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여인을 통해서 알게 된 시인.

뭔지 모를 정서가 통하는 느낌을 받은 시인. 

가끔은 느끼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ㅎㅎ

나로 하여금 뭐든 쓰고 싶게 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올해는 자주 뭘 쓰려고 한다.

시든 산문이든 그도 아닌 끄적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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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박준 시인, 그냥 가지 말고 잘 가

<월간 채널예스> 2019년 1월호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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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한낮, 머플러를 두른 박준 시인을 본 적이 있다. 외투도 입지 않는 계절에 어찌 머플러를 했냐고 물으니, 생활인에서 시인 모드로 전환하는 일종의 장치라고 했다. 오래전 그는 직장에서 퇴근하는 동시에 모자를 쓰곤 했다. 1주일에 3일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학교에서 강연 요청이 오면 먼 지방이라도 꼭 가려고 애쓴다. 주기적으로 휴대폰을 꺼놓고 지내는 박준. 때문에 사과할 일이 종종 생기지만 시를 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012년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후, 딱 6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가 나왔다. 두 시집 모두 12월에 출간, 똑같이 16글자 제목이다. 여름보다 겨울에 시가 더 잘 쓰인다는 박준 시인은 말했다. “장마를 함께 볼 수 있겠다는 말은 정말 강렬한 고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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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완성되면 그것이 빚일까, 빛일까


시집 제목을 보고는 ‘아, 박준 시집이네’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어제 시집을 받았어요. 시간이 있었는데도 잘 안 봐지더라고요.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상자를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뜬금없는 폭탄일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온 선물일지 몰라서 몇 권을 받아 놓고는 근처에도 안 갔어요.

 

계약한 지 한참 후에 나온 시집이죠?

 

첫 시집이 나오기 전에 계약했으니까, 2012년일 거예요.

 

6년간 쓴 시라고 볼 수 있겠네요.

 

가장 오래전에 쓴 시가 첫 시집이 나오기 한 달 전에 쓴 시니까요. 이번 시집도 퇴고를 오래 했어요. 시행을 조금씩 바꿔도 보고요. 돌이 계속 나오는 밭을 가는 느낌이랄까. ‘이러다 언제 끝나지? 아예 밭이 사라지는 거 아니야?’ 싶었어요.

 

시를 읽기 전 시인의 말을 보았어요. “어떤 빚은 빛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두 문장(행)의 글자 수가 같아서 그런지 제겐 시로 읽혔어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주절주절 길게 쓴 버전이 있고, 이것보다 더 짧은 버전도 있었는데요. 너무 멋을 부리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성의가 없어도 안 될 것 같아서요. 인쇄 전까지 다시 쓰고 다시 썼어요.

 

평범한 문장 같지만 계속 남더라고요. “빚과 빛.”

 

특정한 시기에 나를 괴롭히는 어떤 문제가 있잖아요. 그 문제가 미래에도 여전히 나를 괴롭힐 수도 있지만, 그 시기를 잘 통과하면 어느 순간 빛이 되는 것 같아요. 쉽게 이야기하면, 살아가다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될 때가 있고, 언젠가 그 빚에 보답하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빚을 진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하게 시라는 것도 뭔가 어두운 것에서 출발할 텐데 시로 완성되면 그것이 빚일까, 빛일까를 생각해보면, 둘 다인 것 같아요.

 

‘박준 시인의 시집이 이제 두 번째야?’라고 놀라는 독자들이 있더라고요.

 

더 일찍 낼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을 더 갖고 싶었어요. 첫 시집도 1년을 묵히고 나왔었어요.

 

왜죠?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발문을 허수경 선배가 써주셨는데요. 수경 선배가 말했어요. “내가 네 시에 개입할 여지를 줘도 되냐?” 제가 “당연하다”고 말했더니 “그러면 1년을 더 고치고 쓰라”고 하셨어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가 잘 안 갔거든요. 크게 반발하지 않았지만 수긍 하면서도 잘 몰랐어요. 왜 중국 영화를 보면 도를 닦는 스승이 제자에게 계속 물만 떠오라고 하잖아요. 끝이 날 것 같으면 1년 더 하라고 하고요. 아마 시간을 보내며 내공을 쌓으라는 말이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제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뜨거웠던 것 같아요. 과도한 기대, 열망 같은 걸 보신 게 아닐까요.

 

이번 시집은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발문을 썼어요.

 

좋아하는 작가에게 내 글에 대한 글을 받고 싶었어요. 첫 시집도 그렇고 이번 시집에서도 제 욕심을 이뤘어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만약 1년 후에나 글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어도 기다리려고 했어요. 제가 1년 동안 뭘 할지도 궁금했고요.

 

“조촐하게 시작된 박준의 시 쓰기가 많은 독자를 얻어나가는 과정을 얼마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거기에 속한다.”(95쪽) 발문의 첫문장입니다. 두 번째 시집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를 느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엄격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첫 시집이 책으로써 잘됐잖아요. 너무 잘돼서 생기는 불안 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첫 책보다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은 아니었어요. 두 번째 시집이 문학으로 더 잘돼야 한다, 그런 마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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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에 읽는 시

 

4부로 나뉜 시들은 계절을 입고 있어요. 1부는 봄, 2부는 여름, 3부는 가을, 4부는 겨울. 「가을의 말」을 읽고 「겨울의 말」을 읽으니 한 계절이 지난 느낌이 들었어요.

 

시의 순서를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이 많았는데요. 계절의 자연스러운 힘을 빌리고 싶었어요. 우리가 가장 흔하게 하는 인사가 “날씨가 추워졌어요” “내일 비 온대요” 같은 말이잖아요. 굉장히 상투성 짙은 이야기지만 저는 그 말이 좋아요. 상투성 안에 다정함을 발견한다고 할까요? 어쩌면 날씨가 바뀌는 게 세상에서 가장 큰일이 아닐까 싶어요. 한 사람의 삶 속에 기쁨의 사건, 슬픔의 사건은 극히 드물잖아요. 대개는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지나가는데 그때의 평범은 마치 날씨 같아요. 굉장히 작은 일이지만 그 작은 일이 모여서 삶을 이루니까요. 당연한 일이지만 낯설게 받아들이는 데서 시가 시작할 테고요.

 

이번 시집에도 박준 시인이 좋아하는 단어가 등장해요. 곁, 볕, 선잠 같은.

 

어떤 생각을 표현할 때, 이 생각이 가장 덜 훼손되고 나오는 말을 쓰고 싶은 제 마음 때문일 거예요. 그 관념이 최소한 덜 상한 거니까 한 편의 시에서 보면 성공일 수 있는데요. 너무 익숙한 방식의 언어만 사용하는 게 아닐까 고민도 돼요. 다음 시집이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을 되풀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봤자 멀리는 못 갈 것 같기도 하고요.

 

뭐? 바로 간다고? 밥 안
먹고?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받아. 나중에
네가 갚으면 되지. 괜히
잃어버리지 말고 지금
주머니에 넣어. 그럼 가.
멀리 안 나간다. 가. 그냥
가지 말고 잘 가.

― 「사월의 잠」 부분

 

「사월의 잠」은 어디에서 탄생한 시일까 궁금했어요.

 

2016년에 「416 단원고 약전」을 쓰는 중에 꿈을 꿨어요. 저는 너무 강력한 일은 시로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못 써’가 아니라 쓰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과 써야 한다는 마음이 충돌한 상태였어요. 어렵게 썼지만 ‘잘 갔으면 좋겠다’는 말에서 출발한 시예요.

 

첫 시집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시는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였어요. 시집에 사인할 때 적어준 시구이기도 하고요. 이번 시집에는 어떤 시구를 적어주실까요?

 

「숲」이라는 시의 마지막 문장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와 「가을의 말」에 “넘어짐과 일어섬 그마저도 지나서 한 이틀 후에 오는 반가운 것들”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겨울을 좋아하나요? 아무래도 여름보다는 겨울에 시를 많이 쓸 것 같아요.

 

좋아해요. 아직 아이 같은 면이 있는지, 폭설이 내려서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이면 좋겠다는 천진난만한 바람이 있어요. 여름엔 시를 잘 못 써요. 예전에 박인환 시인이 김수영 시인에게 “빨리 겨울이 오면 좋겠어. 코트 입고 싶어서”라고 말한 일화가 있는데요. 저도 겨울이 좋아요. 사람을 좀 소극적으로, 내향적으로 만드는 그런 계절인 것 같아요.


머플러를 매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계절이잖아요. 겨울엔 시인 모드로 더 길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나요?

 

그런 마음도 있고 그렇지 않은 마음도 있어요. 사실 시인의 시간을 가장 방해하는 건 화예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편은 아니지만, 화가 나는 경우가 많죠. 불길처럼 화가 일면 마음 한구석에 있던 시가 타버려요. 어떤 화는 3일이 지나야 풀리고 또 어떤 화는 5일도 걸리고. 시인 모드를 가장 방해하는 건 화인 것 같아요.

 

시가 잘 써지는 순간이 있다면요.

 

스스로를 좋아하는 시간에 시를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싫어하는 순간에는 시를 못 써요. 비단 시뿐이 아닐 거예요. 내가 싫은 순간에는 무엇도 하기 어렵지 않나요?

 

말수가 적을 것 같은 인상인데, 말재주가 좋아서 볼 때마다 놀라요.

 

실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걸 두려워해요. 소박한 강연도 있지만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말해야 할 때도 있는데요.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떨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강연장에 들어가기 전에 우울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말이 느려지고 정신을 차리게 돼요. 사람이 떨리면 말이 빨라지잖아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우울한 생각을 하는데, 좋은 방법은 아니죠.

 

생활인으로 요즘 자주하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제 삶의 위기이기도 한데요. 층간 소음이에요. 신경 안 써야지 하는데도 그렇게 잘 안 되고 있어요. 윗집에 보내려고 편지를 정말 여러 버전으로 많이 썼는데요. 내가 가진 모든 시적인 능력을 동원해서 감동적인 편지를 써서 소음을 막아보고 싶었는데 실패했어요. 한 달 전에 편지와 동화책을 보냈는데 답장이 왔지만 소음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제겐 너무 힘든 일이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요.

 

여전히 독주를 즐기나요?

 

칭찬할 일이 생기면 독주를 마셔요. 뭘 쓰고 나서 마실 때가 많은데, 어쩌면 독주를 마시기 위해 내가 글을 쓰나 싶기도 해요. 저는 사진을 찍으면 꼭 충무로에 가서 인화해요. 충무로가 저렴한 것도, 인화를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고양시에서 충무로까지 가서 인화를 하고 도가니탕을 먹어요. 내가 도가니탕을 먹으려고 충무로에 가나 싶은데요. 뭔가 내 삶 안에서 동일한 일을 하면서 일상이 너무 멀리 굴러가지 않게 칸을 채워놓는 것 같아요.

 

예전에 한 선배가 “네 시는 공부한 티를 안 내서 좋아”라고 했다고요. 저는 엄청난 칭찬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사자는 달리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선배한테 제가 농담으로 이랬어요.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건데요.”(웃음) 제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어떤 하나에 특별히 경도되는 경우가 잘 없어요. 좋은 책을 읽으면 ‘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책을 덮으면 다른 책이 또 좋아요. 대척하는 어떤 사유나 사조에 꽂혀서 ‘아, 이거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요. 하나에 크게 고취되지 않으니까 자유로운 게 아닐까요? 이상한 염세가 있는 걸지도 몰라요. 다만 개인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 같아요. 우리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입출력이 비슷해야 균형을 잡을 수 있잖아요. 입력되는 게 많은데 출력하는 매체가 없으면 답답한 것처럼, 자꾸 출력만 하면 한계가 찾아올 수밖에 없죠.

 

“시를 쓰는 일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박준 시인이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의 정체성과 사고방식이 정해진 상태에서 확 변하는 사람을 볼 때 대단하게 느껴요. 완전히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사람, 익숙한 것에서 잘 벗어나는 사람을 보면, 그들은 같은 시간을 살아도 한 번의 삶을 더 사는 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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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지 못하면 시를 잘 쓸 수 없어요

 

시집은 6년 만에 11만 부, 산문집은 6개월 만에 15만 부가 팔렸어요. 어떻게 체감하나요?

