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퍼옴]

[놀이가 밥이다]돈으로 사는, 주어진 놀이에 익숙… 놀 줄 몰라 또 돈을 낸다

“불이 2층까지 번지고 있어요. 초기 진화 확실히 해주세요.”

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한 직업체험형 키즈카페에서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어두운 실내엔 물냄새 섞인 매캐한 연기가 퍼졌다. 한쪽 벽엔 고층빌딩 외벽처럼 꾸며진 패널 뒤로 ‘가짜 불꽃’이 날름거렸다.

소방대원 옷을 입은 아이들은 저마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위아래로만 움직이도록 고정된 물호스 손잡이를 잡았다. 여섯 살 난 한석이는 엄마를 불러보지만 사이렌 소리에 묻혔다. 손잡이를 양손으로 붙잡고 엄마 쪽으로 호스를 당겨봐도 물줄기는 아주 조금 방향이 틀어질 뿐이다. 이윽고 사이렌 소리와 물줄기가 멎으며 5분의 체험시간이 끝났다. “어린이 여러분, 축하합니다. 화재 진압에 성공하셨습니다!”

그날 오후 찾아간 서울 목동의 테마파크형 키즈카페. ‘심해(深海) 세계’를 모티브로 삼은 카페엔 10평 남짓한 모래놀이터가 보였다. 소독된 모래로 채워진 모래놀이터는 기명 예약제로 운영된다. 옷 위에 작은 몸뻬와 장화를 착용한 6명의 아이들이 모래 위에 옹기종기 앉아 놀았다. 혼자 온 연수(4)는 함께 놀 사람이 없는 듯했다. 연수는 “연수야, 맘마 먹자”라고 중얼거리며 조그만 장난감 삽으로 양동이에 연신 모래를 퍼담았다. 연수가 엄마가 되고 아가도 되는 ‘혼자 소꿉놀이’다. 연수의 양동이가 반쯤 차오를 때 유리창문 너머로 “디보 만화영화 시간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들은 갖고 놀던 장난감을 버린 채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갔다. 혼자 남아 당황한 연수는 잠시 망설이듯 손에 든 장난감을 바라보다 언니들을 쫓아갔다.

어린이 1만5000원, 어른 5000원. 엄마와 아이가 ‘노는 값’이다. 이 돈을 내면 두 시간 동안 엄마는 편하게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아이는 카페의 놀이기구들을 맘껏 이용할 수 있다. 그사이 엄마가 마시는 커피나 식사 값, 아이들이 추가로 체험하는 프로그램 값은 별도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노는 값’ 내는 키즈카페선 친구 아닌 장난감과 놀아
실내 모래·학습체험 등 갖출 것은 다 갖췄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없다


‘돈으로 사는’ 놀이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키즈카페의 시초 격인 실내놀이터가 선보인 뒤 2000년대에는 놀이뿐 아니라 직업·스포츠·학습을 체험하는 ‘복합 기능’의 키즈카페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12년 말 한국생활안전연합이 조사한 결과 요식·놀이시설을 겸비한 키즈카페는 2000년대 초 한 자릿수였으나 2008년 47개, 2012년 208개로 급증했다. 2곳 중 1곳(49.5%)은 수도권에 둥지를 틀었다. 어린이 실내 놀이시설로 넓히면 전국에 1030개에 이른다.

늘어난 숫자만큼 종류도 다양해졌다. 서울 ㄱ키즈카페에선 ‘어린이 방방(트램펄린)’이 유명하다. 청소년 사이에서 인기인 ‘디스코 팡팡’을 모방한 트램펄린 위에서 5~10세 아이들이 최신 아이돌 유행가에 맞춰 ‘방방’ 뛰며 춤추고 논다. 어두운 실내에 디스코 나이트 못지않은 현란한 사이킥 조명이 비친다.

경기도 ㄴ키즈카페의 콘셉트는 ‘어린이 실내 테마파크’다. 500평이 넘는 넓은 실내 한쪽에 풀장도 있어 아이들은 1인용 유아보트를 타고 물 위를 떠다닌다. 엄마는 카페에서 폐쇄회로(CC)TV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놀이와 학습을 겸한 놀이교육 키즈카페도 엄마들이 많이 찾는다. 프랜차이즈 ㄷ키즈카페에서는 원어민이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아이들과 체험활동을 하고 있다. ‘에듀테인먼트 공간’을 표방하는 ㄹ키즈카페는 미니큐브, 기하판, 창의수막대 등 활동놀이 수학교구들을 갖추고 있다. 1세부터 초등 저학년까지 체험놀이를 통해 수학의 기본개념을 배우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돈으로, 학습으로 하는 놀이엔 없는 게 있다. ‘관계’다. 올해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박모씨(41)는 “키즈카페에서 노는 아이들은 대부분 친구가 아닌 신기한 기구, 장난감과 논다”며 “요새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수동적으로 ‘주어진 놀이’에 익숙해지다보니 놀이터에 가고 싶어도 놀 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키즈카페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열흘에 한번꼴로 8세, 11세 두 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를 찾는 성모씨(35)는 “날씨에 상관없이 아이들을 안전하게 맡겨놓을 곳이 키즈카페 정도라서 주말에 쉬고 싶을 때 자주 방문한다”고 말했다. 한번에 기본 비용만 4만~5만원, 체험 프로그램이 추가되면 6만~7만원까지 들어 부담은 되지만 부모도 한숨 돌리고 쉴 수 있어 찾게 된다고 했다.

놀이의 본성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지난해 서울 동북지역 3개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와글와글 놀이터’를 운영해 본 놀이터 이모 김수현씨는 “그렇지 않다”며 ‘돈 딱지’ 놀이를 포기한 아이들 얘기를 시작했다. 아이들 사이에선 처음에 딱지 안에 500원짜리 동전을 넣어 하는 돈 딱지치기가 유행이었다. 500원이 없는 아이들은 참여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놀이터 이모가 돈을 넣지 않은 딱지치기 놀이를 제안하자 아이들은 바뀌었다. 자신이 접은 만큼 딱지를 가질 수 있게 되자 소외된 아이 없이 딱지치기에 열중하고, 승자와 패자는 갈려도 전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다투는 일이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돈이나 값비싼 장난감이 아닌 친구들과의 어울림, 놀이였다.

2012년부터 주 1회씩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전래놀이마당을 열고 있는 서울 동작구 부모커뮤니티 ‘삼별아’의 오명화 대표는 “아이들이 주도권을 갖고 ‘맘껏’ 노는 것이 건강한 놀이의 핵심”이라며 “돈을 받으면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가 생긴다. 고로 놀이가 서비스가 되고 어른들의 개입이 커지면서 아이들의 자유는 축소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참교육학부모회·서울 노원·도봉구청 공동기획>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Posted by 익은수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