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님이 쓰신 글을 퍼왔다.

새겨둘 만한 글이라 담아두고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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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열 살까지 얼마나 실컷 놀았느냐에 따라 아이의 상상력이 좌우된다



“나는 앞으로 일본에서는 신분이나 권력이나 돈에 의한 ‘계급사회’가 아니라, 독서 습관이 있는 사람과 독서 습관이 없는 사람으로 양분되는 ‘계층 사회’가 생겨날 것으로 보고 있다. ”

 

『책을 읽는 사람만이 손에 넣는 것』(비즈니스북스)의 저자인 후지하라 가즈히로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는 대학생 6명에게 도서관에 있는 서적이나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조건으로 리포트를 작성하게 만들었다. 하루 독서 시간이 제로인 학생이 네 명, 30분인 학생이 한 명, 두 시간인 학생이 한 명이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인터넷 검색만으로 완성한 리포트는 논리적 전개가 부족하고 여러 갈래로 퍼진 주제를 제대로 편집하지 못했다. 정보를 있는 대로 죄다 끌어 모아 나열했을 뿐,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만의 의견도 거의 없었다. 반대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학생은 주제를 잘 뽑아냈다. 스스로 가설을 세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 학생은 책을 접함으로써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물론, 나름의 논지를 전개했다.

 

후지와라는 “새삼 느끼는 것은 독서를 통해 지식의 인풋을 축적해 나가지 않으면 자신의 의견이라는 것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터넷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책으로는 얻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 얻은 정보만으로는 얕은 사고밖에 할 수 없다는 의견에는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깊게 논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절대 책을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성장 사회에서는 퍼즐형 사고와 정보 처리력이 요구되었지만, 성숙 사회에서는 레고형 사고와 ‘정보 편집력’이 필수적인 기량이라고 말한다. 정보 처리력은 조금이라도 빨리 정답을 찾아내는 힘을 말한다. 과거의 교육은 주로 ‘보이는 학력’이라는 정보 처리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21세기형 성숙사회에서 요구되는 자질은 정보 편집력이다.



“정보 편집력은 익힌 지식과 기술을 조합해서 ‘모두가 수긍하는 답’을 도출하는 힘이다.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수긍할 수 있는 답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모두가 수긍하는 답을 도출하는 힘이란 단순히 퍼즐 조각을 정해져 있는 장소에 넣는 것이 아니라 레고 블록을 새롭게 조립하는 것이다. 정답은 하나가 아니며 조합 방법에 따라 무궁무진하다. 그런 가운데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요구된다. 하나의 정답을 찾는 정보 처리력에서 필요한 것이 ‘빠른 머리 회전’이라고 한다면 정해진 답이 아닌 새로운 답을 찾아가야 하는 정보 편집력에는 ‘유연한 머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앞으로 정보 편집력이 중요해진다고 하지만 정보 처리력과 정보 편집력은 자동차의 양바퀴와 같다. 초등학교에서는 정보 처리력에 비중을 두어 기초 학력을 키우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상급 학교로 갈수록 정보 편집력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그렇다면 정보 편집력을 어떻게 키워나갈 수 있을까? 저자는 다섯 가지 응용력과 하나의 기술을 제시한다. 다섯 가지 응용력은 다음과 같다.

 

1. 소통하는 힘(다른 생각을 지닌 타인과 교류하면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기술) : 국어, 영어

2.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상식이나 전제를 의심하면서 유연하게 복안사고를 하는 기술) : 수학

3. 시뮬레이션하는 힘(머릿속에서 모델을 그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유추하는 기술) : 자연과학

4. 롤플레잉하는 힘(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이나 마음을 상상하는 기술) : 사회과학

5. 프리젠테이션하는 힘(상대방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위한 표현 기술) : 실기교과(음악, 미술, 체육, 기술, 가정)

 

비판적 사고력을 뜻하는 ‘크리티컬 싱킹’은 이 다섯 가지 능력과 더불어 정보 편집력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기술이다. “크리티컬 싱킹의 본질은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여 주체적인 의견을 지니는 태도, 즉 본질을 통찰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크리티컬 싱킹을 ‘복안 사고’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물을 단락적인 패턴만 인식하는 것으로 포착하지 않고 다면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저자는 다섯 가지 능력과 하나의 기술을 키우기 위해서는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누이 강조한다. 하지만 책만 읽는다고 해서 정보 편집력이 키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강조한다. 그러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정보 편집력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예기치 못한 만남이 중요하며, 그것을 일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놀이’다.”

 

“우리는 놀이를 통해 문제에 부닥쳤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이런 위기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복잡한 상황에서 다양한 정보를 수용하고 판단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보 편집력이 키워진다. 또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부닥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또한 키울 수 있다. 어떤 놀이라도 다양하고 복잡하며 변화가 풍부하다. 막상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요소가 많아 늘 수정이 필요하다. 즉 ‘정답주의’로는 놀이를 즐길 수 없다는 말이다.

