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 몸에 안 맞는다고 여긴 옷 같은, 선거를 치렀다.
공부도 됐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듯하여 부끄럽기도 하다.
괜찮은 결과라고들 하지만, 난 생각보다 못한 결과라는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유로운 시간이 그리우면서도 막상 여유로움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오묘하다.
책을 집어드는 걸로 시작!
버트런드 러셀이 쓴 [런던 통신]을 읽는다.
1930년대에 쓴 글이 어쩌면 이토록 지금 읽어도 울림을 줄까 싶다.
이왕 읽는 김에 한 챕터씩 옮겨 써 봐야겠다.
뭐, 군데군데 내 식으로 슬쩍 바꾼 대목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직업병을 발휘해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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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는다면
In Praise of Artificiality
세상에는 두 종류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인위적이기 때문에 자연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공적인 것(art)을 찾양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자연 찬양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는 인공물이 너무 많아 나타나는 반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반작용으로서는 쓸모가 있지만 인생론으로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은 갈까마귀와 그 짝이 먹이를 먹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먹이는 날고기였는데 어떤 부위는 연하고 어떤 부위는 질겼다. 수컷이 먼저 연한 부위를 모두 먹어치웠다. 그러면서 암컷이 감히 접근하려고 하면 부리로 거칠게 쪼아댔다. 암컷은 먹을 만한 것이 전혀 남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잔뜩 달아오른 식욕을 충족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도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 기운이 넘치는 젊은 사내들 입장에서야 아주 흐뭇한 결과가 나오겠지만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에게는 예의 바른 태도라는 규범에 따르는 편이 더 유리할 것이다.
문명은 모두, 특히 미적인 측면에서는, 인공적이다. 매너, 훌륭한 말하기, 훌륭한 글쓰기, 훌륭한 음악, 훌륭한 무용---. 삶에 우아함을 부여하는 이 모든 것들은 자연스러운 충동을 거부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들을 단련시켜 잔인한 방식이 아닌 유쾌한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나는 어제 갓 개업한 스페인 해안의 작은 식당을 방문했다. 그 식당은 거의 술을 공급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었다. 지배인은 매력적인 동성애자 청년이었는데 벽에다가 유쾌하지만 매우 인공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여가를 보냈다. 그는 배 두 척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꼈다. 한 척은 번개에 맞아 부서진 프랑스 배였고 또 한 척은 고요히 떠다니는 스페인 배였다. 지배인은 세련된 사람이어서 손님들을 세련되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 음주를 단지 심한 갈증을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인공적이고 스타일 있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을 복음으로 삼는 북유럽 나라들이 잃어버린 우아함이 여기 남유럽에서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아직도 살아 있다. 일이라는 복음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지 결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없는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단지 양분을 공급하는 음식을 먹으며, 사랑도 없이 자식을 낳아 자발성과 우아함을 파괴하는 교육을 시킨다.
과정이 즐거워야 스타일이 생기고, 생산 활동이 그 자체로 미적 특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계에 동화되어 일 그 자체가 아니라 일의 결과만을 가치 있게 생각할 때, 스타일은 사라진다. 그리고 사실은 더 야만적인데도 기계회된 인간의 눈에는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이 스타일의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이 점점 기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불행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이 우리를 지나치게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기계를 육체와 정신노동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충분히 활용하지도 못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모두는 더 많은 여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한 집단의 편리한 부속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충동에 예술적 표현을 부여할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보다 힘을 사랑하기 때문에다.
그러나 오직 힘만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최선의 길인지는 의심스럽다. 인간의 본성에는 적어도 힘만큼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다른 요소들도 많다. 기계화 시대가 그 요소들에게 마땅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깨닫기 전까지는 새로운 문명이 온전히 정상화될 수 없을 것이다. (1931.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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