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삶에서 떨어져 있는 무엇으로 여기기 쉽다. 그런 식으로 유혹하는 무리들이 설치기도 하고.

살아가는 힘을 주는 명상이 필요하고, 그런 명상을 볼 줄 아는 눈도 필요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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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 사라진 시대

The Decay of Meditation



100년 전에는, 그리고 150년 전에는 더욱더 그랬는데, 부유한 사람들이 지금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확실히 좀 더 교양이 풍부했다. 그 시절 부자는 당연히 라틴시를 인용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품평하고 고전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부자들은 대개 자기 나라의 문학과 (프랑스인이 아니더라도) 프랑스 문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박식함을 교수들에게서나, 게다가 분야별로만 기대할 수 있다. 이 교수는 라틴어를 알고 저 교수는 옛날의 대가들을 안다. 또 음악을 아는 교수가 있고, 그 와중에도 현대문학의 가장 쓸데없는 지식까지 아는 교수도 있다. 부자들은 그런 지식을 갖춘다는 걸 체면이 깎이는 일로 생각할 것이며, 무지는 사회적 지위의 보증서가 되어왔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홉 뮤즈들의 이름이나 황도 12궁의 별자리를 알아야만 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어린 시절 이 모두를 배웠고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현대 세계에는 여가라고는 거의 없다. 사람들이 옛날보다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라 오락도 일처럼 수고로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리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지혜란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씩 농축되는 것인데 누구도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쟁 방지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절박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고민하지 않아도 상황이 저절로 해결되리라 기대하면서 어깨만 한 번 들썩하고는 깨끗이 잊어버린다. 그러나 손 놓고 있어도 상황이 그렇게 친절하게 전개될 리는 없다.


이런 결과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절약하는 장치들 때문에 초래됐다. 한 예로 이동이란 문제를 살펴보자. 여행 속도가 빨라질수록 여행에 들어가는 시간도 많아진다. 요즘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집에서 한 시간 걸리는 사무실까지 간다.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같은 얘기가 적용된다. 예전에는 자신의 말이 심하게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이웃들을 방문했지만 지금은 100마일 이내라면 어디든 방문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전화에 대해 따져 보자. 언젠가 귀가 어두운 노신사가 전화를 걸어와 장거리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말했다. "네, 버트런드 러셀입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요?" 나는 좀 더 큰 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지만 노신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요?" 마침내 내가 허파가 터져나갈 정도로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알아듣고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 그건 알고 있었소." 대화를 더 나눌 시간은 없었다. 전화, 참 유용한 발명품이다.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쌓여 바쁜 하루하루를 채우면서 마치 일이 마무리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완전히 허구다. 퀘이커 교도들은 대다수 현대인들보다는 좀 더 지혜로운데, 내 생각에는 그들이 수행하는 침묵의 명상 덕분이 아닌가 싶다. 나는 우리가 매일 30분씩만 말없이 부동자세로 있을 수 있다면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모든 사안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맑은 정신으로 처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휴전 기념일(제1차 세계대전 휴전을 기념하는 11월 11일)에 단 2분만이 침묵에 할애되고 한 해의 나머지 모든 시간이 대체로 무익한 소란에 바쳐진다. 참으로 부당한 비율이 아닐 수 없다. 침묵이 좀 더 길어지면 무익한 소란도 좀 더 줄어들 텐데 말이다. (1931. 11. 4.)


Posted by 익은수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