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관련 글을 읽고 찾고 하다가 만난 글.

여기 가져와 남겨두어 틈틈이 읽고자...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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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공부 모임/ 2004년 11월 1일 월요일 오후 2시-5시

한국에서 이반 일리치를 가장 잘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인 김종철 선생님을 모시고 이반 일리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날의 자리는 자유대학의 일리치 공부모임 사람들이 만들었고 자유대학의 다른 모임 친구들이 참여해 3시간동안 진행되었다. 김종철 선생님은 광주에 10월 31일 오셔서 운주사에서 강의를 하시고, 11월 1일 오후에 일리치 공부모임과의 대화, 저녁엔 빛고을생명평화학교 강의를 하셨다. 매우 피곤한 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열정적인 강의와 사람들과의 만남을 보여주셨다.

서로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20대 초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반 일리치의 삶과 사상에 대해 김종철 선생님이 전반적으로 이야기하시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토막 토막으로....

○ 이반 일리히라고 번역해 나온 책들이 있는데 정확히 이반 일리치다. 이반 일리치는 독일 사람도 아니고, 친구들도 이반 일리치라고 부르고 본인이 자신을 이반 일리치라고 불러주길 원했다. 미토 출판사에서 적어도 이반 일리치 사상 전집을 내려 했다면 그 정도의 성실성과 조사는 있어야 했지 않을까. 그런 불성실성이 번역에도 그대로 전해진다. 사상가의 이름 하나 제대로 번역을 못하면서 책은 얼마나 제대로 번역을 했겠는가

○ 이반 일리치의 사상에 여러 평가가 존재한다. 이반 일리치 클럽의 제자들-사실 그는 어떤 사제관계도 맺은 적이 없지만, 그의 사상에 영향 받은 사람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중 일부는 그의 사상이 쓸모가 없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터 버거는 " 20세기 현대사를 보는 관점을 일리치를 통해서 얻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 그의 사상은 쓸데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읽지 않았다"라고 말했고, 오래된 미래로 잘 알려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80년대 이후의 일리치는 거의 도움이 안되었다고 말한다.

아마 그 이유는 이반 일리치 사상의 전반기-Deschooling society(학교없는사회), tools for conviviality(공생공락을 위한 도구, 성장을 멈춰라로 출판됨), limits to medicine(의학에 한계를 가해야 한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로 출판됨), energy and equity(에너지와 평등,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로 출판됨) 등의 팜플렛을 저술한 시기-엔 적어도 사회정치적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신뢰했다면, 후반기로 갈수록 사회정치적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고 그런 프로그램이 별 의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반 일리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독일 그린피스 의장을 지냈던 볼프강 작스의 경우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는 세계의 흐름에 실천적으로 어떻게든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흐름에서 리우 회의와 리우+10 회의에 적극 개입한 바 있다. 그의 화두는 ecology and justice, 생태적 가치와 사회적 정의를 조화시키는 문제였다. 그는 서구가 풍요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시달린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그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당장 독일이 가진 부의 9/10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10%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풍요에 시달리지 않고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선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볼프강 작스가 브레멘의 일리치를 방문했을 때 일리치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볼프강 작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고 다니냐고". 아마 그린피스 일과 녹색당 일을 지칭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 일리치의 팜플렛-그는 책을 근사하게 내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그것들을 팜플렛으로 불렀다. 그래서 그의 책들은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거의 요약본이라 할 정도로..-들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근본의 자리에서 명쾌하게 해설해 준다. 너무 명쾌하고 너무 근본적이다 보니 현실의 표피적인 개혁 프로그램으로는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답답해진다. 늘 묻듯이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라는 질문이 쇄도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리치 사상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성급히 묻는다. 누군가 답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 일리치의 우정 이야기엔 고개가 갸웃해진다. 우정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하고 말이다. 일리치 후기 사상엔 우정(friendship)과 환대(hospitality)를 많이 강조한다. 김종철 선생님은 우정이 결국 세상을 구원할 열쇠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늘 이 우정에 관한 이야기는 화두이다. 간디와 많은 사상가들에게서 이 우정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 날 김종철 선생님의 설명을 나름대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 subsistence, 자급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내 생각에 이런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은 자본주의 밖의 사람들 - 예를 들어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안에서 패배해 밀려났거나, 자본주의 시스템을 거부한 사람들 -이 보여주는 모습인데 이들은 서로에 상호의존하고 우정에 기반한 보살핌이 없이는 삶을 꾸려갈 수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우정이나 인정 같은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고,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어 잘 살면 된다고 말한다. 점점 우정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파괴된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는 것은 피폐함 뿐이다.

