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시 모임이 있었다. 원고 마감 때문에 며칠 잠을 못 이룬 터라 힘들었다. 모임이 끝나고 다시 원고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갔다.

다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일 때가 많을 것이다. 훌쩍 떠나는 여행을 그리는 마음은 비슷할 터이다. 나도 가끔은 잡다한 일상 내려놓고 떠나고 싶은 때가 있으니. 

여행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타자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길에 나서는 게 요즘의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고 여행하는 사람들을 얕잡아보려는 뜻은 아니다. 맛집을 순례한다고는 하지만 맛집의 음식을 정복하러 가는 것 같고, 여행지 또는 관광지를 찍고 떠나는 여행도 땅밟기하듯 정복하고 떠나는 것 같은 건 왜일까? 삐딱해서일까? 글쎄...

그래도 조용히 한 곳에 오래 머물러 가만히 타자(자연)를 들여다보는 여행은 자주 가고 싶다. 그런 여행은 결국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 같다는 생각이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어제 만난 시나 적어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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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며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솓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름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세상 끝 등대 I

                                                     - 박준

내가 연안(沿岸)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

                                                      - 강제윤

집을 떠나 자연의 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바쁘게 걷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시  속도의 노예가 되는 일이다.


길가의 풀과 나무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새소리를 듣지 못하고 정신 없이 걷는다면,

또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풍경을 놓친다면

길에 얽힌 이야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대체 이 자연의 길을 걷는 의미는 무엇일까


길을 나서려면 느리게 걸어야 하리라.

온갖 해찰을 다 부리며 걸어야 하리라.

길에서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위는 잊어야 하리라

목적지에 가지 못한들 어떠랴

길을 벗어나 낯선 길로 들어선들 또 어떠랴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 그 자체가 아닌가.



고요한 길

                                                                                         - 김사인

지나는 사람 없고

시든 엉겅퀴 대궁만 멀춤할 때 늙은 호박 엉덩이 무거워져 이제 혼자는 못 일어설 때

늦은 봉숭아 꽃잎 몇낱과 쇤 고구마줄기와 아주까리, 한사코 감고 오르는 까끄랭이 환삼과 개미들과

먼 데 누워 계시는 윗대 어른들 생각과 다시 콩밭과

잘 벌은 깻잎과 고추밭과 열무 배추와 불쑥한 토란대 몇 뿌리와 순간 까투리 푸다닥 날고, 문득 아픈 아내 생각과

밭둑 수숫대와 영글어가는 나락들과 엉뚱한 흑장미 한그루와

처서 백로 지나 오오 바람도 흙도 풀도 볕에 잘 마른 것,

개미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들로 나는 두루 그득해져

자불자불 졸리면서

전주 이씨네 산소 치장이나 한번 볼까 길을 바꿔 잡으며

어머니 비석에는 남원 양 아무개 여사라고 써볼 생각과 그럼 학생부군 아버지는 뭐라고 하나 싱거운 생각도 들다가

이 별의 한 모퉁이에 나도 머무는 데까지 잘 머물다가 어른들 가시는 것 봐드리고, 장인 장모님도 잘 배웅해드리고, 친구들과도 오명가며 지내다가, 세금이나 과태료 같은 거 밀린 것 없이 있다가, 아이들 짝 만나 서로 돌봐가며 지내는 것 잠깐 보다가, 좀 아파보니 아파서 죽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아내 말마따나 너무 많이 앓지는 말고, 그만할 때쯤 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여뀌풀꽃 분홍 수줍고

배추잎 하나가 우산만 하고

다만

고요한 길.




낯선 곳

                                       - 고은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명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 터키의 혁명적 서정시인이자 극작가로 모스크바 유학시절 마야콥스키의 영향을 받았고 귀국 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시 《죽은 계집아이》, 희곡 《다모클레스의 칼》 등이 있다.




주일 2

                                       - 천상병

1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2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나는 생각하기를

                                               - 뵈른스트에른 뵈른손(노르웨이의 세계적 문호)

나는 생각하기를 위대해져야겠다 해서

우선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리하여 나와 모든 것을 잊었다.

여행 떠날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때 나는 한 소녀의 눈동자를 보았더니

먼 나라는 작아지면서

그녀와 함께 평화로이 사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처럼 여겨졌다.


나는 생각하기를 위대해져야겠다 해서

우선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리하여 정신의 크나큰 모임에로

젊은 힘은 높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가르치기를

하느님이 주는 최대의 것은

유명해지거나 우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 했다.


나는 생각하기를 위대해져야겠다 해서

우선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향이 냉정함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오해받고 소외되어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통해 내가 발견한 것은

만나는 사람의 눈마다 사랑이 있다는 것

모두가 기다린 것은 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인생은 새로워지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 에리히 캐스트너(독일의 대표적인 어린이책 작가이자 시인. 나치 독재에 맞선 지식인)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시간 속을 뚫어 먼 길을 갑니다.

우리는 모두 창밖을 내다봅니다.

내다보는 데에도 이제 싫증이 납니다.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달려갑니다.

어디까지 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옆 사람은 잠자고 있고, 다른 사람은 한숨 쉽니다.

또 한 사람은 쉴새없이 지껄이고 있습니다.

역 이름이 방송됩니다.

해마다 날마다 달리고 있는 기차는

도착할 종착역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짐을 풀고, 우리는 짐을 쌉니다.

무엇이 어떻게 된 셈인지 알지 못하며,

내일은 어디를 지날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차장의 입가에

애매한 미소가 감돌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밖으로 나갑니다.

요란스럽게 기적(汽笛)이 웁니다!

기차는 천천히 다가가 멈춥니다.

죽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립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기차에서 내립닌다.

어머니가 비탄에 젖어 웁니다.

죽은 사람들은 말없이

과거라는 이름의 플랫폼에 서 있습니다.

기차는 시간을 꿰뚫고, 다시 달려갑니다.

왜 달려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일등칸은 텅 비었습니다.

뚱뚱한 사내 하나가

빨간 빌로드 시트에 등을 기대고 앉아

괴롭게 숨쉬고 있습니다.

그는 혼자 있고 그 사실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멀찌감치

나무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현재에서 미래로 여행합니다.

우리는 모두 창밖을 내다봅니다.

내다보는 일에도 이제 싫증이 납니다.

