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재의 성덕일기]“돈도 지식도 신념도 지나치면 위험…행복은 권리 아닌 의무”

정리 |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ㆍ길들임 거부하는 ‘건달 할배’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옳다고 믿을수록 의심해야 돼. 신념도 옳기 때문에 더 무서운 거야. 모든 좋은 것엔 반드시 나쁜 것도 있다고!” 채현국 이사장의 은근한 말투엔 말끝마다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옳다고 믿을수록 의심해야 돼. 신념도 옳기 때문에 더 무서운 거야. 모든 좋은 것엔 반드시 나쁜 것도 있다고!” 채현국 이사장의 은근한 말투엔 말끝마다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니가 내 형님 해라! 니가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구나!”

한밤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여보세요’도 없이 격렬한, 그러나 더없는 친밀함을 담은 인사가 귓전을 때렸다. 노인의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82)이었다. 채 이사장이 있는 효암학원은 경남 양산의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한다.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를 돌아다니는 그를 학생들도 못 알아본다고 한다.

‘부당한 대우도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대한민국의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중동에 보내자’…. 동서남북 사방팔방 어디에나 자리한 유비쿼터스 ‘꼰대’들의 망발에 치여 신음하던 중 접한 그의 말, “늙으면 뻔뻔해진다” “노인들을 절대 봐주지 마라”. 그건 건강한 충격이었다. 대체 어떤 노인이길래 그런 말이 나왔을까. 이 시대를 사는 청년의 한 사람으로 궁금한 게 많았다. 솔직한 고민을 담아 질문을 추리고 미리 보여드렸다. 다행히 마음에 드셨나보다. 그렇게 좋은 인상으로 자칭 ‘건달 할배’ 채현국 이사장과 마주했다.

- 이번 인터뷰를 ‘생각하는 놀이마당’으로 만들자 하셨잖아요.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이셨어요.

“우리는 기억하는 것과 아는 것을 구별 안 하고 살아요. 기억하면 아는 줄 알아. 저 노인이 책을 들고 있네. 이건 그냥 기억이고. 저 노인은 아직도 책을 읽네, 아직도 배우려고 하네, 이런 건 아는 거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저 사람은 책을 읽어 무얼 하려고 하나, 왜 저렇게까지 알려고 할까, 이렇게 수없이 가지를 뻗어나가는 게 생각이야.”

- 준비된 질문과 답을 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면서 서로의 생각이 새롭게 뻗어나가도록 하자는 말씀이셨네요.

“그렇지. 예를 들어 우리는 요리를 가르치려고만 하지 요리로 생각하게 하지를 않아. 먹는다는 행위의 의미부터 음식의 냄새, 재료의 특성, 환경. 먹거리만 가지고도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안 하잖아.”

- 친구들한테 선생님 뵙는다고 하니 기억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간단히 자기 소개를 부탁드려요.

지난 1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뒤뜰에서 마주 앉은 채현국 이사장과 유병재씨.

지난 1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뒤뜰에서 마주 앉은 채현국 이사장과 유병재씨.

“내 소개? 진짜 나이 먹은 건달 영감이야. 돈 벌지 않아도 되고, 늙었으니까 사명감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괴롭힐 일도 없고. 좀 못났어도 남들이 봐주겠거니 하고 게으름 피워도 괜찮잖아. 걷는 것도 이미 비틀거리는데 무슨 수가 있어(웃음). 그러나 남 괴롭히지는 말아야지. 정말 누구든. 나 자신도 그 누구 중 하나야. 내가 날 괴롭히지 말아야 돼. 살아보면 자기가 자기를 못살게 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자기가 자길 못 믿고 자기를 꼴보기 싫어하고, 용납을 못하고. 결국엔 ‘자기합리화’라는 자기 속이기에 숙달이 된다고. 자기 속이는 일을 일평생 그렇게 기를 쓰고 해.”

- 저도 그럴 때가 있는 거 같아요. 오히려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는 건데. 나를 아끼려고 나를 속이는….

“부모가 자식 위한답시고 강요하는 거랑 똑같아. 자기가 자기한테 배운 거를 부모가 자식한테 써먹고, 자식이 부모한테 써먹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써먹고. 서로 그렇게 사는걸. 노인이 되고 나면 더 자동적으로 자기를 괴롭혀. 그렇게 사니까 노인이 되면 더 허무하다고. 그게 그 사람이 늙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젊어서부터 그렇게 살아서 그런 거야. 내내 뻔뻔하게 자기를 속이는 거지.”