 

놀이는 성숙 사회에 꼭 필요한 정보 편집력의 토대가 된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이가 열 살까지 얼마나 실컷 놀았느냐에 따라 아이의 상상력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자.”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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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잡지 격월간 '민들레' 93호에서 퍼옴]

mindle.org

놀이와 놀이터 다시 보기 _ 독일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크에게 듣는다


인터뷰와 정리_편해문 (놀이운동가)


40년 동안 약 2만 개의 놀이터 디자인에 참여해온 독일의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크가 세계인권도시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공공놀이터 혁신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한국의 놀이운동가 편해문 님이 일주일 동안 전국의 여러 강연과 놀이터 참관 여정에 동행했으며, 이 인터뷰는 지난 5월 21일 부산대학교 유아교육학과 이연선 교수님의 통역으로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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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는 놀이가 현실이다 

해문: 아이들은 길과 거리에서 놀면서 큰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특정 구역에 자리 잡은 놀이터가 만들어진 것은 근대 이후로 알고 있다. 유럽에 많은 놀이터를 디자인하신 입장에서 놀이터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무슨 뜻인가?

귄터: 오늘 호텔에서도 보았듯이 그곳은 어른들을 위한 장소이지 아이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놀이터를 만드는 것은 “이제 너희는 여기서만 놀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다른 문제는 아이들이 놀이터에 갔을 때 좋은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거면 차라리 놀이터를 만들지 않는 게 낫다. 만들 거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좋은 장소에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해문: 놀이터에 대해 아이들과 부모의 시각이 서로 다른 것 같다. 

귄터: 부모는 놀이터를 만들거나 아이를 놀이터에 보낼 때, 그곳에서 뭔가 배우기를 바란다. 부모는 놀이터마저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은 친구를 만나고 자기들끼리 규칙도 만들면서 놀려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놀이터에 대한 부모와 아이들의 완전히 다른 관점이다.

해문: 옳은 말씀이다. 놀이는 아이를 속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물이든 사람이든, 놀이 속에서 만나는 것들은 노는 만큼 아이에게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아이들을 속이고 있다.

귄터: 왜 놀이가 아이들을 속이지 않느냐면, 아이들에게는 놀이 자체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판타지가 있고 상상력이 있다. 그 순간순간이 아이들에게는 진실이다. 아이들이 공주 놀이를 할 때, 그 아이는 공주 자체이지 그런 말을 하는 아이를 바보 같다거나 어리석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반면에 교육은 그것을 파괴한다. 놀이는 삶을 가르치지만, 교육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교육은 삶과 관련 없는 것을 너무 오래 가르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실수를 하면서 배운다. 아이들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데 왜 자꾸 가르치는가. 아이들은 답을 해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왜 답을 해주는가. 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가. 아이들이 물어볼 때만 가르쳐주고, 물어보지 않는 한 대답을 하면 안 된다. 

해문: 아이들이 놀기를 바란다면 부모와 교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귄터: 아이들은 뭔가를 하면서, 놀면서 배운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복잡해져서 아이들이 놀기에 공간이나 장소가 충분하지 않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싸우는 방법이 아니라 갈등이 생겼을 때 그걸 풀어가는 방법을 배운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놀이에서 배울 수 있다. 아이들은 자기가 놀고 싶을 때 노는 것이지, 부모나 교사가 놀라고 해서 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놀이에 대한 부모와 교사의 태도는 잘못되었다. 이건 좋은 놀이고 저건 나쁜 놀이라고 구별하고, 이 시간에는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한다고 정해주지만 아이들은 놀고 싶을 때 놀 뿐이다. 놀이라는 것은 목마를 때 물 마시는 것, 배고플 때 밥 먹는 것과 같아서 시간을 정할 수 없다. 아이가 꽃과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놀이가 아닌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 순간 판타지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놀이다. 아이들이 놀기를 바란다면 부모와 교사가 먼저 놀면 된다.

해문: 한국의 부모와 교사는 놀이기구가 있어야 놀이터라고 생각한다.

귄터: 한국의 놀이터는 유럽 같은 다른 나라에서 베껴 온 것 같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놀이기구가 아니라 스포츠 기구에 가깝다. 움직임만을 유도하는 기구이지 놀이기구가 아니다. 한번 생각해보자. 아이들이 순서를 기다려서 미끄럼틀을 온종일 여섯 번, 최대 열 번 탔다고 했을 때, 모두 합쳐 2분 30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게 놀이일까. 부모들이 놀이터의 상징으로 놀이기구를 떠올리는 그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오히려 놀이터 공간 자체가 놀이기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는 “하지 마라, 위험하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댄다. 그런데 아이들을 잘 보면 미끄럼틀 타는 그 시간에 노는 게 아니라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면서 논다. 그런데 부모는 그걸 하지 말라고 한다. 놀이란 직접 해보면서 배우는 것이다. 이런 것이 허용되는 놀이기구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움직이고 운동하는 것은 놀이가 아니다.