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타고 달려갑니다.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차 칸에 있습니다.




여행

                               - 메리 올리버

어느 날 당신은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고

그것을 시작했다

당신을 둘러싼 목소리들이

계속 불길한 충고를 하고

온 집안이 동요하고

오래된 것들이 발목을 잡았지만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라고 소리쳤지만

당신은 멈추지 않았다

바람이 억센 손가락으로

주춧돌을 들어올리고

주변의 슬픔이 한없이 컸지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이미 충분히 늦은 황량한 밤

길에는 부러진 가지와 돌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떠날 때

구름들 사이로 조금씩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서서히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구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삶을 구원하기로 결심하고

세상 속으로 점점 깊이 걸어갈 때

언제나 당신 곁에 있어 온 그 목소리를



The Journey

                                                _ Mary Oliver

One day you finally knew

what you had to do, and began,

though the voices around you

kept shouting

their bad advice --

though the whole house

began to tremble

and you felt the old tug

at your ankles.

"Mend my life!"

each voice cried.

But you didn't stop.

You knew what you had to do,

though the wind pried

with its stiff fingers

at the very foundations,

though their melancholy

was terrible.

It was already late

enough, and a wild night,

and the road full of fallen

branches and stones.

But little by little,

as you left their voices behind,

the stars began to burn

through the sheets of clouds,

and there was a new voice

which you slowly

recognized as your own,

that kept you company

as you strode deeper and deeper

into the world,

determined to do

the only thing you could do --

determined to save

the only life you could save.




Posted by 익은수박
,

정운영 선생이 쓴 <광대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열심히(?) 읽는 흉내를 낸 적이 있었다. 좋은 책이라는 생각은 들었는데, 좀 게으르게 읽은 듯하다. 그나저나 이 책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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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을 전공하려는 J양에게>


J양에게!
  "중국에 대해 기행문을 쓰려거든 그곳에 도착한 지 사흘 이내에 쓰시오." 라는 어느 서양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흘이 지나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물과 조금씩 친숙해지면, 오히려 점점 더 당황하게 되어, 마침내는 붓조차 들지 못한 채 그 시도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를 염려해서 일러 준 말이겠지요. J양이 잡지사로 보낸 편지를 전해 주면서 편집자는 나에게 '가장 자상하고 가장 친절한' - 말하자면 최상급의 형용사가 두 번이나 반복되는 - 회답을 부탁했지만, 아무래도 이 편지가 수신인을 잘못 짚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J양은 아마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으로서 경제학이란 그 '삭막한' 느낌의 학문을 - 실제로 토마스 카알라일은 "경제학은 우울한(dismal) 학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 전공으로 선택해도 좋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생이라는 나무는 그것을 가꾸는 과정의 인고(忍苦)가 그 열매를 따는 순간의 희열보다 더 소중한 법이니, 지금의 고민에서 쉽게 도피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과 적극적으로 대결하십시오. 내용은 다르나 내게도 지금 그와 비슷한 고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경제학을 하나의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예컨대 한 권의 소설책을 덮으면서 던질 수 있는 '재미있다'거나 '지루하다'라는 식의 즉흥적인 감상을 그대로 경제학에 옮기는 일이 결코 용이하지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대해 기행문을 써야 할 한 서양인의 당혹과 곤란이 '잘못된 수신인'에게 하나의 현실로서 다가선 셈입니다.


  경제학이라는 말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상은 아마 '밥'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밥―그것이 빵이나 스파게티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경제학입니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라는 철학자는 "인간이란 요컨대 먹는 존재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만,실상 이 지극히 평범한 발견이야말로 경제학이 성립하는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블라디미르 두진체프의 소설 제목은 아주 지당하고 매력적인 말씀이나, "밥 없이 살 수 있는 녀석이 있으면 나서 보라"는 투박한 항의 또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미 짐작했으리라 믿으나 밥은 그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한 보따리의 소비재일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밥은 한 사회의 발전과 쇠퇴를 규정하는 최초의 요인입니다. 따라서 그 밥을 어떻게 만들고 또 어떻게 나누느냐는 방식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가 형성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밥을 만드는 행위를 경제학에서는 '생산'이라고 합니다. 이 생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토지나 천연 자원과 같은 '노동도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일정한 조직과 통제 아래서 이들 생산수단 (노동대상과 노동도구)을 실제로 사용하는 '노동력'의 역할입니다. 이렇게 생산의 원천을 노동이라 할 때, 경제학은 "태초에 노동이 있었으니 거기서 생산이 비롯되었느니라."고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토지와 같은 노동대상은 자연에 의해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노동력과 무관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에는 인간의 노동이 부가되어야만 그것이 경제적 의미를 가집니다. 냉장고 속의 작은 얼음 한 조각에는 신경을 쓰면서도 북극의 빙산에 무관심한―적어도 경제적으로는―이유는 그 자연의 결정에 인간의 노동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본이라고 부르는 생산 설비와 같은 노동 도구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전에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만들어 낸 노동의 집적이며 그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노동력은 토지나 자본에 선행하는 생산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생산의 주요 요소는 자연, 자본, 노동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노동대상, 노동도구, 노동력이며 그 중에서도 노동력이 가장 본원적인 요소라고 고쳐 말해야 됩니다.


