에 또다시 스스로를 비난하며 죄책감의 굴레에 빠지려는 찰나, 같은 상황에 있는 친구를 나는 어떻게 구하려고 했을까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실천하세요. 처음엔 좀 어색하겠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 연습하고, 또 연습하세요.

그리고 혹시 다섯 번째 시도에서 잠시 삐끗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명심하세요.

여러분은 이미 네 번이나 시도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는 것을요.

(뉴욕타임스, Charlotte Lieberman)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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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국가가 우리에게 주는 것

On National Greatness



조국의 위대함은 개인에게 무엇을 해주는가? 뭔가 중요한 걸 해주기는 하는데 분석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지난 2세기 동안 누려왔던 위대한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정치적 위상의 변화가 개인의 심리에 야기하는 변화를 첨예하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내가 1896년부터 알아온 미국에서는 정반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그 변화가 완전히 성취되려면 멀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상반되는 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국가적 성공이 개인적 성취에 자극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테네인은 페르시아인을 쳐부수고 나서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고 아이스킬로스Aeschylos(BC525~BC456년,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를 낳았다. 영국인은 스페인 함대를 물리치고 나서 세익스피어를 낳았다. 프랑스 문학의 황금기는 루이 14세가 거둔 승리들과 연관이 있었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국가적 노력의 성공과 연관 짓지 않고서는 찾아보기 히든 일종의 개인적 생산성이 존재한다. 그것과 관계 없는 개인적 생산성도 있기는 하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은 자신들의 음악전 천재성을 자극하는 국가적 성공을 누린 바가 없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1632~1677년, 네덜란드 철학자로 유대인이었다)는 억압받는 민족과 패배의 과정을 밟고 있던 국가에 속했다. 개인적인 위대함과 사회적 원인에 의존하는 위대함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공적인 번영에 의지하는 성취의 가장 뚜렷한 예로 건축이 있다. 건축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금세기 건축 분야에서는 미국이 세계를 주도해왔다. 다른 나라들이 거부한 기회들을 미국의 건축가들은 따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건축이 보통 사람들에게 부응해왔다.


뉴요커는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해 말하지만 그 자부심이 언제나 뉴욕 시정 덕분에 생긴 것은 아니다. 건축가의 성공은 어느 정도는 모든 시민의 성공이기도 하다. 만약 뉴욕 시민이 외국인과 논쟁을 벌인다면 외국인에게는 내세울 만한 마천루가 없다는 점도 그에게 자신감을 주는 한 이유가 된다. 요듬 들어서는 이런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지만 당분간은 계속될 것이다. 


국가적 성공의 효과는 청년들과 관련 있는 분야에서 극대화된다. 개인적 차원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재는 능력으로, 이는 부분적으로는 타고나며 부분적으로는 교육의 결과로 얻게 된다. 둘째는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조건이다. 


어떤 멍청한 인간이 진정한 천재는 늘 신중하다는 관념을 세상에 뿌려놓았다. 사실은 정반대다. 어떤 청년이 신중하다면 설사 능력이 있더라도 부모와 동료들로부터 조롱받는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천재라고 자부해봐야 검증되기 전까지는 비웃음이나 사게 될 테니까.


젊은이들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은 누구나 위대한 업적을 남길 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주는 분위기, 따라서 그들의 자부심이 질투에 따른 조소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분위기에서 사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업과 직업 및 건축(이것은 사업인 동시에 예술이다) 분야에서의 성공이 청년이 품어야 할 자연스럽고 가치 있는 야망으로 인식되고 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음악으로 성공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주위 어른들의 그러한 기대는 젊은 시절의 야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국가적 성공의 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데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훈은 이것이다. 청년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기대하라. 그러면 당신은 그걸 얻게 될 것이다. 적게 기대하면 결코 기대하는 것 이상은 얻지 못할 것이다.(1932. 1. 20.)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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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 관한 글

글쎄 아직은 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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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at Sea


내 생애 두 번째로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첫번째는 35년 전이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비교해보면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


35년 전에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이는 없었으며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성공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게 가족이란 자유를 구속하는 외부의 권력으로 다가왔고 세상은 개인적인 모험의 대상일 뿐이었다. 전통이나 윗사람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나만의 생각을 하고 싶었고, 나만의 친구를 사귀고 싶었으며, 나만의 보금자리를 찾고 싶었다. 버팀목에 기대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느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가 넘치는 활력 덕분이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때 나는 바다에서 맞는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즐거운지 알게 됐고, 승무원들이 최대한 축제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도 흥겨웠다. 배는 좌우로 엄청나게 흔들렸는데,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납작한 선박용 트렁크들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객실 이쪽저쪽으로 미끄러졌다. 그 소음이 커질수록 내 웃음소리도 커졌다. 모든 게 끝내줬다.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누군가의 애정이, 차가운 세상의 한기를 몰아내 줄 사람의 온기가 필요해진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대개 그렇듯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즉 죽음이나 노화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세속적인 갖가지 불행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좀 더 형이상학적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살다 보면 겪게 마련인 중대한 재난들, 이를테면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평범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잔인성을 발견하는 일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드는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뒤로 35년 동안 이런 나쁜 일들을 경험하며, 인생에 대해 내가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태도마저 바뀌었다. 도덕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도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가의 기분으로 즐기지는 못할 거다. 나는 자식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고, 가족과 더불어 따뜻한 난롯가에 앉고 싶고, 역사의 연속성과 위대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고 싶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중년들이 크리스마스에 즐기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기쁨이다. 그 점에서는 철학자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평범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음울한 고독을 달래는 데 있어 그런 기쁨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즐거운 모험이었던 바다에서의 크리스마스가 지금은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대중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으면서 홀로 서기를 택한 사람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감미로운 즐거움이 모두 그러하듯 가정에서 얻는 기쁨도 의지를 약화시키고 용기를 훼손할 수 있다. 가정에서 따뜻하게 보내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수평선이 선사하는 해방감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이런 아름다움은 어리석고 사악한 인간들의 손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비틀거리는 중년의 이상주의에 힘을 불어넣는다.(1932. 1. 13.)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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