한국 놀이터의 ‘안전 신화’

해문:  현재 한국 공공놀이터의 참담한 상상력은 ‘안전 신화’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안전만을 오래도록 강조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아이들에게 조금의 모험도 허용하지 않는, 재미없고 지루한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놀이터 안전 신화는 누가 만들어낸 것이며, 안전 강조에 따른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인가.

귄터:  왜 안전이 강조되는가 하면 첫 번째는 과잉보호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많으면 서로 돌보면서 크게 되는데, 요즘은 하나밖에 낳지 않으니까 당연히 과잉보호하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어른들이 아무리 안전하게 놀이터를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도, 아이들은 그것을 넘어 제 맘대로 조작하려고 한다. 도전적 요소를 반드시 넣어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 심하게 기존의 것들을 다르게 조작하려고 한다. 안전이 강조되는 두 번째 이유는 놀이기구를 만드는 회사에 원인이 있다. 그들은 물건을 팔아야 하고 누군가는 사야 하는데, 가장 많이 팔 수 있는 방법이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잉보호하는 부모들을 만족시킨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보험회사이다. 보험회사는 사고가 나면 어디에 돈을 줘야 하는지에 집중한다. 그래서 표준을 만들거나 공장에서 놀이기구를 제조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아주 구체적으로 ‘이렇게 만들면 허리를 다치고, 저렇게 만들면 어깨를 다칠 수 있다’는 식으로 조목조목 따지고 살핀다. 그들은 다치지 않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그리고 그에 따른 표준화 테스트를 하는데, 오로지 숫자에 의존한다. ‘이 길이가 맞다. 저 길이는 틀렸다’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숫자만 이야기하지 아이를 보지 않는다. 공장과 회사는 오로지 돈에만 관심 있으니까 보험과 표준치라는 것이 한 패가 되어 판매에만 집중한다. 회사나 공장에서는 보험과 표준치의 기준에 맞춘 제품을 만들어서 많이 팔기만 하면 된다. 이런 이유로 놀이기구의 안전이 강조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은 먼저 보험 이야기에 주목한다. 

해문:  한국의 놀이터 안전 신화는 세 가지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로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둘째로 재미없는 놀이터가 완성됐다는 것. 셋째로 관련 업체와 그들을 둘러싼 이익집단의 마케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한국에 오셔서 세월호 참사 촛불집회에 참여하며 눈물짓기도 하셨는데, 이 사고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안전 신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안전’으로 포장된 ‘하지 마라, 가만히 있어라, 앉아 있어라’ 같은 말들을 너무 많이, 너무 오랫동안 듣고 자란다. 이런 지시와 제지에 익숙해져서 문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지시받지 않으면 무엇 하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아이들이 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실체 없는 ‘안전’만을 강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본다.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왜 그것이 위험한지 질문하지 못한 채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세월호 참사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독일도 이와 비슷한 시기가 길게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독일에서는 이런 지시와 통제의 흐름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고 싶다.

귄터:  아이들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어른들이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다는 것에는 히틀러식 교육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상황은 공포를 느끼거나 당황하거나 파랗게 질려버려야 할 상황, 다시 말해 패닉이 왔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해보다가 죽는 것과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 사이에는 큰 의미의 차이가 있다. 살려고 몸부림쳤다면 30명 정도만 목숨을 잃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2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죽었잖은가.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른들이 “가만히 있어라, 우리가 하는 말을 들어라” 하는 지시를 내리며 결과적으로 과잉보호에 익숙해지게 한 것이다. 내가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어른이나 군인, 해양경찰이 와서 나를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사회적 정서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자신은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

누가 놀이터를 만들어야 하는가

해문:  한국에서 놀이터를 누가 만들어야 하는지 물으면 건축사도 내 일이다, 조경사도 내 일이다 그런다. 거기에 놀이터 디자이너까지. 놀이터 만들기는 누구의 일이며 누가 해야 하는가.