  나는 위에서 밥을 어떻게 생산하느냐는 문제가 곧 그 사회의 문화적 형태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J양이 써 보낸 대로 경제학이란 요컨대 "한사람의 위대한 시인 보다 한 개의 발전소 건설을 더 소중하게 여기지나 않는지요." 라는 우려에 대해 얘기해보지요. 인간이 처음으로 경제 생활을 시작하면서 노동력은, 구체적으로 그 노동력을 지니고 노동하는 사람은 노동대상과 노동도구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사유 재산이란 개념이 도입되면서 노동력은 먼저 노동대상을 잃게 됩니다. 예컨대 힘세고 욕심 많은 어느 한 사람이 자연이 하사한 광활한 토지에 사유의 울타리를 둘러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은 여태까지 함께 열매를 거두던 땅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또 지금까지 같이 고기를 잡던 강에 다가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회가 점점 더 발전하여 자본주의 단계로 들어오면 노동력은 다시 노동도구와 분리됩니다. 현대의 어떤 노동자도 자기가 일할 공장을 스스로 짓거나 자기가 사용할 기계를 스스로 지고 일터로 가지는 않습니다. 경제학이란 '프리즘'을 통해 볼 때 인류의 역사란 한마디로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이 되풀이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노동의 주체인 인간은 자연(노동대상)이나 자본(노동도구)를 차례로 잃게됩니다. 주인어어야 할 노동력이, 즉 인간이 오히려 그 도구에 예속되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소외'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대의 경제학이 이 소외의 문제를 '대단히 소홀하게'다루는 것은 사실이고, 바로 그런 점에서 크게 비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경제학이 이 소외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란 그 본연의 사명을 끝끝내 포기할 수는 없기에, 아마 멀지 않은 장래에 경제학은 다시 J양이 걱정하는 그 시인에게 진정으로 용기 있는역할을, 주인의 자리를 빼앗은 노예를 고발하고 노예가 된 주인을 분발하도록 만드는 힘찬 노래의 제작을 요청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미 만들어 놓은 밥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문제, 즉 '분배'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나눈다는 행위는 그에 앞서 각기 이해가 대립되는 집단을 상정하게 만듭니다. 만약 서로 많이 가지려고 경쟁하지 않고, 서로 적게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경제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이해 대립의 집단을 경제학에서는 '계급'이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생산한 결과를 귀족이 채찍을 휘둘러 빼앗았으며,중세 사회에서는 농노에게 빌려 준 토지의 대가라는 명분으로 영주가 지대를 걷었으며,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는 생산물의 일부를 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자본가가 이윤으로 차지합니다. 계급이란 이렇게 밥의 생산과 분배에 참여하는 사람과 사람 즉 노예와 귀족, 농노와 영주,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사실상 노동대상과 노동도구를 차지한 집단과 노동력만을 지닌 집단의 갈등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은 투입보다 산출이 커야 한다는 단순한 산술에 의거하는데, 이 산출과 투입의 차액을 잉여라고 부릅니다. 만약 누가 100원을 비용으로 들여(투입) 120원을 수입으로 얻었다면(산출), 그는 이 사업에서 20원의 잉여를 낸 셈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잉여를 귀족의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에 탕진하고, 봉건제 사회에서는 농노로부터 수취한 지대를 영주는 고딕 사원을 세우는 일에 낭비해 버렸습니다. 


 물론 나는 이 이윤이라는 단어가 매우 건조한 느낌과 황폐한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던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윤이 때때로 아주 고약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도 모르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말은 J양 나이의 세대가 평가하는 사치 서열에서는, 예컨데 삶이니 사랑이니 혹은 휴머니즘이니 하는 개념들보다 훨씬 아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J양이 사회의 정신 건강을 위해 아주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하고 있는 미술관의 건립도 사실은 두부 공장의 건설과 마찬가지로 이 잉여가 경제 발전을 규정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고, 또한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그 사회의 문화 형태까지도 결정한다는 설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그 잉여의 생산과 분배가 전혀 정의롭지 못한 관계와 방법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밥을 만들고 나누는 가장 구체적인 현상에서 시작하여 그 밥을 만들고 나누는 사람들의 관계로 관심을 돌릴 때, 경제학은 '밥과 사람의 관계'를 따지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기에 내재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밝히는 학문으로그 본연의 사명을 회복하게 됩니다. 


  바로 그사람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현대경제학이 표상하고 있는 '경제인(homoeconomicus)'또한 그렇게 애착이 가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온통 도시를 압도하는 그 육중한 건물 안에서 하루 종일 자신의 머리를 컴퓨터의 단말기처럼 증권 시세표로 꽉 채우고 있는 비정한 표정의 금융인이나, 혹은 "하늘의 별을 헤아리기보다는 주머니 속의 화폐를 셈하기에 바쁜" 메마른 심성의 기업가에서 "한줌의 매력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J양의 지적을 굳이 탓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경제학이 그토록 약삭빠르기만 해서 항상 현실에 안주하거나 주변과의 타협 속에 연명해 온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경제학은 중세의 봉건 사회를 지배해 온 자연법 사상에 대한 처절한 항거에서 싹텄다는 사실이나 혹은 마르크스 이래의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 제도에 내재된 온갖 모순의 극복을 위해 여전히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다는 사정을 기억해두십시오.


  이제 그 경제학이 지닌 현실 개혁의 자세랄까 혹은 장래의 각오이랄까에 관해 얘기 해 보도록 하지요.  이 대목에서 내 개인의 기억을 하나 섞는 것을 양해하십시오, 벌써 한 20여 년 전, 그러니까 대학에 입학해서 첫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경제학이 얼마나 '훌륭한' 학문인가에 대해 추호의 의문이 없도록 처음부터 신입생의 머리를 철저하게 훈련시켜야 할 '중대한' 사명을 띠고 우리 앞에 나선 한 선배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엉뚱하게도 그것은 인류의 진보를 가져온 세 개의 사과에 대한 얘기였습니다우선 아담이 먹었다는 창세기의 사과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계명을 거역하고 자유 의지를 선택하게 한 최초의 상징이 된다는 것입니다다음으로 뉴턴이 보았다는 사과는 자연의 공포로부터 인간이 지식과 이성의 독립을 선언한 찬란한 기록이 된다는 것입니다마지막으로 윌리엄 텔이 쏜 사과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압제를 전복하고 자유와 사랑을 실현하게 만든 위대한 승리의 표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얘기가 그 선배의 창작인지 아니면 타인의 작품을 도용한 (?) 것인지를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은 확실히 산뜻한 재치 못지 않게 상당한 설득력을 지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이 아담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텔의 사과를 거치면서 인간은 차례로 신과 자연과 인간의 폭력으로부터 그 '자유의 영역'을 확대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사과에 대해서는 철학의 영역에서 그 시비가 가려지고, 뉴턴의 사과가 자연과학 분야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면,  텔의 사과는 필경 사회과학에서 관심이 대상이 되겠지요. 사실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소위 계몽사상은 바로 인간의 해방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랄 수 있는데, 그 중요한 계기는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776년 아담 스미드의 "국부론" 의 출판으로부터 현재까지 경제학 200여 년의 역사는 실상 밥을 만들고 밥을 나누는 자유를 독점하려는 집단과 그 독점을 저지하려는 집단이 벌인 처절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자연법 질서에 대항해 1770년대 '고전과 경제학' 이 태동되었습니다. 그후 1870년대에 들어와 이 고전파 경제학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란 이유로 '신고전파 경제학'이 이의를 제기했고, 반대로 그것이 너무 보수적이란 이유로 '마르크스 경제학'이 도전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신고전파 경제학이 지닌 이론과 정책의 오류에 대한 반동으로 1930년대에 '케인즈 경제학'이 성립되었습니다. 