● 중요한 것은 우정을 되살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밖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만들고, 그 땅을 선택한 사람들(자본주의의 부를 거부하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 우정과 보살핌에 기대고 상호의존하면서, 그 자본주의 바깥의 땅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할 것이고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또한 그런 근본적 삶과 도구, 운동이 기반이 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 일리치는 자신을 역사가이자 시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겐 어떤 레테르도 정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사회학자라 하는데 그의 초기 저서들도 엄밀히 말하면 사회학적 저서라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근대가 만들어낸 분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 사회 시스템, 인간적 규모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복잡하고 완벽한 시스템안에는 인간의 자리가 없다.(doing theology) 생명과학을 논하고 DNA를 논하는 것,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경이다. 인간은 알 권리도 있지만 모를 권리도 있다. 침묵으로 대답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모를 권리가 있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자꾸 알려고 하는 것이 자꾸 어떤 문제를 만들어낸다.

○ Tools for conviviality;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가 세 가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시와 자전거와 도서관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시인이고 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We are called to be poets. poetic ability; 근대사회로 오면서 이 시적 능력, 자율적 능력이 퇴화했다. 배움(leaning)이 교육(education)으로 대체되면서 시적 정서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속도의 한계, 인간 교통 수단의 한계를 말하고, 도서관은 배움(learning)이 가능한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침략할 때 군대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the transformation of learning into education; 배움의 교육으로의 변화, 이것이 근대교육의 실체이다. 시스템은 삶을 오염시키고 Education은 인류의 행복을 해치는 바이러스다.
 
○ 녹색평론에서 복지체제에 대해 거론하고 비판하는 이야기를 지금 다루어야 할지 여러모로 고민이다. 

○ 일리치는 경이로움(surprise)을 높이 평가했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움으로 가득차 있는가, 얼마나 인생은 시적인 것인가?, 복지시스템은 경이로움을 감소시키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능력을 감퇴시킨다. 녹색평론의 독자 중에 경북에서 양로원을 운영하는 분이 있다. 이 양로원에서 지역통화를 실험했는데 노인들의 삶에 생기와 활력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런 경이로움이 복지시스템안에서는 존재하기 쉽지 않다.

어떤 영화감독이 스웨덴이 제일 형편없는 사회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영화작업을 예술이 아닌 사무 보듯이 했기 때문이었다. 9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고, 시스템만 있고 열정이 없다. 영화를 어떻게 그런 시스템으로 찍을 수 있는가? surprise, 경이로움이 없는 사회, 시적이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아름다운 사회인가?
 
○ 쿠에르나바카에 있던 CIDOC의 여러 프로그램 중 스페인어 학교는 남미로 파견될 예비 선교사들의 스페인어 교육을 담당하면서 그들을 탈세뇌화하였다. 그들에게 일리치는 변해야 할 곳은 라틴아메리카가 아니라 미국이고, 미국의 풍요가 문제이고, 풍요에 시달리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교육들은 교황청의 경계를 일으켰고 급기야 교황청 심문실로 호출되어 알 수 없는 고문을 당했고, 결국 일리치는 사제직을 반납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어머니 교회의 종으로 살았다.