 

독자들이 시를 어렵다고 느끼는 건 실제로 시가 산문보다 어렵기 때문이에요. 단순하게 난이도로 따질 수는 없지만, 시는 어떤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시가 갖고 있는 미학이 독자들의 진입 장벽을 높게 만든 거라고 생각해요. 시보다 산문을 읽는 독자의 범위가 넓으니까요. 어떤 책이 더 팔리고 안 팔렸느냐는 개의치 않아요. 다만 아쉬운 건 예전엔 소설을 읽든 산문을 읽든 그냥 독자였는데, 지금은 시 독자, 산문 독자로 구획을 만드는 것 같아서요. 그 경계를 허물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시적인 요소가 들어간 산문을 산문집에 넣었던 거예요. 형식적 경계가 아닌 관습적 경계를 허물고 싶었어요.

 

요즘 제가 꽂힌 단어가 있어요. 최은영 소설가의  『몫』 을 읽고 나서 계속 ‘몫’이라는 단어가 맴돌아요. 박준 시인이 생각하는 ‘박준 시인의 몫’을 묻고 싶어요.

 

일단 작게 이야기하면, 제가 잘 살지 못하면 시를 잘 쓸 수 없어요. 여기서 잘 산다는 건 부유(富裕)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는 일을 잘하는 것이에요. 잘 살고 있을 때 시를 쓸 수 있으니까요. 똑바로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와 문학을 생각하면 시다운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산문을 쓸 때는 강박이 없지만, 시는 정말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또 하나는 시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공공 도서관이든 학교든 가서 이런 시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저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이 시를 읽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창한 마음은 아니지만요. 시가 필요할 때, 독자가 손을 뻗었을 때 시다운 상태로 시가 놓여있길 바라요.

 

산문집을 내고 인터뷰했을 때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했어요. 이번 시집은 특별히 어떤 독자에게 가 닿으면 좋을까요?

 

간혹 중고등학생을 만날 때 “내 돈으로 처음 산 책”이라는 말을 듣는데요. 이것도 욕심이겠지만 교과 과정에서 읽은 시가 아닌 시집을 처음 읽어보는 사람이 제 책을 읽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시집을 선물 받는 사람은 이미 갖고 있는 책을 선물 받아도 “나 이 책 있어”라고 말하지 않아요.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예요. 친구에게 선물한다고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독자를 만날 때 참 고마워요.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는 그냥 선물 같은 시집이면 좋겠어요. 기프트콘처럼 선물할 수 있는 책. 저로서는 정말 강력한 고백이라고 생각하고 쓴 시라서요. 어떤 뭉근한 선물이면 좋겠어요.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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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뒤적거리다 그냥 이 시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냥.

그냥 그냥일까?

글쎄. 

꼭 그렇지만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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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때늦게 싹이 튼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몰라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


Posted by 익은수박
,

정말 생각해 볼 주제.

인간에게 진정 '자유의지'가 있는가? 그간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지만 지금 그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 소비할 자유? 우리도 멋지고 세련되어 보이는 소비자가 될 자유? 그건 아니었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뭐 그런 비슷한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이 더 눈에 들어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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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노아 하라리: 자유라는 신화


학자는 오직 진실에만 충실해야 할까요? 설사 그 진실이 사회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아니면 사회 질서가 유지되도록 거짓말을 해야 할까요? 나는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에서 자유주의(liberalism)와 관련해 바로 이런 고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한편으로 나는 자유주의에 오류가 있고 이 이론이 인간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21세기를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자유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는 여전히 오늘날 세계 질서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특히 종교와 민족 근본주의라는, 훨씬 더 위험하고 해로운 오래된 이념의 공격을 자유주의는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선동가와 독재자들이 자유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내 의도와 무관하게 내 주장을 사용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고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를 감안해 자신을 검열해야 할까요? 자신의 영역 밖에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편협함의 상징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퍼질 때, 우리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냉철한 사고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의 힘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이 자유주의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검열 보다는 자유로운 토론을 택했습니다. 자유주의는 다른 이념보다 더 유연하고 덜 교조적이라는 매우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다른 어떤 이념보다도 비판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이 그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허용하는 유일한 이념입니다. 자유주의는 이미 세 번의 큰 위기, 곧 1차 세계대전, 1930년대 파시스트들의 도전, 그리고 1950년에서 70년대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을 겪었습니다. 지금 자유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1918년, 1938년, 1968년의 위기가 얼마나 컸는지 생각해보면 됩니다.

1968년, 자유민주주의는 거의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내부에서 폭동, 암살, 테러 공격, 그리고 첨예한 이념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 날 워싱턴에서 일어난 폭동이나 1968년 5월의 파리, 그리고 1968년 8월 시카고에서 있었던 민주당 전당대회에 있었다면 자유민주주의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워싱턴, 파리, 시카고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조용했고,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20년 뒤 붕괴한 것은 소비에트 사회주의였습니다. 1960년대의 혼란을 겪으며 자유민주주의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위기 또한 자유주의가 이겨낼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주의가 겪는 위기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혹은 마치 비가 내린 뒤 여기 저기에서 우는 개구리처럼 전세계 곳곳에 등장한 선동가나 독재자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위기는 바로 실험실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인간이 가진 자유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쥐나 원숭이와 달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집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의 감정이나 선택에 궁극적인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부여합니다. 자유주의는 투표권자가 최선의 결과를 알고 있으며, 고객은 언제나 옳고,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

하지만 “자유의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기독교 신학이 만든 신화일 뿐입니다. 신학자들은 어떻게 신이 죄인을 벌하고, 성자에게 상을 줄 권리가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발명했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신이 우리에게 벌을 주거나 상을 줄 이유가 없을 겁니다. 신학자들은 바로 우리의 선택이 어떤 물리적, 생물학적 속박과 무관한 우리 영혼의 자유에 의한 것이며 바로 이 때문에 신이 우리를 벌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동물들에 대해 신학자의 설명과 전혀 다른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인간은 분명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의지는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욕망을 가질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내성적일지 외향적일지, 순할지 까칠할지, 동성애자일지 이성애자일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선택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생물학적, 사회적, 개인적 조건에 영향을 받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정할 수 있고, 누구와 결혼할지,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을지 선택할 수 있지만, 이러한 선택은 자신의 유전자, 생화학적 조건, 성별, 가족력, 자신이 속한 문화권 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자신이 어떤 유전자를 가질지, 어떤 가족의 구성원으로 태어날지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며,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당신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한 번 기다려봅시다. 그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무엇을 떠올릴지 당신은 선택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신이 무엇을 생각할지에 관해 당신이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생각할지, 무엇을 느낄지, 무엇을 원할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될 겁니다.

이 “자유의지”는 비록 항상 신화였지만, 적어도 지난 세기 이 신화는 인류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덕분에 사람들은 종교재판관 혹은 신으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믿어졌던 국왕, 또는 KGB나 KKK와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 신화를 유지하는 데는 큰 비용도 들지 않았습니다. 1776년이나 1945년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선택이 생화학, 뇌과학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자유의지”의 결과라 믿는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은 이제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정부와 기업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의식을 해킹하는 데 성공하게 될 경우, 가장 조종하기 쉬운 상대는 바로 이 자유의지를 믿는 이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대로 해킹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바로 생물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강력한 컴퓨터 성능입니다. 종교재판관이나 KGB는 생물학 지식도, 컴퓨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기업과 정부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게 될 것이며, 일단 그들이 인간을 해킹하는 데 성공하게 될 경우 당신의 선택만이 아니라 당신의 감정 또한 그들의 조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업과 정부가 당신을 완벽하게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지 당신 자신보다만 당신을 더 잘 알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그렇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기존의 자유주의 이념을 잘 알고 있다면, 당신은 이러한 주장을 쉽게 무시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유전자나 뉴런, 알고리듬보다도 훨씬 더 깊숙한 곳에 진정한 내가 있으며 따라서 누구도 인간의 정신을 해킹할 수 없습니다. 내 선택은 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고, 누구도 내 선택을 예측하거나 조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과학적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믿음을 지닌 당신은 더 쉽게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이미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눈에 띄는 기사 제목을 보게 됩니다. “이민자들이 여성을 강간했다.” 당신은 이 기사를 클릭합니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이웃은 다른 기사 제목을 보게 됩니다. “트럼프는 이란에 핵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는 이 기사를 클릭합니다. 이 두 기사는 모두 가짜 뉴스이며 러시아의 트롤, 혹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광고 수익을 올리하는 어느 인터넷 언론이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당신과 당신의 이웃은 그 기사를 자유의지를 따라 클릭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두 사람은 모두 정신을 해킹당한 것입니다.

물론 선전과 조작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선전이 무차별 폭격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정밀한 유도탄처럼 행해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히틀러가 라디오를 통해 연설할 때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출 수 없었고, 따라서 모두가 동의할 최소한의 공통 분모만을 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선전과 조작이 가능해 졌습니다. 알고리듬은 당신이 이민자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이웃이 트럼프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며,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기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영리한 사람들이 바로 이 작업, 사람들의 뇌를 해킹해 기사를 클릭하고 광고를 보게 만들며, 물건을 사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물건만이 아니라 정치인과 이념 또한 팔고 있습니다.

이는 시작일 뿐입니다. 아직 해커들이 분석하는 신호와 행동은 바깥 세계의 정보로 당신이 무엇을 사고, 어디를 가고, 어떤 단어를 검색하는지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몇 년 이내에 생체인식 센서는 해커들이 당신의 내적 세계에 접속할 수 있게 해줄 것이며, 당신의 마음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주의라는 판타지가 애정해 마지 않는, 마음이라는 은유를 가진 심장은 그저 당신의 뇌 활동에 피를 공급하는 근육 펌프로 격하될 것입니다. 해커들은 당신의 심박과 신용카드 사용을 연관지을 것이고, 혈압과 구글 검색 내용의 관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종교재판관이나 KGB가 당신의 기분과 감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 생체인식 팔찌를 가질 수 있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자유주의는 억압적인 정부와 편협한 종교로부터 독립적인 개인을 지킬 수 있는 훌륭한 논리와 제도를 만들어냈지만, 개인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곧 “개인”과 “자유” 두 개념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근대 계몽 시대의 유산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유산이기도 한 이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순진한 개념에서 벗어나, 인간은 해킹될 수 있으며 곧 타의에 의해 조종될 수 있는 동물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는 새로운 조언이 아닙니다. 고대의 철학자와 성자들은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시대나 부처, 공자의 시대에는 당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자신을 충분히 잘 알지 못해도, 여전히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정부와 기업은 당신을 해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 자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게 된다면, 이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곧 그것이 제품이든 정치인이든 당신에게 팔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의 약점을 아는 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약점은 그들에게 당신을 해킹할 수 있는 지름길을 안내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해킹은 코드 상의 오류를 이용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해킹은 인간이 가진 공포, 혐오, 편견, 그리고 욕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해커들은 공포나 혐오를 그저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되면 그 감정을 적절히 자극해 무척 쉽게 이를 더 큰 공포로 키워낼 수 있습니다.

순전한 노력으로 자기자신을 잘 알기 어렵다면, 해커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기술을 이용해 자신을 이해하고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에서 백신 프로그램이 바이러스를 막아내듯 우리에게도 뇌를 위한 백신 프로그램이 필요해질 것입니다. 당신의 인공지능 비서는 당신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 그것이 유쾌한 고양이 비디오든, 짜증나는 트럼프 이야기든간에 – 파악해 당신이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막아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정말 조종 가능한 동물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선택과 의견이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면, 정치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난 300년 동안 자유주의자들은 가능한한 많은 개인이 가능한한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좇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을 정치적인 이상으로 삼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꿈을 이루게 될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순간도 동시에 눈앞에 와 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꿈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준 바로 그 기술에 의해 정부와 기업은 사람들의 꿈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 꿈이 진정한 나 자신의 꿈인지를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이러한 발견이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그 욕망을 실현할 자유를 추구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간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이 생각과 감정, 욕망이 진정한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과라 믿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주의깊게 지켜보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왜 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라고 묻게 된다면 어떨까요?