 나는 이들 여러 이론이 실현하려고 애썼던 자유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 쓰지 않겠습니다. 다만 새로운 주장이 예전의 생각을 계승하기보다는 거부한 면이 압도적으로 크기때문에, 새 이론이 옛 이론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과의 '대결'이란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경제학은 J양이 여러 차례 우려했듯이 현실에 자족하는 무기력한 학문이 아니고, 끊임없이 스스로를'혁명하는' 학문이란 뜻입니다.


  위에서 나는 경제학이 밥과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해명하는 학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만, 앞의 관계는 한 마디로 풍족한 밥에 대한 요구이고 뒤의 관계는 자유의 영역 확대에 대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경제학을 통해서 '밥과 자유'라는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두 측면을 규명 할 수 있게 됩니다.


   J양!
  앨프리드 마셜은 경제학자들에게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함께 지니도록 당부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J양이 냉철한 지식(이론)과 열렬한 애정(실천)을 가지고 자신과 이웃이 밥을 얻고 자유를 찾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경제학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결코 자상하지도 못하고 또 친절하지도 않은 이 회신이 J양이 '미래'를 선택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광대의 경제학<까치 刊>)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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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멀리 다녀오고 난 다음 날 새벽에 꾼 듯한 꿈.


방충창 들고 사다리 오르기

2017.6.20.


언덕 위에 있는 듯한 집 안.

나는 언덕 위에 있는 듯한 집(아파트 같기는 한데 모호함. 암튼 높은 건물로 보임), 1층에 있는 창이 넓은 방에 있다. 저 멀리는 보이지 않고, 바로 앞에 언덕 아래가 내려다 보인다. 잔디가 덮인 듯했다. 언덕 아래는 방충창인지 뭔지 자재(?)들이 조금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방충창을 위로 가져다 달라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남자)에게 언덕 아래 가서 자재 쌓인 듯한 곳에서 방충창을 가져다 위로 전해주라고 함. 1층 넓은 창틀 앞에는 사다리가 놓여 있고, 창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짐. 그런데 방충창은 하나 달려 있음. 그리고 갑자기(처음부터 있어 보이진 않았음) 건물 위에서 아래로 사다리 쪽으로 고무로 된 검은 색 줄(동아줄 느낌?)이 늘어뜨려져 있다.

그는 언덕 아래로 가지 않고 내가 있는 1층 창에 달린 방충창을 떼어 검은 줄에 묶었다. 그러고 나서 방충창을 들고(이고? 짊어지고?) 사다리를 딛고 위로 올라갔다. 시야에서 사라지자 떨어질까 조금 조마조마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아무 일은 없었다. 방충창을 아래서 가져오지 않고 바로 앞에 있는 창틀에서 뗀 게 의외였음. 나는 미안한 또는 고마운 마음에 바로 앞 창틀에 방충창을 다시 새로 혼자서 끼움. 신기하게 방충창이 바로 앞에 하나가 나타났음. 두어 번 낑낑대다 방충창이 창틀에 잘 맞춰짐.


끝.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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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었다.

무엇보다 언어 또는 낱말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고, 그런 생각을 바탕에 둔 듯한 소설 속 연인들의 대화 또한 관계 맺기를 다시금 돌아보게 해주는 듯도 했다.

그림자가 주는 느낌도 독특하고 신선했다. 우리는 저마다의 그림자를 안고, 아니 짊어지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뒷부분에 평론가가 쓴 글은 두루뭉술하게 막연하게 그리고 있던 느낌을 또렷하게 정리해주는 듯하여 부분부분 끄적여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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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_ 자명성의 해체

사람들이 말과 글에서 현실이라는 단어를 무신경하게 사용하는 바로 그 순간, 그 말과 글은 현실과 차갑게 무관해진다. 현실과 직면하지 않기 위해 현실이라는 말이 필요했다는 듯이 말이다. 문학의 할 일 중 하나는 우리가 현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명함에 관한 그 잘못된 믿음을 해체하는 일이다.

 

2. 환상_ 불행의 단독성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고 우리는 그 불행에 무뎌진다. 앞에서 소설가들은 현실이라는 개념의 자명성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소설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환상이라는 장치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중략)

그러니 이 작가의 환상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라면 상투적인 표현만큼이나 지나치게 유려한 표현도 때로는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결벽증이 낳은 자구책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3. 언어_ 일반화의 폭력

여러분도 이런 신기한 사실을 영락없이 관찰하셨겠지요? 즉 여러분이 예사 말투에서 듣거나 쓸 때는 완전히 분명한 어떤 낱말이, 또 여느 글귀의 빠른 진행 속에 끼여 있을 때는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않는 낱말이, 그것을 따로 살펴보려고 순환 과정에서 끌어내자마자, 그 일시적 기능에서 벗어나게 한 다음 하나의 뜻을 찾아 주려 들자마자, 마술과도 같이 거추장스러워지고 야릇한 저항을 끌어들여 뜻 매기려는 노력 모두를 좌절시켜 버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폴 발레리, <시와 추상적 사유>에서

 

모든 낱말들에는 때가 묻어 있다는 것, 그래서 시인이라면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런즉 언어 상황의 청소가 먼저 이루어져야 겨우 한 낱말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인용문의 취지다. 그 과정에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언어와 서먹해지는 순간을 겪는다는 것인데, 시인이 아닌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이와 같은 기묘한 체험을 가끔씩 하곤 한다.

 

4. 대화_ 윤리적인 무지

언어의 이런 폭력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중략) 블랑쇼는 글쓰기에서 언어가 근복전으로 세계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깊은 회의를 느꼈지만 말하기의 경우, 혹은 최소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경우는 사정이 다를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미지의 상대화 관계 맺기를 원한다면 유지해야만 하는 환원할 수 없는 거리는 말하기의 특별한 선물이다."