○ conviviality는 subsistence, 근근히 생활을 영위하는 수준, 그러한 경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데 일리치 그룹은 이를 지극히 normal한 상태로 보고 이를 벗어날 때 불경이 발생한다고 본다. subsistence는 단순히 경제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 CIDOC이 십년이 되어가면서 안정화되었고 이에 따라 점점 관성적이 되면서 의욕과 열정이 떨어져갔다. 일리치는 해체를 결심했고 2년의 기간을 두고 직원들과 국제 정세와 CIDOC의 역할 등에 대한 세미나를 계속했다. 2년 동안 수입을 적립해 직원들에게 이를 나눠주고 CIDOC을 해체하였다. 어떤 일이던 안정상태(Security)가 되면 시스템화되고 인간의 의욕과 열정에 의해 일이 진행되기 어려워지는 위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 평화는 개발로부터 연결고리를 잘라야 가능한 것이다. 경제는 19세기까지 인간 생활의 다만 일부였을 뿐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전부가 되었다. 바로 homo economicus, 경제적 동물이 된 것이다. 경제, 돈이 전부가 된 세상에서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 세계화는 개발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평화는 파괴될 것이다.

○ 일리치가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식사를 하던 중 그 집 아이가 사투리와 슬럼가의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때마다 부모들이 제지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일리치는 그 집에는 교육만 있지 자유가 없다고 말했다. 1492년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뒤 Nebrija는 여왕에게 스페인어 문법 사전을 편찬하는 데 돈을 투자하라고 꼬시면서, 그 문법사전이 신대륙 발견보다 더 많은 이익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전이 만들어졌고, 당연히 이 사전은 도시 귀족들의 말을 표준말로 해서 만들어졌다. 이후 subsistence culture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개발과 세계화로 이어졌다.

○ 일리치는 80년대 이후 중세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근대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근원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를 느꼈다. 이 때 나온 책이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라는 것인데 이것은 빅토르의 휴의 학습론을 분석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일리치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독서가 monastic reading(소리내 읽은 육체적 경험과 함께 읽기)에서 scholastic reading(묵독, 시각적 읽기, 학자적 읽기)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책이란 원래 포도를 한알 한알 따서 음미하듯이 한 자 한 자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때문에 소리내어 함께 읽는 일이 중요하다. 독서란 과거의 지혜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때문에 서울에선 일리치 '읽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 일리치는 기독교의 타락을 강조하는데, 초기 기독교 가정엔 세 가지의 보물이 늘 구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양초와 담요와 마른 빵인데, 모르는 손님이나 여행자가 왔을 때 그가 문지방을 넘어 방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밝힐 양초와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마른 빵과 따뜻하게 잠잘 수 있도록 담요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교회가 그 기능을 빼앗아감으로써 기독교 가정은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할 필요가 없고 점차 귀찮은 일이 되어갔다. hospitality; 환대가 사라진 것이다. 산업사회를 넘어서는 길을 모색함에 있어 이 자발적 환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현재 비산업사회 일부에서 틈새로 남아있는 이 환대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 hope against hope

[출처] 광주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에서 김종철 선생을 초대하여 만남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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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명복을 빕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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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민주주의가 성립하려면 무엇보다 자기절제라는 시민적 덕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 전체가 '환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비상상황에 처해 있다. 이 상황은 언제 종식될지, 과연 종식되는 게 가능할지조차도 지금은 안갯속이다.

중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인간다운 '생존ㆍ생활'이다. 우리는 이 점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도 마스크도 손씻기도 아니다. ...
우리의 정신적ᆞ육체적 건강의 첫째 조건은 타자들ㅡ사람을 포함한 뭇 중생들ㅡ과의 평화로운 공생의 삶이다. 그리고 공생을 위한 필수적인 덕목은 단순 소박한 형태의 삶을 적극 껴안으려는 의지(혹은 급진적 욕망)이다. ...
이 세상의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김종철]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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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는...

나름 열심이었는데.
그래도 내 안에 갇힌 내 탓이겠지.
벗어나는 순간, 혁명일까?
공허함은 순간이려나?
내일이면
다시 길을 갈까?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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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여성의 날이었다. 

기억해 둬야 할 날이기도 하고...

기억해 둬야 할 노래와 시를 남겨두고 싶기도 해서.