일단 자신의 생각과 욕망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우리는 이에 덜 얽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 보고 자신의 욕망이 세상과 무관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개체와 다른 존재로 생각하게 됩니다. 곧, 자신은 독립된 존재이며 따라서 나머지 세상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될 뿐더러, 자신의 변덕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게 되어, 자신이 이 우주에서 가능한 모든 욕망 중에 바로 그 욕망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다른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조종하고 바꾸도록 노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신의 변덕에 기반해 전쟁을 일으키고, 숲을 태웠으며, 생태계를 파괴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욕망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그 욕망을 덜 추구하게 될 것이며 또한 나머지 세상과 더 연결된 느낌을 가질 수 있게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자유의지” 개념을 버리게 될 경우 감정이 없는 존재가 될 것이며, 막다른 골목에 갇혀 멸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 개념에 대한 포기는 두 가지 반대되는 효과를 불러옵니다. 첫째, 우리를 나머지 세상과 더 강력하게 연결하며, 이웃과 주변 환경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이와 대화할 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며, 이때 모든 사람은 자신이 말할 기회만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옆으로 제쳐둘 때 우리는 갑자기 다른 이의 말이 귀에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둘째, “자유의지” 신화를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심오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과 욕망에 매달리는 사람은 자신을 더 잘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아니야, 그저 뇌의 생화학적 변화일 뿐이야!”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됩니다. 이는 모든 인류 각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가장 힘들고 흥미로운 여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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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한 의심이나 인간 본성에의 탐험은 아주 오래된 주제입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이런 주제를 두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이제 모든 것을 바꾸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철학의 문제였던 것이, 이제 공학과 정치에서 다뤄야 할 실용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하던대로 이 문제를 천천히 생각하는 동안 – 그들은 한 주제로 어떤 결론 없이도 3천 년을 논쟁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 공학자들은 조바심을 내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급한 이들입니다.

정부와 기업이 인간을 해킹할 수 있게 된 이 시대에 자유민주주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유권자의 선택이 최선이다” 혹은 “고객은 언제나 옳다”와 같은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이 해킹될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 당신의 지지가 정부의 조종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 당신의 편도(amygdala)가 푸틴을 위해 일하고 있고 당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는 알고리듬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을 당신이 깨닫게 될 때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흥미로운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대개 이런 질문을 여전히 피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환상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탐험하기보다 더 오래된 환상이 제공하는 피난처를 찾아 숨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생체공학의 도전에 응전하기보다 자유주의보다도 더 과학적 현실과 거리가 먼 종교적, 민족적 환상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적 모델을 찾는 대신 20세기 혹은 더 오래된 사상의 찌꺼기를 다시 모으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억 속 환상에 젖어있는 나라에서는 성경의 진실성이나 민족의 신성함(특히 당신이 나처럼 이스라엘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면)에 대한 논쟁을 보게 됩니다. 학자로써 이는 정말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은 볼테르의 시대에나 의미 있는 학문이었고, 민족주의는 20세기 최신 사조였습니다. 하지만 2018년인 지금 이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심각한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인공지능과 셍체공학은 진화 과정 자체를 바꾸고 있으며, 이 기술을 어떻게 써야 할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몇십 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두 가지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합니다. 먼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더 인간적인 정부를 가진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일 뿐 아니라, 또한 인류의 미래에 대해 가장 제한을 덜 가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전통적인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21세기의 과학적 진실 및 기술의 진보와 일관성을 지니는 새로운 정치적 시스템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강력한 신인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여신 테티스를 두고 싸웠습니다. 하지만 테티스가 그의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내려지자 모두 테티스를 포기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세상을 지배하고 싶었기에 그들과 경쟁하게 될 더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테티스는 인간인 펠레우스 왕과 짝지어졌고, 아킬레스를 낳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손이 더 훌륭한 존재가 되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 신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줍니다. 권력을 영원히 가지려는 지배자는 자신을 밀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탄생을, 설사 그 아이디어가 자신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라 해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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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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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고 싶으세요? 다음 13가지 원칙을 잊지 마세요.

2018년 10월 18일 

인생에서 하루는 얼마나 중요할까요? 당신이 오늘 보낸 하루는 당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까요?

시인 헤라클리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는 매일과 같다.” 이는 하루의 길이는 늘 같고, 같은 만큼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같은 해가 뜨고 진다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철학자들의 말처럼 단 하루를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인생 또한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오브리 마커스는 책의 제목으로 이를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하루를 지배하는 이가 삶을 지배한다(Own the day, own your life)”.

아래 13가지 원칙은 하루를 제대로 살기 위한 원칙들입니다. 이 중 어떤 것은 쉽고 어떤 것은 어렵지만, 각각은 모두 중요한 원칙들입니다.

1. 매일 아침 그날을 준비할 것 –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 할 일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준비하세요. 되는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계획을 가지세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매일 아침 그날의 일기를 쓰며 그가 맞게될 하루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그가 만날 사람들을, 그가 겪게될지 모르는 어려움을 생각했고 어떻게 그 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아침은 일기를 쓰기에 최고의 시간이며 이를 통해 성공적인 하루를 만들 수 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할수록, 오히려 힘든 일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2. 산책할 것 – 수세기 동안 위인들은 하루에 수 킬로미터를, 지루하거나 아니면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상쾌한 기분을 얻기 위해 걸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바로 산책이 마음을 맑게 하고 일의 효율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노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모든 깨달음은 산책 중에 얻었다.” 산책은 운동에도 좋지만, 심리적으로 더 큰 이득을 줍니다. 자연을 느껴보세요. 당신을 둘러싼 세상을 느껴보세요. 휴식을 취하세요. 혹시 너무 바쁘다면, 야외에서 걸으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습니다. 주차장에서 걸어다니면서 거래처와 전화를 해보세요. 일단 밖으로 나가 움직이세요.

3. 몰입할 것 – 우리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깊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잠깐 주의를 기울이다가 다시 다른 이야기로 생각을 넘깁니다. 하루를 이렇게 보내서는 안됩니다. 칼 뉴포트가 “딥 웍(deep work)”이라 부른 일에 하루 한 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합니다. 글을 쓰건, 생각이나 구상, 창조적인 일을 하건 의지를 가지고 집중해야만 실제로 일이 진행됩니다. 진정한 작업은 몰입을 필요로 합니다. 하루 중 얼마나 몰입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는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웹브라우저를 다 닫으세요. (물론 이 글을 읽고 나서 말이지요.) 몰입을 위한 시간을 먼저 만들지 않으면, 절대 이를 이룰 수 없습니다.

4. 친절할 것 – 보이스카우트에는 하루 한 가지 착한 일을 하라는 신조가 있습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친절의 기회가 있다.” 무례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봅시다. 당신의 경쟁자에게도 친절을 베풀어 봅시다. 물론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래야 겠지요. 직장 동료는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좋은 대상입니다. 배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편 배달부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당신은 친절을 베풀 때마다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된 느낌을 가지게 될 겁니다. 당신의 하루는 더 가치있게 바뀝니다.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됩니다.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것은 성자나 성직자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니 기회를 놓쳤다고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하루 하나의 친절을 베풀어 보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세요.

5. 읽고, 읽고, 또 읽을 것 – 매일 책을 읽으세요. 단 몇 페이지라도 좋습니다.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모든 책은 그 책을 만들어낸 이와 그가 속한 문화가 축적된 결과물입니다. 이를 무시할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시간이 필요합니다. 밥을 먹는 동안, 잠 들기 전, 지하철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도 이북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몇 페이지라도 읽게 되면 곧 책 한 권을 읽게 되고, 어느새 항상 읽을 거리를 찾게 됩니다. 전기, 숨은 명작들, 인생을 바꿔주는 책들, 철학 서적, 고전, 자기계발 서적, 전쟁 관련 서적, 소설 등 수많은 가치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경영이나 마케팅 책도 좋습니다. 이런 책들은 당신의 시야를 넓게 만들며,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줄 뿐 아니라 영감을 주고 수백년 동안 축적된 지혜와 지식을 제공합니다.

6.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것 – 매일 단 몇 분이라도 모든 전자기기에서 벗어난 시간을 만드세요. 나는 가능한한 매일 수영을 합니다. 이는 운동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시간이 온전히 나만를 위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다른 소음을 신경쓸 필요가 없이 마음의 평안을 찾으면 됩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하루 중에 얼마나 자주, 잠깐이라도 세상과 단절되나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시간을 자주 가지지 못할겁니다. 매일 이를 위한 시간을 정해놓으세요. 당신의 하루는 더 나아지는 반면, 바깥 세상은 당신이 사라진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겁니다.

7. 땀흘려 운동할 것 – 이는 너무 흔한 충고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운동을 ‘몸을 건강하게 만들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좋은 단 하나의 마법의 총알’이라고 단언합니다. 리차드 브랜슨이 기업가들에게 준 첫 번째 충고이기도 하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몸은 훨씬 더 운동을 필요로 합니다. 이를 미루지 마세요.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운동은 건강과 외모를 모두 가져다 줍니다. 목표를 분명히 할 경우 더 좋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무언가 일이 잘 안풀렸을 때에도, 그날의 운동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하루를 기분 좋게 마칠 수 있습니다. 1마일 시간 기록을 깨는 것, 평소보다 수영장을 세 번 더 왕복하는 것, 스쿼트 중량을 높이는 것 등 다양한 목표를 만들 수 있습니다.

8. 죽음에 대해 생각할 것 – 셰익스피어는 자기가 하는 생각의 세 번 중 한 번은 죽음에 관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하루에 한 번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만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하루 얼마나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보냈나요? 아마 그 일을 할 동안은, 그 일이 앞으로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되며, 살아 있는 동안만 살 수 있습니다. 어제 당신이 죽었고, 오늘은 새로 얻은 날인 것처럼 살아보세요. 나는 이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주머니에 동전을 넣어 놓고, 매일 한 번 이 상 그 동전을 만집니다. 죽음은 삶을 의미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목적을 가지게 만들어줍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 죽음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다행이지요.

9. 순간을 즐길 것 – 우리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빈둥거리며 보냅니다. 그저 시간을 죽이며 보낸다고 말하지요. (레이먼드 챈들러는 “게다가 잘 죽지도 않는다(and it dies hard.)”고 농을 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약속장소에 일찍 도착해 로비에서 시계를 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보냅니다. 이런 행동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잘 드러냅니다. 만약 우리가 죽은 시간을 살아있는 시간으로 대체한다면, 많은 것이 바뀔겁니다. 짧은 몇 분 동안에도 수많은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마주하세요. 다른 사람과 소통하세요. 미루던 일을 해결하세요. 태양 빛을 쬐고 자연을 즐기세요. 가만히 자신을 비우세요. 앞일을 준비하세요. 누구도 자신이 얼마 만큼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10. 모든 일에 감사할 것 – 스토아 철학자들은 고마운 마음을 일종의 치료약으로 생각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라 말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모든 것이 신의 선물이므로 그 자체로 선하고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례한 사람에게도 고맙다고 말해봅시다. 실패에 대해 고마워합시다. 며칠 늦은 택배도 다행이라 생각합시다. 이런 일이 당신을 더 큰 어려움에 빠지지 않게 해준 것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일들은 당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에픽테투스는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측면을 바라볼 건가요? 분노를 택하실 건가요? 아니면 감사를 택하실 건가요?

11. 하루를 돌아볼 것 – 이제 아침에 계획한 것을 돌아볼 시간입니다. 개선은 반성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세네카가 한 것처럼 매일 저녁 그날 자신의 행위에대해 생각해봅시다. “불을 끄고 아내가 잠이 들면, 나는 이제 습관이 된 이 일을 시작한다. 오늘 하루 동안 내가 한 행동과 내뱉은 말을, 하나도 숨김 없이, 빠뜨림 없이 나는 되새긴다.” 나는 아침에 계획한 대로 행동했나요? 그 일을 위해 충분히 준비했나요? 어떻게 했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까요? 내게 도움이 될 어떤 교훈을 얻었나요?

12. 더 큰 대상을 접할 것 – 바닷가를 걷거나 아름다운 공원을 걸을 때 우리는 일상의 걱정이나 불안을 잊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해 꼭 휴가철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매일 이런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스토아 철학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자신이 그 사이를 달린다고 상상하며 별의 무한함과 영원함을 느꼈습니다. 매일 밤, 아니면 아침 일찍 우리도 별을 바라 봅시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지상의 사소한 괴로움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만 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건물 옥상에서 먼 곳을 바라봅시다. 잔디를 맨 발로 걸어봅시다. 성당의 뒷자리에 몇 분간 앉아 보세요. 매일 어떤 거대한 무언가와 자신을 연결해 봅시다.

