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퍼옴]

[놀이가 밥이다]“놀이 결핍, 사회적 대화 물꼬 터지면 문제 쉽게 풀릴 수도”

ㆍ(12) 전문가 5인 좌담

아이들의 놀이에 관심을 쏟아온 전문가들과 할 말이 많은 현장 교사·공무원들이 지난 19일 오후 경향신문에 모였다. 경향신문 ‘놀이가 밥이다’ 기획을 마무리하며 열린 좌담이었다. 생후 6개월부터 초·중·고·대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이기도 한 다섯 사람은 아이들의 놀이현실과 공동체 붕괴 상황이 한계에 이르렀고,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문제의 원인도 해법도 공동체 전체의 의식 전환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먼저 나설 때엔 용기가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슈여서 사회적 대화의 물꼬가 터지면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라는 점에도 뜻을 같이했다.

아이들의 놀이에 관심을 쏟아온 전문가·교사·공무원 다섯 사람이 지난 19일 오후 경향신문 ‘놀이가 밥이다’ 기획을 마무리하는 좌담을 하기에 앞서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경희궁 앞뜰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 2월25일 시작된 경향신문의 ‘놀이가 밥이다’ 기획이 한 달이 됐다.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선우현 = 놀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 ‘마실 문화’ ‘골목 문화’의 경험이 없는 젊은 부모들이 등장했다. 소위 ‘알파걸 시대’의 엄마들로, 아이들과 같이 입시경쟁에 뛰어든 세대의 부모들이다. 젊은 부모들은 ‘우리도 경쟁사회에서 살아왔다’ ‘놀이라도 줄여 유리한 고지를 점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 40대 이후 세대의 눈높이와 많이 다르다. 그 자신들이 놀이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는 세대인 것 같다.

문재현 = 놀이에 대한 인식이 현재 35살 정도를 전후해서 많이 다른 걸 볼 수 있다.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데, 1990년대 초·중반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로, 대학 나온 부모들의 통제를 심하게 받기 시작한 세대다. 1990년대 초 특목고가 생기면서 사교육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컴퓨터게임도 많이 생기고 아이돌 문화가 만들어져 어른들과 문화적으로도 분리됐다. 예전엔 언니·형들이 놀이를 이끌어줬는데, 그런 것도 사라지고 놀이도 개인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변화가 있었는데, 문화적인 통찰이나 사회적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그냥 어물쩍 넘어갔다.

한희정 = 교사들도 놀아본 교사와 놀아본 적 없는 젊은 교사들로 확연히 나뉜다. 특히 외환위기(IMF) 이후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직업 선망이 높아지면서 교대 커트라인이 확 높아졌는데, 이후 세대의 문화는 완전 다르다. 젊은 교사들 중에는 외고·교대 등 탄탄대로를 거쳐 교직에 바로 들어온 이들이 있다. 이 친구들은 아이들을 아주 잘 가르치지만 교육과정이 다 끝난 2월에 아이들과 뭘 할지 몰라 정말 괴로워하더라. 

편해문 = 맞다. 놀 줄 모르는 교사들이 실제 많다. 교사들을 만나면 놀이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게 아니고 교사·부모들에게 절실한 문제라고 얘기한다. 지금이 3월인데, 놀이를 통해 아이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1년 동안 어떻게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겠나.


▲ 문재현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장
“놀이 회복 운동 통해 어른들 공동체도 살아나
놀이 자발성 발휘하도록 정부 ‘지시’ 아닌 ‘도움’을”


▲ 김기혜 김해 기적의 도서관 운영 담당 공무원
“사회 전체 놀이 부족 인식… 김해 ‘기적의 도서관’도
아이와 뭘 할지 모르는 부모들의 요구로 생겨나”


▲ 선우현 명지대 아동심리치료학과 교수
“아이·엄마 고립된 생활로 공동체와 어울리지 못해
친구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학교도 공부 외 의미 없어”


- 놀이가 사라져가며 모든 교육주체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다.

선우현 = 핵가족화하면서 아이들 대부분이 유치원 갈 때까지 엄마와 단둘이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내 치료실에는 애도 엄마도 공동체에 잘 끼지 못한 경우가 많다. 언제부터인지 공동체 문화가 무너져 부쩍 개인주의·경쟁주의의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아이들이 친구를 친구라기보다는 경쟁자로 여기고, 학교도 공부하는 공간이지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식의 얘기를 많이 한다. 

문재현 = 예전엔 언니·오빠·할머니 등이 함께 아이를 돌봐줬지만, 지금은 엄마가 아이를 혼자 계속 돌봐야 하는 1 대 1 상황이다. 엄마들이 너무 힘들어졌다.