 

존 바에즈가 부르는 빵과 장미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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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d and Roses

                                                By James Oppenheim

 

As we go marching, marching, in the beauty of the day

A million darkened kitchens, a thousand mill lofts gray

Are touched with all the radiance that a sudden sun discloses

For the people hear us singing, bread and roses, bread and roses

 

As we come marching, marching, we battle too, for men

For they are women's children and we mother them again

Our days shall not be sweated from birth until life closes

Hearts starve as well as bodies, give us bread, but give us roses

 

As we come marching, marching, un-numbered women dead

Go crying through our singing their ancient call for bread

Small art and love and beauty their trudging spirits knew

Yes, it is bread we. fight for, but we fight for roses, too

 

As we go marching, marching, we bring the greater days

The rising of the women means the rising of the race

No more the drudge and idler, ten that toil where one reposes

But a sharing of life's glories, bread and roses, bread and r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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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_제임스 오펜하임

 

환한 아름다운 대낮에 행진, 행진을 하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컴컴한 부엌과 잿빛 공장 다락이

갑작스런 태양이 드러낸 광채를 받았네.

사람들이 우리가 노래하는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행진하고 또 행진할 때 남성을 위해서도 싸우네.

남성은 여성의 자식이고, 우린 그들을 다시 돌본다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린 착취당하지 말아야만 하는데,

마음과 몸이 모두 굶주리네: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

 

우리가 행진하고 행진할 때 수많은 여성이 죽어갔네.

그 옛날 빵을 달라던 여성들의 노래로 울부짖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여성의 영혼은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 우리는 빵을 위해 싸우지. 또 장미를 위해 싸우기도 하지.

 

우리가 행진을 계속하기에 위대한 날들이 온다네.

여성이 떨쳐 일어서면 인류가 떨쳐 일어서는 것.

한 사람의 안락을 위해 열 사람이 혹사당하는 고된 노동과 게으름이 더 이상 없네.

반면에 삶의 영광을 함께 나누네: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 함께 나누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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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품격>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어서

요즘 코로나19로 혼란스럽기도 한데 조금은 연결해서 생각해 볼 만도 해서.

원래는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면역에 관하여>(율라 비스 저, 열린책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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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제 살갗보다 그 너머에 있는 것들로부터 더 많이 보호받는다. 이 대목에서, 몸들의 경계는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혈액과 장기 기증은 한 몸에서 나와 다른 몸으로 들어가며 몸들을 넘나든다. 면역도 마찬가지다.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 집단의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들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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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누가 우물에 독을 풀었나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저기요” 하고 부르면 열에 여덟은 성난 얼굴로 돌아본다는 곳,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어디서든 빵하고 터져 나올 만큼, 그만큼 억압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바이러스가 우리를 불렀다. 누가 감염된 자인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확산된 혐오와 불안을 보면서 계속 떠오르던 말이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일본에서 분노의 표적이 되었던 그 조선인은, 중국인이 되었고, 다시 대구 사람들이 되고, 이제 ‘신천지’가 되고 있다. 그들을 격리하고 제거하면 우리 모두 안전해질 수 있을까?

 

위험한 존재를 ‘안전한 공간, 건강한 사회’로부터 제거하는 방식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식은 소독과 방역, 의심과 격리, 배제와 추방이다. 그들은 흑인이거나, 무슬림일 수도 있고, 중국인이거나 한국인일 수도 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코로나19의 세계적 전파를 알리면서 마스크를 쓴 사진과 함께 ‘메이드 인 차이나’를 표제어로 내걸었다. 미국의 CNN뉴스는 중국 소식을 전하면서 한복 입고 마스크 쓴 한국인들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냈다. 극우정치의 공통 문법인 인종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발화하는 것은 불길한 신호다. ‘유색인종’은 난민이나 트랜스젠더가 될 수도 있고,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폐쇄병동에 갇힌 정신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전염병 이전에 이미 기피되었던 존재들은 다시 병리학의 법정으로 불려 나온다.

 

내가 사는 강원도 접경지역에서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이후 멧돼지 포획 작전이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날 마을 전체가 멧돼지를 막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다. 포수들이 산에 들어갈 때는 인근 주민들에게 입산금지를 알리는 문자가 온다. 그럴 때 멧돼지의 심정이 되곤 한다. 멧돼지는 열병과도 싸우고 사냥꾼과도 싸워야 한다. 멧돼지를 막으면 돼지들이 안전해질까? 돼지들에게 살처분과 상품화를 위해 도살당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안전한 것일까?