13. 8시간 잠을 잘 것 – 우리는 종종 “죽고 나면 원없이 잘텐데 뭘” 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잠을 적게 자는 사람들이 자랑스레 하는 말이지만, 바람직한 말이 아닙니다. 신체는 휴식을 필요로 합니다. 쇼펜하워는 잠을 인생이라는 빚에 대한 이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자를 갚는 것을 언짢아 하지 마세요. 잠 덕에 우리는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수면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은 하나의 의무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규칙이나 습관이 아무리 좋아도, 이를 위한 에너지가 없다면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디엄, Ryan Hol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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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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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재미난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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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읽는지가 중요합니다

2018년 10월 16일 

2016년 5월, 국제경영학회지(International Journal of Business Administration)에는 학생들이 무엇을 읽는지가 그들의 글쓰기 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이 무엇을 읽는지는 심지어 글쓰기 수업 보다도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에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학술 논문과 문학 소설, 논픽션을 읽은 학생들은 미스터리, 판타지, 과학소설과 같은 장르 소설이나 레딧, 텀블러, 버즈피드 등의 인터넷 글을 읽은 학생들 보다 더 수준 높은 문장을 구사했습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이들은 학술 논문을 읽은 학생들이었고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이들은 인터넷 컨텐츠를 읽은 이들이었습니다.

가벼운 읽기(light reading)와 꼼꼼한 읽기(deep reading)의 차이

몰입한 상태로 감각적, 감정적, 도덕적 디테일을 만끽하며 읽는 것을 의미하는 “꼼꼼한 읽기(deep reading)”는 단순히 단어를 해석하는 수준의 “가벼운 읽기(light reading)”과 크게 다릅니다. 꼼꼼한 읽기는 세부 묘사와 암시, 비유가 풍부하게 묘사된 글을 읽는 과정에서 일어나며 독자가 글에 묘사된 사건을 직접 경험할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를 직접 자극합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으며 반성과 분석을 더하며 자신의 상황을 글 속에 대입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글을 더 의미있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배우게 되며, 이를 통해 글쓰기 수준을 높일 수 있습니다.

반면 가벼운 읽기는 우리가 블로그나 속보, 연예 기사 등 몇 줄의 문장이나 이모티콘 등으로 이루어진 글을 읽을때 사용됩니다. 이런 글은 고유한 관점이 부족하며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는 분석적인 내용 또한 미흡한 경우가 많습니다. 읽고 지나치게 되는 이런 컨텐츠는 몇 분 안에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꼼꼼한 읽기는 글과 당신의 뇌를 일체화 합니다.

꼼꼼한 읽기는 뇌의 언어, 시각, 청각 영역을 자극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말하고, 읽고, 쓰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읽기와 쓰기는 언어의 리듬과 문법을 인식하는 브로카 영역을 자극하며,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베르니케 영역과 언어를 인식하고 활용하는 핵심 부위인 모이랑회(angular gyrus)를 자극합니다. 이 세 영역은 신경섬유다발로 이어져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는 글을 읽는 동안 언어 및 리듬과 일체가 되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글을 쓸 때 필요한, 복잡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리듬을 익히게 됩니다.

다음의 두 가지 꼼꼼한 읽기를 통해 글쓰기 능력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시 읽기

의식 연구(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지에 발표된 한 연구는 뇌의 “독서 신경망”은 어떤 글을 읽을 때에도 활성화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보다 감정적인 글은 우리가 음악을 들을때 활성화되는 몇몇 영역 또한 자극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시와 산문을 비교했을 때 연구진은 시의 경우 우리가 자신을 돌아볼 때 활성화되는 후대상피질(posterior cingulate cortex)과 중앙측두엽(medial temporal lobes)을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자원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읽었을 때 자원자의 뇌에서는 “독서 신경망”보다 기억과 관련된 부위가 더 크게 반응했으며,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읽는 것이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회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문학 소설 읽기

인간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복잡한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술입니다. 따라서 작가는 다층적인 인물과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의 감정 상태와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된 “마음 이론(Theory of Mind)”에 대해 연구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최근 한 연구는 문학 소설을 읽을 때, 논픽션이나 대중 소설을 읽을 때 보다 감정적 인지적 마음 이론 검사 결과가 더 올라간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는 적어도 문학 소설을 읽을 때 일시적으로라도 타인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또한, 문학 소설은 깊은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고 외향적 사고와 내향적 사고를 모두 자극합니다. 특히 잡지나 인터뷰, 인터넷의 짧은 글에 비해 인지적 능력을 더 자극합니다.

TV를 보는 대신 꼼꼼한 읽기를 시작하세요

TV를 보는 시간은 대부분 무의미한 시간이며, 뇌는 곧바로 활동을 멈추게 됩니다. 또한, 아무리 당신이 이를 정당화하려 하더라도, 가벼운 잡지나 대중 소설은 글쓰기 능력을 키워주지 못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면 당신의 뇌를 자극할 수 있는 문학 소설과 시, 그리고 수준 높은 문장으로 쓰여진 과학이나 예술에 관한 글을 읽어야 합니다.

(심리학 투데이, Susan Reyno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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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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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있는 노래는 <스타더스트>(이상은 노래)



“우리는 생각하는 별먼지… 호기심 죽이는 과학 왜 배우나요?”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17>별 헤는 과학자 이명현

‘코스모스’의 저자로 유명한 칼 세이건 전문가인 천문학자 이명현씨. 네덜란드에서 유학과 연구원 생활을 마친 뒤 귀국해 연세대에서 연구교수와 천문대 책임연구원을 지냈다. 몇 년 전 보직을 내려놓은 그는 올해 서울 삼청동에 과학책방 ‘갈다’를 열었다. 지난달 28일 ‘갈다’에서 그를 만났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이명현(55)은 별스럽게 사는 과학자다. 휴대폰이 있지만 쓰지 않는다. 그에게 전화를 걸면 이런 회신이 문자로 날아온다. ‘전화 받을 수 없어요. (이메일 주소)로 연락주세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고립’ 확보. “늘 휴대폰을 보며 살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게 얻은 시간으로 궁리를 하고, 책을 보고, 마주 앉은 사람에게 집중한다.

머리칼이 견갑골 아래까지 내려온다. 곧 허리에 닿을 것 같다. 국가 기관 회의에도 면티셔츠에 진을 입고 간다. 여름엔 거기다 슬리퍼까지. 그것이 가장 편한 차림인데다, 남에게 피해 주는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의 작은 행복을 지켜가면서 산다. 참, 머리칼은 소아암 환자에게 기증하려고 길렀다. 딸에게서 배웠다.

그는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별에게서 왔다’는 과학적 추론을 비밀스럽고 소중하게 말하는 재주를 지녔다. 별들이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하면서 치른 핵융합의 결과물이 실은 우리 몸을 이루는 원소들의 재료라는 얘기다. 끊임없는 원소의 순환으로, 결국 사람은 온 우주와 연결돼있다는 스토리텔링. “우리는 게다가 이런 걸 생각해낼 수 있는, 너무나 멋진 별먼지죠!”

그는 꽤 알려진 ‘글 쓰는 과학자’다. 그런데 퇴고가 없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썼다, 고쳤다를 되풀이했다가 첫머리부터 끝 문장까지 한번에 내달려 쓴다. 그리곤 원고 청탁자에게 전송하면 끝. 컴퓨터에서도 지워 버린다. 천재인가? 중ㆍ고교 시절의 엄청난 독서량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서 시작해 문학, 철학, 인문학의 별 같은 작품들을 모두 집어 삼킨 거였다.

천진난만한 눈웃음을 보면, 인생 심각할 것도, 걱정도 없는 사람 같은데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의 첫사랑이자,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한 인생의 벗,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인 그의 아내는 벌써 수년 째 병상에 누워있다. 치과 의사 시절 반짝이던 아내의 뇌는 잇단 수술로 작아졌고, 반짝이던 이성의 빛도 함께 수그러들었다. 자신 역시 아내의 발병 직전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경험이 있고 아직도 하루에 약을 한 움큼씩 먹어야 한다. 그래도 그는 꽤 자주, 행복하다.

“인생의 기준점을 죽음에 둔다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나와요. 과거의 나와 아내는 이제 없고, 관계가 새롭게 설정된 거죠. 논리적인 교감 대신 감정의 교감이 남은 거예요. 그걸 인정해야 지금의 소중한 시간을 누릴 수 있어요.”

존재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면 삶의 찰나는 여전히 경이롭다. 별이 그에게 알려준 삶의 진리다. 그걸 나누려고 올해 6월엔 서울 삼청동에 ‘과학책방 갈다’를 열었다.

◇갈릴레오+다윈 첫 글자 딴 과학책방 ‘갈다’ 

그는 외모부터 눈길을 잡는 과학자다. 늘 면티셔츠에 면바지 차림. 머리칼은 한데 묶어 늘어뜨렸다. 딸의 권유로 소아암 환자에게 기증하려고 기른 지 4년쯤 됐다. 서재훈 기자

-왜 휴대폰을 안 쓰세요?

“제가 하는 일이 시급을 다투며 할 업종이 아니니까요. 전화로 약속을 잡다 보면 제대로 적어두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있어서 아찔했던 일도 있었고요. 또 하나는, 자기 고립이 좀 필요했어요. 그래서 연락은 이메일로 받아요. 매일 밤 확인을 하고 회신도 하고 구글 캘린더에 기록해두죠. 카톡(카카오톡)도 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 얘기하거나 밥 먹을 때 전화를 전혀 보지 않아도 돼요. 특히나 저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자기 고립을 확보하는 게 필요해요. (사회에서) 그래도 되는, 그럴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휴대폰에서 벗어나는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특히나 직장인들에게는 휴대폰이 ‘감옥’이나 다름 없죠.

“맞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꼭 그렇게 살 필요는 없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주위에서 불편해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계속 알리고 유도하니까 이제는 ‘아, 저 사람은 이메일로만 소통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인식하게 되더라고요.”

-머리는 언제부터, 왜 기르는 건가요?

“네팔에 자주 가는데, 3, 4년 전에 갔을 때 (미용실 가는 걸) 신경 쓰지 않았더니 머리가 제법 길었더라고요. 딸 아이가 보더니 ‘아빠도 한 번 해보라’며 소아암 환자에게 하는 모발 기증을 권했어요. 이미 딸은 두 번, 아들은 한 번씩 머리를 길러서 기증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기르게 됐죠. 허리까지 자라게 둬볼까 생각 중이에요. (웃음)”

-과학책방 ‘갈다’를 만든 이유는 뭔가요?

“여기가 원래 부모님 집이에요. 저도 유학 가기 전까지 8, 9년쯤 살았고요. 부모님이 이사 하면서 친분이 있는 NGO(시민단체)나 NPO(비영리기구)에 빌려줬는데, 최근까지 있던 한국비폭력대화센터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됐어요. 정서적인 끈이 있는 곳이니, 부모님이 남에게 처분하기보다 제게 활용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을 해 책방을 열게 됐죠. (진화생물학자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김상욱 경희대 교수 같은 친한 학자 10여명과 아이디어를 모았어요. 다들 과학자이면서 책을 쓰는 사람들이고, 또 어린 시절 책에 빚진 세대죠. 그러다 보니 모두 책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생각을 모은 끝에 교양과학 책을 파는 책방을 하기로 했죠. 또 책만 파는 게 아니라 2층에는 책을 저술할 수 있는 방, 지하엔 북콘서트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어요.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은 과학자뿐 아니라 만화가, 작가, 이미지 컨설턴트, 팝 아티스트 같은 다른 직종까지 확대돼서 지금은 110명으로 늘었고요. 주주로 참여하고 있죠. 제가 대표고요.”

책방 이름 ‘갈다’는 장대익 교수의 머리에서 나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갈’과 다윈의 ‘다’에서 따왔다. 거기다 ‘갈다’의 사전적 의미인 ‘갈아 엎다’, ‘갈아 치우자’, ‘절차탁마’, ‘경작’의 뜻도 보태 더 근사한 작명이 됐다. 닫힌 과학이 아닌 대중에게 열린 과학으로 바꾸자는 열의가 엿보인다.

-통상 서점에서도 과학책은 소외된 경우가 많은데 소중한 공간이네요.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오프라인 거점’이 생긴 거죠. 와서 편하게 하고 싶은 구상을 구현할 수도 있고, 과학책을 볼 수도 있고요. 과학책을 처음 접하는 손님이 오면 처방도 해드려요. 서사적인 서술 방식을 좋아하면 ‘불멸의 원자’(이강영), 명징한 방식을 원하면 ‘김상욱의 과학공부’, 여행이 취미라면 ‘문경수의 제주과학탐험’… 이런 식으로요.”

-이곳(책방)이 옛날 살던 집터라고 들었는데, 이곳에 추억도 많겠네요.

“저는 큰 감흥이 없어요. 살았던 집이긴 하지만.”

-왜요?

“제가 무엇에 미련을 잘 두지 않는 성격이에요. 과거도 그렇고, 제 글에도요. 이메일로 보내고 나면 잊어버려요.”