(중략)

A는 B일까요? 음, 아닐까요? 그렇죠, 역시 그런 것일까요?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대화가 조금 이상해 보이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왜일까, 대화들에 응당 개입하곤 하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 아닌지, 여기에는 독단적인 판단이 없고 그 판단의 강요가 없으며 효율을 위한 과속이 없다. 그 대신 어떤 윤리적인 '거리'가 있다.(중략) 지금까지 우리가 현실의 자명성, 불행의 평범성, 언어의 일반성 등으로 규정해 온 어떤 요소들을 대화 안에 들여놓지 앟기 위해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윤리적인 무지'의 대화라고 부르고 싶다. 세속적인 이해타산에 너무나 밝은 우리들의 대화는 똑똑하게 슬프고, 그런 것들에 무지한 이 인물들의 윤리적인 대화는 어쩐지 무의미해 보이면서 아름답다.


5. 사랑_ 연인들의 공동체

사랑이란 무언잇가, 연인의 가마 모양을 유심히 보면서(34쪽) 그를 유일무이한 단독자로 발견해 내는 일이고, 설사 내가 쇄골이 반듯한 사람을 좋아하더라도 쇄골이 반듯하지 않은 연인에게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39쪽)라고 말해 주면서 그 단독성을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절대화하는 일이다. (중략) 블랑쇼는 "연인들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에 있다."(<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고 말한 적이 있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훌륭한 연애소설은 그 자체로 억압적인 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서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인데,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간접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충분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두 연인이 보여 주는 어떤 윤리적인 관계의 가능성을 통해 시스템의 비윤리적인 비정함에 항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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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다 더 오래 남는 문장도 상징도 대화도 없는 그런 일회용 소설들, 그러나 이 작품은 다시 읽기를 유도하고 또 견뎌 낸다.이 소설의 문장들은 삶의 터전 바깥으로 비틀비틀 끌려 나가는 사람의 속도로 걸어가고, 이 소설의 상징들은 절반쯤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처럼 처연하게 흔들리며, 이 소설의 대화들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가장 진실해질 때의 그 표정으로 오고 간다. 그런 것들이 절규도 환희도 없이, 훈계도 산파도 없이......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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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다 보면, "아! 시가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딱 오는 듯하다.

시를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좋다!

이 글을 알게 해준 그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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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비행사


_산티아고 감보아


슬픈 이야기를 들려줄까 한다. 사실 지금 이 얘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다음 달로 미루거나 내년에나 풀어놓을 것인지, 아니면 아예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 중 하나인 나의 친구, 시인 이보 마카도(Ivo Machado)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최근에 구입한 금속제 모형 비행기를 눈앞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말했듯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포르투갈 아소르스 제도(諸島)에서 태어난 시인 이보 마카도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항공 관제사로 일했다는 점이다. 비행기가 하늘에 있는 길을 따라가도록 공항의 관제탑에 앉아 안내를 해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


이보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던 80년대 중반에, 아소르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산타 마리아의 공항에서 비행 관제사로 일했다. 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이 제도는 유럽과 북미의 딱 중간지점이다.

어느 밤, 그가 공항 관제탑에 도착했을 때, 그의 상사는 “오늘은 자네가 단 한대의 비행기만 안내하면 되네.”라고 말했다.

이보는 깜짝 놀랐다. 평소대로라면 열두 대 가량의 비행기를 관제해야 했다. 그러자 상사가 설명했다.

“특별 케이스야. 어느 수집가가 제 2차 대전 당시의 영국 폭격기를 런던 경매장에서 구입한 모양이야. 영국 비행사가 그 폭격기를 플로리다까지 운항해서 수집가에게 배달하는 임무를 맡았지. 그 비행사가 여기 기착했다가 캐나다 방향으로 가는 중인데 말이야, 폭격기의 비행성능이 신통치 못한데다가 폭풍까지 만났지 뭔가. 지그재그로 비행을 하다 보니 연료가 바닥이 나서 캐나다까지 갈 수도 없고 여기로 회항할 수도 없다고 연락이 왔네. 바다로 처박힐 판이지.”

상사는 쓰고 있던 헤드폰을 그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 친구 좀 진정시키게. 극도로 불안한 상태야. 캐나다 구조대가 출발했고 헬리콥터들이 추락 예상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고 설명하게.”


이보는 헤드폰을 착용하고 그 영국 비행사와 대화를 시작했다. 비행사의 목소리는 극심히 떨고 있었다. 그가 우선 알고 싶은 것은 바닷물의 수온이 어느 정도인지, 혹시 상어 떼가 나타나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이보는 상어 떼 따위는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런 뒤 그들은 사적인 대화로 들어갔다. 사실 관제탑과 비행사 사이의 대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비행사는 이보의 삶에 대해, 이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이보의 느낌에 대해 물었다. 이보가 자신이 시인이라고 말하자, 그 영국인은 기억하는 시가 있으면 낭송을 해달라고 청했다. 다행히도 내 친구는 월트 휘트먼, 코울리지, 에밀리 디킨슨 같은 시인들의 시를 몇 편 외우고 있었다. 이보는 낭송을 해주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소네트라든가 우주의 격렬한 분노와 맞서 싸우는 ‘늙은 선원의 노래’에 나오는 몇 구절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그러다 보니 그런대로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정도 평정심을 회복한 비행사는 이보 자신의 시를 몇 편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보는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시 몇 편을 그 자리에서 번역하여 이 영국인을 위해서 낭송했다. 단 한 명의 청중을 위해서, 고물 폭격기에서 외롭게 조종간을 붙잡은 비행사를 위해서, 캄캄한 바다 위에서 격렬한 폭풍과 싸우는 그를 위해서, 그리고 극도로 날카롭고 끔찍할 정도로 고독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위해서.

“당신 시에는 뭔가 깊은 슬픔이 있고 또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는 각성 같은 게 있군요,”

낭송을 듣고 나서 비행사는 감상을 조용히 전했다.

두 사람은 인생과 꿈에 대해, 깨지기 쉬운 것들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오고 말았다. 연료 게이지의 바늘이 붉은 눈금 아래로 떨어지자 폭격기는 바다로 추락했다.