 

2018년 한 해 동안 노동현장의 사고 사망자 수는 971명, 산재로 죽은 노동자는 2142명, 자살로 숨진 사람은 1만3670명이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노동현장은 바이러스 감염 지역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래도 그건 불안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었으니까. 작년 한 해 한국에서 도축된 돼지는 약 1800만마리, 닭은 무려 10억마리에 이른다. 그건 무섭지 않았다. 먹히는 자가 아니라 먹는 자니까.

 

하지만 아무리 모르는 척해도, 사람들은 모르지 않는다. 이 세계가 켜켜이 쌓이는 죽음 위에서 만들어진 풍요로운 세계라는 것을. 누적된 불안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미칠 듯이 터져 나와 때릴 곳을 찾기 마련이다. 광기는 언제나 약한 곳을 향해 터져나간다. 그 마지막에 파시즘과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걸 막는 길은 마땅히 증오해야 할 대상을 향해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때 정치의 물음이 필요하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서 구원을 찾고, 왜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폐쇄병동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가?

 

병든 닭을 10억마리씩 소비하고, 매년 500만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하는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재난이 그 일상을 중단시키면 사람들은 비로소 묻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 존재인지,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 재난은 함께 살자는 물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추방자들의 귀환이자, 일상을 중단시키는 ‘자연의 파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계속 더 강력한 경고를 보낼 것이다. 우리 공동의 세계에 풀려진 독은 무엇이며, 어디서 온 것인가? 과잉생산, 과잉소비, 거대한 낭비 위에 굴러가는 성장의 경제를 멈추지 않으면 재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너무 오래 감염되어 있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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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려서 논바닥에서도 하고, 학교 운동장이나 넓은 터에서도 공을 차며 놀았다. 

성년이 되어서는 조기축구도 조금 했다. 지금도 뛰고 싶기는 하다. 이젠 이 특기를 살려 테니스에 재미를 붙였다. 큰 돈이 안 들어서 좋다. 

 

마침 리버풀의 감독 '클롭'에 관한 글이 있어 읽다가 적어두고 싶은 대목이 있어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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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의 변화에 감명받은 존 비숍이 클롭과 대담을 통해 그의 리더십을 탐구했다. 존 비숍은 아마추어 축구선수 출신인 영국 코미디언이다. 둘의 대담 내용은 <포포투> 지면을 통해 공개됐고, 지난해 말 영국에서 발간한 단행본 < A Game of Two Halves>에도 수록됐다.

 

(중략)

 

비숍
신앙심이 자신감의 원천인가?

 

클롭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기자회견에서 ‘언젠가 하나님이 판단해주실 것’이라고 말한 적은 있다. 실제로 그렇게 믿는다. 죄를 짓지 않는다. 타인을 해하거나 다치게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선수단 안에서는 신념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다. 누군가를 엔트리에서 빼거나 팔아야 할 때가 그렇다. 내 일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경기에서 패하면 나는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내게 아주 간단하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 것. 내가 제일 중요하겠지만 너무 이기적이면 곤란하다. 내가 들어섰을 때 방 안의 분위기가 별로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경청할 준비가 부족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매번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독실한 신자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따위를 설교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신앙심은 좋은 것이다.”

 

비숍
당신의 신앙을 ‘이성적 인간의 타당한 행동’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을 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클롭
“그렇다. 나뿐 아니라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와 차이가 있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런 믿음에 관한 질문을 받지 않고, 나는 받는다는 점이다. 그뿐이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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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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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혜정의 마을에서]어찌할까, 이 깊은 우울을!

 

다시 칼럼을 쓰기로 하면서 상큼한 글만 쓰자고 다짐했는데 쉽지 않다. 오늘도 우울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는다. 스마트폰을 켜지 말았어야 했는데…. 호주 산불은 여전히 번지고 있고 미국은 호르무즈 파병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쟁터에 가고 싶다는 청년의 댓글이 올라와 있다.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될 테니 한 가지에만 관여하라던 사사키 아타루의 조언을 떠올려보지만 무력감은 이미 내 몸에 들어와 버렸다.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글처럼 “나는 그것을 물속에서 느끼고, 대지에서도 느낄 수 있고, 공기 속에서 냄새로 느낀다. 그 모든 것은 이제 사라졌다. 그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도 사라졌다”.