그가 올해 9월 낸 책 ‘이명현의 과학책방’ 서문이 생각 났다. “그리고 이제 내 곁은 완전히 떠나서 독자들의 품으로 간다. 안녕”이라고 그는 썼다.

“좀 의아스러운 얘기일 수도 있는데, 저는 청탁 없는 글을 써본 적이 없어요. 제가 뭘 스스로 이뤄야겠다고 생각해서 쓴 글이 없다는 의미예요. 글도 쓸 때 퇴고가 없어요.”

-일필휘지라는 건가요?

“네. 그렇게 써서 보내요. 마감에 쫓기기 때문에 퇴고를 못해요. 하하. 대신 미리 생각을 많이 하죠.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여러 번 써요. 그래서 완성된 걸 글로 옮기죠. 600쪽짜리 책 한 권이라면, 며칠 동안 몰아서 한꺼번에 써요. (원고지로) 5장 분량이든, 12장 분량이든, 100장 분량이든 마찬가지예요. 어릴 때부터 버릇이죠. 책이 나와도 방송에 출연해도 그걸 다시 보지 않아요. 출판 제의가 들어와도 조건 중 하나가 그거예요. (웃음)”

-스트레스는 적게 받을 것 같네요.

“사실, 스트레스 받을 일은 많지요. 그런데 나름대로 해소하는 방법이 있어요. 옛날엔 친구 만나 술 마시는 거였는데, (8년 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난 뒤부터 그건 못하고요. 제가 그러고 나서 바로 아내가 수술을 받게 되는 일이 겹치면서 엄청 힘들었죠. 19살 때 배운 명상이 도움 돼요.”

-명상이요?

“네. 대학 1학년 때 방학을 네팔에서 보낸 적이 있어요. 아버지와 가까운 네팔인 가족의 집요. 저보다 한 살 어린 그 집 동생과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하며 여행을 다녔는데 돈이 딱 떨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때 네팔에서 라즈니쉬교가 아주 번성을 해서 곳곳에 캠프가 많았거든요. 그 친구네 집도 라즈니쉬교를 믿었고요.”

20여 년 전 한국에서도 책과 함께 유명세를 날렸던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의 종교를 말하는 거였다.

“돈을 빌리러 가까운 곳의 라즈니쉬 캠프에 갔죠. 그런데 그곳의 구루(지도자)가 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명상을 권하더라고요. 저는 빨리 돈만 빌려서 다시 놀러 가면 좋겠는데. (웃음) 그래서 제가 어깃장을 놓으면서 ‘나는 격식을 갖춰 하는 명상은 싫다. 걸어 다니면서 할 수도 있는 거냐’고 했더니 그렇다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3, 4일 동안 캠프에 머물면서 명상을 했어요. 걸어 다니면서, 한 키워드를 잡아서 그것과 관련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흐트러뜨리는 연습을 했죠. 그런데, 한 이틀 하고 나니까 정말 되는 거예요. 재미있더라고요. 8년 전에 아내가 쓰러져 힘들 때 그게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해보니 작동을 하더라고요. 어릴 때 연습해둔 것이라 그런지. 그래서 힘든 일이 있을 때 명상을 해요. 그러면 마음의 진폭도 좁아지고 안정을 되찾게 되죠.”

◇8년 전 죽음의 문턱까지… 아내도 투병 

그는 ‘갈다’의 곳곳을 설레는 음성과 몸짓으로 소개했다. 지하는 북콘서트나 강연을 할 수 있는 공간, 카페 같은 아늑한 분위기의 1층엔 서가가 들어찼다. 2층은 과학 저술가들이 글을 쓰거나 머리를 맞댈 수 있는 살롱이다. 그 한편에 그의 작은 서재도 있다. 서재훈 기자

-2010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던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11월이었어요. 일요일 밤. 김장철이라 구기동 집 3층까지 배추를 나른 뒤였어요. 약간 숨이 차긴 했어도 힘든 활동은 아니었죠. 그런데 갑자기 쓰러졌어요.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죠. 다행히 딸 아이가 얼마 전 반 친구 아버지가 당한 일을 떠올리곤 바로 119에 전화를 하고 의사인 제 고모에게도 급히 연락했죠. 종합병원이 10분 거리라 다행히 응급처치를 해서 살았지만 이미 심장 근육의 반 이상이 괴사돼서 뛰지 않아요. 지금도 하루에 몇 십 알씩 약을 먹고요. 피의 점도가 높아진 상태에서 혈관 벽에 붙은 세포가 떨어지면서 관상동맥이 막힌 거였어요.”

-당시 경험 이후에 느낀 건요.

“죽음의 상황까지 갔다 온 거니 종종 그런 질문을 받아요. 그런데 심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요. 다만 생활 패턴이 바뀌었죠. 술을 마시지 못한다거나 하는. 그러다 보니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친구들도 점심에 만나고요.”

-마음의 항상성이 견고한 것 같아요.

“내가 겪은 고통의 강도로 우열을 가리지 않으려고 해요. 나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고, 우연히 나한테 그 고통이 찾아왔을 뿐이죠.”

-과학자의 시선이기도 하겠지만, 성격도 낙관적인 듯 해요.

“엄청 낙관적이에요. (웃음) 어릴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어요. 음, 죽음이라기보다 사라진다는 것에. 뭔지 모르니까 막연한 두려움인 거죠. 그래서 사춘기 때 화두 중 하나가 ‘존재’였어요. 장래희망란에 ‘도사’라고 썼다가 선생님한테 혼난 적도 있죠. 교회나 절은 가봐도 신통치 않았고, 도사가 되면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웃음) 그러다가 나중에야, 유한함을 인지하고 받아들인 거죠. 어차피 죽지 않을 수 없다, 영원히 살면 좋겠지만 그럴 방법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개망나니처럼? 아니면 극단적인 여러 행동을 해볼까? 그런데 그래 봤자, 너나 나나 다 죽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그 유한한 시간 동안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을까? 이런 식으로 흘러 간 거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지고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릴 때부터 꽤 논리적인 사고를 했네요.

“사춘기 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책을 엄청 읽었어요. 철학책은 물론이고 근ㆍ현대 세계문학전집, 시집까지 닥치는 대로 다 읽었죠. 도서관까지 가서 구할 수 있는 건 모두요. 과학책은 별로 읽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사고할 재료가 많이 쌓였죠.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막히는 법인데, 거기서 돌파할 예제가 많아진 거죠.”

◇하늘의 금성도 혼자, 나도 혼자 ‘감정이입’ 

-별에는 언제부터 빠지기 시작했나요?

“가장 오래된 기억은 1969년. 그때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어요. 그 전에 저한테 별은 이런 거였어요. 어머니(사회학자)와 아버지(정신과의사)가 모두 일하셨으니 애들이랑 동네 골목에서 놀다 보면 다 집에 들어갈 때까지 남아 있는 때가 많았거든요. 골목에 혼자 있다가 하늘을 보면 금성이 있었어요. 금성도 혼자, 나도 혼자. 그러니 감정 이입이 되더라고요. 또 금성 옆에 있는 초승달도 보이고.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람이 그 달 위를 걸어 다니고 있다니까 어린 마음에 무척 벅찼어요. 아, 나도 저런 걸 해야겠다고. 매혹이 된 거죠.”

-별을 제대로 본 건 언제예요?

“그 때 생각한 ‘저런 일’이 뭔지 모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학생과학 잡지에서 한국아마추어천문가회를 만든다는 소식을 봤어요. 조경철 박사 같은 천문학자들이 만든 조직이죠. 일반회원도 모집했는데 그때 저도 가입했어요. 초등생 회원은 저하고 또 하나 두 명뿐이었죠.”

-어떤 활동을 했나요?

“관측회를 해요. 망원경으로 본 달을 스케치하기도 하고 천체 사진도 찍었죠. 3학년쯤부터는 필름을 자르고 현상, 인화하는 법도 배웠어요.”

-육안으로 금성과 대화하다가 망원경으로 보니 뭐가 다르던가요?

“처음 본 게 토성 아니면 달의 크레이터(달 표면의 구덩이)일 거예요. 특히 토성은 망원경으로 보면 띠가 정말 예뻐요. 엄청 흥분했죠. 그걸 보곤 나도 내 망원경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죠. 그래서 만들었어요. 문방구에서 파는 렌즈로 초점 거리를 맞추고 마분지를 밥풀로 붙여서. (웃음) 1609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처음 천체를 본 망원경보다 그때 만든 망원경이 더 성능이 좋아요. 갈릴레오의 망원경보다 정교하진 못해도 렌즈 성능은 당시보다 더 좋으니까.”

-천문기상학과에 진학해서 평생 별과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 활동 덕분이겠죠?

“네, 우주 비행사와 천문학자는 다르긴 하지만 달에 가는 세상이 됐다고 하니까 막연히 우주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당시는 천문학과가 서울대와 연세대에만 있을 때였죠. 고등학교 때 나선은하에 빠져있었는데 나선은하를 전공한 교수가 있는 연세대에 간 거죠.”

-중ㆍ고교 때 문예반 활동도 했다던데, 과학과 문학에 모두 빠져있었나요?

“이성에게 어필하려면 그런 지적 허영심, 허위의식이 필요했죠. (웃음)”

-문학과 과학이 통하던가요?

“그럼요. 경이로움이요. 문학 특히 예술은 경이로움의 경험이잖아요? 과학도 마찬가지예요. 음악이나 문학 작품, 혹은 과학에서 맛보는 경이로움은 거의 일치해요. 그래서 과학자가 예술가와 잘 통하나 봐요. 경이로움을 즐기고 받아들이고 존중할 줄 아는 태도가 공통점인 것 같아요.”

◇중2 첫 실연으로 빠져든 ‘윤동주의 별’ 

초등학교 때 ‘천문학의 별’에 빠져든 그는, 사춘기 때는 실연으로 ‘문학의 별’까지 섭렵했다. 서재훈 기자

-4년 전 낸 에세이집 제목이 ‘이명현의 별 헤는 밤’이죠. 윤동주의 별에는 언제 매료됐나요?

“중학교 2학년 때 푹 빠졌죠.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지금의 아내와 사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를 받았어요! 그 편지에 윤동주의 ‘서시’와 김소월의 ‘초혼’ 두 편이 적혀 있었죠. 인생의 첫 실연에 서럽게 울다가 그 두 시인의 시를 보기 시작했어요. 구할 수 있는 모든 시집은 다 구해서 읽고 외우고 다녔죠.”

-왜요?

“그리움에 대한 투영이 그렇게 됐나 봐요. 또 ‘네가 나한테 시를 보내 이별을 통보했으니 나도 시로 뭔가 해보겠다’ 이런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요. 처음엔 여자친구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는데, 나중에는 문예반 활동에 신문반, 교지편집 활동도 했고 고등학교 때는 문학 동인회도 만들었죠.”

-그런데 왜 문학이 아닌 천문학의 별을 전공으로 택했나요?

“아주 어릴 때 매혹된 경험이 너무 크게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냥 나는 ‘천문학자’,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했죠. 공교롭게도 진학한 대학이 윤동주의 연세대였어요. 또 제가 다닌 고교도 윤동주가 다닌 평양 숭실학교의 숭실고교고요. 제 인생의 화두인 별과 윤동주의 문학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됐어요.”

그는 외계 지성체를 탐색하는 세티(SETI)연구소의 한국 책임자이기도 하다. 그를 인터뷰 한다니까 주위의 독자 한 명이 이런 질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외계인이 진짜 있나요?’

“(웃음) 과학자들은 (명확하게) 있다 혹은 없다고 잘 답하지 않아요. 99.9%의 확률로 존재할 개연성이 있다고 답하죠. 지금까지 그런 개연성을 만들어낼 만한 여러 관측 결과가 있다는 의미죠. 그걸 종합해서 추론하자면, 외계인은 99.9%의 확률로 존재할 것 같다고 보고 있죠. 문제는 ‘어떻게 찾을 것이냐’죠. 우리 은하 안에 지구와 비슷한 환경 조건을 가진 행성이 얼마나 있을지를 계산해보면, 적으면 50억 개, 많게는 500억 개가 있을 것으로 추정해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닌 거죠. 수십, 수백 개가 아니라 수십억 개 이상이라는 것, 흔하다는 게 의미가 있어요. 그 중 1%에서만 생명체가 있다고 봐도, 그 중 1%만 지구인처럼 지적 능력을 가졌다고 봐도, 우리 은하 내에서 지구인 정도의 진화된 존재는 흔할 것이라는 추론을 하는 거죠.”

