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도 권력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모르면 입을 다물거나 겸허히 공부하거나 해야지 않을까.
한국 남성은 여태 근대 이전에 있어 왔구나.ㅠ
한국 남성의 '근대화'가 이제 시작되어 삶의 결을 바닥부터 바꾸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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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미투, 무지라는 권력에 대한 도전
미투 운동에 대한 나의 심정은 복잡하다. 걱정과 분노로 혼란스러울 정도다. 물론 지금 미투는 유사 이래, 어느 사회에서도 없었던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혁명이다. 나도 당사자이기 때문에 임전무퇴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운동이 그렇듯, 미투 역시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여성들이 수시로 겪는 폭력은 당장 대책이 없다. 마음속으로 미투를 외칠 뿐이다. 고은이나 이윤택씨의 경우는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문단, 연극계)의 문제가 더 본질적이다. 망자(亡者)인 남성도 있고, ‘억울한’ 남성도 있다. 범죄의 성격과 경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 사회의 가해자에 대한 태도는 피해자 존중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다(민주당의 정봉주씨와 안희정씨에 대한 다른 대처를 보라).
교활한 상습범은 숨어 있고, 멋모르고 행한 ‘폭력적 애정 행각’은 선정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 즉 젠더는 법적 처벌이 어려운 사회적 모순이다. 공기처럼 작동하는 일상의 정치이기 때문에 탈법, 불법, 합법의 경계가 모호하다.
한편 지금과 같은 미투 운동 이전에 영화계 성폭력에 대한 내부 고발과 반성이 있었다. 영화계 성폭력 실태 조사와 지원 단체가 설립되는 성과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흔한 적폐가 반복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해명해야 한다.
문제는 “미투를 지지한다”는 정부의 ‘사실상 무대책’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 상담은 고도의 전문성과 다양한 대응을 요구하는 중노동이다.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이명박 정권부터 작년까지, 정부는 무려 122조4000억원을 저출산 대책에 사용했다. 주지하다시피, 성과는 전혀 없었다. 그 돈의 1000분의 1이라도 성폭력 해결을 위해 지원하라. 작년과 올해 모두, 여성가족부 예산은 7640억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0.18%다.
사회적 통념과 달리 미투로 인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숨겨진 범죄가 드러나면서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미투는 남성 사회의 선택적 가시화와 무관하게 계속될 것이다. 사건은 지구의 70%를 덮고 있는 바닷물의 양만큼이나 많다. 문명 이래 가장 오래된, 가장 빈발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굳이 나눈다면 가해자는 크게 두 종류다. 범죄인 줄 알지만 처벌되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대담하게 저지르는 이들이 있고, 그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용되어 왔기 때문에 ‘정말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를 탈식민주의 이론에서는 권력이 허락한 무지(sanctioned ignorance),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무지(willing ignorance)라고 한다.
모든 지식, 학문의 지위는 같지 않다. 외국어 능력에도 위계가 있듯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고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다. 남성 사회에서 젠더는 무지가 당연시되거나 심지어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홍준표씨처럼 여성정책토론회를 열어놓고 “나는 모른다”며 수면을 취하는 정치인의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그에게 여성은 인간은커녕, 유권자도 아니다.
지식의 의미는 권력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들어 피임법은 남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무지의 영역이다. 문제는 이 의도적인 무지로 인해 누가 고통받는가이다. 동성애는 무지가 곧 폭력인 경우다. 대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 가난한 지역에 관한 지식은 무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을 자신이 중산층인 증거로 삼는 이들도 있다.
미투로 인해 가장 충격받은 이들은 아마도 ‘평범한’ 남성들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차마 그 정도 수준인 줄은 몰랐으며, 그들 덕분에 자신이 “점잖은 분” “여성을 존중하는 신사”로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하긴, 어느 누가 이 정도 규모로 성차별, 성폭력이 행해지고 있을 줄 알았겠는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음모론 운운하는 김어준씨 같은 이들의 적폐는 그 발상도 발상이지만 수치심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성의 피해를 조롱하거나 성차별을 사소한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상식적인 남성들은 “너무 몰랐다” “창피하다” “할 말이 없다”고 고백한다.
미투 운동의 의미는 폭력의 감소가 아니라 남성교육에 있다. 한국 남성은 인간의 현실에 대한 무지가 ‘권력’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여성의 말하기가 남성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다. 한국 남성의 근대화는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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