- 예전에 인터뷰에서 하셨던 ‘늙으면 뻔뻔해진다’ ‘늙은이들 봐주지 마라’ 이런 말씀들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사실 저도 꼰대들 욕을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소통이 잘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저희 세대는 기성세대를 약간 적대시하는 느낌이 있어요. 근데 기성세대라 할 수 있는 분이 그런 말을 하시니 신선했어요.

“그게 사실 젊은 사람들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고 늙은 놈들한테 하는 소리거든. 너희 좀 제발 만년이라도 편케 살지, 이놈들아 왜 그러고 사니.”

- 늙은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몰라도 젊은 사람들한텐 울림이 컸어요.

“내 친구들이 ‘너 그러다 요새 휘발유통 들고 돌아다니는 늙은이들한테 테러당한다’ 그러더라고. 난 늙은이들이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협박을 하는지 몰랐는데, 듣고 보니 깡패잖아. 근데 사실 나도 그놈들과 똑같은 깡패거든. 그러니까 내가 탄광을 해서 성공했지. 사람이 다치고 죽고 하는 탄광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건 결국 깡패, 조폭이란 거거든.”

채 이사장은 1960년대부터 강원 삼척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 소득세 10위 안에 들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광부들에게 당시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줬고, 자녀들에겐 장학금을 줬다. 그러고도 모자라 번 돈을 광부들에게 다 나눠주고 10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당시엔 복지의 개념도 희박할 땐데 어떻게 그런 경영을 하셨어요.

“그때 탄광에 오는 사람들은 다 절망적인 사람들이었어. 더 내려갈 데 없는 밑바닥 인생. 근데 우리 탄광에서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났겠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는데. 자기가 일할 능력이 있음을 자기가 자기한테 증명하게 해주는 거야. 그러면 일(노동)은 단순히 돈벌이가 아니라 완전히 창조적인 무언가가 되는 거지. 탄광만 있던 무주공산에 사람들이 모이고 집이 지어지고 애들이 태어나고…. 기적 같은 일이었지. 한 나라가 시작된 거나 똑같은 거야.”

- 광부들과 가족들 무료 진료하는 병원도 만드셨다면서요.

“친구놈 중에 서울대 의대를 나온 놈이 있었어. 혈관에 피가 안 도는 병에 걸렸는데 결국 손발이 썩어들어가서 다 잘라냈어. 왼쪽 손 한 마디만 남았나. 집에만 처박혀 있는 놈을 탄광에 데려왔지. 아, 그랬더니 여기에 자기만큼 불행한 놈이 한가득인 거야. 그놈이 병원 원장을 맡았어. 당장 그놈부터 그렇게 삶을 건진 거야.”

- 잘되는 사업은 왜 그만두셨어요.

“돈 버는 재미가 너무 좋아서 내가 환장을 한 거야. 돈 쓰는 재미는 버는 거에 비하면 재미 축에도 못 가. 한 달 순이익이 그때 환율로 100만달러가 넘는 달이 많았어. 어마어마한 거지. 그런 돈을 가지고 있으면 친한 친구도 심지어 가족들도 아첨을 해 나한테. 관계가 전부 망가지는 거야. 결국 내가 행복해지려고 도망친 거야.”

- 그래도 처자식이 있는데, 가진 걸 다 내놓는 게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일제 때 중국에서 사업을 한 우리 아버지도 순식간에 떼부자가 됐다가 또 금방 거지가 되길 여러 번 했어. 부자일 땐 친구들한테 ‘나 축구공 있다’ 자랑도 하고 좋지. 근데 가난해도 내가 그렇게 불행하지가 않아. 첨에는 답답하고 창피하지. 근데 좀 지나면 창피할 일이 아냐. 괜찮아. 용기도 생기고. 우리 애들이 가난해진다고 불행해지지 않을 거란 걸 내가 믿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거지. 애들을 위해서도 오히려 할 만한 일인 거야.”

- 뭔가 많이 갖는 걸 천성적으로 싫어하시는 거 같아요.

“욕심은 무척 많은데 내가 쥐고 있는 건 싫어. 꾀가 많은 거야. 뭘 지니고 있으면 무겁거든. 남들은 안 그러겠어. 딴 사람들도 안 그래봐서 그렇지 막상 그렇게 왕창 가지게 되면 다 나처럼 느낄 거야.”