-우리 모두는 별에서 왔다고요? 왜 그렇죠?

“천문학의 스토리텔링 중 하나예요. (웃음) 우주와 우리가 연결돼있다는 뜻이죠.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산소, 질소, 탄소, 황, 인 이런 원소들이 지구에서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별들이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하면서 치른 핵융합에서 왔다는 거죠. 개개의 사람들은 부모에게 빚을 져서 태어났지만, 화학적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그렇게 온 우주와 연결돼있어요. 끊임없이 원소들이 순환하고 재활용되면서.”

그는 가수 이상은이 8년 전에 낸 곡 ‘스타더스트’ 얘기를 해주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천문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서. 노랫말이 이렇다. ‘후회할 필요 없어 / 시간은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 / 또한 새롭게 피어나지 / 무지개의 빛 가루처럼 / 시간이 오는 / 우주의 저 편.’

하마터면 이 노래의 숨은 뜻을 모를 뻔 했지 않나. 그는 말했다. “우리는 별먼지죠. 그것도 이런 뜻까지 헤아릴 수 있는, 생각하는 별먼지. 엄청나게 멋진 존재죠!”

◇과학 교과서 10분의 1로 줄이고 천문학 빼자 

‘과학이 문화가 되는 곳', 과학책방 ‘갈다’의 곳곳. 김지은 기자

-와, 그렇군요.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요?

“맞아요. 저는 과학 교과서 내용을 10분의 1로 줄이고 천문학은 아예 빼자고 주장해요. 19세기의 과학, 예를 들면 (천체) 좌표 계산 이런 거요. 요즘은 천문학과 1학년생도 안배우거든요. 공군사관학교에서도요. 이제 프로그램 한 줄이면 돼요. 공사도 예전에는 실측해서 비행해야 하니까 배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그런 것 보다는 현대 허블 우주망원경이 찍은 사진을 보고 감동할 수 있게 하는 게 훨씬 좋은 과학 교육이에요. 지금 교육은 경이로움이 빠진 과학이죠. 있던 경이로움도 시험을 통해 없어지게 하니, 지금처럼 교육할 바엔 차라리 과학을 배우지 않는 게 나아요. 그러면 막연한 호기심은 남을 거 아녜요. 지금은 (중ㆍ고교) 6년을 거치며 호기심이 말살돼 버리는 교육이니까요.”

-그렇다면 저 같은 ‘과알못’(과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안 생길 텐데.

“그렇죠. 시험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과학적 사고를 하는 방식 위주로 바꿔야 해요. 하지만 (소장 과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해도 안 먹히죠. 이미 각 교과 별 기득권이 있으니까요. 총론에서 동의해도 각론으로 들어가면 양보를 하지 않더라고요.”

-‘갈다’에서 하는 ‘코스모스 끝까지 읽기’도 잃어버린, 혹은 몰랐던 과학의 경이로움을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거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굉장히 유명한 책이잖아요. 이걸 다 읽고 싶은 욕망을 가진 분들이 많이 오죠. 제가 하는 역할은 일종의 가이드예요. 옆에서 팩트 체크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는 거죠. 팩트 체크는 예를 들면 ‘코스모스’가 나왔을 때는 우주의 나이를 150억 년에서 200억 년으로 봤지만, 지금은 138억 년으로 바뀌었다거나 하는 것들이죠. 또 제가 칼 세이건의 부인이나 제자들과 친분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설명해요.”

-1980년에 출간된 이 책을 지금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코스모스’는 최첨단의 과학책은 아니에요. 현대 천문학의 성과를 알려면 막 나온 책을 보는 게 낫죠. 이 책은 맥락으로 읽어야 해요. 저는 그걸 돕는 거고요. 과학 분야의 고전이 갖는 위상이 애매해요. 소설은 300년 전의 것을 읽어도 희로애락, 사랑, 질투 이런 보편적인 공감대가 있지만 과학책은 그 사이에 워낙 심하게 팩트가 변하니까요. 정보 전달의 역할은 출간 1, 2년이 지나면 없어져요. ‘코스모스’ 역시 팩트가 달라진 걸 찾기 시작하면 엉망이 되죠. 그럼에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책에 담긴 칼 세이건의 비전과 논리구조 때문이에요.”

-우리 삶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는 건가요?

“칼 세이건은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가치를 외면하지 말자는 얘기를 많이 해요. 냉정하게 상황을 인정하고 난 뒤, 어떻게 살 것인가. 구체적인 방법이 ‘코스모스’에 있어요.”

-언제 처음 ‘코스모스’를 읽었나요?

“1980년에 다큐멘터리가 나왔을 때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봤고, 1981년쯤 국내에 번역본 책이 나왔을 때 봤을 거예요. 그 땐 이 책에 담긴 문학적 비유나 역사, 신화, 전설을 본 게 아니라 최신 화보를 봤죠. 1977년 발사된 우주탐사선 보이저 1, 2호가 1979년부터 목성, 토성, 천왕성을 지나면서 찍은 사진을 보내오기 시작했거든요. 그 최신 화보가 ‘코스모스’에 실려 있었어요. 그러다가 귀국해서 (연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하다가 ‘코스모스’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거의 20년 만에 다시 읽었죠.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지금도 읽을 때마다 새로워요. 한번은 초점을 신화나 전설에 맞춰서, 그 다음엔 맥락으로만 읽어보기도 하고요.”

◇죽으면 별로 흩어지니 재미난 일을 해보자 

그는 생의 기준을 태어난 때부터가 아닌 죽음에 둔다고 했다. 그렇게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나면, 현재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서재훈 기자

이명현의 책들을 읽으면서 몇 대목에서 탄복했다. 그 중에는 담담해서 더 절절하게 아픔이 배어 있는 문장들이 있었다. 어부들이 더 많은 돈을 받고 팔기 위해 청어를 산 채로 가져오려고 청어 사이에 새끼 상어를 풀어놓는다는 얘기 다음이다. ‘지난 1년, 나는 바로 그 청어처럼 살았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참… 미치겠다. 그래도 또 1년만 더 버티고 살아봐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그 청어처럼.’

자신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두어 달 뒤, 아내도 뇌종양으로 투병을 시작하게 돼 힘겨운 1년을 보내고 난 때다.

-청어처럼 사는 건, 어떤 거였나요.

“걸어 다니면서 하는 (생각 흐트러뜨리기) 명상 덕도 봤고요.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서) 이런 (심장) 비상약도 과용했죠. 어쩔 수가 없으니까. 이런 방식으로 심신을 릴랙스 시키면서요. 감정의 진폭을 줄이고 평상심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죠. 늘 대화를 나누던 가까운 상대가 아프고, 그렇다고 (속내를) 자식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고, 결국은 저 혼자 해결해야 하는 거니까요.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에 놓이게 되면 먼저 응급실에 가서 선제 조치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 식으로 살 궁리를 하는 거죠. 힘들긴 했지만, 생각과 생활을 최대한 단순화해서 저도 버티면서 아내의 치료에 집중했죠.”

-돌이켜 보면 잘 견뎌왔나요?

“그랬죠. 반드시 해야 할 일들에만 초점을 맞춰서. 환자가 생기면 주위에서 조언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말들을 해요. 억지스러운 것들도 있고. 심지어 굿을 하라는 얘기까지.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중심을 잡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저는 의료체계 안에서 의사의 지시를 따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주장들은 다 쳐냈죠. 오로지 아내의 치료와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에 집중했어요.”

-부인과 초등학교 동창이니 굉장히 오래됐고 특별한 사이겠어요.

“아내이자, 연인이자, 오래된 친구, 그런 복합적인 관계죠. 우리끼리 통하는 ‘모드 바꾸기’가 있어요. 부부가 되니까 절친이거나 애인일 때 했던 얘기를 안 하게 되는 때가 있더라고요. 그러면 싸우기도 하고 삐치기도 했죠. 그런 때 쓰는 비장의 카드가 ‘절친모드’예요. 그러면 오래된 친구로 돌아가 할 말 다 하는 일종의 면책특권 같은 거죠. 이제는 그런 걸 할 수 없으니 안타깝죠. 그래도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봐야 이 순간 내가 이 사람과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어요. 과거만 생각한다면, 지금의 아내와 교감이나 교류는 할 수 없죠. 아내와의 모드가 새롭게 설정된 거예요. 예전처럼 절친모드로 돌아간다거나, 아이들을 함께 돌본다거나, 논리적인 교감 같은 건 할 수 없지만 함께 사진을 보면서 웃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교감이니 이것에 집중하는 거죠.”

-행복하세요?

“저는 늘 행복했던 것 같아요. (웃음) 힘든 일은 늘 있었지만 자책은 잘 하지 않아요. 그러니 작은 강도의 행복을 느끼는 빈도 수가 높아요.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하거든요. 물론 처음 망원경으로 하늘을 봤을 때 나를 압도했던 경이로운 행복을 재현하긴 힘들어요. 하지만, 대신 약한 세기의 행복이 많죠. 그러면서 좌절의 강도는 약화시키고. 그렇게 감정의 진폭을 줄이는 훈련이 됐나 봐요.”

이 질문을 한 건 내내 그의 눈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행복 때문이었다.

-별 헤는 과학자 이명현의 삶의 도는 뭔가요?

“유한함에 대한 인식, 인지, 그것에서부터 오는 체념이요. 그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외계적 시선으로 저를 보거나 객관화 시키는 데 도움이 되죠. 바꿔 말하면 항상 배수진을 치고 사는 것이기도 해요.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저는 삶의 기준점을 제가 태어난 시점이 아닌 죽음에 두고 사고하는 것 같아요. 어차피 죽는 거니까, 죽으면 (별로) 흩어지는 거니까, 끝이 나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평상적인 재미난 일을 하는 거죠.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도 있지만. (웃음)”

‘과알못 기자’가 천문학자를 인터뷰 해보기로 한 데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인생의 꿈을 다 꾸고 이제 막 별로 돌아가는, 그 사람을 내 마음에서 놓아주고 있던 참이었다.’ 그의 스승이자 벗이었던 조경철 박사를 추모하며 쓴 글이다. 세상의 절반인 하늘과 달과 별이 그에게 준 선물이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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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된 산업화 시대 이후를 홀로세를 넘어 인류세라 이름 붙이기도 한다. 

인간이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명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지구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지구를 살릴 구세주이기도 한 인류. 

희망은 있을까? 기대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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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왈, 2050년을 위해 인류는 뭘 준비해야 하나


1부: 오직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만 유효하다

인류는 전례없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과거의 이론이 붕괴하고 있으며 어떤 새로운 이론도 이를 대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례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2050년에 겨우 30대 초반일 겁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2100년, 곧 22세기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살아갈 겁니다. 오늘날 태어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이들이 2050년 또는 22세기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시대에도 직장을 얻고 세상을 이해하고 인생의 미로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기술을 가져야 할까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누구도 2100년, 아니 2050년의 세상 조차도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누구도 이 질문의 답을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인류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했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신체와 뇌, 마음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오늘날, 과거에는 고정되었고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모든 사실들을 이제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인 1018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미래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기본적인 요소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1018년의 중국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1050년 쯤 송 제국이 멸망하고 거란족이 침입하며, 또 역병이 돌아 수백 만 명이 죽는 것을 겪게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1050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부와 베짜는 직공으로 일하고, 정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와 관료를 가질 것이며, 가부장제가 유지될 것이며, 평균수명은 여전히 40세 언저리일 것이고, 인간의 육체적 특징 또한 전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1018년, 가난한 이들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쌀을 파종하고 비단을 짜야할 것인지를 가르쳤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아들에게는 공자의 가르침과 서예, 말을 타고 싸우는 법을 가르쳤고, 딸에게는 검소하고 성실한 부인이 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1050년에도 이런 기술이 유용하리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중국만이 아니라 다른 세계 역시 2050년에 어떤 특징을 가질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으로 돈을 벌지, 군대와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마 지금보더 훨씬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며, 생명공학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을 통해 인간의 육체 또한 과거와는 비할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는 대부분의 기술이 2050년에는 쓸모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희귀한 것이었고 부족한 정보 마저도 검열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없었기에, 이는 매우 합리적인 교육방법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1800년 멕시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바깥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신문, 도서관 등 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어떤 도구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글을 알고 책을 접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소설이나 종교 서적을 제외한 책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페인 제국은 모든 국내 인쇄물을 철저하게 통제했고, 외국 서적 또한 검열을 통과한 것들만 드물게 허용했습니다. 당시의 러시아, 인도, 터키, 중국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근대적 학교 제도가 등장했을 때, 모든 아이들을 읽고 쓸 수 있게 만드는 것과 지리학, 역사, 생물학의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곧 인류의 거대한 진보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를 막으려 하는 이도 없습니다. 그 대신 어떤 이들은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며, 우리의 관심을 불필요한 것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당신이 지금 멕시코의 한 마을에 살며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대부분의 시간을 위키피디아를 읽고, TED 강연을 보며, 온라인 수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정부도 그들이 원하지 않는 정보를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이제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것이 극도로 쉬워졌습니다. 전세계의 사람들이 클릭 한 번으로 시리아 알레포에 떨어진 폭격 소식과 북극의 빙산이 녹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또한 수많은 반대되는 주장들이 있어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알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역시 수많은 다른 주제들 때문에 사람들은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으며, 또한 정치와 과학이 너무 어렵게 보일 때, 고양이 비디오나 연예인 소식, 포르노 영상은 더욱 유혹적이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장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이 더 많은 정보일 것입니다. 이미 학생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그 정보가 합리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며, 무엇보다도 수많은 작은 정보를 모아 세상에 대한 폭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이는 서구의 진보적 교육이 수백년 동안 추구해온 목표이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서구 학교에서는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정보를 직접 먹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진보적인 학교로 하여금 거대담론에 대한 특별한 공포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과 약간의 자유를 줄 경우 학생들이 알아서 세상을 이해하고, 설사 그들 세대가 모든 지식을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이를 해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라 가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일이십 년 내에 우리가 내릴 결정은 인류의 미래 자체를 결정할 것이며, 우리는 오직 우리가 지금 가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이 세대가 우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가지지 못한다면, 인류의 운명 또한 그저 던져진 주사위에 의존하게 될 뿐입니다.