이 일이 일어난 뒤, 관제탑의 책임자는 이보에게 집으로 퇴근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보가 이런 일을 겪고 당일 다른 비행기를 안내하는 것은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 이보는 그 사건의 결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구조대는 아무런 손상 없이 바다에 떠 있는 비행기를 발견했지만, 비행사는 사망하고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비행기가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의 충격으로 기내 구조물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그의 목을 강타했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군.” 이보가 내게 설명했다.

“그 비행사 때문에 내가 계속 시를 쓸 수 있는 것 같아.”


몇 달이 지난 뒤, 국제항공운송협회가 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보는 배심원단 앞에서 자신과 비행사가 나눴던 대화의 녹음 내용을 듣게 되었다. 배심원단은 그에게 수고했다는 감사의 말을 건넸다. 항공 역사상 관제탑의 주파수를 시로 가득 채웠던 건 그때가 유일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 사람 목소리를 꿈꾸곤 하네.”라는 이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마음으로 시를 써야 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쓰는 모든 말들이 한밤중에, 격렬한 폭풍에 맞서서, 사투를 벌이는 어느 외로운 비행사를 위한 것처럼.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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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세상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무속 신화. <원천강본풀이>

주인공(?) 오늘이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보는 삶의 본질(?), 뭐 이런 걸 생각해 볼 수도 있겠......^^

어여어여 작업해서 책으로 나와랏!

그림은 웹툰 <묘진전>을 쓰고 그린, 젤리 빈 님이 그려주었다.

대개 신화 이야기들이 가부장적인 게 많아 불편한 느낌이 강하다. 여기에 젤리 빈의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글과는 다른 젤리 빈 만의 컷과 만화를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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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적막한 들에서 원천강으로 _원천강본풀이

_ 신동흔 

 

먼 옛날에 적막한 들에 옥 같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아이를 발견한 사람들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어디에서 왔으며, 이름은 무엇이냐?”

저는 강림들에서 솟아나서 혼자 살았습니다.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릅니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느냐?”

학이 날아와서 한 날개를 깔아 주고 한 날개를 덮어 주며 먹을 것을 가져다 줘서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네가 오늘 우리를 만났으니, 오늘을 낳은 날로 하고 이름을 오늘이라고 하자꾸나.”

세상으로 나온 오늘이가 이리저리 다니다가 박이왕의 어머니 백씨부인을 찾아가자 부인이 말했다.

오늘아, 너의 부모님 나라가 어디인지 아느냐? 부모님 계신 곳은 원천강이다.”

원천강은 어찌하면 갈 수 있습니까?”

서천강 흰모래마을 별층당에 높이 앉아 글 읽는 도령을 찾아가 물으면 알 길이 있을 게다.”

오늘이는 바로 길을 나서서 흰모래마을 별층당을 찾아갔다. 저물 무렵에 별층당을 찾아 들어가자 청의동자가 나와서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오늘이입니다. 부모를 찾아 원천강에 가고 있습니다. 도련님은 누구십니까?”

저는 장상이입니다. 하늘의 명으로 여기서 늘 글을 읽고 있습니다.”

원천강 가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연화못 가에 연꽃나무한테 물어보면 알 길이 있을 것입니다. 원천강에 가시거든 왜 내가 늘 글만 읽어야 하고 성 밖으로 못 나가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꼭 알아볼게요.”

오늘이가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나 한참을 가다 보니 연화못 가에 연꽃나무가 보였다.

연꽃나무님, 부모님을 찾아 원천강에 가는 길입니다. 어디로 가면 원천강을 갈 수 있나요?”

원천강 길은 청수바닷가에서 뒹구는 큰뱀을 찾아가 물으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원천강에 가거든 내 팔자를 좀 알아다 주세요. 나는 겨울에 움이 뿌리에 들고 정월이면 몸속에 들었다가 2월에 가지로 가서 3월이 되면 꽃이 피는데 맨 윗가지만 꽃이 피고 다른 가지는 피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이는 답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하고 길을 떠나 청수바닷가를 찾아갔다. 바닷가에서 이리저리 구르는 큰 뱀을 만나서 원천강 가는 길을 묻자 뱀이 말했다.

길 인도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내 부탁도 들어주오. 다른 뱀들은 야광주를 하나만 물고도 용이 되어 올라가는데 나는 세 개나 물고도 용이 못 되니 어쩌면 좋겠는지 알아봐 주오.”

오늘이가 응낙하자 큰 뱀은 오늘이를 등에 태우고 물로 들어가 청수바다를 건네주었다.

가다 보면 별층당에서 글을 읽는 매일이라는 처녀가 있을 테니 길을 물어보구려.”

오늘이가 큰 뱀과 작별하고 길을 가다 보니 한 처녀가 별층당에 높이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오늘이가 다가가 인사하고 원천강 길을 묻자 매일이가 말했다.

길을 한참 가다 보면 시녀 궁녀가 우물가에서 울고 있을 겁니다. 그들한테 말하면 소원을 이룰 거예요. 원천강에 가거든 내가 매일 여기서 글만 읽는 팔자가 어찌 된 일인지 알아봐 주세요.”

. 그럴게요.”

오늘이가 그날 밤을 지내고 일찍 길을 나서서 한참을 가다 보니 시녀 궁녀가 우물가에서 흐느껴 우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왜 이렇게 울고 계신가요?”

우리는 하늘옥황 시녀로 죄를 지어 내려왔는데 이 우물물을 다 퍼내기 전에는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물을 푸려 해도 바가지에 큰 구멍이 나서 아무리 해도 퍼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이는 시녀들에게 정당풀을 뜯어서 덩어리를 만들게 한 다음 그것으로 구멍을 막고 송진을 녹여 칠하고는 하늘에 정성껏 기원을 올렸다. 그렇게 하고 물을 푸자 물이 한 방울도 새지 않아서 금세 우물물이 말라붙었다.

덕분에 저희가 살았습니다. 원천강에 간다고 하셨지요? 우리가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시녀들이 앞장서서 한참 동안 길을 가다 보니 멀리 낯선 별당이 보였다. 시녀들은 그곳을 가리킨 뒤 오늘이 앞길을 축복하고서 하늘로 올라갔다.

오늘이가 원천강에 가까이 가서 보니 주위에 높다랗게 만리장성이 둘러 있고 대문이 꽁꽁 닫혔는데 무서운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다.