선우현 = 심리상담은 3~5월이 성수기다. 학교나 어린이집에서 교사 얘길 듣고 찾아오는 거다. 그런데, 놀이만 놓고 봤을 땐 아이가 또래들 사이에서 안전하게 놀 수만 있다면 병리적인 상황은 없다. 한 가지만 당부하고 싶다. 엄마와 아이가 단둘이만 있는 계속적인 고립 상황에만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엄마들 중엔 홈쇼핑으로 모든 걸 해결하고 집 밖으로는 아예 나올 생각을 안 하는 극도의 대인기피증 엄마들이 있다. 이런 경우가 위험하다. 좀 다른 얘기지만 아이들의 놀이에 부모가 개입하고 놀이를 조종하려 드는 엄마들이 많은 것도 문제다.

김기예 = 김해 기적의 도서관이 한 달에 한두 번 도서관 앞 뜰을 놀이터로 개방해 큰 호응을 받은 것도 결국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있는 부모들의 절실한 요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꼬박꼬박 나오는 한 아빠가 맞벌이하는 우리 가족에게 놀이터가 숨통이었다고 말했는데, 참 보람을 느꼈다. 혼자 있으면 아이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부모들이 모여 힘을 얻은 거다. 

문재현 = 아까 얘기했듯 놀이 자체를 경험해보지 못한 교사들이 등장하면서 교사들도 아이들과의 소통을 많이 힘들어한다. 교사가 주변 아이들 몇 명과 놀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모이게 되는데, 교사가 주변 사람들과 놀 수 있는 마인드가 없으니 어려움이 따르는 거다.

선우현 = 교사도 힘들지만, 교사가 아이들을 못 놀게 통제하니 아이들도 괴롭다. 내게 상담받은 초등학교 고학년 여학생이 모래상자에 교실의 모습을 재현했는데, 모두가 다 복도 쪽 창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교사가 쉬는 시간에 못 나가게 막아 다들 창문 쪽에 가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는 거다.

김기혜 = 교사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다치면 다 교사에게 책임이 돌아오니까 그렇다.

문재현 = 그렇지만 실상은 잘 놀지 못하는 애들이 더 잘 다친다.

한희정 = 놀이의 수준이 다르다고 다 상담받고 치료받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분위기가 우려스럽다. 그런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관심을 갖고 기다려주면 놀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아질 것 같은데, 기다려주지 못한다. 또 다양한 아이들이 섞여 놀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데, 아이들도 점점 더 비슷한 놀이수준, 비슷한 배경의 아이들과만 놀려고 하는 분위기가 있어 걱정이다.

- 그러나 문제가 꽉 막혀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성공의 경험을 좀 들려달라.

문재현 = 학교 단위로 교사 놀이연수와 평화샘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고 있다. 교사가 놀면서 스스로 행복하다는 경험을 해보면 그 다음의 변화는 금방이더라. 처음엔 놀고 나면 아이들이 산만해지지 않느냐, 사고나지 않느냐고 우려하던 교사들이 한번 즐겁게 놀며 교사들끼리, 또 아이들과 어울린 후로는 아이들과 접속되는 느낌이 든다면서 무척 좋아했다. 한번은 연세가 쉰이 넘으신 교사가 놀이연수를 받고 나서 남은 교사생활 동안 이렇게 아이들과 소통한다면 아이들에게 나쁘지 않은 선생님으로 기억될 것 같다며 울먹였는데, 참 가슴이 찡했다.

한희정 = 우리 학교는 놀이가 아이들과 학교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 극적인 변화의 경험이 있다. 처음 놀이시간을 도입하자고 할 때만 해도 교사들 의견이 반반이었다. 안전사고 나고 다칠 수도 있고, 수업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는 의심도 만만치 않았다. 학급 자율로 놀이시간을 운영했는데, 열심히 운동장에 내보내는 교사도 있지만 놀잇감만 사 주고 교실에서 놀게 한 분들도 많았다. 그런데, 운동장에서 실컷 놀고 난 아이들이 3·4교시 수업을 집중해서 잘 듣는다는 긍정적인 얘기들이 나오고 그런 반들이 사고도 오히려 나지 않자, 정년이 얼마 안 남은 보수적인 교사들까지 5·6월부터는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내보냈다. 놀이가 가진 힘을 목격하면서 학교 전체가 불과 몇 달 만에 변한 거다.

김기혜 = 사회 전체적으로도 아이들의 놀이 부족을 많이 염려하고, 놀이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는 것 같다. 도서관 앞마당에서 놀이터를 진행할 때 안내방송을 하는데, 지금은 큰 아이들부터 작은 아이들까지 참여하는 인원이 확 늘었다.

한희정 = 우리 학교는 학기 초에 집중적으로 아이들과 몸으로 부딪치며 소통하는 기간을 갖고 있다. 개학 첫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이 하루 종일 놀았다고 다들 입이 찢어져 있었다. 새학기여서 긴장하며 학교에 왔는데, 하루를 즐겁게 보내면서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거다. 학교에선 3월 한 달이 행복해야 1년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다들 가지고 있다. 