2부: 변화는 시작되었다

학교는 너무 많은 정보를 주입하는 것 외에도 미분방정식 풀이나 C++ 프로그래밍, 시험관의 원소 식별과 중국어 대화 같은 특정한 기술을 가르치는데 너무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2050년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기술이 가치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C++ 프로그래밍이나 중국어 대화에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있지만, 막상 2050년이 되었을 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프로그래밍을 더 잘하며, 새로운 구글 번역 앱이 만다린, 칸토니즈, 하카를 거의 불편함 없이 통역해줄지 모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 기술을 가르쳐야 할까요?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가 다음의 “네 가지 C”, 곧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소통(communication), 협력(collaboration), 창의력(creativity)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학교는 구체적인 기술 교육을 줄이고 보다 범용적인 삶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신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2050년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품을 발명하는 능력 못지 않게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재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변화의 속도와 함께 경제적 변화 외에 “인간의 조건” 또한 변화하고 있습니다. 1848년, 공산당 선언에는 “모든 확실한 것들이 공기중으로 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였습니다. 2048년에는 물리적, 인지적 구조 또한 공기중으로, 혹은 데이터 클라우드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1848년에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농장에서 직장을 잃었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공장에서도 자신의 성별을 바꿀 필요나 새로운 감각을 개발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직물공장에서 일자리를 찾고 나면 남은 인생은 그 일을 하며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48년 사람들은 어쩌면 가상 공간으로 이주해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별 역시 바뀔 수 있으며 인체에 이식된 컴퓨터에 의해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하게될 수 있습니다. 3차원 가상 현실 게임에서 최신 의상을 디자인하는 직업이 이미 존재하며, 10년 내로 이 특정한 직업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예술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 인공지능이 도입될 수 있습니다. 즉, 25살 때 연애 사이트 프로필에 “런던의 옷가게에서 일하는 25살의 이성애 여성”이라고 썼던 여인이 35살 때는 “나이는 조정 중이고 성별도 따로 없음. 뉴코스모스 가상세계에서 신피질 활동을 하며, 인생의 목적은 지금까지 어떤 패션 디자이너도 가보지 못한 영역을 가보는 것”이라고 쓰게될 수 있습니다. 45살 때는 연애나 자기소개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저 적절한 알고리듬이 내게 딱 맞는 상대방을 찾거나 – 아니면 만들어 – 줄 겁니다. 패션 디자인 예술 분야는 알고리듬이 너무나 발달한 나머지 과거 당신이 만들었던 가장 뛰어난 작품 조차도 자부심 보다는 창피함만을 느끼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45살이면 아직도 지켜보아야 할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충분히 더 남아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구도 우리가 보게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미래도 실제 진실과는 거리가 멀겁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21세기 중반의 세상을 설명하고 그 내용이 마치 과학 소설처럼 느껴진다면, 그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다른 이가 21세기 중반을 당신에게 설명하는데 그 내용이 전혀 과학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확실히 맞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미래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 뿐입니다.

이러한 심오한 변화는 삶의 기본적인 구조마저도 그 가장 확실한 특징을 바꾸면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만들기 전의 오랜 과거부터 인간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일을 배우는 시기와, 그 일을 하는 시기입니다. 삶의 전반부에 우리는 지식을 축적하고, 기술을 갈고 닦으며,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세우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었습니다. 열 다섯살의 나이로 학교를 가지 않고 하루 종일 가족이 소유한 논에서 일하더라도, 그 시기 가장 중요한 것은 논 농사를 하는 방법과, 대도시에서 온 욕심 많은 곡물 매매상을 상대하는 법, 옆 논의 주인과 물과 땅을 두고 생기는 충돌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삶의 두 번째 시기에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돈을 벌며 세상을 탐험하고, 사회에 기여하게 됩니다. 물론 50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쌀에 대해, 상인과 이웃에 대해 배울 수 있지만, 이는 일찌감치 배웠던 내용을 조금더 섬세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21세기 중반의 세상에서, 급격한 변화의 속도와 길어진 수명은 이러한 과거의 모델을 무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인생은 점점 더 잘게 쪼개지며, 각 구간은 연속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그 어느때 보다도 더 중요하고 복잡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수준의 스트레스를 포함합니다. 변화는 언제나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일정한 나이 이후 사람들은 변화를 꺼려하게 됩니다. 15세의 아이에게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는 것입니다. 신체가 자라고 생각이 깊어지며,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며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개발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십대는 이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이를 신나는 일로 즐깁니다. 그러나 50살이 되면, 이제 변화는 두려운 것이 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과 싸우기를 포기합니다. 이미 가 보았고, 직접 해 보았고, 남은 것은 티셔츠 뿐입니다. 안정적인 삶을 선호합니다. 지금 가진 기술과 경력, 정체성과 세계관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일수록 이를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나갈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50대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격을 크게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뇌과학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비록 성인의 뇌 또한 과거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는 더 유연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십대의 유연한 뇌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뉴런을 다시 연결하고 시냅스를 추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21세기는 안정성을 추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정체성을, 직업을,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떨어진 사람이 될 뿐입니다. 기대수명의 증가는 당신을 살아있는 화석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이제 50살은 충분히 젊은 나이일 것이며, 따라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 단순히 경제적인 면을 넘어 사회적으로 –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을 재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소함이 새로운 표준이 되는 시대에 당신의 과거 경험과 다른 모든 인류의 과거 경험은 예전처럼 믿을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개인으로써의 한 사람과 전체 인류는 초지능 기계나 강화 신체, 인간의 감정을 믿을 수 없이 정밀하게 조종하는 알고리듬, 인류에 의한 기후 격변, 매 십년 마다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급격한 변화 등 지금까지 어떤 인류도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대해야 합니다. 완벽하게 전례가 없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막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이를 흡수하거나 분석할 방법이 전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청난 불확정성이 세상의 우연한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특성일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적 적응력과 충분한 감정적 균형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당신이 가장 잘 아는 영역을 때로 포기해야 하며,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히도, 아이들을 알 수 없는 것들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게 만들도록 가르치는 것은 물리학 공식이나 1차대전이 발발한 이유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으로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 역시 20세기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문에 21세기가 요구하는 지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산업혁명의 결과 우리는 마치 생산라인과 같은 교육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을 한 가운데 커다란 콘크리트 빌딩이 서 있고, 내부에는 수많은 동일한 교실이 있으며, 각 교실에는 책상과 의자가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종이 울리면, 같은 해에 태어난 서른 명의 아이들과 함께 그 중 한 교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매 시간, 어른 한 명이 들어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 일로 정부에서 봉급을 받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지구의 형태를 이야기하고, 다른 이는 인류의 역사를, 또다른 이는 인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비록 인류가 이 방법으로 커다란 진보를 이루어냈다는 것을 부정할 이는 없겠지만, 이제 이 모델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쓸만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캘리포니아 교외와 같은 선진국 뿐만 아니라 멕시코 시골에도 적용가능한 모델은 없습니다.

3부: 인간에 대한 해킹

지금 내가 멕시코나 인도, 앨라배마의 구식 학교를 다니는 15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어른들을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들 또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방법이었고, 이는 그들이 세상을 잘 알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이 느리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릅니다. 점점 더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며, 어른들이 말하는 정보가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지, 아니면 오래된 편견인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요? 기술일까요? 하지만 기술은 더 위험요소가 많은 도박입니다. 기술은 여러 면에서 당신을 도와줄 수 있지만, 기술이 당신의 주도권을 가져갈 경우 이제 당신은 기술의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전, 인류는 농업을 발명했지만, 이 기술은 소수의 엘리트만을 살찌웠고 다수 인류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가 뜰 때 부터 해가 질 때 까지 잡초를 뽑고, 물을 나르고, 뜨거운 태양 아래헤서 옥수수를 수확해야 했습니다. 같은 일이 지금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술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가 확실하다면, 기술은 당신이 이를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삶에서 원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면, 기술이 당신의 목표를 조종하고 당신 삶을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기술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당신은 점점 더 기술이 당신에 봉사하기 보다 당신이 기술에 봉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환한 스마트폰에 처박고 배회하는 좀비들을 본 적이 있나요? 당신은 그들이 기술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기술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럼 당신 자신에게 의지해야 할까요? 이 말은 세서미 스트리트(역주: 미국의 교육용 프로그램)나 옛날 디즈니 영화에서 나올때는 그럴듯하게 들렸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디즈니도 이제 이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 앤더슨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려 할 때 조차도 외부에서 가해지는 조작의 희생양이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의 소리는 절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우리 뇌가 본래 가지고 있는 생화학적 오류 외에도 국가나 이데올로기, 상업적 광고에 쉽게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생명공학 기술과 기계학습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은 더 쉽게 조작될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코카콜라, 아마존, 바이두 혹은 정부가 당신을 조종하는 방법을 파악하고 당신이 반응하는 약점을 누를 때, 과연 당신은 당신의 진짜 자신과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자신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 교훈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교훈이기도 합니다.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죠. 사실 철학자와 선지자들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충고는 21세기 오늘날 그 어떤 과거보다도 더 중요한 조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자나 소크라테스의 시대와 달리, 이제 당신을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이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코카콜라, 아마존, 바이두, 그리고 정부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스마트폰이나 당신의 컴퓨터, 당신의 은행 계좌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을 속속들이 이해하려 합니다. 당신은 오늘날이 컴퓨터 해킹의 시대라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은 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는 바로 인간을 해킹하는 시대입니다.

알고리듬은 지금도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사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보고 있습니다. 곧, 당신의 모든 걸음걸이, 모든 호흡, 모든 심장 박동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빅데이터와 기계학습 기술을 이용해 당신에 대해 점점 더 잘 알게될 것입니다. 이 알고리듬이 당신을 당신보다 더 잘 알게되는 순간, 이제 그들은 당신을 조종하고 조작하게 될 것이며, 당신은 그저 이를 지켜볼 수 밖에 없게될 것입니다. 당신은 매트릭스와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는 매우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알고리듬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신보다 더 잘 이해한다면, 당신을 움직이는 권력 또한 알고리듬이 가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은 알고리듬에게 모든 권력을 기꺼이 이양하고 알고리듬이 당신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해 주리라 믿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저 편안하게 세상의 발전을 지켜보면 됩니다. 사실 당신이 특별히 해야할 일도 없습니다. 알고리듬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줄테니까요. 그러나 혹시 당신이 자신의 존재와 미래에 어느 정도 주도권을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알고리듬보다, 아마존과 정부보다 더 빨리 뛰어야 하며, 그들이 당신에 대해 파악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더 잘 알아야 합니다. 빨리 뛰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모든 환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건 매우 무겁기 때문입니다.