 

2016년 말 광화문광장에서 콜드플레이의 노래 ‘Viva La Vida’가 울려 퍼질 때 잠시 희망을 걸어보기도 했다. 이제는 그때 신나게 불렀던 그 노래가 왕이 되고자 했던 우리 모두의 마지막을 노래한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제 난 홀로 잠을 자고 내가 한때 지배했던 거리를 배회하지. 난 알아차렸네. 나의 성은 소금 기둥, 그리고 모래 기둥 위에 서 있었다는 걸. 오 누가 왕이 되고 싶어 하겠나? 절대로 진실한 말 따위는 없다네.” 자신에게 닥친 비극적 사건을 두고 신에게 울부짖을 수 있었던 고대인들이 부럽다. 인간에 의해 자행된 “설명할 수 있는 비극”을 견뎌야 하는 현대인은 얼마나 우울한가?

 

나는 이런 시대에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위험한 존재라 생각한다. 크레이그 리슨 감독의 다큐 <플라스틱 바다>에 나오는 죽은 새의 위장에는 플라스틱과 비닐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다. 이런 불편한 장면을 줄기차게 보게 만드는 넷플릭스는 전 지구 시민을 위한 대학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 속편을 보면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이 의외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정상회의 직전에 일어난 파리 테러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잠시 세계 정치인들이 평상심을 잃고 죽음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끔찍한 뉴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챙겨 보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난다
코에 빨대가 낀 거북이를 본 아이
더 이상 빨대를 찾지 않는데…
되레 나이든 어른들은 무감각하다

 

나는 끔찍한 뉴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꼬박꼬박 챙겨 보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코에 낀 빨대로 괴로워하는 거북이 동영상을 보고 아이는 더 이상 빨대를 찾지 않는데 어른들은 무감각하다. 언젠가 친구에게 왜 이런 현실을 보면서 흥분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는 자기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나서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이 바로 그 편협한 전문가주의를 벗어나야 할 때 아닌가? 그간의 전문성이 지금의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새로운 눈으로 현상을 보기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현대 문명은 인간에게 신이 되라고 부추겼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했던 현대인, 엄격한 신과 고루한 가부장과 가난한 마을을 떠나 자수성가한 청년들은 이제 자기 확신에 가득 찬 노인이 되었다. 수시로 시시비비를 가리며 국가 권력의 분신인 듯, 영원불멸의 신인 듯 행동하는 그들·나·우리는 지금 강박증과 분열증을 앓고 있다. 치유가 가능할까? 추운 광화문광장에 시위하러 어김없이 나가는 부모와의 반목을 정치 이야기를 하면 벌금을 내는 것으로 해결했다며 자랑하는 후배가 있다. 가족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서로 마주하기 때문에 ‘현생인류’가 탄생했는데 7만년이 지난 지금, 신이 된 호모데우스는 더 이상 서로를 마주하려 들지 않는다.

 

조건의 변화 없이 의식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지금은 현상을 바라보는 의식을 바꿀 때가 아닌가 싶다. 유일신의 이름 아래 구축된 근대를 해체하는 것. “타 종교에도 진리의 빛이 있다”며 종교 간 대화를 시작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런 면에서 탁월한 이 시대의 선각자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다양한 신과 정령 중 하나로 살아가는 세계를 상상해보자. 그 신들의 세계에서는 개와 고양이와 나무와 정령들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배안에 비닐과 플라스틱이 들어차 있는 새와 거북이와 고래도 아프다고 소리친다. 나는 ‘사회’를 살려내기 위해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말해왔지만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적 존재로서의 회복을 해내지 못하면 기본소득 제도도 효과를 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신들과 인간, 다종 다기한 생명체와 인공지능의 존재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지구의 시간이 열리고 있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신들과 아침마다 지구인에게 우울의 화살을 쏘아대는 정령들과도 친해져야 할 시간.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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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 이분법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흐름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마침 '동백꽃 필 무렵'을 넷플릭스로 막 보기 시작한 터라...ㅋ

(뉴스페퍼민트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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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엄웹스터 사전이 뽑은 올해의 단어는 “They” 

2019년 12월 13일 

 

어느 오후, 당신이 자주 가는 카페. 늘 앉던 자리에 앉으려던 당신은 누군가 놓고 간 핸드폰을 발견합니다. 당신은 종업원에게, 아니면 (카페가 얼마나 큰지에 달렸지만) 카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누가 핸드폰 놓고 갔나 봐요.”라고 외치겠죠. 이 말을 영어로는 어떻게 말할까요? 모든 표현이 그렇듯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보통 아래와 같이 말할 겁니다.