▲ 한희정 서울 유현초 교사(와글와글놀이터 담당)
“실컷 노는 아이들이 사고 덜 나고 집중력 좋아
지자체·학교, 안전 담보 안전공제회 등 지원해야”


▲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저자
아이와 주민이 참여하는 커뮤니티 놀이터 제안
공공 건축물이 주는 도움과 공동체 경험할 수 있어


-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문재현 = 가까운 동네부터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하기 위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아이들의 양육을 돕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영아기 부모들을 위한 놀이지원 프로그램과 놀이터 만들기를 추진하고, 어린이집·유치원·학교에서도 놀이의 힘을 길러주고, 마음껏 놀도록 하는 어른들의 연대도 필요하다.

선우현 = 적극적으로 동감한다.

한희정 = 동네든 학교든 어느 곳이든 놀이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자발성을 강조하고 싶다. 가령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의사 없이 학교에 놀이를 강조하게 되면 교사들은 일을 떠맡게 되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억지로 하게 되는 거다. 그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학부모들이 놀이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 방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자세가 힘이 되는 거다.

문재현 = 맞다. 위에서 사업으로 내려오는 순간 실패한다. 정부나 기관에서 할 일은 놀이 수요자들의 자발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사실, 지방교육청 한 곳이 놀이활성화 프로그램을 내게 부탁했지만 거절한 적이 있다. 구성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얼마나 현장을 괴롭히는지 들었기 때문이다.

한희정 = 안전 문제도 얘기하고 싶다. 지자체나 학교에서 부모들을 다독이면서 가장 낮은 수준의 안전은 우리가 담보할 테니 마음껏 놀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학교가 너무 호들갑 떨면서 불안을 부추길 게 아니라 아이들은 다치면서 큰다는 점을 얘기하고, 안전공제회 등을 통해서 지원해줄 수 있는 만큼만 지원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편해문 = 놀이에 대해 여러 수요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사회적인 협의체를 제안한다. 국내 편의점 수는 2만7000개인데, 그 2배가 넘는 한국의 공공놀이터 6만여개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커뮤니티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정성스럽게 만들면 자연스럽게 모든 이들을 위한 공간이 된다. 현재 순천 지역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모델 개념인 ‘기적의 놀이터’ 2곳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문재현 = 기적의 놀이터가 뭔지 좀 자세히 설명해달라.

편해문 = 기적의 놀이터는 한마디로 커뮤니티 놀이터다. 디자인부터 건축, 사용 후 관리까지 실제로 놀이터를 이용할 아이들과 주민들이 참여해 만들자는 거다. 그런 놀이터를 추진하는 지자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놀이터 공공건축의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공공의 건축물이 공동체 모두의 삶에 어떻게 도움되는지 경험하게 되고, 또 그 공간을 통해 공동체도 살아난다.

문재현 = 동네를 기반으로 한 운동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될 수 있다. 몇 군데 동 단위,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공동체 운동을 해보니 몇 달이 안 걸린다. 옆 사람과 얘기 몇 마디 통하면 동네 일엔 진보·보수가 따로 없게 된다. 특히 놀이터 문제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다들 굉장히 재미있어 하는 주제다.

- 부모와 정부·학교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편해문 = 아이들이 놀다가 다치고, 살다가 실패할 수 있게 부모가 거들어줬으면 좋겠다. 또 한 가지는 아이들을 키울 때 좀 인간적인 품위를 가지고 클 수 있도록 부모들이 터를 만들어주자는 거다. 품위 있는 부모는 아이들을 놀게 한다.

문재현 = 유럽의 귀족들도 얼마나 잘 노느냐가 제대로 교육받은 기준의 하나다. 또 하나 더하자면 놀이야말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

한희정 = 실질적인 얘기를 당부하고 싶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의 쉴 시간은 제발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쉬는 시간에 숙제하고 책 읽으라면서 아이들을 놀지 못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학부모들도 아이들 학원 일정을 짤 때 하루에 2시간 정도는 좀 비워줬으면 좋겠다. 아이 때에 놀이에 흠뻑 젖는 경험이 없다면 어른들이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김기혜 = 다들 공무원들이 꽉 막혀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공무원도 사람이다. 스스로 감동하는 일이고, 주민들이 호응하는 일이면 공무원들도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아이들을 놀게 하자는 일에 누가 반대하겠나.

문재현 = 아이들의 놀이 회복 운동을 통해 어른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면 한다. 이렇게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이 CCTV 100개 설치하는 것보다 더 공동체가 안전해지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직접 경험했으면 좋겠다. 물론 주민들 간 소통의 환경은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줘야 한다.

<시리즈 끝>

<경향신문·참교육학부모회·서울 노원·도봉구청 공동기획>

<송현숙·김지원 기자 song@kyunghyang.com>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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