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지만, 눈에 띄게 보기 그럴 때도 있다.

비겁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길은 있을 텐데... 하면서도 나도 여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싶기도 하다.

'자격 없음'을 덮으려는 안쓰러운 몸부림 비슷한 모습이기는 할 텐데...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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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해서 좋은 점

The Advantage of Cowardice



프랑스 혁명 중에 공포 정치가 끝나고 나니, 머리를 계속 달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재빨리 소신을 갈아치운 약삭빠른 비겁자들 말고는 살아남은 정치가가 아무도 없었다. 그 결과 군부의 전성시대가 20년이나 이어졌다. 장군들을 통제할 만큼 용기 있는 정치가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이야 예외적인 시기로 치더라도, 조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비겁함이 용기보다 유리한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기업이나 학교, 정신병원 따위의 윗자리에 읹아 있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독자적 판단력을 가진 입바른 사람보다는 나긋나긋한 아첨군을 선호할 것이다. 정계에서는 당의 강령을 공언하고 지도자들에게 아첨할 필요가 있다. 해군에서는 해군 전략에 관한 케케묵은 견해를 공언할 필요가 있다. 육군에서는 만사에 대해 중세적 관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언론계에서는 임금 노예들이 백만장자들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만 한다. 그리고 교육계에서는 문맹자들의 편견을 존중하지 않으면 교수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에 따라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오랜 세월 비겁함을 수련해온 자들이 최고 자리에 오르고,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구빈원이나 감옥에서만 찾을 수 있게 됐다. 유감스럽지 않은가?


산업주의로 말미암아 현대 세계는 지금까지 세계사의 그 어떤 시기보다도 사회적 협력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당신이 어떤 사람과 협력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사람을 사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당신도 약탈품을 나눠 갖고 싶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동기는 인간이 서로 협력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자마다 중요성을 띠고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 동기는 출산을 좌우하고, 세 번째 동기는 정치를 좌우한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든 각종 사회 제도 차원에서든 일상적이고 평범한 통치 업무는 두려움에 기초해 있다. 두려움이 없는 자들의 집단을 통치할 수는 없다. 바이킹은 노르웨이 국왕이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자들로, 왕의 지배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기에 노르웨이를 떠났다. 수세기에 걸친 모험을 한 다음 그들은 동토의 아이슬란드 계곡에 사는 농민이 되었다. 


대조적인 경우로 저 위대한 말보로 공작Duke of Marlborough(1650~1722년, 영국/네델란드 연합군 총사령관을 지낸 영국 군인으로 본명은 존 처칠)을 살펴보자. 그는 자기 누이를 제임스 2세의 정부로 만들어 경력의 첫 단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가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 것은 자기 아내와 앤 여왕의 열렬한 우정 덕분이었다. 그는 프랑스인들과 싸울 때마다 그들을 격퇴했으나 프랑스 국왕이 휴전의 명분만 제공한다면 언제든 자제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이름과 막대한 재산을 남겼으며, 오늘날까지 그의 후손들은 애국자의 귀감으로 통하고 있다.


이름뿐인 민주주의의 도래에도 성공의 기술은 그의 시대 이후로 거의 달라진 게 없다. 오늘날 당신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과거에도 그랬듯이 대담하게 굴거나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소심하게 굴며 환심을 사야만 한다. 


따라서 은행 지점장들에게 존중받고, 친구와 이웃에게 존경받고, 진정한 시민의 모범으로 널리 인정받다가 신성한 향기 속에서 죽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충고는 이런 것이다. 당신의 견해를 표명하지 말고 당신 상관의 견해를 표명하라. 당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애쓰지 말고 백만장자들의 지원을 받는 단체가 정해놓은 목표를 추구하라. 개인적인 우정을 쌓을 때는 가능한 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가려서 사귀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사귀어라.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공동체의 최고 인물들 전원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게 될 것이다. 


나무랄 데 없는 충고이긴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이 충고를 따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1931.11.2.)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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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글이지 싶다. 기본소득의 근거를 찾는 글인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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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향한 희망, 돈에 의한 공포

Hope and Fear



사람의 삶에는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요소들이 있는가 하면, 행운이든 불행이든 변하기 쉬운 요소들도 있다. 변하지 않는 요소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변하는 것들은 희망과 공포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한 사람의 감정적인 삶의 특징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의 감정이란 확실한 쪽보다는 의심스러운 쪽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소득이 고정되어 있다면 돈 생각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의 사회적 지위가 불변이라면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속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기 조국의 위대함이 확고하다고 믿는다면 맹렬한 국수주의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가치 집합을 살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구제 불능일 정도로 어리석다고 생각한다면 지적 야망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미적 감각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예술적 탁월함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이 구제 불능일 정도로 평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명성을 바라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 바깥의) 현대 세계에서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가 평균적으로 과거 어느 시절보다 가변적이다. 누군가는 투기로 1년에 100만 달러를 벌었다가 다음 해에 그 돈 전부를 날릴 수도 있다. 그가 100만 달러를 소유하고 있을 때는 훌륭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지만 돈을 날리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서구 세계 전역에 걸쳐 대다수 사람들이 2년 전보다 지금 훨씬 더 가난하다. 반대로 경기가 좋은 시절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부유해진다.


이런 불확실성의 결과로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돈에 집착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집착이 소수 집단에 국한됐지만 지금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 됐다. 경제적 불확실성의 당연한 결과로서 사람은 이제 이 쟁탈전에서 거둔 성공에 비례하여 존경받게 됐다. 그 길에서 비켜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존경받지도 못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은 많은 돈보다 다른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소심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는 사람들 대부분이, 금전적 성공이라는 이상을 젊은이들에게 제시한다. 젊은이들은 영화에서 사치에 관한 묘사들을 접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갑부들이 대리석 홀이 있는 집에서 눈부신 드레스 차림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기 마련이다. 주인공은 대개 끝에 가서 이 성공한 계층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심지어 예술가들조차도 그가 버는 돈의 양에 따라 평가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돈으로 특정할 수 없는 가치는 무시당하게 됐다. 이 투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하는 모든 종류의 감수성을 실패의 증후로 여기는 것이다. 


100년 전에는 부자들이 교육과 문화 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렇지 못하면 존경도 받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교육과 문화가 가난뱅이라고 무시당하는 교사와 교수들에 국한되는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우리 사회 체제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서는 이러한 문명의 손실이 개선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일단은 이 손실을 실감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손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세계가 전적으로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근거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재정적인 지위를 잃는 일이 별로 없고 그 상태를 쉽게 개선할 수도 없는 세상에서는 돈보다는 다른 어떤 것의 가치가 더 무게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는 금전욕을 줄이고자 한다면, 모두가 필요한 만큼 가지되 누구도 과하게 가지지는 않는 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첫걸음을 떼야 할 것이다.(1931.10.7.)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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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는 참 좋다.

근데 좀 길긴 하더라.ㅎㅎㅎ

그래도 좋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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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한 사랑

                                  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갑작스러운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으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 속에서 주고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오,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야.

어쩌면 삼 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손잡이가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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