(와이어드, Yuval Noah Har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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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들어와서 글 하나 퍼옴.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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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게 못되게 굴지 마세요


“내게 가장 혹독한 비평가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 없이 자기 위안으로 삼고 말 글귀도 아닙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실제보다 더 과장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부정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성공보다 실패, 실수, 결함 등 부정적인 대상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도록 진화했다는 것이죠.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심리학 및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같은 대학의 건강한 마음 연구소(Center for Healthy Minds)를 설립한 리처드 데이비드슨 소장은 “자기비판이 몸과 마음에 해로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비판은 부정적이고 반성적인 사고로 이어져 생산성을 저하할 뿐 아니라 우리 몸속에서 염증 반응을 일으켜 만성 질병과 노화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낙담하긴 이릅니다. 이런 부정 편향은 극복할 수 있으며, 자기비판 속에서 얼마든지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왜 그렇게 나 자신에게 가혹한 걸까요?

가장 먼저 인간의 진화 과정을 탓할 수 있겠네요.

데이비드슨 박사에 따르면 인간의 뇌에는 생각과 행동을 계속해서 모니터링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 실수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실수했다는 사실부터 인지해야 하니까요.”

과식하거나 오늘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하는 등 자신의 기대나 목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스스로 비난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특히 개인의 안전이나 도덕성 등이 관여된 상황에서는 뇌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명확하게 하여 해당 경험으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데이비드슨 박사는 경험과 행동에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불필요한 자기반성의 덫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누군가와 나눴던 어색한 대화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또는 사소한 오타를 낸 것을 잊지 못하고 밤잠을 설친다면 자기비판이 오히려 해로운 역효과를 낳은 것이죠.

심리치료 통합 학술지(Journal of Psychotherapy Integration)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종류의 자기비판은 우울증, 불안, 약물 남용, 부정적인 자아상 등의 원인이 되고 의욕 및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는 등 개인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격과 사회심리학 게시판(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에 게재된 또 다른 연구는 사람들이 자기비판으로 인해 실패에 집착하게 된다고 밝혔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로 정해둔 5개 목표 중에서 아직 3개밖에 못 끝냈다고 나 자신을 질책하고 스스로 화를 내면 낼수록 나머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확률이 줄어든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우리는 어김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Catch-22, 즉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처럼 느껴진다면 정확하게 짚으신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결함을 찾아내어 사소한 것까지 들춰내고 비판하도록 진화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역효과가 발생한 것이죠.

해결책은요? 소위 말하는 ‘자기자비(self-compassion)’입니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 심리학과의 크리스틴 네프 교수는 자기자비란 자신의 결함이나 실패와 마주했을 때 이해심을 바탕으로 관대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목표 달성에 있어 자기비판보다 자기자비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경쟁력을 잃고 안주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자비를 실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연구 결과를 보면 이러한 두려움은 전혀 근거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실제로 몇몇 연구를 통해 자기자비가 동기 부여와 긍정적인 변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지난 2016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자기자비를 통해 나를 더욱 폭넓게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고, 이는 곧 자기계발로 이어지며, 자기자비에 집중함으로써 후회가 닥치는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죠. 전문가들은 결국 자기자비의 핵심은 자신의 실수에 집착하여 자기 파괴적인 굴레에 갇히는 상황을 피하는 동시에 자신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바탕으로 실수를 떨쳐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돌봄 연구소(Center for Mindfulness)의 소장이기도 한 매사추세츠 대학교 의과대학의 주드슨 브루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뇌에 나 자신을 바라보고 생각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반성이나 걱정을 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때, 혹은 스스로 판단할 때 자기관계적 사고(self-referential thinking)에 빠지면서 뇌에서 자기관계적 사고를 담당하는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 나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때 해당 뇌 부위가 진정됩니다.

자기자비를 실천하고 스스로 너그러워지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자기자비를 위한 3단계 실천 전략

첫째,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데 있어 새로운 접근법을 최소한 시도라도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세요. 나 자신을 너무 재단하고 판단하지 않기,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 자기자비 실천하기 등 어떤 방법이어도 좋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최선을 다해 나 자신에게 친절하게 행동하세요. 나를 아껴주는 겁니다.

“스스로 가혹하고 못되게 행동하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드는지 돌아보고, 자신에게 친절하게 행동할 때와 비교하여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지를 느껴보는 연습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브루어 박사의 말입니다.

생각과 감정을 인지하고 내려놓는 훈련 중 일상에서 가장 실천하기 쉽고 검증된 방법의 하나가 명상입니다. 마음을 돌보는(mindfulness) 명상을 시도해 보세요. 수많은 판단과 이야기와 추측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호흡을 통해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마음돌봄 명상입니다. (더 읽기: 명상하는 방법)

부정적인 자기대화(self-talk)의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방법의 하나는 에너지를 외적인 활동에 집중함으로써 올바른 관점을 정립하고 자신 이외의 삶의 요소에서도 의미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The Power of Meaning: Crafting a Life That Matters>의 저자 에밀리 에스파니 스미스는 다른 활동을 활발하게 해보라는 조언을 건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머릿속에서 스스로에 관한 생각을 멈추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 거에요.”

둘째, 자신에 대한 비판을 마주하면 친절함으로 대응하세요. 내면의 비평가가 “넌 게으르고 쓸모없어”라고 비난할 때 이렇게 맞서보는 겁니다. “난 최선을 다하고 있어.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니?”

브루어 박사는 자기자비를 장기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세 번째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셋째, 자기비판에 갇혔을 때와 자기비판을 내려놓았을 때, 각각 어떤 기분이 드는지 그 차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자 노력하세요.

그래야지만 보상에 의해 작동하는 뇌의 학습 체계를 가동할 수 있어요.

브루어 박사는 우리 뇌에는 안와전두피질이라는 부위가 있는데, 이 부위는 언제나 “더 크고 좋은 보상(the bigger better offer)”을 갈망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와전두피질은 X와 Y를 비교해서 Y가 덜 고통스럽거나 더 많은 기쁨을 주는 선택지일 경우 Y를 선택하도록 학습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실수하고 나서 자신을 호되게 나무라는 대신 심호흡하는 것이 훨씬 더 기분 좋은 대안이겠죠?

네프 박사는 “친구와 대화한다고 생각해 보면 쉬워요. 만약 여러분이 ‘나는 뚱뚱하고 게으르고 직장에서도 실수투성이야’라고 친구에게 말했을 때, 친구가 ‘맞아. 넌 완전 루저야. 그냥 포기해. 왜 살아?’라고 대답한다면 과연 의욕이 생길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스스로 친절해지는 것의 핵심은 바로 ‘친구를 대하듯 자기 자신을 대하라’입니다. 자기학대를 자기자비로 대체하려면 습관이 들 때까지 꾸준히 연습해야 하죠.

다음번에 또다시 스스로를 비난하며 죄책감의 굴레에 빠지려는 찰나, 같은 상황에 있는 친구를 나는 어떻게 구하려고 했을까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실천하세요. 처음엔 좀 어색하겠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 연습하고, 또 연습하세요.

그리고 혹시 다섯 번째 시도에서 잠시 삐끗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명심하세요.

여러분은 이미 네 번이나 시도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는 것을요.

(뉴욕타임스, Charlotte Lieberman)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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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국가가 우리에게 주는 것

On National Greatness



조국의 위대함은 개인에게 무엇을 해주는가? 뭔가 중요한 걸 해주기는 하는데 분석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지난 2세기 동안 누려왔던 위대한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정치적 위상의 변화가 개인의 심리에 야기하는 변화를 첨예하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내가 1896년부터 알아온 미국에서는 정반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그 변화가 완전히 성취되려면 멀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상반되는 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국가적 성공이 개인적 성취에 자극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테네인은 페르시아인을 쳐부수고 나서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고 아이스킬로스Aeschylos(BC525~BC456년,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를 낳았다. 영국인은 스페인 함대를 물리치고 나서 세익스피어를 낳았다. 프랑스 문학의 황금기는 루이 14세가 거둔 승리들과 연관이 있었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국가적 노력의 성공과 연관 짓지 않고서는 찾아보기 히든 일종의 개인적 생산성이 존재한다. 그것과 관계 없는 개인적 생산성도 있기는 하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은 자신들의 음악전 천재성을 자극하는 국가적 성공을 누린 바가 없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1632~1677년, 네덜란드 철학자로 유대인이었다)는 억압받는 민족과 패배의 과정을 밟고 있던 국가에 속했다. 개인적인 위대함과 사회적 원인에 의존하는 위대함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공적인 번영에 의지하는 성취의 가장 뚜렷한 예로 건축이 있다. 건축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금세기 건축 분야에서는 미국이 세계를 주도해왔다. 다른 나라들이 거부한 기회들을 미국의 건축가들은 따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건축이 보통 사람들에게 부응해왔다.


뉴요커는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해 말하지만 그 자부심이 언제나 뉴욕 시정 덕분에 생긴 것은 아니다. 건축가의 성공은 어느 정도는 모든 시민의 성공이기도 하다. 만약 뉴욕 시민이 외국인과 논쟁을 벌인다면 외국인에게는 내세울 만한 마천루가 없다는 점도 그에게 자신감을 주는 한 이유가 된다. 요듬 들어서는 이런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지만 당분간은 계속될 것이다. 


국가적 성공의 효과는 청년들과 관련 있는 분야에서 극대화된다. 개인적 차원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재는 능력으로, 이는 부분적으로는 타고나며 부분적으로는 교육의 결과로 얻게 된다. 둘째는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조건이다. 


어떤 멍청한 인간이 진정한 천재는 늘 신중하다는 관념을 세상에 뿌려놓았다. 사실은 정반대다. 어떤 청년이 신중하다면 설사 능력이 있더라도 부모와 동료들로부터 조롱받는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천재라고 자부해봐야 검증되기 전까지는 비웃음이나 사게 될 테니까.


젊은이들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은 누구나 위대한 업적을 남길 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주는 분위기, 따라서 그들의 자부심이 질투에 따른 조소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분위기에서 사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업과 직업 및 건축(이것은 사업인 동시에 예술이다) 분야에서의 성공이 청년이 품어야 할 자연스럽고 가치 있는 야망으로 인식되고 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음악으로 성공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주위 어른들의 그러한 기대는 젊은 시절의 야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국가적 성공의 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데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훈은 이것이다. 청년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기대하라. 그러면 당신은 그걸 얻게 될 것이다. 적게 기대하면 결코 기대하는 것 이상은 얻지 못할 것이다.(1932. 1. 20.)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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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 관한 글

글쎄 아직은 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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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at Sea


내 생애 두 번째로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첫번째는 35년 전이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비교해보면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


35년 전에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이는 없었으며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성공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게 가족이란 자유를 구속하는 외부의 권력으로 다가왔고 세상은 개인적인 모험의 대상일 뿐이었다. 전통이나 윗사람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나만의 생각을 하고 싶었고, 나만의 친구를 사귀고 싶었으며, 나만의 보금자리를 찾고 싶었다. 버팀목에 기대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느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가 넘치는 활력 덕분이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때 나는 바다에서 맞는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즐거운지 알게 됐고, 승무원들이 최대한 축제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도 흥겨웠다. 배는 좌우로 엄청나게 흔들렸는데,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납작한 선박용 트렁크들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객실 이쪽저쪽으로 미끄러졌다. 그 소음이 커질수록 내 웃음소리도 커졌다. 모든 게 끝내줬다.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누군가의 애정이, 차가운 세상의 한기를 몰아내 줄 사람의 온기가 필요해진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대개 그렇듯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즉 죽음이나 노화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세속적인 갖가지 불행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좀 더 형이상학적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살다 보면 겪게 마련인 중대한 재난들, 이를테면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평범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잔인성을 발견하는 일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드는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뒤로 35년 동안 이런 나쁜 일들을 경험하며, 인생에 대해 내가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태도마저 바뀌었다. 도덕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도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가의 기분으로 즐기지는 못할 거다. 나는 자식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고, 가족과 더불어 따뜻한 난롯가에 앉고 싶고, 역사의 연속성과 위대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고 싶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중년들이 크리스마스에 즐기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기쁨이다. 그 점에서는 철학자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평범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음울한 고독을 달래는 데 있어 그런 기쁨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즐거운 모험이었던 바다에서의 크리스마스가 지금은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대중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으면서 홀로 서기를 택한 사람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감미로운 즐거움이 모두 그러하듯 가정에서 얻는 기쁨도 의지를 약화시키고 용기를 훼손할 수 있다. 가정에서 따뜻하게 보내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수평선이 선사하는 해방감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이런 아름다움은 어리석고 사악한 인간들의 손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비틀거리는 중년의 이상주의에 힘을 불어넣는다.(193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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