- 책도 일부러 순서대로 안 읽고 누가 가르치는 것도 잘 안 들으려고 하신다면서요. 남 흉내내는 게 싫어서.

“남한테 길든다는 게 아주 불쾌해. 배운다는 게 결국 남한테 길드는 거구나 느끼게 돼. 그러니 선생이 아주 잘 가르치면 나는 그때부터 자꾸 딴생각을 하지. 덜 집중하려고 하고(웃음).”

- 돈도, 지식도 많으면 위험하다. 또 뭐가 있을까요. 많이 갖으면 위험한 것이.

“신념. 그게 없다고 우리는 쩔쩔매는데, 생각해봐. 히틀러도 스탈린도, 다 신념의 사나이였어.”

- 신념도 강하면 위험하다?

“돈이나 권력처럼 신념도 다 마찬가지야. 옳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신념도 옳기 때문에 더 무서운 거야. 스탈린도 히틀러도 그 당시의 기준으로 옳다고 여겨지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좇아갔겠어. 옳으니까 그렇게 끔찍한 물건이 된 거야. 그걸 뒤집어볼 줄 알아야지. 모든 좋은 건 반드시 다른 측면이 있는 거야.”

- 행복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행복이 권리이면 우리는 투정을 하고 요구를 하게 돼. 권리니까. 남한테 거둬들이고 뺏어오는 게 그게 무슨 행복이야. 행복은 의무야. 거부하면 안돼. 행복은 물이 퍼지듯이 골고루 다 퍼져서 누구나 행복해야 되는 거야. 신이 해줬으면 하는 일을 우리 스스로 하는 수밖에 없어. 우린 행복해질 수 있어. 할 수 없는 걸 누가 의무라고 해. 할 수 있는데 안 할까봐 하는 소리지.”

- ‘임금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씀도 기억나요.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 가서 월급 많이 받는 거, 그게 어떻게 인생의 의미고 목적이 될 수 있어.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닌데. 사회 전체가 그렇게 간다는 게 바로 노예적 사태야. 머릿속이 이미 노예잖아. 임금노예란 말은 자본주의 전체에 대한 내 한마디야.”

- 요즘 청년들은 삶의 폭이 좁아서 사실 그런 틀을 넘는 사고를 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해요.

“사회가 젊은이들 시각과 가치관을 그렇게 좁고 단순하게 만들어. 그러다보니 거기 생각 없이 길들여지는 어린 동물처럼 돼가는 거야.”

- 어떻게 하라고 말해주고 싶으세요.

“그 길들임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하는 거야. 자기가 알아채야지. 내가 길들어가고 있다는 걸. 어떡하면 알아채냐고? 처음 아, 하고 느끼는 거 그건 자기 혼자 못 깨달을 수도 있어. 그럼 누군가가 발등을 밟든지 옆구리를 찌르든지 해줘야지. 그래서 서로 아차 하면 돼. 그것만 시작되면 돼. 그 다음은 각자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야.”

- 깨닫는 건 스스로가 아니라 서로 도와야 하는 거다?

“서로 하는 거지. 함께 사는 세상이잖아. 어미가 있어야 새끼가 태어나고, 씨앗을 뿌려야 열매를 맺듯이 뭔가 함께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누구나 반드시 아, 하는 순간은 있어. 조금 늦고 빠를 뿐이야. 숨은그림찾기가 처음엔 어려워도 하나가 보이면 결국 다 찾게 되잖아. 사람의 틀을 좁히는 이 제도의 모순을 젊은이들이 스스로 타개해 나가야지.”

- 요즘 ‘젊은 꼰대’란 말도 있어요. 나이가 어리다고 다 젊은 건 아닌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청년이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요.

“가능성이지. 못나도 가능성, 시시해도 가능성. 그러니까 거기엔 절로 신나는 기운이 있어요. 자기가 볼 땐 미숙하고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거 같아도, 정말 거기엔 가능성이 하나 가득이야. 뭉친 실타래를 보면 이걸 어떻게 푸나 고민이 되겠지만 그 안에는 분명 뭉친 걸 풀어내는 실 끄트머리가 여럿 있어요. 조금만 하면 돼. 그걸 스스로 믿었으면 좋겠어.”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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