귄터:  왜 다들 자신이 적격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 뿌리는 모든 어른들이 다 아이들이었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놀이터를 잘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동기에 대한 해석을 성인의 관점에서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당시의 아동기와 요즘 아이들이 느끼는 아동기는 다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아동기에 거리를 두고 지금의 아이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건축가나 조경사는 아동기를 성인의 눈으로 해석하면서 스스로 놀이터 전문가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들은 놀이터가 깨끗하고 안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노는 공간은 매우 복잡한 사회적 기능을 가진 곳이다. 그러므로 놀이터를 만드는 일을 꼭 전문가가 도맡아 할 필요는 없다. 부모도 좋다. 교육운동가도 좋다. 다만 10~20년 정도 아이들 놀이를 관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뭘 하는지,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온 부모는 뭘 하는지 오래도록 지켜본 사람이 필요하다. 반달리즘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500년 전 아이들이 뭘 했는지, 이런 거 말고 지금 아이들에 집중해야 한다. 놀이터를 볼 때도 흔히 ‘저 아이 나쁜 아이다’, ‘놀이기구 저렇게 타면 안 된다’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로 아이와 부모가 놀이터에서 뭘 하는지 볼 수 있는 사람이 놀이터 만드는 데 참여해야 한다. 아이들이 놀 때 어른들은 머릿속으로 안전하기를 바라는데, 사실 아이들은 파괴하고 망치며 논다. 그런 모습을 본 어른들은 ‘어! 아이들이 저거 망가뜨린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이다.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이다.
 
해문:  선생님과 며칠을 함께 다니면서 보니, 강연을 마치면 늘 한국의 오래된 건축물들을 보러 다니셨다. ‘우리나라 놀이터에 한국 전통의 숨결이 담겨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놀이터를 만들 때 외형을 보면 장식마저 서구적 장식을 따라 한다. 예를 들면 뜬금없이 놀이터 기둥에 야자수를 매달아 놓는다. 어떤 경우는 통째로 스웨덴 미끄럼틀을 사다가 꽂아놓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적 놀이터 양식은 왜 고민하지 않는 걸까.  

귄터: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 미국으로부터 자유를 선물 받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봐라. 미국은 역사가 없는 나라다.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든 나라일 뿐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왜 자신들의 것을 말하거나, 표현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가. 한국의 놀이터 또한 그런 영향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한국적인 삶의 방식이나 문화를 만나고 찾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한국에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그것을 느끼지도, 발견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한국적인 자산을 충분히 인식하고 놀이터를 만들 때 반영하면서, 시대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한국에 와서 한국적인 건축을 보러 다니는 까닭은 ‘한국 아이들은 이런 것 속에서 자신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을 가지겠구나’ 하는 것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적인 것의 좋은 점을 내가 알아야 한국 놀이터에 관해 조언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놀이에는 항상 ‘치유’가 포함되어 있다

해문:  외람되지만, 선생님께서는 어렸을 때 왼손잡이셨고(당시만 해도 왼손잡이는 교정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ADHD와 가까운 면도 있었고, 게다가 난독증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아주 명랑하고 쾌활하신 모습인데,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나게 되셨는지 알고 싶다. 이 질문을 드리는 까닭은 놀이라는 것이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욱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놀이와 놀이터는 이런 아이들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귄터:  나는 왼손잡이였고 ADHD와 난독증이 있었지만, 이것이 장애인지는 모르겠다. 놀이는 세상을 배우고 미래를 배우는 일이기 때문에 항상 그 안에는 ‘치유’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봤다면, 아이들은 가상놀이를 통해 엄마 아빠 역할을 하고, 요리도 하면서 그 충격을 치유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본 것을 가지고 놀기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 놀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언제 노는지를 보면 문제가 있을 때 놀고 싶어 하기도 하고, 평화를 유지하고 싶을 때 놀기도 하고,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놀고 싶어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세상을 모방하면서 평화를 찾을 때까지 논다. 그래서 놀이는 치유다. ‘장애아를 위한 놀이터’라는 말을 쓰지 말자. 왜냐하면 여자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남자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라는 말을 따로 안 쓰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놀이터나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아이들은 보통의 놀이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놀이를 하고 논다. 
나는 놀이터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무엇이 다른지 오래 관찰했지만 별 차이가 없었다. 그저 여자아이들은 차보다는 인형을 더 좋아하고, 남자아이들은 인형보다는 차를 더 좋아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준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마주하는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므로 똑같은 장소에서 놀게 해야 한다. 이 아이들에게 어떤 놀이기구를 주느냐, 어떤 특별한 장소와 공간을 주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갖고 어떻게 노느냐’가 더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충분히 놀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있는가’이다. 아이들이 노는 그 순간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해문:  끝으로 놀이터를 혁신하려는 한국사람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은?

귄터:  우리는 아이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 여기서 ‘강하다’는 것은 자기감정을 스스로 알고 있는 아이를 말한다.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키우려면 스스로 좋은 것을 만들어보고, 좋은 것을 해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 경험은 놀이를 통해서 할 수 있다.

해문:  한국에서 새로운 놀이터 문화를 가꾸려는 사람들에게 깊은 깨우침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건강하시고 또 뵙기를 바란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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