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관한 글

글쎄 아직은 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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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at Sea


내 생애 두 번째로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첫번째는 35년 전이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비교해보면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


35년 전에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이는 없었으며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성공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게 가족이란 자유를 구속하는 외부의 권력으로 다가왔고 세상은 개인적인 모험의 대상일 뿐이었다. 전통이나 윗사람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나만의 생각을 하고 싶었고, 나만의 친구를 사귀고 싶었으며, 나만의 보금자리를 찾고 싶었다. 버팀목에 기대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느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가 넘치는 활력 덕분이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때 나는 바다에서 맞는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즐거운지 알게 됐고, 승무원들이 최대한 축제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도 흥겨웠다. 배는 좌우로 엄청나게 흔들렸는데,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납작한 선박용 트렁크들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객실 이쪽저쪽으로 미끄러졌다. 그 소음이 커질수록 내 웃음소리도 커졌다. 모든 게 끝내줬다.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누군가의 애정이, 차가운 세상의 한기를 몰아내 줄 사람의 온기가 필요해진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대개 그렇듯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즉 죽음이나 노화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세속적인 갖가지 불행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좀 더 형이상학적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살다 보면 겪게 마련인 중대한 재난들, 이를테면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평범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잔인성을 발견하는 일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드는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뒤로 35년 동안 이런 나쁜 일들을 경험하며, 인생에 대해 내가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태도마저 바뀌었다. 도덕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도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가의 기분으로 즐기지는 못할 거다. 나는 자식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고, 가족과 더불어 따뜻한 난롯가에 앉고 싶고, 역사의 연속성과 위대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고 싶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중년들이 크리스마스에 즐기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기쁨이다. 그 점에서는 철학자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평범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음울한 고독을 달래는 데 있어 그런 기쁨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즐거운 모험이었던 바다에서의 크리스마스가 지금은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대중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으면서 홀로 서기를 택한 사람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감미로운 즐거움이 모두 그러하듯 가정에서 얻는 기쁨도 의지를 약화시키고 용기를 훼손할 수 있다. 가정에서 따뜻하게 보내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수평선이 선사하는 해방감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이런 아름다움은 어리석고 사악한 인간들의 손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비틀거리는 중년의 이상주의에 힘을 불어넣는다.(1932. 1. 13.)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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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별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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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대하여

2014년 10월 23일  |  By:   |  과학  |  댓글이 없습니다

프랭크린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매우 정확한 말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은 보통 두려움 그 자체보다 더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물론 이 말에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두려움을 싫어하며, 이는 당연하게 들립니다. 두려움은 아래와 같이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어떤 현상이나 경험을 예상했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불안한 감정.

의학 전문가들은 우리가 두려울 때 느끼는 불안한 감정이 생물학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개에게 물릴까 봐, 연인에게 차일까 봐, 그리고 세무조사를 받을까 봐 두려워 할 때 우리는 똑같은 신체적 반응을 나타냅니다.

두려움은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이해하고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는 기본으로 다섯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다른 거의 모든 두려움은 이 기본 요소들의 조합입니다.

  1. 소멸(Extinction)—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이 이 두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높은 장소에서 바닥을 내려볼 때 가지는 공포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1. 절단(Mutilation)— 신체의 부분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인체의 기관이나 부분, 자연적 기능을 다른 존재에 의해 잃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곤충, 거미, 뱀 또는 다른 징그러운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이 절단의 두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1. 자유의 상실(Loss of Autonomy)— 움직일 수 없게 되거나, 마비되거나, 제한되거나, 갇히거나, 덫에 빠지거나, 묻히는 것과 같이 어떤 환경에 의해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는 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흔히 “폐소공포증(claustrophobia)”로 알려져 있으며, 사회적 관계에서도 이런 두려움이 가능합니다.

  1. 분리(Separation)— 버려지고, 거부되고, 관계를 잃어버리는 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또 다른 이에게 갈망의 대상으로, 존중의 대상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집단으로부터 주어지는 “침묵의 벌(silent treatment)”이 개인에게 심각한 심리적 영향을 끼치는 이유입니다.

  1. 자아의 죽음(Ego-death)— 창피함, 수치심 등은 스스로를 부인하게 만들며 자아를 위협합니다. 자아가 파괴됨으로써 더 이상 다른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사거나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간단한 위계 구조를 가집니다. 가장 아래에는 소멸의 공포가 있고 가장 위에는 자아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들을 바탕으로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소공포증은 기본적으로 소멸의 두려움에 기반합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는 것은 자아의 죽음에 기반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 역시 자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거나 결혼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질투는 분리의 두려움에 기반합니다. “그녀는 나보다 그 사람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 같아.” 질투가 극단에 이르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무가치한 인간이야.” 부러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부끄러움과 죄책감 역시 분리와 자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합니다. 당황스러움과 창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은 종종 분노의 원인이 됩니다. 억압받는 이들이 억압하는 이들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자유의 상실, 그리고 자아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문화나 종교를 무시할 때 역시 자아의 죽음을 느낍니다.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입니다.

종교적으로 극단적인 행위들은 자아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확장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신이 진짜 신이 아니라면, 혹은 최고의 신이 아니라면, 나는 신이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나는 비정한 자연 앞에 홀로 버려질 것이다.”

당연히 어떤 두려움들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학습된 반응이며 따라서 없애거나 줄일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은 다소 어색하게 들리지만 아래와 같은 우리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어색할 것 같은 모임에 초대 받았을 때 그 모임에 가지 않습니다. 의사와의 약속을 이유 없이 연기하며, 연봉을 올려 달라는 말을 그저 꺼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과거 두려웠던 기억 때문에 생기는 본능적 반응입니다. 이 반응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행동에서는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않습니다. 단지 진짜 두려움에 대한 압축된 반응인 “미세 공포”를 경험합니다. 이 순간적 감정에 대해 우리는 진짜 두려움을 느낄 때와 같은 회피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런 반응을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그저 자신의 감정이자 정보로 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려움의 원인을 더 명확하고 냉정하게 분석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고 조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싸이칼러지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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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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