저는 인간 세상에서 온 오늘이입니다. 이곳이 부모 나라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내 주세요.”

여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문을 열어 줄 수 없다.”

문지기가 냉정하게 가로막자 오늘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오늘이는 문 앞에 쓰러져 통곡하기 시작했다.

 

오늘이는 백만 리 인간 세상 먼 곳에서

어린 처녀 혼자서 외로이

산과 물을 건너고 온 고생 겪으면서

부모 나라라고 이런 곳을 찾아왔는데

이렇게도 박정하게 하는구나.

이 문 안에 내 부모 있으련마는

이 문 앞에 나 여기 왔건마는

원천강 신인들은 너무 무정하다.

빈 들에 홀로 울던 처녀

산 넘고 물 건널 적에 외로운 처녀

부모 나라 문 앞에 외로운 처녀

부모는 다 보았나, 제 할 일 다하였나.

박정한 문지기야 무정한 신인들아.

그립던 어머님아 그립던 아버님아.

 

오늘이가 하염없이 흐느껴 울자 돌 같은 문지기 심장에도 동정심이 우러났다.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 그 사실을 알리자 원천강 신인들이 그렇지 않아도 울음소리를 들었다면서 아이를 들이게 했다. 오늘이가 꿈꾸는 듯 안으로 들어가자 신인들이 물었다.

너는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느냐?”

그때 오늘이가 학의 깃 속에서 살던 일부터 지금까지 지나온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하자 신인들이 다가와 오늘이 손을 꼭 잡고서 말했다.

기특하구나. 우리가 너의 부모로다. 너를 낳은 날에 옥황상제가 우리를 불러 원천강을 지키라 하니 어찌 거역할까. 할 수 없이 여기 있게 됐지만 항상 네가 하는 일을 보면서 너를 보호하고 있었노라.”

서로 정담을 나눈 뒤 부모는 오늘이를 이끌고 원천강 구경을 시켜 주었다. 만리장성 둘러싼 곳에 문들이 나란히 달려 있는데, 첫째 문을 여니 화창한 날씨에 봄꽃이 만발하고, 둘째 문을 열자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며, 다음 문을 여니 황금 들판에 나무 열매가 가득하고, 또 한 문을 여니까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춘하추동 사시절이 그 안에 다 모여 있었다.

이제 저는 왔던 길로 돌아가렵니다. 오면서 부탁받은 일이 많은데 어찌해야 할지 알려 주세요.”

오늘이가 장상이와 연꽃나무, 큰뱀, 매일이의 사연을 이야기하자 부모가 말했다.

장상이와 매일이는 부부가 되면 만년 영화를 누릴 게야. 연꽃나무는 윗가지 꽃을 따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주면 다른 가지에도 꽃이 만발할 것이고, 큰 뱀은 야광주 두 개를 뱉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주면 용이 될 수 있지. 너는 연꽃과 야광주를 가지면 신녀가 될 게야.”

오늘이는 돌아오는 길에 먼저 매일이를 만나서 원천강에서 들은 일을 말했다.

하지만 장상이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데려다 드릴게요.”

매일이와 함께 길을 떠난 오늘이가 큰 뱀을 만나 원천강에서 들은 대로 말하자 뱀은 야광주 둘을 뱉어서 오늘이에게 주었다. 뱀은 곧바로 용이 되어 천둥소리를 내며 승천했다. 다시 연꽃나무를 만나서 답을 전해 주자, 연꽃나무는 윗가지 꽃을 꺾어 오늘이에게 주었다. 그러자 가지마다 고운 꽃이 피어나 고운 향기를 내뿜었다. 다음에 장상이한테로 가서 매일이와 서로 만나게 하니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만년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오늘이는 백씨부인을 만나 야광주 하나를 드린 뒤 옥황 신녀가 되어서 인간 세상 곳곳을 다니며 원천강 조화를 전해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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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덧붙여 신동흔 샘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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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강본풀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근래 들어 큰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신화입니다. 한 폭의 그림 동화 느낌을 주는 아련한 이야기지요. 하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세상이란 어떠한 곳이며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를 저 밑바탕으로부터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신화입니다.

이야기 속 오늘이 모습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궁금합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어린 소녀가 홀로 살았던 곳이 적막한 들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싸하게 합니다. 부모도 친구도 없이 넓고 황량한 들판에서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세상에 자기가 왜 생겨났는지, 어디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두루 아득했을 거예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방황하는 존재는 오늘이만이 아니었어요. 벌을 서는 것처럼 책만 읽고 있는 장상이와 매일이도 슬픈 사람들이었지요. 꽃이 제대로 피어나지 않아서 고민하는 연꽃나무도, 아무리 애써도 용이 되지 못해 바닥을 구르는 큰뱀,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울고 있는 선녀들도 다 외롭고 힘든 존재였습니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여러분이 이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있다면 저들의 모습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을 거예요.

이들 가운데 오늘이는 좀 특별했어요. 다들 그 자리에 머물러 고민할 때에 오늘이는 답을 찾아 길을 떠나지요. 여기서 부모님을 찾아가는 일은 제 존재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과 같아요. 부모님이 있어야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오늘이는 마침내 부모님을 만납니다. 거기서 오늘이는 답을 찾은 걸까요? 적막한 들의 외로운 삶에서 벗어나게 된 걸까요?

이야기를 보면 장상이 매일이와 선녀, 연꽃나무, 큰뱀 등은 답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한 것 같은데 오늘이는 명확해 보이지 않아요. 부모님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원천강을 구경했다는 내용뿐이지요. 그러고는 다시 돌아왔다고 해요. 고생 끝에 힘들게 만난 부모님인데 그렇게 금세 헤어지다니, 좀 이해가 안 가기도 합니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이러면서 매달리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이야기로 돌아가서 오늘이와 부모가 만나는 장면을 보면, 부모님은 오늘이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네가 하는 일을 보면서 너를 보호하고 있었다고요. 비록 몸이 곁에 없고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늘 오늘이와 함께였다는 말이에요. 얼핏 보면 엉뚱한 말 같지만, 잘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오늘이가 가진 것들, 그러니까 눈 코 입이나 팔다리, 감각과 판단력 같은 것이 다 부모한테서 온 것이지요. 그 힘으로 오늘이는 적막한 들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고요. 오늘이를 보살폈다는 학은 오늘이가 부모한테 받은 능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늘 부모님이 함께였다는 말, 꼭 맞지 않나요? 생각하면 부모님만이 아닙니다. 오늘이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 햇빛과 바람과 물과 열매와 풀……. 그 모든 것들이 늘 함께였지요. ‘적막한 들이라고 했지만 이 세상은 충만한 들이고 생명의 들이었던 거예요.