 

“Someone left their phone behind.”

 

“동백꽃 필 무렵” 속 홍자영 변호사처럼 문법을 깐깐하게 따지고 틀린 건 고쳐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언어 계의 세종대왕님 같은 사람이 영어권에 있다면 바로 불편해했을지 모릅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영어를 쓰는 나라의 중학교, 고등학교 국어(영어) 선생님들이 저 문장을 봤다면 바로 빨간펜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눈치채셨나요? 위의 문장은 엄밀히 따지면 인칭대명사 사용이 잘못됐습니다. 주어 ‘someone’은 누구를 뜻하는 단수인데, 뒤에 따라오는 대명사로 복수인 ‘they’의 소유격인 ‘their’를 썼기 때문이죠. 우리말로 직역해도 “누군가 그들의 핸드폰을 놓고 가셨어요.”가 되니까 뭔가 잘못되기는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저 말을 한 사람에게 문법이 틀렸다고 지적한다면, 그 사람은 이렇게 항변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단수 인칭대명사를 쓰려면 남자 아니면 여자를 지칭하는 his 아니면 her밖에 없는데, 그럼 이 폰 주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합니까?”

 

영어에는 이렇게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중성 단수 인칭대명사가 마땅히 없었습니다.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 사전을 편찬하는 출판사가 10일 올해의 단어를 발표했는데, 여기에 “They”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보통 사전 편찬 출판사가 뽑는 올해의 단어에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현상을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신조어나 사람들이 기존의 용례와 다르게 쓰는 사례가 두드러지게 늘어난 단어가 선정되는데, “They”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리엄웹스터는 올해의 단어 11개 가운데 하나로 “they”를 선정하면서, “성별을 특정하지 않는 단수 인칭대명사 ‘they'”라고 용례를 밝혔습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they”를 어떻게 쓰는지 살펴보면, 갈수록 “그들”이나 “그 사람들”처럼 복수로 옮기면 오역이 되는 상황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영어에는 마땅한 중성 단수 인칭대명사가 없었다. ‘everyone’이나 ‘someone’처럼 성별을 특정하지 않는 단어를 받아줄 대명사가 없는 상황에서 지난 600년간 그 역할을 해온 건 ‘they’였다. – 메리엄웹스터

 

이렇게 문법상의 맹점을 그동안 덮어준 ‘they’가 문화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쓰임새를 얻게 된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로 기계적으로 빨간펜을 들려던 선생님은 유기체처럼 진화하는 언어의 속성을 모른다는 핀잔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세상에 성별이 남자 아니면 여자 둘밖에 없다고 가정하시느냐”는 핀잔까지 받을지도 모릅니다. 메리엄웹스터의 선정 이유를 좀 더 살펴보죠.

 

또한, 최근 들어 ‘they’는 스스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여기는 이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대화나 소셜미디어는 물론이고, 문법을 검수하고 교정한 뒤 출판하는 글에서도 제3의 성을 지칭하는 대명사 ‘they’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메리엄웹스터

 

명백하게 남성을 뜻하는 대명사(he/his/him)도, 명백하게 여성을 뜻하는 대명사(she/her/her)도 모두 맞지 않는 옷으로 여기던 이들에게 복수 “그들”도 아니고, 단수이면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 혹은 성별이 없는 단수 “그사람”을 뜻하는 대명사(they/their/them)가 새로운 옷이 됐고, 그 옷이 큰 유행을 탄 겁니다.