그 이치가 장상이와 매일이, 연꽃나무와 큰뱀 등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눈앞의 자기 자신만 보고 있을 때 그들은 외로운 존재이고 세상은 적막한 곳이었지요. 하지만 옆에 있는 다른 생명과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자 그 자신 환하게 빛나는 존재가 되고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됩니다. 사실은 그것이 본모습이었지요.

이야기는 이 모든 답이 있는 곳이 원천강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름도 독특한데 그 풍경은 더욱 특별해요. 춘하추동 사계절이 한데 모여 있다니 정말로 신기합니다. 사계절이 함께 모인 모습이란 어떠할까요? 무지개떡처럼 나란히 모여 있을까요, 색색의 꽃다발처럼 어울려 있을까요, 아니면 한데 뒤섞여서 자꾸 변하고 있을까요? 할 수만 있다면 꼭 찾아가서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건 한 가지 비밀인데요. 원천강을 찾아가는 일은 정말로 불가능할까요? 사계절이 한데 모여 있다는 원천강은 어쩌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말이에요. 한번 창밖의 들을 한번 내다보세요. 어때요. 거기 사계절이 함께 있지 않나요? 저 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으면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씨를 맺고 땅에 묻히고 또 싹이 나고 꽃이 피는 역사를 펼쳐 냈으니 그 안에 사계절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지난 사계절의 경험과 느낌과 추억이 다 깃들어 있으니 그 또한 하나의 원천강이라고 할 만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사계절의 준비도 우리 몸과 마음은 이미 하고 있는 중이지요. ‘에 갇힐 때 사람은 외롭고 무력하지만, ‘우리를 향해 활짝 열릴 때 사람은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가 됩니다. 고독한 소녀 오늘이와 하늘 선녀 오늘이의 차이이지요. 오늘이가 사람들한테 전해 준다는 원천강 조화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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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가 <아픔의 기록>에 쓴 '길 안내'

자꾸 읽어 보면 시라는 게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대목이 자꾸 끌린다.

"시는 사실(事實앞에서 무력하다무력하지만 인내력을 잃은 채 무력한 것은 아니다모든 것이 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시는 결과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결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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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기록>(존 버거) 시 소묘 사진 1956-1996

_ 존 버거

 

길 안내

 

열두 살 때부터 시를 썼다, 무엇이든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을 때면. 시는 무력감에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시의 힘은 무력감에서 나온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일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주변의 모든 사실과 빠른 속도로 타협한다. 몸과 기계는 나아갈 길을 찾는 눈을 따른다.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자유롭다는 우리의 느낌은 결정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극히 짧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리고 어떤 저항이나 지연이 있게 되면 우리는 이를 비스듬히 비껴 가는 반동(反動)의 계기로 이용한다.

모터사이클을 몰 때, 삶을 계속 이어 가고자 한다면 거기에 있는 것 이외에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사실(事實) 앞에서 무력하다. 무력하지만 인내력을 잃은 채 무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시는 결과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결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않는다.

 

시를 쓰는 동안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외한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인다. , 벗어 던진 신발, 그리고 머리 빗는 솔처럼, 시는 거기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 앞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세기 전 스페인 북서쪽에 있는 갈리시아인들의 마을 베탄소스(Betanzos) 이곳저곳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플로리다, 쿠바, 중앙아메리카로 이민을 떠났다. 그래서 베탄소스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내가 그리는 그림에다 계속 이 단어를 써 넣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사람은 바람을 누비듯 앞으로 나아가고, 시는 그 반대 방향에서 다가온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지나칠 때 둘 사이에 때로 함께 나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베탄소스와 같은 이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똑같은 연민의 마음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내 사랑이, 똑같은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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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가물가물하다. 내용이 다 날아가 버릴까 봐 떠오르는 대로 적어둔다.

어디선가 부르는 건지 신호를 보내는 건지 암튼 나에게 전해졌다. 아마 나를 부르는 것 같이 느껴지거나 들렸다.
여인네였는데, 좋아하는 사람 목소리인 듯하기도 형상 같기도 한 것 같다. 둘러 보니 조그마한 상자가 있다. 재질은 나무는 아니고 쇠로 된 상자 같아 보였다. 열었을 때 느낌은 쇠 같지는 않았지만.

상자를 열었더니 여인인 듯한 느낌의 형상으로, 녹색 계열의 배춧잎이 옆으로 누운 듯한 모습으로 있었다. 하나가 아니고 두 개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뭐 어쩌고저쩌고 이어져 있다는 식으로 텔레파시를 주고받은 것 같다. 구체적인 대화는 안 떠오른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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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


애국자가 없는 세상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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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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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한 뙈기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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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이야기


간밤에 꾼 꿈 이야기 하나 남긴다.


음. 일단 도로 폭이 넓어 보였다. 

그리고 도로에는 차들이 가득해 보였다. 

그럼에도 정체나 지체가 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도로 끝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멀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아무튼 끝을 가늠할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도로에 있는 차들은 일단 긴 트럭도 있어 보였고, 나머지는 승용차 승합차 들이었던 것 같은데 또렷하지는 않다.

나는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었다. 

정체나 지체도 아닌데, 오토바이 엑셀을 밟으면 부앙~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앞에 있는 긴 트럭을 앞서서 나아가지 못했다.

희한하게 어느 순간 오토바이 앞쪽에 연료 게이지가 보였다. 

내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연료 게이지 같았다. 

희미해 보이기는 했지만 연료 게이지게 연료가 가득하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게이지게 가득하나는 표시로 밝은 불빛이 켜지지 않고, 왠지 희미한 표시만 보이는 듯했다.

아무래도 연료가 없는 게 아닐까 짐작을 했다.


그러고는 깼다.

그리고 여전히 꿈은 칼라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아주 흑백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흑백꿈이라고 해두자!^^



(201706.4)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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