 

인터넷 검색 건수가 유행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라면 확실히 단수 ‘they’는 올해의 대세 단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리엄웹스터가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는 기준 가운데 실제로 검색 동향이 있고, ‘they’는 올 한 해 지난해보다 검색 빈도가 313%나 늘었습니다. 메리엄웹스터의 선임 에디터 에밀리 브루스터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단수 인칭대명사를 쓸 필요가 있는 상황이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럴 때 ‘they’를 써도 되는지 확인해보고자 온라인 사전을 검색해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남성 혹은 여성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여기는 성소수자들은 자동으로 투명인간 취급을 받습니다. 이들에게는 대단히 폭력적인 세상인 셈이죠. 그래서 성소수자들은 ‘they’라는 단수 인칭대명사를 더욱더 반기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커밍아웃한 가수 샘 스미스(Sam Smith)는 오랫동안 중성 혹은 제3의 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샘 스미스가 9월에 올린 트윗: “이제 나를 지칭하는 대명사는 ‘they/them’이다. 오랫동안 나의 성정체성을 두고 씨름해왔는데, 기나긴 전쟁에서 해방된 느낌이다. 이제는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끌어안으려 한다.”

 

메리엄웹스터가 9월 they의 용례에 단수 인칭대명사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추가한 데 이어 미국심리학회(APA)도 올해 들어 they를 단수 인칭대명사로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심리학회는 그 이유로 “단수 인칭대명사 they의 용례를 보면 그동안 소외된 이들을 포용하는 쓰임새가 있다. 또한, they를 단수 인칭대명사로 쓰면 글쓴이가 성별에 대해 가지게 되는 무의식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동안 문법적으로 옳지 않으므로 ‘they’를 단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기준을 굽히지 않던 AP통신도 비판이 끊이지 않자, 지난 2017년 마지 못해 기준을 정정했습니다. 이제 AP통신의 취재기자와 편집기자는 특정 성별을 지칭하지 않는 단수 대명사 ‘they’를 기사에 써도 교열팀의 지적을 받지 않습니다. AP 스타일북의 편집자인 파울라 프로크는 당시 기준을 바꾸기로 한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사실 단수 인칭대명사 ‘they’를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사를 쓸 수 있다. 그래도 이제 기준을 바꾸기로 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먼저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사람들의 구어에 ‘they’가 단수 인칭대명사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남성이나 여성으로 지칭할 수 없는 사람들을 표현할 대명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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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이 된다면 동네에서 끼 많은 친구들과 아무 물건이나 해체해서 재조립하는 놀이를 해보면 재밌겠다 싶다.

<손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런 놀이가 주는 재미를 확인했다. 관심 영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

근데 시간이 모자라다. 

먹고사는 일도 해야 하고 이런 장난질도 하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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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당신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물건, 특히 기계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집안의 고장 난 가전제품이나 장난감들을 수리하려고, 혹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뜯어보신 적은 없나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물건 속에는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과학기술이 각종 기계전기전자 부품의 모습으로 숨겨져 있습니다. 
선풍기 속에는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의 원리’가 담긴 커다란 모터가 있고, 
시계 속에는 회전력을 각기 다른 비율로 전달하는 여러 개의 기어가 물려 있지요. 
이러한 기술들은 시간을 들여 점점 더 인간의 삶과 밀접해졌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사물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기술이 작동하는지에 대해 점점 더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If you can’t fix it, you don’t own it. 
“수리할 수 없다면 소유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뜨끔하게 만드는 이 ‘자가수리’ 선언문은 
물건의 기능을 뛰어넘어 이제는 브랜드나 가치까지 소비의 범위를 넓히고
점점 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로 가득 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듯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결국 기술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행위가 되지 않을까요.

분해하기 전 사물들이 쌓인 공간에서 점차 분해된 사물들로, 
관람객들의 참여를 통해 완성되어 갈 <탐구의 시작, 물건 뜯어보기 체험전>은 
우리가 무심코 쓰는 사물들 속에 감춰진 속사정을 꺼내어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차원으로의 모험을 안내합니다.

 

: 개조된 물건들
: 분해된 물건들
: 사물의 조리를 들여다보는 손
: 기계 최후의 날
: 사물 해부 도감
: 사물의 변신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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